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이야기> (25) 일위도강(一葦渡江) 外

2019. 7. 21. 13:08차 이야기



<달마이야기> (25) 일위도강(一葦渡江)| 불교도서 함께읽기
 
조회 29 |추천 0 | 2007.03.31. 12:00
 

(25) 일위도강(一葦渡江)

 

 

달마를 실은 갈대묶음은 북쪽으로 흘러갔다,. 

병사들도 무릎을 꿇고

모두가 한마음이 된 듯 한없이 절을 했다. 


   무승 철타가 이끄는 군졸들을 뒤따라 수많은 인마(人馬)가 먼지를 일으키며 강변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보리달마는 너무나 많은 병력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음 한 구석에선 격렬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무제 소연은 그토록 악랄한 자란 말인가?

강을 건너 북상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고 강변에서 잡아 처형하려고 하는 것인가?


  무승 철타동태사에서 달마를 놓치자마자 무제에게 상황보고를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통미대사의 말로 미루어 달마가 강을 건너 북위(北魏)로 갈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지체하다간 달마를 끝내 놓쳐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책임추궁까지 당할 염려가 있었다.

보고를 받은 양 무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비록 달마에게 섭섭함과 노여움을 갖긴 했지만 그래도 무제는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철타가 달마를 다시 데려오기만 한다면 그에게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고 한동안 궁성에 머물게 할 작정이었다.

시간을 두고 마음을 돌리게 하여 어떻게 하든 나라와 백성에게 도움이 되게 하고 싶은 것이 무제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달마는 영영 양 나라를 떠나려 하는 것이 아닌가.

무제는 이런 행위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북위로 가기 위해 양자강을 건너는 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제는 긴급명령을 내려 양자강가에 있는 배는 고깃배까지 모두 철수시키고 엄중하게 감시토록 했다.

그리고 무승 철타와 호위병뿐만 아니라 예하의 장군들까지 총출동시키곤,

강변을 샅샅이 뒤져 달마를 잡아오라고 명했다.


   보리달마는 비록 속사정을 소상히 알 수는 없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많이 눈에 띄던 고깃배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것도 그렇거니와

철타와 군졸들이 풍기는 살기(殺氣)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변은 순식간에 군졸들로 가득 찼다.

철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달마를 향해 걸어 나갔다.

달마는 꼼짝없이 잡힐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철타와 호위군졸 몇이라면 자신의 공력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지만

구름처럼 에워싼 수많은 병력을 뚫고 도망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달마 앞에 뚫린 길은 오직 한 군데밖에 없었다.

바로 양자강 옆으로 뻗은 갈대밭으로 통하는 외길이었다.

달마는 농부들의 작업장이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갈대밭을 헤치고 들어갔다.

벌써 농부들은 몸을 숨겨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달마는 멀리 강 건너를 바라보았다.

이미 해가 하늘 높이 솟았고 구름 한점 없었다.

시야에 거리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강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양자강은 바다처럼 넓어 보였다.

달마는 물가로 달려가면서도 머리 속은 강을 건너갈 묘책을 찾기에 바빴다.


달마는 갈대밭에 버려진 몇 묶음의 갈대더미를 보면서 비로소 입가에 웃음을 흘렸다.

“옳거니, 좋은 수가 떠올랐다.”

그리고 갈대 한 묶음을 집어 들어 강물 위로 던졌다.

이어 가볍게 몸을 날려 그 위에 몸을 실었다.

갈대 묶음은 달마의 몸무게 때문에 그대로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무릎까지 물에 잠겼다.

그러나 갈대 묶음 한 가닥이 수면 위로 길게 삐죽 나와 있어

그런 대로 그것을 잡고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달마는 일찍이 연마해 둔 비장의 공법을 써서 강을 건널 작정이었다.

우선 합장한 자세로 갈대 끝을 잡았다.

눈을 살짝 내려 깔아 코끝에 집중하고 아랫배 단전에 중심을 두었다.

그리고 선 채로 깊은 숨쉬기에 들어갔다.

달마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잊었다.

달마의 양미간으로 ‘번쩍’하는 섬광(閃光)이 들어와 온몸을 휘감았다.

동시에 꽁무니뼈 끝에서 정수리로 시원한 기(氣)가 엄청난 속도로 치고 올라 왔다.

달마는 갈대묶음과 함께 가볍게 떠올랐다.


   때마침 남풍이 불어 왔다.

달마를 실은 갈대묶음은 미끄러지듯 북쪽으로 흘러갔다.

