2019. 6. 15. 09:12ㆍ여행 이야기
용두산(665m,안동),국망봉,퇴계태실,침천정,용수사,도산서원 ☆..경북
용두산(龍頭山 664.6m)은 남쪽으로 국망봉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청량산과 이웃하고 있으며 문수지맥 상에서 안동호를 바라보고 있다.
퇴계 선생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공이 마을터를 정할 때 산의 형상이 용의 머리를 닮아 용두산이라 하였고, 또 용수사의 뒷산이기도 해서다.
국망봉(國望峰)은 문수지맥 용두산 남쪽에 있으며 삼각점이 있는 국망봉(481m)과 ‘국망봉단비(檀碑)’가 있는 국망봉(478.5m)은 약 500여m 떨어져 있다.
퇴계 선생의 조부인 이계양 공이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30여년 동안 제사를 올리던 곳은 ‘단비(檀碑)’가 세워져 있는 봉우리다.
정상에는 당시 의식을 거행하던 제단과 바위에 국망봉(國望峰)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남아있다.
날머리에는 고려시대 사찰로 알려진 ‘용수사(龍壽寺)’가 있고, 온계마을에는 ‘태계태실’이 있으며, 안동호변에는 '도산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산행전 퇴계태실을 먼저 들렀고, 들머리에서 침천정을 거쳤으며, 귀가시에는 도산서원을 탐방하므로서 테마산행을 완성하게 된 것.
이 등산로는 ‘안동선비순례길(전체 91.3km)’ 9개 코스 중 8코스의 ‘마의태자길’과 겹친다.
신라가 망하자 태자였던 김일이 고려로의 귀부를 거부하는 세력을 이끌고 끝까지 신라부흥을 일으켰던 흔적이 이 일대에 전설로 남아 있다.
마의태자가 매일 올라가 망국의 신라 땅을 바라보았다는 마의대(麻衣臺), 태자의 한을 담고 있다는 달래재길, 태자리 태자사, 신라리 등 그 흔적들이 빼곡하다.
먼저 들린 퇴계태실(退溪胎室, 민속자료 제60호)은 1454년(단종 2)에 퇴계선생의 조부인 계양공(繼陽公) 이계양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뒷날 'ㅁ'자 몸채의 중앙 돌출된 방에서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태어났다고 하여 당호가 되었으며, 1930년대 전면 개축이 있었다.
침천정은 조선 후기 유학자 운산 이휘재(李彙載) 선생이 1834년에 용계고택의 별당으로 세워 지역 유생들에게 강학을 한 장소였고, 병인양요(丙寅洋擾) 땐
의군을 모집 양인(洋人)을 성토한 장소이다.
그의 손자 운포 이중린(李中麟 1838~1917) 선생은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으로 항일운동을 했던 인물.
용수사는 용두산 자락 용의 앞발에 해당되는 지점에 남향으로 앉아 있으며, 지금은 통도사의 말사로 1181년(고려 명종 11)에 건립되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인 ‘안동 용수사 대정삼년명 금동고’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인 ‘안동 용수사 금호비’가 소장되어 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고, 상덕사 및 삼문은 보물 제211호,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직접 설계하여 지었다고 한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본산이 되었다
문수지맥(文殊枝脈)은 백두대간 박달령 가까이의 옥돌봉(1,244m)에서 남으로 분기, 문수산(1207.6m)에서 용두산을 거쳐 봉수산, 불로봉, 조운산을 지나
학가산(874m)에서 내성천에 이르는 114.5km의 산줄기이다.
코스: 침천정-국망봉(삼각점)-무덤갈림길-국망봉단비(U턴)-무덤갈림길-임도-문수지맥갈림길-임도삼거리-<선비순례길>-용두산-용수사-일주문(4시간30분)
산행궤적
약 11km에 4시간 30분 걸린 셈.
고도표.
안동 선비순례길
안동선비순례길 1~9코스
8코스 '마의태자길'
문수지맥
문수지맥
산행 전 퇴계태실을 먼저 답사하기 위해 버스를 도산중학교 정문 앞에 댔다.
