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4. 18:18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중국 서안 피라미드 비밀 발굴에 대한 것 ㆍ한국역사바로알기
00:00 05:17 ⊙ 이 다큐도 그낭 맛배기⊙ ⊙이집트문명과 연관성⊙ ⊙ 최초의 항공사진 1945년⊙ ⊙ 오리온 별자리배열⊙ ●서안 피라미드의 발견● ⊙ 서안의 위치 위성사진⊙ 본인(콘스탄틴)은 1999년도에 인터넷에서 西安피라미드를 처음으로 알았읍니다!! 묘한 충격과 호기심이 발동하던 차에 2000년도에 직접 서안을 방문하여 서안구경을 처음하면서 진시왕릉 구경갔다가 차를 대절하여 함양지역을 둘러보았읍니다!! 저런 피라미드가 즐비하게 정말 있었읍니다!! 당시로써는 중국 서안지역의 초행길이고 면밀하게는 둘러보진 못했읍니다!! 그 당시 찍은 사진은 필림카메라로 직접 찍었고 현상해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분실한 것인지 찾질 못하겠읍니다. 대신 비슷한 시기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을 올리겠읍니다!! 제가 이쪽을 둘러본후 느낀 점은 이런 피라미드들이 수 없이 있었읍니다 여기 뿐만이 아니고 서안 동쪽지역으로부터 낙양을 지나 鄭州 쪽으로 가는 열차창 밖 내내 저런 피라밋이 한나절 계속해서 보였읍니다. 중국공안들의 저지같은 것은 없었고 그냥 가면 볼 수도 사진찍을 수도 있읍니다!! ⊙ 서안에서 정주를 지나 낙양 인근까지 피리미드는 있었다⊙ ●중국 한나라 무덤이라 구라치는 중국 당국● 여기보면 무덤인 듯이 망부석이나 양들 석상을 세워놓았는데 모택동 이후에 세워눟은 것이라 한다!! 피라미드 주변에 최근에 만들어 설치한 듯한 깨끗한 표면의 석상들이 듬성듬성 설치되어 있다!! ●한나라시대 경제 무덤의 이름 한양릉(漢陽陵)● 최근에 서안피라미드 중에 허름한 것 하나 골라 중국 당국은 비밀리에 발굴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서안피라미드를 너무 숨기고 있으니 깨름찍해서 인지 그 수 많은 피라미드 중 하나를 골라 발굴하여 공개했고 漢陽陵이라 이름붙히고 박물관도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 그 무덤이름이 한양릉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 아닌가? 조선이 漢나라를 계승해서 수도漢陽이라고 했는데 漢나라 문제는 차차 고찰하기로 한다!! 중국 당국이 서안피라미드를 한나라시대의 무덤으로 만드는 작업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역사공정이 탐원공정(探源工呈)이다!! 일반인들은 동북공정은 알아도 탐원공정은 생소할것이다!! 서안피라미드는 중원탐원공정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안피라미드증에 한섹타를 지정해서 한나라陵園이라 칭한다!! 즐비하게 무덤이름을 붙힌다!! ● 한나라경제의 무덤이라는 한양릉박물관● 수 많은 피라미드 중에 중국당국이 공식적으로 발굴 공개한 피라미드는 딱 2개이다!! 하나는 진시황릉과 또하나는 漢경제 무덤 한양릉 나머지는 언급도 없다!! 중국 中原 지역에서 수많은 피라미드들 중에 공식발굴한 것은 진시왕릉과 漢경제릉이다!! 진시왕릉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부상해서 저도 3번 방문한 적이 있읍니다! 문제는 한나라 경제릉인데 무덤발굴 부장품이나 규모에서는 굉장한데 중국당국에서는 홍보를 별로 하지 않는 느낌이다!! 머리에 정상부에 상투를 하고 있다!! 주로 양꼭두를 매장했다!! 무덤 속의 토용이다! 원래 옷도 있었는데 썩어 없어졌다고 한다!! 무덤봉분 피라미드 하나에 나무심고 해서 왕릉처럼 꾸밈!! 한나라식 건물을 최근에 세움 비석을 세움 西漢 양릉(한양릉)이라고 못박음 처음에는 한양릉이라고 부르다가 조선 한양을 연상시킨다는 여론에 따라 陽陵(양릉)이라고 씀. 한양박물관== 주로 토용을 전시해 놓음 진시왕릉과 비슷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 漢宣帝杜陵이라고 써있었는데 딱 봐도 나타나 듯이 최근 1950년대 쯤 세운 것으로 보인다!!! ⊙한양릉 토용의 복식복원⊙ 이런 복식은 한눈에 조선계 복식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무용총의 장삼과 비슷하다!!⊙ ⊙ 왕의 행렬 재현⊙ ♥탐사보고 분석♥ 1960년대 "장문구"라는 탐사대표단장의 생생한 증언을 통하여 서안피라미드의 주인공의 실체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1963년 비로소 중공정부는 서안피라미드에 대하여 인식하기 시작하여 발굴탐사단을 보낸다! 1950년대는 49년 중공 모택동정부 수립 후에 얼마되지 않아서 경황이 없었고 1950년 한국전쟁에 지원군을 보내 국가적으로 신경쓸 틈이 없어 보인다 또한 1958년에 중공정부의 티벳트침공사태로 50년대 10년간은 아수라장의 중국대륙이었다. 60년대가 시작되어 중공이 안정을 찾은후 에 서안에 발굴탐사단을 보낸 것이다!! 발굴탐사단이 발견한 것은 벽화 여러개의 문자 중에도 한국한글, 조각류 6200 여점 맷돌, 절구, 솥 배추김치(백김치) 청동검 금관 상투머리를한 시신 등 3000여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63년 서안피라미드발굴품들 추정♥ ★백김치★ 몇천년된 피라미드 중에서 백김치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미스테리이다! 어떻게 썩지도 않았을까? 