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적 美意識과五方色의 관계 연구 / 李 仁 淑 [碩 士 學 位 論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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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 士 學 位 論 文

한국의 전통적 美意識과  五方色의 관계 연구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지도교수 崔  炳  植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李  仁  淑

2002년   2월

碩 士 學 位 論 文

한국의 전통적 美意識과
五方色의 관계 연구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지도교수 崔  炳  植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李  仁  淑

2002년   2월

 

한국의 전통적 美意識과
五方色의 관계 연구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지도교수 崔  炳  植


이 논문을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李  仁  淑

2002년   2월

 

李仁淑의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주심교수 ______________ (인)

부심교수 ______________ (인)

부심교수 ______________ (인)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2002년   2월  
국 문 초 록
 
  이 논문은 한국미술과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색채문화를 분석하여 전통적 색채의식의 성격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오늘날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하여 종교·사상과 시대적 배경에 따른 미의식美意識과 오방색五方色의 관계를 조명하였다. 나아가 동시대의 가치체계에 의한 오방색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함으로써 한국적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고구려시대의 고분벽화에 다채로운 색상으로 그려진 초상화, 수렵도, 무용도 신선도, 그리고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의 사신도四神圖는 고대로부터 색채문화가 형성되어 왔음을 알게 해준다. 또한 색동저고리와 다홍치마, 연지 곤지와 족두리, 자주색 삼회장저고리와 남색치마 등은 낯설지 않고 정감이 느껴지는 것으로 무의식 속에 민족의 색깔로 인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색채는 시각적·감각적인 체험보다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따른 관념화된 의미나 상징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오행五行의 각 기운과 연결된 청색靑色, 적색赤色, 황색黃色, 백색白色, 흑색黑色의 다섯 가지 오방색五方色을 도출하여 사용한 것이다. 오방색은 고구려시대에는 고분벽화,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분과 용도에 따른 복식 및 왕궁과 사찰의 단청에서 주요한 색으로 쓰이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그 전통이 불화로 이어지며 우리민족의 주요한 색채의식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와서도 민화, 무신도, 궁궐화 등으로 계승되어 오행의 상생과 상극 속에서 색의 조화와 배색을 이루어냈다.
  조선조는 성리학에 의한 금욕주의, 중용사상 등의 영향아래 생활조건의 빈약, 전통적인 자연주의가 작용하여 문인화, 산수화, 도자, 공예, 건축 등에서 검박성과 실용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는 무작위의 미, 비정제성, 소박미 등의 한국미로 표출되었다. 또한 단청, 민화, 한복, 보자기 등에 사용된 오방색도 미완의 자연스러움과 순박함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평면적이고 비개인적이며 관념적인 성격을 가진 민화의 양식은 문인화와 산수화의 사의寫意개념, 서정적 미감을 위한 선염법渲染法, 생략기법 등의 자연주의적 조형수단과는 거리가 있다. 이는 자연주의적 회화의 예술적 가치가 아닌 상징적 가치를 추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행에 따른 오방색 등의 이상주의적, 상징주의적 성격이 강한 색채를 통해 소재의 사실과 생명감에 관계없이 또 하나의 시각적 효과를 낳는 색채 자체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민화는 주제와 형식과 그에 상응하는 상징이 오랜 전통 속에서 유형화된 예술로서 주술적 상징성과 장식적 특성을 띤 생활그림이다. 평면적이고 비개성적이며 상징적인 색채의 조화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유교·불교·노장사상이 변주되어 나타나는 무교적, 음양오행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방색의 상징성과 주술성을 통해 현세 구복적 성격을 띤 신앙으로 표출된 결과이다. 오방색은 한국 전통사상에 조응한 미감이며 조선조 후기의 사회적 기류에 의한 문화적 소산물이다. 또 한국미술의 고전적 성향과 색채의 범람이나 말초적이고 원색적인 색의 사용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말기적 현상을 포함하고 있다.
  오방색은 벽사 邪, 수복강녕壽福康寧, 해탈解脫, 구제救濟를 기원하였다. 권선징악의 모범이 되거나 종교적 신앙으로 통속화하였다. 즉 세시풍속歲時風俗과 예술적 표현을 통해 삶의 빈한함을 극복하려는 민중들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즐거움과 화려함을 나타내는 순수한 원색으로 낙관적이고 밝은 사상, 선한 마음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오방색은 민족의 힘을 북돋아주는 원동력이 되어 고구려 고분의 사신도와 황룡사 노송도의 전통으로서 한국역사의 전 시기를 통하여 계승되고 있다. 
  이러한 전통색채에 대한 올바른 고찰과 이해는 오방색의 미감을 한국미술의 독창적 미의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나아가 새로운 시각의 풍요로운 색채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목  차


국문초록

1. 서론
  1) 연구목적 1
  2) 연구내용 및 방법 2

2. 한국의 전통적 미의식과 오방색의 사상적 근원
  1) 한국미의 특성과 사상적 배경 5
    (1) 한국미의 특색 5
    (2) 전통적 미의식의 사상적 배경 9
  2) 오방색의 개념과 색채의식 21
    (1) 오방색의 개념 21
    (2) 생활 속에 나타난 색채의식 27
  3) 전통미술에 표현된 오방색 33
    (1) 고구려 고분벽화의 색채의식 34
    (2) 단청과 고려 불화의 색채의식 38
   
3. 조선시대의 미술품에 표현된 오방색의 미감
  1) 조선시대의 회화적 환경 42
  2) 민화의 색채의식 46
    (1) 민화의 개념과 미의식 46
    (2) 민화의 종류 및 색채 54

 


  3) 무신도의 색채의식 61
    (1) 무신도의 개념과 미의식 61
    (2) 무신도의 종류 및 색채 63
  4) 궁궐화의 색채의식 65
    (1) 궁궐화의 개념과 미의식 65
    (2) 궁궐화의 종류 및 색채 68

4. 한국회화사에 미친 오방색의 의의와 계승
  1) 한국의 전통사상에 대한 오방색의 미적 대응 73
    (1) 종교·사상에 조응한 한국적 미감 73
    (2) 한국미술의 고전적 성향 75
  2) 사회적 기류와 문화적 소산물 78
    (1) 사회적 변화에 따른 새로운 미감의 표출 78
    (2) 시대의 말기적 현상에 따른 색채의 범람 80
  3) 전통과 계승으로서의 의의 81

5. 결론 86


참고문헌 88
도판목록 93
참고도판 97

ABSTRACT 111


표목차


표1. 오행소속일람표 22
표2. 오방색의 개념도 22
표3. 전통표준색상 오정색 23
표4. 전통표준색상 오간색 23 
표5. 오방색과 색명 24

 

 

 

 

 

 

 

1. 서론


 1) 연구 목적
 
  색은 선이나 형 등과 더불어 미적 가치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인간은 색을 통해 정서를 표현하고 전달한다. 또한 색채는 인간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문화발전과정의 기본요소이며 색채문화는 한 민족·한 시대의 문화척도가 되고 있다. 따라서 색채문화는 선조들로부터 영속되어오던 무의식적인 잠재력을 복원하여 보다 풍요로운 감성적 환경을 조성한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보통 슬픔과 죽음 등의 부정적 정서에 흑과 백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에 색채문화는 생에 대한 긍정과 환희 속에서 생겨난다. 우리 나라의 사계는 뚜렷하고 풍요로운데 반해 색채문화가 획일적이고 빈약하다. 우리 환경이 그만큼 창조적이지 못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한 흑백 위주의 문화나 혹은 색의 무질서한 남용의 폐해를 지양하고, 풍요롭고 긍정적인 색채문화를 새롭게 조명한다는 데에 본 논문의 의의가 있다.
  한국미술에서 색채미학이 금기사항처럼 되어왔던 부정적 인식에는 몇 가지 연유가 작용한다. 조선조가 성립된 이후에 사의기법寫意技法을 중시해온 남종 문인화 사상이 우리 나라에 유입되면서 전반적으로 수묵화가 미술의 역사를 대표해 왔다. 또한 일제시대에는 신일본화 영향으로 한국 전통채색의 맥을 잃었으며, 해방이후에는 친 일본화 배척에 따른 채색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현상이 이어졌다. 수묵화가 득세하였고 더불어 서양화단의 단색조 경향이 더해져 채색화는 거의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서구적 가치에 의한 미술문화에 대한 자각이 일면서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채색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어 전통의 오방색五方色을 재해석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한국적 이미지를 현대적 조형어법으로 표현하는 작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는 우리미술의 자생력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본 논문은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한국미술과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색채문화를 분석함으로써 전통적 색채의식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에 일차적 목적을 두고 있다. 더불어 동시대의 가치체계에 의한 색의 사용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통해 한국적 정체성을 찾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연구 목적에 채용된 근거가 오방색이다.
  오방색은 사회의 관습이나 규범, 교육적 가치관 등의 문화적인 면에서 엄청난 영향을 미친 유교적 사상의 엄격한 금색제도에도 불구하고 민요와 민담 속에 '오색 무지개, 노랑저고리, 분홍치마' 등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는 색채어로 등장하였다. 한국인의 생활의식 속에 다감 다정한 색감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 고분 벽화, 고려·조선시대의 화조, 산수, 민속, 교화, 십장생계통의 그림들에 반복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오늘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조선조의 종교·사상과 시대적 배경에 따른 미의식과 오방색의 관계를 조명하였다. 특히 민화, 무신도, 궁궐화 등에 의해 계승되어진 오방색의 전통을 고찰하였다.
 
 
 2) 연구 내용 및 방법
 
  색은 감각적인 것으로서 시각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은 색채를 사용할 때 그 색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나 감각으로 순수하게 인식하기보다는 지식화되고 관념화된 색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일차원적인 감각에서 시작된 색감이 집단생활을 통해 사회와 민족의 같은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관념화된 보편성으로 작용하여 문화적 특성을 나타내는 독특한 요소로 변화한 것이다. 즉 색의 연상적 가치가 발전해 특정한 빛깔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되었다. 한국미술은 색채에서뿐만 아니라 형태에서도 시각적 표현이 배제되어 있다. 이는 우리의 문화적 특성과 깊은 관련성이 있는 것이다.
  이 연구의 주된 내용은 한국의 과거 문화 속에 나타난 색채를 진단하는 것이다. 한국인은 어떠한 의식에 바탕을 두고 색채를 생활화하였고, 또 회화미로 승화시켰던가를 추출하여 한국인의 색채의식을 정리하였다.
  본문의 내용으로 2장에서는 한민족이 색채를 사용하게된 전통적 미의식 또는 색감정의 사상적·철학적 배경을 검토하였고 그에 따른 오방색에 대한 개념과 사회생활에서의 색채의식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고분벽화, 왕궁과 사찰의 단청, 고려의 불화에 표현된 사상과 색채를 통해 그 시대의 사고체계나 문화, 환경을 이해하고 한국의 전통적 색채의식을 점검하였다.
  특히 3장에서는 비교적 자료가 풍부한 조선조 후기의 민화를 중심으로 서민의 민화, 무속화, 궁중장식화로 분류하여 미의식과 색채를 분석하였다. 민화는 인생과 우주관을 말하고자 할 때 자연이라는 매개물로 표현하였다. 즉 자연을 음양오행으로 이해하려 했던 한국인의 의식세계가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음양오행사상에 의한 색채를 통해 솔직하게 드러내는 민화의 소박하면서도 강렬한 색채감각의 표현 방식을 살펴보려 한 것이 이 장의 주요한 관심사이다.
  4장에서는 삼국시대,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의 미술품들에 한결같이 나타난 오방색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특히 종교, 사상, 사회에 조응한 미감으로서의 오방색의 의의를 고찰하였다. 오방색이 한 시대의 상징적 언어로서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윤택하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감당했으며, 우리의 회화사와 정신사에 매우 귀중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그런데 전통채색, 특히 오방색을 다룸에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현대에 복원된 유물에서 색깔로서의 오방색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출판물에 의존 할 수밖에 없다는데서 한계가 있었다. 단행본을 위주로 검토해본 결과 기왕의 연구서에서 백색에 대한 고찰의 성과는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오방색의 연구서는 단행본으로 출판된 사례가 거의 없다. 각 대학원의 석사논문에서만 수 차례 연구되었으나 비슷한 내용이 여러 논문에서 반복 기술되어 회화사적으로 고증되기는 어렵다고 여겨져 전통색으로서의 오방색 연구가 아직 미개척분야가 아닌가 한다. 또한 표준 전통색상으로의 오정색, 오간색은 1991년 국립현대 미술관의 《한국전통표준색명 및 색상》의 연구에서 제안된 일차·이차 시안의 가설로서 앞으로 계속 연구되어야 할 과제였다.
  연구 방법으로는 실증적인 문헌을 중심으로 전통색채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들을 추출하고 고찰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전통표준색명 및 색상》의 연구자료가 주요한 토대로 이용되었으며, 그 밖의 선행 연구자료들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이미 단행 출판된 회화사에는 색채, 특히 오방색에 관한 내용이 미미하여 한국인의 미의식과 오방색의 관계에 대한 본 연구가 대단히 미흡한 상태일 수밖에 없음을 부언해둔다.

 

 

 

 

 

 

 

 

 

 


2. 한국의 전통적 미의식과 오방색의 사상적 근원
  
 
 1) 한국미의 특성과 사상적 배경
 
  (1) 한국미의 특색
 
  우리의 의식구조는 선대 때부터의 생활습관이 체험을 통해 몸에 베어 온 것으로 이러한 것 가운데 어떤 공통적인 것이 형성되어 왔다. 색채 역시 이를 사용할 때에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의식에 따라 판단하여 왔다. 과거의 생활 습속가운데 한국인 특유의 색채의식이 내재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통적 미의식은 어떤 민족이나 국가에 오랜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미 개념이며 그 구성원의 집단 경험이 여과된 것으로, 건축, 복식, 의식이나 축제에 쓰이는 기구, 그 밖의 일상생활의 도구들 가운데 자주 나타나는 지배적인 형태나 색이다. 또한 지배적 특색이 아니더라도 다른 민족이나 다른 지역에서 잘 나타나지 않고 그 지역·그 민족에게만 나타나는 독특한 미감이다. 이에 근거하여 먼저 한국미술품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한국적 미감과 오방색의 미감을 살펴보고, 그 근간이 되고 있는 사상적 배경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전반적으로 한국미술의 미의식이나 한국미의 특색으로 무작위의 미, 무기교의 미, 자연주의, 한의 초극, 적조의 미寂照美, 비정제성, 해학, 자유분방함, 소박, 해화미諧和美, 담백의 미, 비움의 미 등을 들고 있다. 한국미술은 대체로 예술에 있어서의 절대에의 숭상과 자신의 이미지 실현이라고 하는 이상보다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탄생시킨 예술이라는 데에서 연유한다고 하겠다. 서양에서는 일상생활에서의 미와 예술적 미를 구분하여 사용한데 반해, 우리 나라의 예술은 그 경계가 애매하거나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는데서 한국미의 특질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고유섭은 무기교의 기교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한국미술은 상품화된 미술이 아니므로 정치한 맛, 정돈된 맛에서는 항상 부족하나 질박하고 둔후한 맛과 순진한 맛에서 우수하다고 했다.(도판1)
  이러한 무기교의 기교에 의해 표출되는 미의 특성에 대해서 최순우는 의견을 같이하며, 순리의 아름다움, 적조, 소박, 단순한 아름다움, 무심한 아름다움, 고요한 익살의 아름다움, 담담한 색감의 해화미 등으로 정리했다.(도판2)
  즉 무기교의 미, 무작위의 미는 무의식적인, 무관심한 마음의 작위형태에서 비롯된 것으로 완전한 미감이나 균형을 추구하지 않는 미완의 미, 비정제성으로 나타나거나, 일정한 양식적 규격을 터부시하는 자연성, 간박성, 해학성으로 나타난다. 또는 무미, 무색, 무념의 이미지인 담백함으로, 허와 공을 지닌 자유로운 정신상태의 비움의 미로 표현된다. 이것은 분청사기, 백자를 비롯한 한국의 전반적인 공예품이나 건물에 사용된 자연스럽게 구부러진 목재, 비대칭의 쌍탑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도판3,4) 민화의 채색이나 단청, 한복, 보자기 등의 오방색 또한 화려하고 완벽하고 장식적인 기교로서의 색채보다 채우고 싶지 않은 빈 마음과 미완의 자연스러움, 천진스런 순수함으로 표현된다.(도판5) 이러한 한국미술의 무작위는 생활과 일체화된 미감으로서의 양식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
  한편 야나기 무네요시에서 비롯된 비애미는 오늘날 식민사관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1960년 이후 한국의 문학과 예술의 전통으로 한恨의 개념이 대두되었다. 천이두는 한국인의 한은 원怨, 탄嘆, 정情, 원願 등의 모순적인 정서와 복합체를 이루어 그것을 끊임없이 소화하고 정화하고 삭임으로써 예술적인 멋과 윤리적인 슬기를 지향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최병식은 한국의 한은 애절하고 가슴깊이 파고드는 아픔이 스며있으면서, 반항이나 극복이라기보다는 비극에 순응하면서 빚어내는 색채로, 또는 곡선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오구굿이나 풍년과 안전을 기원하는 별신굿 등의 무속적인 행위와 민화의 서민정서는 한의 아픔을 비교적 단순한 서민적 방식으로 표출해 가는 것이라고 했다.(도판6)
  또한 한국의 해학미는 비정제성, 적조미, 한의 초극에 연유되어 표출한 것으로 민화의 '까치 호랑이 그림'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민화 속의 호랑이는 맹호에게서 느껴지는 공포가 아닌 우스꽝스럽고 순진한 표현으로 되어있으며, 기교를 부리지 않는 어리숙함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조선조 말엽, 관리들이 타락하고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 민중이 삶의 의욕을 잃고 있을 때 판소리, 탈춤, 민화의 해학미는 어려운 세상을 한바탕 웃음으로 날려버리는 유희본능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현세적 인생관이 표출된 것으로 안휘준이 말하는 명랑하고 풍류적이고 큰 것을 추구하고 작은 것을 되도록 생략하는 대의성, 천진성을 띤 한국미와 상통한다.(도판7)
  한국적 미의식의 자연주의 특색에 대해 김원용金元龍은 중국이나 일본의 짙은 화장과 화려한 의상을 한 배우에 비해 시골처녀에게서 느껴지는 겸손하고 소박한 순수미라고 했다. 지붕에 널린 고추, 마당에 열린 감 등은 원색이면서 동화 같은 한국의 색채로서, 꽃은 붉게, 나무는 파랗게, 가미 없는 단순한 배색으로 한국적인 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즉 삼라만상을 그저 있는 대로 파악하고 관조하는 경지로서의 순박한 자연주의라고 했다.(도판8)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조형과 색채에 나타나고 있는 미의 특성은 자연성을 비롯하여 무작위성, 소박성, 간박, 비정제성, 대범성, 한의 초극, 명랑, 고요와 익살, 해학, 자유분방함 혹은 평범성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전반적인 미의식에 근거하여 오방색 역시 有유의 개념이 아닌 무無의 개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을 만들어내기 위한 채색이라기보다는 무의 집적集積, 즉 색을 칠하기보다는 쌓아올려서 나타낸 투명한 채색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엄격하고 화려한 당채, 일본의 몽롱하고 장식적인 농채와는 달리 한국의 색채는 중간색조의 소박한 자연색으로 느껴진다.(도판9)
  이러한 한국미의 특색은 채색화의 대표적 표현양식이랄 수 있는 고려불화의 미려하면서도 투명한 진채와 민화의 맑고 명랑한 서민의 색감에서 일치한다. 한복의 색이나 청명한 하늘과 바다에 비견되는 고려청자의 색과 조선백자의 색 등 모든 색채가 밝고 투명하다. 이외에도 흉배, 활옷, 놀이개, 배갯모, 안경집 등의 자수그림과 보자기의 색감은 조선 상류사회 생활사의 멋스러운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민화의 오방색은 밝고 활달한 아름다움으로 드러난다. 그 아름다움이 지닌 밝은 사상은 가난과 계급제도의 불 합리 속에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던 서민들과 부녀자들에게 현실을 순응하고 웃음을 띠게 하는 위안으로 작용했다. 민중들은 오방색에 의한 초자연의 힘을 빌어 구원과 벽사진경 邪進慶을 기대하고, 그 믿음과 마음에서 전통사회의 집 안팎을 그림으로 메웠던 것이다.
  현세적 조건의 결여사항을 구체적으로 보충하려는 것이 기복이며 주술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오방색은 현실적인 삶에서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항을 구체적으로 확보하려는 민속차원의 기복측면으로 발현되었다. 그러나 원한이나 저항이라기보다 《흥부전》 《수궁가》 《배비장전》 《심청전》의 판소리나 살풀이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음과 헤어짐의 심연 속에서 계시되는 삶과 만남의 밝은 빛이다. 신접神接의 황홀경이고, 무속상의 엑스터시이다. 즉 오방색은 한국인의 본능적 의식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소박하면서도 강렬한 색채감각이다. 오방색은 전통시대의 상징적 언어로서 현실의 삶을 순응하고 정화함으로써 예술적인 멋으로 승화하였다.
  일반적으로 감상적 회화의 색채는 개인으로서의 작가와 감상자 사이의 미적 공감대를 통해 발현된다. 그러나 오방색이 상징하는 의미와 미감은 개성적인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이나 낯선 것이 아닌 공통의 감수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민족의 공통된 세계관이 원초적인 미적 체험으로 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오방색은 조선시대의 무색조 일상 속에서 그들이 찾아낸 순수한 원색으로서, 유법儒法을 발현하여 그림의 격조, 소위 화관·화론의 정통성을 추구하는 산수화, 문인화 등에 대한 상대적 미감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면서도 조선시대의 수묵회화를 포함한 모든 한국예술을 아우르는 한국적인 무작위의 창의와 소박하고 허점이 있는 따뜻한 인간미가 내재되어 있다.

  (2) 전통적 미의식의 사상적 배경
 
  민족의 문화적 특질이나 미의식은 문화를 주도하는 시대정신의 유형으로서 어느 한 시기에 국한되기보다는 각 시기의 정치 이데올로기, 종교이념, 사상 등에 의해 부단히 변모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한국미의 특질이 규정되기 위해서는 이를 설명 할 수 있는 기반이 있어야 한다. 이에 그 사상적 배경으로서 무교 사상, 음양오행 사상, 자연주의 사상, 유교·불교·도교의 종교사상을 각각 살펴보고자 한다.
  
