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건국 900여년 사실일 가능성 / 역사문 동명님 글

2013. 8. 23. 11:01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구려 건국 900년설 사실일 가능성>


<삼국사기>

    (서기 668년)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사신으로 왔다가 요동으로부터 돌아가니 황제가 “군대 안은 어떠한가?” 하고 물으므로 [그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예전에 선제께서 죄를 물을 때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적이 아직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고구려비기(高句麗秘記)에 900년이 되기 전에 마땅히 팔십(八十) 대장이 멸망시킬 것이다.”고 하였는데, 고씨(高氏)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비기(秘記)란 이인(異人)이나 선지자(先知者)들이 인간의 길흉화복이나 국가의 미래에 관하여 도참사상 및 음양오행설에 의해 행하는 예언적 기록이다. 당나라 시어사 가언충이 황제가 고구려를 상대로 승리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자, 예언적 기록인 고구려비기를 들먹이며 자신감을 가지라는 조언을 하고 있다.

    고구려비기에 고씨(高氏)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었다고 한다. 가언충은 고구려 탄생 시점을 한나라 때라고 분명히 명시하였다. 그런데 계산상으로 한나라는 (기원전 206년)에 건국하였기에, 가언충이 말하는 900년하고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고구려비기의 이런 차이가 오히려 고구려 900년설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기존의 통설은 추모(鄒牟)가 나라를 세운 시기가 (기원전 37년)이었고, 고구려가 패망한 년도가 (서기 668년)이므로 700년설이었다.


    중국사료에 고구려 시조는 추모이며, 한나라 효원제 2년인 (기원전 37년)에 나라를 세웠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여타 문헌기록에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37년)으로 보는 견해는 사실과 부합한다. 따라서 추모를 시조로 하는 고구려는 당연히 700년설이 맞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 건국기에 보면 추모는 원부여 출신으로 두 가지의 건국기록이 존재한다.

    하나는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다만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라고 하여 졸본천이 원부여의 영역이었는지, 아니면 구려족이라 불리우는 예맥족 영역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주몽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라고 하여 추모가 정착한 곳이 졸본부여 지역임을 알수가 있다.


    추모가 처음 정착한 곳이 졸본부여국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추모는 그 이듬해에 비류국왕 송양의 항복을 받았고, (기원전 34년)에 비로소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추모가 졸본부여의 왕이라면, 별도의 성곽과 궁실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추모가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한 까닭을 알아낸다면, 고구려 건국 900년설을 입증할 수가 있다.

    먼저 추모 출신지인 부여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기 화식열전>에 “연국(燕國)은 북쪽으로 오환과 부여와 이웃하고 동쪽으로 예맥조선진번(穢貉朝鮮眞番)의 이익을 관장한다.”라고 하여 부여의 존재는 연나라가 멸망하기 전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왕충은 사물의 경중을 가려 서술하고 참과 거짓의 표준을 세우기 위하여 논형(論衡)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옛 성인들이 알을 깨고 나왔다는 등의 기록은 모두 거짓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왕충이 부여의 시조로 동명왕을 언급하고 있다.


    부여가 존재하던 시기는 연나라가 멸망하기 전이라 했으니, (기원전 230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임을 알 수가 있다. 부여와 함께 수록된 종족을 보면 예맥, 조선, 진번 등이 있다. 이들 종족들이 할거하던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뭔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진(秦)나라가 중화 제족들을 통일할 당시에 북쪽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 옛날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의 유망민과 오르도스 지역의 의거(義渠) 융(戎)을 통합한 흉노선우 묵특이 남진하고 있었으며, 그 동쪽에는 동호(東胡), 즉 맥(貊)의 제족들이 내몽고 및 서만주 일대에 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사기 자서(自序)>에 “연나라 태자 단(丹)이 진(秦)에 쫓겨 요동으로 달아난 틈을 이용하여, 만(滿)은 그 유민들을 수습하여 해동으로 데리고 가서 진번(眞番) 등의 땅을 안정시키고 한(漢)나라 황실의 외번을 지키는 외신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만(滿)이 조선으로 망명하기 이전에 맥(貊)족인 진번(眞番)에 정착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시기는 흉노가 맥족을 공격하기 이전이었다.


    (기원전 209년) 진나라에서 어양(漁陽)을 수비하라는 명령에 불복한 진섭과 항적이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ㆍ제(齊)ㆍ조(趙)의 수많은 백성들은 조선왕 준(準)에게 귀화하였다. 진나라를 멸망시킨 한(漢)나라는 노관을 연왕(燕王)으로 삼고 조선과 진번 등 맥의 제족(諸族)들과 관계개선을 도모한다.