그러나 <피라미드 효과>를 알면 의문을 약간이나마 풀 수 있다!! 피라미드 속에서는 시체도 잘 썩지 않고 음식물도 부패가 잘 안된다는 것이 피라미드효과이다!! ★청동검★ 청동검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청동검은 주로 한반도와 남만주지방에서 발견되는데 특이하게도 서안지역 피라미드안에서 나왔다!! 이것은 청동검은 일개의 생활도구가 아니고 특수한 계급의 神異적인 靈物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남만주와 한반도땅은 청동검이 많이 발견되므로 오히려 서안지역보다도 특이한 땅이라 볼 수 있다!! ★맷돌과 절구★ 맷돌과 절구도 발견 이 도구는 물론 한반도인만의 도구는 아니다. 전유라시아에서 발견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주로 남중국 소수민족들이 사용하고 있다. 운남성지역에서 많이 쓰고 있는데 문제는 중국 한족들은 별로 쓰질 않고있다는데 있다!! ★금관★ 이런 금관도 나왔다!! 이것도 古아시아시대부터 특수한 샤먼계급의 표식이다. 경상도지역에서 발견된다고 신라유물만이 아닌 것이다. 신라시대 이전부터 이런 시베리아 샤먼식 관(冠)은 역사가 오랜된 것이다!! ★한글형태의 문자★ 이런 가림토문자와 같은 한국식문자가 나왔다는 것은 소위 훈민정음의 역사는 무려 10000년 전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흑피옥시대에도 한글과 같은 문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번 본학회 강연회에서도 증명되다시피 흑피옥시대인 1만년전 유물에도 한글가림토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가림토문자류의 한글문자가 서안피라미드 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상투머리를 한 시신★ 몇 천년된 것이 되어서 나온 시신이면 시신은 없고 유골이 있어야 마땅하나 시신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여기서 나온 것은 시신이 맞다!! 즉 "미이라" 이다!! 피라미드효과 때문에 시신은 유골로 변하지 않고 미이라로 발견된 완곡한 표현이 "시신"이다!! 2800여년전의 신강성출토 미이라 <비교용사진> 이런 상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역시 머리카락이 부패되지 않은 것을 보면 미이라가 틀림없다!! 조선전통상투머리 타클라마칸 출토 미이라 누란의 미녀 미이라 상투머리도 凡유라시아적인 풍습이다 그러나 중국 한족은 상투를 하지 않는다!! ★벽화★ 63년 당시 서안피라미드에서 발견된 벽화가 어떤 것이 었나는 전해지질 않는다!! 그러나 최근 중국당국이 서안피라미드를 비밀리에 발굴해 일부가 유포된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을 통하여 당시 발견된 벽화형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서안에서 발굴조사된 피라미드의 벽화☆ 전체적인 복식의 모습은 조선전통의 투피스식 한복을 연상케 한다!! 또다른 벽화 삼국시대 쯤의 사극에서 많이 나오는 복식과 머리모양이다. ☆사극 연계소문에서 나오는 복식과 머리모양☆ ★결론★ 이상 63년도 당시의 발굴에 참여했다가 임종 전에 진실을 토로한 故 장문구씨의 증언을 토대로 발견된 유물들을 대강 살펴보았다 이 유물들을 토대로 피라미드 축조연대와 축조 주인공을 살펴보면 축조연대는 대략 5000년 전 이상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여기에 나오는 유품들 중 청동기가 나왔다고 볼 때 이런 청동기는 4~5000년전 것으로 대략 기존학계에서도 짐작하기 때문이다!! 4000년 이후에는 청동기유물이 점차로 없어진다. 왜냐하면 청동기의 주성분인 "주석"이 전세계적으로 고갈되고 철기시대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서안피라미드의 겉에 입혀진 표피를 제거한 모습이다 이러한 석조건축의 바탕 위에 후대에 표피를 입혔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표피를 입힌 후에도 수쳔년 동안 저렇게 각잡힌 모습을 유지했던 것도 대단한 기술이다!! 아마도 超과학적인 기법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축조주인공이 누구냐? 는것은 당시 장문구씨의 증언에 답이 있다 그 답을 직접들어 보면서 이번장을 마친다!!! "이 유적은 우리 짱꼴라유적이 아니야!! 한족문명 以前에 朝鮮유적이야" |
중국서안 피라미드 비밀 발굴에 대한 것 2018.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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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안에 위치한 피라미드를 공개하지 않는 중국정부 시사
cafe.daum.net/kse17/IUt2/635 김천서부17
중국내에 있는 피라미드군 고대 한민족 역사(조선시대 및 그 이전)