퇴계태실은 불과 2~300m의 거리. 길가 키 작은 수수에 눈길이 간다.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개량을 한 듯 난쟁이 수수다.
퇴락해 가는 한옥에 품위있는 향나무 한 그루.
퇴계태실 문은 중앙에 대문을 두고 양쪽에 방을 들인 솟을 대문이다.
솟을 대문의 현판엔 성림문(聖臨門)이라 편액되어 있는데, 이는 퇴계의 어머니가 성인(공자)이 문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하여 지은 이름.
성림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노송정(老松亭)이 자리잡고 있다.
퇴계의 조부인 이계양 공은 단종이 폐위된 세조원년(1455)에 이 집을 짓고 뜨락에 소나무를 심은 뒤 '노송정(老松亭)'이라는 현판을 내걸고, 스스로의 호(號)도
'노송정'이라 하였다.
귀암(龜巖)과 지간(芝澗)의 편액을 당겨보니...
둘 다...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의 글씨.
노송정 편액은 이계양 공이 직접 썼다고 한다.
옥루무괴 (屋漏無愧) 또한 해사의 글씨로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늘 행동을 삼가하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한다’는 뜻.
산남낙민(山南洛閩)은 아주 편안하고 강한 느낌의 해서체로 '해동의 낙양과 민중'이란 뜻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발상지임을 의미한다.
해동추로(海東鄒魯)는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의 추(鄒) 땅과 온혜를 상호 연결시켜 바라보는 의식을 담고 있는 현판이다. 해서체.
퇴계선생태실(退溪先生胎室) 편액.
중앙에 삼면(三面)을 계자난간으로 둘러 누(樓)형식으로 독특하게 꾸민 곳이 퇴계태실이며, 이 방이 퇴계 이황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계양공도 이 방만은 며느리들 신방이나 산실로만 이용했다고 한다.
본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이다.
온천정사(溫泉精舍) 현판이 걸려있다. 낙관엔 역시 해사(海士).
퇴계태실은 일명 노송정 종택이라고도 부른다.
퇴계태실을 탐방하고 바삐 차에 올라 용수사 방향으로 500여m 이동(온천교에서 100m 지점)하여 차를 댄다.
용수사로 가는 도로는 1차선으로 대형차량과 교차할 땐 어느 한 쪽이 양보를 해야만 된다.
좌측 세멘트 농로 끄트머리에 낮은 산자락이 내려와 있고, 기와집이 한 채 보이는 게 '침천정'이다.
침천정과 낮은 산자락.
진행하면서 우측으로 눈을 돌리니 멀리 용두산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돌아본 모습에, 황토색 간이 건물은 '온천수 시추공'이라 적혀있다. 도산온천에 온천수를 공급하는 모양.
버스에서 내려 불과 2~300여m의 지점에...
침천정이 있고, 본격 산길입구는 침천정 뒷편 낮은 산자락.
정면 3칸 팔작지붕의 침천정...
편액을 살짝 당겨본다. 침천정(沈泉亭)이면 샘을 베고 있는 정자라는 의미.
애국지사 '운포(雲圃) 이중린 선생 사적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 침천정의 유래와 내력이 자세히 적혀있다.
그는 경술국치 이후에도 입산 피신생활을 하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했으니, 거룩하도다. 선생의 생애여!
능선에 오르자 산길은 유순한...
솔밭길로 송이버섯이 나는 모양으로 입산금지 푯말이 붙어있다.
지형도 상의 국망봉(481n)엔 국망봉이 저쪽에 있다고 화살표를 그은 표지판과 삼각점이 있고...
퇴계 선생의 조부이신 계양공이 제사를 올렸던 봉우리(국망봉 단비)는 여기서부터 500m에 위치한 봉입니다라는 코팅지.
작은 봉우리를 살짝 올라서면 남동쪽 능선으로 갈림길이 있지만 우측으로 살짝 틀어 내려선다.
