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 / 나무위키
2022. 8. 31. 02:05ㆍ美學 이야기
한국화
최근 수정 시각: 2022-07-17 10:15:40
드라마 마르코 폴로의 오프닝 수묵화.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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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
2.1. 고대2.2. 중세2.3. 조선시대2.4. 일제강점기2.5. 1950년대: 한국화 이전의 동양화단2.6. 1970년대: 한국화라는 용어의 탄생2.7. 1980년대: 한국화라는 용어의 정착과 현재
3. 쟁점
4. 특징
5. 주요 도상
6. 주요 기법
7. 종류8. 준비물9. 한국화 화가
10. 도움될 만한 참고 자료들11. 둘러보기1. 개요[편집]
2. 배경[편집]
2.1. 고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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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도 한반도에서는 회화가 꾸준히 그려졌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무덤의 벽에 그려진 고분 벽화가 그려졌다. 현재 고구려 벽화고분은 100여점이 남아있으며, 고구려의 사회, 귀족과 서민들의 생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학적 자료로 평가받는다. 한편 신라에서는 말안장의 장니 등에 천마도, 신라 행렬도 등의 그림이 남았다. 솔거의 이야기나, 다카마쓰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고구려 여인의 도상을 보아[1] 이미 삼국시대의 회화가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작가론이나 화론이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다.
2.2. 중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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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발달하면서 불화 유물이 많이 남았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통일신라기의 국보 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변상도(變相圖) 불화가 있고 고려시대 고려 불화부터는 유물의 수도 많다. 귀족들의 개인 불당에 안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불화들은 주로 당시 유행했던 관음보살 등의 도상을 표현했다. 고려시대 불화는 조선시대 수묵화와 달리 금니와 여러 안료를 써서 상당히 세밀하고 화려하게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2.3. 조선시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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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화의 특징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이때에도 채색이 화려한 그림은 여전히 그려졌으나, 사대부를 중심으로 유교의 질서를 반영한 문인화, 수묵화가 더 유행하였다. 특히 동기창의 남종화론의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문인화가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직업 화원이었던 김홍도는 남종화와 북종화를 넘나들면서 여러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조선시대 말에 이르면 장승업같이 중국식 도상을 따르는 방향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서민들은 민화를 향유했고, 조선 후기의 불화도 민화적 양식이 혼합되는 양상이 보여진다.
서민들은 민화를 향유했고, 조선 후기의 불화도 민화적 양식이 혼합되는 양상이 보여진다.
2.4. 일제강점기[편집]
일제강점기에 한국 회화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주로 일본 남화의 영향을 받아 호분을 많이 사용해 뿌옇게 칠한 그림이 유행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고희동 같은 화가들이 일본에 유학해 서양화를 배워온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일본총독부는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자주성을 주장하는 표현을 막고, 향토색을 강조한 그림을 장려하였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안중식, 조석진 같은 화가들이 명성을 얻었으며, 김기창, 김은호, 노수현, 변관식, 이상범, 이용우 등도 활동했다. 이 중 김기창, 김은호, 노수현, 이상범 등은 강제징병을 독려하는 삽화를 신문에 그리는 등의 활동을 벌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2.5. 1950년대: 한국화 이전의 동양화단[편집]
한국화라는 용어가 미술계에 부각된 것은 해방 이후였다. 해방 이후 한국 화단은 크게 세 가지 과제를 안았다. 식민시기를 맞아 일제문화 청산을 위해 한국문화의 발견이라는 문제가 첫 번째였고, 이러한 문화를 민족 단결의 수단으로서 혹은 이데올로기 홍보의 수단으로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가가 두 번째였다. 나머지 하나는 이런 문화를 비단 한국 내에서만 향유하는 것이 아닌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한국의 동양화단은 당대 미술계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던 소위 '왜정식 미의식'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쉽게 말해 50년대 동양화단은 한국미술의 특질성을 보존하는 방향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동양회화에서 보였던 일본 미술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였다. 이런 시도는 자연스럽게 '한국적인 동양회화'라는 논의로 확대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글은 1954년 8월 5일 청강 김영기가 서울신문에 게재한 글이었다. 그는 『현대동양화의 성격 : 시급한 한국 國畵의 성립』에서 '동양화'라는 명칭 자체를 일제의 잔재로 파악하고 민족문화의 확립을 위해서는 '한국화'라는 단어를 공식적인 용어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그는 동신문에 『회화의 명칭에 대하여: 시급한 한국화의 화풍』, 경향신문에 운보 김기창의 기고문 『산수화 아닌 동양화를』에 답변하여 『동양화 아닌 한국화를』이라는 글을 써내면서 한국화 용어를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청강 김영기는 한국화 논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이후 70년대 그의 한국화론이 동양화단의 후학들에게 전방위한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에 와서는 미술사학의 분야에서 '한국화'라는 용어사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청강 김영기의 입장과 달리 당시 미술비평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것은 한국화라는 용어 자체의 냉담함이라기 보다는 동양의 회화 전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대한 반응에 가까웠다.
가령 윤희순은 1946년 『조선미술사연구』에서 서양화와 비교할 때 동양화가 모방에 불과하다는 시각을 내놓기도 했다. 이들은 일본의 동양화와 한국의 동양화가 비슷한 것은 식민잔재의 잔여물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나아가 '미술의 근대화'라는 일제시기 이후 미술비평의 경향에 기인한 바도 있었다. 동양화 전반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구체적인 미술가들에 대한 비판도 잇달았다. 이 무렵 청전 이상범이 그린 회화를 두고 안개를 연상케 하는 표현법이 일본의 남화와 비슷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해방 이후 동양화단은 외부적으로 미술비평가들의 비판과 내부적으로는 왜색의 청산이라는 이중의 과제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까지 겹쳐서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50년 한국전쟁과 뒤이은 정치적인 혼란으로 한국의 동양화단이 자체적인 미술이론에 근거한 회화상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 중 대표적인 글은 1954년 8월 5일 청강 김영기가 서울신문에 게재한 글이었다. 그는 『현대동양화의 성격 : 시급한 한국 國畵의 성립』에서 '동양화'라는 명칭 자체를 일제의 잔재로 파악하고 민족문화의 확립을 위해서는 '한국화'라는 단어를 공식적인 용어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그는 동신문에 『회화의 명칭에 대하여: 시급한 한국화의 화풍』, 경향신문에 운보 김기창의 기고문 『산수화 아닌 동양화를』에 답변하여 『동양화 아닌 한국화를』이라는 글을 써내면서 한국화 용어를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청강 김영기는 한국화 논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이후 70년대 그의 한국화론이 동양화단의 후학들에게 전방위한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에 와서는 미술사학의 분야에서 '한국화'라는 용어사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청강 김영기의 입장과 달리 당시 미술비평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것은 한국화라는 용어 자체의 냉담함이라기 보다는 동양의 회화 전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대한 반응에 가까웠다.