중국내에 있는 피라미드군을 구글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아래 하단의 흰부분 있는곳이 중국 섬서성 서안공항입니다. 서안 공항 주위에 구글에서 찾아본 피라미드가 약 30여개 정도 됩니다. 그런데 중국 자료에 의하면 이곳 주위에는 약 100여개의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이 피라미드들을 위구르의 피라미드라고 명명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를 찾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중국 당국이 진시황묘라고 하는 피라미드가 이곳 100여개의 피라미드군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이집트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가 밑변 227m, 높이 146m 이지만, 진시황묘라고 일컫는 피라미드는 밑면 360m, 높이 548m입니다. 그리고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보다 약 200여년이 앞선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 피라미드군이 모여 있는 곳을 봅니다. 이 피라미드들이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의 크기와 비슷합니다. 다음은 중국 티벳에 있는 지구상 최고(最高)의 피라미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높이 6700m의 피라미드, 인도어로는 카일라스(kailas)봉.... 전 세계적으로 가장 신성시 여기는 곳 중의 하나로 등반이 허용되지 않는곳, 그러나 오래전 러시아 탐험가들이 이곳을 탐험하면서 이곳 티벳주위에 약 100여개의 작은 피라미드중에서 이곳 카일라스가 제왕적인 피라미드이며, 만약 눈이 녹으면 우주로 가는 길의 문이 지구상에서 이곳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내에 수많은 피라미드가 존재하고, 또한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피라미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계에서는 그 가치를 충분히 검증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학적 가치를 알지 못하면서도 현재의 과학이 최고인양 우겨대는 것이 너무나도 우스운 과학 지식이라고 봅니다. 제가 20여년전에 서안의 진시황묘를 올라가고, 그곳에서 가까운 병마용을 구경하였을때, 병마용의 형상은 군대가 황제에게 출병을 아뢰는 군대 조직의 형상이었습니다. 상투를 튼 관료들과 장군들과 보병까지........ 어쩌면 이런 형상은 고조선보다도 더 이전의 모습이라고 칭해야 할까요? 지금의 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칼날, 저 칼날에 책을 대면 책 한권이 그대로 베어져버린다는 청동기의 문화(?), 모든게 어거지 춘향의 역사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 수차례 홀로 서안을 방문하면서, 주위의 산들을 등반하고, 우리 한민족의 역사 중심지라고 생각하며, 거닐었던 긴 세월......우리 선조들이 대륙의 주인으로 살았던 수천년의 세월..... |
중국내에 있는 피라미드군 2017.07.12
blog.daum.net/bdseo1443/587 치우천황 연대기
중국 서안의 피라미드(Pyramids). 중국,서안,피라미드
구글어스로 중국 섬서성 서안(Xi'an) 지방을 살피다가 발견한 거대한 피라미드(Pyramids).
(사진 확대=클릭.스크롤하면 하단에 좌표)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1.jpg
서안 남동쪽 Dizhai (적채;狄寨 )라는 곳이다.(그 동안 알려져온 서안의 서남쪽,남쪽이 아니다)
협곡과 절벽이 외워 싼 평원지대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2.jpg
예사롭지 않은 지형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것 같다.주위에는 특이시설들이 서너곳 보인다.
( 연구시설?). 마치 요새같기도 하고, 성 같기도 하고.
항공기를 이용하기 전에는 서안시내 어디서도 눈에 띄지 않을것 같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3.jpg
전체가 반석처럼 높게 올라 온 지형이다.
중앙의 백색 시설의 하단에 있는 타원형 축구장이 피라미드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4.jpg
3번 사진의 좌측 피라미드. 엄청나다.
진입도로를 만들고 시설(정문?)을 한것으로 보아 관리를 하긴 하는 모양이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5.jpg
3번사진의 우측 피라미드.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현재로 선 이 두개의 피라미드에 대한 정보가 없다.
중국 서안 (Xi'an)의 Dizhai 피라미드-5의확대
석재로 들여쌓기 한 모습이 계단처럼 뚜렷하다.
흙무덤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서안 Banpocun피라미드-1
중앙에서 오른쪽이 위의 Dizhai (적채;狄寨 )지역이고, 중앙부 부터 왼쪽이 Banpocun (반파,반포) 라는 곳으로. 7000년전의 유물이 다량 발굴된 앙소문화,고대 유적지이다.
A지역은 피라미드군 지역.
서안 Banpocun피라미드(Pyramids)-2
바로 위 사진의 A지역 부분이다.
1945년 미 공군 조종사가 촬영했다는 그 지역이고,
오리온 별자리 모양을 닮았다는 피라미드군이다.
현재까지는 상태가 대체로 양호하지만 작은 고분들은 과거 사진과 비교해 볼 때,
그 선명한 형태가 많이 변형,훼손된듯 하다.