중간의 작은 봉우리를 좌측 사면으로 살짝 우회하는데, 무덤이 있는 이 작은 봉우리가 중요한 갈림길로 단비가 있는 국망봉에서 되돌아와야 하는 지점이다.
국망봉의 단비와 그 옆에 기묘하게 생긴 자연석에다 다시 국망봉이라 새겨 놓았다.
권 선생님과 함께 기념사진.
단비 아래에 자잘하게 새겨져 있는 글자를 살펴보니 13대, 14대, 15대손이 쓰고 세웠다는 뜻이다.
그 옆의 작은 바위에도 한 자씩 국망봉이라 새겨져 있다.
나라를 바라본다 하였으니,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한양을 보았겠으나 단종은 영월에서 죽임을 당했지 않았나?
돌비 뒷면엔 꽃이 피어 있다.
단비가 있는 국망봉에서 식사를 한 뒤 U턴하여 무덤이 있는 갈림길에 돌아왔다.
이후 북쪽 능선으로 이어가면 우측으로 살짝 조망이 열리면서 범상치 않은 하늘금이 보여...
당겨보니 봉화의 청량산인 듯하다. 청량산에도 퇴계의 흔적들이 있다.
잘록한 안부(비포장 임도)에 내려서서 후미들에게 탈출할 수 있다고 무전으로 알렸다.
광주 이씨묘를 지나고...
제법 반듯한 등로를 이어가면...
잘 관리되고 있는 무덤에서 임도를 만난다.
우리는 지맥꾼이 아니라서 굳이 능선을 고집할 필욘 없어...
우측 어깨에 문수지맥을 무겁게(?) 짊어지고...
임도를 걸으니 산행속도에 가속도가 붙는다.
여름철이 아니라서 임도걷기는 아주 쾌적하였고, 벤치에서 쉼도 하며...
40여분 만에 임도 삼거리에 닿았다.
삼거리 우측 10m지점에 이정표가 있어...
확인을 해보니...
'선비순례길'이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후미팀에게 국악진흥원 방향 임도로 내려가면 용수사 일주문 옆에 우리 버스가 있다고 하였다.
선비순례길의 친절한 안내판.
용두산은 이정표(수운정 방향) 맞은편 원목걔단을 밟고...
산길로 접어 들지만 곳곳에 송이버섯 입찰구역으로 입산급지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선비순례길 이정표와...
안내판.
안부에서 사거리 갈림길이 나오고...
우리는 능선을 고수하여...
바위가 있는 작은 봉우리에 올라선다. 바위가 있는 이 봉우리에서 용수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다.
바위 봉우리에서 5분 만에 용두산 정상에 올랐더니 카메라맨 문채 씨가 사진을 찍어주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다.
말끔히 제초작업을 한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망이 열린다. 아까도 보았던 청량산이어서...
살짝 당겨 보았더니 육육봉이 확인이 된다. 그래서 퇴계 선생이 쓴 것으로 알려진 싯귀를 읊조린다.
'청량산(淸凉山) 육육봉(六六峰)을 아나니 나와 백구(白鷗)
백구(白鷗)야 헌사(喧辭)하랴 못 미들슨 도화(桃花)로다
도화(桃花)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魚舟子) 알가 하노라.’
<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는 나와 갈매기뿐 / 갈매기야 소문내었느냐 못 믿을 것은 복숭아꽃이로다/ 복숭아꽃아 떠나지 말아라 어부가 알까 염려하노라>
용두산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제초작업한 길을 무심코 내려섰더니 그 길은 '선비순례길'이어서 되올라 왔다.
우측 수더분한 능선을 선택하여...
네이버지도와 다음카카오에 그어진 등로를 따라...
능선늘 내려섰더니...
멧돼지가 횡포를 부린 묘 2기를 만나고...
다시 묘 1기를 만나니...
좌 우로 반듯한 길이 나있고 능선으로도 흔적이 보인다. 네이버지도를 따라 좌측으로 진행하니...
