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관서정원답사 자료 6. 法隆寺五層木塔 - 2

2022. 8. 30. 23:31美學 이야기

자료집 게시판 6월 관서정원답사 자료 6. 法隆寺五層木塔 - 2

칸텔리  21.06.19 12:42
 
 


12호벽(십일면관음입상) - 서면 북쪽끝。8개의 小壁에 그려진 보살상 중에서는 유일하게 정면을 향해 서있는 도상이다. 마주보는 위치에 있는 7호벽의 관음보살상과 대응된다. 
内陣小壁画는 전술한 바와 같이 20면이 남아 있지만, 모두 도상이 비슷하여 각각 날아오르는 천인 2구씩을 묘사하고 있다. 모두 동일한 밑그림을 사용하여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데, 크기는 세로 71cm, 가로 136cm 정도 된다. 거의 직사광선이 비추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14, 16호벽 정도가 보존상태가 좋다.


화재 전의 벽화는 토벽에 백토를 바른 위에 채색한 것으로, 채색에 사용되었던 안료는 다음과 같다. 
적색계열 - 적색(진사), 철회, 사산화삼납
황색계열 - 황토, 일산화납
청색계열 - 녹청, 군청 (남동광)
자색계열 - 벽화에는 나타나지만, 재료는 불명. (현재는 茶色으로 변색되어 있음.)
흑색 - 먹


벽화는 실물크기의 밑그림을 벽면에 전사한 후, 채색한 것으로 보인다. 밑그림을 벽면에 전사하기 위해 염지법이라 하여 밑그림의 뒷면에 목탄, 철회 등의 분말을 칠하고, 벽면에 대서 주걱 등으로 윤곽선을 그려서 벽면에 전사하는 방법이나, 押圧線引法이라 하여 밑그림을 바로 벽면에 대서 뾰족한 막대기 등으로 윤곽선을 그려, 벽면에 홈이 파이도록 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밑그림을 전사한 후 채색한 다음, 다시 철회로 윤곽선을 강조하는 기법으로 제적되었는데, 채색은 적색계열과 녹색계열의 대조를 강조하여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해 청홍분장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의상 등에 운간채색이라 하여 가는 선을 겹쳐 그려 색채의 농담을 표현하는 기법을 아용하고 있다. 윤곽을 강조하기 위해 鉄線描라 하여 강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호우류우지(法隆寺) 壁画와 인도 아잔타 석굴관과의 유사성에 관하여 여러가지 설명이 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은 양식적 특징은 주로 돈황의 막고굴 등의 초당회화와 관련이 깊고, 직접적으로는 중국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작자에 관해서는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으나, 벽화마다 작풍이 서로 다른 부분이 확인되는 점에서 볼 때, 공동제작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금당 자체가 호우류우지(法隆寺)에서 仁王会가 거행되었던 持統天皇7年(693年)까지는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점에서 볼 때, 벽화의 제작시기도 그와 비슷하게 700년 전후를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天平19年(747年)의 자료인 '法隆寺資財帳'에는 벽화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당시 벽화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고, 단지 당시 시각에서 벽화를 금당 건물과 일체로 인식하여 별도의 '資財'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8세기후반제작으로 보는 설도 있다.) 벽화에 관해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嘉承元年(1106年)경 大江親通이 저술한 '七大寺日記'이다. 여기서 大江親通은 벽화를 '鞍作鳥', 즉 호우류우지(法隆寺) 금당 본존의 제작자인 止利仏師가 그렸다고 언급하고 있어, 당시 이미 그와 같은 전승이 있어왔음을 알 수 있다. 카마쿠라 시대, 호우류우지(法隆寺)의 승려 顕真의 저술인 '聖徳太子伝私記'에서도 벽화의 제작자를 鞍作鳥로 적고 있다. 
明治時代에 와서 벽화의 예술적, 역사적 가치가 서서히 인식되면서 1887년 경에는 桜井香雲라고 하는 화가가 벽화를 모사한 바 있다. (모사본은 東京国立博物館 소장)또한 1907년-1931년경까지 鈴木空如라고 하는 화가에 의해서도 모사가 이루어졌다. (모사본은 秋田県大仙市所 소장)
古社寺保存法(文化財保護法의 전신이 되는 법령)이 공표되었던 1897년에는 벽화를 유리로 덮어 보호하는 안이 검토되었다가 실행되지는 못했고, 1915년에는 文部省에 호우류우지(法隆寺) 壁画 보존방법 조사 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그 2년전에 작고한 岡倉天心이 주창해왔던 것이었고, 4년후인 1919년에 과학적보존방법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 후, 해산되었다. 벽화의 과학적보존처리에 관해서는 벽화 일부에 대해서만 시험해보고, 구체적으로는 진전되지 않았다. 1917년에는 벽화를 보호하기 위한 커튼이 설치되어 다음해부터 벽화는 봄, 가을의 일정기간에 한해 공개가 되었다. 
1934년에는 文部省에 法隆寺 国宝 보존사업부가 설치되어 국가주도로 이른바 法隆寺伽藍 昭和大修理가 실시되었다. 1939년에는 文部省에 다시 法隆寺 壁画 보존조사회가 설치되어 미술, 역사 등의 분야의 전문가를 비롯, 자연과학 분야의 전문가도 참가하여 벽화의 열화방지와 보존을 위한 대책이 검토되었다. 벽화를 종래대로 금당 내에서 보존하는 방법과 금당 밖으로 분리하여 별도로 보존하는 방법 등이 검토되었지만, 벽화의 분리에 관해서는 사찰 측이 신앙 상의 이유로 반대하여,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 1935년에는 교토의 미술서적출판사였던 便利堂에 의해 벽화의 실물크기의 대형 사진을 촬영했다. 벽화의 원형이 손상된 지금에 와서는, 이 때의 사진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便利堂에서는 벽화를 수십장의 흑백사진에 나눠 실물크기의 벽화를 촬영한 이외에 적외선사진과 색분해사진도 촬영했다. 당시 일본 수준에서는 칼러필름이 보급되어 있지 앟았기 때문에 필터를 사용한 4색분해에 의한 칼러사진이 촬영되었다. 便利堂은 1938년에는 collotype 인쇄에 의한 벽화 복제품을 제작하고 있다. 


