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5. 00:12ㆍ나의 이야기
아답파가 성서의 아담의 원형으로 의심받는 것과 꼭같이 이브의 원형도 수메르사에서는 발견이 된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엔키두와 삼헽은 늘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삼헽을 이브의 원형으로 보기에는 근거가 약하나 수메르 신화에서 "갈빗대의 부인" 닌티는 이브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제신에게
인간적인 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슈메르인들은 그들사이에서 발견한 분쟁들을 그들 신들에게 고안하여 부여했다. 슈메르 승려들은 가축의 신 Lahar와 그의 누이동생 곡물의 여신 Ashnan간의 한 분쟁에 관하여 적었다. 어떤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신들도 심심하고 허탈했었는데 그래서 찬양되고져 바랬다.두 동기간인 신들 개개가 자기 자신 그리고 그녀 자신의 업적들을 과장했으나 다른이의 공로는 축소했다.
슈메르인들은 작은 신들인 Emesh(여름)와 그의 동생Enten(겨울)사이에 벌어졌던 또다른 분쟁을 ‘알고 있었다’ 이들 형제 각자가 마치 카인이 農夫고 그리고 아벨이 牧童이었듯이 창조에 있어서 특수한 책임들을 지녔었다.
신 엔닐은 Emesh에게 家屋들이나 寺院들,도시들을 건설하는데에 쓰이는 나무들을 길러내고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임무들을 맡겼다. 엔닐은 Enten에게는 암양으로 하여금 양들을 잉태하게하며,염소들에게 새끼를, 새들에게 보금자리를 짓고, 물고기들에게 그들의 알을 낳게 그리고 나무들에는 과일을 열리도록 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런데 Emesh가 農夫의 신이 되고져 하여 Enten에게 挑戰했으므로 둘이는 매우 격하게 다투게 되었다.
신 엔키와 그리고 모신 Ninhursag--아마 원래부터 地球 여신Ki사이에 역시 분쟁이 있었다.
Ninhursag은 신성한 정원에서 여들 식물들이 발아하도록 했고, 식물들은 Enki가 아버지인 여신들의 3대로부터 창조 되었다. 이들 여신들은 “고통이나 辛苦없이”탄생이 되었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때 Enki가 Ninhursag이 키운 식물들을 먹자 분쟁이 벌어졌다.
Ninhursag은 격한 노염으로 반응해,그녀는 엔키에게 죽음의 저주를 선언했다.
그러자 엔키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엔키 몸뚱이의 여덟 부위들-그가 먹었던 여덟 식물들의 하나하나에 한 부위씩- 병이 발생했으니 그들중 한 부위가 그의 갈빗대이었다.
그때 여신 Ninhursag은 그에게 나린 죽음의 선고를 바꿀 동정심을 보이지 않고 사라져 버렷지만 드디어 마음이 누그러져서 돌아와 엔키를 치료한다. 그녀는 8명의 醫神들을 창조했는데-그에 8명의 여신들을 더 창조하니- 엔키의 앓고 있는 신체 각 부위에 한명씩을 창조한 것이다.
엔키의 갈빗대를 치료했던 여신은 Nin-ti이었고, 슈메르어로 “갈빗대의 부인”이란 이름이었으며,
수세기후에 히브리 저서들에서는 다른 역할로 나타나는 그러니까 Eve라고 불린 한 인물로 묘사가 되고 있다.
길가메쉬 서사시에 보이는 아담과 하와의 원형
길가미시의 이야기는 니네베 나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던 12장 점토서판 한 시리즈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 시리즈의 열 한 번째가 홍수전설을 담고 있었다.
한 諸王名列表에 의하면, 길가미쉬는 에레흐(Erech)에서 다스린 한 수메르 王朝의 5번째 왕이었고,그는126년을 통치 한다.(Gadd,Early Dynasties of Sumer and Akkad,London,1921,Page36) 그의 공적들을 적고 있는 점토서판들의 내용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길가미쉬는 偉大하고 賢明했으며 배운 게 많은 왕이었으며 ,대홍수 이전의 역사에 정통하고 있었다. 그는 위대한 여행가 이었고 ,英雄이었으며 한 石碑에 묘사된 그의 행적들의 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에레흐의 거대한 성벽들을 세웠고 에-아나(E-Anna)사원을 세웠다. 그는 반신반인인 인물로서 그의 2/3는 신인가 하면, 1/3은 인간인 존재였다. 백성들은 그가 지운 重課稅(corvee)의 괴로움을 면하고져 신께 그들을 해방시킬 자를 보내 달라고 탄원한다.