이 길은 자꾸만 사면을 따라 좌측 능선으로 올라 붙는다.
그 길을 따르면 능선을 따라 용수사로 내려갈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네이버지도에 나와있는 트랙을 고수하며 계곡으로 진행하였는데, 사진에서 보는 우측 능선이었을까.
풀숲에 가린 희미한 족적을 좇아...
들국화 향을 맡으며...
계곡에 내려서서 우측으로 길을 찾았다.
오래된 묵은 길을 만나...
계류를 좌측으로 끼고 내려서니...
산판길인 듯 널따랗다.
마의태자가 신라땅을 바라보았다는 마의대가 있다고 하였지만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 찾을 길이 없다.
이 바위는 아닐 테고...
쇠줄을 넘어오니...
또다시 출입금지 쇠줄.
임도급 산길에서...
또다시 쇠줄.
물탱크를 지나자...
용수사의 뒷모습이 나오고...
돌아보니 산신각이다.
새로 반듯하게 지어진 당우는 규모가 상당하고 절마당에는 곱게 잔디가 깔려있다.
대웅전 우측에 있는 이 석탑은 어디서 많이 본 한데,
바로 불국사의 다보탑이다. 다보탑의 모조품인 셈.
용두산 중턱에 있다는 마의대(麻衣臺)는 찾지 못하고...
마의당(麻衣堂) 현판만 올려다 본다.
반대편의 당우는...
월오관(月午觀). 달이 대낮처럼 밝다는 뜻이니,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월오리로 넘어가다 달빛에 서러움과 한을 되새겼다는 스토리텔링.
대웅전 앞에도 안면이 있는 석탑 두 기가 있다. 가까이 있는 석탑은 지난 어래산 봉좌산 때 보았던 '정혜사지 13층석탑'이고, 뒤의 것은 유명한 석가탑.
석탑 세 기가 모두 경주에 있는 국보로 이미테이션.
대웅전 좌측에 있는 세 기의 석비는...
운곡리 주민일동이 기증한 하마비(下馬碑)이고,
용수사 뒷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안동 용수사 금호비(安東 龍壽寺 禁護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0호)'.
“이 산에는 제단이나 옛 절뿐만 아니라 영역 안에 중대한 설이 있기 때문에 영원히 산 안에서의 모든 출입을 금지하고 보호하도록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글을 지은 사람은 일영(日營)으로 되어 있고, 비를 세운 연대는 신해년 10월이라 되어 있으나 신해년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자료요약>
그리고 알 수 없는 또 한 기의 비석.
그 옆 전각에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돌부처 한 기가 모셔져 있다. 개성 영통사 불상으로 탈북민이 모셔왔다는 탈북1호 불상인 미륵불(彌勒佛)이다.
-용두산 용수사-
용두산 자락 불보사찰에 오신
통일미륵부처님
분단된 국토에 이산가족이 있었는지
몇 구비 인연 따라 용수사에 왔다
북한 땅속에 묻혀 지낸지 얼마였는지
답답한 육신 꺼내달라는 현몽도
북한을 떠나려거든 데려가 달라는 목소리도
믿어지지 않은 실화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곡절 많은 인연 따라
북한에서 중국 안동(단둥)으로
중국 안동(단둥)에서 우리나라 안동까지
이념을 초월한 수행의 발걸음이 머문 부처님
대웅전 옆에 소박한 야단법석을 차려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며
대중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潤疇 목 필 균>
날아갈 듯 단정한 정면 3칸 팔작지붕의 대웅전과 석탑 두 기의 안정적인 모습.
잔디밭을 가로질러 나와 돌아 본 모습.
용수사를 뒤로하고 내려서는 길엔 작은 돌탑들이 배열해 있다.
금방 일주문.
산행을 마친 일행들이 터를 잡은 모습.
일주문엔 '용두산용수사'
글씨는 퇴계학 연구원 이사장을 맡고 계시는 '행파(杏坡) 이용태(李龍兌) 박사.
선비순례길 안내판.
