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서안 피라미드 비밀 발굴에 대한 것 外

2019. 7. 4. 18:18우리 역사 바로알기



중국 서안 피라미드 비밀 발굴에 대한 것| ㆍ한국역사바로알기

한류포스 | 조회 1163 |추천 6 | 2018.12.29. 20:06



⊙ 이 다큐도 그낭 맛배기⊙
⊙이집트문명과 연관성⊙


⊙ 최초의 항공사진 1945년⊙


⊙ 오리온 별자리배열⊙

●서안 피라미드의 발견●
⊙ 서안의 위치 위성사진⊙

본인(콘스탄틴)은 1999년도에 인터넷에서 西安피라미드를
처음으로 알았읍니다!!
묘한 충격과 호기심이 발동하던 차에

2000년도에 직접 서안을 방문하여 서안구경을
처음하면서 진시왕릉 구경갔다가 차를 대절하여
함양지역을 둘러보았읍니다!!
저런 피라미드가 즐비하게 정말 있었읍니다!!

당시로써는 중국 서안지역의 초행길이고 면밀하게는
둘러보진 못했읍니다!!
그 당시 찍은 사진은 필림카메라로 직접 찍었고
현상해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분실한 것인지
찾질 못하겠읍니다. 대신 비슷한 시기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을 올리겠읍니다!!
제가 이쪽을 둘러본후 느낀 점은 이런 피라미드들이
수 없이 있었읍니다
여기 뿐만이 아니고 서안 동쪽지역으로부터 낙양을
지나 鄭州 쪽으로 가는 열차창 밖 내내 저런 피라밋이
한나절 계속해서 보였읍니다.
중국공안들의 저지같은 것은 없었고 그냥 가면
볼 수도 사진찍을 수도 있읍니다!!

⊙ 서안에서 정주를 지나 낙양 인근까지 피리미드는
있었다⊙

●중국 한나라 무덤이라 구라치는 중국 당국●
여기보면 무덤인 듯이 망부석이나 양들 석상을
세워놓았는데 모택동 이후에 세워눟은 것이라 한다!!
피라미드 주변에 최근에 만들어 설치한 듯한
깨끗한 표면의 석상들이 듬성듬성 설치되어 있다!!

●한나라시대 경제 무덤의 이름 한양릉(漢陽陵)●

최근에 서안피라미드 중에 허름한 것 하나 골라
중국 당국은 비밀리에 발굴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서안피라미드를 너무 숨기고 있으니 깨름찍해서 인지
그 수 많은 피라미드 중 하나를 골라 발굴하여 공개했고
漢陽陵이라 이름붙히고 박물관도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
그 무덤이름이 한양릉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 아닌가?
조선이 漢나라를 계승해서 수도漢陽이라고 했는데
漢나라 문제는 차차 고찰하기로 한다!!

중국 당국이 서안피라미드를 한나라시대의 무덤으로
만드는 작업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역사공정이 탐원공정(探源工呈)이다!!

일반인들은 동북공정은 알아도 탐원공정은 생소할것이다!!
서안피라미드는 중원탐원공정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안피라미드증에 한섹타를 지정해서
한나라陵園이라 칭한다!!
즐비하게 무덤이름을 붙힌다!!

● 한나라경제의 무덤이라는 한양릉박물관●

수 많은 피라미드 중에 중국당국이 공식적으로 발굴 공개한 피라미드는 딱 2개이다!!
하나는 진시황릉과 또하나는 漢경제 무덤 한양릉
나머지는 언급도 없다!!

중국 中原 지역에서 수많은 피라미드들 중에
공식발굴한 것은 진시왕릉과 漢경제릉이다!!
진시왕릉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부상해서
저도 3번 방문한 적이 있읍니다!
문제는 한나라 경제릉인데 무덤발굴 부장품이나
규모에서는 굉장한데 중국당국에서는 홍보를
별로 하지 않는 느낌이다!!
머리에 정상부에 상투를 하고 있다!!

주로 양꼭두를 매장했다!!

무덤 속의 토용이다!
원래 옷도 있었는데 썩어 없어졌다고 한다!!


무덤봉분 피라미드 하나에 나무심고 해서 왕릉처럼 꾸밈!!


한나라식 건물을 최근에 세움


비석을 세움 西漢 양릉(한양릉)이라고 못박음
처음에는 한양릉이라고 부르다가 조선 한양을
연상시킨다는 여론에 따라 陽陵(양릉)이라고 씀.


한양박물관== 주로 토용을 전시해 놓음
진시왕릉과 비슷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


漢宣帝杜陵이라고 써있었는데 딱 봐도 나타나 듯이
최근 1950년대 쯤 세운 것으로 보인다!!!
한양릉 토용의 복식복원⊙
이런 복식은 한눈에 조선계 복식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무용총의 장삼과 비슷하다!!⊙


⊙ 왕의 행렬 재현⊙



♥탐사보고 분석♥

1960년대 "장문구"라는 탐사대표단장의 생생한 증언을
통하여 서안피라미드의 주인공의 실체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1963년 비로소 중공정부는 서안피라미드에 대하여
인식하기 시작하여 발굴탐사단을 보낸다!
1950년대는 49년 중공 모택동정부 수립 후에
얼마되지 않아서 경황이 없었고 1950년 한국전쟁에
지원군을 보내 국가적으로 신경쓸 틈이 없어 보인다

또한 1958년에 중공정부의 티벳트침공사태로
50년대 10년간은 아수라장의 중국대륙이었다.
60년대가 시작되어  중공이 안정을 찾은후 에
서안에 발굴탐사단을 보낸 것이다!!


발굴탐사단이 발견한 것은
벽화 여러개의 문자 중에도 한국한글, 조각류 6200 여점
맷돌, 절구, 솥 배추김치(백김치) 청동검 금관
상투머리를한 시신 등 3000여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63년 서안피라미드발굴품들 추정♥

★백김치★

몇천년된 피라미드 중에서 백김치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미스테리이다! 어떻게 썩지도 않았을까?
그러나 <피라미드 효과>를 알면 의문을 약간이나마 풀 수 있다!!


피라미드 속에서는 시체도 잘 썩지 않고 음식물도
부패가 잘 안된다는 것이 피라미드효과이다!!

★청동검★

청동검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청동검은 주로 한반도와 남만주지방에서 발견되는데
특이하게도 서안지역 피라미드안에서 나왔다!!
이것은 청동검은 일개의 생활도구가 아니고
특수한 계급의 神異적인 靈物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남만주와 한반도땅은 청동검이 많이
발견되므로 오히려 서안지역보다도 특이한 땅이라 볼 수 있다!!



★맷돌과 절구★
맷돌과 절구도 발견
이 도구는 물론 한반도인만의 도구는 아니다.
전유라시아에서 발견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주로 남중국 소수민족들이 사용하고 있다.
  운남성지역에서 많이 쓰고 있는데
문제는 중국 한족들은 별로 쓰질 않고있다는데 있다!!



★금관★
 이런 금관도 나왔다!!
이것도 古아시아시대부터 특수한 샤먼계급의 표식이다.
경상도지역에서 발견된다고 신라유물만이 아닌 것이다.
신라시대 이전부터 이런 시베리아 샤먼식 관(冠)
역사가 오랜된 것이다!!