달마가 잡고 있는 갈대 끝은 마치 배의 조타 구실을 하는 것 같았다.

바람 따라 좌우로 흔들리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강 한복판으로 속도를 더해 갔다.


   철타와 군졸들이 강가로 몰려들었을 때,

달마는 강 한복판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철타는 상상을 초월한 광경에 완전히 넋을 잃었다.

군졸들도 너무나 신기해 탄성을 내질렀다.

무승 철타는 그제야 깨달은 바가 있었다.

범부의 하잘 것 없는 육신의 눈으로 참 부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크게 뉘우쳤다.


   철타는 그 자리에서 두 손 모아 땅바닥에 덥석 엎드려 절을 했다.

진흙바닥에 손과 옷이 더럽혀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조사를 죽이려고 쫓아오다니, 큰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병사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달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모두가 한 마음 한 몸이 된 듯 한없이 절을 했다.


   철타는 힘없이 황궁으로 돌아와 모든 사실을 본 대로 보고했다.

무제도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뿐만 아니라 하염없이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참 부처에게 지은 죄를 어떻게 갚음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양 무제는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다.

옥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철타와 내관들도 덩달아 무릎을 꿇었다.

한동안 눈을 감은 채 미동조차 않던 무제는 무엇에 놀란 듯 소스라치며 일어섰다.

그리고 급한 목소리로 엄명을 내렸다.

“조사 보리달마를 해치는 일이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전국의 관원들은 앞으로 어떤 스님이든 각별히 대접하도록 하라.

그리고 스님들이 배를 탈 때는 뱃삯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불가에 몸담은 승려들은 역대 왕조에서 뱃삯을 내지 않고도 배를 탈 수 있는 전통이 세워졌다.

양 무제는 아울러 전국의 모든 사찰에서 7일 동안 재를 올리게 했다.

달마 조사에게 지은 불경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선 그 방법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달마가 갈대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양 나라 전체로 퍼졌다.

백성들은 한결같이 혀를 내두르며 신비로워 했다.

달마를 조사로 섬겨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샘솟았다.

   이 같은 소식은 때마침 먼 길을 여행하고 돌아온 보지공(寶誌公) 선사의 귀에도 들어갔다.


  보지공 선사 기인인 동시에 국사로 추앙받고 있던 존재였다.

보지공은 흔히 지공(誌公) 또는 보공(寶公)이라고도 불렸고,

묘각대사(妙覺大師)라는 도호로 불리기도 했다.


  보지공은 출생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느 날 까치둥지 속에서 애 우는 소리가 나서 사람들이 올라가 꺼내온 것이 바로 보지공이었다.

이 아이는 몸은 사람이었으나 손발은 까치를 닮아 있었다.

그러나 자라면서 영특함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글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유불도(儒佛道)의 경전에 무불통지(無不通知)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적을 보여주곤 했다.

꼽추나 절름발이를 만나면 자비심을 베풀어 그들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럴 때마다 예외 없이 정상인으로 되돌아갔다.

이런 보지공인지라 일찌감치 출가했다.

장성해서는 양 나라의 수도 금릉에서 갖가지 소문을 뿌리고 다녔다.


   그의 괴상한 용모와 이적 때문에 도성 안이 시끄러웠다.

양 무제는 그런 꼴을 두고 보지 못했다.

그대로 방치해 두다간 백성들을 현혹시킬 뿐만 아니라 왕실의 위엄을 손상시킬 염려가 크다고 생각했다.

황명을 내려 보지공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감옥에 있어야 할 보지공은 그 다음 날도 여전히 성 안을 활보하고 다녔다.

보지공이 분신술(分身術)에 능한 것을 모르는 관원들은 경악했다.

탈옥한 줄 알고 급히 무제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무제는 귀를 의심했다.

탈옥이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관원들을 대동하고 친히 감옥으로 갔다.

감옥 안에는 보지공이 그대로 사슬에 묶인 채 앉아 있었다.

무제는 거짓 보고한 죄를 물어 보고를 올린 신하를 그 자리에서 감옥에 처넣었다.

한데 보지공이 성 안을 활보하고 다닌다는 보고는 계속 해서 올라왔다.

무제가 받은 충격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할 말을 잊은 채 오직 감옥 안의 보지공에게 눈길을 쏟고 있을 뿐이었다.


   무제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다.

옥졸들에게 감옥 문을 열게 하고 손수 사슬을 풀어주면서 보지공에게 크게 사죄했다.

무제는 보지공을 극진히 모셔 국사로 대접했다.

그리고 궁성 옆 화림원(華林園)에서 살도록 했다.