잘 지어진 화장실 밑으로 계곡이 있었지만 정자와 맞배지붕 건물 우측에 수고꼭지가 있어 그곳에서 대강 땀을 씻었다.
여러 편의시설이 있는 건 선비순례길을 의욕적으로 꾸민 것.
그 옆의 커다란 비석과 부도 세 기.
뜬금없이 '희양산봉암사사적비'. 이 비석이 안동에 온 까닭은?
용수사는 퇴계가 20세 때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주역을 탐구하다 병까지 얻을 정도로 유서 깊은 사찰이었지만 소실되었다.
이후 봉암사 주지를 지낸 원행스님이 용수사 주지로 와서 경험과 공력을 바탕으로 현재의 용수사로 재탄생 시킨 게 인연일까?
귀가길에 도산서원을 들렀다.
도산서원은 안동 북부에 위치하여 지난 안동 여행에서도 미처 답사치 못한 곳. 왕모산 때도 그랬고, 청량산 때도 그랬다.
이번 용두산 국망봉 산행을 테마로 엮기 위해선 꼭 답사해야만 하는 곳.
매표소와...
입구의 하마비.
입장료는 어른 2,000원에 경로 우대이며,
하절기 09:00~18:00까지이다.
조금 걸어 들어가면...
우측으로 시야가 열리며 마치 섬 같은 제단이 하나 있다. '시사단(試士壇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3호)'이다.
이황 선생의 학덕을 추모해 제사를 지낸 곳으로 그곳에서 과거를 치르기도 했다.
1792년 정조는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명을 내 퇴계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를 신설하여 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시행하고 기념하던 장소가 시사단이다.
안동댐으로 수몰되기 전에는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의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1975년에 원위치에 10m 높이의 돌축대를
쌓아올린 뒤 원형대로 옮겨 지었다.
비각 안에는 1824년(순조 24) 비각을 다시 지을 때 새로 새겨 세운 비석이 있다.
이보다 앞서 1796년(정조 20)에는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도산별과(陶山別科)를 기념하려고 지은 글을 새긴 비석이 있었다.<자료인용>
안동호에 물이 차면서 시사단은 완전 섬이 되어버렸다.
시사단 안내판.
선생은 서원의 동쪽을 천연대(天鳶臺), 서쪽을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로 불렀다.
탐방 시간이 20분 정도였으니 주마간산(走馬看山) 정도가 아니라 말위에서 쏜 화살처럼 쏜살같이 돌아야 할 판.
산기슭 옴팍하게 또아리를 튼 서원을 들어가다...
아주 기이하게 가지를 뻗친 왕버들을 쳐다본다. 마치 한 마리의 용이 용트림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누가 여기에다 우물 정(井) 자를 써놨노?
도산서원에서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인 열정(冽井이다.
우물 하나의 이름에도 주역 정괘(井卦)의 지혜와 교훈이 들어 있다.
도산서원을 들어와...
농운정사(隴雲精舍)는 도산서당에 붙어 있는 기숙사로 언덕 위의 구름이라는 뜻이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에서 공(工)자형의 평면을 갖고 있다. 2개의 긴 방, 2개의 마루방, 2개의 토방이 이어져 있고 앞뒤로 툇마루가 붙어 있다.
서쪽마루는 ‘관란헌(觀瀾軒)’이라 이름 붙였고, 나이 적은 후배들의 공간이다.
퇴계 선생의 시 '관란헌'이다.
浩浩洋洋理若何 넓고도 양양하니 그 이치 어떻던고
如斯曾發聖咨嗟 일찍이 성인께서 이렇다고 탄식했소
幸然道體因玆見 도체가 다행히도 이로부터 나타나니
莫使工夫間斷多 공부를 할 양이면 끊임있지 말아다오
농운정사는 1561(명종 10년)에 지어졌다.