★한글형태의 문자★

이런 가림토문자와 같은 한국식문자가 나왔다는 것은 
 소위 훈민정음의 역사는 무려 10000년 전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흑피옥시대에도 한글과 같은 문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번 본학회 강연회에서도 증명되다시피
흑피옥시대인 1만년전 유물에도 한글가림토새겨져 있었다
이런 가림토문자류의 한글문자가 서안피라미드
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상투머리를 한 시신★

몇 천년된 것이 되어서 나온 시신이면
시신은 없고 유골이 있어야 마땅하나 시신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여기서 나온 것은 시신이 맞다!!
즉 "미이라" 이다!!
피라미드효과 때문에 시신은 유골로 변하지 않고
미이라로 발견된 완곡한 표현이 "시신"이다!!

2800여년전의 신강성출토 미이라 <비교용사진>


이런 상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역시 머리카락이 부패되지 않은 것을 보면 미이라가
틀림없다!!


조선전통상투머리


타클라마칸 출토 미이라


누란의 미녀 미이라



상투머리도 凡유라시아적인 풍습이다
그러나 중국 한족은 상투를 하지 않는다!!


★벽화★

63년 당시 서안피라미드에서 발견된 벽화가
어떤 것이 었나는 전해지질 않는다!! 
  그러나 최근 중국당국이 서안피라미드를 비밀리에 발굴해
일부가 유포된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을 통하여 당시 발견된 벽화형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서안에서 발굴조사된 피라미드의 벽화☆

전체적인 복식의 모습은 조선전통의 투피스식 한복을
연상케 한다!!


또다른 벽화
삼국시대 쯤의 사극에서 많이 나오는 복식과 머리모양이다.


☆사극 연계소문에서 나오는 복식과 머리모양☆


 
★결론★

이상 63년도 당시의 발굴에 참여했다가
임종 전에 진실을 토로한 故 장문구씨의 증언을 토대로
발견된 유물들을 대강 살펴보았다
이 유물들을 토대로 피라미드 축조연대와 축조 주인공을 살펴보면
축조연대는 대략 5000년 전 이상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여기에 나오는 유품들 중 청동기가 나왔다고 볼 때 
 이런 청동기는 4~5000년전 것으로 대략
기존학계에서도 짐작하기 때문이다!!

4000년 이후에는 청동기유물이 점차로 없어진다.
왜냐하면 청동기의 주성분인 "주석"이 전세계적으로
고갈되고 철기시대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서안피라미드의 겉에 입혀진 표피를 제거한 모습이다
이러한 석조건축의 바탕 위에 후대에 표피를 입혔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표피를 입힌 후에도 수쳔년 동안
저렇게 각잡힌 모습을 유지했던 것도 대단한 기술이다!!
아마도 超과학적인 기법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축조주인공이 누구냐?
는것은 당시 장문구씨의 증언에 답이 있다
그 답을 직접들어 보면서 이번장을 마친다!!!

"이 유적은 우리 짱꼴라유적이 아니야!!
한족문명 以前에 朝鮮유적이야" 



중국서안 피라미드 비밀 발굴에 대한 것 2018.12.29

cafe.daum.net/hanryulove/5Qxi/17427   한류열풍 사랑








중국 서안에 위치한 피라미드를 공개하지 않는 중국정부| 시사

배병호 | 조회 244 |추천 0 | 2018.10.30. 17:08


중국 서안에 위치한 피라미드를 공개하지 않는 중국정부 

 

이집트 피라미드 보다 더 크고 더 많은 규모의

중국 서안에 위치한 피라미드를 공개하지 않는 중국정부

최초의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다.

 

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들 거대한 피라미드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예상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 수 천년 앞서 만든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지금으로 부터 약 5천년, 6천년 이상 전으로 밝혀짐. 황하문명보다 한 천년정도는 빠름.)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학술적인 조사도 불가능하며 중국에 의한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중국당국은 1960년대,1970년대에 이미 위 피라미드들을 발굴하다가 동이족 즉,

<배달민족>의 유들이 쏟아져 나오므로 발굴 중단.

황하문명보다 배달문명이 빨랐다는 것이 드러나므로...
그 후 중국 당국은 위 피라미드들에 접근금지를 시키고
고조선, 고구려를 중국역사라 우기는 작업을 시작하였음.)
<하우스 돌프 씨 >

 

독일의 고고학자인 하우스돌프씨는 피터 크랴샤라는 친구와 함께

여행객으로 가장하고 평상시 잘 알고 지내던 중국의 시 

관광부 장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용해 외국인 금지 구역으로 묶여있던

북중국 일대의 피라미드들을 몰래 사진으로 담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중국 공안당국은 촬영사실을 알아내고

하우스돌프씨와 친구를 검거하여 카메라 및 필름 등을 압수하였으나,

다행히 촬영 직후 곧바로 사진들을 독일로 보내,
서방세계에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을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세계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21세기 최고의 고고학 발견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국과 유렵의 수 많은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중국 정부에 발굴을 허가해 달라는 공문과 압력을 수차례 보냈다.

처음에는 중국정부에서는 "북중국 및 만주땅에는 옛날부터

야만민족과 기마민족들이 살았던 곳이라 진보된 문명이 없다"고 말하고 ,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된 것"이라고 발뺌 하였다.
하지만 야만민족이나 기마민족이 만들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하고 웅장하여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아무튼, 그런식으로 계속 발뺌해오던 중국정부에서는 계속되는
서구학자들의 발굴요구 및 서구 케이블 TV에서 몰래 중국에 잡입해

카메라로 찍어 서구사회에 방송하는 노력에 힘입어 ,

최근에 중국의 일부학자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아직 발굴기술과 유물 보존기술이

 부족해 다음 세대로 발굴을 연기하게 되었다는 말만 살짝 흘렸다고 한다.
 
 

그 발표와 함께 10년전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켜
자국학생에게 가르치고 전 세계에 고구려 역사가 중국역사라고 홍보하고 있는 중이다.

 

보이는 바와 같이,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은 위로 갈수록 낮아지고

계단식 형태의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고구려의 무덤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런 건축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건축공법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면, 이 5,000년 전에 이 지역에서 이런 문명을 가진 집단은 누구일까?

중국인인가? 아니다. 중국인은 황하 유역에서 농사짓고 있었다.

 

몽골인인가? 아니다. 몽골인들은 당시 존재도 없었다.

거란족? 오환족? 이들은 완전 유목민으로서 정착 문명과 관계없다. 여진족? 

이들도 유목민이다.

 

5,000년 전에 이 지역에 관계된 국가나 민족은 누구인가?

모든 역사책에는, 이 지역에 고조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펀주: 비교적 근래에 만주에서 4400년전 청동기 발견되었다.
 

'황하문명'의 지금까지 발견된 최고 오래된 청동기는 4200년전 것.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 역사서 들에서 보아도 고구려는 민족이 백제 신라와 같았고 말(언어)도 같았음.