과학적보존방법의 검토와는 별도로 벽화의 현 상태의 모사를 제작하기 위하여 당시의 대표적인 일본화가 4명이 분담하여 1940년부터 모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일본이 전시체제에 돌입하였던 1942년 경에 모사작업은 중단되었다. 
이하의 4명의 화가가 조수를 인솔하여 각각의 벽화를 모사했는데, 
荒井班 - 荒井寛方(1878 - 1945): 2, 10호벽
入江班 - 入江波光(1887 - 1948): 6, 8호벽
中村班 - 中村岳陵(1890 - 1969): 1호벽(미완성), 5호벽
橋本班 - 橋本明治(1904 - 1991): 9호벽(미완성), 11호벽(미완성)
4명중, 아라이히로카타(荒井寛方와 이리에하코우(入江波光)는 당시 그다지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미술사가였던 滝精一의 추천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荒井는 인도의 아잔타 벽화를 모사한 경험이 높이 평가되었고, 入江는 이전에 土田麦僊、村上華岳 등이 창설한 국화창작협회의 회원이었지만, 1928년 동 협회의 일본화부가 해산되면서 오로지 고회화 모사에 몰두하면서 모사전문 화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荒井、入江、中村、橋本가 인솔하는 각 그룹은 각각 大壁 1面、小壁 2面을 각각 분담하여, 1, 6, 9, 10호 大壁을 추천으로 맡았고, 8면이 있는 小壁은, 2, 5, 8, 11호의 4면은 각각 담당이 정해졌지만, 남은 4면은 담당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결국 착수되지 못했다. 착수했던 모사도 橋本가 담당했던 9, 11호벽, 中村가 담당했던 1호벽 등은 미완성인 채로 끝나버렸다. 
당시, 모사를 일본화와 서양화 중 어느방식으로 할까에 대해서도 벽화보존조사회에서 논쟁이 있어, 서양화가였던 和田英作(1874 - 1959)는 '호우류우지(法隆寺) 壁画의 색채는 서양화기법이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 田靫彦 등의 일본화가들은 '벽화와 같은 선은 일본화가 아니면 그려낼 수 없다.'고 주장하여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모사는 일본화 방식으로 결정되었지만, 그와 별도로 和田英作는 개인적으로 유화로 모사하기로 했다. 和田가 모사한 5호벽도 미완성인채로 끝났다. 