퇴계선생의 시 '농운정사'
常愛陶公 上雲 도홍경의 농상 구름 두고두고 사랑하여
唯堪自悅未輸君 오직 홀로 기뻐하나 임에겐 못 보냈소
晩來結屋中間臥 늦게서야 집을 얽고 그 가운데 누웠으니
一半閒情野鹿分 한가한 맘 그 반을 들사슴과 나누련다
툇마루의 동쪽마루는 ‘시습재'로 나이든 선배들의 공간이다.
농운정사의 시습재(時習齎)는 '배우고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논어 학이편에서 인용했단다.
퇴계 선생의 시 '시습재'를 보자.
日事明誠類數飛 날로 명성 일삼아서 새 나듯이 익히고는
重思複踐 時時 거듭 생각 다시 실천 때때로 나아가오
得深正在工夫熟 공부가 이룩되어 깊은 맛을 얻고 보면
何 珍烹悅口 맛있게 삶은 고기 입에 맞을 정도리요
도산서당(陶山書堂)은 퇴계선생의 친필로 그의 시 [도산서당]을 보자.
大舜親陶樂且安 순이 친히 그릇 구워 즐겁고도 마음편코
淵明躬稼亦歡顔 연명 몸소 농사하니 얼굴 역시 기뻤다오
聖賢心事吾何得 성현의 그 심사를 내가 얻음 아니로되
白首歸來試考槃 백수로 돌아왔으니 이에 숨어 살으리랏다
휴식을 취하던 마루에는 암서헌(觀瀾軒)이라는 이름(친필)이 붙어있고, 암혈지사(巖穴之士)인 은사(隱士)가 사는 집이란 뜻이다.
퇴계선생의 시 [巖栖軒(암서헌)]을 보자.
曾氏稱顔實若虛 증씨는 안연더러 실하면서 허한 듯이
屛山引發晦翁初 병산(유자휘)은 회옹에게 가르치던 처음이라
慕年窺得巖棲義 바위에 깃드는 뜻 늦게서야 엿봤으니
博約淵氷恐自 박약공부 연빙자세 성기었음 두려웁소
유독 연꽃을 좋아한 퇴계 선생은 연꽃을 심어 정우당(淨友塘)이라 하였다.
직접 지은 도산서당의 거처하던 방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였다.
선생의 시 '완락재'다.
主敬還須集義功 공경을 주장해도 집의(集義) 공부 종요롭네
非忘非助漸融通 잊고 돕지 않고도 점차로 융통하리
恰臻太極濂溪妙 염계의 태극도의 묘한 경계 알고보니
始信千年此樂同 천추에 이 기쁨 같을 것을 알았노라
돌에 새겨진 매화원(梅花園). 마지막 눈을 감기 전 "저 매화나무에 물줘라."하였을 정도로 유달리 매화를 사랑한 퇴계 선생.
아래에서 보면 마치 2층 누각처럼 보이는 광명실(光明室)은 선생의 친필이다.
광(光)은 햇빛, 명(明)은 달빛을 의미하므로 이 세상의 어두움 즉 무지의 세계를 밝히는 것이 책이라고 하여 이름이 지어졌다.
서원 서고의 이름이 광명실인 것은 이런 의미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역락서재(亦樂書齋) 광명실.
광명(光明)은 많은 책이 서광(瑞光)을 비추어 준다라는 뜻.
도산서원은 이황이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三年喪)을 마치자 그의 제자들과 선비들이 1574년(선조 7년) 봄에 도산서당 뒤로 조성이 시작됐다.
그 이듬해인 1575년 8월 낙성과 함께 선조로부터 '도산'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1576년 2월 사우를 준공해 이황의 신위를 모셨다.
서원으로 출입하는 정문이 '진도문'(進道門)이다.
진도문을 들어서야 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인 전교당으로 뜰아래에는 정교대가 설치되어 불을 밝힐 수 있게 했다.
강당인 전교당(典敎堂;보물 제210호) 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건물로 전체적으로 큰 대청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만 한존재라 불리는 한 칸의 온돌방이 있다.
전교당 앞에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유생이 묵었던 동재의 박약재와...
서재인 홍의재가 마주보고 서 있다.