과거 미 공군이 촬영한 항공사진과 비교.
그동안 서안(Xi'an)의 피라미드 이미지들은 모두 수십년 전의 것이거나, 그 진위를 알 수 없는
것들이었으나 구글어스로 몇번의 시도 끝에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서안의 피라미드라고 넷상에 나돈 여러 이미지 (모양새만 피라미드형인 흙무덤들도 있다) 들은1945년 미 공군이 촬영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함양(Xianyang) 북쪽에 동서로 은하수 처럼 깔린 무수히 많은 피라미드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적어도 서안의 남,서남,동남쪽에서는 수십년 동안 신뢰성있게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구글어스 피라미드 탐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중국의 피라미드형 고분은 두 종류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한 종류는 이집트형 처럼 최상단이 뾰족한 모양이고, 다른 한 종류는 만주의 고구려 장군총이나 마야 피라미드와 같이 상단의 각뿔이 잘려나간 듯한 형태인데, 이 두 종류는 다시 들여쌓기가 분명한 것과 단지 표면을 진흙으로 다져놓은 듯한 민 피라미드로 구별된다.
물론 형태가 뚜렷한 큰 규모의 것들을 비교한 결과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연구의 여지가 있다.
아래 사진은 위의 서안 Banpocun피라미드 배열과 기타지역.오리온좌의 삼태성을 비교한 것이다.
1.서안 피라미드 현재 2.1945년 촬영당시 3.이집트 피라미드 4.마야 피라미드 5.오리온좌
(Banpocun 지역)
규모의 대소를 불문하고 서안지역의 고분들은 대체로 양호하나. 함양지역의 것들은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거나 그 흔적만 (위장? 변형?)보이는 것들도 여럿 발견된다.
상당수의 것들이 개발로 인한 도로,주거시설,방대한 산업시설들에 채이고 지반용 복토로 깎기고, 무차별적으로 파헤쳐 나가는듯해 안타깝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의 평원지대 (농경지)라 매립용 토사 구하기가 쉽지 않을테니 더욱 그렇다.
이대로 가다 간 수년내에 상당수가 소리 소문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 라는 생각이 든다.
서안,함양지역은 확인된 것만해도 60-70기가 훌쩍 넘는데 (그 중 20여기 정도가 대형)
근대화 이후, 필요불필요를 논하지 않더라도 상당수가 발굴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함양,서안 모두 개방 이후 조성된 듯한 도로,주거시설,경지 등이 고분군 일대를 잠식해 가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과 중국인의 속성을 생각컨데,하늘의 눈인 위성이 내려다 보는 오늘날 까지도 유물공개나 공개발굴은 커녕. 존재마저 쉬쉬 하는 것은 그들의 기를 무참히 꺾는 뭔가가 있음이 자명하다.
나라와 민족을 따지기 전에 이것은 인류 최고,최대의 유물이 아닌가?
얼마전 발견되었다는 네이멍구 Chifeng (하가점, 홍산문화지) 인근지역의 피라미드형 고분은 발굴한 건지 어쩐 건진 모르지만
상당량 유물수습까지 했다고 발표해 놓고 사진 한 장 공개를 안하고 있다.
5,500년 전 인류 최고의 것이라고 하면서도.....
좌표: 34 23'51.66" N 108 42'43.49" E
위의 이미지는 함양과 함양공항의 중간지점 에 위치하고 있는 피라미드다.
기단이 뚜렷하여 적석총(돌,전돌,흙별돌)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나무를 열을 지어 심어서 계단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기는 하지만.
이 고분 주위의 다른 진흙 피라미드,함양북서쪽 건능이나 진시황능이라는 것들 처럼 흙으로 형태만 갖춘 민 피라미드가 아니라, 고구려 장군총과 같은 들여쌓기 공법으로 만들어진 적석총이다.
이 고분은 발굴 되었는가?
연대 측정은?
고분의 유물과 실제 주인은?
위의 고분을 보고 한족식 봉토분(흙무덤)이라고 하는 사람은 정신병자일 것이다.
함양 서안지역의 규모가 큰 피라미드형 고분들 중, 위와 같이 뚜렷하게 적석총이라고 판단되어지는 피라미드(장방형)는 많지않다.
그러나 이는 서안 함양 지역의 여러 장방형 고분 형태 중 가장 오래 된 듯 하면서도 앞선 문화,문명이 축조한 것으로 보여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이다.
장군총과의 유사성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고,
이 지역의 수많은 장방형 토총고분들은 이러한 적석총을 후대에 모방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기천년을 버텨 온, 말 그대로 인류 최고의 유적이다.
그런데, 중국정부는 원형관리는 물론 공개조차 하지 않고있다.
서안 Orion좌 모양의 Pyramid 중 일부.
위의 이미지는 Banpocun(반파) 지역 오리온좌 모양의 고분군 중, 큰 순서대로 첫번 째와
두번 째 고분이다.
그런데 나란히 있는 규모가 비슷한 두 고분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두 고분의 축조 연대가 상당기간 차이가 나거나,
인위적으로 한 쪽을 변형시킨 결과일 것이다.
