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연죽장 전수조교 황기조 님

2013. 9. 23. 07:18잡주머니

 

 

 

 

 

      

합금부터 세공까지, 오로지 손길이 만드는 작품

    남원에 위치한 백동연죽장 전수회관을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면에 늘어선 담뱃대 작품들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속 한켠 작게 자리한 담배에 대한 향수가 떠올랐다. 햇볕 창창한 시골 마을, 마루에 앉은 할아버지가 기다란 담뱃대를 물고 계시는 모습. 안개 같은 담배연기가 이따금씩 피어오르던 풍경. 이렇듯 담뱃대는 지난날에 대한 향수와 장인의 손길이 어울려 예술작품으로서의 하모니를 만들어 가고 있다.

    “백동연죽을 알기 위해서는 제작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백동연죽은 얼핏 보면 굉장히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하면 여러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이 합금기술이지요. 그 외에도 무늬를 새겨 넣기 위한 고도의 세공기술을 요해요.”

   백동연죽의 아름다움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할 만한 것이 바로 고도의 합금기술 속에서 탄생하는 청아한 빛이다. 금속 부분인 대꼬바리와 물부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금, 은, 구리, 아연, 니켈, 주석을 합금하는데 그 비율에 따라서 빛이 천차만별 달라진다.

   “합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백색의 발현이 달라지는 것이죠. 가장 좋은 색깔을 말하자면 완전한 백색을 최고로 치지는 않아요. 약하게 노란빛이 감돌아야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꼬바리와 물부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1200℃가 넘는 화덕 속에 금속을 넣어 쇳물을 만들고, 만들어진 쇠막대기를 망치로 쳐 두드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귓가를 쨍쨍하게 울리는 망치소리가 거듭되고 또 거듭되어야만 비로소 작품을 만들 바탕이 마련되는 것이다. 오롯한 담뱃대가 나오기 위한 수많은 과정들 속에 깃든 공력. 담배문화가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 담뱃대가 여전히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데에는, 시간과 땀으로 오랜 시간동안 이어진 지극한 손길이 있기에 가능하다.

 

 

 


5대째 이어지는 삶과 전통

    “사실 이 길을 걷게 되면 넉넉히 살게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지요. 하지만 가업을 잇는다는 것에 전혀 의구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2대였던 제 할아버지는 담뱃대 행상을 하며 품 안에는 태극기를 지니고 3.1 독립운동을 하셨어요. 일제의 총탄에 가슴을 맞아 7일 만에 순국하셨고, 건국훈장애국장을 수여받으셨지요.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제 아버지가 대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셨고, 아들도 가업을 이어 이제 5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책임감이나 자부심만으로는 외길을 걷기 힘들어진 현실. 그래서 몇 백년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업業의 힘이 놀랍다. 담배에 대한 인식이 달랐던 그 옛날. 대꼬바리 100개를 만드는 데 20일 정도가 걸렸다. 그것만 있으면 송아지 한마리를 살 수 있었다. 가내공업으로서는 필터담배가 보급되기 전인 196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필터담배가 들어오면서 담뱃대는 점점 사양길로 접어들었죠. 어떤 마을에서는 가구 100호 중에 70호가 담뱃대를 만들었을 만큼 엄청난 가내공업이었는데 말이죠. 이제 담뱃대는 생활용품이 아닌 전통공예작품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백동연죽의 맥을 이어나가고 싶어요. 오로지 전통기술만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기쁨이 우리 후손들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새로운 방식을 통한 담뱃대의 대중화, 그는 끊임없이 꿈꾼다

    건강을 지키기 위한 금연운동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그렇다면 백동연죽의 미래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선조의 손길이 남아 있는 전통문화라 한다 해도, 사람들의 수요가 없다면 그 미래가 불투명할 수밖에 없을 터.