가령 윤희순은 1946년 『조선미술사연구』에서 서양화와 비교할 때 동양화가 모방에 불과하다는 시각을 내놓기도 했다. 이들은 일본의 동양화와 한국의 동양화가 비슷한 것은 식민잔재의 잔여물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나아가 '미술의 근대화'라는 일제시기 이후 미술비평의 경향에 기인한 바도 있었다. 동양화 전반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구체적인 미술가들에 대한 비판도 잇달았다. 이 무렵 청전 이상범이 그린 회화를 두고 안개를 연상케 하는 표현법이 일본의 남화와 비슷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해방 이후 동양화단은 외부적으로 미술비평가들의 비판과 내부적으로는 왜색의 청산이라는 이중의 과제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까지 겹쳐서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50년 한국전쟁과 뒤이은 정치적인 혼란으로 한국의 동양화단이 자체적인 미술이론에 근거한 회화상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했다.
2.6. 1970년대: 한국화라는 용어의 탄생[편집]
70년대의 시대적인 상황에 있어서 정치적인 변화는 한국 동양화단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박정희 정권은 문화정책적으로 민족문화를 지원했다. 이것은 해방 이후 고대 미술에 쏟은 관심에 비해 현대 동양화에는 제도적인 지원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현실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양화단의 최고 쟁점은 국전 동양화부에서 구상과 비구상 분야의 분리에 관한 문제였다. 이 문제는 특히 동양화의 정체성 문제와도 결부되어서 숱한 논란을 낳았다.
이 대립은 크게 보면 체제순응적이고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기존의 국전, 그리고 국전의 체계를 바꿈으로서 동양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려고 하는 젊은 세대 작가들의 대립이었다. 젊은 작가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묵림회의 동인이었던 산정 서세옥을 들 수 있다. 서세옥은 동양화의 추상을 시도함으로서 산수화 일색의 동양화단에 변화를 꾀하고 이를 통해서 한국 고유의 '한국화'로 나아가자고 생각했다. 이것은 70년대 초기 한국화라는 것이 동양화 전반을 지칭하는 개념이기보다는 기존의 동양화를 대체할 새로운 동양화 또는 전위적인 동양화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했다. 1971년 이경성이 『한국예술지』에 기고한 「미술개관-한국화의 가능성」은 이러한 함의가 있는 한국화에 가하는 비판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동년 『신동아』에 올라온 박용숙의 기고문인 「한국화단 유감 - 한국화의 원류와 개념」에서도 국전과 갈등을 빚었던 미술가들의 자신의 작품들을 한국화로 규정했다. 이 때문에 '한국화'란 용어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주지해야 할 사실은 이 시기 한국화라는 용어 자체가 젊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였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50년대 김영기의 논의에서도 언급되었듯 한국화라는 용어는 기실 한국에서 그려진 동양회화 전반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개념은 당시 동양화단의 전반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지만, 일부 회화에선 그 용어가 언급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회화를 한국화로 부른다거나 소정 변관식의 회화를 한국화로 소개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시 한국화라는 용어는 꽤나 중층적인 의미가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의미들이 상충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몇몇 미술사가들은 70년대 한국화 논의 당시 평론가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이런 용어의 혼재에서 연유하였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1970년대부터 유리의 대량생산과 서양식 액자가 보급되면서 가정집에 한국화 액자를 걸어두는 것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한국화 액자는 나전칠기 장롱과 더불어 2000년대 이전의 가정집을 상징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되었다. 지금도 오래된 단독주택이나 오래된 식당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 대립은 크게 보면 체제순응적이고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기존의 국전, 그리고 국전의 체계를 바꿈으로서 동양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려고 하는 젊은 세대 작가들의 대립이었다. 젊은 작가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묵림회의 동인이었던 산정 서세옥을 들 수 있다. 서세옥은 동양화의 추상을 시도함으로서 산수화 일색의 동양화단에 변화를 꾀하고 이를 통해서 한국 고유의 '한국화'로 나아가자고 생각했다. 이것은 70년대 초기 한국화라는 것이 동양화 전반을 지칭하는 개념이기보다는 기존의 동양화를 대체할 새로운 동양화 또는 전위적인 동양화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했다. 1971년 이경성이 『한국예술지』에 기고한 「미술개관-한국화의 가능성」은 이러한 함의가 있는 한국화에 가하는 비판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동년 『신동아』에 올라온 박용숙의 기고문인 「한국화단 유감 - 한국화의 원류와 개념」에서도 국전과 갈등을 빚었던 미술가들의 자신의 작품들을 한국화로 규정했다. 이 때문에 '한국화'란 용어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주지해야 할 사실은 이 시기 한국화라는 용어 자체가 젊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였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50년대 김영기의 논의에서도 언급되었듯 한국화라는 용어는 기실 한국에서 그려진 동양회화 전반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개념은 당시 동양화단의 전반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지만, 일부 회화에선 그 용어가 언급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회화를 한국화로 부른다거나 소정 변관식의 회화를 한국화로 소개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시 한국화라는 용어는 꽤나 중층적인 의미가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의미들이 상충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몇몇 미술사가들은 70년대 한국화 논의 당시 평론가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이런 용어의 혼재에서 연유하였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1970년대부터 유리의 대량생산과 서양식 액자가 보급되면서 가정집에 한국화 액자를 걸어두는 것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한국화 액자는 나전칠기 장롱과 더불어 2000년대 이전의 가정집을 상징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되었다. 지금도 오래된 단독주택이나 오래된 식당에서 종종 볼 수 있다.
