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토불교의 세계 / 제12 장 정토교학의 중심사상 -5. 극락정토에 성문이 존재하는가

2013. 9. 24. 21:59경전 이야기

 5. 극락정토에 성문이 존재하는가

 

 

                                                                                 장휘옥 著/불교시대사
 

정토경전의 내용


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해 두고 싶은 말이 있다. 제3부의 다른 주제들은 모두 제2부의 해당 부분에서 언급한 내용들이기 때문에 그 개요만 간략히 서술하였다. 그러나 성문문제에 관해서는 이 책 어느 곳에서도 언급한 적이 없으므로 이곳에서 사상의 전개 순으로 상세히 다루었다.
극락정토에 성문(聲聞)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정토교학사상 하나의 큰 문제였다. 그것은 극락정토는 법장보살이 대승의 보살도로 완성한 이상적 세계이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이상적 세계로서 요청된 극락에는 당연히 대승불교 쪽에서 소승이라 멸시해서 부른 성문이 존재할 리 없으며, 만일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극락은 대승의 보살도 정신에 입각한 이상국토가 될 수 없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아미타불의 국토인 극락에는 결코 성문이 존재할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토경전에서는 분명히 극락세계에 성문이 무수히 존재한다고 설한다. 즉 <무량수경>에서는 법장비구의 48원 가운데 제14원에 "내가 부처될 적에 그 나라 성문들의 수효에 한량이 있어 삼천대천세계의 성문과 연각들이 백천 겁 동안 세어서 그 수를 알 수 있으면, 나는 정각을 얻지 않겠습니다." 라하여, 극락에 성문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기를 서원하였으며, <아미타경>에는 "아미타부처님에게는 무량무변한 성문의 제자들이 있는데 모두 아라한으로서 산수로 셀 수도 없다."고 설한다.
또한 <관무량수경>에서는 정토에 왕생하는 자를 삼배구품(三輩九品)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 가운데 중배(中輩)의 삼품(三品)에 속하는 부류는 극락에 왕생한 후 아라한(阿羅漢)을 얻는다고 되어있다. 즉 중품상생(中品中生)의 사람은 극락에 왕생해서 곧바로 아라한을 얻지만, 중품중생은 반 겁(半劫)을 지나야 아라한을 얻고, 중품하생은 일소 겁(一小劫)을 지나야 아라한을 얻는다고 설한다. 이것은 극락에 왕생한 후에 성문의 과보를 얻는다고 하는 것으로서, <무량수경>에서 극락에 성문이 무수히 존재한다고 설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극락에 성문의 존재를 인정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면 아미타불의 정토에는 무엇 때문에 성문이 무수히 존재한다고 하였을까?


인도인들의 견해


먼저 인도에서 최초로 정토사상에 대해 설했으며, 또한 공사상으로써 대승불교를 철학적으로 기초를 세운 용수(龍樹)의 견해를 보면, 그는 아미타불의 국토에 성문이 무수히 존재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예를 들면 <대지도론> 권34에는 "부처님 중에는 오로지 성문만을 승려(僧)로 삼는 부처님이 있는가 하면 오로지 보살만을 승려로 삼는 부처님이 계시며, 아미타불의 국토와 같은 경우는 성문과 보살이 섞여서 승려가 되어 있다."고 설하며, 또한 <십주비바사론>의 <이행품>에는 "성문이 무량하며 머리를 조아려 예배한다."고 극락을 찬탄하고 있다.

