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뇌원차(腦原茶)와 차의 수출

2019. 12. 29. 10:15차 이야기



고려의 뇌원차(腦原茶)와 차의 수출| 茶道古時

천사 | 조회 41 |추천 0 | 2010.03.10. 08:18


고려의 뇌원차(腦原茶)와 차의 수출


 

허흥식(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우리 차의 시대 구분

 

   우리나라에서 차를 유통시키는 공간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차의 재료를 파는 다상(茶商)과 마시도록 음료로 팔면서 사교의 공간으로 제공하는 다방이 있으나 차방이라 말하지 않는다. 언어는 자주 경음을 거쳐 격음으로 변하므로 서양의 ``티(Tea)``보다 우리 차의 한자음인 ``다``는 기원이 오래되었다고 하겠다. ``다``나 ``티``는 양자강 하류의 동남방 푸젠성의 사투리에 가깝고 이곳 천주(泉州)에는 아랍인과 유태인이 무역하였던 곳이므로 유럽으로 퍼졌다고 짐작된다. 


 

   우리나라의 차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단군과 연결시킨 백산차(白山茶)가 있지만, 상록관목의 일반차보다 아주 작으며, 아한대 고산식물로 음료와 약으로 사용되었다. 일반 아열대성 식물인 차나무는 재배하였고 이를 채취하여 가공하였다. 차의 원산지는 히말라야 남쪽 산록과 중국 서남이라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차는 영하 5℃를 내려가면 동사하며, 10℃ 이상 15℃까지는 뿌리는 자라지만 잎이 자라는 온도는 15℃ 이상이다. 더운 지방일수록 잎이 큰 차가 자라고, 우리나라의 모든 차는 기후의 한계로 잎이 화살촉처럼 좁고 끝이 날카로운 소엽이다.


차는 금관가야의 황후가 배에 싣고 왔다는 전설이 있고, 《삼국사기》의 공식기록은 838년이지만 이보다 앞서 가공한 차의 수입과 차나무의 재배가 간간히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와 고려에서 재배한 차는 모두 산차(山茶)로 변하였고 봄에 꽃이 핀다. 지금 재배하는 차는 1939년도입한 종자로서 가을에 꽃이 피는 차이가 있으며, 이를 교배하여 새 품종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나라 차의 역사는 크게 다섯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신라 말기까지로 차의 정착기라 하겠다.

제2기는 고려 시대로 차의 재배가 서남 해안을 중심으로 크게 확장되었고, 가공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여 내수는 물론 수출하였다는 기록이 관찬기록에도 여러 차례 올라 있다.

제3기는 조선 시대로 어육을 제물로 사용하면서 차례라는 용어는 그대로 쓰였지만 내용이 달라지고, 극 소수의 차인을 통하여 명맥이 유지되었으며 사용이 점차 줄었다.

제4기는 19세기부터이고 다산해거도인, 그리고 초의 등이 차를 소생시켰다.

제5기는 1939년 새로운 차를 도입하여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지금까지 계속된다.


차의 시대 구분은 불교의 시대 구분과 거의 같다. 불교가 전래되었던 삼국 시대 중반부터 신라 말기까지 수용과 정착기이고, 새벽부터 이슬이 마르는 아침에 해당하였다.

 

차와 불교의 한낮은 고려 시대였다. 이 시기에 제사는 고기를 쓰지 않은 소제(素祭)가 주류를 이루었고, 중요한 제전에서 진차례(進茶禮)가 있었다. 조선에서 차를 제례에 쓰지 않아도 언어의 관성에 의하여 차례라 하였다.

 

조선 시대는 불교와 차가 극히 위축된 저녁 노을이었고,

 

19세기부터 소생하기 시작하였으나 어두운 밤의 반딧불과 같았다. 일제는 통계상으로 발전시켰으나 전통에서 발전하였다기보다 한밤의 식민지로서 하청업자와 같은 실험 재배와 수탈의 대상이었다.

 

 고려는 차 생산의 강국

 지금 우리나라는 차(車) 생산의 강국이지만 고려 시대는 차(茶) 생산의 강국이었다. 신라에서 예불에 차를 공양한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자주 확인되고 《삼국사기》에는 828년 대렴이 지리산 기슭에 차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보다 앞서 백제에서 일본으로 차를 전하였고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차의 공양도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삼국 시대에 차를 공양한 기록이 자주 실려 있다. 《고려사》에는 중요한 축제와 사신의 접대에 차를 올리는 진차례와 공신의 포상과 상례의 부의에 국가에서 차를 하사 기록이 매우 풍부하다.
특히 고려의 지방제도를 갖추었던 성종과 현종시의 기록은 차의 수량이나 명칭, 그리고 사용에 대해서까지 자세하므로 당시 차의 가공법에 대해서도 이해가 가능하다.