우측고분의 형태에 복토를 하여 좌측처럼 변형되었을 수도 있다,
좌측고분에 나무심기가 진행 중인 것으로 보아 후자의 경우가 설득력이 있다,
그 이유는 뭘까?
왜 중국정부는 원형대로 보존 관리하지 않는걸까?
이곳 뿐만이 아니다.
여러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 주위엔 어김없이 무수히 많은 나무를 재배하는 모습도 한결같다.
진입로를 정상까지 만들고, 그 양편에 석물들을 나열하고,정상에 누각을 세우고,
초입에 문을 세우고....
화족식 고분형태로 변해가는 것이다.
수년 내에 서안 함양에서는 우측과 같은 형태의 들여쌓기 장방형 고분은
더 이상 보기 어려울 것이다.
동북공정과 맞물려 씁쓸하기만 하다.
추가---------------------------------------------------------------
적토 (積土) 적석 (積石)
위의 이미지는 고구려 초기 또는 그 이전의 고분모습이다.
지표 위에 시신을 안치하고 흙으로 덮던 묘장에서 점차 매장물 등 묘실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과 신분,권위적인 요소가 곁들여 대형화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대형과된 고분의 붕괴를 막기 위하거나,북방민족의 토템신앙(우리의 성황당 같은)과 결부되어 그 소재가 돌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표에 묘실을 만들고 그 위에 적토( 현재사용하는'봉토분'의 의미가 아닌) 를 한 고분은 우리나라 백제 신라 고분에도 많다.
(묘장법을 일컫는 말 중에 '봉토분'은 외형이 흙으로 된것을 말하지만, 그것을 다시 묘실이 지표 이상에 위치하느냐, 지하에 완전매장 되느냐의 분류는 하지 않고 있는듯 하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를 적토, 후자의 경우를 봉토로 구분하여 쓴다)
장수왕릉(장군총) 의 전체모습 이집트 피라미드의 초기형태인 기단식
위의 두 고분은 매우 유사함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하는 것은 묘실이 지표이상에 동일하게 위치하며, 묘실입구가 확연하다.
위 네기의 고분들의 공통점은 묘실이 지표, 또는 그 이상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인데,
함양, 서안지역의 장방형 고분들과 고구려,또는 그 이전 시대의 '적총'과의 연결고리를 의심하는 것은 피라미드 형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총=지표이상에 묘실위치=묘실을 보호하기 위한 외형유지 필요(돌,전돌,진흙벽돌 등)
봉토(적토가 아닌)=지하에 묘실위치=지표 이상에 매장된 것이 없으므로 형태유지 불필요.
라는 근본적인 묘장 형식에서 유사성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함양,서안 관중평원의 수많은 고분들 중, 적어도 몇기의 대형 피라미드(장방형)고분은 적총으로 여겨지고,대부분은 그 적총을 모방한 형태들이 아닌가 한다.
고대 한(漢)족의 묘장문화 중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왕릉이라 할지라도 전혀 석재(石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석실을 조성하지 않고,목곽(木槨)으로 내부공간을 만들어 완전 매장하고, 또 흙만을 사용하여 봉토하고 봉토보호를 위해 작은나무들을 심는 형태이다.
신분에 따라 목곽의 겹이 다른 듯, 최고 아홉겹에 이르는 고분이 발굴되기도 했다.
맺음.
관중평원(함양,서안)의 장방형 봉토분은 한나라시대 것이라고 이미 몇몇을 공개하고 있지만,
더 많은 수가 비밀에 쌓여 있고,적석총이라고 예상되는 것들은 더욱 그렇다.
현재까지 밝혀진 내용만으로는 한나라 능들보다 뒤늦게 만들어진 장수왕릉(장군총)이 한나라 왕릉들을 모방,계승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할 수 있지만.
서한과 고구려의 관계,그리고 위치를 생각해 볼 때, 고구려가 서한의 묘장문화를 받아 들인 것이라고 볼 이유는 털끗만큼도 없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서한시대 이전에 공통된 묘장문화를 받아 들이는 계기가 두 지역간에 있었으리라는 방향설정도 있을 수 있는것이다.
어떤 시대든 시대는 시작과 단절이 있기 마련이다.
화하족이 서남방에서 올라와 서한을 세워 서안의 주인이 된것은 B.C202년 부터이고 존속기간은 214년 간인데, 반파에서 발견된 앙소문화 유적은 연대가 최고 7000년을 넘는다.
이 문화는 아직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동이문화와는 이질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화하족의 문화도 아닌 것이다.
그럼,한나라 이전 5000여년 동안 이 지역의 주인들은 누구였을까?
서한(西漢)에 의해 멸망한 진(秦)과 그 전의 상(은),주(周)와 전설의 하나라 밖에는 밝혀진 게 없고,
그 기간도 모두 합쳐 1600년 이내이며, 이마저도 거의 동이정권으로 밝혀지고 있다.
한 이후로 수(隨)는 진(秦)과 마찬 가지로 2대 밖에 존속되지 않았고, 당나라는 능역을 몽땅 서안 서북쪽 고지대에 조성하였다.