2.7. 1980년대: 한국화라는 용어의 정착과 현재[편집]
한국화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동양화단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말이었다. 이 시기 '한국화'라는 용어는 비단 특수한 화가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나 특정 시대의 회화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닌 한국의 동양화를 두루 일컫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한국화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서 1983년의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우선 교육의 측면에서 1981년 12월 교육과정을 재편과 함께 1983년 기존의 동양화라는 명칭을 한국화로 바꾸어 표기하였다. 미술계에서도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동양화를 한국화 부문으로 지칭한 것이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3] 이후 동양화를 다루는 각종 전람회, 회고전, 기획전 등에서 한국화란 용어가 널리 정착되었다.
그리하여 80년대에 이르면 한국에서 탄생한 동양화 전반에 대해 한국화라는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했다. 이런 변화를 잘 알려주는 사례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드러난다. 1978년 국립현대미술관은 기획전에 맞추어 『한국현대미술사 : 동양화』라는 책을 발행했다. 그런데 이 책은 이후 84년 수정 보완되어 재출간할 때 '동양화' 대신 '근대 한국화의 흐름'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약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용어에 큰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1985년 『미술세계』 11월호에 이석구가 기고한 글은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한다. 그는 한국화의 현주소를 진단하며 "한국화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채 몇 년이 되지 않았다." 지적하고, 한국화 논의의 출발점을 청강 김영기의 기고문들과 활동들로 잡았다. 이런 관점은 최근에 와서 몇몇 반론이 제기되기 전까지는 한국화 용어의 기원을 다루는 논의에서 정설로 취급받았다.
정리하면 한국화에 대한 논의는 (김영기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 식민지 시대의 문화의 청산이라는 문제와 맞물려 제기되었고 그것은 1950년대 한국 화단이 당면했던 세 가지 주요한 문제와도 연관되었다. 이후 한국화라는 용어는 1970년대까지 한정적으로 사용되다가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를 거쳐서 동양화단에 정착했다.
특히 한국화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서 1983년의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우선 교육의 측면에서 1981년 12월 교육과정을 재편과 함께 1983년 기존의 동양화라는 명칭을 한국화로 바꾸어 표기하였다. 미술계에서도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동양화를 한국화 부문으로 지칭한 것이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3] 이후 동양화를 다루는 각종 전람회, 회고전, 기획전 등에서 한국화란 용어가 널리 정착되었다.
그리하여 80년대에 이르면 한국에서 탄생한 동양화 전반에 대해 한국화라는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했다. 이런 변화를 잘 알려주는 사례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드러난다. 1978년 국립현대미술관은 기획전에 맞추어 『한국현대미술사 : 동양화』라는 책을 발행했다. 그런데 이 책은 이후 84년 수정 보완되어 재출간할 때 '동양화' 대신 '근대 한국화의 흐름'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약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용어에 큰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1985년 『미술세계』 11월호에 이석구가 기고한 글은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한다. 그는 한국화의 현주소를 진단하며 "한국화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채 몇 년이 되지 않았다." 지적하고, 한국화 논의의 출발점을 청강 김영기의 기고문들과 활동들로 잡았다. 이런 관점은 최근에 와서 몇몇 반론이 제기되기 전까지는 한국화 용어의 기원을 다루는 논의에서 정설로 취급받았다.
정리하면 한국화에 대한 논의는 (김영기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 식민지 시대의 문화의 청산이라는 문제와 맞물려 제기되었고 그것은 1950년대 한국 화단이 당면했던 세 가지 주요한 문제와도 연관되었다. 이후 한국화라는 용어는 1970년대까지 한정적으로 사용되다가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를 거쳐서 동양화단에 정착했다.
3. 쟁점[편집]
3.1. 용어의 모호함[편집]
한국화라는 용어의 탄생배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화라는 용어는 기존의 동양화라는 개념에 대한 반대급부로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미술의 역사를 보았을 때 한국의 회화는 동양의 회화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화는 엄밀히 정의하면 사실 동양화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 그 점은 중국이나 일본이 각기 중국화나 일본화라는 용어를 설정하고 그것의 상위 범주로서 동양화를 설정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한국화의 논의에 있어서 동양화는 한국화라는 용어에 반대해 탄생했고, 용어의 의미를 한국만의 고유한 미술문화를 표현한 회화로 설정했기에 용어의 의미가 모호해진다는 점이 있다. 이 점은 특히 50년대와 70년대 청강 김영기의 한국화 논의에서 동양화라는 용어 사용에 반대하며 "동양화라는 용어를 쓴다는 것은 민족 의식의 주체성이 없다는 표시이고, 민족예술의 특성을 보일만한 풍성이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한국화라는 용어 사용이 더 적절하다"고 지적하는 바람에 문제가 되었다.
3.2. 진정한 한국화란 존재하는가?[편집]
김영기의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화는 민족의식을 드러내고 민족문화의 고유한 특질을 드러내는 동양회화를 지칭한다. 하지만 이런 관점을 한국 동양화단의 역사에 겹쳐볼 경우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김영기의 관점이라면 70년대 한국 동양화단의 젊은 작가들이 전개했던 동양적인 추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화로 분류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서세옥을 기수로 하는 젊은 작가들은 분명 서양식 엥포르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영기의 지적대로라면 70년대 비구상미술을 그렸던 젊은 화가들의 작품은 당대에 그들을 한국화로 불렀던 것과는 달리 서양화로 불러야 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또한 오늘날의 견지에서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분 자체나 너무나도 모호하게 되어 버렸다. 예를 들어 동양화 기법으로 마이클 잭슨을 그리는 손동현은 한국화가인가 현대미술가인가 묻는다면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전통 한국화 기법으로 그리는 것이 한국화인가, 아니면 전통 한국화가 그려온 소재와 주제를 그리는 것이 한국화인가, 그도 아니라면 한국화만의 특징을 드러내 그리는 것이 진정한 한국화인가? 2000년대 이후 동양화단은 매체와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 기존의 전통 회화에 구애받지 않고 서양화와 한국화 심지어 미디어아트를 넘나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론가들과 미술사학자들은 기존의 한국화 용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보는 중.
