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에서 비틀기, 상식 넘어서기, 상식 깨기, 더 깊이 파고들기 / 신옥철 外

2019. 10. 8. 15:31잡주머니



2011, 5, 17 고운기 교수님 강의 후기(해체1)| ♣..............문학 강좌

신옥철 | 조회 76 |추천 0 | 2011.05.20. 03:33



2011, 5, 17 고운기 교수님 강의 후기

 

상식에서 비틀기, 상식 넘어서기, 상식 깨기, 더 깊이 파고들기 / 신옥철

 

1)  해체주의 철학가 데리다깨기, 부수기, 비틀기, 뒤집기, 심층으로 파고들기의 창조적 사고에 대한 현대적 개념을 제시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는 사고할 수 없는 부분을 사고하려는 시도가 강했던 사상가이다.

  이는 창작 활동을 하는 우리회 회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이미 현대인의 필수 코드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인 새로운 생각, 앞서 가는 생각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 새기고 넘어 가야할 부분이다.

 

  이 글의 서두에 타이틀로 달아 놓은 ‘상식에서 비틀기, 상식 넘어서기, 상식 깨기, 더 깊이 파고들기’의 사고 방법은 창의력의 기본 지침서로 알려진지 오래이며, 데리다를 앞선 사람이 바로 니체이다.  니체‘짜라투수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선과 악에서 창조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은 가장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 하며, 기존의 가치를 파괴해야만 산다. 결론적으로 최악은 최선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이다.’ 라고 말했다. '창조적인 것을 모든 도덕, 합목적적(우리의 상식선에 머무는 틀에 박힌 생각들)구속에서 해방 시켜야 한다.’라는 말 역시 그의 주장이다.

  좀 과격한 어조로 거침없이 말하는 것이 니체스타일이어서 사회의 규범 안에서 자신을 아름답고 고상하게 지켜가려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는 이 말이 다소 거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2세기를 앞서 살고 간, 우리와 다를 것 없는 한 인간이 이미, 벌써 깨달은 바를 전하는 말일 뿐이다. 창조는, 창의력은, 아니 새로운 생각은 기존의 관념을 깨지 않고서는 이를 수 없다는 의미이다. .

 

  후대의 사상가 데리다는 우리에게 니체의 이 파격을 넘어 그동안 사유되지 않은 부분, 사유할 수 없는 부분을 생각해 보기를 권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우선 빈틈이라곤 없는 완전한 실체의 빈틈에 관한 사유이다. 예를 들어 의식과 무의식에서 무의식은 의식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의식과 대비시켜 차이를 찾아내어 대립구도에 세우는 것은 데리다의 해체가 아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작용을 사유해 보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의식과 무의식은 경계를 긋듯 둘로 나누어질 수 없는 개념이다. 의식 속에 이미, 벌써 무의식이 들어와 있고 무의식에 이미, 벌써, 늘, 항상 의식이 침투해 있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낮과 밤의 경계에서도 선을 긋듯 분명한 것이 아니다. 낮에 이미 밤의 한 부분이 들어와 있고, 밤에 벌써 낮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미 죽음이 들어와 있고, 죽음 속에 삶이 깃들어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인간인 내 안에 인간이 아닌 어떤 모습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인들이 신화 속에서 실체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반인 반수가 바로 그것이다. 즉, 나는 괴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안의 깊은 내면에 숨겨진 자신도 알 수 없는 모습, 그것이 무의식이었든, 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든 나는 지금의 내 모습만으로 살아 갈 수는 없다. 이는 늘, 언제나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나 많이 내가 바뀌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데리다에 의하면 스스로 완벽한 실체는 없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도 아니고 내가 아닌 것도 아닌 그 틈새, 의식과 무의식의 틈새, 선과 악의 틈새, 그 경계에서 서로는 서로에게 이미 얼마만큼씩 서로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순수한 것이란 없다. 즉, 빈 공간을 포함하지 않은 전체란 없다.