중국정부가 서한시대 무덤이라고 극구 우기는 것은 그들 역사상 서안에 이런 고분유물을 남겼다고 드리 댈 왕조는 눈씻고 봐도 한나라(서한)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한은 200여년 동안 총동원하여 대형만 수십기가 되는 저 거대한 무덤만 만들며 살았단 말인가?
서한시대 최대라는 한무제릉은 과연 그 주인이 한무제인가?
고대로 올라가면 올라 갈 수록, 고구려 이전의 유일대국인 고조선의 동이의 활동영역이 중국 대륙 전체에 걸쳐 있음이 강단사학들이 좋아하는 "실증"으로 드러나고 있고, 신화가 아닌 신화인 단군의 태백산이 바로, 중앙아시아 천산(天山)이라는 다국적어로 된 옛기록도 발견 되었다.
관중평원엔 분명히 적석 거대 피라미드들이 고대로 부터 존재해 왔으며, 상,진,한 등이 점유해 내려오며 그 형태를 흙으로 모방한 것들이 서로 혼재되어 있다.
다시말하면 언뜻 보기엔 동산과 같이 모두 한족식 토총으로 보이지만,진품과 모방물을 각각 축조한 세력의 문화,문명과 연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동서문명의 교차점으로 여겨지는 함양,서안지역의 피라미드형 적총들과 고구려 적총을 연결해 보는 것은 바로 '적총'의 기원 문화,국가를 찿아 보자는 것이고, 고대문명의 두 축인 이집트 이전문명의 동진이냐, 아니면 동이문명의 서진이냐하는
인류문명의 시원을 밝히는 것 까지도 연결되는 것이다.
--하우스돌프(Hartwig Hausdorf)의 하얀 피라미드는 무릉(茂陵)이다.
http://blog.daum.net/sabul358/4399090
--장군총과 서안(西安)의 피라미드-(杜陵).
http://blog.daum.net/sabul358/8529151
중국 서안의 피라미드(Pyramids). 2006.06.21
blog.daum.net/sabul358/3997763 향고도
[일요미스테리 극장] 중국 서안에 존재하는 피라미드의 실체ㅣ과연 이 피라미드는 어느 시대의 것인가?
*** https://youtu.be/HW40dhcG2vw
최근 수정 시각:
1. 주장[편집]
이 피라미드는 대략 5000년~6000년 전에 고조선인이 만든 유적지로 1945년 인근을 비행하던 한 조종사의 촬영에 의해 발견되었다. 훗날 '몰다스프'라는 러시아 과학자가 이 부근에서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를 발견하였고 주변 지역에 100개가 넘는 피라미드군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현재 피라미드는 중국의 공안에 의해서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 학술 조사가 불가능하며 중국에의한 연구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 독일의 고고학자 하우스도르프가 외국인 출입금지 지역을 몰래 잠입하여 피라미드를 발견하였다. 이때 하우스도르프는 'Die weiße Pyramide'(하얀 피라미드)라는 책을 저술하여 피라미드의 존재를 서방에 알리며 비로소 알려졌다. 중국 측에서는 이를 조작이라며 일축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중국에서 36명의 비밀 조사단이 꾸려져 유적을 조사했다. 이때 발굴에 참여한 장문구 씨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문자와 백김치, 중앙에는 상투 머리를 한 시체까지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동이족 문물이 쏟아져 나오자 발굴단장은 이 유물들이 조선인의 유물임을 깨닫고 자존심이 상하여 철수시켰으며 외부에 알리지 않을 것을 장문구 씨 등에게 협박하였다. 하지만 장문구 씨는 임종 직전에 소신 발언을 하였으며 비로소 중국의 피라미드가 한국의 역사의 일부임이 알려졌다. 장문구 씨의 유언은 인터넷에서도 검색하여 찾아볼 수 있다. 중국 측은 이곳에 나무를 심으며 무덤을 훼손하고 있다.
2. 티베트의 피라미드(?)[편집]
1945년 미국 공군에 소속 된 조종사가 C-54 수송기를 몰고 당시 연합군의 속한 중국군에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중 기계 결함이 발생해 저공 비행을 하던 였는데 이때 티베트에서 피라미드를 목격했다. 제임스 가우스맨은 이를 사진으로 남겼다.
러시아의 몰다디프 단장은 발굴단을 이끌고 티베트에서 거대한 피라미드군을 발견하였다. 이 피라미드는 외부 요인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근처에는 100여개의 피라미드군들이 존재하였다. 아울러 그곳을 조사한 결과 석조 인간상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강린포체의 북쪽 사면. 우리나라에는 카일라스산으로 알려졌다. |
그리고 몰다디프 단장이 발견했다는 피라미드의 정체는 티베트의 성산인 강린포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산은 티베트 불교에서 수미산으로 간주하여 신성시하며 당연히 피라미드가 아니다. 이 러시아 발굴단은 강린포체를 초고대문명의 흔적일 가능성이 있다며 중국에게 러시아 합동조사반 파견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하였지만 중국 측에서는 자연 현상으로 생긴 산이라고 일축하며 거부하였다.