 

한민족의 문명이 중국보다 빨랐고 중국 문명은

한민족의 문명을 받아서 된 것이라 하는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보충: 중국 신화통신이 위의 사실을 극히 일부 밝힌 내용

mis2
(그림설명: 할트위그 하우스돌프씨가 촬영한 중국의 파라미드 사진


mis3
(그림설명: 할트위그 하우스돌프씨가 촬영한 중국의 파라미드 사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25m~100m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큰 것도 있다 시기도 2천년은 앞선다


축조하기 위해서는 당시 기술로 연 100만명 가량 소요 추정한다



처음 발견은 1945년 미국 수송기 조종사의 보고에 의해서다



자연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다


1963년 진시황의 무덤으로 추측 발굴하기 시작했다


1973년 탄소 연대측정법에 의해 진시황보다 수 천년 앞서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지금으로 부터 5천년 이상으로 본다


중국공안국에 의해 철저하게 감추어지고
학술적 조사도 불가능하며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60년대와 70년대에 발굴 동이족 유물들이 나오므로 중단했다



근금지 시키고 고조선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집어넣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독일의 고고학자 하우스돌프씨는 피터크랴샤 라는 친구와 여행객으로 가장

중국의 시 관광부 장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용해 사진촬영에 성공하였다





중국은 하우스돌프씨와 친구를 검거하여

카메라 등을 압수하였으나 이미 사진은 독일로 보내져 존재가 알려졌다




세계사를 다시 써야 하는 발견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유렵의 수 많은 학자들은 발굴을 허가해 달라는 공문과 압력을 수차례 보냈다.
중국정부는 야만족과 기마족들이 살았던 곳이라 진보된 문명이 없다고 말하고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된 것이라고 하였다.
역사서에는 고조선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속되는 발굴요구에 중국의 일부학자들이 존재를 인정했다.
발굴기술과 유물 보존기술이 부족해 연기하게 되었다고 말을 흘렸다.


그러고는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집어넣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세상에 선전하는 중이다.



위로 갈수록 낮아지는 계단식이다. 고구려의 무덤과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들여쌓기 공법이라 한다.
중국과 일본에 없는 고구려 건축 공법이다.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이 지역에 관계된 나라와 민족은 누구인가?


당시 漢族은 황하 유역에서 농사를 짓고 몽골인은 없었다
거란 오환 여진 이들은 완전 유목민으로 정착문명과 거리가 멀다
만주에서 4400년전 청동기가 발견되었다
황하문명 청동기는 4200년전 것이다
중국 역사서에도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같았고 민족과 언어도 같았다
신화통신이 밝힌 내용중에-중국문명은 한민족의 문명을 받아들여 이룬 것이다
고구려 장군총(將軍塚)은 피라미드들과 모양은 같은데 크기 차이가 많이 난다
고조선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둔갑하는데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순간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발을 불어 댈것이다 중국은 거대한 문명국 이었다 라고
선조의 유산을 지키지 못한 한국인들은 바보가 될 것이다
물론 그리 되어서는 절대 안될 것이다...
잃어버린대 조선의 영화까지 갉아 먹으려 하다니

- 히스토리 채널 방송내용에 의하면 여기가 중국정부가 촬영을 허락치 않는 곳이라 합니다
- 지금도 그러한지는 모르겠으며 추가정보가 확인될 때 까지 '억측'등은 삼가바랍니다.

(위성사진 확인) 중국 섬서성 장안 동남쪽피라미드 / 함양 피라미드 비교
(기존 게시물)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서안 서북쪽 함양에는
'건릉, 소릉, 양귀비묘' 등 여러 피라미드가 있다.
중국은 왜 서안의 피라미드를 세계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것일까?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1.jpg
서안 남동쪽 Dizhai (적채;狄寨 )라는 곳이다.
(그 동안 알려져온 서안의 서남쪽,남쪽이 아니다)
협곡과 절벽이 외워 싼 평원지대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2.jpg
예사롭지 않은 지형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것 같다.
주위에는 특이시설들이 서너곳 보인다.( 연구시설?).
마치 요새같기도 하고, 성 같기도 하고.
항공기를 이용하기 전에는 서안시내 어디서도 눈에 띄지 않을것 같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3.jpg
전체가 반석처럼 높게 올라 온 지형이다.
중앙의 백색 시설의 하단에 있는 타원형 축구장이 피라미드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4.jpg
3번 사진의 좌측 피라미드. 엄청나다.
진입도로를 만들고 시설(정문?)을 한것으로 보아 관리를 하긴 하는 모양이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5.jpg
3번사진의 우측 피라미드.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현재로 선 이 두개의 피라미드에 대한 정보가 없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5의확대
석재로 들여쌓기 한 모습이 계단처럼 뚜렷하다.
흙무덤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서안 Banpocun피라미드-1
중앙에서 오른쪽이 위의 Dizhai (적채;狄寨 )지역이고,
중앙부 부터 왼쪽이 Banpocun (반파,반포) 라는 곳으로.
7000년전의 유물이 다량 발굴된 앙소문화,고대 유적지이다.
A지역은 피라미드군 지역.
서안 Banpocun피라미드(Pyramids)-2
바로 위 사진의 A지역 부분이다.
1945년 미 공군 조종사가 촬영했다는 그 지역이고,
오리온 별자리 모양을 닮았다는 피라미드군 이다.
현재까지는 상태가 대체로 양호하지만 작은 고분들은 과거 사진과 비교해 볼 때,
그 선명한 형태가 많이 변형,훼손된듯 하다.
과거 미 공군이 촬영한 항공사진과 비교.
사진 전체를 보시면 화살표시 되어 있는것이 가장 큰 피라미드이며,
두번째는 가장 오른쪽 상단에 위치해 있으며,
세번째로 큰 피라미드는 윈쪽 하단에 있는것이며,
네번째, 다섯번째 피라미드는 첫번째와 두번째 사이
약간 하단 두개의 피라미드가 있는것을 볼 수 있으며
밀집되어 있는 마지막 사진은 3번째 피라미드 옆에 있습니다.
가장 큰 피라미드
두번째 큰 피라미드
세번째 큰 피라미드
네번째 피라미드
다섯번째 피라미드
<밀집되어 있는 피라미드...>
구글지도를 통해서 직접 보고 싶으시면 구글지도 검색창에
34 23'51.66" N 108 42'43.49" E 를 복사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중국 서안에는 위와 같은 피라미들이 분명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왜 중국에서는 관광유적으로 개발하면 엄청난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이런 놀라운유적을 숨기고 있는 걸까요?
왜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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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안 피라미드 발굴학자 "故 장문구(張汶邱 )씨"의 임종전 마지막 증언"
1963년4월에 우리 고적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조사해야하니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타고 이틀만에목적지인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있었고,

도착한 우리 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것이 대단했어요.

 거대 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말과 마차를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

그림,여러 문자(중국글 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절구,솥, 그릇등

생활도구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상투머리를한 정 중앙시신

(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호위상 3000여점등이대량발견 되었습니다.
 
 

우리는 난생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 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하였으며,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있는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 작성된 상황이었고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

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

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오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일행은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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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지역의 피라미드들 공중사진과 이집트 피라미드들 공중사진을 비교해 보지요.

[상공에서 촬영한 서안 지역의 피라미드들]

 

 

 

[상공에서 촬영한 이집트 피라미드들

(이집트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들)]서안과 이집트의 피라미드들이 비슷하지요.  