 

  이렇게 해체란 고유성은 없다고 보는 관점이다. 전체는 타자로부터 조금씩 오염되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 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현재를 만들어 가는 그 간격, 그 차이가 동시에 미래를 만들어 간다. 의식은 무의식과 동시에 작동한다. 낮은 밤이 이미 깃들어 있다. 이렇게 서로 대립적 관계로 분명히 경계지을 수 없는 상황들은 늘 동시에 발생한다(Doubleing). 그래서 어느 한쪽을 떼어버리고 지워버리고 싶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타고 남은 재처럼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재’는 무엇이 타고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무엇은 우리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재로 남아 있다. 이 재는 타 없어진 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흔적이다. 과거 내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 졌는가? 완전한 순수가 있는가? 데리다‘우리는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고 말한다. 이는 존재와 동시에 타자성이 발생함을 의미한다. 대립구조로는 생각할 수 없는 더블링을 말하는 것이며 대리보충만이 있을 뿐 기원은 없다는 오리지널의 상실성을 의미한다. 데리다에게 직접성은 처음부터 파생된 것이다.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것은 매개로부터 시작한다.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부분들... 우리는 모두 재를 묻히고 산다. 유령이다.

  더 완전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예를 찾아본다면 우리의 사유 속에서 조물주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은 완전한 실체이다. 스스로 완벽한 이 조물주에게서 만약 인간이 없다면..., 이 세상 모든 사물, 자연 등 위대한 존재인 그와 구별되는 타자들이 없다고 가정해 본다면 금방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스스로 완벽한 조물주은 왜 인간과 자연, 기타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만들어낸 것일까? 이를 통해 보면 신의 개념에서 조차 빈틈없이 완전한 것은 없다.

  이것이 데리다의 사유이다.

 

2)  이러한 현대적 사유 정의에 지난 시간 고운기 교수님의 강의와 시를 적용시켜볼 수 있을 같다. 교수님께서는 포근한 어조와 부드러운 음성으로 자신의 고교시절을 떠올리며 시인의 길로 들어선 계기를 들려주었다. 기억 속 아득한 곳에 새의 보금자리처럼 둥지를 틀고 있는 음악선생님의 클라리넷연주... 교수님은 아마도 감수성이 예민하던 때에 한동안 취했던 그 시절의 혼자만의 경험이 자신을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아닐까 하는 내용을 우리에게 전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시를 소개 했다. 처음으로 소개된 시는「정희성과 정호승」이다.

 

두 사람 다 시인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서 / 아니, 모이는 이들에 따라 한 쪽이 좀 덜 알려져서 / 정희성을 정호승으로 알고 / 정호승을 정희성으로 아는 일도 생긴다 // 그러다 아예 / 정희성을 정희승이라거나 / 정호승을 정호성이라거나 / 신나게 헷갈린다 // 그러니까 세상에는 정희성과 정호승이 살고 / 정희승과 정호성이 떠돌아 다닌다 // 진짜와 유령의 공존// 정희성의 이름에 정호승의 약력이 붙고 / 정희성의 시의 제목에 정호승의 시가 붙고 / 정희성의 1연에 정호승의 2연이 붙는다 // 거기서 더 기막힌 시가 나온다면? / 드디어 유령은 시인으로 데뷔하여 / 어느덧 유령 시인이 한 몫 하는 세상을 만든다. // 나는 어제 밤 정희성 시인과 오랫동안 이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 그는 정말 정희성이었을까 / 혹 정희승 아니 정호성은 아니었을까.

                                                                         -「정희성과 정호승」전문 -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는 이 시대의 한 현상 통해 우리의 생각이 상식선에 머무는 범위를 넘어서 사유해 보려는 시도였다고 말했다.

  시 속 내용과 같은 현상을 감지한 교수님은 이를 통해 우리의 상식선에서 생각하게 되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저 부도덕한 일이라는 생각, 세상이 이래서 되겠는가. 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지만 이 상식을 넘어서 바라보게 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현상을 이해하게 되고, 새로운 문화의 발생을 포착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이미 우리의 일상에는 인터넷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 시 속 현상은 이미 흔한 일이 되었다. 이를 통해 인터넷의 정보가 얼마나 가벼울 수 있는지,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정보의 왜곡뿐 아니라 사건의 경중도 사라져 버리는 현실을 실감할 수 있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하면 첫 화면에 천안함 침몰 사건, 연평도 포격 사건과 나란히 어느 한 연예인이 지난밤 웨딩마치를 울렸다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가 동시에 등장한다. 희극과 비극이 중대사건과 코미디가 동시에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침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를 사건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가슴 철렁한 위협을 느끼다가도 금방 잊고 만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코드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 데리다의 사유이며 이 시 속 의미이다