첫째, 김영기의 관점이라면 70년대 한국 동양화단의 젊은 작가들이 전개했던 동양적인 추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화로 분류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서세옥을 기수로 하는 젊은 작가들은 분명 서양식 엥포르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영기의 지적대로라면 70년대 비구상미술을 그렸던 젊은 화가들의 작품은 당대에 그들을 한국화로 불렀던 것과는 달리 서양화로 불러야 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또한 오늘날의 견지에서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분 자체나 너무나도 모호하게 되어 버렸다. 예를 들어 동양화 기법으로 마이클 잭슨을 그리는 손동현은 한국화가인가 현대미술가인가 묻는다면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전통 한국화 기법으로 그리는 것이 한국화인가, 아니면 전통 한국화가 그려온 소재와 주제를 그리는 것이 한국화인가, 그도 아니라면 한국화만의 특징을 드러내 그리는 것이 진정한 한국화인가? 2000년대 이후 동양화단은 매체와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 기존의 전통 회화에 구애받지 않고 서양화와 한국화 심지어 미디어아트를 넘나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론가들과 미술사학자들은 기존의 한국화 용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보는 중.
4. 특징[편집]
이하의 서술들은 한국화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반의 회화까지도 포괄적으로 해당되는 내용이 많이 있다. 이는 한국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로 먼저 알고 있어야 하는 사안이다.
4.1. 형식적 특징[편집]
4.1.1. 수묵[편집]
서양화와 비교했을 때 동양화에서는 특히 수묵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이 재료의 차이는 외형 면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불러왔는데, 위에 덧그려 수정할 수 있는 유화와 달리 한번 먹이 스며들어 번지면 수정하기가 어려운 수묵화는 그 특성상 꼼꼼히 덧그리는 것보다 일필휘지로 그리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동양의 회화가 붓과 먹으로만 그려지는 것이 아니다 수묵화라 하더라도 채색이 가해지는 경우도 존재하는데 청록산수같은 장르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가을의 산이나 여름의 산을 표현할 때는 담홍색의 안료를 섞어 사용하기도 한다.
4.1.2. 여백[편집]
첫째로 한국화는 여백의 미를 중시한다. 여백을 그저 채워야 할 빈 공간으로 여기는 서양화와 달리, 여백도 또 하나의 공간이라 여기며 그려진 사물이 아닌 그 나머지를 차지한 여백(공기)의 흐름이 작품의 공간을 차지한다고 여긴다. 이 때문에 동양화를 감상할 때에는 그 빈 부분을 생략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하며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안개나 하늘, 구름, 연못, 바다와 같이 형태가 유동적이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물들은 동양화에서는 굳이 그려지지 않고 여백으로 많이 표현되며, 일종의 '자유로운 공간'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생긴 여백에 붓으로 시나 문장을 써넣고, 도장을 찍거나 서명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안개나 하늘, 구름, 연못, 바다와 같이 형태가 유동적이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물들은 동양화에서는 굳이 그려지지 않고 여백으로 많이 표현되며, 일종의 '자유로운 공간'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생긴 여백에 붓으로 시나 문장을 써넣고, 도장을 찍거나 서명하는 경우도 많다.
4.1.3. 다시점[편집]
또한 본래의 서양화가 고정된 초점투시를 사용한다면, 한국화는 여러가지 다시점을 한 작품에 담을 수 있는 산점투시를 사용한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전통적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필요한 부분만을 취해 작품에 반영하는 유모취신, 경영위치의 사상을 간직한 한국화는 산점투시를 이용하여 오히려 초점투시보다 자연스럽고 미학적인 구도를 취할 수 있지만 자칫 남용하게 되면 되게 지저분하고 산만해보인다.
이는 산수화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산수화를 보면 특정 위치에서 보고 그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일점투시도법에 따라 그리는 서양 풍경화와 달리 동양의 화가들은 풍경의 여러 부분을 머릿속에서 조합해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단 산수화만 그런 것은 아니다. 건물을 그린 그림을 봐도 오른쪽 처마는 기와가 보이는데 왼쪽 처마는 밑부분이 보이도록 그린 경우가 있다. 이는 일부러 사물의 여러면을 동시에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그린 것이다. 서양이라면 투시도법을 적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뒷면을 보이지 않게 생략하고 그렸겠지만, 동양은 그러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성곽의 남쪽에 있는 건물들은 일부러 뒤집어 그려 성읍의 중심을 기준으로 방사형으로 배치되게 그리는 등의 모습도 간간히 보인다.[4]
이는 산수화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산수화를 보면 특정 위치에서 보고 그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일점투시도법에 따라 그리는 서양 풍경화와 달리 동양의 화가들은 풍경의 여러 부분을 머릿속에서 조합해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단 산수화만 그런 것은 아니다. 건물을 그린 그림을 봐도 오른쪽 처마는 기와가 보이는데 왼쪽 처마는 밑부분이 보이도록 그린 경우가 있다. 이는 일부러 사물의 여러면을 동시에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그린 것이다. 서양이라면 투시도법을 적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뒷면을 보이지 않게 생략하고 그렸겠지만, 동양은 그러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성곽의 남쪽에 있는 건물들은 일부러 뒤집어 그려 성읍의 중심을 기준으로 방사형으로 배치되게 그리는 등의 모습도 간간히 보인다.[4]
4.2. 개념적 특징[편집]
4.2.1. 육법화론[편집]
중국 남제 때 사혁이 저술한 품평서인 고화품록에 쓰여있는 품평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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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생동 (氣韻生動): 생생한 표현. 운필을 통한 필력이 표현되는 법칙이다. 대상의 형태, 기질, 성격이 생생하게 표현되고 작가의 주관적인 개성과 정신력의 기품이 넘치며 생명력을 표현하는 화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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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법용필 (骨法用筆): 형태의 기본적 묘사. 필치(터치)를 뜻한다. 운필에 의하여 나타나는 형태 속에 골격을 형성시킨다. 이는 변화 많은 먹색의 세밀한 톤과 여백의 표현에 의하여 자아내게 되며, 사물의 배후에 숨어 있는 비법을 포착하는 화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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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물상형 (應物象形): 형태의 사실성. 즉 스케치를 뜻한다. 대상을 직접보고 사실적인 형체를 중시하여 사생하는 것이다. 이는 형태상의 사실, 즉 형상를 위주로 하는 화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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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부채 (隨類賦彩): 색채의 사실성. 대상(對象)의 종류에 따라 그 질과 뜻을 잘 알고 색채를 묘사하는 것을 이른다. 대상의 종류에 따라 색채를 유별하여 칠한다. 색채 뿐만 아니라 먹의 농담표현도 이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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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위치 (經營位置): 구도를 뜻한다. 화면을 살리기 위한 여러 가지 형상의 배치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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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모사 (傳移模寫): 연습을 위해 다른 그림을 배끼는 것을 뜻한다. 묘화의 기법을 수련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화법의 묘사를 통하여 체득하는 것이다.