모사는 1940년에 시작되어 금당 내에서는 당시 일본으로서는 군사용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최신기기였던 형광등이 조명으로 사용되었다. 모사방법은 便利堂이 촬영한 실물크기 사진을 화지에 희미하게 collotype인쇄한 것에 채색을 입히는 방식이었는데, 入江만은 이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전통방식대로 겹쳐 그리는 방식을 고수하여 제작했다. 이 방식은 얇은 화지를 고회화의 원본과 사진판 위에 겹쳐 비쳐 보이는 선을 잘 관찰한 후 다시 원본을 보면서 화지에 선을 그리는 방식이다.  이 때 사용한 화지는 '神宮紙'라 하여 明治神宮 外苑의 성덕기념회화관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되었던 明治天皇 일대기를 그린 회화를 제작하기 위해 高知県에서 특별제작된 종이였다. 교토출신의 入江와 칸토 지방에서 온 다른 3명간에는 모사방법 뿐 만 아니라, 여러가지로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모사작업은 금당 안의 좁은 발판 위에서 해야 하는 힘든 작업으로 좀처럼 진척되지 않는 데다가 수당도 턱없이 쌌다. 그 와중에 전쟁분위기가 완연했던 1942년에는 모사작업이 중단되어 버렸다. 모사는 종전이후 재개되었지만, 荒井、入江 등의 2명은 1945, 48년에 타계하였고, 入江의 조주 중에는 훗날 악역배우로 유명해진 吉田義夫도 있었다.
종전 직전인 1945년에는 금당 해체작업이 시작되었고, 이 해체는 수리의 목적도 있었지만, 전쟁 중의 소실을 막기 위해 미술품 뿐 만 아니라,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조물도 같이 부재 단위로 해체하여 소개시기키 위한 의미도 있었다. 금당은 상부부분 부재부터 해체되어, 1, 2층 사이의 천정판까지 들어내는 단계까지 진행되면서 종전을 맞이했다. 


1949년 1월 26일 이른 아침 금당에 화재가 발생했다. 당일 東京日日新聞 및 報知新聞의 보도에 따르면, 오전 5시경의 주지 佐伯定胤가 새벽 예불 때까지는 이상이 없었다가, 오전 7시20분경에 발화하여 오전 9시전후에 진화되었다. 원인에 관해서는 공식적으로는 벽화를 모사하던 화가가 쓰고 있던 전기방석에서 화재가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모사에 사용한 황광등용 전열기가 원인이라는 설, 방화설 등 진상은 아직 확실치 않다. 화재 당시, 금당은 전술한 바와 같이 반 정도 해체되어 있어서, 천정 위쪽으로 2층부분과 모코시(裳階)부분의 부재는 해체 완료되었던 탓에 화를 면했다. 또한 내부에 안치되어 있던 석가삼존상 등 불상도 모두 大講堂、大宝蔵殿 등에 옮겨져 있었기 때문에 무사했지만, 벽화만은 연기에 노출되어 1층 기둥, 창방, 공포 등의 표면도 까맣게 그을렀다. 또한, 호우류우지(法隆寺) 금당 壁画에 관해 종종 소실되었다라고 기술되는 경우가 있는데, 아래에 기술하는 바와 같이, 원본 벽화가 검게 눌은 상태가 되긴 했지만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화재로 손상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손상된 벽화는 아크릴수지와요소수지를 주입하여 경화시켜, 1954년 10월-다음해 3월까지 재조립하여 경내 지키도우(食堂)동쪽에 지어진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東京国立博物館 호우류우지(法隆寺)보물관으로 이전보관하는 계획도 있었지만, 신앙상의 이유 등으로 결국 호우류우지(法隆寺)에 남았다.)이 수장고에는 타서 눌은 벽화와 기둥 등의 부재가 종전의 배치대로 설치되어 있지만, 보존 상의 이유로 일반공개는 되지 않았고, 금당은, 해체 중 재사용이 가능한 부재는 재사용하고, 손상된 1층 기둥부재는 새로 끼워넣어, 1954년 준공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벽화가 그려져 있었던 벽은 빈 공간인 채였고, 1967년에 이르러서 호우류우지(法隆寺)의 발원으로 朝日新聞社의 후원에 힘입어 재현벽화를 제작하여 원본대신 벽체에 끼워졌다. 당시 담당했던 화가는 아래의 14명인데, 
安田班 - 安田靫彦(1884 - 1978)、羽石光志、岩橋英遠、吉田善彦 - 2, 4, 6호벽
前田班 - 前田青邨(1885 - 1977)、近藤千尋、守屋多々志、平山郁夫 - 3, 10,12호벽
橋本班 - 橋本明治(1904 - 1991)、野島青茲、大山忠作 - 8, 9, 11호벽
吉岡班 - 吉岡堅二(1906 - 1990)、稗田一穂、麻田鷹司 - 1, 5, 7호벽
을 담당했다. 1940년부터 시작되었던 모사 때와는 달리 이번 모사에서는 法隆寺의 현장이 아니라, 각자의 아틀리에에서 제작되었다. 사용된 기법은, 화지에 실물크기 사진을 collotype인쇄한 것에 채색을 입히는 방식이다. 화지는 福井의 岩野製紙所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통의 크기의 화지를 보통 눈으로는 구
 