   ① 무교 사상적 배경 
  인류는 상고시대부터 자연과 천신에 대한 숭배사상을 바탕으로 살아왔다. 고대 한국은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에 기초를 둔 천부신과 지모신에 대한 농경의식을 행하였던 농경문화였다.
  색의 사용에서도 색채 자체가 감각적 측면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주술적,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샤머니즘적인 색채관으로 일관하여 왔다. 특히 동양에서의 색채관은 가시적이고 과학적이며 광학 분석적인 서양의 색채관과 달리 개념적, 관념적으로 색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여 왔고, 색채는 자체의 미보다 신앙의 대상과 상징으로 존재하여 왔다. 신에게 곡식의 풍요를 기원하거나 신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강해지기 위해 주술로 사용되었다. 각종 조형미술, 무용할 때 쓰는 가면, 조각물의 딸랑이 악기, 무용방패, 얼굴과 신체 등이 제례의식에 따라 채색됨에 따라 비로소 종교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三國志》 〈동이전한東夷專韓〉에 의하면 '오월과시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천신제를 지내며, 모든 사람이 모여서 밤낮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고 논다'고 하였다. 또한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專서문〉에도 '노래하고 춤을 추며 변관을 쓰고 비단옷을 걸치고 조두俎豆라는 그릇을 사용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한국 무속의 기원은 가무였으며,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古, 마한의 천군天君의 제천의례는 엄숙한 의식이기보다 신명나는 우리 놀이문화의 근원이었다. 고려조의 팔관회八關會역시 불교의 법회이기보다 고래로 있었던 제천의식의 반복으로 음주가무가 벌어지는 축제였다. 이러한 제천의례는 쉽게 말해서 굿판으로 한국민족의 종교적 심성 안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무교의 원형이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이 제천의식에서 보여주었던 그 자유분방함은 질서를 넘어선 무질서적이고 카오스적인 무교에서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의 가장 깊은 종교적 심성 안에는 무교가 자리 잡고 있다. 그 무교의 핵이 엑스터시에 있다면 한국인들의 종교적 태도, 혹은 일상적 태도, 더 나아가서 문화 예술의 본질은 무교적 망아경에서 파생된 영향의 그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이 국가 통치이념이었던 조선조는 이성을 가장 중시하였고 모든 자연의 이치를 도덕적으로 해석하였다. 유교와 남성에게서 소외되었던 서민과 여성들은 유달리 신앙성이 약한 유교보다 무교를 찾았고, 종교적 숭배물이나 구복적 내용의 무속화와 민화 등에서 위안을 구했을 것이다.
  또한 불교문화와 유교문화에도 그 심층에는 무교적 요소가 깔려있다. 불당 안에서 가장의 출세와 자식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치성을 드리는 한국 어머니들의 모습은 불교의 정도실천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유교의 제사와 무교의 고사 의례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천재지변이나 죽음 등의 큰 재앙에 대처할 때에는 유교적 이성보다 무교적 감수성이 더욱 발휘되었다. 즉 유교적 산물은 가족제도 및 한국인들의 일상생활과 사회적 성격을 결정하고 있지만, 신명의 예술과 놀이문화를 좌우하는 한국인의 원초적 심성은 다름 아닌 무교적 산물이다.(도판10)
  우리의 시나위와 산조, 판소리, 살풀이, 탈춤, 민화 등은 자연스러운 예술미가 한층 발현되는 분야이다. 민화는 같은 소재와 주제를 담았으나 제멋 대로이며, 자연스럽다 못해 거칠고 투박한 미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빈궁한 생활 속에서도 오방색의 밝은 미감으로 표출되는 민화의 낙천성은 한국 무교의 인생관에서 비롯된 사고방식에 연유한 것이라 하겠다.
  민화적 소재의 四獸사수, 화조, 산수, 민속, 교화, 십장생의 그림이 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고려와 조선시대 미술품에 그대로 이어지고 끊임없이 반복해 나타났다. 이는 한국적 사고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바뀌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세 아닌 현세에서의 수복을 치성하는 무교적 심성이며, 민화와 오방색은 그들의 인생과 철학, 생활 습속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② 음양오행 사상적 배경
  음양오행은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사유관념으로서,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자연적인 이치뿐만 아니라 성적, 신화적, 종교적, 윤리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사회제도나 풍속 등 온갖 문물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에 '동이가 조두라는 그릇을 사용하면서 무악을 즐기고 하늘의 별을 보고 천문을 헤아린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동이의 무속적 풍속이 연금술이나 천문학 등의 음양오행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음양오행사상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문화권에서 사상체계의 중심이 되어 온 원리로 천문현상이나 인체에서 연유된다. 중국의 최고의 신화집이자 지리서인《산해경山海經》에 실려있는 다음과 같은 글귀에서 고대 동양인의 우주관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공간 사이에 있고,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영향을 미치며
    계절의 순환, 세월의 흐름 속에 만물이 변한다.
 
  하늘에는 해와 달의 항성과 다섯 개의 행성인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오성五星이 있다. 이것은 지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에너지 장으로서 태양은 빛을 통해 주야晝夜라는 양기陽氣의 변화를 주도하고 달은 인력을 통해 음형陰形의 변화를 주도한다. 즉 일월日月은 음양陰陽을 낳는다. 또한 오성이 일으키는 에너지의 장은 장구한 세월동안 반복하며 단련시켜서 지상의 존재들인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라고 부른 다섯 가지 원소의 오행五行을 낳는다.
  즉 우주와 인간의 모든 현상은 음·양 두 원리로 이루어지며, 이 음양의 영향을 받아 삼라만상이 생성 소멸된다. 이것이 오행으로서 목화토금수의 변전變轉이다. 이에 따라 한해의 시작인 동지를 음, 한해의 중간인 하지를 양으로 표현할 수 있다. 춘분은 목, 하지는 화, 추분은 금, 동지는 수로 표현되고, 토는 변화를 일으키는 사계의 바탕이 된다.
  상생설相生設은 이러한 생성적 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오행은 상생하면서도 상승하는 작용을 가지고 있다. 상생하면 만물이 생육하고 상승하면 서로 거절하여 만물이 이에 의해 쇠망하는 것이므로 자연의 재화나 인사, 화복 등은 모두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우주의 생성과 삼라만상의 발전을 이처럼 성장과 조화로 파악했으므로 인생관이나 세계관도 음양의 상생론에 의거하여 성립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때로는 변질되고 부정되기고 하였으나 도교계통의 민간신앙에서 유교적 덕치주의와 같은 국가의 정치이념에 이르기까지 합리화되고 체계화되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였다. 또 정치는 물론 사회, 문화의 각 분야, 즉 점성, 율력, 의술, 풍수지리, 민간신앙 등 여러 분야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며 모든 자연현상을 해석하는 논리 체계가 되었다.
  우리 나라는 고구려시대 4세기경에 오행설에 입각한 유교적 덕치주의가 왕권행사를 견제하는 이념적 도구로 수용되었다. 그리고 고분벽화의 사신도를 통해 내세에 대한 종교·신앙적 측면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한편 〈태극도설太極圖設〉에서는 태극이 음양을 낳고 음양이 오행을 낳는다는 구도로 이해된다. 음양과 오행이 합하여 하나가 됨으로써 건乾과 곤坤, 즉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생겨나고, 바로 여기에서 차례로 만물이 발생 진화한다고 하였다. 즉 음양은 우주간의 두 가지 상반된 기본 동력으로서 양은 남성적, 능동적, 밝음, 더위, 건조, 굳음 등을 나타내고, 음은 여성적, 수동적, 어두움, 추위, 습기, 부드러움 등을 나타낸다. 상호 대립함으로써 두 개의 원리는 대자연 또는 현상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그것들은 지고의 하나 속에서 모든 것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나타낸다.
  이러한 태극도설은 그후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의 기초가 되었다. 16세기 우리 나라의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등의 탁월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심화되면서, 민간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이기철학 내지 음양오행사상이 널리 퍼져 나갔다. 이것은 형이상의 이理, 즉 성性의 세계와 형이하의 기氣, 즉 정情의 세계로서, 인간됨의 자기완성을 지향하는 실천적 인간가치로서의 한국예술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자연의 이치를 알고 이법理法을 지켜야 한다는 사상은 이렇게 음양오행사상과 결합하여 정치뿐만 아니라 일상적 행사에도 적용하였으며, 한국인의 의식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게 되었다.
  
   ③ 자연주의 사상적 배경
  자연은 사상, 종교와 더불어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동양에서 예술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회화사에서는 산수화의 개념이나 주요 미학사상이 모두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한국미술의 무작위 정신에 기인한 미술전반의 미의식이나 도자기의 청색과 백색의 미, 미려한 곡선과 수많은 문양에서 자연에 대한 탐미정신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우리민족은 고대인의 특성중의 하나인 태양숭배와 경천사상에 따라 고유한  사상을 형성하였는데,  은 곧 백을 뜻하여 흰색을 신성한 색으로 다루게 되었다. 흰색은 물감을 들인 색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원색이라는 의미에서 흰색은 무색이며, 무색은 곧 자연 그 자체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에 동화하며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올바른 삶이라 믿어왔던 결과이다. 이것은 한국미술의 바탕을 흐르는 자연주의 형성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우리 나라의 완만하고 둥근 형태와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화된 노년기성의 지형은 우리들의 심상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자연은 심리적 긴장을 안정시키는 적당한 볼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정된 균형감을 갖게 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정원은 자연의 연장으로서, 인간이 만들었다는 느낌을 최대한 배제하여 자연으로 회귀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중국과 일본의 정원은 그 규모에서 차이가 있지만 인간의 기술과 논리적 꾸밈으로 공간을 분리하여 재구성한 인위자연이다. 한국의 건축은 뒷산과 터를 기묘하게 이용함으로써 뒷산을 닮아 있다. 자연의 흐름을 깨트리지 않고 인위의 건축과 천연의 봉우리가 조화를 이루어 천연스럽게 살아가도록 하는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도판11) 
  또한 한국 산천에 널려있는 천연재료는 한국미술의 특질과 미의식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화강암의 특징과 서양의 대리석을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서양과의 미감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리석이 칼로 쉽게 다룰 수 있을 만큼 연하고 부드러운 반면, 화강암은 아주 단단하여 형태를 만들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결국 화강암의 표현은 외면성보다는 내면적인 표현이 강조된다. 이와 같이 우리의 문화는 냉정하고 정확한 기하학적 인간, 또는 기하학적인 형태감이나 차가운 느낌으로 나타나기보다는 화강암의 성질이나 질감과 같이 소박함, 따뜻함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색채 또한 소박하고 순수한 중간색과 단순한 배색이 애용되었으며 자연스럽고 여유 있는 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김원용은 한국미술의 특색을 '자연주의'라고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곧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 재현하려는 자연주의이며, 철저한 아我의 배제이          다. 무의식중에 자연이 만들어낸 것 같은 조화와 평형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 조화가 '비조화의 조화' '무기교의 기교' 일 때 그 조화의 상태를 '멋'이라고 부      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미술품은 요란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때로 적막하여 주위 환      경이나 자연과 훌륭하게 융합 조화를 이루어 낸다....유럽의 자연주의가 자연과 인      간의 화합을 이상으로 하되 자아와 타자의 구별을 의식하는데 반해 동양의 자연주      의는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합일을 이상으로 삼는다.
 
  한국의 평화롭고 너그러운 자연환경에 대한 친밀감이 자연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④ 유·불·선 사상적 배경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로부터 중국의 한나라에서 유儒·불佛·도道의 사상을 받아들여 사고와 생활에 적용하였다. 《삼국사기》 진흥왕 37년조에
   
    최치원의 난랑비鸞郞碑서문에는 "나라에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있으니 이것을 풍류      라고 하였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밝혀져 있는데, 실제적으      로 유불선의 삼교를 포괄하여 중생을 교화하자는 것이다.
 
  고 기록되어있다. 신라시대 우리 민족의 미의식에 종교적 영향이 매우 컸음을 시사하는 글이다. 한국의 본격적인 미술활동이 종교이념을 외형으로 하여 시작되었음은 물론이고, 현재 남아있는 전통유물 중 많은 수가 불교적 종교이념에 관련되어있다.
  유교는 조선시대의 중심적 통치 이념으로서, 회화를 비롯한 모든 미술분야에 성리학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다. 이기론의 철학과 사상은 정신적 내면성을 표상하는 실천적 인간학으로서, 한국예술의 특질을 마음과 뜻과 행위의 일체를 이루는 실천적 가치에 두고 있다. 한국의 미적 특징들인 소박성 혹은 무작위성, 투명성과 익명성, 관념성 등의 조형상의 특징은 규범 철학적 성격이 강했던 조선시대에 더욱 두드러진 것이다. 즉 화려한 색채와 기교, 장식보다는 검소하고 경쾌하면서 실용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져서 조야하다고 할 정도로 무식無飾 무화無華의 조선적인 미술로 전개되었다.(도판12)
  그러나 유교의 세계관 중 생재론生財論과 절용주의節用主義의 적극적인 실천은 새로운 창의적 욕구와 기술의 진보 등을 저해하였으며, 무색 위주의 생활과 미술을 지향하는 타율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조선조의 유교가 주자학으로 획일화되고 그 사상이 단순하고 철저한 것도 한 요인이다. 지나치게 명분주의와 형식주의에 따라서 법도만 강조하는 예학으로 흐르고 인격도야만이 중시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유교의 영향은 미술사에 있어 선비 정신의 발현이라고 하는 문인화풍 등의 회화양식을 통해 사실보다는 정신성이 강조된 수준 높은 미술형태로 발전했다는 일면이 있다. 그와 함께 장인으로의 창작행위나 색채로 표현되는 모든 예술분야를 무시하고 천시함으로써 진정한 창작예술로의 발전을 저해했다고 하는 모순점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지배계급의 유교적 도덕과 가치관은 서민들로 하여금 계급사회의 불 합리, 생활의 빈약 등으로 시달리게 했으며, 기복적 불교와 무교에 심취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사대부의 회화사가 대체로 유교, 불교, 도교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그림이었다면 민화는 민중의 현실 속에서 생활 그 자체 도구로써 복록을 구하는 그림이었던 것이다.
  한편 불교는 삼국시대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상 및 문화예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불교사상을 제외하고 한국의 미를 논할 수 없으며, 이는 서양의 미의식이 기독교를 제외하고 논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불교미술은 교리나 사상에 대한 소산이라는 기본적 역할 외에 불교의 세계관, 즉 정토교적 사상과 화엄사상 등에 대한 미술적 표현이다. 종교미술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미술자체로서의 완성이기도 하다. 불교의 중관中觀, 원융圓融, 상즉相卽, 불이不二와 같은 '하나'라는 사상은 예술에서도 구체화되었다. 원만한 미로서 송의 자기나 고려자기에 표현되어 있다. 또 무無나 무심, 공空과 같이 자아를 초극하는 불교의 교리는 한국적 미의식으로 반영되었다. 서산 마애불의 어린아이 같은 순진 무구한 자태, 신비로운 미소의 미륵반가상, 단순하면서도 정제된 형식의 한국의 전형적인 불상양식과 수많은 한국적인 사찰건축과 탑을 탄생케 했다. 특히 석굴암 불상은 종교적 이상세계가 가장 아름답게 구현된 것으로 비례·조화 등에서 그 정점을 이루고 있다.
  불교에서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은 번뇌를 유발하는 근본으로 간주되었다. 밀교에서는 깨달음의 체험을 모든 감각기관에 의한 표현으로 나타냈으며  만다라의 색채는 환희와 신비의 세계를 표출한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탱화의 형태로 전승되고 있으나 우리 나라의 만다라는 다만 성聖, 욕慾을 구분하는 공간설정을 위한 것으로 성역공간을 방어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에 의해 불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았으나,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사회의 이면에서 활동하는 민간 신앙으로서의 성격으로 변모되었다. 때문에 조선의 불교미술은 고려시대의 귀족예술에 비해 대체적으로 민중들의 기호와 취향에 맞는 대중적인 형태로 발전하였다. 특히 임란이후 고승들의 두드러진 활약에 힘입어 불교계가 활력을 다시 찾게 되고 피폐화된 사찰의 중창이 활기를 띠게 되면서 조선말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현세구복적 성격을 띤 불화로 변모하였다. 그 증거로 여래화 계열의 아미타불화, 신중화神衆畵가 다수 제작된 예를 들 수 있다.(도판13,14) 
  한편 고려 초기에 팔관회와 연등회를 국가적 의례로 다루어 중요시하는데 이후 불교적 연등행사는 민간신앙과 습합되어 세시풍속의 하나가 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불교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이기보다 민중의 구복적 신앙으로 저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디 동양의 미의식은 노장의 무위자연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산수의 미로 귀착되어졌다. 또한 사군자의 발생은 남종문인화가 가지고 있는 불교의 선미禪味와 노장의 무위자연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회화정신과, 유교의 인격수양과 청빈하고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표현되는 회화정신과, 그리고 은일적인 사상이 일치되어 유·불·선 합치의 예술로 승화되어 나타났다.(도판15) 도가사상은 조선시대의 회화에도 크게 영향을 미쳐서 산수화의 발전에 현저한 기여를 하였으며, 이 시대에 실용화 이상으로 감상화가 주류를 이루며 유행하였던 사실도 이러한 도가사상과 성리학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조선조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인 무작위적 미감은 노장의 회의와 부정으로 일관되는 공허론空虛論과 무위사상에 관련이 깊다. 이것은 유有와 무無의 개념을 모두 부정하고 음양의 초인식超認識 체계의 도道나 자연이라는 절대개념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도가철학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기보다 불로장생, 기복, 신선사상, 도참사상圖讖思想 등을 중심으로 한 도교적 내용과 샤머니즘이 복합되어 반영되었다. 더욱이 민중들에게서 한국 종교의 특성이 현세 구복적 성향으로 나타난 것과 같이 도교 또한 고유사상과 습합하여 민간신앙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이러한 민간신앙적 도교는 현세적 삶의 조건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을 중심과제로 삼고, 질병이나 일반적 재앙 같은 구체적 사건을 구체적으로 해결해보려는 행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형태는 오늘날까지도 서낭신, 용왕, 칠성신 등의 세시 풍속이나 무속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조선조까지의 공예, 도자기, 건축, 민화 등에서 무작위적 본능으로 잘 나타나 있다. 또한 민간 신앙상의 세속적 화의를 품고 있어 민중화적 성격을 띤 민화의 개념과 일치한다. 민화는 세시풍속에 따라 그려지고 쓰여지며 상징화적 성질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민족 미의식의 사상적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 상반된 구조가 있다. 그중 하나는 백색과 남색으로 표출되는 탈채색, 금채색 경향을 주도한 자연주의 사상과 유·불·도의 철학적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미술품이나 사찰에서 볼 수 있듯이 화려하고 원색적인 색을 사용하여 색에 주술적인 목적과 의미와 상징성을 부여한 무교사상과 음양오행사상이라고 하겠다.

 
 2) 오방색의 개념과 색채의식
 
  한민족은 선사이래 근대에 이르기까지 샤머니즘·불교·도교·유교적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면서 음양오행사상에 의한 오방색을 일관되게 사용하였다. 또한 오방색은 우리의 민족적 정서 환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쓰여졌으며, 한국의 전통적 미의식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 오방색의 개념

  오방색五方色은 음양오행설에 따른 오행五行의 각 기운과 직결된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의 다섯 가지 기본 색이다. 동서남북 및 중앙의 오방五方이 주된 골격을 이루고 있는 양陽의 색이다. 다섯 가지 방위사이에 놓여지는 간색間色으로서의 홍紅·자紫·벽碧·녹綠·유황색 黃色은 음陰의 색이다. 즉 동방에 청색, 남방에 적색, 서방에 백색, 북방에 흑색, 중앙에 황색을 두었다. 그리고 동방과 중앙의 간색은 녹색, 동방과 서방의 간색은 벽색, 남방과 서방의 간색은 홍색, 북방과 중앙의 간색은 유황색이며 북방과 남방과의 간색은 자색이다.
  또한 오색은 오행의 원리에 따라 계절, 오미五味, 오상五常 오장五臟, 오관五官, 오음五音 등과 연결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1) 오행소속일람표

 
 
  다음의 도표는 오색을 방위와 오행의 개념도로 나타낸 것이다.

      (표2) 오방색의 개념도   

         

 
 
 
 


 

  다음은 오정색五正色과 오간색五間色에 대한 색의 속성을 알아본 것이다.

(표3) 전통표준색상 오정색

(표4) 전통표준색상 오간색
  다음은 한국인의 색채사상에 의한 색채표기를 정리한 것이다.

(표5) 오방색과 색명


 
  오채五彩·오색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후한시대의 미술 〈염직染織〉편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옛사람의 형상을 보니 일, 월, 성, 신, 산, 용, 꽃, 벌레 등을 오채로 장식         하였고, 또 제기祭器, 해초, 불, 미米, 분粉, 토끼모양의 수繡, 채색, 수 등을 오채로     나타내 오색을 실시해 복장을 만들었다.
 
  우리 나라 고대의 색채관을 드러낸 최초의 문헌 기록인 《삼국사기》에서도 고구려시대에 적색과 청색을 각각 남과 북의 상징색채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통하여 머리는 하나이고 몸은 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서 왕께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부여왕에게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고구려를 합병하심이 어떤가      요?" 라고 말하였다. 붉은 까마귀를 받은 고구려왕이 부여왕에게 대답하기를 "검은      색은 북방의 색깔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으며,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      서로운 것인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나에게 보냈으니, 두 나라      의 존망을 알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또한 일연의 저서 《삼국유사》에는 우리 민족이 과거로부터 오방위에 따른 색을 풍수에 적용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산은 바로 백두산의 큰 줄기로서 각 대에는 부처들의 산몸이 항상 머무는 곳이      다. 동방은 푸른빛이 있는 곳인지라 동대의 북쪽 귀퉁이 밑, 북대의 남쪽 기슭 끝      에 마땅히 관음방을 설치하여 둥근 형상의 관음과 푸른 바탕에 1만 관음상을 그려      모시고..... 남방은 붉은빛을 맡은 지라 남대의 남쪽 면에 지장방을 두고, 둥근 형상      의 지장과 붉은 바탕에 8대 보살을 위수로 1만 지장의 화상을 그려 모시고..... 흰빛      은 서방인지라 서대의 남쪽 면에 미타방을 두고, 둥근 형상의 무량수 상과 흰 바탕      에 무량수여래를 위수로 한 1만 대세지 보살을 그려 모시고..... 검정색은 북쪽 땅인      지라 북대 남쪽면에는 라한당을 두고 둥근 형상의 석가 화상과 검정 바탕에 석가      여래를 위수로 5백 라한을 모시고..... 누른빛은 중앙에 처한지라 중대에 있는 진여      원 가운데는 문수와 부동의 소상을 모시고 뒷벽에는 누른 바탕에 비로차나를 위수      로 한 서른 여섯 가지로 변화하는 형상을 그려 모시고.....
 