4.2.2. 서화동원[편집]
글씨와 그림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사상이다. 상형 문자인 한자의 특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애초에 '한자'라는 글자가 그림에서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그림을 잘 그리는 자가 글씨도 잘 쓴다고 여겼으며, 반대도 마찬가지로 글씨를 잘 쓰는 자가 그림도 잘 그린다고 보았다. 그 덕분에 선과 운필, 다시 말하자면 필력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이는 나아가 '시서화 일체'라는 개념이 된다. '시(詩)와 글자(書)와 그림(畵)은 하나'라는 뜻이다. 즉, 문학과 그림은 하나라는 뜻.
이는 나아가 '시서화 일체'라는 개념이 된다. '시(詩)와 글자(書)와 그림(畵)은 하나'라는 뜻이다. 즉, 문학과 그림은 하나라는 뜻.
4.2.3. 사의(寫意)[편집]
서양화는 전통적으로 회화의 주제가 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따서 재현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결과 원근법 같은 개념도 서양에서 처음 출발하여 조선 후기나 되어서야 국내에 전해졌으며, 보여지는 것 그대로를 사생(寫生)한 회화가 잘 그린 회화라는 개념도 동양 미술사에서는 굉장히 희박했다. 이는 매체적으로 동양에서 덧그리기 쉬운 유화보다 수묵화가 발달한 탓도 있지만, 서구 특유의 분석적이고 실증적이며 환원적인 사고방식과 동양의 종합적이고 전체적인 사고방식의 차이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국화를 비롯한 동양화는 대체로 그림 이면의 의미를 표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보통 한국화가 서양화보다 은유적이고 명상적이며 주관적이고 관념적이라 여기는 까닭이 이 때문인데, 한국화는 얼마나 닮게 잘 그렸나를 중시하기보다는 얼마나 그 사람의 생각이나 의중(意中)을 잘 표현했나를 더 중시한다. 이를 보통 사의(寫意)라고 부른다. 똑같은 산을 그리더라도 서양화에서는 재현적인 회화를, 동양화에서는 관념화된 회화를 그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특히 중국 명나라 말의 서화가 겸 이론가인 동기창(董其昌)이 제창한 남종화를 따르는 문인화 쪽에서 이런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5] 사진의 등장 이후 현대미술 또한 재현 메타에서 벗어나 개념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6]
한 예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자. 서양미술의 기준으로 보면 이는 잘 그린 그림이 아니다. 선도 똑바르지 않고, 집 뒷부분이나 입구 방향을 봐도 틀린 원근법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당시 사대부들은 김정희의 그림을 잘 그렸다고 칭찬했는데, 이는 김정희가 유배 생활로 겪는 고통이나 상실감을 잘 표현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인화의 경향은 시서화(詩書畵) 삼절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되는데, 당시 양반들이 그림뿐 아니라 그 그림에 붙는 제시나 글도 중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글과 그림이 의도상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수묵화가 발달하고 그림도 글씨처럼 간략하게 그리는 경향이 나타난 건 이런 영향 탓으로 보인다. 그래서 오늘날 한자로 된 제시는 해석하지 못하고 그림만 보는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의도를 제대로 알 수 없어 감동이 반감되는 경향이 있다.
주의할 점은 이것이 사실적으로 그리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반례로 윤두서 자화상 같은 초상화가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진 것을 들 수 있다. 사실 조선시대 초상화는 거짓없이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오늘날 의사들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무슨 피부질환을 앓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서양 초상화라면 미화해 그리고, 오늘날 현대인이라면 뽀샵질을 했을 흉터나 반점도 그대로 그린 경우가 많다. 원근감이나 양감의 표현 면에서는 몰라도 질감같은 세부 묘사의 표현은 당시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반면 한국화를 비롯한 동양화는 대체로 그림 이면의 의미를 표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보통 한국화가 서양화보다 은유적이고 명상적이며 주관적이고 관념적이라 여기는 까닭이 이 때문인데, 한국화는 얼마나 닮게 잘 그렸나를 중시하기보다는 얼마나 그 사람의 생각이나 의중(意中)을 잘 표현했나를 더 중시한다. 이를 보통 사의(寫意)라고 부른다. 똑같은 산을 그리더라도 서양화에서는 재현적인 회화를, 동양화에서는 관념화된 회화를 그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특히 중국 명나라 말의 서화가 겸 이론가인 동기창(董其昌)이 제창한 남종화를 따르는 문인화 쪽에서 이런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5] 사진의 등장 이후 현대미술 또한 재현 메타에서 벗어나 개념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6]
한 예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자. 서양미술의 기준으로 보면 이는 잘 그린 그림이 아니다. 선도 똑바르지 않고, 집 뒷부분이나 입구 방향을 봐도 틀린 원근법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당시 사대부들은 김정희의 그림을 잘 그렸다고 칭찬했는데, 이는 김정희가 유배 생활로 겪는 고통이나 상실감을 잘 표현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인화의 경향은 시서화(詩書畵) 삼절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되는데, 당시 양반들이 그림뿐 아니라 그 그림에 붙는 제시나 글도 중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글과 그림이 의도상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수묵화가 발달하고 그림도 글씨처럼 간략하게 그리는 경향이 나타난 건 이런 영향 탓으로 보인다. 그래서 오늘날 한자로 된 제시는 해석하지 못하고 그림만 보는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의도를 제대로 알 수 없어 감동이 반감되는 경향이 있다.