그런데 용수는 한편 <이행품>의 첫머리 게송에서는 "만일 성문지(聲聞地)와 벽지불지(?支佛地)에 떨어지면 이것은 보살의 죽음이라 이름하며, 이것은 곧 일체의 이익을 잃는 것이다." 라고까지 설하여 성문승(聲聞僧)을 극렬히 비난하고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이 대소승의 구별을 역설한 그가 대승의 이상적 불국토인 극락에 저급한 성문의 존재를 인정한 까닭은 무엇일까?
용수는 <대지도론> 권93에서 삼승(三乘)의 차별은 오탁의 나쁜 세상에서만 설해지는 법이지만, 오탁의 세상이 아닌 아미타불이나 아촉불의 불국토에도 삼승의 구별이 있는 것은 그 부처님들이 초발심을 일으킬 때에 삼승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발원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용수의 사상은 '오탁의 세상이기 때문에 방편으로 삼승을 설한다'는 <법화경> <방편품>의 중심사상에 따른 것이라 보지만, 대승의 이상적 세계인 정토에 무엇 때문에 대승의 비난을 받은 성문이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용수가 극락에 삼승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과는 달리, 유가파의 대표적 논사 세친(世親)인 극락세계에는 이승종불생(二乘種不生)이라 하여 성문이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그는 <정토론> <왕생론>에서 아미타불의 세계는 "대승선근(大乘善根)의 세계로 한결같아서 헐뜯고 싫어하는 이름이 없고, 여인과 불구자와 이승(썽문과 연각)은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에 의하면 극락은 대승의 세계로서 일체의 차별을 여읜 평등한 세계이기 때문에 성문이 있다고 하더라도 삼승 차별의 성문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극락에는 성문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승의 비난을 받는 성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세친의 입장은 <무량수경>의 제14원에서 성문이 무수하게 많기를 서원하면서, 동시에 제4원에서 그 나라의 천인(天·人)들의 모습이 모두 한결같아서 잘난 이 못난 이의 구별이 없기를 서원한 내용을 충실하게 해석한 것으로서, 한편으로는 신앙적으로도 만족할 만한 해답을 내리고 있다고 본다.


한국·중국인들의 견해


극락에 성문이 존재하는지에 관한 한국과 중국인들의 견해(당시 중국에서는 신라인들의 사상을 그들의 사상과 구별하지 않고 동일하게 취급하였으므로 여기서도 정토교학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살펴보기위해 한국인의 사상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함께 소개한다)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세친과 같이 극락에 성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용수의 견해처럼 극락에 성문이 있다고 하는 설이다.
한국과 중국불교에서 극락에는 성문이 없으며 오직 보살만이 존재한다는 견해를 취한 사람은 북위의 담란과 당나라의 회감뿐이며, 이들은 왕생의 요인을 발보리심으로 본다. 이 두 사람 외에는 모두 극락에도 성문이 존재하며 삼승의 구별이 있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도 극락에 왕생하는 요인을 발보리심에 두느냐 두지 않느냐에 따라 의견이 나뉜다. 즉 발보리심을 왕생의 요인으로 삼는 수나라 혜원은 극락에 성문이 존재하는 것은 일단 보리심을 발해서 보살이 되어 극락에 왕생한 자가 도중에 어떤 이유로 보리심에서 물러나 성문이 된 자라고 해석하며, 이에 반해 발보리심을 왕생의 요인으로 삼지 않는 당나라 선도는 성문의 자격 그대로 정토에 존재한다고 설하여 철저하게 성문의 존재를 허락하고 있다.
이것을 역사적 전개 순으로 보면, 먼저 '발보리심이 왕생의 요인으로서 극락에 성문이 없다'는 담란의 설이 나오고, 그 뒤를 이어 '발보리심을 왕생의 요인으로 삼으면서 극락에 성문이 존재한다'는 혜원의 설이 나왔으며, 마지막으로 '발보리심을 왕생의 요인으로 삼지 않으면서 극락에 성문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선도의 설이 제창되었다. 이 중 담란의 발보리심 요인으로서 성문이 없다는 설은 세친의 <정토론>과 <무량수경>에 근거하며, 선도의 발보리심의 비요인으로서 성문이 있다는 설은 <관무량수경>에 근거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혜원의 중간적 견해는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의 절충설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담란에게서 시작되어 선도에 이르러 일단락된 성문설은, 당나라 현장(玄裝)이 신교학을 도입해 옴으로써 새로운 진전의 계기를 만나 일승(一乘) 삼승(三乘)의 권실(權實)논쟁에 휘말려, 한편으로는 신라 원효(元曉)의 조직적 일승설을 낳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 경흥(憬興)의 정통적 삼승설을 낳았다.
원효와 경흥은 모두 발보리심을 왕생의 요인으로 삼으면서 더구나 극락세계에는 부정성(不定性)의 성문이 존재한다고 하여, 선도(善導)와는 다르게 <무량수경>의 입장으로 되돌아갔다고 할 수 있지만, 원효와 경흥은 성문의 무여회심(無余廻心)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그 결과 삼승교(三乘敎)의 입장에서 정토교를 해석한 경흥은 정성성문(定性聲聞)에게는 아미타불의 구제의 대자비가 미치지 않는다는 독특한 설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모든 중생의 구제를 종지로 삼는 정토교에 충격을 주는 설이었는데, 이 설의 수정·보완으로 나온 설이 선도의 제자인 회감(懷感)의 설이다.
회감은 극락의 성문과 아라한을 소승이라 하지 않고 대승이라 불렀으며, 극락은 오로지 대승보살뿐이지만 대승의 성문과 대승의 아라한이 존재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설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담란과 혜원의 설을 절충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상과 같은 중국과 한국인들의 견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담란