According to a fragment of the epic in Hittite, Gilgamesh was of gigantic proportions; his height was about sixteen feet and his chest measurement in proportion (49). As the story begins Gilgamesh, likened to a wild bull, and described as the shepherd of Uruk, is acting oppressively towards his fellow-citizens.
신들이 여신 아루루에게 명해 한사람을 창조하게 한다.
여신은 손을 씻고,점토를 쥐고 거기에 침을 뱉어 한 사내를 만들고 머리카락을 덮었다. 그는 짐승들과 어울려 숲에서 살았는데, 그들을 강력한 체격과 완력으로 지배한다.그는 엔키두라고 불리었다. 이전에는 이 이름은 에아바니라고 읽었다.
길가미쉬가 그의 소문을 듣게 되자,숲으로 한 婦人을 보냈는데 그녀가 그를 에레흐로 유혹하여 다려왔고,그곳에서 그와 길가미쉬는 막역한 親舊가 되었다.
우르의 아브라함이 하란을 지나 가나안으로 간것은 기원전 18세기, 그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전승으로 듣고 있었을 것이다. 구약의 창세기는 바빌로니아의 전승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스라엘의 민족사 자체가 생기기도 전에 바빌로니아에서는 이천년전의 인물의 설화속에서 흙에 침을 뱃어서 인간을 만들고 있다.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오는 대홍수
그 설화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는 정확히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설화가 슈메르인들이 저지메소포타미아에서 살고 있었던 원래의 토착 주민들을 압도하기 이전에 존재하여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슈메르인 필경자들이 오랜 그 지역 고유의 한가지 설화를 취급하고 있는가 하면
바빌로니아인들은 다른 설화를 ,그리고 히브리인은 또 다른 설화를 취하고 있어서 그 홍수설화의 상치설들은 제3 기원전 밀레니움 시기에는 슈메르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 사이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다.
샤일(Scheil)은 함무라비 통치기의 일자가 있는 한 점토서판에 바빌로니아 홍수설의 일부가 적힌 텍스트(Recueilde Travaux,vol.xx pages 35ff.)를 출판했고 푀벨(poebel)은 기원전 2000년 무렵의 아미사두가(Ammisaduga) 통치하에 쓰인 한 슈메르 홍수설화(Hist.Texts and Hist. and gram. Texts,philadelphia,1914)의 한 부분을 편찬, 번역했다.
이러한 텍스트들을 기록한 筆耕者들은 洪水說(홍수 說話)을 創案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典範(原型Archetypes)들을 카피했음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이들이 얼마나 오랜 것인지 그 누구도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의 가장 단순한 형태로 설화는 그 地域에 억수같은 비로 동시에 일어났던 티그리스, 또는 유프라테스가 아니면 양쪽 다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범람으로, 아마 단지 低地 바빌로니아에서의 홍수가 어떠했는지를 묘사했다.
이와 같은 홍수들은 低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억도 할 수 없는 太古시대부터 일어났다.
그러한 홍수는 지난 50년 동안에도 없지 않았다. 原始시대에도 갈대로 역은 오두막들과 진흙으로 빚은 가옥들이 휩쓸러 갔었고 ,村落들이 모두 파괴되고 사람들과 家畜들이 익사해 왔다
Above 'Akaikah: Reed huts and brick building next to Euphrates channel. View from water
Photo taken by Gertrude Bell in 1918
傳說에 언급된 홍수는 특별이 파괴적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까닭은 슈메르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 양쪽에 홍수는 그들의 제왕들의 리스트들에 일종의 잊힐 수가 없는 연대기적인 현저한 사건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28세기에 발생한 대홍수의 추정도.