주의할 점은 이것이 사실적으로 그리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반례로 윤두서 자화상 같은 초상화가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진 것을 들 수 있다. 사실 조선시대 초상화는 거짓없이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오늘날 의사들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무슨 피부질환을 앓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서양 초상화라면 미화해 그리고, 오늘날 현대인이라면 뽀샵질을 했을 흉터나 반점도 그대로 그린 경우가 많다. 원근감이나 양감의 표현 면에서는 몰라도 질감같은 세부 묘사의 표현은 당시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4.2.4. 동음이의의 활용[편집]
동양화에서는 유독 동음이의를 이용한 도상들이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박쥐가 있는데, 박쥐 복(蝠)자가 복 복(福)자와 동음이의인 것에 착안해 복을 비는 도상으로 많이 애용된 것이 그 예이다.
5. 주요 도상[편집]
5.1. 도석인물[편집]
도교와 불교(석가)의 인물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말한다.
5.2. 십장생[편집]
5.3. 일월오봉도[편집]
해와 달과 다섯 개의 봉우리를 그린 그림으로 왕권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5.4. 사군자[편집]
5.5. 까치와 호랑이[편집]
민화에서 주로 그려진 도상이다. 사실은 호랑이가 아니라 표범이라는 주장도 있다.
6. 주요 기법[편집]
전통적으로 한국화에서 사용되는 도구는 붓과 먹으로 기법 측면에 있어서도 당연히 이 두 도구를 활용하는 기법들이 등장했다. 통칭 필묵기법으로 부르는 한국화의 기법들은 크게 구륵, 준, 염, 점, 경, 중, 질, 서 , 농과 담, 건과 습, 전, 절, 돈, 좌 등이 있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 필묵기법의 구분은 천차만별로 이는 먹의 사용법과 붓의 사용법을 어디까지로 제한하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한국화를 포함한 동양화에 있어서 기법이라는 것은 단순한 기법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동양화의 경우 민화나 일부 회화 장르를 제외하면 문인들이 향유하던 회화들이 오늘날 남아있기에 그 성격에 있어서 정신의 수양이라는 측면이 강하게 들어갔다 이런 생각은 원나라 때 조맹부에 의해서 체계화되고 명대 동기창에 의해서 하나의 법칙으로까지 자리잡으며 이것은 이후 조선이나 일본의 문인화 이론에까지 영향을 준다. 일례로 심전 안중식의 경우 붓과 벼루를 논하면서 "벼루란 단지 붓을 적시는 것이 아니라 먹을 가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먹 갈기의 행위를 일종의 수양 행위로 받아들였던 문인화 정신의 기저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다
6.1. 삼원법: 고원, 심원, 평원[편집]
중국 북송대의 곽희(郭熙)가 정립한 동양 고유의 원근법이다. 이는 산수화를 그릴 때 멀리 있는 산의 모습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서양의 투시도법이나 공기 원근법과 같은 기법에 대응하는 것이다. 한국화를 비롯한 동양화는 다양한 시점을 한 화폭 안에 녹여내는데, 이는 쉽게 말하면 "산을 그릴 때, 산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과 산을 오르며 바라본 모습, 산 정상에서 건너편 산을 내려다 바라보는 모습을 모두 그려야 한다" 고도 할 수 있다. 서양미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당혹스럽기까지 할 정도의 주문이지만, 동양화에서 이는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이다. 그림은 현실을 "재현" 하기 위해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원법이란 "올려다보는 시점" 으로, 높고 청명한 느낌을 위해 뚜렷하고 웅대한 느낌을 주어 표현한다. 평원법이란 "산에서 산을 수평으로 바라보는 시점" 으로, 밝은 느낌과 어두운 느낌을 조화시켜서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심원법이란 "산꼭대기에 서서 산 아래를 굽어 넘겨다보는 시점" 으로, 중첩된 깊이감을 살리기 위해 무겁고 어두운 느낌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러한 삼원법은 국내에서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등에서 잘 반영되는 등 널리 보편화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청나라와의 교류 및 실학사상의 등장과 함께 변화를 맞이하였다. 조선 후기의 여러 작품들을 보면 실제로 서구적인 원근법이 일부 적용되는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김홍도의 《환선정》 에는 공기 원근법이 반영되어 먼 지형지물이 흐릿하고 작게 묘사되어 있고, 화성능행도 중에서도 환어행렬도에서는 사선 방향으로 투시도법이 일부 반영되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강희언의 북궐조무도, 강세황의 개성시가 등의 작품에서는 가히 "현실의 재현" 이라고 평가해도 무방할 정도의 완연한 서구적 투시도법이 적용되었으며, 가까운 건물은 크고 먼 건물은 작게 그려져 있다.