 

  이 시 속에는 정호성이 정호승이 된다. 더블링이다. 정희성도 정호승도 아닌 유령이 된다. 정호성, 정희승이 된 이들은 실체를 잃은 ‘재, 흔적’이 된다. 실체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 단어들은 그들을 떠올리게 한다. 헷갈리게 하며 혼돈을 일으킨다.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고 원래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는 재가 된 것이다. 유령이다. 유령은 이것과 저것이 동시에 등장하여 뭔지 알 수 없게 하는, 사뭇 헷갈리게 하는 존재이다. 실체 없는 이 유령이 흔적뿐인 이 유령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현대이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하이퍼 리얼리즘의 현상인 것이다. 이 시에서는 유령이 시인으로 데뷔하여 한 몫 한다. 어젯밤 만난 정희성은 그가 정희승인지 정호성인지. 유령인지 헷갈리는 세상이다. 이 헷갈리는 세상,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겹쳐있어 서로를 오염시켜 순수 오리지널을 찾아 볼 수 없는 현상. 데리다가 말하는 이성으로는 설명 될 수 없는 이 요상한 시대의 현상을 직접 현실에서 착안하여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운기 교수님의 시「정희성과 정호승」이다.

 

  교수님은 이러한 자신의 시를 통하여 ‘상식에서 비틀기, 상식 넘어서기, 상식 깨기, 더 깊이 파고들기’를 보여 주었다. 5월 17일의 강의는 비틀고, 깨고, 뒤집고, 넘어서고 파고드는 사유의 훈련이 창작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과정임을 전하는 강의였다. 이외에도 교수님이 요즘 시 쓰기 계획에 관해서도 살짝 열어 보여주셨다. (이것은 강의에 참여한 사람만 아는 특혜로 숨겨들 것임^^)

 

                                                          2011, 5, 17 고운기 교수님 강의 후기(해체1) 201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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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24 이재복 교수님의 강의 후기 / 해체2| ♣..............문학 강좌

신옥철 | 조회 52 |추천 0 | 2011.06.01. 06:53



2011, 5, 24 이재복 교수님의 강의 후기

 

문학인의 자세, 시대정신 반영/ 신옥철


- 이날 이재복 교수님의 강의는 문학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문학인은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도 그래 왔고, 현재에도 진정한 문인들은 한 발 앞서 시대를 읽고 이를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려면 공부가 필요하다고 하였지요. 아니 절실히 요구 된다고 하셨습니다. 잠깐 언급하신 현대 사유의 코드 ‘해체’에 관하여 모두 궁금할 것 같아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 데리다의 해체개념을 정리합니다. 참고가 되셨으면 합니다.

 

해체 (déconstruction)

 

  ‘해체’데리다의 독특한 철학방식이다. 그는 기존의 사상과 문학사의 범주에서 벗어나, 기존의 학문적 분류체계와 규범으로 나란히 놓을 수 없는 서로 다른 분야들을 병치시켜 사유한다.

소쉬르, 퍼스와 니체, 루소와 프로이트를 나란히 놓고 텍스트를 구성해 가는 것과 심리학, 정신 분석학, 기호학, 법학, 신학, 미술, 심지어 정치학, 선사학, 인공두뇌학 등을 넘나들며 사유하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그는 이렇게 서로 성격이 다른 사상가들의 글과 표현, 상이한 철학들의 틈을 파고 들어가 그 사이에서 자신의 견해를 펴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철학과 인문학의 글쓰기에서 벗어나 매우 이질적인 성격의 텍스트들을 교차시키면서 순환과 진전을 반복하는 새로운 시도이다. 이 독창성을 사람들은 ‘간 텍스트적 폴리그(polygue intertexturl)라 부르기도 한다.

데리다가 이러한 방식을 시도하는 것은 철학의 논리적 언어사용을 지양하고 서로 대비 되는 듯한 개념들 사이에 칼로 무자르듯 선명한 분할 선을 그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고전적 사유방식에 대한 회의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속에서 데리다는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해체적 방법을 구사한다. 데리다의 이 ‘해체’적 사유 방식은 20세기 이후 현대사상의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을 만큼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 용어의 세계적 유명세에도 놀랐다고 말한다. 그는 이 ‘해체’라는 용어가 어떤 한 가지를 의미하는 철학적 정의로 곡해 되는 것을 우려하며 해체는 그저 우리의 생활 속 곳곳에서 '일어나는 것(ce qui arrive)일 뿐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이 해체의 개념은 그의 저서『그라마톨로지』에서 비판적 분석의 방식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마톨로지에서 파악할 수 있는 해체의 특성은 기존 철학방식의 적대적 입장을 취하지 않으며 지신을 겨냥하는 철학적 반대 입장에 대해 파괴나 붕괴를 시도하지도 않는다.