베로소스(Berossos, ed. Schnabel,Page261)는 그 홍수가 있기전 120sars, 즉 432,000년 동안 10명의 諸王이 다스렸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그가 언급하는 諸王중 몇몇은 그에 상응하는 楔形文字가 준비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에네도라코스(Enedorachos)는 에메두라키(Enmeduranki이고 오파르테스(Opartes) 우바라투투(Ubaratutu)이며 , 그리고 크이슈트로스 (Xisuthros)는 아트락아시스(Atrakhasis)이다. 洪水說話는 神話의 英雄 길가미시(Gilgamish)와는 아무 관련을 갖고 있지 않다. 왜 그것이 그들 역사에 포함되어야 했는지 알기는 어렵다. 길가미시敍事詩에 그것이 들어 있는 것은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의 書記들에 의한 것이다.
한 가지 사실은 기록할 만하다. 설화의 모든 編輯人들은 자기의 說에 도덕적 敎訓을 포함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도시 슈류파크(Shuruppak)는 그 주민들의 사악함으로 파괴되었는데, 그 사악함으로 해서 中間天의 神 벨의 분노가 그들 머리위에 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義人 노아와 같은 우타-나피스팀(Uta-Napishtim)이 등장하는데, 그는 신성의 파괴적인 힘이 인류에게 떨어지리란 경고를 받는다. 죄 있는 자는 모든 그의 소유물과 함께 멸망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義人은 구원받아 살아 남을 것이며, 신은 모든 것을 보며 알고 계신다고 했다. 길가미시 敍事詩의 최대의 윤리적 교훈은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왕이라고 해도 유한한 존재일 뿐이며, 태어난 모든 이는 죽게 되며, 어떤 사람도 지상에서 불사의 생명을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훈은 베로소스가 말한 그 홍수의 설화가 가르치고져 하는 게 아니다. 그에 의하면 크이수트로스가 方舟가 멈추었음을 알자 그는 밖을 보았고 그곳이 산의 한쪽 측면의 남겨진 땅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와 아내,딸 그리고 사공이 方舟를 떠나, 묻에 올라, 땅에다 제를 올리고, 제단을 세웠으며 諸神께 희성을 받치고 사라진다. 방주에 남았던 사람들이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딸과 사공이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았음을 알게 되자, 크게 슬퍼하며 계속하여 크이수트로스의 이름을 부르면서 방주에서 벗어난다. 그들이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으나 大氣中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고 그가 그들에게 나린 훈계는 그들의 신앙이 되었다. 그들에게 들려온 그 목소리는 그가 신들을 모시고 사는 자로서의 스스로의 경신사상을 일깨웠다.
그의 아내나 딸 그리고 사공도 동일한 명예를 얻게 되었다. 그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선물인 그 목소리는 또한 그들로 하여금 바빌로니아로 돌아가라고 했고,시파라(Sippara)에서 인류에게 알려진 文字를 탐구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신께 祭物을 받친 후 바빌로니아로의 귀로에 올랐다. (Cory,Ancient Fragments, London,832,Pages26ff참조)
'The ENUMA ELISH'(“太初에. When on high.") 슈메르 創造敍事詩는 해마다 초나흔날 新年祝祭日,대략 3월 25일에, 아마도 도시 중앙 지쿠라트 頂上에서부터 朗誦이 되었다.
이는 諸神들의 評議(슈메르인들의 시민회의들과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이며 그리고 다른 견해들은 슈메르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으며, 즉 그들이 그들의 만신전과 그리고 諸神의 서로간의 교류 에 부여했던 그 구조로서 그들의 자신들의 독특한 사회질서에 관련이된 내용들을 표현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에눈마 엘리스의 텍스트는 그의 博識한 性向들과 그의 문학사랑으로 名聲이 높았던 아시리아王 Assurbanipal (669-626)의 宮殿에서 발견이 된 飜譯版으로부터 알려진 것이다( 그는 그가 逝去하기에 앞서 22,000개의 텍스트들을 收集했다).
여기 그 작은 選集들이 있다.