무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보지공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루는 무제가 공손하게 물었다.

“저는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만승천자가 되어 국사님을 모시고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나이까?”


   보지공은 대답 대신 무제를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무제가 다가오자 그의 손을 잡은 채 입정(入定)에 들어갔다.

무제 스스로 입정하여 숙명통(宿命通)으로 전생을 알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무제는 자기의 전생이 초지(初地) 보살임을 알았다.

이를 계기로 국사에 대한 무제의 존경심은 날로 더해 갔다.

한데 안타깝게도 보리달마가 금릉에 왔을 때 보지공은 산천을 주유하고 있었다.

만약 보지공만 화림원에 머무르고 있었더라도 달마를 둘러싼 불상사는 생길 턱이 없었다.

보지공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무제의 마음속엔 한 가닥 아쉬움이 남아 꿈틀거렸다.

보리달마에 대한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했기에 그의 아쉬움은 차라리 가슴앓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무제는 서둘러 화림원으로 국사를 찾아갔다.

   이미 자초지종을 알고 있던 보지공은 덤덤하게 무제를 맞았다.

“대사님께서는 안녕히 다녀오셨는지요.”


   무제는 정중하게 합장의 예를 올렸다.

보지공도 합장으로 예를 갖추었다.

무제는 인사가 끝나자마자 그 동안 달마를 초청했던 일에서부터 갈대 잎을 타고 강북으로 건너간 일까지

소상히 아뢰었다. 그리고 국사에게 물었다.

“대사님께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보리달마는 어떤 위인입니까?”

“그 어른은 관세음보살의 후신이오.”

무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가 죽을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모셔와 속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어른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오. 온 나라의 백성들이 가서 청해도 불가능하오.”

 

 

◇이도영(1884~1933) 作 ‘달마 도해도’
(종이에 수묵, 116×36.5㎝,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김영욱의 선시로 읽는 선화
5 .  김 명 국 의   ‘ 달 마 도 ( 達 磨 圖 )’ 

김영욱 승인 2018.03.1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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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명국 作 ‘달마도(達磨圖)’, 17세기, 종이에 먹, 83×5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齴齲來東十萬里(언우래동십만리)
       梁王不契渡江西(양왕불래도강서)
       九年無語成何事(구년무어성하사)
       空使兒孫特地迷(공사아손특지미)

       면벽중인 달마 표현한 작품
       역동적이나 무심한 눈빛엔 고요한 마음 고스란히 담겨

    ‘달마가 동쪽으로 십만 리를 와서 
    양왕과 맞지 않아 강 서쪽으로 건너갔네. 
    구년 동안 말없이 무슨 일을 이뤘는가, 
    부질없이 아손들만 헤매게 하는구나.’ 

       유정(惟政, 1544~1610) ‘갈댓잎으로 강을 건너다(一葦渡江)’.
    시선을 압도한다. 
    비단 시원시원하고 분방한 먹의 선 때문만은 아니다. 
    그 선으로 빚어낸 달마의 눈빛이 묵직한 무언가를 전한다.

       달마 내면의 고요한 정신은 호방한 선의 흐름을 따라 깊은 울림의 대화를 시도한다.달마는 서기 520년경에 중국으로 건너와
    서 양나라 무제와 대면하게 되었다. 길고도 짧은 대화가 오갔다. 서로가 인연이 아님을 알았기에 달마는 갈댓잎을 타고 강을 
    건너 쑹산의 소림사(少林寺)로 향했다. 단순히 두 사람의 개인적인 견해 차이로 인한 헤어짐이 아니다. 결별과 도강은 외형적인 
    성장에 치중한 당시 중국불교에 대한 달마의 회의적인 견해를 대변한다.흔히 달마가 소림사에 머무르며 9년 동안 면벽(面壁)에 
    전념했다고 한다. 벽은 곧 자신의 마음이다. 마음을 보는 것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달마의 육체는 점차 
    쇠해졌지만 안정된 마음은 깊고 고요한 눈빛을 통해 드러났다.김명국의 ‘달마도’는 마치 면벽에 전념한 달마를 그린 듯하다. 