 

  이렇듯 기존철학의 대립적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사유 방식을 제시하는 해체의 특성을 살펴보면 첫째로 서구 오랜 역사 속에서 진리로 여겨왔던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불리는 인지적 장에 대해 니체와는 또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며 이성으로, 논리로 설명 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사유의 시도이다. (오염, 흔적, 바깥의 사유, 경계, 문턱, 프레임, 차연, 더블링, 이퀄리의 개념 등)

   다음으로는 음성언어와 문자 언어의 전통적 대립을 문제 삼는다. 이에 있어서도 대립들을 거꾸로 뒤집어 놓거나 타도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동안 사유되지 않았던 분분, 아니 더 정확히 사유 될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한 고찰을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데라다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루소를 읽으면서 개념적 차원 못지않게 수사적 요소 역시 중요하며 글쓰기에 있어 ‘문학적’ 양상과 ‘철학적’양성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그라마톨로지에서 그는 서양철학 전통을 현전의 형이상학으로 규정하며 다음 몇 가지 요소로 비판을 시도한다. 첫째, 현전의 형이상학의 결정적 방식은 로고스 중심이라는 것이다. 둘째, 음성언어는 이 같은 현전의 형이상학을 특권시하는 매체이며 문자언어는 그 같은 현전의 중개, 또는 지연을 표상하는 한 단계 낮은 역할을 담당할 뿐이라는 점에 대해 비판을 시도한다. 셋째로는 데리다의 견해에서 음성언어에 대한 형이상학적 또는 로고스적 바탕은 토대적 모순, 또는 긴장에 종속 된다는 점에 대해 다룬다.

   그 이유는 음성언어 문자 언어 공히 매개화를 통하여 의미를 갖는 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동안 기표와 기의라는 대립구도에 의해 서술 되어 왔던 기존의 관점은 영혼/육체, 무한/유한, 초월/경험, 지성/감성 등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로고스 중심의 전체 형이상학 체계가 해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에 가장 새로운 해법이 바로 지난시간(고운기 교수님 강의 후기)에 언급했던 데리다의 ‘해체’적 방법이다.

 

  특히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구조주의 기호학자 소쉬르의 견해를 해체한다. 소쉬르의 기호 이론은 기호의 로고스 중심적 이론으로 음운론 중심이다. 소쉬르는 음운(음성언어)구조가 문자언어를 포함한다고 보고 있다. 언어의 객관적 과학을 지향하면서 문자언어의 상위에 음성언어를 위치시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소쉬르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 기표와 기의의 불가분성에 관하여 분석한다. 이어 소쉬르의 언어 과학이 로고스 중심주의를 특징짓는 '포함'과 '배제'의 논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음성언어/문자언어, 안쪽/바깥쪽, 지성/감성, 자연/비자연 등 소쉬르는 서양 전통을 계승하여 편협한 기능만을 인정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 데라다의 제안은 음성언어/문자언어, 안쪽/바깥쪽, 지성/감성, 자연/비자연 등의 차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극명한 대비는 그들의 견해를 담은 다음 말에서도 드러난다. 소쉬르는 ‘언어 속에서 모든 것은 역사’라고 말한 반면 데리다는 언어기호의 본질 주의를 해체하면서 ‘매 순간 무한하게 다시 이루어진다’고 했기 때문이다.

 

  지난시간의 정리에 이어 이상의 내용을 이해를 돕기 위하여 데리다가 만들어낸 용어 차연에대해 살펴보면 구조주의의 대립구조의 현상들에 비추어 새롭게 정의되는 그의 해체적 사유를 쫓아 갈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의 '차연'

 

   데리다에 의하면 한 시대 앞선 구조주의의 사유방식의 골자는 바로 ‘차이(difference)'라는 개념이다. 이 차이는 과거 철학의 형이상학적 현존성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사유의 틀이다. 앞에서 논의 된 바처럼 데리다는 소쉬르의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차이개념을 해체하고 있다. 데리다의 ’차연(differance)'은 바로 이러한 일체의 차이, 동일성을 동시에 생산해주는 기능 혹은 작용, 상태의 무한한 지속을 의미한다.