점토서판 1
太古 時節 하늘들이 그 이름들이 없었었고,
그 아래 굳은 땅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을 때,
오직‘원초의 압수’존재하게 하는이,(맑은 물)과
그리고 ‘무무 티아맏’, 그들 일체를 낳았던 여자,(짠물)뿐,
단 하나의 몸체로서의 물들의 혼합자가 상속자이었을까?
어떤 갈대 오두막도 조밀하지 않았고, 어떤 소택지도 보이지 않았으니,
이름으로는 불리지 않았던 그들의 운명들이 정해졌었을까?
그러자 그들속에서 諸神이 생겨났도다.
라무(진흙씨)와 라하무(진흙양)이 태어났으며
그들이 성년이 되어 조상으로 되어지기도 앞서서,
그들은 그 이름으로 불리었도다.
Anshar(上部 먼하늘)과 Kishar(下部아득한 하늘)들이 지어지다,
다른 것들을 뛰어너머,그들은 날들을 끌어갔고, 해들로 덧붙여졌노라
아누가 그들의 상속자이었고, 그의 부친의 라이벌이었노라,
정말이라네. 아누,안사르의 첫-아들은 그의 부친과 동격이었다네.
그는 그의 생각대로 누디무드Nudimmud(에아)를 낳았네.
이 누디무드가 그의 아버지들의 정복자이었네.
넓듸넓은 지혜와 이성 그리고 힘에 있어 막강함으로,
그의 할아버지 안사르보다도 훨씬 막강했네.
그는 그의 형제들인 제신들중에서 대적자가 없었네.
성스런신들인 형제들이 다같이 결집했었다네,
그들이 앞과 뒷 파도인양 티아맏을 귀챦게 했다네,
하늘의 거처내에서 흥겹게 떠들어,
그렇다네, 그들이 티아맏의 기분을 잡쳐버렸다네.
압수도 그들의 절규를 낮출 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티아맏은 그들의 방식에 할말이 없었다네.
그들의 행위들은 (모두)에게 혐오스럽기 한량 없었다네.
혐오스럽나니 그들의 거동들이었고, 그들은 오만불손하기 그 짝이 없었다네.
그러자 대신들의 어머니 압수가,
그의 고위보좌관 무무를 칭하면서 고함을 내질렀어요.
“ 오 무무여, 나의 정신이 기뻐하는 나의 막료여,
이쪽으로 오시오,가서 티아맏을 만납시다!“
제신들과 그들의 아이들에 관하여 협의를 나누면서,
그들이 가서 티아맏의 면전에 좌정했어요,
압수가 입을 열어 눈부시게 빛나는 티아맏에게 말했노니,
“그들의 거동들은 나로서는 속이 메스꺼워지는 짓꺼리로다.
낮에는 내게 마음에 안정이 없고, 불면의 밤이로다.
나 부셔버릴거요 그들의 거동을 쓸어버릴 것이로다.
그리하여 안정을 회복하게 되어야겠소, 휴식을 취해야하지 않겠소!“
티아맏이이를 듣자말자, 그녀는 화가나서 그녀의 남편에게 고함쳤노니,
그녀 오직 홀로 격분했기에 그녀의 분위기에 슬픔을 띄면서,
불만에 가득차 소리를 높였으니,
“뭐라고요? 우리가 세운 것을 우리가 파괴해야만 한다고요?
그들의 짓거리들이 참으로 가소롭건만, 우리들은 친절하게 경청해 봅시다!“
압수에게 협의를하던 무무가 그때 대답했나니,
무무의 충고는 병을 주는 것이며 무뚝뚝한 것이었노니,
“나의 부친이여 반항들을 파괴하소서,
그러면 낮에는 위안을 얻고 그리고 밤에는 휴식을 할 수 있을 것이니!“
압수가 이를 듣자, 그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도다.
악마 때문에 그는 그의 아들들인 제신에 적대하는 계획을 세웠으니.
그가 그에게 키스하려고 그의 무릎을 꿇고 앉자,
무무로 말하자면, 그는 그의 목을 포옹했도다.
그들사이에서 그들이 계획했었던 모든 것들은 이제 그들의 아이들인
제신들에게 반복되었도다.