       진한 먹물을 듬뿍 묻힌 붓으로 시원하게 그린 가사(袈裟)는 역동적이고, 무심한 듯 묽은 먹물로 툭툭 그은 달마의 얼굴은 
    마냥 평정하기만 하다. 옅은 선으로 그려낸 달마의 눈매는 두껍고 강한 필치로 그린 가사 속에서도 강렬하고 묵직한 느낌을 
    자아낸다.달마는 어디를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내면이거나 혹은 자신이 기다리는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시절인연이라 했다. 모든 현상이 시기가 되면 깨어나고 일어난다는 말이다. 9년의 면벽에서 달마가 구하고자 한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외형이 아닌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면의 정신을 마음으로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 그 깨달음은 이미 
    무제와의 만남에서 깨우쳤다. 그가 면벽에서 구한 것은 시절인연의 기다림이다. 달마는 자신의 마음 속 선(禪)을 마음으로 전할 
    인물이 나타나기까지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리고 훗날 선종의 제2조가 되는 혜가(慧可, 487~593)가 입문을 허락받기 위하여 
    팔을 끊자 그에게 마음의 깨우침을 전하였다. 

      마음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다. 
    온갖 현상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 
    관심과 무관심,만남과 이별, 사랑과 증오, 화해와 갈등 모든 행위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음이 안정되면 자연스레 모든 현상을 펼치고 거두어 들인다.깨달음은 단지 문자로 전해지지 않는다. 글이 없어도 어느 순간 마음에서 마음으로 자연스레 전할 수 있다

    그 마음의 시절인연을 기다리지 못하고 깨달음만을 구하고자 하는 중생들만 지금껏 헤매는 것이 아닐까.

    김영욱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zodiacknight@hanmail.net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김영욱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zodiacknigh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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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13 | 법보신문  








    일위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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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attachment/ilwy.jpg 一葦渡江

    고사성어의 하나로, 무협소설에서는 경공의 경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1. 한자의 음과 뜻2. 유래3. 무협물에서 쓰임새4. 기타5. 관련 항목

    1. 한자의 음과 뜻[편집]

    일위도강(一葦渡江)
    한 일, 갈대 위, 건널 도, 강 강.

    갈대잎 하나를 타고 을 건넌다는 의미.

    2. 유래[편집]

    일위도강이라는 고사성어는 소림사의 조사 중 하나로 꼽히는 달마대사의 일화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달마가 갈대잎 하나에 몸을 실어 양자강을 건넜다는 전설로, 이 일화를 달리 노엽달마(蘆葉達磨) 및 달마도강(達磨渡江)이라고도 한다.

    야사에 따르면 양무제는 자신에게 망신을 준 달마를 쫓으라고 병사를 보냈는데, 달마는 그 병사들 앞에서 갈대잎을 타고 유유히 강을 건너 추적을 따돌리고 숭산 소림사로 가 그 유명한 구년면벽을 시작했다.

    3. 무협물에서 쓰임새[편집]

    무협소설 등지에서 일위도강은 경신술의 일종, 또는 경공의 경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대체로 물 위에 지푸라기를 띄워놓고 이를 밟고 다시 도약하는 식의 기술(또는 경지)지만, 이는 달마대사의 일화를 정확히 재현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달마는 단순히 갈대잎을 밟은 게 아니라 그걸 배 타듯이 타고 움직인 것이기 때문이다. 경공의 경지가 아니라 별개의 술법으로 나올 때는 그 유래 때문에 왕왕 불가(佛家)의 무공으로 묘사된다.

    갈대잎이라는 발디딤대를 사용해야 하는 만큼, 등평도수처럼 아예 물 위를 달리는 수법에 비하면 대개 처진다고 묘사된다.

    4. 기타[편집]

    • 여담이지만 실존하는 소림 칠십이예 중에도 달마도강공이라는 경공 수련법이 있다.

    5. 관련 항목[편집]






    불 화 의   세 계 <15>    달 마 대 사 와   일 위 도 강 ( 一 葦 渡 江 )
    드러내지 않는 무루복 실천 강조

       
     
      달마대사가 갈대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가는 것을 묘사한 벽화가 ‘일강도강(一葦渡江)’이다.  
     
       달마대사는 남인도 사람으로 중국에 선(禪) 불교를 전파한 분이다. 어릴 적 ‘보리다라’라고 불렸는데 당시 인도 최고의 도인인 
    반야다라 존자의 제자가 되었다.

    반야다라는 보리다라가 선정에 든지 7일 만에 깨달음을 얻음에 따라 ‘보리달마’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되는데 달마(達磨)는 
    통달하고 크다는 뜻이다.

    스승이 열반한 뒤 달마는 스승의 유언을 따라 북쪽에 부처님의 법을 펴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달마대사가 처음 도착한 곳은 지금의 광주로 양나라 땅이었다. 당시 양 무제(武帝)는 불교를 위해 헌신했다고 칭송이 자자했었다. 
    무제는 수많은 절과 탑을 지었으며 스님들을 공양했고 이같은 이유로 스스로 한량없는 복을 지었다고 생각했다.

