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16) '고텐부르크'號 실렸던 차는 '송라차' '무이차'

2023. 3. 5. 00:47차 이야기

[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16) '고텐부르크'號 실렸던 차는 '송라차' '무이차'

200년 만에 인양된 범선 기념茶 만든 `관웨이동`

  • 입력 : 2021.07.01 10:07:06
  • 최종수정 : 2021.09.14 16:07:02
 
 
 
1731년 6월 14일, 스웨덴 동인도회사가 고텐부르크라는 항구 도시에 세워졌다. 1732년부터 1806년까지 스웨덴 동인도회사의 배가 135번 아시아로 떠났다. 이름은 동인도회사였지만 정작 인도에 간 것은 세 번뿐, 나머지는 모두 중국 광저우가 목적지였다. 그들은 배에 목재, 철, 동 등을 싣고 스페인에 가서 팔았고 그다음 중국으로 가서 중국산 자기, 차, 실크 등을 구입한 후 스페인에서 물건값으로 받은 은을 지불했다. 당시 중국은 물건값으로 은만 받았기 때문에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동인도회사에 고텐부르크호라는 이름의 배가 있었다. 이 배는 1745년 1월 11일, 중국 광저우에서 700t의 화물을 싣고 출발했다. 차 366t, 자기 60만점 100t, 실크 19상자, 주석 133t, 진주 3.4t, 등나무 제품 2.3t, 후추 1.8t을 실었다. 이 화물이 스웨덴에 도착하면 당시 스웨덴의 1년 GDP에 해당하는 돈을 고스란히 이익으로 남길 수 있었다.

1745년 9월 12일, 8개월 동안 거친 바다를 건너온 고텐부르크호는 목적지 항구를 900m 남겨 놓고 있었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도착하지 못하고 암초에 부딪혀 침몰했다. 그 와중에 간신히 건져 올린 차 30t, 비단 80필과 자기를 경매에 부친 결과 모든 손실분을 만회하고 14%의 이익이 남았다.

고텐부르크호의 중국 방문에 맞춰 제작한 기념 보이차. 박물관에 전시된 고텐부르크호의 모형.

화물의 3분의 2가 미처 회수되지 못한 고텐부르크호는 바닷속에서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 200여년이 지난 1984년, 고텐부르크호의 잔해가 발견됐다. 10년간 인양이 진행되는 동안 고텐부르크 기금회가 세워지고 1813년 문을 닫았던 스웨덴 동인도회사도 새로 문을 열었다. 그들은 고텐부르크호를 복원하기로 한다. 본래 설계도가 없어서 잔해를 기초로 하고 옛 문헌 등을 참고해가며 옛날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던 범선을 완성했다.

2005년 10월 2일 새로 만들어진 고텐부르크호가 항해를 시작했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들러 최종 목적지인 중국 광저우까지 왔다.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끝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30위안짜리 입장권을 사서 배에 올라 구경을 했다. 경축 행사를 위해 스웨덴 공주까지 등장했다.

관웨이동도 고텐부르크호에 관심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당시 고텐부르크호에서 차가 발견됐다는 보도가 자주 나왔다. 관웨이동은 배가 바닷속에 200년이 넘게 있었는데 차가 바닷물에 쓸려 가거나 썩지 않고 비교적 괜찮은 상태로 발견된 것이 신기했다. 어떻게 차가 남아 있었을까? 그 차는 대체 무슨 차일까?

직접 마셔본 사람도 있었다. 차 전문가 루치이는 그 차를 마시고 소감을 이렇게 썼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바닷물과 진흙에 거의 250년 동안 묻혀 있다 햇빛을 본 차가 썩지 않고 그중 일부는 마실 수도 있다는 것을. 일부를 우려서 몇 모금 마셔봤더니 맛이 싱겁고 약간 톱밥 같은 향이 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맛이 오래갔다.”

어떻게 바닷물이 스며들지 않았던 걸까? 루치이는 포장을 매우 꼼꼼하게 한 덕이라고 설명했다.