(느낌이 오시겠지만 서안 피라미드들을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더 높은상공에서 찍은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는 서안 피라미드가 좀 더 큰 것으로 보입니다.) 

 



cafe.daum.net/kse17/IUt2/635   김천서부17








중국내에 있는 피라미드군 |고대 한민족 역사(조선시대 및 그 이전)

지평선 | 조회 1837 |추천 17 |2017.07.10. 20:05 http://cafe.daum.net/sisa-1/f8lD/693 


중국내에 있는 피라미드군을 구글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아래 하단의 흰부분 있는곳이 중국 섬서성 서안공항입니다. 

서안 공항 주위에 구글에서 찾아본 피라미드가 약 30여개 정도 됩니다.


그런데 중국 자료에 의하면 이곳 주위에는 약 100여개의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이 피라미드들을 위구르의 피라미드라고 명명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를 찾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중국 당국이 진시황묘라고 하는 피라미드가 이곳 100여개의 피라미드군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이집트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가 밑변 227m, 높이 146m 이지만, 진시황묘라고 일컫는 피라미드는 밑면 360m, 높이 548m입니다. 그리고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보다 약 200여년이 앞선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 피라미드군이 모여 있는 곳을 봅니다. 이 피라미드들이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의 크기와 비슷합니다.




다음은 중국 티벳에 있는 지구상 최고(最高)의 피라미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높이 6700m의 피라미드,  인도어로는 카일라스(kailas)봉....


전 세계적으로 가장 신성시 여기는 곳 중의 하나로 등반이 허용되지 않는곳,

 그러나 오래전 러시아 탐험가들이 이곳을 탐험하면서 이곳 티벳주위에 약 100여개의 작은 피라미드중에서 이곳 카일라스가 제왕적인 피라미드이며, 만약 눈이 녹으면 우주로 가는 길의 문이 지구상에서 이곳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내에 수많은 피라미드가 존재하고, 또한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피라미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계에서는 그 가치를 충분히 검증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학적 가치를 알지 못하면서도 현재의 과학이 최고인양 우겨대는 것이 너무나도 우스운 과학 지식이라고 봅니다.


제가 20여년전에 서안의 진시황묘를 올라가고, 그곳에서 가까운 병마용을 구경하였을때, 병마용의 형상은 군대가 황제에게 출병을 아뢰는 군대 조직의 형상이었습니다. 상투를 튼 관료들과 장군들과 보병까지........ 어쩌면 이런 형상은 고조선보다도 더 이전의 모습이라고 칭해야 할까요?


지금의 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칼날, 저 칼날에 책을 대면 책 한권이 그대로 베어져버린다는 청동기의 문화(?), 모든게 어거지 춘향의 역사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 수차례 홀로  서안을 방문하면서, 주위의 산들을 등반하고, 우리 한민족의 역사 중심지라고 생각하며, 거닐었던 긴 세월......우리 선조들이 대륙의 주인으로 살았던 수천년의 세월.....



중국내에 있는 피라미드군 2017.07.12

blog.daum.net/bdseo1443/587   치우천황 연대기





중국 서안의 피라미드(Pyramids). | 중국,서안,피라미드

향고도 2006.06.21 01:27


구글어스로 중국 섬서성 서안(Xi'an) 지방을 살피다가 발견한 거대한 피라미드(Pyramids).

(사진 확대=클릭.스크롤하면 하단에 좌표)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1.jpg

 

서안 남동쪽 Dizhai (적채;狄寨 )라는 곳이다.(그 동안 알려져온 서안의 서남쪽,남쪽이 아니다)

협곡과 절벽이 외워 싼 평원지대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2.jpg

 

예사롭지 않은 지형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것 같다.주위에는 특이시설들이 서너곳 보인다.

( 연구시설?). 마치 요새같기도 하고, 성 같기도 하고.

항공기를 이용하기 전에는 서안시내 어디서도 눈에 띄지 않을것 같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3.jpg

 

전체가 반석처럼 높게 올라 온 지형이다.

중앙의 백색 시설의 하단에 있는 타원형 축구장이 피라미드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4.jpg

 

3번 사진의 좌측 피라미드. 엄청나다.

진입도로를 만들고 시설(정문?)을 한것으로 보아 관리를 하긴 하는 모양이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5.jpg

 

3번사진의 우측 피라미드.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현재로 선 이 두개의 피라미드에 대한 정보가 없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5의확대 

 

석재로 들여쌓기 한 모습이 계단처럼 뚜렷하다.

흙무덤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서안 Banpocun피라미드-1

 

중앙에서 오른쪽이 위의 Dizhai (적채;狄寨 )지역이고,  중앙부 부터 왼쪽이  Banpocun (반파,반포) 라는 곳으로. 7000년전의 유물이 다량 발굴된 앙소문화,고대 유적지이다.

A지역은 피라미드군 지역.

 

 

 

 서안 Banpocun피라미드(Pyramids)-2

 

바로 위 사진의 A지역 부분이다.

1945년 미 공군 조종사가 촬영했다는 그 지역이고,

오리온 별자리 모양을 닮았다는 피라미드군이다.

현재까지는 상태가 대체로 양호하지만 작은 고분들은 과거 사진과 비교해 볼 때,

그 선명한 형태가 많이 변형,훼손된듯 하다.

 

 

 

과거 미 공군이 촬영한 항공사진과 비교.


 

 

 

 

   그동안 서안(Xi'an)의 피라미드 이미지들은 모두 수십년 전의 것이거나, 그 진위를 알 수 없는

것들이었으나 구글어스로 몇번의 시도 끝에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서안의 피라미드라고 넷상에 나돈 여러 이미지 (모양새만 피라미드형인 흙무덤들도 있다) 들은1945년 미 공군이 촬영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함양(Xianyang) 북쪽에 동서로 은하수 처럼 깔린 무수히 많은 피라미드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적어도 서안의 남,서남,동남쪽에서는 수십년 동안 신뢰성있게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구글어스 피라미드 탐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중국의 피라미드형 고분은 두 종류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한 종류는 이집트형 처럼 최상단이 뾰족한 모양이고, 다른 한 종류는 만주의 고구려 장군총이나 마야 피라미드와 같이 상단의 각뿔이 잘려나간 듯한 형태인데, 이 두 종류는 다시 들여쌓기가 분명한 것과 단지 표면을 진흙으로 다져놓은 듯한 민 피라미드로 구별된다.

물론 형태가 뚜렷한 큰 규모의 것들을 비교한 결과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연구의 여지가 있다.

 

 

   아래 사진은 위의 서안 Banpocun피라미드 배열과 기타지역.오리온좌의 삼태성을 비교한 것이다.

 

 

1.서안 피라미드 현재    2.1945년 촬영당시   3.이집트 피라미드   4.마야 피라미드  5.오리온좌

  (Banpocun 지역)

 

 

   규모의 대소를 불문하고 서안지역의 고분들은 대체로 양호하나. 함양지역의 것들은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거나 그 흔적만 (위장? 변형?)보이는 것들도 여럿 발견된다.

상당수의 것들이  개발로 인한 도로,주거시설,방대한 산업시설들에 채이고 지반용 복토로 깎기고, 무차별적으로 파헤쳐 나가는듯해 안타깝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의 평원지대 (농경지)라 매립용 토사 구하기가 쉽지 않을테니 더욱 그렇다.