    무제는 달마대사가 중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궁으로 초빙했다.

    무제는 “수많은 절을 건립하고 경전을 펴냈는데 어떤 공덕이 있냐”고 묻자 달마대사는 “공덕이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이어 무제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공덕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불교의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실천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달마대사는 “탑과 절을 다 헐어버리시오”라고 답했다.

    달마대사는 무제가 유루복(有漏福)을 지어 놓고 교만한 마음으로 무루복(無漏福)을 지은 양 자랑하는 것은 공덕이 되지 않는다고 
    우회적으로 질타했다.

    무제는 달마대사의 말을 듣고 자신의 공덕과 선행이 무시 당한데 대해 노여움을 참을 수가 없었고, 달마대사는 무제와 인연이 
    닿지 않음을 알고 양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달마대사가 양자강을 건너려는 순간 무제의 군사들이 달마대사를 체포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군사들은 양자강 강변을 에워쌌고 달마대사는 꼼짝없이 잡힐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달마대사가 살길은 오직 양자강을 건너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갈대 이파리가 강물을 따라 유유히 떠다니고 있는 것을 발견한 
    달마대사는 그동안 연마한 비장의 공법을 써서 갈대 이파리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합장한 자세로 갈대 끝을 잡은 
    달마대사는 무사히 강을 건너 위나라 소림사로 향했다. 달마대사가 갈대 이파리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는 모습을 목격한 군사들은 
    크게 뉘우쳤다고 한다.

    사찰 벽화 가운데 달마대사가 갈대 이파리 하나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일위도강(一葦渡江)’이다.

    소림사에 도착한 달마대사는 9년 동안 수행했는데 대사의 수행방편인 면벽좌선은 선(禪) 수행의 핵심이 됐고, 향후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전해지게 됐다.

    이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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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 화 의   세 계< 16>   3 년  뒤   되 살 아 난   달 마 대 사
    • 이병철 기자
    • 승인 2009.10.07 16:57
    • 댓글 0





    正法 전하기 위한 구도자의 삶


       
     
      달마대사와 송운이 총령(파미르고원)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모습으로 사진은 불탑사 대웅전 벽화다.  

     
      양무제의 군사를 따돌리기 위해 갈대를 타고 양자강을
     건넌 달마대사는 소림사에 들어가 9년 동안 면벽좌선
    (面壁坐禪)하며 부처님 정법을 전하기 위해 분위기가 
    무르익기만을 기다렸다.

    그 사이 중국의 교종 스님들은 선종의 교세가 확장되자 
    달마대사의 인품과 신통력을 시기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권위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5차례나 
    독약을 넣은 음식을 대접해 살해하려고 시도했지만 
    달마대사는 그때마다 신통력으로 독을 토해냈다.

    9년이 흐른 뒤 드디어 혜가 스님이 나타났다. 혜가 
    스님은 달마대사의 법을 이은 중국 선종의 2대 선사다. 
    처음에는 달마대사가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혜가 스님은
     스스로 칼을 들어 한쪽 팔을 잘라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증명해 보였다. 이에 달마대사는 ‘오본래자토 전법구미정 일화개오엽 
    결과자연성(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花開五葉 結果自然成) -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해 중생을 제도하고자 함이니 
    한 송이 꽃이 다섯 잎을 피우면 열매는 스스로 맺힌다’라는 게송으로 혜가 스님에게 부처님의 참된 진리를 전했다.

    자신의 할 일을 끝냈다고 생각한 달마대사는 중국 스님들이 여섯 번째로 독을 탄 음식을 권하자 그냥 받아 삼켰다. 법은 혜가 
    스님에게 전했고, 이곳에서 인연이 다했음을 판단했기 때문이다.

    달마대사는 ‘내가 죽으면 짚신을 신긴 채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여러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앉은 자세로 열반에 들었다. 제자들은 웅이산에서 장사를 지내고 정립사에 탑을 세웠다.

       달마대사가 열반한 지 3년이 지났을 때 인도에 사신으로 갔던 송운(宋雲)이 귀국하면서 총령(지금의 파미르고원) 고갯길에서 

    달마대사를 만났다. 뜻밖에 달마대사를 만난 송운은 무척 감격해 하며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여쭈었고, 이에 달마대사는 

    “인연이 다해 이제 인도로 돌아가는 길이오. 그리고 그대의 임금은 이제 세상을 떠났소”라고 답했다.