덧붙여서 이 산은 등반금지 지역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초고대문명 발생지이기 때문에, 혹은 중국이 불리한 역사를 감추기 위해 금지한 것이 아니다. 이 산을 티베트 불교에서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수미산으로, 힌두교에서는 시바가 거주하는 성소로 받아들이는 등, 종교계에서 신성하게 여기기 때문에 입산이 금지되었을 뿐이다. 2001년에 스페인 팀이 중국 측에 등반을 허가받았지만 전세계의 불교와 힌두교 신자들이 강력히 반대하여 불발되었다. 이곳 참고.
금방 탄로나는 거짓말이기도 하며,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자들은 한나라 황제들의 무덤을 우리나라 역사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요즘은 티베트와 몰다디프를 은근슬쩍 지워버리고 유포하기도 한다.
3. 서안의 피라미드(?)[편집]
3.1. 중국이 서안 피라미드를 은폐한다?[편집]
중국 측이 카일라스 산, 즉 강린포체 입산을 허락하지 않는 사실과, 하우스도르프가 찍은 한나라 황제들의 황릉을 교묘하게 섞어서 중국 정부가 서안의 피라미드를 은폐한다고 와전된 것이다. 이 해프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우스도르프가 저술하여 1994년에 출판한 '하얀 피라미드(Die Weiße Pyramide)'라는 책을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저자 하르트비히 하우스도르프(Hartwig Hausdorf, 1955~)는 유사과학에 심취한 독일인 저술가로, 음모론에 심취하여 중국이 감추었다는 티베트의 '하얀 피라미드'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정말로 피라미드를 발견하여 사진을 찍고 서양에 알렸는데, 이때 찍은 사진이 바로 서안에 있는 피라미드다. 즉 강린포체를 찾아 헤매다가 착각하고 서안에 있는 한나라 황제들의 무덤을 찍은 것이다.
하우스도르프는 이때 찍은 한나라 황릉 사진을 들고 음모론을 내세웠다. 이 피라미드들은 외계문명이 만들었던 초고대문명이며 피라미드들이 오리온 성좌 모양으로 배치된 것이 그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이 사람은 중국이 은폐하는 동이족의 문명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라, 외계문명 음모론을 믿고 그 증거를 찾기 위하여 활동한 것이다. 하우스도르프는 한나라 왕릉들뿐만 아니라 마야, 이집트의 피라미드까지도 외계문명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이 이 피라미드를 은폐하는 이유는 이 무덤에서 외계인 시체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애초에 하우스도르프의 피라미드 주장은 유사역사학이 아니라 유사과학이 출발점이었다.[1] 하우스도르프의 저작물들
이러한 뒷이야기를 알 리 없는 지나가던 유사역사학자들은 이 떡밥을 물고 한나라 황릉이 우리 조상들의 피라미드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박을 하겠다고 이 무덤에 나무를 심는 행위를 중국에서 은폐하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는 사실이 아니냐고 주장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은폐되지 않았다.구글 한무제 무릉 검색결과
한무제의 무릉(茂陵) |
중국인들도 이 중요한 문물을 은폐할 리 없다. 오히려 열심히 연구하고 열심히 공개하고 했는데, 환빠들이 동이족 조상들의 피라미드라고 주장하던 한경제 양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오히려 한국에 공개하기까지 했다. 강서구 동주민센터 섬서성문물정화특별전안내
그러면 나무를 왜 심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나무 심기는 중국 측 나름대로 무덤을 조경한 방식일 뿐이다.[2] 중국은 이 무덤의 존재를 감추기는커녕 관광자원으로 잘 활용한다. 단지 근처에 진시황릉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그곳으로 더 많이 갈 뿐이지... 애초에 나무로 무덤을 감출 생각이었다면 산책로를 없애고 단순한 산처럼 보이기 위해 나무를 불규칙하게 배치했을 것이다.
3.2. 고조선과의 연관성(?)[편집]
장군총과 한무제 무릉 간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서 방추형 계단쌓기는 고구려에만 존재하는 무덤 양식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고유 양식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야 문명의 치첸 이트사도 고구려 건축물이라는 주장을 따를 가능성이 아주 높다.[3]
참고로 이렇게 주장하면 불리한 쪽은 오히려 고구려다. 중국은 전국시대에 이미 방추형 무덤 양식이 존재했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거대해졌다. 만주에는 소규모 적석총만 존재할 뿐이며 그중 가장 거대하다는 장군총도 중국과 비교하면 매우 작다.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이 고맙다고 외칠 만한 주장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고구려 적석총은 그 이름대로 돌을 쌓는 방식(적석)이지만, 이 서안 피라미드라는 무덤은 흙을 쌓아 만든 방식이라서 아주 다르다.