이곳에 걸린 도산서원과 전교당 현판은 선조의 어명을 받아 조선조 최고의 명필 한석봉(韓石峰)이 어전에서 쓴 친필 글씨다.
작은 글씨는 ‘만력3년6월 일 선사(萬曆三年六月 日 宣賜)’. 만력 3년은 1575년이고, ‘선사’는 임금이 하사한다는 의미다. 사액서원임을 말해주고 있다.
전교당 안내판.
바삐 들어선 곳은...
고직사(庫直舍)로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살림집이다.
도산서원을 내려서며...
고직사는 상 하로 나눠져 있다.
고직사.
'역락서재'의 현판 글씨도 선생의 친필.
역락서재의 안내판.
도산서원을 벗어나니 어느새 땅거미가 진다.
도산서원 안내판을 일별하고...
바삐 버스에 오른다.
당일 산여행으로 이러한 일정을 한꺼번에 테마로 묶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기회마저 포기해버리면 다음 기회는 언제 또다시 올 것인가?
메모장의 버킷 리스트는 그대로이고 , 살아갈 날은 그렇게 마냥 길지 않을 것이니...
blog.daum.net/bok-hyun/885 김복현의 산이야기
안동 용두산 용수사 산사의 풍경
경북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273-1
용두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용수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 말사이다.
안동에 있는 사찰들은 대부분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의성 고운사 말사들인데
용수사가 통도사 말사가 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용수사 일주문
정갈한 손길이 오고간 장독대 옆으로 '무말랭이'가 가을볕에 잘 말라가고 있다.
용수사 범종각
용수사 입구에는 이렇게 생긴 돌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가을이 곱게 내려앉은 용수사 뜰 앞
용수사 개창기에 의하면
고려 의종의 발원으로 화엄종 사찰이 개창되어, 명종 때에 완성되었으며
이후 의종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운영되어 왔다.
용수사 대웅전
용수사 대웅전 사분합 꽃살문
산신각 주변으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용수사의 미륵불
.
요사채 월오관
고려명종 11년(1181년)에 최선이 건립하였으며, 조선 선조때 극락전을 중수하였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전투 중에 용수사와 부속암자 '영은암'이
불에 타서 소실되었다.
그 후 터만 남은 곳에 1994년에 대웅전과 요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안동 용두산 용수사 2015.11.14
blog.daum.net/nami3152/2402 산사에서의 풍경소리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에 있는 용두산 용수사 유적및 전설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에 있는 용두산 용수사
용수사 개창기에 의하면
고려 의종의 발원으로 화엄종 사찰이 개창되어, 명종 때에 완성되었으며 이후 의종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운영되어 왔다.
고려명종 11년(1181년)에 최선이 건립하였으며, 조선 선조때 극락전을 중수하였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전투 중에 용수사와 부속암자 '영은암'이 불에 타서 소실되었다. 그 후 터만 남은 곳에 1994년에 대웅전과 요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용두산 용수사(龍壽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용수사는 신라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수 차례 화재로 옛터만 남았는데 봉화의 각화사 주지 성원이 1146년(의종원년)에 용수사 옛터의 남쪽에 암자를 지은 뒤 입적하자 각화사의 주지로 왕실과 가깝던 고승 석윤이 의종에게 용수사 창건을 건의하자 의종은 예종(1079~1122)이 각화사를 창건해 화엄교리를 폇듯이 의종도 사찰을 지어 화엄교리를 펴고자 하였다. 이에 의종(1127~1173)은 석윤에게 용두산의 암자를 증축하여 용수사라 사액하고 크게 번성시켰는데 의종이 믿었던 장군에게 죽음을 당하자 명종1년(1181)에 형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국왕의 원찰로 지정 최고 문신 최선에게 왕명으로 '용수사개창비문'을 짓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용수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형상의 용두산 자락에 여의주 부분에 자리하고 농암 이현보,퇴계 이황,금계 황준량,간계 이덕홍선생이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던 곳으로 평소에 선비들의 도학 강마처가 되기도 했고 국란을 당해서는 의병과 승병의
본부가 되기도하고 지역민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일본군이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용수사에 본부를 차렸고 의병장 이중린이 용수사를 불태웠으며 1992년 문경 봉암사 주지를 지낸 원행스님이 부지매입을 시작으로 대웅전등을 복원하였고 지속적으로 복원을 해가고 있다.