    총총히 사라지는 달마대사의 어깨에는 주장자가 걸쳐 있었고, 그 끝에 짚신 한 짝이 매달려 있었다.

       송운이 황궁으로 돌아오자 자신이 모셨던 명제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효장제가 황제에 즉위해 있었다. 송운이 황제를 

    알현하며 얘기를 나누던 중 달마대사 이야기를 하게 됐다. 효장제는 3년 전에 달마대사가 입적했다고 했고, 송운은 총령에서 

    달마대사를 만났다고 했다. 이를 이상히 여긴 효장제는 달마대사의 묘를 파헤쳐 보라고 했는데, 뜻밖에도 그 안에는 빈 관과 

    짚신 한 짝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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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침> 지난 제659호(9월 25일자) 본란 소제목 ‘달마대사와 일강도강(一葦渡江)’ 가운데 일강도강은 ‘일위도강(一葦渡江)’의 잘못이

    기에 바로 잡습니다.

    이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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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역 구법의 길… 동북아 역경사를 열다


    중국 서안= 신성민 기자
    승인 2016.11.25 15:39


    중국 선종사찰 순례 ④ 대자은사·흥교사



       대자은사 광장에 있는 현장 스님 동상. 뒤로 현장 스님이 인도서 갖고 온 경전 등을 수장하기 위한 대은탑이 보인다.
    경·율·론 삼장을 모두 터득한 고승을 의미하는 삼장법사. 일반적으로 <서유기>에서 손오공 등을 이끌고 천축국으로 가는 고승을 삼장법사로 알고 있다. <서유기> 실질적 주인공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은 당나라 시기 구법승 현장 스님이다.

    현장 스님은 602년 진씨 집안의 4째 아들로 태어났다. 10년 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앞서 출가한 둘째 형을 따라 삭발하고 수행자의 길을 걷는다. 고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수행을 할수록 종파마다 교리가 달랐다. 의문은 꼬리를 물었고, 결국 직접 인도로 가서 불경을 구하고 배우기로 결심한다.
    서유기 모델 현장 스님 자취담긴
    中 서안 대자은사 대안탑·흥교사
    현장 스님 구법행·역경불사 인해
    지금의 동아시아 불교 존재 가능
    제자 규기·원측 간 스토리도 눈길

    현장 구법행 첫 장애물 ‘당 조정’
    <서유기>를 보면 현장 스님이 천축 구법행을 알리자 당 태종은 잔치를 열고 환송해준다. 진리의 구법행이 마치 왕조를 위한 출사로도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과 판타지는 다르다. 안타깝고, 울화가 치민다. 당시 당나라는 국외 여행이 금지돼 있는 상황. 이 때문에 현장 스님은 수 차례 조정에 “구법행을 허락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지만 각하됐다. 결국 현장 스님은 국법을 어기고 629년 인도로 떠난다. 당시 불교국가였던 고창국과 천산산맥을 넘어 결국 중인도 나란다대학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5년을 머무르며 자신이 그토록 배우고 얻고자 했던 <유가사지론>을 비롯한 유식의 교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인도 각지에 구법과 불적 순례의 여행을 계속해서 다수의 불전을 얻어서 귀로에 나섰고, 17년만인 645년에 이번에는 환영을 받으면서 장안으로 돌아왔다. 현장 스님은 구법 여정을 통해 불사리 150개, 불상 8체, 경전 520권 657부를 중국에 전했다. 이에 크게 기뻐한 당 태종은 현장 스님에게 직접 역경 사업을 명하게 된다. 이후 현장 스님은 입적 전까지 역경에 매진하게 된다.

    조계종 교육원 선종사찰순례단이 대자은사에 조성된 현장 스님 일대기 조각들을 보고 있다.
    현장의 역경처 ‘대자은사’
    현장 스님의 역경처 중 한 곳이 현재 중국 서안에 있는 대자은사다. 현장 스님이 처음 황제의 명을 받아 역경을 시작한 곳은 흥교사이고, 이후 대자은사로 옮겨 역경을 했다. 스님은 대자은사 북서쪽에 지어진 변경원에서 불경 한역(漢譯)에 힘썼고, 11년에 걸쳐 40여 부의 경을 한역했다. 이 한역 사업에는 현장 스님의 제자인 규기와 신라 유학승 원측도 참여했다.

    원래 대자은사는 당 태종의 모후 문덕황후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사찰이다. 한때는 승려 수만 300명이 넘을 정도로 대찰(大刹)이었다. 대자은사에서 현재까지 유명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대안탑이다.