  오색의 사용은 오행의 원리에 의해 따른 것으로, 상극색相剋色은 조화될 수 없고, 상생색相生色은 서로 조화되어 나타났다. 또한 반드시 주색主色이 있어 어느 한 색을 중심으로 하고, 나머지는 그 색에 부합되는 색을 사용하였다. 오행의 상생구조에 따라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이 이웃하면 상생하고, 상극구조에 따라 하나씩 건너면 극한다. 이에 따라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색은 청생적, 청생흑, 적생황, 적생청, 황생백, 황생적, 백생흑, 백생황, 흑생청, 흑생백이다. 또 서로 부합되는 색은 청극황, 청극백, 적극백, 적극흑, 황극청, 황극흑, 백극청, 백극적, 흑극적, 흑극황이다.
  한편 한민족은 예로부터 오방색의 청·적·황·백·흑색에 해당되는 고유어를 가지고 있었는데 색의 차원을 나타내는 '검다, 희다, 푸르다, 붉다, 누르다'가 바로 그것이다. 산뜻함이나 강조를 나타내기 위해 '새, 샛, 시'자 등의 접두사를 넣어 새하얗다, 새파랗다, 새까맣다, 샛노랗다, 시뻘겋다, 시퍼렇다 등으로 표현하였다. 또 검붉다, 검푸르다, 검디검다, 검누렇다 등으로 분화되어 색채의 명, 암, 탁, 청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하였다.
  청색은 오행 중 목木으로서 떠오르는 동방에 해당되고, 태양이 솟고 광명을 주는 까닭에 하늘과 무성한 식물 등을 상징하는 색이다. 우리 나라의 고대어에서 '푸르다'의 어근은 '팔-'이고, 풀에서 변한 말이다. 이것은 만물이 생성하는 봄의 색인 까닭에 창조, 불멸, 생명, 신생, 희망을 상징하며, 양기가 왕성한 벽사기복의 색으로 즐겨 사용되었다. 한국인들은 청색과 백색에 강한 선호를 보이고 있으며, 청색은 학과 같은 청렴결백한 선비의 색으로 간주되었다.(도판16)
  적색은 오행 중 화火에 해당된다. 온화하고 만물이 무성한 남방을 나타내고 계절로는 여름에 속한다. 태양, 불, 피 등과 같이 생명력이 충만한 색이므로 생성과 창조, 정열과 애정, 적극성을 나타낸다. 적색은 가장 강력한 양의 색으로 인식되어 재앙과 악귀를 물리치는 강력한 벽사색으로 사용하였다. 우리 민족의 무속이나 민간생활과 매우 밀접한 색이다.(도판17)
  흑색은 오행 중 수水로서 북방을 나타내고 겨울에 속한다. 우리 나라의 고대어에서 '검다'의 어근은 '검'이라는 명사어로 곰, 거북, 거미 등이 파생된다. 이들은 동물인 동시에 신격을 갖춘 인격신의 존재로 간주되며, 단군신화의 곰의 검은 색깔에서 검은색이 유래된 듯하다.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고 스며들기를 좋아하는 물과 같이 음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인간의 지혜를 관장하며 은밀하고 현묘함을 좋아한다. 민간신앙에서는 화재예방의 부적으로 먹색의 水수 자를 써서 불을 취급하는 곳에 거꾸로 붙인다. 또 만물의 씨앗을 간직하고 저장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적색을 내포하고 있으며, 적색은 황색을 내포하고 있어 흑색은 모든 색의 혼합 색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흑색은 영면永眠을 불러일으키는 색이다.(도판18)
  백색은 오행중 금金을 나타내며 서방에 속하는 것으로 가을에 해당된다. 15세기의 표기인 ' -다白'의 어근 ' '는 태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햇빛을 흰색으로 인식한데서 비롯되었다. 단군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고 한 것도 희고 깨끗하며 밝다는 태양숭배사상, 즉  사상에 연원이 있다. 흰 빛깔은 빛을 상징하므로 결백과 진실한 삶과 낮, 순결 등을 뜻하며, 이는 우리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은 원인이기도 하다. 선조들은 백색을 말할 때 아주 희다는 뜻으로 순백, 그리고 선명하게 희다고 해서 선백鮮白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초월적 존재의 고결한 정신을 표상하고 탄생 또는 시작 이전의 무의 상태를 의미하며 색깔에 대한 완전한 근본이고 시작으로 영원한 회귀성의 변화를 실행하는 색이다.(도판19)
  황색은 오행 중 토土에 해당되며 오방색의 중심 색으로써 모든 것을 포용하고 조화롭게 만드는 땅을 상징한다. 고대어에서 '누렇다'의 어근은 '놀-'이고 이것은 땅의 뜻을 지닌다. 천지현황天地玄黃이 의미하듯이 하늘은 검게 땅地은 누렇게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우주중심에 해당되므로 가장 고귀한 색으로 인식되어 임금만이 황색 옷을 입을 수가 있었다.(도판20)
 
  (2) 생활 속에 나타난 색채의식

  우리 나라는 고래로 이와 같은 오색을 두루 사용함으로써 오색의 화합을 통하여 오행을 상생시키고자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우리 나라의 태극기는 우주만물의 근원이며 음양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는 태극의 원리를 응용하여 제작하였다. 곧 태극도는 음양상호작용의 상징이며, 전체와 부분의 역동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적색은 존귀와 양陽이고, 청색은 희망과 음陰이며, 사괘四卦는 천지일월天地日月과 사시四時·사방四方 등을 상징하는 우주관의 표현이다.(도판21)
  공간개념에 따른 색채사용도 철저하게 생활에 적용되었는데, 특히 국가적인 의례나 의식 때에는 이를 철저히 지켜 국가의 번창과 안녕을 꾀하였다.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북현무北玄武, 남주작南朱雀의 개념은 풍수의 이치에 맞아야 생활이 길상 장수하고 국가가 번창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다.
  사계의 변화도 시각적으로 체험하기보다는 오행적으로 사시四時와 짝지어 청춘靑春, 주하朱夏, 백추白秋, 현동玄冬으로 관념화하였다. 한국인의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의식은 모두 이와 같은 음양오행적 이치에 철저히 따랐다.
  민속제의나 놀이에도 적극 활용되어 처용무에서는 오색 옷을 입은 다섯 처용이 큰 처용탈을 쓰고, 황색 처용을 중심에 두고 춤을 추어 오행사상에 충실하였다.(도판22) 우리 나라 곳곳에 산재한 서낭당이나 신당수神堂樹에는 오색포를 걸었으며, 제를 올릴 때에나 두레기에도 서낭옷이라 하여 깃대 끝에 오색 헝겊이나 용, 호랑이 등의 신상을 그린 기폭을 붙였다. 풍어제를 지낼 때에도 서낭기와 봉기를 세우는데 기폭은 오색 중에서 한 색깔을 물들이고 동정은 다른 색깔을 택한다.(도판23)
  탈춤놀이는 벽사 의식무와 굿의 형태를 가미한 것이 많으며, 주로 양반사회와 파계승을 풍자하여 세상됨됨이를 비판하고 서민생활의 애환을 해학적으로 담고 있다. 영남 오광대는 오행설에 바탕을 두고 다섯 광대의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진 탈춤으로, 오방색을 상징하는 복색을 한 다섯 양반이 등장해 양반에 대한 조롱과 풍자를 보여준다. 오방신장五方神將의 가면도 모두 오색이며, 봉산탈춤에서 팔목중이는 오색 옷을 입고 춤사위가 활발한 춤으로 경쾌하고 화려하게 펼쳐 보인다.(도판24)
  이러한 탈놀이와 함께 지역주민들이 다같이 연출하고 즐기는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 세시놀이, 편 겨루기 놀이 등 모든 민속놀이는 주로 음력 정월대보름과 4월 초파일, 5월 단오, 8월 추석 등의 명절에 놀았다. 오락적인 성격과 함께 마을의 안녕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며 주민들의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는 취지와 벽사의 성격을 담고 있는 만큼 오행의 상생을 도모하는 의상 및 깃발 등이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도판25)
  이와 같이 색채는 기쁘고 즐거운 일을 나타냈으며, 혹은 일상적인 일이 아닌 특별한 일이나 범상치 않은 일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서민들의 일상생활에서의 색채는 백색과 흑색, 또는 무색이 전부였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까치두루마기를 비롯하여 혼례복, 왕실복, 관복, 사대부가의 의복, 무복舞服, 기타 기생·무당 등에 종사하는 이들의 복식에 색채의가 입혀졌다.(도판26)
  혼례는 관혼상제 중 가장 경사스럽게 여겨 길례吉禮, 가례嘉禮라 하였으며, 조선시대 중·후기에는 혼례 당일만은 일반 서민들도 색채의를 착용할 수 있게 허용하였다. 신부는 녹의홍상綠衣紅裳에 녹색 원삼이나 홍색과 색동으로 이루어진 활옷을 덧입고, 연지 곤지와 족두리나 화관으로 치장했다.(도판27) 신랑도 혼례복은 특별해서 관복인 남색 또는 북청색의 단령을 착용하고 사모 관대를 하였으며, 민간에서도 혼례 때에는 입을 수 있었다.
  특히 사대부가의 부인복은 평상시에도 아름다움을 구하기 위해 오행의 상생 과 상극 속에서의 조화와 배색을 갖춘 반회장 저고리, 삼회장 저고리 등을 입었다.(도판28) 이는 고구려 벽화에서도 볼 수 있는 우리 나라 고유복식의 특징으로,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 선을 덧댄 귀부인의 웃옷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아이들의 옷에서 생성의 원리를 가장 많이 적용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기본색인 오색 천을 모두 이어 붙여서 만든 색동 저고리는 오행을 두루 갖춤으로써 사된 기운을 막고 어린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색의 배열은 오행을 상생하는 순서인 청, 적, 황, 백, 흑, 청으로 이어졌다. 점차 시대가 지나면서 간색을 섞어 화색華色만으로 배색하였고 오행의 배열과 무관하게 되었으나 우리 민족에게 가장 정겹게 느껴지는 대표적인 것이 되었다.(도판29) 정초에 어린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오방낭자 복주머니도 복을 받아들이고 간직하며 만사평안을 빌기 위한 것이다.(도판30) 이외에도 오방장 두루마기, 혼례복의 원삼 등 색동을 이용한 복식은 매우 다양하다. 
  왕실과 조정은 특별히 품계에 따라 복색을 정하여 조화와 위계를 뚜렷이 하였다. 특히 정색과 간색을 구별하여 신분이 높고 낮음을 표시하였다. 중국에서는 황제를 천자라 하여 황색 곤룡포를 입었지만 우리 나라의 왕은 입을 수 없었다. 천자가 정색을 쓰는 반면 왕은 간색을 사용하여 그 차이를 드러냈다. 또 오례五禮 중 길례吉禮, 빈례賓禮, 가례嘉禮와 같은 의식에서는 정색 가운데 양의 기운이 강한 적색과 청색이 사용되었으며, 휼례恤禮때에는 백색과 흑색이 주로 사용되었다.(도판31)
  식생활에서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주식이 되어 온 밥은 오행을 구비하고 있다. 또한 쌀, 보리, 조, 콩, 기장의 오곡으로 오곡밥이나 약밥을 만들어 먹는 것은 대표적인 세시풍속이다. 반찬 역시 다섯 가지 나물로 오행과 오색을 맞추고, 국도 다섯 가지 건더기를 넣어서 끓여먹는다. 그리고 잔칫상에 올려지는 국수 위에도 장수를 기원하는 오색고명을 얹어 오행에 순응하는 기복의 의미를 더하였다. 상차림에 있어서도 반드시 국을 함께 놓아 음양의 기운을 조화시켰고, 사대부가에서는 어魚와 육肉, 편片과 적炙, 소蔬와 채菜 등 음양과 오색의 배열을 일상화했다.(도판32)
  금기나 주술 양식에는 양의 색인 청색과 적색을 사용하여 사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신앙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정초나 동지날에 팥죽이나 시루떡을 나누어 먹고 대문이나 문설주에 뿌려 상서롭지 못한 것을 쫓아 버리는 습속은 붉은 것을 이용하여 부정한 것이 끼어 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특별히 동지는 일년 중 해가 가장 짧아 귀신이 행동하기 좋은 때이므로 양의 기운인 붉은 색을 사용함으로써 음의 기운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간장을 담글 때에도 반드시 고추를 간장 위에 띄우고 장독 둘레에 고추를 매달았다. 붉은 고추, 대추, 팥 등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백색은 이에 신성함을 곁들여 같이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식생활의 색채관념을 결정짓는데는 주술신앙의 비중이 매우 컸다.
  또한 벽사진경의 가장 강력한 의지표현의 하나인 부적의 색은 모두가 적색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관상감에서 주사로 쓴 부적을 만들어 단오에 대궐 안으로 올리면, 이를 문설주에 붙여 불길한 재액을 막았다고 한다. 이러한 관습은 대궐뿐만 아니라 일반 민가에도 널리 행하여 집집마다 붉은 부적을 붙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재래신앙으로 남아있다.
  신부의 얼굴에 바르는 연지 곤지는 시집가는 여인을 투정하는 음귀에 대한 축출의 의미에서 사용하였고, 청색 홍색의 사주단자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도판33) 아기를 출산 할 때의 금줄에는 남아의 경우에는 빨간 고추와 숯, 여아의 경우에는 생솔가지와 숯, 종이를 끼워 놓는데 이때의 빨간 고추는 양의 색으로 남근의 상징이며, 청솔 가지는 정절의 상징으로 쓰인다. 또한 숯은 부정한 것을 방지하는 것으로 우리 나라의 생활 속에서 넓게 사용되었다.(도판34)
  주생활에서도 건축재료로 붉은빛이 나는 황토를 즐겨 사용하였다. 서울 종로의 흙이 붉은 빛의 황토였는데 사람들이 종로의 흙을 마구 파 가는 바람에 이를 막는 금토방禁土 을 붙여야만 했다고 한다.
  이상은 음양오행적 이치에 따른 색의 사용이 일반화된 것이며, 이러한 경향의 일부는 오늘날에도 크게 변화되지 않은 채 고유문화로 내려오고 있다. 한국인은 의미에 매우 민감한 민족이다. 색채나 행동은 물론 물건의 실용적 가치나 조형적인 특징, 시각적 특징보다 상생상극의 의미성을 더 강조하였다. 이러한 의미부여에 의한 행동은 부자연스러움과 감정의 억제를 동반하고 형식주의의 요인으로 대두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활달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는 역시 오색의 유채색이 어울린다. 민요에서 사용된 색의 수치 가운데 봉선화가 가장 많으며, 짙은 적보다는 간색인 홍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반면 청색은 간색인 녹색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상대적으로 음색인 백색과 흑색의 빈도는 매우 낮다고 한다. 또한 숱한 꽃 중에서도 봉선화와 국화꽃을 빈번히 노래한 것은 그 색채에 미적 공감을 느꼈기 때문이며, 분홍과 노랑이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는 색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의미적인 해석이 아니더라도 역시 즐겁고 특별하고 희망을 표현하는 행위 및 생활습속에서는 모두 시각적으로 밝고 아름다운 유채색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색으로서의 오방색은 삶을 유지하고 가꾸어 나가는 데 큰 몫을 감당하였다.
  생활습속에서 색의 사용을 살펴볼 때 우리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일컬을 만큼 빈번하게 사용해왔던 색은 백색과 청색으로 이어지는 자연색이다. 조선 왕조의 철저한 정색관념에 의해 동방의 색인 청색의 사용이 법제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민들과 양반들의 일상생활에서 흰옷의 사용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것은 인간적인 감각이나 감정을 억제하고 인격과 형식, 규범 등을 중요시하는 유교적 사고방식의 결과이며, 색이 있는 것은 곧 욕망이고 천하고 품위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색을 숭상했던 의식 속에는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것에서 초월하여 고매한 인격에 이른다는 금욕주의적인 한국인 특유의 인생관이 자리잡고 있다. 감정표현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우리 민족의 기질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색채에 감정이입하거나 감정투사하지 않고 어떤 의미부여를 통해서 은근히 표현하는 것이 한국인의 전형적인 심성이 되었으며, 탈채색脫彩色, 금채색禁彩色이 의식화되었다. 백자와 청자에 나타나고 있는 우아함과 신비로움도 이러한 오랜 민족의 정신과 맥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금욕적인 인격완성의 의미 외에, 자연에 동화하고 자연에 귀의하는 심성과도 깊이 관련되어있다. 대궐이나 사찰을 제외한 일반 민가는 기둥, 벽, 마루, 방안의 가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연 그대로의 색이다. 이것은 자연의 색과 아울러 모나지 않고 툭 튀어나지 않는 평온한 마음의 심리상태를 갖게 하며, 나아가서 가장 보편적인 조화상태의 무색중화無色中和에 이르는 의식구조를 갖게 한다.(도판35) 따라서 백색은 채색한다는 적극적인 행동의식이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무색개념이며, 백색옷은 있는 그대로의 무색옷이라는 타율적인 의식구조도 없지 않다.
  이처럼 각각의 색에 대한 개념과 용도의 사례를 보이는 조선시대의 전통색채는 음양오행설에서 기인된 유채색을 주로 사용했던 지배계급 사회의 엄격한 정색주의 관념과, 색채사용이 엄격히 통제되어 무채색을 생활색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피지배계급사회에서의 무채색 관념으로 나뉠 수 있다. 이들의 상반된 유채색 관념과 무채색 관념의 두 개념은 자연스런 색채 발달의 흐름에 방해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3) 전통미술에 표현된 오방색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랜 미술은 고구려 고분벽화로서 종교적인 숭배물이나 장식에 관련되어 있는 채색화이다. 솔거의 황룡사 벽화인 노송 그림과 종교적 제의祭儀 기능으로서의 인물화 역시 신화라고 일컬을 만큼 숙련된 채색에 의한 사실화였음을 《삼국사기》에는 전하고 있다.
    그가 일찍이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 줄기가 가는 비늘 같았으며,      가지와 잎이 구불구불하여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 등이 가끔 멀리서 바라보고 날      아 들다가 벽화의 벽에 이르러서는 벽에 부딪쳐 떨어지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 되      어 색깔이 변하자 절의 승려들이 단청으로 덧칠을 하였다. 그 후로 까마귀와 참새      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 또한 경주 분황사의 관음보살과 진주 단속사의 유마 화      상이 모두 그가 그린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대대로 신화라고 말한다.
 
 
  (1) 고구려 고분벽화의 색채의식
 
  고구려 고분벽화의 생활, 풍속, 음악, 무용, 전투, 씨름, 수렵, 복식, 기물, 건축, 장식, 문양, 종교, 사상, 우주관 등은 한국학 연구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미술사적인 면에서도 회화자료를 풍부하게 남기고 있어 우리 나라 회화의 시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고색 창연한 색채와 세련된 구성은 그 시대의 미의식과 회화기법, 색의 사용, 색의 감정 등을 확인하기에 충분하다.
  벽화초기와 중기에는 현세의 부귀영화와 권세가 내세에도 이어지기를 소망하는 고구려 전통적인 신앙의 계세繼世사상이 많이 작용하였다. 무덤은 곧 생전 생활의 변화와 연장으로서, 무덤주인공의 초상화 및 현실세계를 서사적, 기록적으로 표현한 생활 풍속이 주를 이루었다. 천장은 천상의 세계로 표현되어 일월성신, 신선, 신수神獸, 서조瑞鳥, 영초靈草, 비운飛雲 등이 그려져 있다. 현실의 벽면과 천상의 세계인 천장이 어우러져 일종의 소우주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중기 이후에는 점차 원시적 종교관념보다 초기 도교 및 불교의 도입으로 현실보다는 불가사의한 세계를 동경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고, 예술에서의 신비화, 장식화의 형식과 수법을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특히 5세기에는 불교 문화적 요소인 연꽃표현이 많으며, 예불도, 역사상力士象 등의 불교적 색채가 강렬하게 나타났다.
  후기에는 무덤을 지켜주는 사신도가 대부분으로 화려하고 찬란한 문양화의 경향으로 기울어졌다. 사신도는 중기에 지배적이었던 불교의 영향이 감소하고 오행신앙을 내세운 선계적仙界的 요소를 상대적으로 강하게 담고 있어, 선仙·불佛 혼합적 내세관에 입각한 표현으로 해석된다. 음양오행에 의한 우주창조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는 사신도의 고분벽화는 장식무늬 벽화와 더불어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고구려 특유의 양식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초기 고분벽화의 대표적인 안악 3호분安岳三號墳은 묘주 생전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묘주와 부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묘주의 초상」은 머리에는 왕만이 쓰는 백라관 밑에 평정관을 받쳐 쓰고 있으며, 붉은 옷을 입고 있어 신격화되어 있다. 또한 대행렬도는 수레를 타고있는 주인공, 기마, 악대, 기를 들고 가는 의장병, 무사 등이 긴 행렬의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인물들의 자세나 복장이 각기 다르고 세련된 표현기법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 표정이 거의 동일한데 이는 당시 대상의 개별성에 대한 인식이 적었음을 시사해준다.(도판36)
  덕흥리 벽화고분의 천장에는 안악 3호분보다 훨씬 다양한 요소와 주제들이 표현되어있다. 특히 남쪽천장의 「견우직녀도」의 시녀들의 색동 주름치마는 뒤의 수산리 고분벽화, 일본의 고송총高松塚벽화와 함께 고구려여인들의 옷의 특징이 되었다. 오행을 두루 갖춤으로써 사된 기운을 막고 무병장수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색동옷이 이미 3세기초에 출현되어, 고구려 여인들로부터 이후 우리 민족의 여인들과 어린이들에게까지 오랫동안 사랑 받는 옷이 되었음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5세기 후반의 쌍영총에는 여주인공의 「불공도」가 눈에 띤다. 가장 크게 표현된 부인상에는 검은색 저고리에 붉은색 깃과 끝동이 달려있다. 그리고 단에는 붉은색 무늬가 그려져 있다. 승려의 가사에도 물결 무늬의 붉은색 띠가 두드러져 있는데, 적색은 이후의 불화에서도 가장 많이 쓰이고 신성하고 숭고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거마행렬도車馬行列圖」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얼굴 양 볼에는 하나같이 붉은색 연지가 찍혀 있어 음귀에 대한 축출의 의미에서 사용된 연지의 역사가 오래인 것을 알 수 있다.(도판37)
  무용총의 「접객도」에서도 주인공이 붉은 선이 달린 검은색 저고리에 붉은 점무늬가 있는 바지를 입고 있으며, 수산리 벽화 고분의 「곡예 감상도」에서도 검은 저고리와 점무늬가 있는 바지가 보인다. 또한 부인은 얼굴에 연지를 찍었으며, 붉은색 깃과 끝동이 있는 검은 색 저고리와 색동으로 된 주름치마를 입고 있다.
  이상에서 종합해 볼 때 색채는 먹색과 함께 적, 황, 자, 백, 청 등 여러 가지가 사용되었고 금박이 쓰여지기도 하였다. 복식에서는 붉은색 옷깃과 붉은색 소매끝동을 가진 검정색 저고리와 색동 주름치마, 점무늬 바지와 저고리 등이 당시의 양식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검은색은 북방의 수기水氣를 취해 아래로 내려가게 하고 붉은색은 남방의 화기火氣를 취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게 하여 수와 화, 즉 음과 양의 기운을 조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붉은 옷과 연지는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의 여인들이 악귀를 쫓는 주술적인 용도로 사용하였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집가는 여인들의 대표적인 차림이 되었다.
  「수렵도」는 무용총의 벽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로 힘과 동세를 중시하는 고구려 미술의 특성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산의 원근에 따라 백-적-황색으로 처리하였는데 이는 중국적 색채의 원리가 수용된 것이다.(도판38)
  6세기의 고분벽화인 평양의 강서중묘와 대묘, 집안지역의 통구 사신총과 오회분의 5호묘, 4호묘 등은 음양오행사상을 표현한 방위신인 청룡, 백호, 주작, 현무, 황룡이 그려져 있다.
  강서중묘와 대묘에서의 「청룡도」「백호도」는 목 아래 부분에 흰색과 붉은색, 그리고 벽색의 삼색 띠가 표현되어 있고, 몸체 각 부분이 화려하면서도 치밀한 묘사와 채색으로 이루어져 있다.(도판39) 암수의 「주작도」도 삼색 띠의 목, 붉은 색조의 몸통과 꼬리, 오색의 날개, 흰색조의 목과 머리, 불꽃 모양의 벼슬을 지니고 있다.(도판40) 「현무도」는 힘있는 움직임, 탄력 있는 긴장감, 뛰어난 색채 등으로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가장 대표되는 작품이다. 또 천장고임부에는 산과 나무, 산화공양散花供養을 하는 비천상과 상서로운 짐승과 새를 탄 선인仙人, 인동연꽃과 기화요초琪花瑤草, 이수서조異獸瑞鳥 등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도판41) 즉 강서대묘 벽화에는 선계에서의 삶에 대한 열망과 불교의 정토에 대한 소망이 함께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통구 사신총의 「현무도」는 강서대묘의 현무보다 더욱 힘차고 동적이며, 선명한 색채의 특징이 더욱 뚜렷해졌다. 거북이와 뱀의 꼬이고 뒤틀린 모양의 격렬한 동작과 튀는 듯한 주변의 구름들이 어우러져 극도로 힘차고 폭발적인 분위기를 내고 있다. 거북이의 색채는 전체적으로 갈색조이고, 뱀은 배의 색채가 흰색에서 점차 자주-빨강-녹색-검정색 등으로 변화해 매우 화려하다. 머리는 노란색으로 채색되어 푸른 바탕과 대비되며, 주위를 둘러싼 비운문은 먹선으로 그려진 형태에 빨강, 자주, 청록색 등으로 채색되었다.(도판42)
  오회분 4호묘·5호묘는 완벽에 가까운 구성과 채색이 돋보이며 고구려벽화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청룡도」는 어깻죽지에 붉은 불꽃 모양의 날개털, 두 다리 사이에 희고 상서로운 불꽃 모양, 목 아래에 두 줄의 색 띠가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4호와 5호묘의 사신도 모두에게 적용된 설채 방법으로 매우 화려한 빛깔과 자태의 신비스런 존재로 화하고 있다. 이들 색채는 사신과 오행설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오색으로서 자연스런 세부묘사, 화려한 채색과 배경무늬 등으로 특유의 환상적 신비감을 자아낸다. 또한 천장 받침돌에는 해와 달을 받쳐든 복희와 여와, 용·봉황·학을 타고 나는 신선, 악기를 연주하는 선인, 꿈틀대며 서로 꼬여있는 용, 농사의 신, 불의 신, 야철冶鐵신, 제륜製輪신 등이 묘사되어 있어 화려한 색채의 고구려 신화체계를 보여준다.(도판43) 천장 중앙석에는 빨강, 파랑, 노랑의 강렬한 원색의 몸통과 상서로운 흰색의 불꽃을 가진 황룡의 꿈틀대는 모습을 대담한 필치로 그려내어 중앙·황제를 상징하고 있다. 사신도가 아닌 오행에 의한 오신도五神圖를 표현하고 있다.(도판44)
  이상의 사신도는 대부분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방향개념에 맞추어 표현되었고, 천장까지 신선, 신수, 서조, 영초, 일상, 월상, 용, 비운문 등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입체화된 만다라를 보는 듯하다.
  색채는 초기에 비해 더욱 선명해지고 오방색의 빨강, 노랑, 파랑, 흰색, 검정 등 모든 색깔이 극도로 밝으면서도 결코 야하지 않은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안료의 사용을 보면 빨강은 주사, 검정은 그을음, 녹색은 석록, 파랑은 석청, 갈색은 대자, 흰색은 백악, 노랑은 황토 등의 안료가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화려한 채색은 오랜 세월과 심한 결로 현상에도 광채를 잃지 않고 있어 안료의 제조와 채색기법이 뒷받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단청과 고려불화의 색채의식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색채생활에 나타난 단청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로는 색채로 그린 모든 그림을 일컫는 말이다.
 