대웅전에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관음.대세지 양대보살과 8대보살이 안치되어 있고 후불 목각 탱화는 화려하고 호화로우며 마당에 옥돌로 다듬은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고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탈북부처님과 금호비(禁護碑)에는 '이 산은 다만 제단과 옛 절뿐아니라 국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 산 전체를 영세토록 금지하여 보호 할일이다 일영(日營)이 제목을 짓고 신해(辛亥) 10원에 세운다'라는 비가 있었다.
원행스님은 탬플스테이와 다례문화체험,불교경전 강의등 다양한 사회교화활동과 지역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불교와 유교의 소통을 위하여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동정각에서 반야심경의 해설과 원문독송.한글로 풀이된 반야심경을 청취 하면서 불교의 교리를 익히는 시간을 가졌으며
좋은 말씀을 하여주신 주지스님에게 감사를 드리며 우리는 농암종택으로 향했다.
세상사 한마디
잘난척 하지않고 있는척 하지않으며 아는척 하지않는 이렇게 삼척을 피하며 나이들어가는것이 노테크의 한 방법이다.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에 있는 용두산 용수사 2018.07.30
blog.daum.net/snipe5853/3633 인생은 "0"
KOREAN CULTURE - Yongsusa Temple Stay in Andong / 안동 용수사 템플스테이
[화제의 인물]안동 용수사 원행스님 “안동사람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주지스님의 안동사랑과 퇴계사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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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안동 용수사 원행스님 “안동사람들 정신 바짝...
adinews.co.kr/ArticleView.asp?pcfrom=mobile&intNum=5993&ASectio.. 안동인터넷뉴스
안동 용수사 금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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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문
안동 용수사 금호비는 용수사 경내에 있으나 본래 용수사 뒷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31㎝, 폭 45㎝, 두께 17㎝이다. 금호비의 앞면 모습이다.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273-4
문화재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0호
제작일자
2009-08-05
제작
씨씨포유㈜
저작권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안동 용수사 금호비
www.grandculture.net/ko/Contents/Contents?dataType=0403&content..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적/유물
본문 내용
안동 용수사 대정삼년명 금동고
- 한자명 :
- 安東 龍壽寺 大定三年銘 금동고
- 영문명 :
- Andong Youngsusa Daejeong Samnyeon Myeonggeum Donggo
- 분류 :
- 문화 > 전적/유물류 기타
- 소재지 :
- 도산면 운곡리 60
- 분 류 : 기타
- 지 정 : 도유형문화재 제323호
- 지정일 : 2001. 4. 30
- 소재지 :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60
- 시 대 : 고려시대 의종
- 소유자 : 용수사
용수사에 보관되어 있는 청동으로 만든 동고(銅鼓)로 징과 같은 형태이다. 용수사는 고려 의종 원년(1146)에 각화사 주지인 성원이 암자를 지으면서 개창되었다. 1896년에 불타버린 것을 이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동고는 가로 31.3㎝, 세로 30.3㎝ 크기로, 절을 다시 지을 때 발견되어 보관하게 되었다. 동고의 위부분과 그 양옆에 각각 1개씩의 고리가 있으며, 아랫부분에는 길이 15.5㎝, 최대 폭 6.2㎝의 울림통이 있다. 앞면 중앙에는 연꽃무늬가 있고 중간에는 문양을 새긴 띠가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글자와 당초무늬가 있고 뒷면에도 가장자리를 따라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동고는 앞면과 뒷면의 글자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의종 17년(1163)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어 고려말에 제작된 금고의 양식을 살피는데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안동 용수사 대정삼년명 금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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