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29. 10:15ㆍ차 이야기
고려의 뇌원차(腦原茶)와 차의 수출 茶道古時
고려의 뇌원차(腦原茶)와 차의 수출
허흥식(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우리 차의 시대 구분
우리나라에서 차를 유통시키는 공간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차의 재료를 파는 다상(茶商)과 마시도록 음료로 팔면서 사교의 공간으로 제공하는 다방이 있으나 차방이라 말하지 않는다. 언어는 자주 경음을 거쳐 격음으로 변하므로 서양의 ``티(Tea)``보다 우리 차의 한자음인 ``다``는 기원이 오래되었다고 하겠다. ``다``나 ``티``는 양자강 하류의 동남방 푸젠성의 사투리에 가깝고 이곳 천주(泉州)에는 아랍인과 유태인이 무역하였던 곳이므로 유럽으로 퍼졌다고 짐작된다.
우리나라의 차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단군과 연결시킨 백산차(白山茶)가 있지만, 상록관목의 일반차보다 아주 작으며, 아한대 고산식물로 음료와 약으로 사용되었다. 일반 아열대성 식물인 차나무는 재배하였고 이를 채취하여 가공하였다. 차의 원산지는 히말라야 남쪽 산록과 중국 서남이라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차는 영하 5℃를 내려가면 동사하며, 10℃ 이상 15℃까지는 뿌리는 자라지만 잎이 자라는 온도는 15℃ 이상이다. 더운 지방일수록 잎이 큰 차가 자라고, 우리나라의 모든 차는 기후의 한계로 잎이 화살촉처럼 좁고 끝이 날카로운 소엽이다.
제1기는 신라 말기까지로 차의 정착기라 하겠다. 제2기는 고려 시대로 차의 재배가 서남 해안을 중심으로 크게 확장되었고, 가공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여 내수는 물론 수출하였다는 기록이 관찬기록에도 여러 차례 올라 있다. 제3기는 조선 시대로 어육을 제물로 사용하면서 차례라는 용어는 그대로 쓰였지만 내용이 달라지고, 극 소수의 차인을 통하여 명맥이 유지되었으며 사용이 점차 줄었다. 제4기는 19세기부터이고 다산과 해거도인, 그리고 초의 등이 차를 소생시켰다. 제5기는 1939년 새로운 차를 도입하여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지금까지 계속된다.
차와 불교의 한낮은 고려 시대였다. 이 시기에 제사는 고기를 쓰지 않은 소제(素祭)가 주류를 이루었고, 중요한 제전에서 진차례(進茶禮)가 있었다. 조선에서 차를 제례에 쓰지 않아도 언어의 관성에 의하여 차례라 하였다.
조선 시대는 불교와 차가 극히 위축된 저녁 노을이었고,
19세기부터 소생하기 시작하였으나 어두운 밤의 반딧불과 같았다. 일제는 통계상으로 발전시켰으나 전통에서 발전하였다기보다 한밤의 식민지로서 하청업자와 같은 실험 재배와 수탈의 대상이었다.
고려는 차 생산의 강국 지금 우리나라는 차(車) 생산의 강국이지만 고려 시대는 차(茶) 생산의 강국이었다. 신라에서 예불에 차를 공양한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자주 확인되고 《삼국사기》에는 828년 대렴이 지리산 기슭에 차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보다 앞서 백제에서 일본으로 차를 전하였고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차의 공양도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삼국 시대에 차를 공양한 기록이 자주 실려 있다. 《고려사》에는 중요한 축제와 사신의 접대에 차를 올리는 진차례와 공신의 포상과 상례의 부의에 국가에서 차를 하사한 기록이 매우 풍부하다.
``차라고 간단히 표시하거나 그마저 부의나 장례를 도왔다[賻增 賻恤 賜賻 護喪]``는 표현으로 생략하였다. 차의 이름으로 뇌원차(腦原茶)와 대차(大茶)의 두 가지만 나타난다. 이 두 가지 차의 모양이나 이름, 그리고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거란의 기록에 쓰인 뇌환차(腦丸茶)는 뇌원차이고, 고려 후기에 충선왕의 이름을 피하여 뇌선차(腦先茶)로 실려 있다. 대차보다 고려차의 대명사처럼 쓰인 뇌원차는 고려의 최고급 차인가 일반 차인가 규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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