담란은 극락에 성문이 없다고 보는 일승설(一乘說)의 대표자다. 그는 <왕생론주>에서, <법화경>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오탁의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삼승을 설했다고 하지만, 아미타불의 정토는 오탁이 세상이 아니기에 삼승의 구별이 없으므로 극락에는 성문이 있을리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담란이 극락에 성문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대승의 보살뿐이라고 주장한 것은, 인도의 용수가 극락은 오탁의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삼승을 설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도 극락에 삼승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 이유를 법장비구의 발원으로 돌리는 것과는 대립하는 설로, 세친의 이승종불생설(二乘種不生)에 따른 것이 분명하다.
담란은 극락에 성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성문이 극락에 왕생하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성문이 극락에 태어날 수 있는 이유를 보리심을 발했기 때문이라 하여 성문의 왕생을 적극적으로 논증하였다. 즉 그는 <무량수경>등에 성문이 있다고 한 것은 아라한의 존재를 가리킨 것으로서 삼승 차별의 성문을 말한 것은 아니다. 아라한은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다시는 삼계(三界 ; 중생이 윤회하고 流轉하는 미망의 경계를 셋으로 분류한 것으로서, 欲界, 色界, 無色界로 되어 있다)에 태어나지 않지만, 아라한은 아직 해탈을 얻지 못했으며, 삼계 밖에는 정토를 제외하고는 태어날 곳이 없으므로 아라한은 반드시 극락에 태어남으로써 비로소 성불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이리하여 아라한인 성문이 극락에 태어나면 그는 이미 성문이 아니지만, 다만 그 본래의 이름에 따라 성문이라 한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세친이 이승종불생(二乘種不生)이라 한 것도 극락에는 이승의 종자가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 뜻이지 이승의 내생(來生)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비유하면 귤은 강북에서 생산되지 않지만 그 지역에서 귤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극락에정토에는 이승의 존자는 태어나지 않지만 타방세계의 성문(아라한)이 태어나는 것은 거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더구나 담란은 성문의 왕생, 즉 발보리심을 담지 이론적인 필연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종교적인 부처님의 위신력에 착안하여, 예로부터 성문은 불도(佛道)의 씨앗을 생(生)하지 못하는 자라 불리고 있으나 이러한 성문으로 하여금 정토에 태어나 무상보리심을 발하게 하는 것은 모두 아미타불의 본원의 불가사의한 신력(神力)에 의한 것이라 해석함으로써 성문왕생 사상을 이론적인 해석보다 종교적 신앙으로 회향하고 있다. 성문의 발보리심을 부처님 원력의 불가사의한 작용이라 보는 담란의 견해에서 자신의 종교적 체험이 그의 교학 전체에 깊이 침투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혜원


