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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동연죽장 황영보 선생은'온고지신'이란 말처럼 옛 것에서 새로움이 탄생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옛 것을 귀중하게 여기고 전통에 대한 애착과 관심을 더 많이 갖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안봉주기자 bjah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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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대는 한자어로 연죽(煙竹)이다. 백동(白銅)은 구리 합금의 일종인데 니켈이 들어가 흰 빛을 띤다. 검은 빛을 띠는 것은 오동(烏銅)이다. 백동연죽(白銅煙竹)은 동(銅)에 금, 은, 아연 등을 합금 처리해 전통적인 수공 기법으로 만든 담뱃대이다. 남원의 담뱃대는 예부터 전국에서 명성이 제일 높았다. 남원에서 전통적으로 제작돼 왔던 담뱃대가 오동상감(烏銅象嵌) 송학죽이다. 죽전(竹田) 황영보(黃永保·80) 선생이 그 기능보유자다. 지난 93년 무형문화재 65호로 지정됐다.
그가 살고 있는 남원시 왕정동 강정몰 마을에서는 70여 가구중 50여 가구가 담뱃대를 제작하며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번성했지만 이젠 전국적으로도 담뱃대를 제작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유일하게 그가 명맥을 잇고 있다. 그는 대대로 담뱃대를 만든 집안 출신이다. 3대째다.
그의 할아버지 황찬서(黃贊西) 선생은 1991년 애국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다. 담뱃대를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도 했다.
광복 67주년을 맞은 지난 15일 백동연죽장 황영보 선생을 찾았다. 과거에 언론에도 가끔 등장했지만 최근에는 뜸한 터였다. 남원 춘향테마파크에 있는 백동연죽전수관에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전수관이라고 해서 어느 정도 이름에 걸맞는, 그럴듯한 공간을 상상했는데 실망스러울 정도로 초라했다. 백동연죽 전수조교인 그의 아들 기조(51)씨가 4대째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인터뷰 자리에 배석해 얘기를 거들어 주었다.
-요즘도 백동연죽 제작을 활발히 하십니까.
"옛날에는 어려운 것은 내가 하고 쉬운 건 전수조교(아들)한테 맡겼는데 거꾸로 됐어. 이젠 나이가 들어 쉬운 건 내가 하고 어려운 건 아들이 해."
-말씀이 약간 어눌하시군요.
"8년전 풍을 맞았어. 식사하다 쓰러졌는데 말 하는 게 자연스럽지가 않아. 다른 데는 이상이 없고…"
-지금도 전시회 등은 꾸준히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지난 4월과 5월에 기획행사를 열었고 연 네차례 복지관을 찾아 '찾아가는 전시회'도 열고 있어."
-맨 처음 담뱃대를 만들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열다섯살 때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아버지가 권유해서 했지."
-당시 기술 전수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버지 어깨 너머로 배우기도 했고 나중엔 기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일을 잘못 할 때는 (나한테)공구를 던지기도 했지. 한 우물을 파면 성공해. 지금도 자식들한테는 한 우물을 파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어."
-아버지가 무서운 분이셨나 봅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위엄이 있었지. 동네에서는 호랑이 할아버지로 불렸어."
-그동안 돈 좀 벌었습니까.
"당시엔 담뱃대가 없어서 못 팔았지. 6·25 무렵 다른 사람이 만든 건 1500원씩이었는데 내가 만든 건 2500원씩 받았어. 내 제품이 최고였지. 돈도 벌었어. 한 4∼5억 벌었는데 이젠 다 자식들한테 나누어줬어. 내가 가진 것은 1000만원도 안돼."
-나이 들면 돈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들 하던데 왜 일찌감치 나누어 주셨습니까.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갖고 있으면 뭐해."
-만드신 담뱃대를 당시엔 어떤 경로를 통해 팔았나요.
"나는 만들고 각시(아내)가 내다 팔았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매처에 팔았어. 팔아 오라고 일 많이 시켰어. 여자 몸으로 참으로 고생 많이 했지."
-무형문화재가 되셨는데 타고난 소질이 있었던가 봐요.
"매년 무슨 무슨 대회에서 수상하다 보니 기록이 쌓이고 한 우물을 파게 된 거지. 임실의 추오판 선생이 기능 보유자였는데 아들까지 작고하는 바람에 유일하게 조명을 받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거지."
-지금 만드시는 백동연죽은 얼마에 팔리나요.
"대왕죽(상품)은 600만원, 송학죽은 500만원, 민죽은 100만원씩 하지."
민죽이란 아무런 문양 없이 백동으로만 만든 일반 담뱃대다. 서민이 주로 이용하던 저렴한 것이었다. 부산 마산 안성 울산 광주 등 담뱃대를 만드는 곳이 여럿이었지만 전라도 지역에서는 남원이 그 중심이었다. 민죽은 3일이면 만들 수 있지만 송학죽은 일주일, 대왕죽은 보름이 걸릴 정도로 금속 세공에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담뱃대가 지체와 신분을 상징하는 수단이자 사치품이기도 했다. 60년대 궐련이 나오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굉장히 비싼데 수요는 좀 있습니까.
"거의 없어. 문화재청이 인간문화재 지원 차원에서 몇개씩 구입하는 정도야."
-백동연죽의 핵심 기술은 무엇입니까.
"백동은 계속 두드리면 깨져버리기 때문에 불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면서 두드려야 해. 수만번 손길이 가야 하는 것이라 고생이 많아. 6∼7일 걸려 하나가 만들어지는데 핵심 기술은 수 놓는 것이야. 솔잎·매화·학·용 등의 문양을 새길 때 오동상감기법으로 수를 놓는데 이 기술이 어려워."
