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글씨의 흐름 (삼국시대-신라)

2019. 11. 26. 01:20글씨쓰기


우리나라 글씨의 흐름 (삼국시대-신라)|서예통론

하전 | 조회 57 |추천 1 |2015.06.25. 12:59 http://cafe.daum.net/bbhy0003/S1GN/33 

 

 

 

p265-268

 

 

신라(新羅 BC57-AD935)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초기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며

따라서 글씨에도

솔진(率眞)의 문화적 고유성을 간직하고 있다.

중국과의 왕래는 6세기 초엽

지증왕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서예유적은 고구려보다도 훨씬 많이 남아 있다.

신라의 대표적인 서적은 냉수리비(冷水里碑).

봉평비(鳳坪碑) .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등이다.

이외에도 국보 517호인 청제비(菁堤碑)를

비롯하여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천전리서석(川前里書石).

명활산성비(明活山城碑).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와

명문(銘文). 전(磚). 와(瓦). 목간(木簡) 등에서

신라인의 면모를 접할 수 있다.

 

솔진(率眞) ; 꾸밈이 없고 진실됨?


 

 

냉수리비(冷水里碑)

 

1989년에 발견되어 국보 26호로 지정되었고

지금 경북 영일군에 안치되어 있다.

건립연대는 503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의 전면과 비음 그리고 윗면에

모두 231자가 새겨져 있다.

글씨는 참치(參差)의 극치를 보여준다.

가로와 세로줄을 맞추지 않았으며

글자의 크기도 일정치 않다.

예서의 필획으로 해서를 쓴 그 독특함은

신라의 꾸밈없는 솔진(率眞)의

풍모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참치(參差) ; 길고 짧고 들쭉날쭉함 (변화가 많음)

 

 


참고 도판


 

p266

봉평비(鳳坪碑)

 

경북 울진에서 1988년에 발견되었다.

자연석을 이용하였으며 높이는 2m 정도이다.

건립연대는 법흥왕 때의 것으로 추정한다.

이 비의 서체도 대소의 자형이 천진하게 어울렸다.

이 비에서도 어수룩한 가운데

신라인의 소박과 진솔을 대할 수 있다.

 


참고도판





 

적성비(赤城碑)

 

충북 단양에서 발견되었다.

국보 제 19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중부고속도로로 단양휴게소 뒤에 자리하고 있다.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으므로 남아 있는 글자가

매우 선명하다.

이 비는 이전의 다른 신라 비(新羅 碑)보다는

좀 더 정돈된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행간과 자간을 가지런히 맞추어 놓았다.

 

 


참고 도판




 

p267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진흥왕순수비는 창녕탁경비(昌寧拓境碑)를 비롯하여

북한산비(北漢山碑). 황초령비(黃草嶺碑).

마운령비(磨雲嶺碑) 등 네 개다.

이 중에서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의

글씨는 서로 흡사하다.

서체는 남조 등의 해서인데

혹간 행초를 섞어 쓰기도 하였다.

특히 황초령의 비는

청의 강유위가

그의 <<광예주쌍즙(廣藝舟雙楫)>>에서

고품(高品)으로 평가하고 있다.

창녕비는 비면의 형태에 따라 윤곽선을 새겼고

오른쪽 상부(上部)는 계란모양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마멸이 심해 판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진흥왕 순수비는 서풍은 남조에 근거하고는 있지만

신라 특유의 고졸미가 넘치는 서풍이다.

 

 


참고 도판




남산 신성비 제 1비

남산 신성비 제 2비


대구 무술명 오작비


대구 천전리 서석


임선 서기석



태종무열대왕비 제액




황초령비





참고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대학교출판국, 인터넷 사전, 도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