고원법이란 "올려다보는 시점" 으로, 높고 청명한 느낌을 위해 뚜렷하고 웅대한 느낌을 주어 표현한다. 평원법이란 "산에서 산을 수평으로 바라보는 시점" 으로, 밝은 느낌과 어두운 느낌을 조화시켜서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심원법이란 "산꼭대기에 서서 산 아래를 굽어 넘겨다보는 시점" 으로, 중첩된 깊이감을 살리기 위해 무겁고 어두운 느낌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러한 삼원법은 국내에서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등에서 잘 반영되는 등 널리 보편화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청나라와의 교류 및 실학사상의 등장과 함께 변화를 맞이하였다. 조선 후기의 여러 작품들을 보면 실제로 서구적인 원근법이 일부 적용되는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김홍도의 《환선정》 에는 공기 원근법이 반영되어 먼 지형지물이 흐릿하고 작게 묘사되어 있고, 화성능행도 중에서도 환어행렬도에서는 사선 방향으로 투시도법이 일부 반영되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강희언의 북궐조무도, 강세황의 개성시가 등의 작품에서는 가히 "현실의 재현" 이라고 평가해도 무방할 정도의 완연한 서구적 투시도법이 적용되었으며, 가까운 건물은 크고 먼 건물은 작게 그려져 있다.
6.2. 산수화[편집]
6.2.1. 준법[편집]
준법(皴法)이란 말 그대로 산과 절벽을 그릴 때 쓰는 기법들을 말한다. 준법은 그 기원을 쫓아가면 원나라 시대에도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까지 원나라 이전의 회화들을 규정하는 준법들은 모두 명대 이후에 규정된 것들이다.[9] 명말청초 시기 강남 문인 산수의 발달과 더불어 화집이 발행이 빈번해졌는데 이 때 왕개가 편집 인쇄한 『개자원화전』에서 체계화하고 정리한 명칭들이 오늘날까지 수용 발전되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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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준법: 가로로 긴 선을 그어 ㄱ자와 ㄴ 모양의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 일정한 크기의 바위를 나타내는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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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엽준법: 연꽃이파리의 잎맥처럼 바위를 그려 솟아오른 바위의 모양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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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점준법: 빗방울 같은 점을 많이 찍어내서 울퉁불퉁한 바위의 표면을 묘사하는 기법이다. 미점준법과는 다르게 비교적 건조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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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색준법: 헝클어진 노끈처럼 그리는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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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아준법: 말의 이빨처럼 점을 일자로 불규칙적으로 찍어 나타내는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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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두준법: 하얀 구름이 피어오르듯 그린다는 뜻으로 층층이 쌓인 기암들을 표현 할 때 많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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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벽준법: 편필 이라고도 하며 송대 화가 이당이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크게 대부벽준과 소부벽준으로 나눈다. 주로 화층 암석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며 도끼로 찍듯이 그린다는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거친 표면을 연출하는데 사용한다. 남송 당시 마하파의 화가들이 즐겨썼다. 말 그대로 붓으로 찍어누르듯 그린다. 날카로운 벼랑을 그릴때 많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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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골준법: 윤곽을 그리지 않고 붓의 농담만을 이용해 그리는 것이다. 바위의 괴량감을 표현하고자 할때 많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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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마준법: 베를 짜놓은 듯이 그린다는 뜻으로, 먼저 윤곽을 먼저 그린 이후에 몽당붓을 이용해 길이가 길지 않은 선들을 수차례 그린다 이때 담묵에서 심묵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그려준다 오대 시대 화북산수의 대표적 화가인 동원, 거연의 회화에서 빈번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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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점준: 원대 미불, 미우인 부자가 창시한 기법으로 붓끝으로 옅은 농담을 반복적으로 쌓아 횡점을 그려 올려서 산세를 표현하며 전체적으로 습윤한 느낌을 주는데 많이 사용된다. 이후 문인화법으로 정착되어 청말까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6.2.2. 백묘법[편집]
면을 사용하지 않고 선의 굵기에만 차이를 두어 선만을 사용해 그리는 기법. 달마도가 백묘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6.2.3. 구륵법[편집]
윤곽을 칠하고 색을 채워 그리는 기법으로, 채색화에서 많이 사용된다. 그 특성상 주로 북종화 계열에서 많이 사용했다.
6.2.4. 몰골법[편집]
윤곽선 없이 색채 또는 수묵의 농담만으로 물체를 그리는 고테크닉 전법이다. 주로 꽃잎이 넓은 꽃을 그리는데 많이 쓰인다.
6.2.5. 점법[편집]
나뭇잎을 그리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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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자점: 활엽, 낙엽, 죽엽 들을 그릴 때 많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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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엽점: 오동나무, 단풍나무의 잎을 그릴 때 사용하며 간단하게 잎맥 표현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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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숙점: 편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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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엽점: 말 그대로 소나무의 잎을 표현. 파필법이라고도 한다.
6.2.6. 나뭇가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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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각법: 말 그대로 사슴뿔처럼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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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조묘법: 게의 발처럼 날카롭게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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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점법: 일자점을 비스듬히 겹쳐그리기. (침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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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법: 뿌리
6.3. 인물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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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묘: 옷 주름 표현에 사용되며 부러진 갈대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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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선묘: 딱딱하고 변화가 없는 선. 흡사 사인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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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엽묘: 끝은 가늘고, 가운데는 뚱뚱한
종아리선
6.3.1. 공필법[편집]
백묘법이 먹선의 변화를 준다면 이 공필법은 굉장히 세세한 선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다. 윤두서 자화상의 그 수염이 공필법으로 그려진 수염이다.
6.3.2. 백묘법[편집]
6.4. 용묵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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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묵법: 농중담이 한 붓 안에 들어있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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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묵법: 물기가 있는 부분에서 의도적으로 먹을 번지는 표현. 서양의 웻 인 웻 기법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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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투법: 담묵 위에 농묵이 스며드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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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묵법: 먹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겹쳐 그리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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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묵법: 칠한 먹이 마르면 그 위에 덧칠하는 표현. 예나 지금이나 쓰기 힘든 테크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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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묵법: 물맛이 나는 붓을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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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염법: 종이를 적당히 적셔 먹을 사용해서 번지도록 함. 안개를 표현할 때 좋다.
7. 종류[편집]
8. 준비물[편집]
9. 한국화 화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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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관련 정보 참고.
