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글씨의 흐름 (고려)

2019. 11. 26. 01:22글씨쓰기



우리나라 글씨의 흐름 (고려)|서예통론

하전|조회 68|추천 0|2015.07.08. 14:31http://cafe.daum.net/bbhy0003/S1GN/35 

 

 

 

p274-280

고려(高麗 918-1392)의 글씨

고려시대의 글씨 유적은 주로 비명(碑銘)이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고려의 초기에는 통일신라말기에 유행한

구양순풍이 지배적이었다.

중기에는 안진경법도 채용되었으며 석탄연이 등장하여

왕희지 행서가 부각되었다.

말기에는 당시 원나라의 학자이며 서예가인

조맹부와 이제현. 이암 같은 이들이 유대를 맺으며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풍기는 조선중기에까지 이어진다.

고려시대에는 서가들도 대거 활동하였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서가는

최언위(崔彦撝). 구족달(具足達). 장단열(張端說).

김거웅(金巨雄). 안민후(安民厚). 석탄연(釋坦然).

이암(李嵓) 등이 특히 유명하다.

글씨 유적으로는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普賢寺朗圓大師悟眞塔碑).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

법천사지광국사비(法泉寺智光國師碑).

문수원중수기(文殊院重修記).

허재묘지(許載墓誌). 전기처고씨묘지(田起妻高氏墓誌)

등의 금석문과 화엄경권(華嚴經卷).

진각선사고신(眞覺禪師告身) 등의 활자본이나 육필 등

그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대체로 고려시대의 글씨는 단정하면서

근칙한 것이 특징이다.

평자들은 통일신라시대보다

좀 더 발전했다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구양순풍의 글씨가 이전보다

좀 더 세련되었다든지 아니면

더욱 근사해졌다든지의 변화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더욱 퇴보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고려시대 450여 년 동안

우리가 지금도 법으로 채용하여 쓸 글씨는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이는 이 시기 동안에 중국은 왕희지와 초당 삼가(三家)의 필법

그리고 안진경법을 가지고 소동파. 황산곡. 미불. 조맹부 등

큰 명가들이 연이어 배출된 것과 매우 다른 양상이다.

 



참고 도판

전기처고씨묘지(田起妻高氏墓誌)

 





 

p276

최언위(崔彦撝)


최언위는 통일신라 말에 활동하였던 최인연(崔仁渷)이

개명한 이름이다.

18세 때에 당에 유학하여

42세에 귀국한 당시의 지식인이었다.

고려조에서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었다.

구양순법으로 쓴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가있으며

낭원대사오진탑비(朗圓大師悟眞塔碑)를

찬(撰)하였다.


태자사부(太子師傅) ; 자주국에서 임금의 자리를 이을 임금 아들을

                                가르쳐 이끌어 주는 사람 곧 스승 ?

찬(撰) ; 지을 찬, 가릴 선. 글을 씀 ?

 

 


 


구족달(具足達)


고려 초기 활동하였으며 구양순법의 대가로 평가된다.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사찬(沙粲)과 興文監卿(흥문감경)을 지냈다.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普賢寺朗圓大師悟眞塔碑)와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를

통하여 그의 글씨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는 944년에 건립되었다.

비의 높이는 3m가 넘으며 폭은 1.5m에 가깝다.

보물 제 17호이며 충북 중원군 정토사지에 있다.

신라. 고려를 통하여 가장 큰 비이다.

비문은 최언위가 짓고 구족달이 썼다.

비명은 정간 선을 긋고 썼는데

필세가 웅경(雄勁)하고 예리하다.

『서정(書정(魚+靑))』에는 북조의 의(意)가 있고

필세가 기위(奇偉)하다고 평하였다.


웅경(雄勁) ; 웅장하고 굳세다 ?

기위(奇偉) ; 뛰어나게 훌륭함

 

 

 



장단열(張端說)


생졸연대는 미상이다.

광종 때 군부경(軍部卿)을 지냈고

한림원 서학박사(書學博士)를 역임하였다.

그의 글씨는 고려에서는 드물게 우세남법을 쓰고 있다.

따라서 아취가 있다.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는

965년에 세워졌다.

경상북도 문경군 희양산 봉암사에 있다.

보물172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은 이몽유(李蒙遊)가 짓고 장단열이 썼다.

초당의 유풍인데 유세남의 필법이 두드러져 있다.

아취에 신운이 감도는 작품으로

정갈하기가 초당의 비에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고려를 통하여 상급의 명품이다.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는

975년에 세워졌다. 현재 경복궁내에 안치되어 있으며

보물 제7호이다. 이 비도 9척이 넘는 거비이다.

김정언이 짓고 장단열이 쓰고 이정순(李貞順)이 새겼다.

정간선을 치고 우세남법으로 썼다.

청아하고 엄정하여 필력이 웅경하다.

 

 


참고 도판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




석탄연(釋坦然)


고려의 선승이다.

당시 학사 홍관(洪灌)과 더불어

필력이 가장 정묘했다고 한다.

이원무(李元茂)가 지은

「대감국사비명(大鑑國師碑銘)」에 의하면

국사는 8세에 문장을 지을 수 있었으며

시를 지어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하였다.

글씨도 또한 잘 썼으므로

‘천리구(千里駒)’ 라고 불렀다고 한다.

13세에는 육경의 대의를 통하였고

19세에 출가하였다고 한다.

글씨로는 문수원중수기, 예천의 북룡사비,

양주의 승가존중수기 등이 있다.

문수원중수기(文殊院重修記)는

김부식이 짓고 탄연이 쓴 것인데

왕희지의 행서를 체득한 유려한 글씨이다.

특히 문수원중수비 제액은

안진경의 해법으로 썼는데

안법을 체득한 것이며

안법의 글씨로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것으로 보인다.

 

 


 

이암(李嵓, 1297-1364)

 

고려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군해.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

원나라에 다녀왔는데 귀국할 때

원나라의 농서인 〈농상집요 農桑輯要〉를

구해다가 보급시켜 고려의 농업기술발달에 공헌했고

서예에 능하여 원나라 조맹부와 교류하여

그의 필법을 체득해 귀국한 뒤 우리나라에

조맹부의 글씨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 꼽혔다.

글씨로는 문수사장경각비(文殊寺藏經閣碑)가 남아 있다.

이 비는 조맹부의 글씨에 가까운 필치인데

필력이 주경하고 결체의 묘를 얻었다.

현재 탁본만이 전한다.

이 비의 두전(頭篆)인 ‘文殊寺藏經碑’라는 6자

역시 이군해의 글씨인데,

진전(秦篆)의 법을 제대로 터득한 명품이다.

고려의 비로 많은 두전이 있으나

대개는 보잘것없고,

이 전서만이 뚜렷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참고 도판

문수사장경각비

(文殊寺藏經閣碑)


 

 

 참고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대학교출판국 , , 인터넷 참고, 인터넷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