담란의 설처럼 극락을 순수한 대승의 나라이기 때문에 성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무량수경>을 해석하는 데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관무량수경>이 극락에서 성문의 과보를 얻는 자가 있다고 설한 것을 해석하기는 힘들다. 이에 두 경을 조화하여, 발심 왕생해서 극락에서 소승의 과보를 얻는다고 하는 혜원의 설이 제창되었다.
담란이 극락에 성문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주석한 세친의 <정토론>은 대체로 <무량수경>의 요의를 논한 것으로 간주하므로, 담란이 이것을 주석하여 <왕생론주>를 만들 때 그 중심은 아무래도 <무량수경>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특히 부처님의 원력에 의해 성문의 왕생을 설한 것은 <무량수경>중심의 입장이 아니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담란이 극락에 성문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정토론>의 이승종불생이라는 문장에 근거를 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삼승의 무차별을 설한 <무량수경>에 중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라 여긴다.
그러므로 담란 이후에 배출 된 학자들은 <무량수경>뿐 아니라 <관무량수경>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따라서 <관무량수경>의 삼배구품의 문장 가운데 극락에서 성문의 과보를 얻는다고 한 문장을 무시하고, 담란처럼 타발세계의 성문이 내생한 것을 본래의 이름에 따라 성문이라 했을 뿐이라고 일축해 버릴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나온 설이 혜원과 길장의 '발보리심을 왕생의 요인으로 삼으면서 극락에 성문이 존재한다' 는 설이다.
혜원과 길장 등은 모두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에 주석을 붙였는데, 두 경전에서 극락의 성문을 생각할 때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하나는 <무량수경>에서는 극락에 성문이 무수히 많다고 하고, <관무량수경>에서는 극락에서 성문의 과보를 얻는다고 분명히 다르게 설하기 때문에, <무량수경>의 성문과 <관무량수경>의 성문을 간단히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극락에는 삼승의 구별이 있는 성문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에서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는 수행에 따라 삼배(三輩)의 구별이 있지만 극락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삼배 모두 발보리심이 필수라고 한다.
위의 두 가지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문제는 발보리심을 왕생의 요인으로 삼는 극락에 어떻게 삼승의 구별이 있는 성문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혜원은 발보리심을 왕생의 요인으로 삼으면서 극락에 성문이 존재함을 교묘히 설하고 있다.
혜원에 의하면,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무상보리심을 발하는 것이 필수요건이다. 그러나 보리심을 발해서 왕생한 자가 모두 대승의 과보를 얻는다고 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특수한 예로서 만일 왕생하기 이전에 소승의 교리를 배운 적이 있는 자는 극락에 태어나 일단 소승의 과보를 얻기 때문이며, 이러한 자도 이미 보리심을 발했기 때문에 극락에 태어나서 일단 소승의 과보를 얻은 후에는 다시 반드시 대승으로 전향해서 대승을 구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혜원은 <정토론>의 이승종불생(二乘種不生)은 이승의 경지를 벗어나 대승보살이 된다는 점에서 이승종불생이라 한 것이며, <관무량수경>의 소위 극락에서 성문의 과보를 얻는다고 한 것은 이전에 소승의 교리를 배운 자가 극락에 태어나 얻는 최초의 경지를 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은 성문 가운데 아직 아라한을 얻지 못한 자에 관한 설이며, 아라한을 얻은 자가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혜원은 우법(愚法) 성문과 불우법(不愚法) 성문으로 나누어 해석하였다.
우법성문이란 소승에 집착해서 대승에 어리석은 자들을 말하며, 불우법성문은 소승을 이해함과 동시에 대승도 잘 아는 자를 이르는 호칭이다. 이 가운데 불우법의 아라한은 죽어서 정토에 태어나 경전을 듣는데 반해, 우법의 아라한은 죽은 후 즉시로 정토에 태어날 수 없으며, 일단 무여열반에 들어 불가사의 겁을 지난 후, 미래에 다시 마음을 내어(心想을 生한 후) 정토에 태어나 법을 듣는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혜원의 견해는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정토론>의 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요구를 일단 만족시켰으며, 또한 대승불교의 교리를 정토교학에 적용하여 교설을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해석을 기획하려 한 점에서 그 공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정토경전의 정신에 입각하여 아미타불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본원의 깊은 뜻이 무시된 듯한 감이 있다. 참고로 길장의 설도 본질적으론 혜원과 동일하므로 생략한다.