    회繪는 오채에 의지하는 일종의 기술이며, 화畵는 채색보다는 윤곽선을 중요시         하고 그 화 자체의 존재성보다는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단청은 회와 화의 합의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근본에 바탕을 두었고, 따라서 단청이란 도圖, 서書, 회繪, 화畵를 총칭한다.
  단청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요소를 문양화해서 인류가 항상 염원하고 추구하는 내세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즉 그 시대의 생활, 신앙, 관념 등을 일정한 질서와 약속에 따라 오방색을 기본으로 상징화한 것이다.
  신라시대의 색채사용에 대한 자료는 《삼국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오색은 성골이 왕궁에서만 사용하였고 진골계급부터 채색으로 장식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신라의 단청 장식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신라 전성기에는 귀족들의 집은 물론 서민들의 가옥에도 치장을 하였다.
  《삼국유사》 〈문무왕조〉에 의하면 '채색 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의 신상을 만들어 문두루文豆婁의 비법을 행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또 〈탑상塔像〉에서는 '제석이 홍륜사의 누각에 내려와서 머무르니 풀, 나무, 흙, 돌 할 것 없이 다 이상한 향기를 풍기고 오색구름이 절을 덮었다' 고 하여 그 시대의 사찰이 오방 신앙에 의한 단청으로 장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불교미술이 최고를 이루었던 때인 만큼 단청도 화려한 색채가 주를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조 개성에 온 송나라의 사절 서긍徐兢은 그의 여행기 〈선화봉사 고려도경〉의 궁전조에 단벽조식丹碧藻飾, 단칠丹漆이라는 용어를 써서 고려 궁전의 규모와 장엄성을 논하였다.
  
    난간은 붉은 칠을 하고 동화銅花로 장식하였으며, 단청의 문양과 채색이 매우 힘       차고 아름다워서 다른 전각들보다 뛰어나고 사찰의 단청도 엄숙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라고 기록한 것을 보아 당시의 궁전과 사찰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짐작이 된다.(도판45)
  고려시대의 불화는 청자와 함께 고려의 미술문화를 대표하며, 당시의 불교신앙과 미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현세의 고뇌를 잊고 내세의 영화를 그 속에 투영하려는 고려인의 정취와 신앙의 상징으로서 단순한 미감이기보다는 궁정취미나 귀족취미로 다듬어진 극도로 세련된 미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인물, 산수, 영모, 송죽, 계화 등 일반회화와 관련이 깊으며, 구도와 구성, 설채법, 필묵법, 기법 등에서도 더없이 소중한 자료이다.
  불화의 특색을 살펴보면 군청색계, 황토색계의 비단바탕에 주사, 석록, 석청 안료의 주朱, 녹청, 군청 의 삼색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흰색 및 금니金泥의 안료를 사용하여 화사하면서도 은은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이루어냈다. 안료의 사용법에서는 혼색을 하지 않고 원색 그대로를 사용하되, 원색 층에 다른 색감의 채색 층을 올림으로써 탁해지지 않은 중간 색조의 다양한 색감을 이루었다. 특히 금채를 비롯한 색채들은 뒷면에서 칠하여 앞면으로 베어 나오게 하는 이른바 배채법으로 설채되어 박락의 피해를 비교적 덜 받고 본래의 화려한 색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강렬하면서 세련된 색채는 고려시대에 고도로 발달한 안료의 제조법과 독특하고 품위 있는 색채감각이 뒷받침된 결과이다. 반면에 일본의 다양한 색감의 안료 및 채색법과 비교할 때 고려 불화는 입체감을 나타내는 색감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관경변상서품觀經變相序品」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도판46,47) 등에서도 고려불화의 주된 색채가 주朱와 금색임을 알 수 있는데, 아미타여래상의 가사는 붉은색으로 전면을 칠하고 있으며, 대의와 치마에는 녹청, 군청을 사용하였다. 지장보살, 수월관음도 또한 치마의 바탕색은 모두 붉은색을 사용하였다. 화려함을 더해주는 요소의 금니는 모든 윤곽선, 옷 주름선, 각종문양 등의 채색부분의 넓이에 따라, 색상에 따라 선의 굵기를 미묘하게 달리 사용하여,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붉은색은 고대부터 귀한 분, 최고의 신을 나타나는데 쓰인 색으로 불화에서는 신성하고 숭고한 의미를 지닌다. 금색은 부처의 절대적인 존재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색으로 부처의 진리와 지혜라는 무한한 빛을 상징한다. 백색은 백색 연꽃과의 조화를 이루며 하늘의 의미와 함께 깨끗하고 순수한 존재임을 나타낸다, 황색은 왕족과 같음을 의미하며, 「지장보살도」에 나타내는 흑색은 명부의 의미를 담고 있다.(도판48)
  무늬의 특징도 독특하고 뛰어나다. 불, 보살들은 각종 식물 문양들이 그려져 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는데 이들 문양은 고려불화의 특색을 돋보이게 하는 고려 고유의 것들이다. 「수월관음도」는 붉은 바탕의 가사에 그려진 노란 원형의 문양이 옷의 주름에 관계없이 둥근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도식적인 느낌을 주며 독특한 문양적 효과가 크다. 투명한 사라에 의한 옷자락의 아름다움도 이웃 나라의 불교회화와는 다른 고려불화의 특색이다.(도판49)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불화는 주, 녹청, 군청의 투명한 진채, 섬세하고 미려한 금니의 선묘, 고려의 독창적인 연화당초원문 등이 함께 조화되어 고려의 귀족적인 아취의 미의식으로 표출하였으며 채색화의 절정을 이루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시작된 채색화가 고려불화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조선시대의 초상화, 화조화, 민화로 이어져 현대의 채색화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늘날 전통적인 정신성과 한국적인 미감의 상징적인 색채로서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3. 조선시대의 미술품에 표현된 오방색의 미감 
  
 
 1) 조선시대의 회화적 환경
 
  조선시대는 우리 나라 미술사상 회화가 가장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며 제일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던 시기이다. 북종화, 남종문인화, 남종산수화, 진경산수화를 비롯하여 사군자, 도석화, 초상화, 풍속화, 춘의도, 영모초충도, 궁중장식화, 의궤도, 세화歲畵, 지도그림, 무속화, 민화 등 수없이 많은 종류의 회화가 펼쳐졌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격조 높은 남종산수화와 이를 소화시켜 우리의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 풍속화, 민화는 조선시대를 대표할 만한 높은 수준의 회화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사대부화가, 화원화가, 서민화가들의 그림으로 분류되면서 화풍, 기법, 미의식에서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지만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갖으며, 당시의 변천해 가는 세태와 수요와 관련을 맺고 있다. 당시의 토속적인 한국미는 민화에서도 튼튼한 기반이 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 화단을 두고 볼 때 오방색의 사용이 두드러진 민화의 색채를 고찰함에 오방색 그림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회화적 환경을 간과할 수 없다.
  조선시대는 전반적으로 문인화와 산수화의 경향이 두드러졌고, 그들의 이상과 격조의 추구는 색채를 극단적으로 배제하는 기법으로 흐르게 하였다. 이규상의 〈화주록畵廚錄〉은 당시의 회화를 화법으로 구분하여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대개 화파는 두 파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세속에서 원법院法이라 일컫는 것        으로 곧 나라에 이바지하는 화원의 화법이다. 그리고 하나는 유법儒法으로 신운        을 위주로 하는 그림으로 필획의 가지런함과 성김을 돌보지 아니하여 화원에서        그리는 그림과 다른 것이 대체로 유화에 해당한다....김홍도는 당시 세속의 모습과      양태를 잘 그렸는데 세상에서는 속화체俗畵體라 일컫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회화는 주로 지배층에 속했던 화가들이 유법으로 그린 소위 정통화라 불리어진 일반회화와, 도화서 화원들에 의해 그려진 원화院畵로 구별되었다. 더불어 풍속을 그린 풍속화가 있다고 했다. 그 외 민화는 조선조의 그림 중에서 정통화와 원화를 제외한 장인들의 그림으로서 속화로 일컬어졌다.
  조선시대의 회화는 초기에 명나라의 원체院體화풍과 절파折派의 북화풍이 주를 이루다가 중기 이후 점차 남종문인화를 추종하는 회화관으로 흘렀다. 후기에 들어 실학적 입장에서 사실성을 추구했지만, 겉모습만 닮게 그리는 것을 지양하고 문인화의 품격이나 사의성을 중시하였다.(도판50) 조선조 초기의 안견과 강희안으로부터 중기의 화가들에 대한 화평을 기록한 〈화단 斷〉에서 윤두서는 화도론畵道論을 다음과 같이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당시의 선비 취향의 화법을 엿볼 수 있다.

    필법의 공교함과 묵법의 정교함이 묘하게 어우러져서 신격에 이르고 만물에 물상      을 부여함은 그림의 도이다. 그러므로 그림에는 화도畵道가 있고, 화학畵學이          있고, 화식畵識이 있고, 화공畵工이 있고, 화재畵材가 있다.

  이렇게 당시의 회화는 성리학을 바탕에 둔 유교미학과 도가사상을 기저로 한 은둔사상 등의 사조와 담백한 수묵중심의 회화관 등을 반영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새로운 경향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였으며 진경산수가 대두하였다. 풍속화가 풍미하였고 서양화법이 수용되었으며 서민들 사이에 민화가 유행하였다.
  진경산수는 정선이 남종화풍을 수용하여 한국의 산천에 맞는 자신의 화풍으로 발전시킨 그림이다. 이것은 자아의식의 팽배, 여행 붐, 지도제작의 활성화, 예술과 문화에 대한 수요의 증대 등 당시의 시대적 추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추이는 민화의 활성화와 오방색 사용의 증대와도 깊은 관련으로 작용하였다.
  정선의「금강전도」를 비롯한 진경산수 화풍의 중요한 특징은 대담한 구도의 변형과 골필의 선묘, 묵법을 강조한 농담의 음양대비로 요약할 수 있다.(도판51) 이는 주역의 사상과 진경산수가 하나로 되어 그 형태와 내용과 정신에서 음양의 대비를 충실히 나타낸 결과이다. 금강산도는 사대부 화가들이 즐겨 그린 화제일 뿐만 아니라 이후 민화에도 좋은 범본이 되었다.
  풍속화는 윤두서, 조영석, 강희안 등의 화가들에 의해 소극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하여 김홍도와 신윤복에 이르러 꽃을 피우게 되었다. 김홍도의 『풍속화첩』은 서민들의 삶을 서민의 심성에 다가서는 리얼리티로 표출해 냈다. 굵고 힘차면서도 투박하고 경직되어 거친 느낌을 주는 선들로 조선의 정취를 그려내어 후기 화단의 대표적 성과를 이루었다.(도판52) 신윤복의 「쌍검대무」는 양반이 가무에 능한 기생들과 즐기는 장면을 담은 그림으로 몸놀림과 색채가 인상적이다. 전체적으로 고운 미색 바탕에 홍색치마, 연두 저고리와 자주색 겉옷을 안정감 있게 조화시켰다. 적색과 청색의 두 검무 기생의 옷 색깔은 강렬한 색의 대조를 이루어 벽사기복의 민화적인 주술성을 담고 있다.(도판53)
  이와 같은 후기의 미술은 문예 중흥을 도모하던 영조·정조연간에 일어난 사회, 문화, 예술 전반의 사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실학의 대두, 한글소설과 판소리의 등장, 사설 시조의 유행 등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그림을 즐기는 경향이 왕공, 사대부들을 위시한 상류층뿐만 아니라 다소 경제적 여유가 있는 서민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어 민화가 널리 퍼졌다. 조선 후기에 이처럼 민화가 유행했던 것은 당시 사회의 정치 경제력 신장, 신분계층의 구조변화, 회화를 위시한 예술의 대중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은 북학파의 영향으로 청조문화가 적극적으로 수용되었고 김정희의 영향력이 증대됨에 따라, 화단은 남종문인화와 모화적인 것을 지향하게 되었다. 조선조 말기의 일반회화는 색감의 부재 현상으로 이어졌고, 더불어 정치사회의 혼란과 경제의 영세성은 민화가 크게 확산되는 현상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조선시대 회화사는 안견으로부터 장승업 전후까지의, 사대부 문인이나 도화서 화원들의 그림으로 역사를 이루어왔다. 소위 '화관 화론의 정통성'이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음은 물론이며, 우리의 회화사는 여전히 정통회화의 카테고리 안에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정통성이 인정되는 감상화보다 실용화로서의 민화의 수요가 많았다.

    양반화가보다 신분이 낮은 화공의 그림이 삼국시대 이래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그      림의 주류를 점하였으며, 사회 전체로 보면 감상화보다는 양적으로 실용화가 대세      였고, 감상화도 주로 왕가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정통회화의 전반적인 특질도 이념화된 화관 화법의 완벽한 표현보다 천연스러움과 어리숙함을 엿볼 수 있다. 한국의 산수는 중국의 남종회화에서 영향을 받았으되 온화하며, 꾸미지 않은 조방粗放한 구도, 선묘의 자연미, 주제의 친근성, 소박주의 등 한국적 특성을 갖게 되었다. 동물화나 풍속화, 화조화 등에서도 해학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민화의 고졸한 발상, 소박한 형태감, 무심한 색의 표현과 다르지 않는 미감이다.
  일반회화의 감색현상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세시풍속이나 민화적인 미술품 등에서는 오방색이 일관되게 사용되었다. 흰옷을 주로 입고 무색의 생활환경을 가진 조선민중은 외세의 침략과 유교윤리의 가치관 속에 잠재될 수밖에 없었던 긍정과 환희의 세계를 민화를 통해 나타냈고, 민화의 원초적이고 낙천적인 상징성들은 그들의 마음을 열기 위한 장이 되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민족의 생활 철학과 정서가 자유로이 표현된 실용적 장식화로서, 위로는 궁궐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생활 전체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2) 민화의 색채의식
 
  (1) 민화의 개념과 미의식 

  민화의 개념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것으로서 무명의 공인에 의해 만들어진 공예적인 민중의 실용화'라고 처음으로 규정한데서 비롯되었다. 김호연도 민화가 민족의 생활미술임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민화는 우리 민족의 미의식과 정감이 가시적으로 표현된 옛 그림이다. 민족의 미의      식과 정감은 겨레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이 땅에 삶을 베풀면서 몸에 지니게 된       생활철학과 생활감정의 미학적 측면이다. 그것이 회화형식으로 구체화된 상태가 곧      민화이다.
 
  또한 이우환의 민화가 그려진 배경설명에서도 민화의 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
   
    부유한 종가일수록 풍성하게 그림을 걸어놓고 있었다. 화가는 우선 마을의 종가        를 찾아가 사랑방에 머물면서 장벽화, 병풍, 족자, 영정 등을 그리는 것이다....1년       에 한번, 또는 2년에 한번씩 같은 고장을 방문하여 의뢰 받은 그림을 완성하여 옛      그림을 바꿔 발라주고 얼마간의 대가를 받고 떠나간다. 방랑화가가 다녀간 마을에      는 집집마다 새 그림으로 생활공간이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민화의 개념은 감상화이기보다 장식화이며 생활미술이다. 또한 양반이나 부자에 속하는 층이 주로 민화를 주문하고 소유하였으나, 서민층이 그림을 그림으로써 양반과 서민 모두의 공통된 취향의 미의식이 반영될 수 있었다. 이것은 민화가 문인화의 이념적 정취에 비해 조선민중 전체의 정취에 더 밀착되어 있는 것을 말해주는 바, 민화의 색채 또한 조선민중의 미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의 논의에서는 서민화가에 의해서 그려지고 서민들에 의해서 주로 사용되었던 서민화를 위주로 고찰하고, 도화서 화원에 의해 전통성과 인습성을 강하게 띠고 그려진 궁궐화는 따로 분류하여 고찰하였다. 또한 서민화가에 의해 그려지고 서민화의 색감과 미의식에 맥을 같이하는 무속화는 종교화로서 구별하여 고찰하였다.
 
   ① 민화의 개념
  첫째로 민화는 생활의 필요에 따라 쓰여지고 장식해온 생활미술이다. 민화의 소재들은 기복축사祈福逐邪, 벽사진경 邪進慶, 권선징악, 종교와 신앙, 일상의 풍속 등과 관련한 소재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즉 일상생활을 풍요롭고 복되게 하며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소재들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이것은 생활에 필요한 물품으로 표현되거나 가옥구조를 장식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민화는 감상화를 표방하는 일반회화의 화첩이나 족자 유행과는 달리 거의 모두 병풍 형태나 장벽화로 그려졌다. 우리 나라 한옥구조에 알맞는 병풍은 선조의 일생과 같이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돌상, 혼례상, 회갑연, 생을 마칠 때 시신의 관을 두루는 역할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장식하여 왔다. 따라서 그 용도와 장소에 어울리는 병풍그림이 그려지게 되었음은 당연하다. 예를 들어 안방에는 화훼도나 화조화·어해도 병풍이, 혼례의 신방에는 어해도·모란 병풍이, 수연에는 십장생도·평생도 병풍이, 사랑방엔 문방도·문자도·수렵도 병풍 등이 사용되었다. 산수화나 영모 화조화의 경우에도 대부분 병풍에 그려짐으로써 생활미술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둘째로 민화는 고대로부터 유형에 의해 반복되어온 그림이다. 고대의 회화는 인류의 생존이나 생활과 직결된 주술적 기능을 띠고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실용화의 목적에 부합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선사시대의 암각화로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기록적 성격의 실용화가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는 민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병풍, 족자의 속화에 대한 풀이.
    우리 나라 여염집의 병풍, 족자 그리고 벽에는 속화가 붙여진다. 그러한 그림들은      원래 뜻이 있었던 것인데, 그리는 자들이 고사故事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나는 여기에 몇 가지 아는 것을 적어서 아이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이 글에서 소위 속화라는 것이 당시 여염집에 널리 애용되었으며, 그 그림들은 원래의 유형이 있고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은 화조도나 모란도와 같은 일정한 주제가 오랜 세월에 걸쳐 되풀이되는 동안에 굳어진 화면의 구성형식이다. 쓰임새에 따라 그림의 주제와 형식이 선택되고 민화는 그에 적응하는 상징을 부여해 온 셈이다.
  이는 전통적인 동양화, 특히 한국회화가 오래 전부터 정해진 수복강녕, 벽사진경을 바라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 성취를 위한 기원과 국가사회의 보존, 안녕, 질서유지를 위한 지배계급의 정치적 목적, 나아가 공동 문화권에 속한 사회 구성원의 공통된 감수성을 공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정한 틀에 의해서 제작되고 발전되어 왔던 속성 때문이다. 청동기시대의 암벽화로부터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화조, 산수, 민속, 교화, 십장생의 공예품 등에 그대로 이어지고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민화의 유형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또한 생활장식화로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기에 편하도록 병풍에 그려졌던 것도 유형의 형성과 관련이 깊다.
  셋째 선조의 토속신앙과 인생관이 반영된 상징성과 주술성을 담고 있다. 민화는 상징과 설화를 인용하여 잡귀를 쫓고 복을 기원하며 교훈적이거나 해학적인 이야기를 담은 관념적 세계이다. 민화의 상징적, 주술적 표현은 문화적 환경이나 개인적 의사에 의해 자유롭게 변형되기도 하면서 서민들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였다. 그것은 공통적인 인생관 내지는 세계관으로서 부귀다남, 무병장수, 입신양명 등 그들의 소망과 구복求福을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해도는 다산을 상징하고, 잉어는 출세와 부귀를 상징하고 있다. 즉 고사나 민담의 내용을 몇 가지의 사물로 상징화하여, 서민들이 항상 꿈꾸던 아들딸 많이 낳고 높은 벼슬에 올라 호의호식하면서 장수하고자 하는 현세의 기복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도판54)  
  특히 민화는 벽사와 길상의 기능을 포함한 상징이 중심을 이루는 민간 신앙으로서의 주술성을 지니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처용가면이나 부적은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민화 역시 심리적인 병에 대한 민중의 한을 풀어주려는 하나의 방편으로 쓰여졌던 셈이다. 병에서 해방되려는 민중의 바램은 한마디로 무병장수하려는 현세 복락적인 욕망의 표현이며, 이것이 십장생도 등으로 표현된 것이다.
  또한 세화로서 궁중으로부터 사대부,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축귀逐鬼나 구복의 상징을 띠고 정월 초하룻날에 대문이나 집안에 붙여졌다. 대표적인 예가 호랑이 그림이며, 사신도, 용그림, 산신도, 신장도 등이 주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현세적 삶을 긍정하고 현세와 내세를 이원화하지 않은 샤머니즘과 관련이 있다. 샤머니즘은 선사이래 불교, 도교, 유교 등과 융합하면서 이러한 민중적인 욕망과 접근해 있었고, 한국인의 무의식적 본능 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민화는 전통사회의 생활습속과 화의에 따라 제작된 대중적인 실용장식화로서, 고대사회로부터 계승된 민족의 신앙과 사상을 상징하고 표출하였다. 대중의 한을 뛰어 넘어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용기를 주는 웃음으로, 황홀경으로, 특히 벽사진경과 수복안녕을 기원하는 그림으로서 전통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세시풍속에 따라 그려지는 세화로, 집안 곳곳의 문, 벽장, 병풍, 벽 등을 장식하는 치레그림으로, 또는 여러 가지 나쁜 귀신을 막는 주술적인 성격의 액막이 그림으로서,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어 그려졌다. 따라서 민화는 그 내용이나 발상 등에서 일반 회화보다 한국적인 정서를 더 많이 반영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② 민화의 미의식
  앞서 기술했듯이 조선 민화는 대중의 아름다움을 통한 기쁨과 아울러, 무교가 찾아낸 인간 본위 우주관, 현세적 인생관을 표현하였다. 한국 회화사에서 취급되어 있는 그림들은 대체로 유교, 불교, 도교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그림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종교는 지배자나 특수층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 종교가 갖는 이데올로기는 민중의 결핍된 현실을 완전하게 대변할 수 없다는 구조 속에서 민화가 민중의 생활 속에 자리잡게된 것이다.  물론 민화 속에는 불교나 유교가 지향하는 자비심이나 중용, 인仁의 사상이 있지만 그 표현의 매체나 방법에 있어서는 토착적이고 민중적이다. 즉 무교시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신화, 전설, 민담의 변함없는 소재였던 용, 까치, 호랑이, 물고기, 불로초, 십장생, 화조 등은 민화의 가장 보편적인 소재이다.(도판55)
  따라서 민화의 미의식은 무엇을 어떻게 잘 그리느냐는 것보다 음양오행의 상생상극의 원리에 따른 소재의 조화와 색의 조화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동물과 동물, 식물과 식물, 혹은 동물과 식물 등의 짝짓기 조화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양상은 궁극적으로 사신도와 같은 이상적인 우주원리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림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심리적인 작용을 하게 하는 일종의 조형주술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민화의 소재들은 화가의 창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음양오행의 상생상극에 부합되는 대상으로 재현되었으며, 이러한 자연의 소재를 의인화시켜 인간의 감정이나 사상을 담고 있다. 인간도 다른 동식물과 같이 음양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신도와 십장생을 구성하고 있는 동물은 물론, 모든 화조도의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음양오행사상을 근거로 하고 있다.(도판56)
  민화는 민화에 알맞는 미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 멋의 요소로서 시원하고, 자연을 살리고 교만이나 작위가 없는 미의 표현으로서 텁텁하며, 조화와 대비의 상태로서 어울린다. 멋은 한국인의 미의식과 예술행위의 바탕이 되고 있다. 이것은 화법이나 기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즉흥적인 어울림이 있다.     조선후기의 판소리, 시나위, 산조, 살풀이, 탈춤이나 진경산수, 풍속화, 장승, 백자의 자유분방한 문양, 자연목과 자연석을 사용한 건축 등에서 볼 수 있는 자유분방함이 민화에도 강하게 반영되었다. 전문적인 화공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치졸할 정도로 소박하고 단순하다. 과감하게 생략해버리고 과장해버리는 등 사대부의 예술적 표현보다 훨씬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러한 한국적 예술정신의 특징인 자유분방함은 즉흥성, 소박성, 투박성, 자연친화성, 무작위성, 비균제성, 역동성, 여백 등의 다양한 미감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민화와 한국미술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중국미술처럼 정교하지 않고 일본미술처럼 깨끗하고 세련되지 않다. 어딘지 어수룩하고 서투른 솜씨가 오히려 자연스럽다. 쉽고 간단하며 솔직하고, 또한 익살스럽고 꿈이 있으며 믿음이 있다. 
  조선회화의 특징의 하나로서 원경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민화는 보다 철저하게 원경, 근경의 개념과 배경을 무시하고 대상물만을 화면 가득히 배치하였다. 이와 같이 사물 존재의 근거가 되는 배경과 소재의 색채를 무시한다는 것은 사물의 존재보다는 소재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중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민화는 자연주의적인 사실화가 아니며 주술적인 목적과 상징성을 부여한 관념의 세계이자 이상의 세계인 것이다.
 