 

   ``차라고 간단히 표시하거나 그마저 부의나 장례를 도왔다[賻增 賻恤 賜賻 護喪]``는 표현으로 생략하였다. 차의 이름으로 뇌원차(腦原茶)대차(大茶)의 두 가지만 나타난다. 이 두 가지 차의 모양이나 이름, 그리고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거란의 기록에 쓰인 뇌환차(腦丸茶)는 뇌원차이고, 고려 후기에 충선왕의 이름을 피하여 뇌선차(腦先茶)로 실려 있다. 대차보다 고려차의 대명사처럼 쓰인 뇌원차는 고려의 최고급 차인가 일반 차인가 규명할 필요가 있다.


뇌원차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추정이 있었다. 20세기, ``뇌``란 용어가 포함되고 약과 함께 하사한 사실에 초점을 두고 용뇌(龍腦)를 사용한 약차라고 풀이한 일본 학자가 있었다. 용뇌는 주사(HgS)와 명반이 결합된 광물로서 도가에서 단약으로 사용하였다. 광물질의 독성이 강한 주사를 청정한 차에 포함시킨다는 가공법은 상상하기조차 사리에 어긋나므로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뇌원차는 대차와 함께 쓰이므로 가공한 모양이나 크기에 따른 차이에 불과하다는 접근도 가능하겠다. 문종 시에 황보영에게 내린 대차 300근을 다른 예와 비교하면 뇌원차 200각과 대차 10근의 잘못으로 짐작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차는 1근 정도로 만들고, 뇌원차는 10각이 1근 정도로 모두 합치면 30근 정도였으리라 짐작된다. 굳이 뇌원차와 대차로 나누어 주었던 근거는 상례에 쓰기 간편한 소형의 뇌원차가 있었고, 장기 보관으로 조금씩 사용하기 위한 대형의 대차와 차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고려의 상례는 상례를 지나면 조석의 상식에 차를 사용하였고, 대차를 부수어서 장기간 사용하였다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작설차(雀舌茶)가 주로 쓰였다. 이는 곡우와 하지 사이에 어린잎을 따서 만든 최고급의 차인가? 소엽의 차를 따서 건조시킨 떡차가 아닌 엽차를 의미하는가? 의문이 있다. 소엽차를 말리면 어린잎이 아니더라도 작설차에 가깝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어린잎은 우전차(雨前茶)라 엄격히 구분해서 불러야 할 필요가 있다. 고려의 뇌원차나 대차가 엽차가 아닌 떡차일 가능성최승로의 상소에서 확인된다. 그는 광종부터 성종에 이르는 여러 국왕이 사원에서 행하는 제전과 진전의 조상 숭배에 몸소 맷돌을 돌려 차를 갈았고 이를 공덕재라 불렀다고 하였다. 차를 부수었다는 연차(碾茶)란 가루로 만들기보다 ?덩어리를 부순다?고 해석된다. 고려의 차가 견고하게 조성된 떡차[餠茶]였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시기에 송에서도 떡차가 유행하였다고 한다. 송의 차로 고려에서 수입한 납차(蠟茶), 용봉차(龍鳳茶), 소단(小團), 각차(角茶) 등이 보인다. 납차는 밀랍을 넣어 점질을 높이면서 차의 쓴맛을 줄이고 차의 부패를 방지한 차이고, 용봉차는 국왕의 사용과 무역에 쓰인 최고급차였다. 나머지는 둥글거나 네모지게 만든 모양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뇌원차는 각이란 단위가 쓰인 바와 같이 소형 각차였을 가능성이 크다. 남연군의 무덤을 옮기기 위하여 넘어뜨린 가야사 탑에서 나왔던 승설차는 눌러서 용을 각인시킨 소형의 떡차였고, 용봉차뇌원차도 이와 같은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


   떡차는 조성 과정에서 벽돌처럼 단단하게 만든 차이다. 차를 덖으면서 짓이기거나 절구로 찌어서 이를 엿기름처럼 틀에 넣고 다져서 형태를 다양하게 만든 차이다. 떡차는 단단하므로 이동이 간편하고 오래 두어도 변질되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부수어서 사용하기가 불편하고 덖는 과정에서 짓이기므로 찻잎의 원형과 영양이 파괴되고 잎 모양이 손상된다. 명대에는 떡차가 아닌 잎의 형태로 물에 넣으면 살아나는 엽차로 대세가 변하였다. 조선 시대의 작설차도 물에 넣으면 어린잎이 다시 피어나는 엽차이고 고려의 뇌원차나 대차와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고려에서 공신의 부의뿐 아니라 국가의 유공자, 노인에게 국왕이 고마움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사한 물품 가운데도 뇌원차대차가 포함되었음이 틀림 없다. 《고려사》에 자주 등장하는 성종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고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던 국왕으로 유명하다. 국가 유공자의 포상과 그들의 죽음, 늙은 백성들에게 하사한 물품인 차는 국민통합을 통하여 위기를 극복하려는 국왕의 노력에 사용된 값진 선물이었다.(복사글)



                                                                   고려의 뇌원차(腦原茶)와 차의 수출 2010.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