황영보 선생은 오동(烏銅)의 배합법이 특이하고 설대(담뱃대의 몸통 부분)를 끼워넣는 배토리 부분에 봉황과 솔잎, 매화, 학 등의 문양을 상감기법으로 새겨 넣는 기술이 뛰어나다. 연죽은 민 담뱃대와 오동상감 담뱃대로 나뉘는데 오동상감 연죽은 불 인두로 소나무와 학 등의 낙화(烙畵)를 넣어 만든 제품이다. 이 전통적 연죽 제작 기능이 원형 그대로 4대째 전수되고 있다. 그의 아들인 전수조교한테 물었다.
-담뱃대가 이미 사양길이고 팔리지 않는 제품을 만드는 건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뭔가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행안부에서 명품 담뱃대를 생산하기 위해 디자인 개발에 들어가 있습니다. 성공할려면 휴대용으로 소지할 수 있어야 하고 멋스러움이 있어야 해요. 이런 제품이 올해 생산되고 내년부터 홍보에 들어갈 겁니다."
-외국인에게는 담뱃대와 갓, 호랑이민화가 한국을 상징하는 3대 전통공예품인데 저렴한 비용의 선물용 담뱃대가 개발된다면 수요가 있지 않을까요.
"다양한 형태의 모델이 개발중에 있어요. 20∼30㎝ 길이의 휴대용 담뱃대에다 한약재나 향신료를 넣어 들이 마실 수 있도록 고안된 것도 있어요. 건강이 좋지 않는 분들이 담뱃대로 한약 성분을 흡입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연구개발 중에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기술을 전수받으려 하는 경우는 없나요.
"없어요. 체험활동은 합니다만."
-오늘이 광복절이기도 하고 해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할아버지 얘기로 화제를 돌려볼까요. 황 선생님의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담뱃대를 제작하면서도 태극기를 갖고 다니셨어. 담뱃대 판 돈을 가방에 넣어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도 했지."
-일본 순사 총탄에 순절하셨는데 어떤 운동을 하시다 변을 당하셨나요.
"기미 독립만세운동의 해였어. 4월4일이 남원장인데 이날 임실 순창 곡성 등에서 1000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어. 독립만세 함성이 들끓자 일본 헌병대와 수비대가 감당을 못하고 무차별 총을 쏘아댔지. 다섯명이 현장에서 사망을 했어. 할아버지는 사격을 하던 왜경 수비대에 달려들어 총을 빼앗으려 격투를 하다 옆에 있던 수비대 총탄에 맞았어. 전주에 있는 자혜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입원 9일만에 숨을 거두었어. 당시 할아버지 나이 47세였고 장례는 동민장(洞民葬)으로 치러졌어."
-항일정신이 투철한 분이셨는가 봐요.
"남원에도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일본인들은 터를 잡기만 하면 잘 사는데 우리 주민들은 가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을 항상 못마땅해 하셨다고 해. 과감하게 항일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일본상품 불매운동, 일본인 돈 안 꾸어쓰기, 세금 안내기 운동, 일본인에게 땅 안팔기 운동 등을 벌였어. 일본인에겐 눈엣가시여서 헌병대에 고발당하기도 하고 두차례에 걸쳐 헌병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구금되기도 했어."
-70여년 동안 쇠를 두드리며 외길 인생을 사셨는데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후회는 없어. 그런데 밥벌이가 안돼. 인간문화재라고 해서 다른 일은 못하게 하고 밥벌이는 안되고…. 이것이 문제지 다른 건 없어."
-스스로를 한마디로 표현하신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 '담뱃대 왕'이야. 우리나라에서 최고 아름다운 댐뱃대를 만들었으니까."
-아들이 기능을 전수하고 있는데 만족하십니까.
"공무원 하면 월 몇백만원씩 버는데 쥐꼬리만한 돈으로 잘 이어갈까 걱정스러워. 계속 할지 모르겠어."
-백동연죽전시관이 이렇게 비좁고 초라한 줄 몰랐습니다.
"30평인데 너무 비좁아요.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 전수관에서 기거를 해야 원칙인데 그런 공간도 없어요. 겨우 작업장 하나 있는데 불편하기가 이를 데 없지요. 문화재청에 기거할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아들 기조씨가 거들었다. 백동연죽전수관은 국비와 지방비 2억원을 들여 1997년 10월 남원관광단지 내에 지어졌다. 연죽 제작과정을 담은 사진 액자와 연죽들이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있을 만큼 협소하다.
-가족들이 이 분야에 모두 헌신하고 있는데 자치단체나 정부 차원의 관심은 어떻습니까.
"문화재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있어요. 잘 나가는, 인기 있는 무형문화재는 종업원을 수십명씩 두고 일하기도 합니다. 스포츠로 따지면 비인기 종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비인기 문화재라 힘들고 외로워요. 비인기 분야에도 정부가 많은 관심을 갖고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가장 시급한 현안은 무엇입니까.
"아까 말한 기거할 공간을 전수관 부지 안에 만들어 주는 것이겠지요. 사업비가 약 2억원 정도 된다던데….문화재청에 요구해 놓고 있어요."
-전통문화 보존을 위해 보완할 부분이나 절실한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온고지신이란 말처럼 옛 것에서 새로움이 탄생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옛 것을 귀중하게 여기고 전통에 관심을 가졌으면 해요. 문화재에 대한 애착과 관심도 더 많이 갖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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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동연죽전수관에서 황영보 선생이 만든 담뱃대를 본보 이경재 선임기자에게 제작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