    “앞으로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담뱃대를 더욱 대중화하는 일입니다. 담뱃대가 생활필수품이 아니기 때문에,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고안해낸 것이 한약재 20가지를 담뱃대에 넣어 불은 안 피우고 향과 수분만 흡입하여 폐, 기관지, 간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습니다. 먹는 약이나 주사를 이용하는 것보다 향으로 인체에 흡입했을 때 효능이 더욱 좋거든요. 끊임없이 연구한 결과, 특허청에서 특허를 받게 되었습니다.”

   백동연죽의 또다른 묘미는 바로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 넣은 세공기술이 아닐까. 오동(금, 구리)를 가지고 황새, 솔잎, 용, 학 등의 무늬를 새긴다. 이 과정에도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 백동연죽은 현대화와 대중화의 길 앞에 놓여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용도는 변화하겠지만, 생김은 과거나 지금, 그리고 미래까지도 고유하게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 백동연죽의 진짜 미래가 아닐까.

   “아버지께 이 기술을 전수받으면서 마찰도 있었어요. 전통 그대로를 전하고자 하는 고집과 부딪힌 것이지요. 그것 또한 중요한 부분이지만, 저는 담뱃대가 전통에만 머물지 않고 현대의 사람과도 교감할 수 있기를 바라요. 다양한 기법을 가지고 도전해서 새로운 작품, 그리고 제품을 만들고 싶어요.”



 

글·박세란 사진·이대영

 

 

 

                                                                                       다음 카페 <무등산닷컴>   茶泉 님의 글 중에서

 

 

 

*** 부친은 중요무형문화재 65호인 황영보(1932년 11월 21일생) 님......... , 전북 남원시 왕정동 532번지 전수관 거주

          백동담뱃대 가격 : 상감 400~500만원,  민대(무늬가 없는 것) 100만원 대

 

          백동 합금 : 구리 58%, 니켈 37%, 아연 5%

 

 

 

*** 백동연죽장 / 다음백과사전

 

        서유구의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에서는 "사치를 다투는 자들이 백동과 오동(烏銅)으로 담뱃대를 만들고 금은으로 치장함으로써 담뱃대 한 개에 이삼백 전까지 하니 막대한 재물의 손상이다"라고 했으며, 〈경도잡지〉에서는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말 잔등에 담뱃대와 담뱃갑을 지니고 다녔다고 하고 있어 담뱃갑이나 담뱃대가 남성들의 중요한 치레용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부 계층에서는 오동이나 순은·금은입사·칠보 등으로 호화롭게 장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담뱃대는 물부리와 담배꼬바리, 그리고 그것을 잇는 가는 설대로 구성되어 있다. 물부리란 담뱃대 끝부분으로 입에 대고 연기를 빨아들이는 부분이며, 담배꼬바리는 담배를 태우는 곳이다. 이 두 부분에 백동을 사용하고, 설대는 낙죽(烙竹)이나 각죽(刻竹)한 것을 상품으로 쳤다. 제작방법은 용해된 쇳물을 길이 8cm, 너비 2cm, 두께 0.5cm 가량의 골판에 부어 식힌 다음 두드려 얇은 판을 만들고, 두께가 1㎜ 정도 되면 한 감씩 작두로 잘라 다시 0.7~0.8㎜ 두께로 두드려 조정한다. 속이 빈 관을 만들기 위해 처음에는 V자로, 다음에는 L자, 만곡의 순으로 두드려 가며 끝이 서로 맞닿으면 붕사를 바르고 황동으로 땜질해 붙인다. 그 표면에 구리·금(진오동)·은(가오동)을 합금한 오동을 상감하여 갖가지 문양을 넣는다. 마지막으로 담배꼬바리와 물부리 사이를 설대로 연결하면 완성된다. 설대는 무늬가 없는 것은 민죽, 무늬가 있는 것은 꽃대 또는 별죽(別竹)이라 하며, 꽃대는 또한 토리에 사용한 무늬에 따라 송학죽·매화죽·용문죽·태극죽 등으로 부른다. 명산지로는 울산·마산·김천·남원·신해인·임실·안성 등이며, 1980년에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의 추옥판(秋玉判, 1991 해제)을 기능보유자로 지정한 바 있으나 작고하였으며 현재에는 황영보(黃永保)가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