    652년(당 영휘 3년)에 건립된 대안탑은 현장 스님이 인도로부터 가져온 불상과 경전을 수장하기 위해 지어졌다. 7층 전탑으로 높이가 54m에 이르며, 각층 마다 사리가 봉안돼 있다. 지금은 내부에 계단이 설치돼 이전보다는 수월하게 탑의 최상층까지 오를 수 있다. 여기서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난 창을 통해 서안 시내가 조망이 가능하다. 남쪽으로는 현장 스님의 동상이 있는 광장이 있으며, 북쪽 뒤로는 분수 광장이 있다. 분수광장 좌우로는 현장 스님의 기념관도 보인다.

    현재 대자은사 주위는 중국 시민을 위한 광장과 편의·상업시설이 대규모로 조성돼 있다. 중국인들은 일과를 마치면 이곳에서 운동을 하거나 외식을 하며 여가를 즐긴다. 사찰 참배도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모습이다.

    대자은사 인근에 조성된 상업광장. 파노라마가 눈길을 끈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대자은사 옆으로 길게 조성된 ‘진한당국제문화상업광장(秦漢唐國際文化商業廣場)’이다. 천장에 설치된 파노라마 스크린을 통해서 중국 불교 문화재와 관련한 영상이 계속 흘러나왔다. 중국에서 불교가 갖는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었다.

    달마가 선(禪)을 전했다면, 현장은 부처님의 바른 교법을 전달했다. 이는 동아시아 대승불교 역사의 근간을 이루는 일이었다.

    대자은사 대웅보전에는 현장 스님을 선양하는 조박초가 쓴 주련이 있다. 이를 보면 현장 스님이 가지는 위치는 명확하다. “불법의 바다가 현장 스님을 숭앙하니 서역도 두루 깨달은 자라고 말했다. 유식학을 널리 펼치니 이곳은 나란다에 비할 수 있다.”

    흥교사의 현장사리탑과 제자 규기, 원측의 사리탑. 현장의 유식종을 이어받았고, 이는 신라로 전해진다.
    현장과 그 제자들이 잠든 흥교사
    현장 스님의 사리는 서안의 흥교사에 모셔져 있다. 주목할 점은 현장 스님과 제자인 원측과 규기의 사리탑도 함께 있다는 것이다. 현장과 제자들의 사리탑은 현장의 구법 여정과 역경사업, 중국과 신라의 유식종 탄생이라는 일련의 역사적 과정이 함축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현장 스님은 구법행과 역경사업을 통해 <성유식론> 등을 바탕으로 한 유식종을 창종한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제자 규기와 원측이다. 특히 현장은 제자 규기를 많이 아꼈다. 워낙 총명했던 규기를 제자로 맞이하기 위해 현장은 스님으로서는 금기인 술, 고기, 여자를 모두 허용하겠다는 조건까지 내걸었다. 그래서 규기를 ‘삼거(三車) 법사’라고도 한다.

    원측 역시 뛰어난 제자였지만, 규기와 같은 혜택은 받지 못했다. 이는 유명한 ‘도강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규기는 현장 스님의 유식론 강의를 독점했고, 원측은 문지기를 매수해 그 강의를 몰래 엿들었다. 정식 강의는 규기가 앞서 들었지만, 이를 자기화해서 강론을 펼친 것은 원측이 먼저 였다. 국내 학계에서는 일련의 도강 사건을 규기 측에서 후대에 날조한 것이라 본다. 원측의 인품으로 도강할 이유도 없고, 실력도 한 수 위라는 것이다.

    흥교사에 봉안된 현장과 제자 규기, 원측의 조각상.
    현장 스님의 입적 후 규기는 자은사를 중심으로 자은학파를, 원측은 서명사를 중심으로 서명학파를 형성한다. 규기의 자은학파는 유식종의 정통이자 주류임을 자임했고, 서명학파와는 많은 쟁론을 펼쳤다.

    그럼에도 원측은 측천무후 등에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당시 장안의 최고 사찰 중 하나인 서명사의 대덕으로 주석하며 강론을 펼쳤다. 신라에서 수차례 원측의 귀국을 타진했지만, 그의 실력을 인정한 측천무후의 반대로 귀국은 이뤄지지 않았고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입적한다. 이후 원측의 제자 도증이 신라로 귀국해 태현에게 유식학을 전하면서 신라의 유식종이 시작된다.