9.1. 삼국시대[편집]
9.1.1. 401년~500년[편집]
9.1.2. 501년~600년[편집]
9.1.3. 901년~1000년[편집]
9.2. 고려시대[편집]
9.2.1. 1001년~1100년[편집]
9.2.2. 1101년~1200년[편집]
9.2.3. 1201년~1300년[편집]
9.2.4. 1301년~1400년[편집]
9.3. 조선시대[편집]
9.3.1. 1401년~1500년[편집]
9.3.2. 1501년~1600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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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金禔, 1524~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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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림(申世霖, 1521-1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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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해(李不害,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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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李正根,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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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효(李崇孝,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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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효(李興孝, 1537-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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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李楨, 1578-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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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李澄, 1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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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암(李巖, 1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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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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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집중(黃執中,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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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윤(李慶胤,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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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윤(李英胤, 1561-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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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립(尹毅立, 1568-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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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립(尹貞立, 1571-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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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몽룡(魚夢龍, 15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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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우(李繼祐, 1573-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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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金明國, 1600-?)
9.3.3. 1601년~1700년[편집]
9.3.4. 1701년~1800년[편집]
9.3.5. 1801년~1900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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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張承業, 1843-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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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蔡龍臣, 1848-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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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安中植, 1861-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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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진(趙錫晉, 1853-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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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영(李道榮, 1885-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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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高羲東, 1886-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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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李象範, 1897-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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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수현(盧壽鉉, 1899-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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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련(許百鍊, 1893-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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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金殷鎬, 1892-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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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복(李漢福, 1897-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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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관식(卞寬植, 1899-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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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호(金觀鎬, 1890-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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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우(李鍾禹, 1899-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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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羅惠錫, 1896-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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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金鍾泰, 1806-1935)
9.4. 일제강점기 이후[편집]
9.4.1. 1901년~2000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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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현(金重鉉, 1901-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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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1904-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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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우(李用雨, 1904-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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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吳之湖, 1905-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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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具本雄, 1906-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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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李仁星, 1912-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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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형구(沈亨求, 1908-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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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李仲燮, 1916-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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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朴壽根, 1914-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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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대정(咸大正, 1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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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옥(朴商玉, 1915-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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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상(李鳳商, 1916-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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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상(李揆祥, 1918-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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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金耕, 1922-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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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鄭圭, 1923-1971)
-
도상봉(都相鳳, 1902-1977)
-
이마동(李馬銅, 1906-1981)
-
김인승(金仁承, 1910-2001)
-
김원(金源, 1912-1994)
-
김재균(金載均, 1952~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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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金煥基, 1913-1974)
-
남관(南寬, 1913-1990)
-
최영림(崔榮林, 1916-1985)
-
유영국(劉永國, 1916-2002)
-
손응성(孫應星, 1916-1979)
-
장욱진(張旭鎭, 1917-1990)
-
김흥수(金興洙, 1919-2014)
-
김영주(金永周, 1920-1995)
-
임직순(任直淳, 1919-1996)
-
이항성(李恒星, 1919-1997)
-
유경채(柳景埰, 1920-1995)
-
손동진(孫東鎭, 1921-2014)
-
권옥연(權玉淵, 1923-2011)
-
변종하(卞鍾夏, 1926-2000)
-
김상유(金相遊, 1926-2002)
-
박서보(朴栖甫, 1931- )(박재홍, 朴在弘)
-
이성자(李聖子, 1918-2009)
-
전성우(全筬雨, 1934- )
-
하종연(河鐘賢, 1935- )
-
이우환(李禹煥, 1936- )
-
배염(裵濂, 1911-1968)
-
박생광(朴生光, 1904-1985)
-
윤형근(尹亨根, 1928- )
-
장우성(張遇聖, 1912-2005)
-
김기창(金基昶, 1913-2001)
-
성재휴(成在烋, 1915-1996)
-
이유태(李惟台, 1916-1999)
-
박래현(朴崍賢, 1921-1976)
-
천경자(千鏡子, 1924-2015)
-
박노수(朴魯壽, 1927-2013)
-
서세옥(徐世鈺, 1929- )
-
김두환(1913-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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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성(1945- )
10. 도움될 만한 참고 자료들[편집]
11.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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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지리 ]⠀
⠀[ 군사 ]⠀
⠀[ 정치 ]⠀
⠀[ 경제 ]⠀
⠀[ 사회 ]⠀
⠀[ 외교 ]⠀
⠀[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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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1] 담징이 그렸다는 호류지 금당벽화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일본 쪽에서는 직접 당에서 전수받은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2] 고려 후기의 화공, 생몰년 미상. 화면 좌우 모서리에 적힌 화기(畵記)에 의하면 봉익대부(奉翊大夫) 겸 좌상시(左常侍)였던 고려의 귀족 염승익(廉承益, ?~1302)이 자신이 임종할 때에 아미타불을 만나 즉시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자회에게 하여금 이 불화를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3] 물론 이러한 변화는 관주도의 전람회가 사단법인인 한국문화진흥협의회로 이관된 탓도 컸다.[4] 조선 초기의 읍 단위 지도나 도성의 지도 참고.[5] 반대로 북종화 계열은 서양미술처럼 사실적인 재현에 치중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화는 고전서양화보다는 오히려 현대회화에 더 가깝다. 물론 북종화 계열의 사실적 표현이라는 것은 자연주의에 입각한 대상의 정확한 재현이라기 보다는 자연의 이상적인 부분을 한데 따와 완벽한 자연을 창조하는 것에 가깝다 더 자세한 것은 중국 미술 참고[6]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현대미술에서 상업미술은 제외된다.[7] 해, 산, 돌, 물, 달 또는 구름, 소나무, 불로초, 사슴, 거북, 학[8] 이를 매난국죽(梅蘭菊竹)이라고 한다.[9] 물론 이렇게 전해진 기법들 중에는 오대, 송나라 시기에도 동일한 명칭을 썼던 것들도 있다[10] 따로 서술[11] 고려시대 후기 문신 이암과 한자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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