제신이 듣자 그들은 당황했으며
그들은 침묵으로 떨어졌고 말없이 있었노라.
에아-누디무드,지혜가 출중하고 지모가 대단하며 수완이 능란한,
가장 지혜로운 에아가 그들의 계획을 속속들이 뀌뚫고 있었으니.
출중한 자가 그것에 대항하여 설계하고 그는 궁리했으며, 대항했으니,
그것에 대항하여 그의 주문을 공교히 했도다,,,
,,,압수에 족쇄를 채웠고 그는 그를 도살했도다,,
(티아맏이 Kingu로 하여금 그녀 참피온이 되어 Apsu 설욕을 하도록
그리고 젊은 신들을 정복하도록 임명하도다. 그들 자신들의 리더와 참피온을 찾기로 결심
함으로 응수하다.)...
점토서판 II
,,모든 아누나끼 신들이 군집했노라.
그들의 입술들을 굳게 다물고서 그들은 침묵속에 앉아 있었노라,,
“어떤 신도(그들이 생각했노라) 전투하러 갈 수 없고 그리고
티아맏을 대면하면, 목숨을 부지하기위하여 도주할꺼야.“
主君 Anshar가, 제신의 아버지인 그가 위풍 있게 일어 섰도다,
그리고는 그의 마음속에서 심사숙고하며 아누나끼들에게 말했도다.
“그의 힘이 강력한자 그가 우리들의 복수자가 도어야하노라,
전장에서 매서운 그가, 메르득이 영웅이로다!“...
(메르득이 초대에 응하다.)
...“대신들의 운명이요, 제신의 창조자,
만일 진실로 내가 그대들의 복수자로서,
티아맏을 쳐부수고 그대들의 생명을 구한다면,
총회를 열어 나를 최고의 신으로 운명을 정해야 하노라!
그대들이 Ubshukinna에서 기뻐하며 모여 앉았을때
그대들의 발언이 아니라 내 말이 운명들을 결정하노라.
내가 있도록 한 것은 불변이며,
내 입술에서 나온 명령은 다시 상기하지도 변경하지도 않을 것이노라.“
점토서판 III
...그들이 그들의 여행에 오를 준비를 했었노니,
운명들을 결정할 모든 위대한 신들이었노라.
그들은 Ubshukinna를 가득 채우면서, Anshar앞으로 들어갔노라.
그들은 총회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노니.
그들은 축연의 빵을 들고,포도주를 부었노라,
그들은 향기로운 마취제가 들어있는 마시는 깔대기로 목을 축였노라.
그들이 독한 술을 들자,그들의 몸들이 부풀었노니.
메르득을 복수자로하는 법렬을 정했노라.
그들은 그를 위하여 왕자의 옥좌를 세웠노라.
그의 부친들을 마주하고 사회를 하면서 앉아 있었노니....
아라비아에서 온 아카드 사람
Elliot Smith 교수는 “만일 아라비아가 셈족들의 고향이었다는 점에 동의하는 관점이 진실이라면, 아랍인들은 그들의 고향을 떠난후 바빌로니아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의 신체적인 특징들에서 심대한 변화를 격었음에 틀림이 없다.”라고 적고 있다.
아랍인들이 그들이 소아시아로부터 온 남으로-이주하는 Armenoid와 혼합 되었던 곳인 팔레스타인과 북부시리아로 최초에 이주했다함이 권위있는 견해이다.
“원-이집트인들과 Armenoids의 인척들인 아랍인들의 이 혼합형은 , 고대 바빌로니아인들과 그리고 이집트인들의 기념석들에 등장하는 이들에 대단히 비슷했던 당시 큰코의,긴-수염의 셈족들을 형성했을 뿐만이 아니라 역시 현대 유대인들을 형성했을 것이다.”(19) 이러한 관점은 아랍 이주의 물결이 메소포타미아를 휩쓱기에 앞서 북쪽으로 시리아방향으로 향했다는 Dr. Hugo Winckler의 논점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주한 지역들로의 이들 침입들이 인종적인 형태들의 융합과 교차와 중간 두개골형의 산출과 안면의 특징들을 나타내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가정을 하기는 어렵다.