   ③ 민화의 색채와 표현기법
  민화는 주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그치지 않고 어떠한 관념을 담고 있다. 이것은 민화의 장점이면서 특징이 되는 것으로 형태의 자유로운 변형과 평면적 구성, 색채의 장식성으로 표현되었다.
  민화의 독특한 공간 구성방법은 설화나 상징적 소재들을 비롯하여 일반회화의 소재까지 새롭게 재구성하여 규범과 상식에 벗어나는 자유롭고 독특한 조형세계를 펼쳐 보였다. 전후, 좌우, 상하, 고저, 원근에 대해 일정한 시점을 두지 않고 여러 시점에서 대상을 포착하였으며, 작법을 무시하였다. 예를 들어 금강산 그림에서 만 2천봉을 부감하고 거기에 시선을 360도 이동시켜 10폭 병풍에 평면화시켰다.(도판57) 또한 호랑이의 얼굴과 형태에서 앞면과 옆면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으며, 책거리 그림에서도 역원급법을 써서 물체의 좌측, 우측, 전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서구 근대미술의 입체파 조형원리와 흡사한 것이다. 또한 화면의 전면에 물상을 평면 배치함으로써 독립적 대상들로 강조하였다. 중앙 중심적인 구성과 대칭의 구도로 단순화하고 도안화하여 소박한 미적 효과를 발휘하였다. 이는 형태나 색채 등과 어울려 민화를 보다 솔직하고 천진스런 미의 세계로 승화시켜 주고 있다.
  민화의 가장 뚜렷한 특질인 색채는 소재의 사실과 생명감이나 표정과 관계없이 또 하나의 시각적 효과를 낳고 있다. 사물 그대로의 표정을 살리기보다는 그것을 해체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즉 실제의 고유색과는 무관한, 색채 자체로의 의미를 담은 상징적인 색채가 평면적이고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채색은 옅은 담채로부터 짙은 당채에 이르기까지 제한을 두지 않고 사용하였다. 바탕 색깔과의 어울림을 감안하면서 대담하게 진출색을 구사하였다. 한색보다는 온색, 암색보다는 명색을 구사하여 밝은 사상으로서의 색의 의미와 효과를 더하였다. 이러한 색은 밝고 장식적인 원색이면서도 결코 야하지 않아 한국의 중간 색조 분위기와 어울리고 있다. 또한 사물 모두의 존재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붉은색 옆에 파란색을 똑같은 채도로 칠하여 어느 한 색이 약화되지 않도록 하였다. 보색과 아울러 반대색을 사용하여 활달함과 함께 생활가운데 음양오행의 이치를 깨닫게 하였다. 즉 대상의 색깔보다는 그림 안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주관적인 색가色價를 더 중요시했으며, 다섯 가지 색 중에서 한가지 색을 주조로 하면서도 색의 빛깔에 의한 변화를 줌으로써, 색채 자체로서의 독립성, 상징성, 생명감을 발휘하였던 것이다.(도판58)
  재료는 석염료나 토염료의 광물성과 식물성이 사용되었다.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노랑색은 치자, 등황, 황벽이 사용되었으며, 적색은 홍화와 소목, 자초, 천초가 쓰여졌다. 청색은 람藍 등의 식물성 안료가 많이 쓰였으며, 수묵과 호분도 병용되었다. 금니도 종교화나 궁중화에 한하지 않고 널리 쓰여지며 포도즙화 같은 과일이나 화즙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특히 주색朱色 안료인 경면주사鏡面朱砂는 벽사의 신비력을 가진 광물성 안료로서 부적그림 등에 필히 쓰여졌다. 청색안료도 구충용으로 쓰여져 색과 민간신앙의 관계는 필연적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민화는 색의 변화와 조화에 있어서도 회화적인 원칙보다 색 자체의 사상적 의미와 상징성을 중시하였다. 이런 색깔은 어린이나 여인들의 옷 색깔, 색동,  오색보, 장신구 등의 색감과 일치하는 것이다. 김호연은 이러한 색채를 진채라고 규정하였는데 건물의 단청보다 엷고 중국의 당채에 비해 훨씬 밝은 중간색으로 환한 인상을 준다. 흰색을 10, 검정색을 30으로 할 때 대체로 20전후의 색가로 나타나는 색조를 말한다. 민화의 진채는 여러 빛깔의 배합에서 비롯된 조화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물감의 혼합이라기보다 색상의 엮음이다.
 
  (2) 민화의 종류 및 색채

  민화의 종류는 산수화, 영모화, 화조화, 인물화, 어해魚 화, 풍속화, 책거리 그림, 문자도 등으로 대단히 폭 넓은 주제들을 다루었다. 민화의 진경산수, 금강산도, 풍속관습도 등은 정통회화의 동향이나 경향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명암법, 원근법, 투시도법 등은 책거리 그림에 반영되는 등 정통회화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들은 부귀다남이나 수복강녕, 입신양명 등 기복적인 것, 벽사적인 것, 도덕 규범의 앙양을 위한 것 등 아주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민화가 장식과 생활 습속에 기인한 실용적 요구에 따라 제작되었듯이 종교적 요소인 원래의 뜻과 의미를 잃어버린 가운데 순순한 장식적인 그림으로 변형된 것도 많다.

   ① 화조화의 의미와 색채
  화조화는 고려불화에서 배경적인 자료로 많이 밝혀졌으나 역시 한국화로서의 화조화의 특징은 조선민화의 화조도 병풍에 가장 많이 나타나 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꽃이 인생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서 존귀하게 여겼으며, 오리는 영원히 끊기지 않는 깊은 인연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서 매우 가까이 해 왔다. 이러한 민족성이 질적, 양적으로 풍부하고 우수한 화조그림을 낳았다고 하겠다.
  중국에서는 매년 섣달 그믐날에 초복벽사招福 邪를 위해 문이나 실내에 붙이는 문신門神이나 연화年畵 등의 장식성이 강한 민간화가 송대부터 정착되기 시작했다. 그 후 명明·청대淸代에 중국 각지로 퍼져나갔으며 동아시아 각국의 미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다도코로 마사에는 조선후기의 세시풍속과 화조화, 호도, 목단도 등에 보이는 무명성, 실용성, 서민성, 상징성의 특징은 중국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화조화의 꽃나무와 새들은 각각 상징성을 띠고 있다. 모란꽃은 부귀의 상징이고, 수선화는 충절, 원앙새는 부부의 금술, 까치는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쌍쌍이 짝지은 새들은 부부간의 금술이나 많은 아들딸을 낳아서 행복하고 평화스럽게 살자는 수복강령의 소망을 담고 있다. 또한 탈없이 사랑을 즐기자는 뜻으로 묘사되었다.(도판59) 따라서 화조화는 가장 색채가 풍부하고 담담한 중간색으로 화려하게 그려지는 일이 많았고, 주로 신혼부부의 방이나 안방을 장식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중섭이 '그림은 쉬워야 한다. 산골농부가 보아도 알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듯이 화조화는 쉬울 뿐만 아니라 어둠의 그림자가 없는 밝고 환한 아름다운 그림이다. 이처럼 기쁘고 화려하고 좋은 것을 나타내는 상징에는 흑백의 먹보다는 오방색이 적당했고, 꽃과 새, 생명, 환희의 자연스러움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채색으로 표현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화법을 초극한 멋있고 신나는 자유스러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즉 화공들의 몸 속에 베어 있는 무교적 신명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오방색이 가장 자연스럽다.
  화조도는 항상 짝을 이루어 표현함으로써 춘의, 부귀다남, 강녕 등의 상징성을 띠고 생활주변을 장식해 왔다. 따라서 풍부하고 화려한 색채가 그 특징으로, 빨강, 녹색, 분홍, 파랑, 벽색, 노랑 등이 남녀화합의 상징적 조화미를 표출하고 있다. 색채표현은 중심적 소재를 강한 빨강, 파랑의 보색대비 효과로 돋보이게 했으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위해 차가운 색보다는 따뜻한 색을, 어두운 색보다는 밝은 색으로 밝고 환한 아름다움을 구사하였다. 표현양식이 초기에는 일반회화의 영향으로 사실적이었으나, 시대가 갈수록 장식적인 면이 강조된 변형된 형태가 성행했다. 조선조 후기로 내려오면서 극히 환상적인 양상으로 흐르고, 자수 병풍의 본이 되었다.
  장생도長生圖 계통의 화조그림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지의 불로초에서 다정스럽게 쉬는 한 쌍의 학처럼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기를 염원한 그림이다. 붉은 태양, 다섯 가지 색의 서운瑞雲, 수려한 산, 맑은 물,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 바위, 불로초, 거북, 학, 사슴 등 세상의 모든 기쁨이나 좋은 것을 한데 모아 아름답게 꾸민 구복적 장식화이다. 특히 청록색의 소나무는 절개와 불로장생을 상징하며, 액막이나 새해를 뜻하기도 하여 세화로도 많이 그려졌다. 청록색은 오방색의 청색과 함께 신생, 창조, 불멸, 희망을 상징하고 벽사기복의 색으로 간주되며, 더불어 이상향의 색깔로서 불화, 신선도 등에서 주로 사용되는 색채이다.
  이러한 십장생도는 중국의 신선사상과 한반도의 원시신앙, 자연숭배가 복합된 것으로 수렵도 병풍과 함께 한국의 고유한 것이라고 한다. 주로 새해를 축하하고 복을 기원하던 세화나 회갑 등에서 사용되었고, 일정한 형식과 도식적인 형태에 화려한 채색을 하여 장식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다.(도판60) 봉황과 오동나무, 혹은 소나무를 함께 구성한 화조도는 장생도의 성격이 짙으며, 오방색의 화려한 색채로 깃털을 표현함으로써 감상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일련의 연중행사나 가정행사는 민화창작의 계기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혼례와 수연壽宴으로, 화조도나 모란도, 특히 원앙이나 기러기를 그린 병풍은 혼례식의 상징적인 그림으로 제작되었다. 이렇게 화조화는 장식성과 실용성에 따라 화조도, 초충도, 목단도, 연화도, 화훼도 등으로 구별하여 사용되었다. 
  목단도는 꽃 중의 왕으로 일컬어지는 모란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특히 상징적인 면이 크게 부각되는 그림이다. 원래 궁궐에서 상징적 의식화로 쓰이던 것이 저변화되어 민간에서 유행한 것으로, 제례용이나 혼례용으로 사용되는 일이 많았다. 문벌이 높은 집안의 경사에는 궁궐에서 빌려다 쓰기도 하였으며, 마을단위로 병풍이 제작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8-10폭의 규모가 큰 표장이 주를 이루고 내용도 화려한 것이 많다. 뿌리 밑에 적, 청, 녹, 백, 자색 등으로 채색된 바위를 그린 괴석 모란도와 그밖에 모란만 있는 것, 화병에 꽂혀진 것 등으로 양식화된 것이 목단도의 특징이다.
  모란은 부귀의 상징이고, 괴석은 음양오행의 남녀화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통 청색 괴석은 남근을 상징하고, 구멍이 뚫린 적색 괴석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고 있다.(도판61) 화면 가득히 꽃잎이나 잎이 크고 풍부하게 그려졌으며 배경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꽃은 주로 주색과 홍색의 적색계통, 황색이나 백색 또는 청색모란도 있다. 또한 모란도의 꽃은 무속이나 불교와 관련하여 상징화, 양식화된 경우가 많다. 무당의 집이나 사당의 모란도는 꽃병에 꽂힌 모란으로 그려지거나 꽃만 크게 그리는 등 과장과 입체감이 없는 평범한 구성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연화도는 8-12폭 전후의 병풍그림이 많으며 다른 연작보다 병풍 전체에 수많은 연꽃을 그린 것이 대표적이다. 연화도는 뿌리가 굳으면 가지가 번성한다는 본고지영本固枝榮, 연이어 귀한자식을 낳는다는 뜻의 연생귀자連生貴子 등 중국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특히 사대부가에서 유행되던 화제畵題이다.
  따라서 다양한 기복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꽃의 수에 따라 한줄기의 연꽃은 청렴 결백을, 무더기의 연꽃은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물고기와 소재를 같이 할 때는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기를 바라고, 까치가 연밥 위에 앉아 연씨를 쪼아먹는 것은 과거시험에 잇달아 합격하기를 바라는 의미이며, 제비가 연꽃 위를 나는 그림은 천하가 태평하기를 소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색채는 다른 민화에 비해 소재 그대로의 색을 표현한 생채화가 많으며, 색채보다는 소재적 의미에 더 큰 뜻을 두고 있다.(도판62)
  
   ② 산수화의 의미와 색채
  산수화는 서민들의 순수한 감상을 위해 그려진 것으로 일반회화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민화의 금강산도는 정선이후 계승되어온 진경산수의 저변화된 양상을 반영한 것이다. 소상팔경도, 관동팔경도 등에서도 남종화법이 주로 사용되어 일반회화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민화의 산수화는 형태와 구도 등에서 다양하게 변화시킴으로써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면에서 일반산수와 판연하게 구별된다. 또한 민간에서 전래된 산악숭배와 신선사상, 민간설화 등을 반영하여 자유로운 발상의 변형이나 파격적인 구도를 취하기도 하였다.(도판63)
  민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산수화는 자연 풍경을 재현하기보다는 음양, 동정動靜의 대립과 조화를 밝히고 가슴속에 들어있는 이상의 산과 물을 창조해내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바위는 십장생의 하나로서 그 모습을 표현하기 위하여 많은 준법이 발달하였는데, 민화에서는 음양, 남녀의 상생상극, 화합을 표현하였다. 색채는 민화 중 가장 일반 회화에 근접한 것으로 수묵산수와 청록산수 등이 주로 그려졌다.
 
   ③ 사신도의 의미와 색채
  사신도는 한민족의 꿈과 욕망이나 기원 등을 포괄한 주술적인 벽사의 상징이다. 따라서 청룡, 황룡, 주작, 현무에서의 색채 사용도 오방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형태와 의미는 많이 변형되어 그 낱낱이 주술적 의미를 지니고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남쪽에 역병이 유행하면 그 방위에 주작도를 걸었으며, 청룡도와 황룡도는 운룡의 모습으로 표현하여 가뭄시의 기우제때 기원의 용도로 쓰여지는 일이 많았다.(도판64) 호랑이는 각종 토착신앙이나 민담民譚에서의 벽사의 상징으로 변형되어 정월에 문앞에 걸어 놓거나 사당에 장식되었다. 그 중에서도 소나무에 앉은 까치와 호랑이는 민화 중에서 가장 수효가 많은 유형이다. 까치 호랑이 그림에서 호랑이는 백성을 보호하고 잡귀의 침범을 막아주기 위한 서낭신의 뜻을 받들어 집집에 파견된 사자로 볼 수 있다.(도판65) 이렇게 민화에 그려진 여러 가지 소재는 드러난 모습 외에 안으로 감추어진 상징적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상징성이야말로 민화의 진정한 목적이자 가치라고 생각하였다.
 
   ④ 책거리 그림의 의미와 색채
   책거리 그림은 사물 외의 배경이 제외되어 그려졌다. 역원근법을 사용하여 문방을 쌓아 올리거나 서가에 정연하게 넣어진 하나의 조직체로 꾸몄다. 또 투시도법이나 음영법과 같은 서양화법을 응용하기도 하였다. 자연형태를 해체하여 점, 선, 색의 기본적인 조형요소를 강조하였으며 평면적 화면구성과 색채의 극단적 대비 등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화려한 색채에 의한 기하학적 장식문양은 불가사의한 환상세계를 보여준다. 화조, 연화, 문자 등과의 다양한 결합으로 장식성을 높인 것도 많았으며, 점차 책갑 및 책표지의 도안화 경향으로 변모되어갔다.
  원래는 학문숭배를 나타내는 것으로 서재 등의 장식에 사용되었으나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의미성은 희박해지고 조선조의 정물화로서 독창적인 구상력과 화려한 색채감각이 뛰어난 회화자체로 발달했다.(도판66)
 
   ⑤ 문자도의 색채와 의미
 문방도와 마찬가지로 문자도도 조선조 민화를 대표하는 독특한 회화로서 삼강오륜을 비롯한 당시의 유교적 윤리관이 반영되어 있다.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意廉恥'의 여덟 문자를 희화해서 8폭 병풍에 담은 효제도가 가장 많이 남겨져 있다. 이들 여덟 문자는 중국의 고사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시대의 사회윤리로 자리 잡았다.
  초기에는 문자와 관련 깊은 고사의 작은 그림을 문자의 윤곽내부에 표현하였으나, 후기로 내려옴에 따라 의미보다 회화성이 강조되어 먹의 문자 위에 화려한 색채의 동식물이 그려지거나 문양화되면서 전체적으로 장식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도판67)
  그 외 경작도, 어류화, 수렵도, 산신도, 지도화, 백동자도, 효자도 등이 생활 공간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제작되었다.
  민화의 맥락을 더듬어 가면 그 소재나 내용과 양식에 있어서 벽화가 발전 변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벽화에서 장벽화로, 그리고 병풍 그림으로 변모한 것이며, 사회의 발달과 함께 그림의 소재나 종류가 늘어나고 양식도 다양화됨에 따라 유형화 된 것이다. 민화가 문인화풍의 정통화보다 훨씬 색채가 풍부한 것도 생활공간의 벽화양식에서 온 장식화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고찰해 본 것과 같이 민화의 색은 대상의 사실이나 재현에 충실하기 보다 색상의 어울림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효과를 낳고 있다.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살리기보다는 그것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즉 소재의 고유색과 관계없이 색채 자체의 의미를 담은 상징적인 색채로서, 주제의 용도와 내용에 관련한 의미성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색은 일반회화의 설채에 비해 밝고 솔직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원색이면서도 가볍거나 경박하지 않은 중간 색조를 띠고 있다. 더불어 장식적이고 표현적인 매력과 함께 소박한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특징은 한국미술의 일반적인 미감과도 잘 어울린다.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한층 더 서민의 생활과 염원을 드러내는 문화적 특성을 가식 없이 보여줌으로써 조선 민중의 미의식을 대표하고 있다. 