“차는 작은 나무 상자에 담겨 있었는데 나무 판 두께가 1㎝ 이상이었다. 상자 안에 검은색 납판을 깔고, 오동나무 기름을 바른 뽕나무 종이를 깔았다. 이렇게 하니 상자 안에 든 차가 산화되지 않고 모양을 유지할 수 있었다. 차의 색은 장아찌처럼 보이지만 모양은 기본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면 가볍디가벼웠는데 대부분 찻잎은 뭉개지거나 표피층이 떨어져 나가 있었지만 나무 상자를 열 때부터 급속히 풍화돼 이런 것 같다.”

녹차의 일종인 ‘송라차’…향기롭고 맛이 맑아…

뉴스를 보던 관웨이동은 배보다 오히려 차에 훨씬 흥미가 생겼다. 그런데 뉴스에 고텐부르크호에 실렸던 것이 무슨 차인지는 나오지 않았다. 알아보려면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스웨덴이 인양 초기인 1986년에 배에서 건진 차의 일부를 중국 측에 전달했고 차는 줄곧 중국다엽박물관에 소장돼 있었다. 다만 대중에게 공개되지는 않았다. 관웨이동이 중국다엽박물관에 연락했다면 그 차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웨이동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배에서 발견된 차가 보이차일 것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보이차는 당시 중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보이차의 가장 큰 특징은 오래돼도 마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매우 드문 일이지만 100년 가까이 된 차가 아직도 남아 있고 경매에서 매우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기도 했다. (최근 베이징 가덕경매에서 오래된 보이차 한 편이 약 3억원에 낙찰됐다. 100년이나 됐다는데 잎 모양이 매우 완전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이차를 ‘마시는 골동품’이라고 부른다.

고텐부르크호는 2006년에 광저우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관웨이동은 고텐부르크호 기념차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기념차는 보통 차보다 시선을 많이 끌고 가격도 비싼 법이니 꽤 좋은 사업이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번개처럼 보이차 회사를 세웠고, 순식간에 보이차를 생산했다. ‘260년 만에 돌아오는 보이차’라고 선전도 많이 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보이차에 ‘고텐부르크호의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때부터 이 보이차는 고텐부르크호의 공식 차가 됐다. 선원들이 오랜 항해 끝에 광저우에 도착했을 때 선물로 받은 것도 이 차였다. 관웨이동은 고텐부르크호 선장을 보이차의 고향 윈난성에 초청해서 홍보에 열을 올렸다. 중국 사람들이 당나라 때 육우가 있었다면 현대에는 이 사람이 있다고 존경하는 차계의 유명 인사 우줴농 이름이 새겨진 카드도 차 상자에 넣었다. 우줴농과 보이차는 전혀 관계가 없고 게다가 이미 여러 해 전에 사망했지만, 관웨이동은 그런 것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언론도 관웨이동의 보이차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바닷속에 200년 넘게 잠겨 있던 보이차가 돌아온다고, 이 일을 계기로 앞으로 보이차가 본격적으로 스웨덴 시장에 진출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공들여 홍보를 한 덕에 관웨이동의 보이차는 비싼 가격에도 잘 팔렸다.

진실은 무엇일까? 고텐부르크호에서 나온 차는 정말 보이차였을까? 그렇지 않다. 고텐부르크호가 광저우를 떠나던 1745년에 보이차는 아직 중국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배에 실렸던 차는 송라차와 무이차였다고 한다. 명나라 때 풍시가라는 사람이 송라차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송라차는 녹차다. 명나라 때부터 이미 인기가 좋은 차였다. ‘대방’이라는 이름의 스님이 장쑤성 호구라는 곳에서 차 만드는 법을 배워 고향 안후이성으로 돌아가 만든 차가 송라차였다. 매우 향기롭고 맛이 맑아서 멀리서도 차를 사기 위해 찾아와 가격이 치솟았다고 한다.”

신정현 죽로재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15호 (2021.06.30~2021.07.06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