이대로 가다 간 수년내에 상당수가 소리 소문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 라는 생각이 든다.

 

   서안,함양지역은 확인된 것만해도 60-70기가 훌쩍 넘는데 (그 중 20여기 정도가 대형)

근대화 이후,  필요불필요를 논하지 않더라도 상당수가 발굴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함양,서안 모두 개방 이후 조성된 듯한 도로,주거시설,경지 등이 고분군 일대를 잠식해 가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과 중국인의 속성을 생각컨데,하늘의 눈인 위성이 내려다 보는 오늘날 까지도 유물공개나 공개발굴은 커녕. 존재마저 쉬쉬 하는 것은 그들의 기를 무참히 꺾는 뭔가가 있음이 자명하다.

나라와 민족을 따지기 전에 이것은 인류 최고,최대의 유물이 아닌가?

얼마전 발견되었다는 네이멍구 Chifeng (하가점, 홍산문화지) 인근지역의 피라미드형 고분발굴한 건지 어쩐 건진 모르지만

 상당량 유물수습까지 했다고 발표해 놓고 사진 한 장 공개를 안하고 있다.

5,500년 전 인류 최고의 것이라고 하면서도.....

 

 

 

 

 좌표: 34 23'51.66" N 108 42'43.49" E

 

   위의 이미지는 함양과 함양공항의 중간지점 에 위치하고 있는 피라미드다.

기단이 뚜렷하여  적석총(돌,전돌,흙별돌)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나무를 열을 지어 심어서 계단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기는 하지만.

이 고분 주위의 다른 진흙 피라미드,함양북서쪽 건능이나 진시황능이라는 것들 처럼 흙으로 형태만 갖춘 민 피라미드가 아니라, 고구려 장군총과 같은 들여쌓기 공법으로 만들어진 적석총이다.

 

이 고분은 발굴 되었는가?

연대 측정은?

고분의 유물과 실제 주인은?

위의 고분을 보고 한족식 봉토분(흙무덤)이라고 하는 사람은 정신병자일 것이다.

 

   함양 서안지역의 규모가 큰 피라미드형 고분들 중, 위와 같이 뚜렷하게 적석총이라고  판단되어지는 피라미드(장방형)는 많지않다.

그러나 이는 서안 함양 지역의 여러 장방형 고분 형태 중 가장 오래 된 듯 하면서도 앞선 문화,문명이 축조한 것으로 보여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이다.

장군총과의 유사성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고,

이 지역의 수많은 장방형 토총고분들은  이러한 적석총을 후대에 모방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기천년을 버텨 온, 말 그대로 인류 최고의 유적이다.

그런데, 중국정부는 원형관리는 물론 공개조차 하지 않고있다.

 

 

 

 서안 Orion좌 모양의 Pyramid 중 일부.

 

   위의 이미지는 Banpocun(반파) 지역 오리온좌 모양의 고분군 중, 큰 순서대로 첫번 째와

두번 째 고분이다.

그런데 나란히 있는 규모가 비슷한 두 고분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두 고분의 축조 연대가 상당기간 차이가 나거나,

인위적으로 한 쪽을 변형시킨 결과일 것이다.

우측고분의 형태에 복토를 하여 좌측처럼 변형되었을 수도 있다,

좌측고분에 나무심기가 진행 중인 것으로 보아 후자의 경우가 설득력이 있다,

그 이유는 뭘까?

왜 중국정부는 원형대로 보존 관리하지 않는걸까?

 

   이곳 뿐만이 아니다.

여러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 주위엔 어김없이 무수히 많은 나무를 재배하는 모습도 한결같다.

진입로를 정상까지 만들고, 그 양편에 석물들을 나열하고,정상에 누각을 세우고,

초입에 문을 세우고....

화족식 고분형태로 변해가는 것이다.

수년 내에 서안 함양에서는 우측과 같은 형태의 들여쌓기 장방형 고분은

더 이상 보기 어려울 것이다.

동북공정과 맞물려 씁쓸하기만 하다.

 

 

추가---------------------------------------------------------------

 

적토 (積土)                              적석 (積石)

 

   위의 이미지는 고구려 초기 또는 그 이전의 고분모습이다.

지표 위에 시신을 안치하고 흙으로 덮던 묘장에서 점차 매장물 등 묘실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과 신분,권위적인 요소가 곁들여 대형화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대형과된 고분의 붕괴를 막기 위하거나,북방민족의 토템신앙(우리의 성황당 같은)과 결부되어 그 소재가 돌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표에 묘실을 만들고 그 위에 적토( 현재사용하는'봉토분'의 의미가 아닌) 를 한 고분은 우리나라 백제 신라 고분에도 많다.

(묘장법을 일컫는 말 중에 '봉토분'은 외형이 흙으로 된것을 말하지만, 그것을 다시 묘실이 지표 이상에 위치하느냐, 지하에 완전매장 되느냐의 분류는 하지 않고 있는듯 하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를 적토, 후자의 경우를 봉토로 구분하여 쓴다)

 

 

 장수왕릉(장군총) 의 전체모습         이집트 피라미드의 초기형태인 기단식

 

위의 두 고분은 매우 유사함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하는 것은 묘실이 지표이상에 동일하게 위치하며, 묘실입구가 확연하다.

 

   위 네기의 고분들의 공통점은 묘실이 지표, 또는 그 이상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인데,

함양, 서안지역의 장방형 고분들과 고구려,또는 그 이전 시대의 '적총'과의 연결고리를 의심하는 것은 피라미드 형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총=지표이상에 묘실위치=묘실을 보호하기 위한 외형유지 필요(돌,전돌,진흙벽돌 등)

봉토(적토가 아닌)=지하에 묘실위치=지표 이상에 매장된 것이 없으므로 형태유지 불필요.

 

라는 근본적인 묘장 형식에서 유사성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함양,서안 관중평원의 수많은 고분들 중, 적어도 몇기의 대형 피라미드(장방형)고분은 적총으로 여겨지고,대부분은 그 적총을 모방한 형태들이 아닌가 한다.

 

   고대 한(漢)족의 묘장문화 중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왕릉이라 할지라도 전혀 석재(石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석실을 조성하지 않고,목곽(木槨)으로 내부공간을 만들어 완전 매장하고, 또 흙만을 사용하여 봉토하고 봉토보호를 위해 작은나무들을 심는  형태이다.

신분에 따라 목곽의 겹이 다른 듯, 최고 아홉겹에 이르는 고분이 발굴되기도 했다.

 

 

맺음.

 

   관중평원(함양,서안)장방형 봉토분은 한나라시대 것이라고 이미 몇몇을 공개하고 있지만,

더 많은 수가 비밀에 쌓여 있고,적석총이라고 예상되는 것들은 더욱 그렇다.

현재까지 밝혀진 내용만으로는 한나라 능들보다 뒤늦게 만들어진 장수왕릉(장군총)이 한나라 왕릉들을 모방,계승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할 수 있지만.

서한과 고구려의 관계,그리고 위치를 생각해 볼 때, 고구려가 서한의 묘장문화를 받아 들인 것이라고 볼 이유는 털끗만큼도 없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서한시대 이전에 공통된 묘장문화를 받아 들이는 계기가 두 지역간에 있었으리라는 방향설정도 있을 수 있는것이다.