 
 3) 무신도의 색채의식
 
  (1) 무신도의 개념과 미의식
   
  무신도巫神圖는 종교화로서의 상징적인 도상과 샤머니즘으로서의 벽사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것은 무속신앙의 주술적인 측면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그림임을 암시하는데, 그 부적이나 세화의 기원으로는 잡신을 물리치는 처용그림을 들 수 있다.
  고려중엽 이규보李奎報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노무편 병서老巫篇 幷序〉의 '무당이 자기의 신당 방벽에 단청으로 그린 신상을 가득히 걸어놓고 장구를 치고 가무를 한다'는 기록을 통해 무신도의 역사를 알 수 있다. 또한 솔거가 단군상을 그렸다는 기록으로 이규보의 《동사유고東事類考》를 보면 솔거가 그린 「단군어진檀君御眞」에 화제를 붙여서 가까운 친척들에게 조상으로 모시게 했다고 한다. 또한 목멱산 신사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태조4년 때부터 나오고 있으나 새로운 무신도가 그려지면 옛 본은 반드시 소각시켜 없애는 습속이 있어 현재 볼 수 있는 무신도는 거의 1800년대 이후의 것이며, 조선왕조 이상으로 소급되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무신도는 종교화인만큼 의미나 상징성으로 해석해야 하며, 그를 통해 민족성이나 미의식을 탐구할 수 있어 미술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무신도에 담긴 우리민족의 특징은 따뜻하고 온화하며 무던하고 모나지 않다. 그리고 이는 가장 솔직한 선과 색채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무신도의 색채표현은 조형적인 면보다 전통색채의 상징적 표현 그 자체이며, 더불어 해학적인 표현이나 과장된 표현 등으로 한국회화의 특색을 담고 있다. 
  무신도의 색채가 주로 석채를 사용했거나 어둠 속에서도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원색을 사용한 것은 고분 벽화의 양식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무신도의 색 사용이 고분벽화시대의 색채 의미체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음양오행사상에 바탕을 두며, 모든 색채가 신성하고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황수의 오색천이나 각종 금기를 나타내는 새끼줄에도 다섯 가지 색상을 이용하여, 새끼줄은 노랑, 고추는 빨강, 숯은 검정, 소나무 잎사귀는 파랑, 종이는 흰색으로서 오방색의 상징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색상의 가치는 무당의 의상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원근법이 철저하게 무시되는 도상성, 혹은 무신들의 정면성 등 회화적인 양식이나 예술적인 자율성이 아닌, 자연과 우주의 비밀에 도달하는 종교적 체험입장의 의미를 담고 있다. 구도와 원근법을 거의 무시한 채 종교적인 차원에서 주신만을 과장하는 주관적 사실성이 주요한 기법으로 쓰이었다.
  무신도의 장식적인 화면구성은 의도적으로 신당의 분위기를 자극하는 효과가 있으며, 색채조화와 대비, 색의 반복, 동시적 표현은 깊이와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한다. 원색의 강렬하고 선명한 조화는 원초적인 인간의 감수성에 호소하고 있다. 안료로는 당채와 석채가 주로 사용되며, 적색, 청색, 황색, 녹색의 밝은 색을 주조로 하여 백색, 흑색 등이 보조로 사용되었다.
  무속의 우주관에 따르면 천상, 지상, 지하 삼계에 다같이 해와 달, 별이 있고, 천상에는 천신, 일신, 월신, 성신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지배하고 있다. 지상에는 인간, 금수, 산신의 자연신이, 지하계에는 인간의 사령死靈, 명부신이 살고 있다. 이러한 세계를 도형화한 것이 삼태극의 천부기天符旗다. 새로운 생명체의 생성과 소멸을 포함하며, 빨강은 천天, 파랑은 지地, 노랑은 인人을 의미한다.  또한 세 힘은 동등한 분할에 의한 힘으로 순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종교의 상징체계로서의 무신도는 단순히 사물의 형태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로서 신관을 형상화시키기 위한 종교적 승화과정을 거쳐 현실 속에 일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무신도의 종류 및 색채
 
  무신도의 종류를 살펴보면 인간의 욕망과 삶의 안녕을 비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그려지기 때문에 인간의 세속적인 모든 부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들이 등장한다. 수명장수로 칠성신, 재복을 주는 대감신, 동서남북을 지켜주는 오방신, 수명을 관장하는 염라대왕신, 액을 막아주는 창부, 천연두를 물리치는 호구아씨 등 인간의 근본적인 기복신앙을 고루 담고 있다. 이외에 민족신앙과 관련 있는 용, 호랑이, 봉황, 기린, 거북이, 해, 달, 개 등은 정통화, 민화, 원화, 불화 등의 모든 그림과 조각, 건축, 공예품에 그려지고 새겨 질뿐만 아니라 무신도에서도 무신과 함께 등장하고 있다.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장수, 소원성취, 자녀성장, 평안, 무사를 비는 일을 담당하며 민간신앙에서도 많이 모셔지고 있다. 또한 삼국시대에 불교와 습합하며 전래되어 사찰의 산신당과 칠성당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칠성七星」은 생명을 낳고 지키는 힘을 의미하는 적색을 주색으로 사용한 것이 많으며, 적색과 녹색, 혹은 청색 등, 벽사의 색을 옷과 가사, 모자에 번갈아 사용하고 있다. 신상은 대개 도인이나 신선과 같은 남성이 많으며, 관복차림에 머리에 별을 이고 있는 모습이 신비롭다. 색깔과 색깔로 된 형상의 집합과 조화를 추구한 구도의 아름다움이 특별하다.(도판68)
  「대신마누라」 「대신 할머니」 등은 청색이 주로 사용된다. 대신마누라를 잘 모셔야 집안의 잡귀가 추방되고 굿 등을 순조롭게 할 수 있으며, 잘 모시지 않으면 재앙이 따른다고 믿었다. 집안의 조왕신과 같은 역할로서 풍요로움을 추구하고 현실의 문제를 담당하였다.(도판69)
  「홍씨대감 부부」는 구체적인 성의 등장으로 무신의 권능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고 신격화하였다. 신의 이름에 대감의 벼슬을 붙여서 높이 부르거나 마누라, 할머니, 마마 등의 높임말로 부르는 것이 있다. 대감의 역할은 재물운을 돕는 데 있다. 대감놀이, 대감굿에서 재물을 욕심 내는 대감으로 풍자되어 굿판의 인기가 높다. 색조는 전체적으로 적색을 띠고 있으며, 특히 밝고 따뜻하고 풍요로운 색채는 보는 이로 하여금 행복한 느낌을 자아내는 민화적인 속성을 담고 있어 화목한 가정을 소망하는 현세구복의 성격을 띠고 있다.(도판70)  
  이렇게 주술성과 상징성이 강한 무신도는 부적 또한 벽사색을 사용하였듯이 청색과 적색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장군, 신장, 용신, 별상, 성수, 호구아씨 등 많은 종류에 강력한 벽사색인 청색과 적색이 사용되었다.
  황색은 무신도에서 후광이나 배경에서 주로 쓰이며, 밝고 광채가 나는 것으로 인식되어 고귀함과 성스러움으로 표현하였으며, 옥황상제, 공자, 대신마누라 등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흑색은 부정적인 상징으로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는 어두운 밤, 죽음, 죄악을 연상케 하며 무신도에는 드물게 사용되었다.
  흰색은 「삼불제석三佛帝釋」의 삼각형 흰종이 고깔이나 옷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삼불제석」은 세 부처와 제석을 맞이하는 굿 그림인데 제석은 제천의 왕으로 하늘을 다스리는 역할을 한다. 환인, 환웅, 단군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제석신앙은 환인천신사상과 불교신앙이 복합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백색은 흰색을 신성시하는 고대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인간의 재복, 수명, 잉태를 담당하였다.(도판71)
  「오방신장五方神將」은 이름 그대로 오방위를 지키는 신장으로 동방청제, 서방백제, 남방적제, 북방흑제로 불리운다. 부분적으로 오방위의 색을 사용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적색이 주조를 띠고 있어 강력한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부모를 죽게 하는 청록살, 남편사랑 못 받는 공방살, 떠돌아 다녀야하는 역마살, 남자와 관계해야하는 도화살, 몹쓸 병으로 죽는 역살 등에서 지켜주기 위한 방위신이다.(도판72)
  이상에서 살펴본 무신도의 색채관념은 오색이 오행, 오방위, 계절, 그리고 인체 및 사회적, 심리적 관심사 등 인간사의 모든 관심사와 연결되어 있다. 천지인에 입각한 적색, 황색, 청색을 개념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무신의 종류에 따라 절대적으로 색을 구별하여 쓰지는 않았고 압도적으로 적색이 많이 쓰였다. 이는 불교에서의 적색사용과 일치하며 신성함과 강력한 힘의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청색, 황색, 녹색의 과감한 보색대비에 의한 선명성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보색관계를 이루는 두 색은 음양으로서 우주와의 조화와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며 「칠성」 「삼불제석」 「오방신장」 「별상」등에서 볼 수 있다. 옷이나 가사 혹은 소매 끝에 적색과 녹색을 번갈아 사용한 보색대비의 표현은 강한 색채의 원시성을 느끼게 한다. 특히「정주정씨부인」과 「정주정씨」에서 부인의 적색의상과 마부의 녹색의상, 또 정씨의 적색의상과 마부의 녹색의상은 강한 보색 대비를 이루고 있다.(도판73)
  이러한 원색끼리의 대비, 흰색과의 배색, 짙고 선명한 색과 탁한 색과의 대비, 또는 보색대비에 의한 색채사용은 힘을 상징하여 보는 사람에게 강렬한 신의 인상을 남기며, 더욱 흥분되어 보이는 일면을 들어내고 있다. 원시적 색조는 화려함과 함께 해방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데 이는 종교적 기능에 부수되는 축제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굿판 뒤에 행하는 놀이판이나 난장판 등과 같은 것으로, 오방색이 가지는 상징성과 관계가 깊다. 즉 굿의 직접적인 행위 외에도 무속화 그 자체로서, 또는 오방색 그 자체로서 현실의 질병이나 마음의 질병을 씻어주는 심리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잡귀를 몰아낸다는 의미에서의 괴기스러움이나 무서움, 또는 일반적인 종교화에서 오는 장엄함이나 엄숙함이 없다. 명랑하고 밝게 표현함으로써 민화의 색채표현이나 한국적 미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무신의 의미나 그 대상자의 현실로 볼 때, 분노하고 반항적이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특히 중국이나 일본의 과장된 미술에 비교할 때, 당시의 우리미술은 무속화마저도 순한 마음을 담고 있다. 이것은 무교의 낙관적이고 밝은 사상에서 비롯된 한국인의 일상적인 삶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4) 궁궐화의 색채의식
 
  (1) 궁궐화의 개념과 미의식
   
  민화 중에는 특별히 궁중에서 사용하던 병풍그림이 있다. 예를 들어 궁궐의 용상 뒤에 장식한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나 「목단병牧丹屛」은 그 구도와 색감으로 보아 민화로 볼 수 있으며, 민화적 소재인 십장생도, 효제도, 책가도 또한 궁중에서 널리 애용되었다. 
  이렇게 주제와 색의 사용만으로는 민화와 구분할 수 없는 궁중장식화는 도화서의 화원들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김홍도가 책거리 그림의 명수였다는 기록의 예도 있다. 화원들은 궁중장식화뿐만 아니라 궁궐과 조정의 기록화, 지도그림,  초상화 또는 사대부들의 청탁을 받은 여러 분야의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조선시대 상층문화의 여러 가지 측면과 수준 및 기호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경복궁, 덕수궁 조선왕조 고궁의 임금 용상 뒤에는 해와 달, 한국의 다섯 명산, 바다, 소나무가 있는 「일월오봉도」가 있다. 이것은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들이 그린 걸작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궁궐화는 대부분 궁중에서 사용했던 실용·장식화로서, 개성이 중요시되지 않았고, 그래서 무낙관이었으며, 또한 거기에 그려진 이상은 임금, 사대부, 백성 모두가 공유한 것이기에 크게 민화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궁중회화의 주목적은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거나 국가의 전통을 영원히 계승하는 것이므로 형식과 기법에 있어 엄격한 규범을 따르고 기존의 전례를 고수하려는 보수적 경향이 강함에서 민화와 변별된다. 특히 적, 황, 청, 흑, 백의 오방색 위주의 화려한 색채와 오랜 동안의 훈련과 완벽에 가까운 경지로 인한 섬세한 기교가 궁중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궁중장식화, 의궤도, 지도그림, 초상화, 세화를 포함한 궁궐화를 민화에서 분류하여 고찰하였다. 특히 민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궁중장식화인「일월오봉도」와 「궁모란병」을 통해 고전적 형태,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주제선택, 오색 진채, 그리고 도식적 양식으로 나타나는 고식성古式性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와 「궁모란병宮牡丹屛」 「의궤도儀軌圖」 「십장생도十長生圖」 「문방책탁도文房冊卓圖」같은 특정한 주제의 궁궐그림은 장식적, 도식적, 비사실적인 양식을 고수하였다. 또 병풍이라는 고전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평면적이고, 비개인적이고, 개념적인 성격을 가진 양식으로 일반산수와 화조화의 표현기법이나, 기운생동의 용법, 문인화적 사의개념 등 자연주의적 조형수단과는 거리가 멀다. 의도적으로 선택한 표현방식으로 자연주의적 회화의 예술적 가치가 아닌, 상징적 가치를 추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국미술양식의 근간으로 나타나는 고유의 특성으로 고대의 주술적인 상징성을 더욱 강하게 보존한 서상도瑞祥圖의 전통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궁궐화 양식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형태를 최대한 단일 평면에 배치하는 평면성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 둘째, 대상마다 시점을 달리하여 각각 독립적 대상들로 강조하면서 그들의 조화를 꾀하는 확대된 시야를 사용하였다. 셋째, 수평병립구도로 사물을 동격으로 병치시켰다.  넷째, 사선배치를 억제하고 좌우대칭배치를 사용하여 화면 양쪽간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다섯째, 균질화된 광선을 다원적으로 표현하였다. 여섯째, 소묘의 명료성으로 세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형태가 분명하다. 일곱째, 사물의 고유색보다는 오행에 따른 오방색 등 이상주의적, 상징주의적 성격이 강한 색채를 사용하여 독립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여덟째, 중국과 일본에서는 오래 전에 유행이 지나가 버렸으나 대체로 공간이 협소하고 창이 많은 한국의 궁궐 건축 실내에 적합하도록 병풍형태를 고집하였고, 이는 근대까지도 애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양식적 특징들은 한국 토양에서의 주술적 상징성과 장식적 특성이 크게 부각된 것으로 궁궐화의 기념비적이고 종교적인 도상의 연출에 독특한 긴장감을 부여해 준다.
  이들 고식성은 종묘사직의 건축을 비롯하여, 예악의 규범에 맞는 아악과 제례악과 제례무,「궁모란병」등 종묘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내재되어있는 조선왕조의 복고주의적 성향에서 비롯된다. 조선왕조가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서 중국의 동시대 왕조인 명조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 특히 주대周代를 모델로 하여 유교 이상국가의 원형에 접근하려고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종묘제례에 사용된 제기와 제물의 성격은 례禮의 복고주의적 성격에 맞춰 주周의 전통을 따랐다. 궁중제례악의 오음계도 조선시대에 이미 음악이 다양하게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정악正樂을 계승하여 중국보다 그 원형을 잘 유지보존하고 있다. 궁중장식화의 경우도 조선시대 이전에 이미 사실주의적 기교가 발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양식에서 비사실적·개념적·복고주의적 성향이 다분히 보이고 있어 조선왕조의 상고적尙古的이고 복고주의적 정치이념과 그 미학에 부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궁궐화의 종류 및 색채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는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우리 나라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형식으로 음양陰陽과 일월日月, 오행五行과 오봉五峯이라는 매우 선명한 상징으로 표현되었으며, 일월과 산악山岳을 더하면 세계가 된다는 소박한 감각에서 직접적으로 음양오행의 세계관을 표상하고 있다. 
  「일월오봉도」에는 극도로 형식화된 산수가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좌우에 붉은 태양과 흰 달이 떠있고 중앙에 녹색과 청색의 다섯 개의 암산봉이 당당하게 솟아있다. 계곡 양편에 폭폭수가 쏟아지고, 산 아래쪽에는 반원으로 이어진 모양의 물결과 파도가 강을 이루고 있다. 양끝에는 붉은 노송이 서있는 대칭적인 구성이다. 전체의 톤은 청색과 녹색이 주조이고 부분적으로 적색이 쓰이고 있다.
  이는 천계, 지계, 생물계의 영구한 생명력의 표상으로서 제신諸神의 보호를 받아 자손만대로 길이 번창하라는 국가관의 투영이자 왕실의 지고한 권위를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동물 한 마리 없는 한가한 정경과 원근감 없는 간략화된 화면구성이 오히려 독특한 환상적 도상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진채의 아름다움이 뛰어나다.(도판74) 이러한 내용이나 구도상의 특질은 고구려 벽화와도 상통하는 점이 있으며, 대단히 고졸하고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도 크게 변하지 않아 전통성이나 인습성이 매우 두드러진다.
  오봉도와 같이 장엄미와 색채미가 뛰어난 「일월부상도日月扶桑圖」는 고대의 우주원리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해와 달이 동쪽의 뽕나무에서 뜨고 서쪽의 소나무 속으로 넘어간다는 유래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에서 뽕나무와 소나무는 神樹이다. 지상에는 음양을 강조한 괴석과 영생초가 수평으로 배치되었고, 수평의 장식문양 위에 벽색의 깊은 바다와 기암괴석이 솟아 있다. 그 위로 매우 장식적인 청·적·황·백·녹의 오색구름을 배경으로 뽕나무와 소나무가 해와 달을 굳건히 받히고 있다.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장식성을 띠고 있으며, 세련된 색채감각이 돋보인다.(도판75)
  궁궐에서 제작된 그림 중에서 가장 많은 수가 남아 있는 것은 진채를 사용한 극히 장식적이고 도식적인 양식의 모란도 병풍이다.「일월오봉병」이 왕권의 상징물로서 어좌를 지키며, 사후에도 혼전, 빈전, 제실에 사용된 신성한 것이라면, 「궁모란병」은 그 장식성과 기복적 성격으로 인해 다른 병풍과 달리 길례,  흉례, 가례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조선왕조의 국가적 부적 같은 병풍이었다.    「宮牧丹屛」은 당시의 선비정신을 표상하여 절제와 절약을 추구한 수묵사군자와 달리 왕실귀족의 취향을 적극 반영하였다. 그들이 절대적으로 추구했던 부귀영화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태평성대와 국태민안을 염원하는 의식화儀式畵로서 풍부와 과장의 형태를 통해서 모란의 부귀영화라는 상징성을 극대화시키는 도상이 되었다.(도판76) 
  김홍남은 의궤와 《조선왕조실록》등의 문헌기록을 통해「궁모란병」이 가례, 길례, 흉례와 같은 특별한 궁중의례에 사용된 의식화儀式畵라는 점과 일월오봉병과 어진의 제작과 함께 모란병 제작이 화원화가들의 주된 임무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또 「궁모란병」이 화중왕花中王, 부귀화로서 모란의 축복적  상징성외에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국태민안과 태평성대를 알리는 서상瑞祥으로서의 상징성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강렬한 색채와 형태를 통하여 장식성을 보이면서 회화와 문양의 중간 지점으로서 도식적 성격이 강한데, 이러한 양식구조는 한국인의 사실적이면서 상징적인 생활의식의 이중구조를 드러낸다고 했다. 그러한 상징내용과 양식의 관계를 파악하여 조선 궁중미술이 표방하는 미의식과 조형태도를 이해하여 궁모란병의 미술사적 의의를 규명할 수 있다.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는 장생도 계통의 화조화로서 기복적, 상징적 의미를 담은 화려하고 장엄한 그림이다. 그 상징적 의미가 불로장생의 염원을 담는 십장생그림과 동일하며, 반도 또는 선도라고 불리는 상상 속의 복숭아는 신선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외에도 궁중의 화조화는 청록산수화풍으로 그려져 섬세하고 단정한 선묘와 극락이나 이상향의 상징적이고 화려한 채색이 특징적이다.(도판78) 
  이외에도 「효제도孝悌圖」 「십장생도十長生圖」 「문방책탁도文房冊卓圖」와 같은 특정한 주제의 그림은 장식적이고 도식적인 성격으로 궁궐화의 미감을 선명하게 담고 있다. 「문방책탁도」는 보통 책거리라고 하며, 문방사우를 기본으로 하여 화려하고 고귀하고 지적인 화면으로 꾸며진 그림이 대부분이다.(도판77)
  남공철의 《금릉집金陵集》을 보면 정조의 책거리 취미를 엿 볼 수 있다.

    정조께서 화공에게 명하여 책거리 그림을 그리게 하여 자리 뒤에 붙여두시고 업무      가 복잡하여 여가가 없을 때는 그 그림을 보며 마음과 책을 노닐게 했다.

  책거리 그림은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제에서도 기본 화과畵科 중 하나로 채택되었다고 했다. 이규상의 《일몽고》 중 〈화주록 〉에는 김홍도가 책거리 그림에 뛰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화원의 그림은 새로이 서양의 사면척량화법을 본받고 있는데....세속에서는 이      를 가리켜 책거리 그림이라고 한다. 반드시 채색을 했는데 한시대의 귀인으로 이러      한 그림을 바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김홍도는 이러한 재주에도 뛰어났다.

  위의 두 글에서 정조 연간에 책거리 그림이 인기가 많아 병풍 또는 벽장문 등에 많이 붙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책거리는 구도와 형태의 어울림뿐만 아니라 점, 선, 색의 어울림이 뛰어나 사대부를 비롯해 민중들도 좋아해 민화의 좋은 범본이 되었다. 입방체의 표현은 시각적 이미지보다는 관념적 이미지의 표현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적 특성으로서 색채뿐만 아니라 형태에서도 시각적 표현이 배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또한 많은 기록화가 제작되었는데 채색이 아름답고 운치 있으며 붓놀림이 아주 정밀하였다. 환쟁이의 채색산수라고 증언하는 단원의 『금강산 군첩』도 정조의 령에 따라 그려진 기록화의 일종이다. 단원의 『금강산 군첩』은 이후 금강산의 범본이 되어 19세기에는 많은 민화로 제작되었다.
  『원행을묘정리의 궤』와 함께 그린 「수원능행도」는 조선시대 기록화의 기념비적 명작이다. 8폭의 대작으로서 장면의 특징을 조감법에 의한 파노라마 식으로 펼쳐 그렸는데, 특히 노량진을 건너는 「노량선주교」와 시흥 행궁에 이르는 「행렬도」는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가 되고 있다. 사실화의 기록이라는 점에 충실하기 위해 원근법이 무시되고 대관적인 투시법을 적용하였으며, 인물의 표현은 직위와 품계에 따라 위치 자세 등이 정확하게 표현된다는 형식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장중함 속에서도 잡담과 장난이 엿보이며, 정연한 맛 대신 변화를 주어 생기가 돈다.(도판79)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는 사람모양을 화본畵本에 나오는 형상 그대로 따랐고, 대상의 색 또한 있는 그대로 칠하고 있다. 그러나 꼭 대상의 색이라기보다는 아름다움을 위해 섞어놓은 듯한 다섯 가지의 옷 색깔이 조화를 이루며 성명하고 화려하게 펼쳐져 있다.(도판80)
  조선시대는 도화서 화원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가 지도제작이었고, 문인이나 시인들도 틈만 나면 온 나라를 두루 다니며 시를 짓고 글을 남겼고 지도를 그렸다. 「영변지도」는 주변의 모든 산봉우리, 성곽, 성문, 관야, 민간건물, 논, 밭, 버드나무를 8폭 병풍에 거의 빼지 않고 그대로 그렸으나 기록화라기보다 회화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도판81)
  「전라도 지도」중 「광주전도」는 정방형의 광주성 외각으로 청록색 산을 빙 둘러 배치하여 화사하게 만개한 꽃 모양을 연상시킨다. 푸른색의 산봉우리와 전각, 지명을 적어 넣은 황색, 홍색의 도형은 차라리 유기적으로 흐르는 생명체라고 할 수 있겠다.(도판82) 이와 같이 조선시대 그림지도의 형식미는 산천을 사람의 몸과 같이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로 인식했던 자연관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즉 인생과 우주관을 말하고자 할 때 자연이 인간 자신이며 자신의 몸이 곧 우주라는 것으로 당대인들이 자연과의 친화력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을 뜻한다.

 

 

 

 

 

 

 

 

 

4. 한국회화사에 미친 오방색의 의의와 계승
 
 
 1) 한국의 전통사상에 대한 오방색의 미적 대응
 
  현실의 절박함과 소원하는 바를 해결하고 성취하려하는 관념의 표현체로서 오방색의 상징적 구조와 구성의 그림들은 한국인이라는 집단의 무의식적 잠재력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상징이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떠나서 나타나는 꿈이나 환상 또는 이미지를 가리킨다. 인간은 과거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 부호와 상징 속에서 사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미술은 그들이 생명유지의 욕구와 의지를 도상을 통해 표현한 주술적 상징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이기보다 삶의 욕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자연과의 직접적인 소통방식이다. 그것은 곧 종교적 형태이고, 우리민족이 특별히 종교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서 민화와 오방색의 개념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의 미술품들에 나타난 오방색의 미적 특질들과 당시의 지배적 사상과의 관련성을 정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오방색이 우리 미술품들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내적인 필연성을 서술하고자 한다. 또한 매우 고졸하고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도 크게 변하지 않으며, 전통성이나 인습성을 띠고 나타나는, 즉 한국미술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고전적 성향으로서 오방색을 서술하려고 한다.
 