별하기 힘들만큼 정교하게 이어붙여 종으로 3.1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화면을 만들었다. 안료는 교토의 岩田放光堂에서 특별히 제작하였다. 橋本明治가 저번 모사에 이어 참여하였고, 吉岡、吉田、近藤、野島、大山도 저번 모사에 조수로 참여했던 화가였다. 1967년에 시작하여 채 1년이 되지 않아 1968년에 완성되었고, 패널에 끼워져 금당 벽에 설치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법요가 거행되어 호우류우지(法隆寺) 금당 内部는 화재이전의 면모를 되찾았다. 





현재, 벽화는 화재로 색채가 거의 사라져, 윤곽선만 간신히 남아 네가티브필름같은 상태가 되어 있다. 사용되었던 안료 중 철회만은 화재후에도 화학변화없이 잔존하고 있어 윤곽선이 철회로 그려졌던 탓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벽화 중 1호大壁、10호大壁 등은 손상이 적어 비교적 도상이 남아 있고, 12호벽의 십일면관음보살상은 전체 도상과 의복 문양등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벽화 중 최고걸작으로 손꼽히던 6호벽의 아미타정토도는 심각한 피해를 입어 중존의 아미타여래상의 얼굴 부분은 소방호스를 넣기 위한 구멍이 뚫리는 바람에 이 부분의 도상은 완전히 없어졌다. 세계문화유산 우표의 도안이 되기도 했을만큼 유명했던 우협시 관음보살은 얼굴부분 안료가 거의 사라져 있다. 상부에 그려져 있던 山中修行羅漢図는 소실되었지만 모사가 남아 있다. 


 


석가삼존상(国宝)은 623年, 止利仏師作의 광배명의 광배와
 
 함께 모셔져 있는 불상으로 일본 불교조각사의 시작을 알리는 명작으로 도식적인 의복처리, 행인형 눈, 소위 아르카이크 스타일의 미소 (고대 그리스의 아르카이크 조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흡사 미소와 유사한 표정, 고식(古式)미소라고도 하며, 대체로 조각을 단지 생명없는 차가운 인형인 채로 두기 보다, 그 안에 혼을 머물게 하고, 인간과 같은 생명과 감정을 가진 존재로 하고자 인위적으로 표정을 정한, 즉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입끝을 위쪽으로 올리는 이 <미소와 유사한>표정으로 보인다. 


동양에서는 육조시대의 중국이나 아스카시대 이후 일본 불상조각의 얼굴에 동일한 미소가 나타나며, 그리스의 것과 매우 유사한데, 양자의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불상의 경우, 미소는 불의 중생에 대한 자비를 나타내기 위해서 육조시대의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북위의 운강(雲岡)이나 용문(龍門)의 석굴사원의 불ㆍ보살상에는 미소를 띤 것이 적지 않다. 이 육조풍의 불상은 조선을 매개로 일본에 이식되어 아스카시대의 불상이 되었다. 법륭사의 백제관음, 구세관음, 중궁사나 광륭사의 미륵보살 등에서도 이 미소가 나타난다. ), 두터운 귓볼, 목에 표현된 삼도가 표현되지 않은 점 등 후대의 일본 불상과 차이나는 양식을 나타내어 대륙풍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약사여래좌상(国宝)은 '東の間'의 본존으로 안치되어 있는데, 양 협시였던 日光・月光菩薩像은 따로 보관되고 있지만 양식이 달라 본래 일체로 제작되었던 것은 아니다. 


阿弥陀三尊像(重文)은 카마쿠라시대의 慶派의 仏師인 코우쇼우(康勝,?-?)의 작품으로 원래 '西の間'에 있었던 본존상이 중세에 도난당하여, 새로 조성된 불상이다. 전체적으로 구성, 의복문양 등 카마쿠라 시대로서는 고식에 해당하여 '東の間'의 약사여래상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지만, 표정등은 카마쿠라 시대의 유행을 따르고 있다. 협시인 勢至菩薩像은 에도막부 말기-明治初期에 행방불명되어 현재는 프랑스 키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금당에 안치되어 있는 勢至菩薩像은 바로 키메미술관 소장 보살상을 모방하여 1994년에 새로 주조한 것이다. 





四天王立像(国宝)은 아스카시대 작품으로 광목천, 다문천상의 광배 뒷면에는 山口大口費'의 작품이라는 명문이 있다. 같이 안치되어 있는 석가삼존상、약사여래상이 銅造인 데 반해, 木造彩色이며, 후대의 사천왕상과는 달리, 분노의 표정과 자세를 나타내지 않고, 邪鬼 위체 직립부동의 자세로 서있는 형상이다. 