선도


혜원의 설이 발보리심을 극락왕생의 요인으로 삼는 한 정토에서 성문의 과보를 얻는다고 하는 설명이 궁색해질 뿐 아니라, 이것은 또한 하배의 삼품이 정토에서 보리심을 발한다고 한 <관무량수경>의 설에도 모순이다. 이러한 불합리를 한꺼번에 해소하기 위해 발보리심 왕생설을 과감히 버린 사람이 담란의 흐름을 이은 선도다.
선도는 도작의 제자로서 <관무량수경>을 깊이 연구했으므로 담란이 언급하지 않았던 극락에서의 성문의 과보 문제가 그에게는 큰 관심사였다. 선도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발보리심을 극락왕생의 요인으로 한 견해를 과감히 버렸다. 그는 정토의 법문은 어리석은 범부를 위해 설한 것이지 성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토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원력에 의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원력에 수순하는 것만이 정정업(正定業)을 얻을 수 있는 길이며,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보리심을 발한다 하더라도 왕생을 위한 결정업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선도는 오직 부처님의 원력에 수순해서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왕생의 정정업이라 주장하였다. 담란의 소위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힘의 신앙은 여기에서 새로운 표현으로 힘있게 나타났다.
선도의 설은 분명히 혜원의 발보리심 요인설에 반대되는 것이지만, 담란의 견해를 그대로 계승한 것도 아니었다. 담란이 극락에 성문이 없다고 설한 것에 대해, 선도는 발보리심잉 왕생의 요건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극락에 성문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점에서 담란과 선도는 다르다.
이와 같이 선도의 설이 담란의 설과 약간 차이가 나긴 하지만 근본정신에서는 담란의 설에 전혀 위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선도가 담란의 흐름을 있는 학자이면서도 담란과는 달리 극락에 성문의 존재를 허락한 의도는, 극락에 삼승(三乘)이 존재하는 것과 담란이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원력을 강조한 것을 서로 관련해서 설함으로써 어리석은 범부를 포함해서 오승(五乘 ; 人·天·성문·연각·보살)의 원력왕생이라는 이행법문(易行法門)을 확립하는 데 있었다. 실로 발보리심이 왕생의 요인이 아니기 때문에 성문도 극락에 왕생해서 후에 발심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범부에게도 극락왕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었다.
또한 <정토론>의 '이승종불생'을 선도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 한다. 하나는 하배의 삼인(三人)은 정토에 태어난 후 대승의 설법을 듣고 무상보리심을 발하기 때문에 소승의 설법을 듣는 일이 없으므로 이승의 마음은 발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승의 종자가 생하기 때문에 이승의 종자는 불생(不生)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승의 계행(戒行)을 닦아 왕생을 원하는 자도 모두 왕생할 수 있지만, 다만 그곳에 이르러 먼저 소승의 과보를 증득하고 곧 대승으로 전향하여 다시는 이승심(二乘心)을 내는 일이 없으므로 정토에서 회심(廻心)한 이후로 다시는 이승심을 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정토론>에서는 '이승종불생'이라 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설을 분석해 보면, '이승종불생'이라는 것은 극락에서 이승의 종자를 생하는 일이 없다고 하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분명히 담란의 <왕생론주>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담란이 발보리심해서 왕생한다고 설하여 이승 그대로 왕생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선도는 이승이 이승 그대로 왕생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 점은 담란과 선도의 중대한 차이다.
한편 이승이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허락한 점에서 선도는 혜원과 일치하지만, 혜원이 발보리심해서 왕생하는 자는 재차 그 나라에 태어나 소승의 과보를 증득한다고 하는 구차스러운 해석을 내리는 것과는 달리, 선도는 이승이 발보리심하지 않고도 왕생할 수 있다고 설하기 때문에 그에게서 왕생 후에 소승의 과보를 증득한다는 것이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고 회심하기 전이든 회심한 후든 정토에 이르러 새롭게 이승심을 발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정토론>의 '이승종불생'의 설에 저촉되는 것이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선도의 설은 어디까지나 담란이나 혜원 등의 설을 계승해서 이것에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더구나 그것을 교묘하게 수정·응용해서 이론과 신앙의 요구에 부응한 역사적 집성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선도가 <관무량수경소>로써 '고금을 해정(古今楷定)'했다고 한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선도가 극락에서 성문의 과보를 얻는 것을 긍정한 설은, 혜원처럼 구차스럽게 극락에서의 성문의 과보를 왕생 이전의 수학에 의한 것이라 해석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관무량수경>의 삼배 구품 가운데 하배 삼품의 사람은 정토에 태어난 후 보리심을 발한다는 설도 선도에 의해서만이 모순없이 해석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도의 설은 <관무량수경>을 해석하는 데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지만, 발보리심이 왕생의 요인이 아니라고 하는 견해는 <무량수경>에서 삼배의 중생은 모두 보리심을 발해서 정토에 태어난다고 한 내용에는 부적합한 해석이다. 이리하여 다시 발보리심을 왕생의 요인으로 삼는 설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원효