 

   어떤 시대든 시대는 시작과 단절이 있기 마련이다.

화하족이 서남방에서 올라와 서한을 세워 서안의 주인이 된것은 B.C202년 부터이고 존속기간은 214년 간인데, 반파에서 발견된 앙소문화 유적은 연대가 최고 7000년 넘는다.

이 문화는 아직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동이문화와는 이질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화하족의 문화도 아닌 것이다.

그럼,한나라 이전 5000여년 동안 이 지역의 주인들은 누구였을까? 

 

   서한(西漢)에 의해 멸망한 진(秦)과 그 전의 상(은),주(周)와 전설의 하나라 밖에는 밝혀진 게 없고,

그 기간도 모두 합쳐 1600년 이내이며, 이마저도 거의 동이정권으로 밝혀지고 있다.

한 이후로  수(隨)는 진(秦)과 마찬 가지로 2대 밖에 존속되지 않았고, 당나라는 능역을 몽땅 서안 서북쪽 고지대에 조성하였다.

 

   중국정부가 서한시대 무덤이라고 극구 우기는 것은 그들 역사상 서안에 이런 고분유물을 남겼다고 드리 댈  왕조는 눈씻고 봐도 한나라(서한)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한은 200여년 동안 총동원하여 대형만 수십기가 되는 저 거대한 무덤만 만들며 살았단 말인가?

서한시대 최대라는 한무제릉은 과연 그 주인이 한무제인가?

 

   고대로 올라가면 올라 갈 수록, 고구려 이전의 유일대국인 고조선의 동이의 활동영역이 중국 대륙 전체에 걸쳐 있음이 강단사학들이 좋아하는 "실증"으로 드러나고 있고, 신화가 아닌 신화인 단군의 태백산이 바로, 중앙아시아 천산(天山)이라는 다국적어로 된 옛기록도 발견 되었다.

 

   관중평원엔 분명히 적석 거대 피라미드들이 고대로 부터 존재해 왔으며, 상,진,한 등이 점유해 내려오며 그 형태를 흙으로 모방한 것들이 서로 혼재되어 있다.

다시말하면 언뜻 보기엔  동산과 같이 모두 한족식 토총으로 보이지만,진품과 모방물을 각각 축조한 세력의 문화,문명과 연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동서문명의 교차점으로 여겨지는 함양,서안지역의 피라미드형 적총들과 고구려 적총을 연결해 보는 것은 바로 '적총'의 기원 문화,국가를 찿아 보자는 것이고, 고대문명의 두 축인 이집트 이전문명의 동진이냐, 아니면 동이문명의 서진이냐하는

인류문명의 시원을 밝히는 것 까지도 연결되는 것이다.

 

 

--하우스돌프(Hartwig Hausdorf)의 하얀 피라미드는 무릉(茂陵)이다.

   http://blog.daum.net/sabul358/4399090 

 

--장군총과 서안(西安)의 피라미드-(杜陵).

   http://blog.daum.net/sabul358/8529151 




중국 서안의 피라미드(Pyramids). 2006.06.21

blog.daum.net/sabul358/3997763   향고도







[일요미스테리 극장] 중국 서안에 존재하는 피라미드의 실체ㅣ과연 이 피라미드는 어느 시대의 것인가?




 ***  https://youtu.be/HW40dhcG2vw 








서안 피라미드 고조선 문명설

최근 수정 시각:

분류
1. 주장2. 티베트의 피라미드(?)3. 서안의 피라미드(?)
3.1. 중국이 서안 피라미드를 은폐한다?3.2. 고조선과의 연관성(?)
4. 그외5. 결론6. 참고 자료7. 같이 보기

중국 서안한국인조상들이 만든 피라미드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1. 주장[편집]

   이 피라미드는 대략 5000년~6000년 전고조선인이 만든 유적지로 1945년 인근을 비행하던 한 조종사의 촬영에 의해 발견되었다. 훗날 '몰다스프'라는 러시아 과학자가 이 부근에서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를 발견하였고 주변 지역에 100개가 넘는 피라미드군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현재 피라미드는 중국의 공안에 의해서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 학술 조사가 불가능하며 중국에의한 연구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 독일의 고고학자 하우스도르프가 외국인 출입금지 지역을 몰래 잠입하여 피라미드를 발견하였다. 이때 하우스도르프는 'Die weiße Pyramide'(하얀 피라미드)라는 책을 저술하여 피라미드의 존재를 서방에 알리며 비로소 알려졌다. 중국 측에서는 이를 조작이라며 일축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중국에서 36명의 비밀 조사단이 꾸려져 유적을 조사했다. 이때 발굴에 참여한 장문구 씨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문자백김치, 중앙에는 상투 머리를 한 시체까지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동이족 문물이 쏟아져 나오자 발굴단장은 이 유물들이 조선인의 유물임을 깨닫고 자존심이 상하여 철수시켰으며 외부에 알리지 않을 것을 장문구 씨 등에게 협박하였다. 하지만 장문구 씨는 임종 직전에 소신 발언을 하였으며 비로소 중국의 피라미드가 한국의 역사의 일부임이 알려졌다. 장문구 씨의 유언은 인터넷에서도 검색하여 찾아볼 수 있다. 중국 측은 이곳에 나무를 심으며 무덤을 훼손하고 있다.

  후술하지만 당연히 사실과 다른, 서양의 유사 과학자들과 한국의 유사 역사학자들의 억지 주장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이 피라미드의 정체는 티베트의 성산 강린포체 혹은 한무제, 한경제, 소제 등 한나라 황제들의 무덤들이다.

2. 티베트의 피라미드(?)[편집]

   1945년 미국 공군에 소속 된 조종사가 C-54 수송기를 몰고 당시 연합군의 속한 중국군에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중 기계 결함이 발생해 저공 비행을 하던 였는데 이때 티베트에서 피라미드를 목격했다. 제임스 가우스맨은 이를 사진으로 남겼다.

   러시아의 몰다디프 단장은 발굴단을 이끌고 티베트에서 거대한 피라미드군을 발견하였다. 이 피라미드는 외부 요인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근처에는 100여개의 피라미드군들이 존재하였다. 아울러 그곳을 조사한 결과 석조 인간상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주장하는 미군이 저공 비행하였다는 장소는 인도와 중국 사이 티베트 인근으로 추정되지만 어째선지 촬영했다는 사진에는 서안이 찍혀 있다. 이해가 안 된다면 서울을 저공 비행하면서 사진을 찍었더니 강릉에 있는 아파트 단지가 찍혔다고 생각하면 좋다. 티베트 초고대 문명 음모론이 서안 초고대 문명 음모론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사진이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1945년에는 미국 공군(USAF)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몰다디프 단장이 발견했다는 피라미드의 정체는 티베트의 성산인 강린포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산은 티베트 불교에서 수미산으로 간주하여 신성시하며 당연히 피라미드가 아니다. 이 러시아 발굴단은 강린포체를 초고대문명의 흔적일 가능성이 있다며 중국에게 러시아 합동조사반 파견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하였지만 중국 측에서는 자연 현상으로 생긴 산이라고 일축하며 거부하였다. 동이족에 대한 언급은 당연히 없다. 근처에서 발견된 피라미드 1백여 개 또한 자연적인 지질현상 때문에 금자형(金字型)으로 갈라진 암봉일 뿐이다. 이를 두고 중국이 무엇인가 캥기는 게 있어서 막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지만 이 산은 티베트의 성산(聖山)이라서 중국보다는 세계 종교인들의 입김이 더욱 강한 지역이다.