그리고 이 무덤이 소재한 지역이 고조선 강역과 가깝다는 주장도 있는데 서안은 중국 섬서 성의 중심지이며 고조선의 강역과는 한참 떨어져 있다. 동이족의 강역과 비교해봐도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주장 또한 고조선이 대륙을 지배했다는 주장과 짬뽕된 거짓말이다. 이덕일조차 고조선이 섬서성까지 진출했다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img class='wiki-image' src='//w.namu.la/s/c17519487ac571cc52d2ede6230eafd4c5e96c04373105c798a13dc76825dac3ed7f458a342f1f7e636ad6a91cf937ac50218efa4fc493c21920aac92697044eafe07871eaac162ac969a99a58390398478429ec05b97133b14bf03294eb19a3' alt='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20px-China_Shaanxi.svg.png'> | ||
중국 섬서성 | ||
고조선 강역도 |
1963년4월에 우리 고적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 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 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 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 있었고,
도착한 우리 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 것이 대단했어요.
거대한 벽돌 피라밋 지하 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그림,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절구,솥,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 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등이 대량발견 되었습니다.
우리는 난생 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 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 있는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 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 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
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
오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 체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 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 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해 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 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하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당시 발굴요원이었던 장문구(張汶邱)의 임종 전 증언내용...이라고 알려진 글.
- 저 말을 믿으면 조사 3일 만에 4팀으로 나뉜 발굴단 36명이 유물 18,000여 점을 일일이 작성하였다는 소리가 된다. 따라서 이 증언을 한 사람은 발굴에 대해 잘 모를 가능성이 높다.
- 중국 문자와 한국 문자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유적지가 5000~6000년 전에 조성되었다는 주장과 완벽하게 반대되는 주장이다. 유사역사학자들은 이때 발견된 문자가 바로 가림토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를 근거로 한자도 우리나라의 문자라고 주장하기도한다. '가림토'라는 존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시하더라도 여러 자료들을 교차검증하면 오류가 발생한다.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은 기원전 1200년경에 처음 등장하였고 환단고기에서는 가림토가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 2181년으로 약 4000년 전이라고 주장한다. 이마저도 가림토의 제작연대가 올라갔다며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3세 단군인 가륵 재위 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이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게 하니'라며 가림토의 제작연대를 아주 정확하게 기록했다. 두 거짓말이 부딪여 헛소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즉 피라미드 조성의 시점을 올려도 너무 많이 올려버렸다. 한자는 커녕 유사역사학에서 주장하는 가림토도 존재하지 않는 시점이다. 결정적으로 환단고기 자체가 불쏘시개에 불과한 위서다.
- 백김치가 유적에서 발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배추김치를 보존하는 놀라운 기술력은 둘째로 넘기더라도이 글을 쓴 사람은 고추가 임진왜란 이후에 비로소 전래된 건 알아도 배추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점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배추의 어원은 백채(白菜)로, 중국 남북조시기(6세기)에 순무를 품종 개량하여 만들어진 채소이기 때문에 결코 5천 년 전의 고대 유적지에서 나올 수 없다. 우리나라 문헌에서도 비로소 고려시대 이후에야 약재로 쓰인다며 처음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배추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시점은 고춧가루가 들어온 시점보다 늦고 그전까지는 서민들은 배추김치를 먹을 엄두조차 못 냈다.
- 쐐기를 박는 것은 그들이 1945년 혹은 1963년에야 피라미드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주장은 서구 음모론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사실 뒤늦게야 서구의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졌음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학계와 관계없는 대다수 대중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고고학계에서는 이 고분이 한나라 시대 무덤임을 이미 알고 탐험대들을 보냈다. 1914년 학술 보고서
환빠의 전략적인 차원에서도 고구려 적석총들보다 시간적으로 빠른 한나라의 황제릉과 연결하는 것은 되려 동북공정이나 냐선일체 등에 부합하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4. 그외[편집]
- 몽골 피라미드(?)
이 주장은 김상일의 저서 '인류문명의 기원 한(p. 377)'에서 몽골 피라미드가 존재한다는 주장에서 나왔다. 하지만 해당 부분은 프레드 마이어 쇼터가 저술한 "pyramids of shensi"-Magazine(Downey California, MM< 1985)의 89쪽의 해당 사진을 인용했는데, 해당 책에서 나온 피라미드가 바로 서안 피라미드였다.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로 몽골 피라미드 이야기는 갑자기 사라졌다.
- 만주 피라미드(?)
초창기에는 만주에서 5천 년 전에 생성된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서안, 티베트, 몽고에 우리나라 피라미드가 있다고 하는데 정작 우리 활동권이었던 곳에 피라미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는지 들러리로 붙어다니던 양념 같은 주장이었다. 초창기에는 이 주장에 대해서는 어떠한 근거도 내밀지 않았다. 이 주장은 고구려 적석총인 장군총의 연대를 올리려는 목적으로 나온 헛소리인 듯하다.
5. 결론[편집]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설은 거짓이다. 이 주장은 중국 강린포체 은폐설 -> 중국 외계문명 은폐설 -> 중국 동이족문명 은폐설 단계로 이어져 내려오는, 태생부터 이상한 주장이다.
6. 참고 자료[편집]
7. 같이 보기[편집]
서안 피라미드 고조선 문명설 - 나무위키
namu.wiki/w/서안 피라미드 고조선 문명설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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