   '차연'이라는 이 용어는 데리다가 독특한 방법으로 만들어낸 신조어로 그의 독자적인 비평작업인 해체비평의 관건이 되는 비평 용어이다.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differance(디페랑스)’는 프랑스어 ‘difference(차이)’의 어미 ‘-ence’를 ‘-ance’로 바꾸어서 만든 것으로, 그의 해체적 반인식론(anti-epistemology)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련어들을 지칭하기 위한 독특한 신어이다. 이 관련어에는 ‘다르다(differ)’라는 의미와 ‘연기하다. 지연시키다(defer)’라는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는 프랑스어 ‘differer(디페레)’가 포함되어 있다. 즉 ‘differance(디페랑스)’는 동음어인 ‘differer(디페레)’가 결합되어 만들어졌음을 알리기 위해 어미 ‘-ence’를 ‘-ance’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차연은 차이(변별성)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연기 또는 지연이라는 의미도 나타낸다. 자크 데리다에게 있어서 단어도 아니고 개념도 아닌 이 용어는 두 가지 의미(차이 ·지연)를 모두 작동시키며, 어떤 순간에도 어느 한쪽만의 의미로는 환원되지 않는다. ‘difference’의 ‘e’에서 ‘differance’의 ‘a’로의 미묘한 이동은, 결과적으로 텍스트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결정되어 있거나 확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의미 작용의 연쇄 속에서 하나의 대체 가능한 언어 해석으로부터 다른 해석으로 지연된다는 데리다의 주장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차연이라는 용어 자체도 자크 데리다의 용법에서는 불안정하게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용어를 확정된 개념으로 고정시켜 사용한다면 이 용어가 지닌 효력과 불확정성에 대한 강조가 사라지게 된다.

  데리다가 창시한 이 차연(differance)은 차이(difference)와 똑같이 발음된다. 발화되었을 때 차연은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눈으로는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차연은 가능성으로 음성 언어에 존재하면서 문자를 특권화시킨다. 차연은 명사도 동사도 아니다. 그것은 ‘사물’과 ‘행위’사이에서, 철학의 근본적인 대립인 실체와 활동 사이에서 작용(놀이) 한다. 또한 이차연은 소쉬르적인 기호의 양면을 가로질러 놀이한다. 차연은 말도 아니고, 개념도 아니다. 차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존하는 것도, 본질과 존재를 가지고 있는 ‘사물’도 아니다. 차연은 ‘차연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거부한다. 차연은 철학적 신조어의 표준 모델, 즉 (새로운) 개념을 위한 (새로운 ) 말이라는 모델을 따르지 않는다. 그 대신 결정 불가능성의 운동을 활성화시킨다.

   따라서 데리다 이 차연은 또 다른 데리다의 모든 개념들 즉, 오염, 흔적, 바깥의 사유, 경계, 문턱, 프레임, doubleing, equally의 개념 등을 이해 할 수 있는 키 워드가 된다. 차연이라는 용어 차체가 double을 포함하고 equally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한 쪽의 입장을 지칭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 방식의 토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겹쳐 있는, 오염시키는 흔적,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문턱프레임경계의 의미 등이 모두 이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체는 구조주의의 대립구도를 전복시켜 위치를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대립구조 차체를 흔들어 놓는 것이다. 구조 자체를 무효화 시켜 모호하게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럴 경우 명확한 것은 없다. 지난시간 잠깐 언급한 이재복 교수님의 무의식, 혼돈, 분열, 모호, 우울, 그로데스크... 그리하여 현대의 징후는 복잡, 불투명, 난해, 혼돈스러워지는 것이다.

 

<사족으로...>

  현대적 사유의 이러한 흐름을 알고 글을 쓰는 것이 문학인의 자세라 하였었는지... (그럴 것 같은데 잘 듣지 못해 모르겠습니다.) 강의를 확실히 들은 분께서 마지막 이 물음 해결해 주세요^^ 하지막 데리다에 의하면 알수 없는 것이 답이긴 함...^^



                                                        2011, 5, 24 이재복 교수님의 강의 후기 / 해체2   201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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