슈메르인들의 외부원천설
Elliot Smith교수는 “이들 슈메르인들을 슈메르로의 이민자들로서 어딘가로부터 왔다는 목적으로 많은 하자들에 의하여 대단한 창의성이 나타내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하기전에 오랜 세대동안 페르시아만의 머리부위에 이주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떤 이유들도 없는 것이다.
초기 유적이 없다는 것이 무익한 논의에 지나지 않음은 슈메르와 같은 이러한 나라는 나일 델타에서 보다 그러한 증거의 보존에 전혀 좋을 것이 없었을 뿐 만이 아니라 또한 역시 이 종류의 부정적인 진술들이 이민에 대한 긍정적인 증거를 줄 수 있는 더욱 일반적인 근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두드러진 인류학자는 솔직하게 슈메르인들은 지중해의 전-왕조적인 이집트인들의 동일인들이었다는 견해인 바, 혹은 인도와 브리티쉬 섬들과 아일랜드 서부에 도차했던 그 인종의 동부지파인 갈색인종이었다는 견해이다.
동일한 고대 가족에 그들의 육체적 특징들이 유대인형의 셈족과 구별되는 아랍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Nannar 의 지구라트
Nannar의 지쿠라트 그리고 Ningal(Internet, Wooly 1954 201)
나날은 우르의 지쿠라트에서 숭경의 예식을 받았다.
그곳에는 역시 여월신Ningal을 위한 더 작은 사원이 있었다.
Nanna는 한 고위 여승려와 승려들의 양쪽으로부터 숭경을 받았다.
기원전 2600년 사르곤으로부터 기원전 550년의 나보니두스에 이르기까지 전사적으로 위대한 제왕들이 그들의 딸들을 우르에 있는 Nanna의 고위여승으로써 복무하게 했다. 전통은
기원전 3400년경 우르의 첫 왕조로 부터우르가 망하고 나서 나보니두스에 이르기까지 3000년가량의 시기에 걸쳐 계속 되었다.
우리는 이 전통이 하란에서 또다른 1700년동안 계속하고
여전히 금일의 이스람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르의 위대한 제3제국의 건설자 Ur-Nammu가
비슷한 정신 혹은 shekina가 하고 있는 한 여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명백한 사실로서 아래 비석에서 보여주는 왕이 정원의 풍요를 보전하기 위하여 Nanna와 Ningal 양쪽 신 앞에서 생명의 나무에 헌주를 하고 있으며 이는 우르의 지쿠라트를 건설하고 올린 가장 중요한 의식임이 분명한 일이다.Ur-Nammu는 풍요의 정원을 구했다
태양신 사마쉬 / 슈메르
사마쉬는 슈메르 신화에 의하면 태양신이었다.
슈메르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3천년 이상 이전에 살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지역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협곡들에 상응한다.
금일의 메소포타미아는 이락과 쿼웨이트의 영역의 일부분이다.
그가 지상에서 일체를 볼 수가 있었던 이래로 그는 역시 정의의 신을 대변했다.
그것이 그가 옥좌에 좌정한 지배자로서 사마쉬가 묘사되었던 이유이다.
그와 그의 아내,Aya는 두명의 유명한 아이들을 가지고 있다.
Kittu는 정의를 그리고 Misharu는 법을 대변했다.
서양의 아시리아 학자들이 여러가지 주장들을 하면서 그들이 한족에 가깝지 않으냐고 하는 이들도 있으나 알타이 어계의 우리들 몽고계통의 골격 구조, 얼굴이 모가난 점은 수메르인들이 인도의 서북쪽 고원지대, 파밀로부터, 빙하기에 살아 남았던, 혹독한 자연의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특징적인 외모를 지니게 된 것이다.
수메르 설화와 훈 설화의 언어적인 유사점에서 우리는 보통이 아닌 시사를 얻게 되며, 고대 수메르 문명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느낀다.