 


毘沙門天・吉祥天立像(国宝)은 '中の間'의 본존 석가삼존상의 좌우에 시립해 있는데, 헤이안시대의 木造彩色像이며, '金堂日記'으로 보아 承暦2年(1078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中の間', '西の間'의 본존 위에 장식되어 있는 천개도 아스카시대의 제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東の間'의 천개는 카마쿠라시대의 제작)


오층목탑(国宝)은 목조로 지어진 오층탑으로서는 현존 世界最古의 건축물이다. 1-5층까지의 체감율이 높은 것이 이 탑의 특징으로, 5층의 경우, 1층의 절반 정도에 해당한다. 1-4층까지의 탑신은 3칸이지만, 5층의 경우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 내진에는 동서남북 각각 통칭 塔本四面具(国宝)라고 하여 소조 불보상군(총 80점의 소조상이 국보)을 안치하고 있다. 소조상의 재료가 되는 점토는 사찰 근처의 흙과 성분이 거의 동일하여 이 일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쪽면은 '유마경'에 나오는 '문수보살과 유마거사간의 문답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북쪽면은 '석가의 열반 장면', 서쪽면은 '인도의 여러 국왕들이 석가의 유골을 분배하는 분사리의 장면', 남쪽면은 '미륵의 정토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북면에서 석가의 입멸을 슬퍼하는 불제자의 상이 특히 유명하다. 오층목탑 내부에도 벽화(重文)가 있었지만, 손상이 심해 별도 보관중이다. 心礎는 지하 3미터에 있는데 1926년 내부에서 유리제의 사리호와 그 안에 봉납된 금/은/동제의 용기 등으로 구성된 사리용기가 발견되었고, 조사후, 원래 위치에 재봉납되었다. 


 

 






회랑(国宝)또한 금당 등과 거의 동시대의 건축으로 大講堂의 연결부분은 헤이안시대의 건물이다. 건설 당시에는 대강당 안쪽으로 회랑이 닫혀져 대강당은 회랑 바깥에 있었다고 한다. 
経蔵(国宝)은 나라시대의 이층 누각 건물로 観勒僧正坐像(重文)을 안치하고 있지만, 비공개이다. 
鐘楼(国宝)은 상기 経蔵과 대칭되는 위치에 있지만 건립시기는 헤이안시대이다. 


 


大講堂(国宝)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헤이안시대인 延長3年(925年)에 소실된 후, 正暦元年(990年)에 재건된 건물이다. 薬師三尊像(平安時代、国宝)와 四天王像(重文)을 안치하고 있다. 


 
東院伽藍은 원래 聖徳太子 일족의 거주지였던 이카루가노미야(斑鳩宮) 터에 지어졌는데, '法隆寺東院縁起'에 의하면, 天平11年(739年)、僧行信이 이카루가노미야(斑鳩宮)이 황폐해진 것을 탄식하여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랑으로 둘러쌓인 내부에는 팔각원당의 夢殿이 있고, 회랑 남쪽에는 礼堂、북쪽에는 絵殿 혹은 舎利殿이 있고 이에 접하여 伝法堂이 있다. 
夢殿(国宝)은 나라시대에 건립된 팔각원당형 건물로 내부에는 聖徳太子의 등신상으로 추정되는 救世観音像을 안치하고 있다. 



観音菩薩立像(救世観音)(国宝)은 아스카시대의 목조상으로 夢殿 중앙의 厨子에 안치되어 있다. 오랜 세월 비불로 흰 천으로 덮힌 채로 보존되어 왔다가 明治初期에 岡倉天心과 페노로사가 처음으로 흰 천을 벗기면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견 경위에 대해서는 다소 윤색된 부분도 있어 진상은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현재도 봄, 가을의 2회에 잠시 공개될 뿐 비공개로 남아 있고, 보존상태가 극히 좋아 조성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박도 많이 남아 있다. 
行信僧都坐像(国宝)은 나라시대의 건칠좌상으로 行信은 東院 건립과 관계된 인물로 극단적으로 가는 목과 괴이한 용모가 특색이다. 
道詮律師坐像(国宝)은 헤이안시대초기의 작품으로, 이 시기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목조가 아닌 소조좌상이다. 道詮은 行信와 같이 황폐해 있던 東院의 중창에 힘을 썼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聖観音立像(重文)은 救世観音의 뒷쪽에 시립해 있다. 
絵殿/舎利殿(重文)는 카마쿠라시대의 건물로, 絵殿에는 현재의 오사카부인 摂津国의 화가였던 하타노치테이(秦致貞)가 延久元年(1069年)에 그렸던 '聖徳太子絵伝'의 障子絵(国宝)가 있었다. 太子의 生涯를 묘사한 가장 오래된 작품이이지만, 明治11年(1878年)、 당시 왕실에 헌납되어 현재는 '法隆寺献納宝物'로 東京国立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絵殿에는 에도시대에 그려진 '聖徳太子絵伝'이 대신 걸려 있다. 