    흥교사 현장사리탑 동쪽에는 원측의 사리탑이 서쪽에는 규기의 사리탑이 각각 있다. 현장의 원력으로 시작된 구법행은 역경으로 기반을 만들고, 유식학 전파라는 결실을 맺는 과정이 담겨 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한 명의 원대한 원력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우뚝 서 있는 세 탑을 보며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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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서안= 신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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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노라의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경기매일
    승인 2019.05.13 16:42

    part21_한류의 원조는 조선시대?



    안노라 ▲‘그림으로 만나는 서양사’인문학 강사 ▲‘벗에게 가는 길’인문학 공간 대표


    [달마도] 그림출처 = 네이버


       방탄소년단의 인기가 가히 세계적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K팝이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를 끌며 ‘한류흑자’를 견인하는 중심에 방탄소년단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중국의 2016년 한류 제한령이 본격화 된 이후 처음으로 흑자의 규모가 한한령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고 하네요. 자랑스런 젊은이들입니다.

       오늘은 BTS가 몰아치고 있는 한류태풍의 원조를 소개합니다. 조선 후기 인조(1623~1649)때 도화서 화원이었고 술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연담(蓮潭) 김명국(金鳴國)입니다. 워낙 술을 좋아해 말년엔 취옹(醉翁)이라는 호를 취합니다. 낮은 신분이 담기 벅찬 뛰어난 재능 탓인지 생년과 졸년은 미상입니다. 두 차례에 걸쳐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는데 일본인들의 그림요청에 응하느라 밤잠을 자지 못해 울려고까지 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그는 어떤 그림을 그렸기에 그토록 특별한 인기를 누렸을까요?

       1603~1867은 일본 에도시대입니다. 우리들이 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현 도쿄에 개설한 막부이지요. 그는 내분과 전란이 끝나자 칼을 빛이 나게 벼린 후 조심히 칼집에 꽂았습니다. 그리고 상업과 문화의 부흥에 힘썼습니다. 그 일환으로 에도막부는 우리나라에 통신사를 요청했지요. ‘조선통신사는 17세기 조선의 농밀하고 성숙한 문화를 배에 싣고 에도에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찬란하고 격조 있는 한류문화가 일본 한복판에 내렸습니다.

       <달마도>김명국일본 통신사로 갔던 1636~1643년 사이의 작품이라고 전합니다. 그림을 전혀 모르는 이가 보아도 말로 광야를 내달리는 듯한 호방한 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여백과 농담과 생략이 압권입니다. 거침없이 긋고 주저없이 꺾습니다. 부처님이 붓대를 쥔 듯 시작과 끝이 한 호흡처럼 느껴집니다. 배움과 노력으로 그리는 기량이 아니라 천재적인 재능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개성이 묻어납니다. 글이나 말을 뛰어넘는 깨달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정신이 현현(顯現)하듯 털 한 오라기에도 선(禪)의 침묵이 배어나옵니다. 따라하거나 흉내 낼 수 없지요. 그의 이러한 솜씨를 조선의 문장가 남태응은 신품(新品)이라 칭했고 김명국을 일컬어 신필(神筆)이라 했습니다.

       김명국이 일필휘지로 그린 달마는 5세기 말의 인도 선승입니다.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 무제는 많은 절을 짓고 불탑을 쌓고 승려를 양성하는 불교 중흥정책을 폅니다. 마침 달마가 인도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 궁궐로 초대하고 후한 대접을 한 뒤 내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묻습니다. 달마는 공덕이 없다고 한 마디로 잘라 대답합니다. 칭송을 바라는 공덕은 이미 공덕이 아니라는 뜻을 전한거지요. 무제는 그를 괘씸히 여겨 은밀히 죽인 후 산에 묻어 버립니다. 얼마 후 송운이라는 사람이 벗은 발로 지팡이를 짚고 서쪽으로 가는 달마를 만납니다. 이 사실을 무제에게 아뢰자 무제는 빈 관을 확인하고 군사를 불러 달마를 뒤쫓게 하지요. 양자강 가에 도착한 군사들은 갈대를 타고 강을 건너는 달마를 보게 됩니다. 그야말로 “달마 아저씨 갈대 잎 타고 양자강 건너갈 적에”가 된 것입니다. 이런 달마의 일화가 <절로도강 折蘆渡江 갈대 한 가지를 잘라 타고 양자강을 건넌 것>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그림으로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갈댓잎을 타고 서쪽으로 간 달마도, 가랑잎을 타고 태평양을 건넌 코끼리도 없는 한적한 오후, ‘술에 취하고 싶으나 아직은 덜 취한 상태’에서 최고의 작품이 나왔다는 신필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싶은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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