  (1) 종교·사상에 조응한 한국적 미감
   
  조선조는 삶과 죽음에 관한 두려움을 종교적으로 극복하려는 성聖의 문화와, 그 두려움을 유희적으로 해소하려는 속俗의 문화를 창출하며 살아왔다. 공동체적으로는 성황제, 단오굿, 무당굿, 산신제, 풍어제 등의 마을제를 지내고 장승, 솟대, 남근석의 상징을 통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였다. 개인적으로는 호의호식하고 입신출세하기를 고대하며 집안 곳곳에 그림으로 치장하였다.
  벽사신앙 혹은 벽사신앙의 색채적 주술성과 금기신앙에 관한 미술적 형태들은 곧 인간과 악마의 투쟁사와도 같은 것으로서 동서 고금을 통하여 인류사와 함께 진행되어 오고 있다. 이는 정치적인 사정과 시대나 장소에 따라 변주되어 왔지만 선사이래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건강과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즉 오방색은 한국의 전통적 종교와 사상과 신앙에 대해 미적으로 조응함으로써 이와 같은 벽사구복의 색채적 상징성, 주술성으로 표출되었다.
  색채의 변화, 발전 과정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각 시대의 정치적 변동에 따른 종교·신앙·사상적 배경이다. 즉 불교가 성행했던 고려시대에는 색채가 밝고 화려하면서도 우미하여 귀족적인 취향의 불교회화가 극치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유교사상 및 종교가 국가적 기반으로 자리잡을 때에는 그에 따른 무색 무취한 회화관에서 비롯된 색채의식이 지배계급의 근간을 이루었다. 특히 유교의 금욕적인 인격완성 및 절용주의, 자연에 동화하고 자연에 귀의하고자 하는 심성은 색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있는 그대로의 무색을 이상적 색채로서 또는 생활 색채로 받아들이는 타율적인 의식구조를 낳았다.
  그러나 민중들은 지배계급의 유교적 도덕과 가치관에서 조금은 비켜설 수 있으며, 유교에서 벽사 신앙으로서의 종교적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계급사회에서 오는 불 합리, 외세의 침략, 생활의 빈약 등에 시달려온 민중들은 기복적 불교와 무교에 심취할 수밖에 없었다. 노장사상에서도 무위자연이나 참선, 산천을 유랑하는 풍류적인 도道보다 삶과 직접 연결되는 무병, 제액, 수명장수 같은 복록을 기원하는 신앙적 요소만이 신봉되었다. 또한 음양오행적 사고는 이들 종교·사상과 변주되면서 선사이래 한국인의 의식 속에 뿌리깊게 영향을 미쳐왔다. 더구나 조선말기사회는 내부적인 구조의 붕괴의 여파로 민란이나 사회동요가 일며 많은 신 종교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들은 태고부터 내려오는 지고신至高神, 제천사상, 무교, 그리고 자기수련이나 풍류사상과 같은 고유사상들과 유·불·선의 동양고전사상들이 모두 혼합된 바탕에서 태어났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한민족의 토속신앙을 바탕으로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를 통합한 민중신앙이라는 것이다.
  한국미의 대표적 특질인 무작위의 작위, 자연스러움, 해학, 소박, 자유분방함 등은 한국인의 무교적 기질이 습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무속에서 굿은 성스러운 종교의례이기보다 혼돈스러울 정도로 자유분방하다. 굿의 마지막 절정인 무감에 이르면 굿판에 있는 모든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 춤을 추는데 전체적으로 무질서하고 자유분방하다. 이러한 무속의 자유분방함과 절정감은 무속화와 민화 등의 서민적 그림에서 원색적이고 솔직하며 자유스러운 색채로 발산되었다. 상징적이고 주술적인 색채를 통해 삶과 죽음을 극복하고, 그 두려움을 유희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즉 이들의 종교형태는 형이상학적인 사상보다 벽사구복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자연스러운 예술미로 발현되어 민화와 무속화 속에 자연스럽다못해 거칠고 투박한 미의식으로 반영되고 있다. 한 세상을 호의호식하며 즐겁게 살고 싶다는 믿음의 자세가 화조, 산수, 민속, 교화의 그림 속에 담겨있다. 이때의 색채가 신앙의 대상과 상징으로 존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 불교, 도교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고 있는 그림들은 지배층의 이상과 그 변천의 기록이 되고 있으며, 민화와 오방색은 민중의 현실 속에서 생활의 필연적 대응으로, 나아가 무교적·음양오핵적 사상에 대한 한국적 미감으로서 존재한 것이다. 종교와 사상에 대한 미적 대응물로서 민화의 표현이 벽사구복일 수밖에 없으며, 상징으로서의 오방색이 그들의 미의식을 대변해주고 있다. 따라서 오방색의 의미나 상징성을 찾는 일은 바로 한국적인 미의식을 찾는 일이며, 미술사에서도 매우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2) 한국미술의 고전적 성향
 
  최초의 회화는 석기시대 동굴인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일종의 사냥마술이었다. 생존을 위한 동물사냥에 앞서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들은 보다 강해지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들 그림은 사냥을 위한 주술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점차 일시적인 것이 아닌 오랫동안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져 그림은 보다 더 복잡한 마술과 연관을 갖게 되었다. 사후死後의 생활을 위해 실생활에 있었던 모습보다 더욱 분명하고 질서 있게 그려졌다. 점차 죽은 자를 위한 봉사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미술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가 되었고 벽면의 찬란한 장식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회화의 역사에 알 수 있듯이 그림은 생명유지의 욕구와 의지를 담은 상상력에서 비롯된 상징이었고 주술적인 기능과 장식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오방색은 고대의 회화와 역사를 같이하며 고대인의 서상으로서의 주술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색이다. 조선시대의 민화 등에 나타난 오방색 역시 고대인의 상상력과 주술성, 상징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의 오색 진채는 기복적·주술적인 주제를 선택하였으며 장식적·도식적·비사실적인 양식으로 나타났다. 즉 내용, 형식과 함께 고전적인 색채로 표출된 것이다. 특히 궁궐화는 형식과 기법 등에서 기존의 전례를 고수하려는 보수적 경향이 강해 상고대의 오방색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또한 궁궐화나 서민의 민화 등을 비롯한 모든 한국미술은 서로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으며, 한국미술이 고전적 성향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데서 오방색의 고식성古式性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한국회화는 오랫동안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서 반복적으로 그려 비슷한 주제의 그림이 많고, 화법이나 구도, 양식에서도 일정한 틀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민화는 병풍이라는 고전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사실주의적 기교가 아닌 비사실적, 관념적 성향을 띠고 있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 성취를 위한 기원으로서, 사회집단의 공통된 감수성을 공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정한 틀을 유지하며 반복되어 왔던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민화적 화제와 색채는 변하지 않고 이어져왔다.     
  즉 오방색은 상징적 가치를 추구하는 색채로서, 시대적 변이나 사상의 변화를 도모하기보다는 일정한 주제가 되풀이되는 동안 화면의 구성형식과 함께 고정화되어 일관되게 나타난 색이다. 이것은 한국미술양식의 전반적인 특성으로서, 고대의 주술적인 상징성을 강하게 보존하려는 서상瑞祥으로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회화의 미감은 시대의 문화적 조건, 시대적 미관, 물질적 조건에 따라 변화되기 마련이며, 또한 그에 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흔히 상류계급의 미관에 의한 감상화는 다름 아닌 시대성, 국제성, 지역성, 정신성을 표방하는 문화적인 미이다. 이에 반해 서민에게 있어서의 그림이란 숭배, 기원, 벽사, 장식과 같은 용도로 쓰이는 문화적 실용품이다. 조선후기에 들어 서민계층의 사회경제가 발전되면서 미술에 대한 향유가 서민층에게까지 확산되었으나, 이때의 감상적 취미도 시대적 미관이나 시대의 문화적 조건 등에 변화되어 나타나기보다 전에부터 있어 왔던 화조, 어충, 풍속, 사경과 같은 자연 모방적인 것을 택하였다. 또한 궁정에서의 호사, 향락주의, 장식취미, 탐미주의 등의 궁정취미도 상류의 문화미와는 미감의 원천이 다른 것이다. 더구나 전통적인 한국회화는 삼국시대 이래 화공에 의한 실용화가 양적으로 대세를 이루었고, 조선후기의 실경산수, 풍속화, 초상화 등에서도 이념화된 미관의 완벽이나 국제적인 화관 화법보다는 천진하고 천연스런 소박주의의 자연미가 돋보인다. 이것은 민화의 고졸한 발상, 소박한 형태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미감이다. 이에 근거하여 볼 때 한국미술은 대체로 시대적 추이와 관련 없이 미술동향의 변화가 거의 완만하게 나타나거나 고전적 미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미술의 총체적인 고식적 경향의 일환으로 민화 혹은 오방색은 궁정과 서민층 모두에게서 애용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의 기질인 '한결같다' 말이 의미하듯이 한결같은 표현으로 일관하려는 경향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한결같은 성향은 어떤 한 시절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시간의 새로운 관념으로 삶의 관계를 극복하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변할 수밖에 없는 인간과 시간의 관계를 넘어 변하지 않으려는 자연의 시간에 대한 의미가 흐르고 있다. 즉 한결같은 조형미술의 탐구는 시대의 흐름을 타는 것이 아니라 긴 세월의 시간을 관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결과는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공통된 의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오방색은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인식의 의미로서, 한결같은 성향으로 반복되어 나타났다. 한국미술의 선, 형, 색, 질감 등에서 오래된 것 같은 새것, 새것이지만 오래된 것 같은 것을 미적 가치로 인식하는 미적 기질에 맥을 닿고 있다.
 
 
 2) 사회적 기류에 의한 문화적 소산물
   
  (1) 사회적 변화에 따른 새로운 미감의 표출

  앞장에서 살펴본 조선시대의 민화, 궁궐화, 무신도 등은 특히 조선후기와 말기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을 가지고 있다. 당시의 사회적 변화의 일환으로 삶에 대한 의지와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현세 구복적인 성향의 시대적 소산물로서 필연적이었다. 그것의 새로운 표현체로서 상징적으로, 의미적으로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 오방색이다.
  한국인은 새로운 맛이나 사상보다 한 시절 한 사상에 고착화하여 변하지 않으려는 성향과 한편으로는 부단히 변모하려는 또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앞서 살펴본 고전적 성향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오방색은 새로운 사회적 기류에 의한 문화적 대응물로서, 당시의 사회적 변화에 대한 민중의 새로운 미감으로 드러난 것이다. 사회의 변화, 즉 서민의식과 민중의식의 성장에 따른 문화변동의 과정에서 오방색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상층과 기층의 문화가 섞이는 시기였다. 이러한 상층과 기층의 융합현상에 의한 문화적 특징은 사회적 변화에 따라 생겨난다. 이 시대의 주된 특징은 일반 민들이 사회경제적인 여러 조건의 변화에 힘입어 집단적으로 신분상승한 것이다. 민화가 조선의 고유한 예술미로 발현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에 생겨나 19세기에 그려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19세기에 민화가 왕성하게 그려진 것은 조선후기의 다양한 사회변동에 따라 민중들의 신분이 급상승하면서 자신들의 감정이나 가치관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게된 데 연유한다.
  또한 민화 또는 오방색이 크게 유행하게 된 배경으로 많은 그림의 수용을 필요로 했던 시대성이 크게 작용한다. 봉건사회가 급격히 해체되어 가는 영조·정조연간의 조선후기 사회는 모든 사회의 가치, 내용, 형식 등에서 변화를 필요로 했다.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은 문화적 생산과 소비를 가져왔고, 일부 양반 계층에만 있었던 예술적 취미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서민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미술에 대한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새로운 내용과 새로운 형식의 창출이 필요했고, 그 결과 한국적 사실주의라고 일컫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절정을 이루었다. 또한 수묵화에 대한 새로운 미감으로서 민화는 여염집에서 널리 사랑 받고 사용되었다.
  민화와 오방색의 확대 보급은 이러한 현상들과 궤를 같이하며 서민들의 생활문화로서 확산되었다. 민화와 오방색은 민중들의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를 반영한 것으로 양반사회의 문화적, 예술적 향유를 모방하면서 새로운 기조로 형성된 것이다. 상류층의 문화가 하층민에게 널리 확산되는 단계에 들어서면 기존 예술이 지니고 있던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다양한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이때 그 형태는 민중의 미의식과 생활문화의 독자성으로 표출하게 된다. 민화의 특성은 내용, 용도, 형식, 색채 등에서 상류층의 감상화나 장식화와 구별되어진다. 즉 민간의 장식화는 기존의 화법, 화관에 의한 미감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신분상승과 부의 축적을 향유하고 장식할 수 있는, 또 그들의 정서에 맞는 미감의 자유분방한 색깔로 표출한 것이다. 이것은 민요나 민담, 탈놀이, 마을 공동체놀이, 문화적 조형물인 장승, 솟대 등 당시에 활발했던 민중 문화예술과 함께 민중의식의 성장 속에서 떠오른 힘있고 자유분방한 문화적 소산물로서 민중 미의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 시대의 말기적 현상에 따른 색채의 범람
 
  색채는 정치·사회·경제적 흥망성쇠에 따라 반복되어 나타나는 특성이 있다. 즉 색채 사용의 빈도나 패턴화 현상은 시대적 흥망성쇠, 국제적 정세와 문화교류상태 등 외래적 영향에도 크게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문화적, 사회적 변동의 추이에 따른 새로운 형식의 창출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시대적 특성에 따라 반복되어지는 색채 유형의 예를 살펴보려고 한다.  
  새로운 국가 체제가 세워지는 사회적, 문화적 안정과 발전 도약의 시기에는 색과 문양의 사용에 있어서 절제된 양상으로 나타나며, 장례풍속이나 의례 등이 검소해진다. 점차 국가적 기반의 안정기가 되어 문물이 풍요로워지는 시기에는 조형미 넘치는 자연주의적 경향과 다양한 사조가 나타난다. 시대의 후기와 말기의 현상은 미술의 양산화로 이어져 광범위하게 대중의 일상생활 속으로 보급되는 반면 질의 저하를 가져온다. 봉건사회의 퇴폐를 반영해서 미술전체의 성격이 말초적인 것으로 기울어져 간다. 사치와 허례가 극심하고 국운이 쇠퇴해 가는 말기에는 보통 무늬의 범람이나 색채의 범람으로 나타나며, 또한 다량화 됨에 따라 패턴화, 추상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볼 때 경제·사회적으로 풍요로웠던 조선조 후기는 신분제도의 혼란과 함께 점차 사치와 음주유흥이 크게 문제되었던 사회이다. 즉 민화의 유행이나 색채 사용은 서민들의 사회진출에 따른 향락과 문화적 욕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더욱이 조선 말기에 해당되는 1850년경부터 1910년까지는 대내외적으로 급변하던 어지러운 상황이었으며,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미술상황은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남종화 지상주의로 일원화되었다. 철학과 사상이 결핍된 극단적인 감색현상으로 이어지고, 한가지 주제만을 전문으로 그리는 등 전반적으로 수준이 하락하였다. 또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민화에서 반영되어 확산되었다. 지나친 감색현상으로 화단이 위축되면서 정신적 공황을 메우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민화의 확대를 가져왔다. 그리고 점차 수요가 폭발됨에 따라 유형이나 색채 등에서 문양화, 추상화, 범람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색채의 범람과 함께 말초적이고 원색적인 색의 사용, 문양의 패턴화, 인쇄를 통한 다량생산 등 질적인 저하를 가져왔음을 부인 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종합해보면 오방색은 한 시대의 상징적 언어로서 고대사회로부터 계승된 민족의 신앙과 사상을 상징하고 표출하고 있으며, 특히 벽사수복을 기원하는 색의 역할을 담당했다. 오방색은 한을 뛰어 넘는 용기를 심어주는 색으로서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윤택하게 하였으며, 현실을 탈피할 수 있는 긍정적 이상향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처럼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양하게 생각하고 꿈을 잃지 않도록 한 오방색의 기능은 우리의 회화사와 정신사에 매우 귀중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하겠다.
  
 
 3) 전통과 계승으로서의 의의
 
  한국미술이 동양미술이라는 보편적 가치관 속에서 중국과 일본에 국경을 이루고 교류하면서 어떻게 고유한 전통을 간직하고 발전시켜왔는지, 우리민족의 전통미가 현대의 조형미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의 정체성에 대한 담론은 1990년대에 제기되었던 가장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과거의 미술을 대상으로 할뿐만 아니라 동시대 미술을 대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회화 원류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한국 현대미술가들에게 지워진 과업이기도 하다.
  한국미술을 이어가는 귀중한 문화 유산 중에 첫째의 특징이 한국인의 우아한 색감이다. 그것은 시대와 대상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지만, 한국미술에 면면히 나타나고 있는 오방색이다.
  역사적인 관찰에 의하면 한국문화의 원류가 채색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는 아기가 발견되는 우물가에 전광과 같은 이상한 빛이 드리워지며 붉은 색 알에 들어 있는 동자를 꺼냈다고 쓰고 있다. 고주몽의 설화에서도 유화부인이 낳은 알은 빛에 의해 감응되는데 그 빛은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깔을 뜻한다. 또 수로왕의 설화에서도 동자가 붉은 색 끈과 황금색 상자에서 알의 껍질을 벗고 나왔다. 이렇게 영웅적인 탄생설화와 위대한 교훈을 그리는 일은 결코 묵색의 세계가 아니라 채색의 세계였다.
  그러한 전통은 고구려 시대의 고분벽화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의식에 병풍이 쓰였는데 팔관회의 기록에 병풍을 채병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것이 채색화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의 불화로 이어지면서 세련된 감각으로 발전되었다. 고구려 벽화의 주황색을 기조로 한 은은한 색조, 고려불화의 붉은색과 이상향을 대표하는 청록색조들은 모두 오방색의 조화와 변화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송나라 곽약허가 고려 회화를 '고유단청지묘固有丹靑之妙'라고 칭송했던 색깔이다. 고려 청자의 형태와 비색 또한 고려불화의 정교하고 우아한 색조 및 형태와 맥을 같이 한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민화, 무속화, 궁중장식화, 단청, 불화 등을 통해 계승되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에 의해 불교미술이 급격히 쇠퇴했지만 왕실의 비호아래 고려불화를 계승한 수준 높은 불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예를 들어 조선초기의 「무위사 후불벽화」는 아미타 존상의 단아한 신체표현과 부드러운 붉은 색과 녹색을 주조로 한 밝은 채색, 그리고 구불구불한 주름선, 착의법, 장식적인 대좌의 표현 등이 벽화라는 재료와 함께 고려불화의 특징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서 주목된다. 또한 임란이후 후기에는 사찰의 중창과 함께 당시의 진경산수화, 풍속화 등의 한국적 사실주의의 시대적 보편성을 반영하였다. 즉 조선시대 불화는 사실적인 회화기법과 부처님의 이상적인 신관身觀이 접목하여 완성되었으며, 동시에 전통을 고수하여 전통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또한 단청은 불교, 유교가 성행하였던 동양 3국에 일찍이 유행하였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단청문화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는 나라는 우리 나라 뿐이다. 우리 나라는 사원을 새로 건립하면 반드시 단청을 하고 궁전이나 사찰의 단청이 퇴색되면 다시 새롭게 단청한다. 조그만 사당이나 팔각정 등의 건조물을 지어도 단청은 필수적이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다포 건축의 장식적인 구조에 어울리는 복잡한 양상을 띤 다채로운 색으로, 단청의 장식적 효과를 더욱 강조하였고, 색채미를 강하게 표출하였다.
  이와 같이 오방색은 그 시대의 사회적 취향과 성향을 잘 보여주면서도 고대로부터 깊숙이 잠재되어 내려오던 생활 신앙에서 비롯된 축복과 희망과 구원의 의미를 나타내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통으로서 한국역사의 전 시기를 통하여 민화적인 그림으로 끊임없이 제작되고 사랑 받아 왔던 것이다.   
  해방이후 동양화단은 일본화 양식에 대한 본능적인 반 채색 감정으로 인해 일본화의 양식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채색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반응을 보였다. 또한 서구에서 미니멀리즘 미학이 유입되면서, 정신 세계를 지향하려는 이상미의 추구로서의 감색현상과 철학성은 1970년대 한국의 모노크롬회화로 나타났다.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는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동양적인 사상이 배어있는 미술의 한 성향으로 발전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선조가 창조하고 면면히 계승해온 범 자연성의 문화적 맥락을 오늘의 시점에 재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서양화단의 감색으로 일관된 현상에 대한 자각과 함께 70년대 후반부터 채색화의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한국적 이미지를 새로운 표현기법과 조형으로 차용하며, 전통의 오방색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한국적 이미지의 전통색을 사용한 현대의 화가로서 박생광은 대담하고 강렬한 천연색으로 색 자체에 대한 본질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민족미술의 기치를 올렸다. 또한 민화풍의 바보산수에서 김기창은 적·청·황·흑·백색을 사용하며, 명쾌하고 원색적인 색상과 함께 분명하고 빠른 속도의 붓 놀림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종상은 한민족의 원형상을 주제로 하여 속도감 있는 일획과 방위색 등의 화사한 색을 구사하였다. 이화자는 벽화작업으로 주제와 정신, 양식과 소재, 채색의 질료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의 대표성을 지닌 작업을 주창하고 있다. 장혜용은 일정한 공간 속에 한국의 얼을 추상적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오방색의 현대적 변용을 꾀하고 있다.
  특히 박생광은 80년대에 이르러 민족정서를 기반으로 한 채색화의 신경지를 이룩해냄으로써 수묵위주의 한국화단에 채색화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그의 채색은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방법적인 모색에 있어서 색채 자체의 의미화와 평면화를 통해 회화 자체로 인식하는 현대적인 감각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색채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색채 자체로의 구체성을 띠고 나타난 것은 전통의 수용과 함께 색채의 자율성의 회복이라는 면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회화의 평면성이 갖는 장식적 효과를 적절히 높이면서 한국고유의 이미지를 형상화하였다. 특히 그 소재는 한국전래의 무속화와 민화에서 변주된 것으로, 이들이 갖고 있는 회화적 성과를 자신의 방법으로 원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현대적인 감성으로 해석하였다는데서 우리 고유의 정신의 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도판82,83)   
  현대에 이르러 오방색은 그 상징성의 계승과 작가의 새로운 시각의 결합에 의해 재해석되고 변용 되어지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전통색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이 외적 이미지만 도출했을 때에는 전통적 소재와 현대적 기법의 어색한 결합에 그치고 만다. 그러므로 전통색을 재조명하여 오늘의 새로운 양식으로 변환할 때 전통색채의 미감을 현대적 미의식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5. 결론 
  