伝法堂(国宝)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건물로, 化粧屋根裏이 특징이다. 橘夫人(현재는 聖武天皇夫人・橘古奈可智이라고 하는 학설이 우세)의 집을 이축하여 불당으로 개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나라시대의 주택유구로서 귀중한 유물이다. 해체수리 당시, 이축되어 개조된 사실이 확인되었고, 이축이전에는 주택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내에는 다수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지만 비공개이다. 내부는 '中の間'、'東の間'、'西の間'로 나뉘어, 나라시대 건칠조아미타삼존상이 안치되어 있다. 그 외에도 헤이안시대 제작된 목조 범천, 제석천입상, 사천왕입상, 약사여래좌상, 석가여래좌상, 미륵불좌상, 아미타여래좌상 등이  안치되어 있다. 
東院 권역 내에는 그 외에 무로마치 시대인 長禄3年(1459年)에 건립된 南門、카마쿠라 시대 건축물인 四脚門과 鐘楼(国宝) 등이 있다. 
관음보살입상(구면관음)(国宝)은 唐 전래의 조각으로 香木을 이용하여 채색없이 이른바 檀像라고도 불리웠던 입상이다. 정교한 장신구, 신체와 분리되어 표현되어 있는 귀거리, 천의까지 일체형으로 조각된 아주 기교적인 조각이다. 
관음보살입상(몽위관음)(国宝)은 아스카시대 후기(白鳳期)의 銅造 조각으로 원래 東院 絵殿의 본존이었으며, 악몽을 길몽으로 바꾸어준다는 전설에서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지장보살입상(国宝)은 헤이안시대의 목조 조각으로 桜井시의 오오미와진쟈(大神神社)의 神宮寺인 다이고린지(大御輪寺)에 있었다가 明治의 神仏分離로 호우류우지(法隆寺)로 옮겨져 금당内陣의 뒤쪽에 안치되었다가 大宝蔵院으로 옮겨졌다. 
육관음상(重文)은 역시 아스카시대 후기(白鳳期)의 목조 조각으로 정식 명칭은 '관음/세지보살', '일광/월광보살', '문수/보현보살' 등으로 불리우지만, 본래 그렇게 불리웠는지는 확실치 않다. 각각 조금씩 양식이 다르고, 東京의 根津美術館에는 이 육관음상과 유사한 보살상이 있어 원래는 8体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범천/제석천입상, 사천왕입상(重文)은 모두 나라시대의 소조상으로 원래는 지키도우(食堂)의 본존인 약사여래상 주위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玉虫厨子(国宝)는 아스카시대의 작품으로, 원래 금당에 안치되어 있었다. 불당형 厨子로 건축양식상 호우류우지(法隆寺)의 사이인가람(西院伽藍)보다 더 고식으로 아스카시대의 건축 혹은 공예의 유품으로 귀중한 예이다. 투조의 장신구 아래에 실제 비단벌레 날개를 잘라 모아 장식한 것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현재 비단벌레 날개는 일부만 남아 있고, 제작 당시의 화려함을 예상하기엔 힘들다. 문과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회화도 유명하여 석가의 전생에 관한 얘기인 '捨身飼虎図' 또는 '施身聞偈図'는 특히 잘 알려져 있다. 
橘夫人厨子 혹은阿弥陀三尊像(国宝)는 아스카시대 후기(白鳳期)의 작품으로 역시 금당에 안치되었었다. 厨子 내의 아미타삼존상은 아스카시대후기의 금동불로서는 대표작으로 연지에서 솟아나온 3개의 연화 위로 삼존상이 표현되어 있다. 
金堂小壁画(重文)은 1949년의 금당 화재시 현장에서 미리 소개되어 있어 화재를 면했던 小壁의 천인상 벽화 20면인데, 그 일부는 전시중이다. 
南大門(国宝)은 사이인가람(西院伽藍)의 남쪽에 있는데 팔작지붕의 1층 문으로 무로마치 시대인 1438년에 당시의 西大門을 이축하여 건립하였고, 창건 당시에는 맞배지붕이었다. 
쇼우료우인(聖霊院)(国宝)은 사이인가람(西院伽藍)의 동쪽에 있는 데, 쇼우토쿠타이시(聖徳太子)의 祀堂으로 카마쿠라 시대에 건립되었다. 원래는 東室의 일부였다가 1121년 재건시 남쪽 절반을 聖霊院으로 개조하여 쇼우토쿠타이시(聖徳太子)상을 안치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284年에 개축된 것이다. 헤이안 시대 작품인 성덕태자 및 권속상(国宝)、여의륜관음반가상(重文)、지장보살입상(重文)등이 안치되어 있다. 
히가시무로(東室)(国宝)은 후대의 보수/개조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나라시대의 건축으로 당시의 승방건축의 유구로 귀중한 예이다. 