   덧붙여서 이 산은 등반금지 지역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초고대문명 발생지이기 때문에, 혹은 중국이 불리한 역사를 감추기 위해 금지한 것이 아니다. 이 산을 티베트 불교에서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수미산으로, 힌두교에서는 시바가 거주하는 성소로 받아들이는 등, 종교계에서 신성하게 여기기 때문에 입산이 금지되었을 뿐이다. 2001년에 스페인 팀이 중국 측에 등반을 허가받았지만 전세계의 불교와 힌두교 신자들이 강력히 반대하여 불발되었다. 이곳 참고.

   금방 탄로나는 거짓말이기도 하며,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자들은 한나라 황제들의 무덤을 우리나라 역사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요즘은 티베트와 몰다디프를 은근슬쩍 지워버리고 유포하기도 한다.

3. 서안의 피라미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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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도중 미군이 찍었다는 사진으로 주장되는 사진

   우리나라의 유사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학설(?)이지만 당연히 사실이 아니며 이 피라미드들은 2천여 년 전에 만들어진 중국의 한나라 황제들의 무덤이다.

3.1. 중국이 서안 피라미드를 은폐한다?[편집]

   이 황릉들은 항공촬영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인공적으로 조성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주장은 앞서 말한 티베트 피라미드 음모론과 섞여나온 헛소리다.

   중국 측이 카일라스 산, 즉 강린포체 입산을 허락하지 않는 사실과, 하우스도르프가 찍은 한나라 황제들의 황릉을 교묘하게 섞어서 중국 정부가 서안의 피라미드를 은폐한다고 와전된 것이다. 이 해프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우스도르프가 저술하여 1994년에 출판한 '하얀 피라미드(Die Weiße Pyramide)'라는 책을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저자 하르트비히 하우스도르프(Hartwig Hausdorf, 1955~)유사과학에 심취한 독일인 저술가, 음모론에 심취하여 중국이 감추었다는 티베트의 '하얀 피라미드'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정말로 피라미드를 발견하여 사진을 찍고 서양에 알렸는데, 이때 찍은 사진이 바로 서안에 있는 피라미드다. 즉 강린포체를 찾아 헤매다가 착각하고 서안에 있는 한나라 황제들의 무덤을 찍은 것이다.

   하우스도르프는 이때 찍은 한나라 황릉 사진을 들고 음모론을 내세웠다. 이 피라미드들은 외계문명이 만들었던 초고대문명이며 피라미드들이 오리온 성좌 모양으로 배치된 것이 그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이 사람은 중국이 은폐하는 동이족의 문명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라, 외계문명 음모론을 믿고 그 증거를 찾기 위하여 활동한 것이다. 하우스도르프는 한나라 왕릉들뿐만 아니라 마야, 이집트의 피라미드까지도 외계문명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이 이 피라미드를 은폐하는 이유는 이 무덤에서 외계인 시체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애초에 하우스도르프의 피라미드 주장은 유사역사학이 아니라 유사과학이 출발점이었다.[1] 하우스도르프의 저작물들

   이러한 뒷이야기를 알 리 없는 지나가던 유사역사학자들은 이 떡밥을 물고 한나라 황릉이 우리 조상들의 피라미드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박을 하겠다고 이 무덤에 나무를 심는 행위를 중국에서 은폐하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는 사실이 아니냐고 주장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은폐되지 않았다.구글 한무제 무릉 검색결과


파일:茂陵_-_panoramio.jpg
한무제의 무릉(茂陵)


   이 사진은 중국 공안들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본 관광객들도 잘만 다닌다.#1 #2 #3 #4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조작했다고 주장하는데 한국인들도 잘만 다닌다. #5

중국인들도 이 중요한 문물을 은폐할 리 없다. 오히려 열심히 연구하고 열심히 공개하고 했는데, 환빠들이 동이족 조상들의 피라미드라고 주장하던 한경제 양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오히려 한국에 공개하기까지 했다. 강서구 동주민센터 섬서성문물정화특별전안내

   그러면 나무를 왜 심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나무 심기는 중국 측 나름대로 무덤을 조경한 방식일 뿐이다.[2] 중국은 이 무덤의 존재를 감추기는커녕 관광자원으로 잘 활용한다. 단지 근처에 진시황릉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그곳으로 더 많이 갈 뿐이지... 애초에 나무로 무덤을 감출 생각이었다면 산책로를 없애고 단순한 산처럼 보이기 위해 나무를 불규칙하게 배치했을 것이다.

3.2. 고조선과의 연관성(?)[편집]

결론부터 말하면 연관성은 없다.무덤 주인이 고조선을 멸망시켰더는 연관성은 있다.

   장군총과 한무제 무릉 간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서 방추형 계단쌓기는 고구려에만 존재하는 무덤 양식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고유 양식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야 문명치첸 이트사고구려 건축물이라는 주장을 따를 가능성이 아주 높다.[3]

   참고로 이렇게 주장하면 불리한 쪽은 오히려 고구려다. 중국은 전국시대에 이미 방추형 무덤 양식이 존재했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거대해졌다. 만주에는 소규모 적석총만 존재할 뿐이며 그중 가장 거대하다는 장군총도 중국과 비교하면 매우 작다.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이 고맙다고 외칠 만한 주장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고구려 적석총은 그 이름대로 돌을 쌓는 방식(적석)이지만, 이 서안 피라미드라는 무덤은 흙을 쌓아 만든 방식이라서 아주 다르다.

   그리고 이 무덤이 소재한 지역이 고조선 강역과 가깝다는 주장도 있는데 서안은 중국 섬서 성의 중심지이며 고조선의 강역과는 한참 떨어져 있다. 동이족의 강역과 비교해봐도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주장 또한 고조선이 대륙을 지배했다는 주장과 짬뽕된 거짓말이다. 이덕일조차 고조선이 섬서성까지 진출했다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20px-China_Shaanxi.svg.png
<img class='wiki-image' src='//w.namu.la/s/c17519487ac571cc52d2ede6230eafd4c5e96c04373105c798a13dc76825dac3ed7f458a342f1f7e636ad6a91cf937ac50218efa4fc493c21920aac92697044eafe07871eaac162ac969a99a58390398478429ec05b97133b14bf03294eb19a3' alt='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20px-China_Shaanxi.svg.png'>
중국 섬서성
파일:external/pds14.egloos.com/a0107670_497bf972de9d3.jpg
고조선 강역도

고조선 강역에 대한 논란의 자세한 내용해당문서 참고.

   그렇다면 장문구의 증언은 무엇인가?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4]
1963년4월에 우리 고적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 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 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 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 있었고,
도착한 우리 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 것이 대단했어요.

거대한 벽돌 피라밋 지하 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그림,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절구,솥,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 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등이 대량발견 되었습니다.