  이상에서 본 연구는 우리 민족의 과거 문화 속에 나타난 색채를 고찰하였다. 어떠한 의식을 바탕으로 색채를 생활화하였으며, 또 회화미로 승화시켰는가를 추출함으로써 한국인의 색채의식을 정리하였다.
  현대에 들어 우리민족의 전통미가 어떻게 고유한 형식으로 계승되어 왔는지, 또 현대의 조형미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의 정체성에 대한 담론이 이어지고 있다. 우아한 색감은 한국회화 원류의 전통으로 계승되어지는 많은 전통미 중에서 대표적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전의 현존하는 회화작품이 드물고, 조선시대 이후 유입된 남종 문인화에 의해 수묵위주의 회화만이 중시되었다. 식민지 이후 일본의 색채와 미감이 한국 채색화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하여 전통색채의 현대에로의 맥이 거의 단절되었다. 전통적인 정신성과 한국적인 미감의 상징적인 색채로서 의 고유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근대 이후 전통색채에 대한 학습이나 경험이 부족하고 이를 분석해낼 수 있는 색채 인식 기준이 없는 실정이다. 채색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미진한 상태이며,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특히 조선조의 종교적, 사회적 배경 등과 관련하여 그 시대의 미의식과 미술품에 나타난 오방색의 관계를 유추해봄으로써 현대적인 미감으로의 계승 발전을 타진해보고자 하였다. 
  우리민족은 선사시대부터 있어온 무교적 영향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에 의한 미의식에 중국으로부터의 유교, 불교와 노장사상을 비롯한 음양오행사상이 더해져 색채관이 정립되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의 채색화로서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차분하고 중후한 색채감으로, 고려불화는 화려하고 정교한 색채로, 무신도는 본능적인 색채감정으로, 조선조 민화는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색채로 나타났다.
  조선조는 유교적 세계관이 사회의 중심에 자리잡았고 무교, 불교 등이 저변화되었다. 왕공, 사대부와 서민의 계층적 분리가 확연하게 되었고 철저한 의미중심의 사회가 되었다. 또한 외세의 잦은 침략과 조선조의 절용 정책과 생활의 빈약함이 더해져, 이후 한국의 미술품은 자연주의, 무기교, 비정제성, 소박성, 비애, 해학 등의 미적 특성이 양식화되었다. 회화에서도 회화의 기본구조나 형식적인 면보다 정신성이 중시되는 수묵위주의 남종문인화가 자리잡게 되어 오늘날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쳐오고 있다. 이것은 조선조의 유교가 주자학 일변도로 획일화되어 그 사상이 단순하고 철저하다는 데에서 기인된 것이기도 하다.
  한편 궁중과 서민사회의 세시풍속을 비롯하여 생활장식에 관련한 문화 예술품과 종교화 등에 순연한 원색의 오방색은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나타났다.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위안으로, 결핍된 삶을 뛰어 넘는 즐거움과 화려함으로, 무의식적 본능의 황홀경으로, 벽사진경을 담아 일관되게 표현되었다. 즉 오행으로서의 상징성과 관념성은 당시의 시대적 소산물로서 현세구복적 미의식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한국의 오방색은 중국의 완벽하고 풍부하면서도 무거운 색감과 일본의 섬세하고 화려하며 감각적인 색채와는 다른 독자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간색조의 담담한 색으로서 한국 미술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소박미의 경향성을 담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미적 특성이 모든 채색 그림에서도 근간이 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오행에 따른 색깔이나, 극락·이상향의 색깔인 광물성 청록색 등의 상징적 색채의 사용으로 인해 사실주의적 성격보다 상징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비사실적이고 관념적이며 복고주의적인 성향을 다분히 보이고 있어 한국미술의 고전적인 미학에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무교적·음양오행적 가치관 속에 유교, 불교, 노장사상이 변주되어 나타난 것으로 현세구복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오방색은 한국전통사상에 대한 미적 대응물로 벽사, 수복강녕, 해탈, 구제를 기원하고, 권선징악의 모범이 되거나 종교적 신앙으로 통속화했다. 이에 따라 서민들의 생활을 진실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그들의 미의식, 색채감각, 예술에 대한 소박한 의지와 열망을 드러낸 대중적인 실용화로서 민화가 꽃피운 것이다.
  민화의 소재들은 화가의 창의적인 선택이 아닌, 음양오행에 의한 상생상극의 자연학적인 원리에 의해서 차용되었으며, 이러한 소재는 인간의 감정이나 사상을 상징하고 있다. 색채 역시 음양오행사상에 의해 의식화되고 관념화된 색으로서 소재가 갖는 의미와 맥을 같이한다. 또한 무교적 사고에서 비롯된 원초적 심성의 색으로 색채적 주술성을 지니고 있다. 민화는 상생에 따른 오색의 변화와 조화를 통해 상징적 색채미와 장식적 조화미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민화의 표현은 종교와 사상에 조응하는 미감으로서 벽사구복일 수밖에 없으며, 시대적 변이나 사상의 변화를 도모하기보다는 주제의 되풀이와 함께 오방색의 사용을 고정화하였다.
  오방색은 시대에 대응한 한국적 미감으로서 또 다른 상반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국인의 역동적이면서 고식적인 생활의식의 이중구조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민화와 오방색은 조선시대 후기의 사회적 기류와 민중의식의 성장에 따른 문화적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 판소리, 탈춤, 마을 공동체놀이, 장승, 솟대 등 당시에 활발했던 민중 문화예술과 함께 민중의식의 성장 속에서 떠오른 힘있고 자유분방한 문화적 대응물로서 나타난 것이다. 풍요로운 경제·사회현상을 반영하는 서민들의 사회진출에 따라 향락과 문화적 욕구에 대응하는 새로운 미감으로 민화와 오방색이 표출되었다. 이후 말기의 퇴폐를 반영하여 미술전체의 성격이 말초적인 것으로 기울어지면서 색채의 범람과 함께 말초적이고 원색적인 색의 사용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민화와 오방색은 민중의 현실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났으며 전통적 사상의 미적 대응물로서 존재하였다. 오방색은 그 시대의 사회적 취향과 성향에 대응하는 가운데 고대로부터 한민족의 본능 속에 잠재되어 내려오던 신앙에 근거한 축복과 희망, 그리고 구원의 의미로 표출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조선조의 민화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의 전통으로서 우아한 색감의 조화를 이루어 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오방색이 갖는 상징내용과 시대적 배경을 파악하여 한민족이 표방하는 미의식을 이해하고 오방색의 미술사적 의의를 규명하였다. 현대의 풍요롭고 긍정적인 색채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전통색채를 발굴하여 현대적인 조형어법으로 복원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색으로서의 오방색은 계속 연구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전통이라는 것이 한국적 고유성으로 발현되어 현대의 감각과 접목함으로써 현대적 미의식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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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목록

도판1.  「백자철화국문白磁鐵畵菊紋항아리」 높이 30.8cm, 17세기후반, 국립중           앙박물관소장, 국보93호
도판2.  「서안書案」 47.9x25.7cm, 조선말기
도판3.  「분청사기철화어문병」 29.7cm, 중앙박물관소장                 
도판4.  「해인사 구광루」 합천   
도판5.  「오색항라 조각보」 110x111cm, 19세기, 한국자수박물관소장
도판6.  「바리공주 거리」 서울 새남굿, 무형문화재 제104호
도판7.  「부네」 하회별신굿, 파계승마당, 무형문화재 제69호            
도판8.  「비단각상보」 69.5x70cm, 평창아트소장
도판9.  「남아돌복」 복원품, 국립민속박물관소장
도판10. 「안동차전놀이」 무형문화재 제24호
도판11. 「송광사」 조선초기, 순천      
도판12. 「백자철화운룡문호」 높이30.2cm, 17세기, 호암미술관소장
도판13. 「아미타삼존도」 226x145cm, 표충사, 1885
도판14. 「신선도」 112x93cm, 선암사, 1858      
도판15.  이인문 작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 121.2x53.2cm, 종이에수묵담채,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도판16.  파랑이미지, 바다
도판17.  빨강이미지, 가마, 19세기, 덕수궁 궁중유뮬전시관소장 
도판18.  검정이미지, 갓
도판19.  백색이미지, 백의
도판20.  황색이미지, 메주
도판21.  태극기
도판22. 「처용무」 무형문화재 제39호
도판23. 「위도 띠배놀이」 풍어제, 무형문화재 제82-다호
도판24. 「8목중춤」 봉산탈춤, 제2과장, 무형문화재 제17호
도판25. 「영산줄다리기」 무형문화재 제26호
도판26. 「진주검무」 무형문화재 제12호
도판27. 「활옷」 19세기, 단국대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소장
도판28. 「삼회장저고리」 1700-1800년대, 국립민속박물관소장
도판29. 「여아돌복」 복원품, 국립민속박물관소장
도판30. 「오방낭자주머니」 복원품, 국립민속박물관소장
도판31. 「제복祭服」 흑초의, 정원용(1783-1873)의 유품, 국립민속박물관소장
         중요민속자료 제13호
도판32.  교자상                                  
도판33.  납폐함과 내용물, 국립민속박물관소장
도판34.  금줄
도판35.  대청, 경상북도 월성군 양동 이씨 문중의 고가, 1850년대, 국립민속박           물관소장
도판36. 「대행렬도」 안악3호분, 고구려초기
도판37. 「거마행렬도車馬行列圖」 쌍영총, 고구려 5세기
도판38. 「수렵도」 무용총, 고구려 5세기후반
도판39. 「청룡도」 강서대묘, 고구려후기
도판40. 「주작도」 강서중묘, 고구려후기
도판41. 「하늘세계」 강서대묘, 고구려후기
도판42. 「현무도」 통구사신총, 고구려후기
도판43. 「복희와 여와」 오회분4호묘, 고구려후기
도판44. 「황룡도」 오회분4호묘, 고구려후기
도판45. 「봉정사 극락전」 12세기, 안동, 국보15호
도판46. 「관경변상서품觀經變相序品」 150.5x113.2cm, 고려시대, 西福寺, 일본
도판47. 「아미타여래」 184.5x86.5cm, 고려시대, 正法寺, 일본
도판48.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111x43.5cm, 14세기, 善導寺, 일본
도판49. 「수월관음도」 419.5x254.2cm, 1310, 鏡神社, 일본
도판50.  심사정 작 「파교심매도 橋尋梅圖」 115x50.5cm, 비단에수묵담채, 18           세기,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도판51.  정선 작 「금강전도」 130.6x94.1cm, 종이에수묵담채, 1734, 호암미술           관소장
도판52.  김홍도 작 「무동舞童풍속화첩중」 27x22.7cm, 종이에담채, 국립중앙           박물관소장
도판53.  신윤복 작 「쌍검대무」 28.2x35.2cm, 종이에담채, 간송미술관소장
도판54. 「군학산수도」 56x35cm, 종이에채색                       
도판55.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 91x56cm, 종이에채색, 영남대학교박물관소           장
도판56. 「화조도」 각76x30cm, 서울대학교박물관소장
도판57. 「금강산도 8곡병」 종이에수묵담채, 각82.5x44.5cm, 호암미술관소장
도판58. 「화훼도」 각73.5x27cm
도판59. 「화조도 대련對聯」 132.8x48cm, 종이에채색, 호암미술관소장
도판60. 「봉황장생도」 37x155cm, 진주대아고교소장
도판61. 「목단도 10곡대병」 각174.2x48cm, 비단, 호암미술관소장
도판62. 「수련도水蓮圖10曲屛」 98.5x380cm, 비단에채색, 호암미술관소장
도판63. 「화조산수도」 119x43cm, 종이에채색, 영남대학교박물관소장
도판64. 「운룡도」 103x61cm, 호암미술관소장
도판65. 「까치호랑이」 116.5x83cm, 호암미술관소장
도판66. 「책거리 8곡병」 각52.2x31cm, 종이에채색, 호암미술관소장
도판67. 「문자도」 53x33cm,
도판68. 「칠성」 99x61cm, 1800년대, 서울
도판69. 「대신마누라」 87x52cm, 1900년대, 서울
도판70. 「홍씨대감부부」 101.5x711.5cm, 1800년대, 서울   
도판71. 「삼불제석」 95x58cm, 1800년대, 서울
도판72. 「오방신장」 66x53.8cm, 비단, 1900년대, 온양민속박물관소장
도판73. 「정주정씨」 106x61cm, 1800년대, 서울
도판74.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6曲屛」 18세기, 경복궁
도판75. 「일월부상도日月扶桑圖」 149.5x122cm, 마에채색, 호암미술관소장
도판76. 「궁모란병」 총330x548cm, 4폭1쌍, 창덕궁
도판77. 「책가문방도冊架文房圖8曲屛」 68.5x342.4cm, 종이에채색, 호암미술관           소장

도판78.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8曲屛」 99x285cm, 비단에채색, 호암미술관소           장
도판79. 「노량주교도섭도舟橋渡涉圖」 『원행을묘정리의궤도』 제8폭, 비단에           채색, 142x62cm, 1795, 호암미술관소장
도판80.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원행을묘정리의궤도』 제3폭,
         142x62cm,  비단에채색, 1795, 호암미술관소장
도판81. 「변박개도卞璞改圖東萊府殉節圖」 145x96cm, 1760, 육사박물관소장
도판82. 「광주전도」 『전라도 지도』 조선시대
도판83. 「봉정사 대웅전」 15세기, 안동, 보물55호
도판84.  박생광 작「무당」 부분도, 137x136cm, 1981
도판85.  박생광 작「명성황후」 부분도, 200x330cm, 1981 



참고도판

 

 

 

 


도판1.「백자철화국문白磁鐵畵菊紋항아리」          도판2.「서안書案」47.9x25.7cm, 조선말기         높이 30.8cm, 17세기후반,
      국립중앙박물관, 국보93호

 

 

 

 


도판3.「분청사기철화어문병」                                   도판4.「해인사 구광루」합천
 높이 29.7cm, 중앙박물관

 

 

 

 


도판5.「오색항라 조각보」110x111cm                      도판6.「바리공주거리」서울 새남굿

 

 

 

 

 

도판7.「부네」하회별신굿                                     도판8.「비단각상보」69.5x70cm

 

 

 

 


도판9.「남아돌복」복원품, 국립민속박물관         도판10.「안동차전놀이」놀이전에 신명돋우기

 

 

 

 

 


도판11.「송광사」조선초기 ,순천                      도판12.「백자철화운룡문호」높이30.2cm,
                                                           17세기, 호암미술관

 

 

 

 

 


도판13.「아미타삼존도」226x145cm,                 도판14.「신선도」112x93cm, 선암사, 1858
       표충사, 1885

 

 

 

 

 

 

도판15. 이인문 작「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                          도판16. 파랑이미지, 바다
121.2x53.2cm, 지본수묵담채,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도판17. 빨강이미지, 가마, 19세기                                      도판18. 검정이미지, 갓

 

 

 

 

도판19. 흰색이미지, 백의                                          도판20. 황색이미지, 메주


도판21.태극기                                                            도판22.「처용무」

 

 

 

 

 

 

 


도판23.「위도 띠배놀이」풍어제                          도판24.「8목중춤」봉산탈춤, 제2과장

 

 

 

 

 

도판25.「영산줄다리기」                                               도판26.「진주검무」

 


도판27.「활옷」19세기                               도판28.「삼회장저고리」1700-1800년대,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도판29.「여아돌복」복원품,                                 도판30.「오방낭자주머니」복원품,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도판31.「제복祭服」흑초의, 정원용(1783-1873)의 유품,                       도판32. 교자상
    국립민속박물관, 중요민속자료 제13호

 

 

 

 

 

 

도판33. 납폐함과 내용물                                                   도판34. 금줄

 

 

도판35. 대청, 1850년대, 국립민속박물관              도판36.「대행렬도」안악3호분, 고구려초기

 

 

 

 

 


도판37.「거마행렬도車馬行列圖」쌍영총,            도판38.「수렵도」무용총, 고구려 5세기후반
         고구려 5세기

도판39.「청룡도」강서대묘, 고구려후기                 도판40.「주작도」강서중묘, 고구려후기


도판41.「현무도」통구사신총, 고구려후기           도판42.「하늘세계」강서대묘, 고구려후기


   

 

 

 

도판43.「복희와 여와」오회분4호묘, 고구려후기      도판44.「황룡도」오회분4호묘, 고구려후기

 

 

 

 

 


도판45.「봉정사 극락전」12세기, 안동,                   도판46.「관경변상서품觀經變相序品」
       국보15호                                             150.5x113.2cm, 西福寺, 일본

 

 

 

 

 

도판47.「아미타여래」           도판48.「지장보살도」   도판49.「수월관음도」419.5x254.2cm,  184.5x86.5cm, 正法寺, 일본      111x43.5cm, 善導寺, 일본             鏡神社, 일본

 

 

 

 

 

도판50. 심사정 작「파교심매도 橋尋梅圖」          도판51. 정선 작「금강전도」130.6x94.1cm
115x50.5cm, 비단에수묵담채,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비단에수묵담채, 1734, 호암미술관

 

 

 

 


도판52. 김홍도 작「무동舞童」27x22.7cm,           도판53. 신윤복 작「쌍검대무」28.2x35.2cm,
   종이에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종이에담채, 간송미술관

 

 

 

 

도판54.「군학산수도」56x35cm,                              도판55.「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
     종이에채색                                      91x56cm 종이에채색, 영남대학교박물관

 

 

 

 

 

도판56.「화조도」각76x30cm                         도판57.「금강산도 8곡병」각82.5x44.5cm,
    서울대학교박물관                                     종이에수묵담채, 호암미술관

 

 

 

 

 

도판58.「화훼도」각73.5x27cm                         도판59.「화조도 대련對聯」132.8x48cm,
                                                            종이에채색, 호암미술관

 

 

 

 

도판60.「봉황장생도」37x155cm,진주대아고교  도판61.「목단도10곡대병」비단,                                                                                각174.2x48cm, 호암미술관

 

 

 

 

 

도판62.「수련도水蓮圖10曲屛」                               도판63.「화조산수도」119x43cm,
98.5x380cm, 비단에채색, 호암미술관                           종이에채색, 영남대학교박물관

 

 

 

 


도판64.「운룡도」103x61cm, 호암미술관                     도판65.「까치호랑이」116.5x83cm

 

 

 

 


도판66.「책거리 8곡병」각52.2x31cm,                              도판67.「문자도」53x33cm
    종이에채색, 호암미술관

 

 

 

 


도판68.「칠성」99x61cm,             도판69.「대신마누라」          도판70.「홍씨대감부부」
   1800년대, 서울                 87x52cm, 1900년대, 서울      101.5x71.5cm, 1800년대, 서울

 

 

 

 


도판71.「삼불제석」95x58cm,   도판72.「오방신장 66x53.8cm,   도판73.「정주정씨」106x61cm,
  1800년대, 서울              비단, 1900년대, 온양민속박물관          1800년대, 서울
 

 

 

 

 


                    도판74.「일월오봉도6곡병」18세기, 경복궁

 

 

 

 

 


도판75.「일월부상도日月扶桑圖」149.5x122cm,        도판76.「궁모란병宮牧丹屛」총330x548cm
      마에채색, 호암미술관                                          4폭1쌍, 창덕궁

 

 

 

도판77.「책가문방도冊架文房圖8曲屛」                  도판78.「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8曲屛」
68.5x342.4cm, 종이에채색, 호암미술관.                   99x285cm, 비단에채색, 호암미술관

 

 

 

 


도판79.「노량주교도섭도舟橋渡涉圖」                    도판80.「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원행을묘정리의궤도』제8폭,                             『원행을묘정리의궤도』제3폭,
  비단에채색, 1795, 호암미술관                             비단에채색, 1795, 호암미술관

 

 

 

 


도판81.「변박개도卞璞改圖東萊府殉節圖」           도판82.「광주전도」『전라도 지도』           145x96cm, 1760, 육사박물관

 

 

 

 

도판83.「봉정사 대웅전」15세기,                            도판84. 박생광 작「무당」부분도,
     안동, 보물55호                                               137x136cm, 1983 

 

 

 

 

 


                   도판85. 박생광 작「명성황후」부분도, 200x330cm, 1981


ABSTRACT


A Study on the Korean Traditional Sense of Beauty and the Obansaek-the Five Colors of the direction
- With a Special Emphasis on the Chosun Dynasty -


InSook Lee 
Major in Arts Education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KyungHee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examine the roles colors have played in traditional Korean art and in the mind of Korean people, and to attempt to account for the characteristics of the traditional sense of color. In particular, this thesis examines the Chosun Dynasty period, from which the modern Korean art has directly developed, and investigates the Obansaek (the Five Colors of the direction) with relation to the sense of beauty at that time from the religious, philosophical, and historical perspectives. Furthermore, this thesis aims to find out the national identity by taking a positive look at the Five Colors which were the products of the contemporary ways of thinking.
  The colorful old tomb murals from the Kokuryo Dynasty with such diverse paintings as human portraits, hunting or dancing paintings, hermit paintings, and the Four-gods (blue dragon, white tiger, red peacock, and black turtle) paintings show that Korea has developed a rich culture of color since the ancient times. Also, the colors on the traditional clothing, such as the women's rainbow-striped shirt and crimson long skirt, the bride's cheek rouge and colorful crown, and the color-end purple shirt and deep blue skirt and so on, give Korean people familiar and intimate feelings, and are generally considered as Korean traditional colors.
  Unlike the colors that are based on senses, the Five Colors are symbolic in nature, originating from the um-yang-o-hang (the principles of Um and Yang-the positive and negative, Five elements), where the energy of the Five elements, metal, wood, water, fire, and earth, became the basis for the Five Colors-yellow, white, black, red and blue. The Five Colors were widely used for the tomb murals during the Kokuryo Dynasty, and during the Unified Shilla Dynasty as well for the different clothing depending on social status and for the danchong or the colors of buildings such as palaces and temples. The tradition was also followed in the buddhist paintings in the Koryo Dynasty, and these colors began to be appreciated as the main colors of the Korean art. During the Chosun Dynasty, the Five Colors were also extensively used in folk paintings, shamans paintings and royal paintings through their harmonious combination, which symbolized the pulling and pushing powers of the Five elements.
  The art during the Chosun Dynasty, mainly shown in the scholar and landscape paintings, pottery, crafts and architecture, is characterized as emphasizing simplicity and practicality due to the stoicism and moderation which had been nourished by Sung Confucianism, the economic difficulty at that time, and traditional naturalism. As a result, natural beauty, unrefinement, and simplicity have become the key elements representing Korean beauty. We can easily see unrefined naturalness and simplicity of the Five Colors in danchong, folk paintings, traditional clothing, and pochaki (wrapping cloth).
  However, the two-dimensional, impersonal, and idealistic characteristics of folk paintings are in marked contrast with the naturalistic characteristics of scholar paintings and landscape paintings that used spreading or omission techniques for representational and lyrical beauty. This means that folk paintings pursued symbolic values, not the artistic values that naturalistic paintings sought. This also means that they had additional visual effects by using the Five Colors, which were the idealistic and symbolic representation of the Five elements irrespective of the real colors or the meaning of the objects. In other words, folk paintings, whose themes, forms and the corresponding symbols had been conventionalized over time, were everyday-life paintings had the characteristics of magical symbolism and decorative nature. Folk paintings revealed the two-dimensional, impersonal, symbolic beauty of the Five Colors.
  Folk paintings were based on the Shamanism, um-yang-o-hang philosophy which were historically derived from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and had a religious character such as invoking worldly happiness through the symbolism and enchantment of the Five Colors. In other words, the Five Colors were the artistic representation of the Korean traditional philosophy, and the cultural outcome of the social changes in the later period of the Chosun Dynasty. They embraced the classicist tendencies of Korean art and the artistic trends of the end of the Dynasty such as the overflow of colors or the use of sensuous and primary colors.
 The Five Colors are the conventionalized expressions of the Korean people's religious practices such as driving away evil spirits, invoking happiness and long life, saving one's soul, delivering from difficulties, and rewarding the virtue and punishing the vice. In other words, these colors are the expressions of the will by the people to overcome the harsh environments through their artistic practices and observance of the seasonal customs. As pure solid colors, which symbolize happiness and splendor, these colors show the positive and bright philosophy and the virtuous minds of the people. In this way, the Five Colors have been the driving force of the Korean people and regularly used throughout the history, for instance, in such paintings as the Four-gods painting in the Kokuyro tomb mural, or the Old Pine Tree in Whangryong Temple.
  The present thesis has examined how the Five Colors have been used in Korean traditional art. It is claimed that the Five Colors are the original artistic expressions of Korean art, and that their proper understanding and appreciation will lead to the development of a new, rich culture of color in the future. 

 

 

 

 

 

 

원문보기: http://www.eduart2000.com/nonmun/nonmun/이인숙2002.hwp

출처: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편집(정리):가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