관음보살입상(国宝)은 쿠다라칸논(百済観音)이라고도 하며, 7세기 초중반인 아스카시대 제작된 목조보살상으로 원래는 금당 内陣의 뒷편에 안치되었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구등신의 특이한 비율로 제작되었으며, 和辻哲郎의 '古寺巡礼'를 비롯하여, 다수의 문예작품에서 격찬해 마지않았던 유명한 조각이지만, 그 유래와 조상배경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百済観音'이라고 하는 별명도 근대에 붙여진 것으로 정작 사찰 내에서는 明治初期까지도 '虚空蔵菩薩像'라고 불리웠다. 


일본에 현존하는 목조불상조각의 古例로 귀중한 예인 동시에 근대 이후, 和辻哲郎의 '古寺巡礼', 亀井勝一郎의 '大和古寺風物誌' 등에서 격찬하여 유명해졌다. 높이 210.9센티미터로 작자는 불명이며, 오각형 평면의 복련대좌 위에 직립해 있는 형상이다. 통상의 불상보다 심하게 날씬하고 팔등신에 가깝게 조각되어 있다. 오른팔은 팔꿈치가 거의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고, 팔뚝을 앞으로 수평으로 내밀고 손바닥을 위로 향해있지만, 지물은 현재 없다. 왼손은 수직으로 내려 손등을 전면으로 향하여 팔꿈치가 가볍게 구부러져 있으며, 정병을 쥐고 있다. 상반신에는 승기지, 하반신에는 치마모양의 상이 표현되어 쳔의를 형상화하였다. 천의는 대퇴부 정면에서 X자형으로 교차하여 양 팔을 거쳐 몸통 옆으로 수직으로 늘어뜨려져 있다. 두발은 머리카락을 엮어 양 어깨에 길게 늘어뜨린 형태이다. 宝冠、首飾、臂釧、腕釧 등의 장신구가 붙어 있는데, 모두 동제투조로 별도로 제작된 것이다. 광배는 보주형 두광으로 중앙부에 八葉蓮華을 표현하여 그 주위에는 동심원 문양이 있고, 그 외곽에는 화염문양이 표현되어 있다. 대나무를 형상화한 목제광배지주의 아래쪽에는 山岳形 장식이 있다. 