수퇘지 훈 설화의 단편들
비쟌틴의 역사학자 Procopius에 의하면, Huns의 Utigurs국과 Kutigur국은 한 Hun왕의 쌍둥이 아들들로 부터 유래하고 있다. 이 쌍둥이들이 수퇘지 사냥 중에 그들의 아버지와 헤어졌다. 이들 훈인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죽자 나라를 다스렸던 Mauger와 Gorda(Magyar와 Hunugur?)라고 불린 두 왕자들을 역시 두고 있었다.그 “Hun"왕자의 Mauger란 이름은 그가 통치했던 국민들/국가,the Magyars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천상의 수퇘지를 대변하는 한 지주로부터 조각된 암석. 몽고로부터 나온 한 회화 훈의 단편
The Huns의 또다른 후예는 역시 그들의 이름속에 항가리인들과의 관련성이 나타나는 동부 중국의 the Uygur(Yugor, Ugor)이다. 그들의 전설속에 한때 위대한 황제가 Tartars와 Mongols의 선조가 된 Tartar(Hunor)와 Mungli(Maugor)라 불린 두 아들들을 두었었다. (Abul Ghazi Bahadur,한 Khiva의 17세기 역사가)그가 코카사스 Ujgurs는 몽고 왕실가계와 관련이 있었으며, 기원적인 태초 고대 설화라기 보다는 차라리 그보다 후기의 역사적인 사건과 연결되었다고 하고 있다.
수메리아 관련 건,
지혜와 범-창조자의 수많은 이름들 사이에서, Ea는 거대한 수퇘지란 의미의 Daramah이다.
“거대한 수퇘지,
한 메소포타미아의 신”에 대한 Dr. Bobula Ida의 논문, Buenos Aires는
그 해의 마지막의 항가리의 Regos 관습들과 수퇘지의 전통들과 관련이 된 동일한 낱말들이나 관습들에 대한 탁월한 분석이며 비교대조이다.
For those who would like this sent to them by EMAIL, drop me a note.
항가리어 지식속에 지혜는 그 뿌리語 Tan,Tud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반면에 신은 역시 Is-Ten이다.
그런고로 Tana는 Pisces물고기 자리와 같은 의미인 Hea와 관련이 된다.
노아의 홍수이전의 제왕들의 슈메르 설화들속에서 Etana의 설화는 주목을 끈다. Etana의 전설은 하늘을 방문함을 포함하고 있다. 항가리 신화에서 Nimrod는 바로 Kushan-Scythian에서와 같이 Etana의 아들이다. “Kush-Tana"는 그 국가의 선조이다.
아시아에서 Ten, 신 혹은 역시 하늘을 의미하며, 그리고 Teno는 초기 이집트 S-Ten에서와 같이 Hun 황제들의 타이틀이었다. 일본어에서도 동일하다.
이란이 한 서부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자인 Takma Urupi(Tana=Takma)에 의해 문명화 되었을 때인(아아리안 이전시대) 한 페르시아의 설화속에서 역시 그의 아내가 Eneth이었다. Eneth or Nana는 메소포타미아와 Scythian 인들사이에서 물들,하천들, 그리고 풍요의 어머니 여신의 이름들이다. 그녀는 황도대의 제6궁 처녀궁( Virgo)에 의해 상징이 되었다.
수메르가 유프라테스-티그리스 하류 거대한 충적지를 개간하여 수로를 만들어 배수를 하고, 농경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을 때 수메르는 여러 공동체가 각기 독자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수메르 문명이라고 말할 때 이는 수메르 문명을 탄생하게 한 집단적 인간의 힘의 업적이었다.
가야인들이 낙동강 하류 김해와 함양, 고령과 창원등 금일의 경상남도 그리고 경상북도에서 기원전 1,2세기경에 그들의 삶을 개척하기 시작할 때 가야의 여러 촌락들도 각기 독자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제4의 제국이라고 말할 때 이는 가야의 운치 높은 문명과 그후 일본의 고대 문화 비조문명을 탄생하게 한 집단적 인간의 힘의 업적이었다.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3000년전 무렵이면 이미 그들의 세계 최초의 독창적인 문자와 언어, 그리고 철기를 사용하고 ,배수의 기술과 종교로서의 농경생활, 무엇보다도 그들의 사원인 지쿠라트와 에아를 위시한 그들의 자연신들을 신앙하면서 양강의 하류 무한대의 충적지를 배수하여 에덴의 동산을 이루고 행복한 고대의 삶을 적어도 5,6백년이상 향유하고 있었다.