우리는 난생 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 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 있는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 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 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
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
오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 체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 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 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해 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 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하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당시 발굴요원이었던 장문구(張汶邱)의 임종 전 증언내용...이라고 알려진 글.
  • 중국 측이 은폐하기 시작했다는 시점은 2차 세계대전 시점이라더니 1963년에 비로소 동이족 문물이라고 깨닫는다. 그 전에는 감춘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 저 말을 믿으면 조사 3일 만에 4팀으로 나뉜 발굴단 36명이 유물 18,000여 점을 일일이 작성하였다는 소리가 된다. 따라서 이 증언을 한 사람은 발굴에 대해 잘 모를 가능성이 높다.
  • 주장에 따르면 해당 피라미드가 1960년대에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진시황릉은 1970년대에 발굴되었다. 그럼에도 진시황의 또다른 유물 운운하는가 하면, 아직 찾지도 못한 진시황의 시체와 모습이 똑같은 시체가 존재했다는 서술까지 나온다. 게다가 글쓴이는 무덤의 주인이 상투를 틀었다고 주장하며 은근슬쩍 진시황동이족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데, 화의 관점으로 보면 진시황의 출신지인 진나라는 중국 서쪽에 존재했다. 전국시대(중국) 문서 참고.
  • 중국 문자와 한국 문자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유적지가 5000~6000년 전에 조성되었다는 주장과 완벽하게 반대되는 주장이다. 유사역사학자들은 이때 발견된 문자가 바로 가림토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를 근거로 한자도 우리나라의 문자라고 주장하기도한다. '가림토'라는 존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시하더라도 여러 자료들을 교차검증하면 오류가 발생한다.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은 기원전 1200년경에 처음 등장하였고 환단고기에서는 가림토가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 2181년으로 약 4000년 전이라고 주장한다. 이마저도 가림토의 제작연대가 올라갔다며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3세 단군인 가륵 재위 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이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게 하니'라며 가림토의 제작연대를 아주 정확하게 기록했다. 두 거짓말이 부딪여 헛소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즉 피라미드 조성의 시점을 올려도 너무 많이 올려버렸다. 한자는 커녕 유사역사학에서 주장하는 가림토도 존재하지 않는 시점이다. 결정적으로 환단고기 자체가 불쏘시개에 불과한 위서다.
  • 백김치가 유적에서 발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배추김치를 보존하는 놀라운 기술력은 둘째로 넘기더라도 이 글을 쓴 사람은 고추임진왜란 이후에 비로소 전래된 건 알아도 배추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점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배추의 어원은 백채(白菜)로, 중국 남북조시기(6세기)에 순무를 품종 개량하여 만들어진 채소이기 때문에 결코 5천 년 전의 고대 유적지에서 나올 수 없다. 우리나라 문헌에서도 비로소 고려시대 이후에야 약재로 쓰인다며 처음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배추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시점은 고춧가루가 들어온 시점보다 늦고 그전까지는 서민들은 배추김치를 먹을 엄두조차 못 냈다.
  • 쐐기를 박는 것은 그들이 1945년 혹은 1963년에야 피라미드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주장은 서구 음모론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사실 뒤늦게야 서구의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졌음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학계와 관계없는 대다수 대중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고고학계에서는 이 고분이 한나라 시대 무덤임을 이미 알고 탐험대들을 보냈다. 1914년 학술 보고서
   요즘 새롭게 주장되는 내용 중에는 중국 정부가 뒤늦게 한나라 황제들에게 끼워 맞춘다는 주장도 있는데, 한서를 보면 황제의 사망 시 "葬○陵'라는 식으로 어느 능에서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주변의 마을[5]들이 실제 기록에 부합하는 명칭을 오래 전부터 사용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황제릉마다 황제를 어느 정도는 끼워맞춘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서안 피라미드 고조선 문명설만큼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끼워맞추는 것은 아니다.

환빠의 전략적인 차원에서도 고구려 적석총들보다 시간적으로 빠른 한나라의 황제릉과 연결하는 것은 되려 동북공정이나 냐선일체 등에 부합하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4. 그외[편집]

   현재 음모론자들은 '서안 피라미드'에만 주력하여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고 시도하지만 사실은 위 티베트 피라미드 이외에도 폐기처분된 주장들이 여러가지 있었다.
  • 몽골 피라미드(?)
       이 주장은 김상일의 저서 '인류문명의 기원 한(p. 377)'에서 몽골 피라미드가 존재한다는 주장에서 나왔다. 하지만 해당 부분은 프레드 마이어 쇼터가 저술한 "pyramids of shensi"-Magazine(Downey California, MM< 1985)의 89쪽의 해당 사진을 인용했는데, 해당 책에서 나온 피라미드가 바로 서안 피라미드였다.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로 몽골 피라미드 이야기는 갑자기 사라졌다.
  • 만주 피라미드(?)
       초창기에는 만주에서 5천 년 전에 생성된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서안, 티베트, 몽고에 우리나라 피라미드가 있다고 하는데 정작 우리 활동권이었던 곳에 피라미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는지 들러리로 붙어다니던 양념 같은 주장이었다. 초창기에는 이 주장에 대해서는 어떠한 근거도 내밀지 않았다. 이 주장은 고구려 적석총인 장군총의 연대를 올리려는 목적으로 나온 헛소리인 듯하다.
  • 마야 피라미드(?)
       이 주장은 사실 아직도 남아있다. 발음의 유사성을 두고 상상을 펼친 주장인데, 요약하면 고구려의 유민들이 멕시코로 넘어가서 마야 문명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물론 근거 없는 낭설이다.

5. 결론[편집]

   이 잘못된 주장이 일반인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면서, 유튜브 등지에는 주장을 반박하는 사람을 비정상 내지 매국노로 모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동이족 시절에 한창 날렸으니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자고 주장하지만 동이족이라는 표현은 중화사상의 관점에서 동쪽에 존재했던 이민족들을 가리키는 멸칭이다. 2천 년 후 일본인들이 우리가 쪽발이 시절에 한창 날렸으니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자고 주장한다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설은 거짓이다. 이 주장은 중국 강린포체 은폐설 -> 중국 외계문명 은폐설 -> 중국 동이족문명 은폐설 단계로 이어져 내려오는, 태생부터 이상한 주장이다.

6. 참고 자료[편집]

7. 같이 보기[편집]

[1] 이 피라미드가 외계인의 문명이라는 소리는 미국에서는 유명한 미스테리 떡밥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지만 하우스도르프가 놓친 것이 있었으니, 이미 70년 전에 한나라의 무덤임을 알고 조사단을 파견했다는 학술보고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2] 사진에 보이는 나무는 측백나무다. 중국은 측백나무를 고귀한 나무로 여겨서 고위층들의 무덤에 조경하는 경우가 많다. 명나라 황제 무덤들에도 측백나무로 조경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제갈량의 사당도 측백나무로 조경되어 있다.[3] 실제로 KBS에서 진지하게 주장했던 적이 있다. 즉 이 주장에 긍정한다면 당신은 그들이 파놓은 다른 함정에도 같이 빠지는 것이다.[4] 글의 원문을 그대로 싣기 위해 오타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5] 특히 한나라 황제들의 무덤을 만들 때는 주변에 황제릉을 관리하는 마을까지 새롭게 만들었는데 그 지명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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