호우류우지(法隆寺)에 전해오는 어느 기록에도 이 조각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고, 작풍도 서로 달라 백제관음상의 조성 당시부터 호우류우지(法隆寺)에 있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후대에 다른 사찰에서 옮겨왔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元禄11年(1698年)에 작성된 '法隆寺諸堂仏躰数量記'에서야 비로소 '虚空蔵立像 長七尺五分'라고 하는 기록이 있어서 높이로 볼때 백제관음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문헌상으로 최초로 등장하게 된다. '法隆寺諸堂仏躰数量記'에서는 이 '虚空蔵菩薩像'을 '백제국에서 전래되었고, 인도에서 제작된 상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延享3年(1746年)、호우류우지(法隆寺)의 승려 료우킨(良訓)이 저술한 '古今一陽集'에도 '虚空蔵菩薩'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조각상의 유래는 옛기록에는 없지만, 노인이 전하는 전승으로는 다른 나라에서 전해진 상'이라는 서술이 있어, 당시까지도 유래에 대해서는 불명확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있던 곳에 대해서는 아스카 지방의 橘寺라고 하는 학설, 이카루가의 中宮寺에서 옮겨왔다는 학설 등이 있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근대에 접어들어 호우류우지(法隆寺)에서는 이 조각상을 관음이라 지칭하지 않고 '虚空蔵菩薩'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쇼우토쿠타이시(聖徳太子) 신앙과 관련있어 보인다. 明治19年(1886年)、宮内省、内務省、文部省 등에 의해 행해진 호우류우지(法隆寺)의 조사당시의 목록에는 '朝鮮風観音'로 기재되어 이 무렵부터 관음보살상으로 지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에 '朝鮮風観音'라고 명칭을 붙였던 것은, 당시 나라지방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있었던 岡倉天心의 명명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明治30年(1897年)、당시 국보로 지정되었을 당시의 정식명칭도 '관세음보살'이었지만, 정작 호우류우지(法隆寺) 측은 '虚空蔵菩薩'를 고집했었고, 明治38年(1905年)4月14日에 명칭변경을 청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明治44年(1911年)에 목조 宝冠이 새로 발견되면서 그 보관의 정면에 아미타불의 화불이 조각되어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사찰 측에서도 '관음보살'이라는 명칭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20세기 이후 유명해진 '백제관음'이라는 명칭은 그 유래가 그리 오래되지 않아, 大正6年(1917年)의 '法隆寺大鏡'에서의 해설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후, 大正8年(1919年)에 간행된 和辻哲郎의 '古寺巡礼'에서도 백제관음으로 칭했고, 고고학자인 濱田青陵(濱田耕作)이 大正15年(1926年)、'仏教芸術' 잡지에 기고한 '百済観音像' 이후, 수필집에서도 '백제관음'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 후 점차 '백제관음'이라고 하는 명칭이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백제관음은, 호우류우지(法隆寺) 금당 본존인 석가삼존상、또는 夢殿의 救世観音像와 같은 止利式의 불상과는 그 양식이 상이하다. 止利式의 불상은 정면을 관조하는 경향이 강하여 측면감이 거의 고려되어 있지 않고, 좌우대칭성이 강하며, 의복문양도 도식적인 점이 그 특징이지만, 백제관음상에서는 측면감 측면에서 보다 자연스럽고 인체 표현에서의 입체적인 파악이 진전을 이루고 있다. 7세기 전반의 제작으로 보이는 호우류우지(法隆寺) 夢殿 본존인 救世観音像을 보면, 전체적으로 정면을 강조하고 좌우대칭성이 현저하고, 어깨에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도식적이고, 양쪽 팔에서 몸통 옆으로 내려지는 천의는 지느러미 모양의 돌기를 표시하며 좌우로 평면적으로 퍼지고 있다. 이에 반해 백제관음상의 머리카락은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천의는 보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전후방향으로 흔들리듯 표현되어 그 우아함은 측면에서 관찰하면서 비로소 시선에 들어온다. 양쪽 손도 각 손가락이 서로 다른 곡선으로 표현되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백제관음은 夢殿 본존상 보다 연대가 내려가지만, 初唐彫刻의 영향이 보여지는 薬師寺 東院堂의 聖観音像과 호우류우지(法隆寺)의 夢違 観音像 등 보다는 고식으로 대략 7세기초중반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는 학자마다 거의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작풍의 원류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는데, 중국의 남조의 작풍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小林剛、望月信成 등)、北斉・北周・隋의 불상에서 양식적 원류를 찾는 견해(上野照夫、町田甲一 등) 등이 있다. 후자의 학설에 의하면, 호우류우지(法隆寺) 금당 석가삼존상과 같이 7세기 전반의 止利式의 불상은 북위의 작품을 원류로 볼 때, 그보다 3차원적 공간 파악이 진행되어 조각된 경우 시대를 내려서 추정하여 北斉・北周・隋의 조각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호우류우지(法隆寺) 금당 본존과 같이 止利様式의 원류를 북위에서 찾는 종래의 견해와 달리 吉村怜의 견해는 止利様式의 원류를 남조양식에서 찾고 있는데, 그 경우, 상기한 바와 같이 止利様式의 원류를 북조에서 찾는 견해는 그와 다른 양식의 불상을 남조와 斉周様式에서 찾게 되는  견해가 성립하지 않게 되어, 재고의 필요성이 있게 된다. 본 백제관음과 조형감각이 유사한 예는 일본 국내에는 法輪寺 虚空蔵菩薩立像、中宮寺 菩薩半跏像、호우류우지(法隆寺) 금당 四天王像 등에서 찾아 그 제작연대를 비교하는 경향도 있다. 

 

 

6월 관서정원답사 자료 6. 法隆寺五層木塔 - 2

 

6월 관서정원답사 자료 6. 法隆寺五層木塔 - 2

 12호벽(십일면관음입상) - 서면 북쪽끝。8개의 小壁에 그려진 보살상 중에서는 유일하게 정면을 향해 서있는 도상이다. 마주보는 위치에 있는 7호벽의 관음보살상과 대응된다. 内陣小壁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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