가야인들은 수메르인들과 동일한 시공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차라리 고조선인들과 수메르를 비교함이 옳다. 고조선의 옛터가 태백산맥이요, 오늘날 만주인 송화강 유역이나 아니면 요하 강변 어느 곳이나 요서의 어느 곳이었음에 틀림이 없지만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밝혀진 것이 너무 희소하고 그나마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다. 뭘 비교할 것인가!
수메르인들은 기운전 4000년 경에 양강의 하류에서 그들의 삶을 개척 할 때, 그곳에는 이미 상당한 기간 살아온 선주민이 역시 있었지만 이를 정복하고 새로운 삶의 기술과 비젼으로 압도한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인들에게 양강의 하류는 그들의 조상이 살았던 고향이 아니었다.
반도의 서북쪽 금일의 요서지방에 있었던 위만조선이 기원전 108년 한에 의해 붕괴되었을 때 그 유민들이 서해를 따라 남하하여 오늘날의 경상남도 남해안에 살게 된다.창원 다호리, 일군의 목곽묘 무덤군에서 청동과 철기, 그리고 유리구슬 목걸이들이 나왔는데 이는 목곽묘의 양식이 고조선의 선진 양식과 동일한 것으로 판명 되었다. 양동리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중국 형식의 청동거울,철제 사슬구슬이 다량 출토 되었으며 김해가 중심이 되어 남해안 지방들은 대륙의 내량(the Lelang)과 활발한 무역을 했으며 외와 백제의 가교 역할을 한다.
수메르인들이 토착의 주민들에게는 신들과 같은 모습으로 비추였을 것이다. 그들의 점토서판의 기록에는 그렇게 나와있다. 에리두를 건설한 이들이 새롭게 등장하여 지쿠라트를 중신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수로를 내고 운하를 파며 진흙으로 신전을 지으며 청동이나 철기를 사용하여 토착인들이 저항할 수 없는 무력을 지녔으며 이미 일부 지배층은 문자를 창조하여 사용함으로서 왕국이 서게 되었고 지배층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있어 압도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
가야의 지배층도 서북에서 철기의 기마로 하강해온 무사집단으로서 이 남해안 지방의 신천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금관가야의 김수로왕등은 토착민들의 세력이 아니었다. 이들 북방계의 유민집단이 정점을 이루고 5세기 경에 그 문화의 절정을 이룬 가야 문명은 고령의 지산리 고분들에서 나온 도자기들에서 보이듯 그 섬세함이 특징으로서 이들이 일본의 최초 문명인 아소카의 문명에서 나타나는 그 화려하고 섬세한 특징과 해양양식의 문화를 꽃피웠다.
일본의 국수주의 학자들이 보이는 임나 일본부 따위의 강변은 수용하기 어려운 허상으로서 당시 문화의 중심은 금관가야로서 이들이 4세시 경에 신라-고구려 연합군에게 패전하여 그 유민들이 대량으로 일본 구주지방에 유입됨으로서 비롯된 것이다. 임나일본부가 성립하려면 당시 일본에 그 만한 문명이나 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개한 상태의 구주가 아니라 문명의 중심은 반도의 김해지방으로서 이곳에서 옛 고조선의 유민들이 새로운 무대에서
해양을 통하여 내랑뿐만이 아니라 월남 지방이나 이들 동남아의 해상루트를 통하여 인도까지도 통상했음을 그들이 남긴 유물과 전설로서 알 수 있다.
중동역사연대표기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Re: 10/28일의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을풍경 (0) | 2013.05.15 |
---|---|
[스크랩] 다시 가 본 현충원 (0) | 2013.05.15 |
[스크랩] 유리벽에 빠진 하늘 (0) | 2013.05.14 |
[스크랩] 보현정사 / 각서리 (0) | 2013.05.14 |
[스크랩] 호랑이 (0) | 2013.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