    사마천은 “만맥(蠻貊)의 무리들에게 원조를 청해 날이 갈수록 황실과 소원해져 스스로 화를 불러들였다.”라고 노관을 비난하였다.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노관은 만(滿)이 정착하고 있었던 진번에게 군사협조를 구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앞서 부여와 함께 수록된 종족들 중에 조선을 제외하고 진번이 맥족들의 중심지역이 아닌가 싶다. 중국사료나 삼국사기의 기록에 소수맥(小水貊) 및 양맥(梁貊)의 존재는 맥족의 이동설을 뒷 받침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번을 비롯하여 맥족은 어느 시기에 이동하였던 것일까? 그 시기는 만(滿)이 조선왕 준(準)을 몰아낸 이후 일 것이다. 만(滿)과 진번이 그 이후 어떠한 상황을 연출했는지 자세하지 않지만, 진번 등이 동북쪽으로 이동하였을 개연성이 크다.


<한서(漢書)>

    한 무제(漢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년) 여름에 조선이 항복하자 그 지역에 낙랑(樂浪)치소(治所)는 조선현(朝鮮縣)이다. 임둔(臨屯)치소는 동이현(東暆縣)이다. 현도(玄菟)치소는 옥저성(沃沮城)이며 뒤에 구려(句麗)로 옮겼다. 진번(眞番)치소는 삽현(霅縣)이다. 등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한나라가 우거(右渠)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강역에 사군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현도의 치소는 옥저성(沃沮城)이며 뒤에 구려(句麗)로 옮겼다고 했는데, 여기서 구려가 등장한다.

    <한서 지리지> 현도군조에 응소는 “故眞番朝鮮胡國”이라고 주석(註釋)하였다.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진번과 조선은 “호국(胡國)”이라고 풀이하는 것이 순리에 맞을 듯 하다. 또한 응소는 고구려현에 대해서 “구려호(句麗胡)”라고 주석하였는데, 이러한 해석은 진번과 구려(句麗)에 호(胡)자를 붙임으로써 동호(東胡) 즉, 맥족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원전 108년)에 구려라는 종족이 있었고, 구려는 맥족의 별종이라는 것이다. (기원전 108년)경의 구려를 고구려의 전신으로 생각하여 고구려 건국 800년설을 주장하는 아래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자.


<삼국사기>

   함형(咸亨) 원년 경오(670)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 왕은 고구려 후계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리노라. 공(公)의 태조 중모왕(中牟王)은 덕을 북산(北山)에 쌓고 공을 남해(南海)에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를 덮었다. 자손이 서로 잇고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며 땅은 천리를 개척하였고 햇수는 장차 800년이나 되려 하였다.


    신라인들이 인식하는 고구려 건국은 800년이었다. 현도군이 옥저성에서 구려족 인근으로 옮긴 이유는 후한서에 따르면, 이맥(夷貊)족들의 침략이라고 한다. 이 당시를 한서(漢書)와 동명왕편을 바탕으로 재구성 해본다.

    구려족인 해모수는 (기원전 82년) 진번군을 공격하여 멸한 공로로 원부여로부터 왕족에 준하는 칭호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해모수는 해부루왕이 금와(金蛙)를 양자로 입적하여 태자(太子)로 삼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있는 왕족들과 결탁하여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다. 이에 해부루왕과 가신들은 금와의 본거지로 도읍을 옮긴다. 원부여를 장악한 해모수는 왕권강화를 위해 토착세력의 하나인 하백(河伯)과의 정략결혼을 추진한다. <동명왕편>에는 하백(河伯)과의 혼인과정을 신화적으로 표현하였지만, 유화(柳花)는 해모수의 정식 왕비로 책봉된 것이다. 동부여에서 해부루왕이 죽고 금와가 왕위에 오른다. 해모수에 대해 좋지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던 금와왕은 원부여 왕족들을 포섭하고, 드디어 원부여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때 해모수는 사망했으며, 유화는 태백산(太伯山) 남쪽 행인국(荇人國)으로 도망간다. 그러나 관리에게 발견되어 금와왕에게 붙잡힌다. (기원전 57년) 추모(鄒牟)가 부여(夫餘) 왕실에서 태어났다.


    해모수는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의 아버지이다. 추모왕이 국호를 고구려라 했으니, 부여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맥족의 별종인 구려족의 명칭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신라의 사관들은 이러한 근거로 고구려 건국 800년설을 기록하였던 것이고, 가언충은 구려족의 전신인 예맥족과 진번 등이 존재하던 (기원전 230년)을 기준으로 삼아 고구려 건국 900년설을 주장한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기존의 통설에서 주장하는 고구려 건국 700년설은, 단지 추모가 나라를 세운 시기로부터 기준점을 잡은 것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