중국불교사에서 극락에서의 성문의 존재문제는 선도설에 의해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선도는 <관무량수경>의 주석에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관무량수경>의 문장에는 매우 충실했지만 <무량수경>의 해석에는 소홀한 감이 없지 않았다. 선도는 발보리심이 왕생을 위한 필수조건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관무량수경>의 삼배구품의 왕생문제 해석에 꼭 들어맞는 설이다. 그러나 <무량수경>에는 분명히 삼배의 사람은 모두 발보리심해서 왕생한다고 하였다.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기에 다시 발보리심 요인설이 제기되고, 두 경전의 새로운 절충조화설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사명을 띠고 나타난 대표적인 사람이 신라의 원효와 경흥이다.
원효와 경흥은 다 같이 당나라 현장에 의해 유가(瑜伽)의 신교학을 접한 학자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이 문제의 실마리를 신불교에 의한 오성차별설(五性差別說)에서 발견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의 정토교학은 종래의 학설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신유가의 법상(法相)교학은 오성차별을 엄수하여 성문 중에서도 대승으로 회심할 수 있는 부정종성(不定種性)과 대승으로 회심하지 않은 결정종성(決定種性)의 구별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것은 종래 성문 모두에 대해 대승으로의 회심을 인정하던 정토교학에 있어 실로 놀라울 정도의 새로운 설이었다. 또한 단지 정토교학만의 문제로만 그치지 않고 일승 삼승의 대논쟁으로서 당나라 초기의 불교학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 중대한 문제였다. 이 쟁론에서 원효는 조화적 일승설, 경흥은 정통적 삼승설을 주장하였다.
원효는 정토의 성문에 대해, 성도와 매우 유사한 설을 주장하고있다. 즉 그는 무량수국이 정토라 불리는 것은 오직 정정취만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이라 정의하고, 이런 이유로 무량수국에는 사과(四果)의 성문은 물론 사의(四疑)의 범부도 있으며, 다만 사정취(邪定聚)와 부정취(不定聚)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무량수국에 성문과 범부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이것은 극락에는 성문이 무수히 많다고 한 <무량수경>의 설이나 극락에서 성문의 과보를 얻는다고 한 <관무량수경>의 설 모두에 합치한다.
원효는 왕생의 요인을 성변(成弁)의 인(因)과 왕생의 인으로 구분하여, 왕생의 인에 대해 여래의 본원력을 잇기 때문에 감(感)에 따라 수용하고, 스스로의 업인력(業因力)의 성변(成弁)하는 바가 아니라고 한다. 왕생에 대해 이와 같이 부처님의 원력을 설한것은, 담란과 선도의 계통을 따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효의 설은 결국 혜원이나 길장의 설로 복귀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정토에 사과(四果)의 성문이 있다고 설한 그 성문이란, 부정근성의 성문을 말한 것으로서 결정종성의 성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토론>에 이승종불생이라 한 것은 결정종성의 이승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서, 부정근성의 성문이 없다고 한것은 아니다. 정성(定性)의 이승은 정토에 왕생할 수 없으며, 부정성 가운데 삼품의 사람으로서 대승심을 발하는 자는 모두 그곳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원효가 정토에 성문이 왕생 한다고 하는 그 성문도 성문 중의 부정근성의 사람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부정근성이라 하더라도 그는 이미 발보리심한 자에 제한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정토에 성문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엄밀히는 성문이라 부르기 힘들며, 결국 원효도 발보리심을 왕생을 위한 절대적 요인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발보리심을 왕생의 요인으로 삼으면서 정토에 성문이 존재한다고 설한 점은 혜원과 궤를 같이 하지만, 아미타불의 원력과 발보리심을 함께 설한 점에서 담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성문의 발보리심을 왕생의 필수 요건으로 보는 한, 그도 <무량수경>의 학자다운 해석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혜원과 원효는 이승을 우법과 불우법으로 나누는 점에서 일치한다. 혜원은 아라한의 생·불생을 논함에 있어 두 종류의 성문을 설하고, 불우법의 아라한은 곧바로 묘토에 태어나 거칠은 아미타불의 국토에는 생하지 않고, 우법의 아라한은 무여열반을 거쳐 불가사의 겁을 지난 후 마음을 내어 정토에 태어난다고 설했다. 이것에 대해 원효는 이승 가운데 우법의 학인은 왕생하지 못하고, 불우법의 이승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정토가 있음을 믿고 발원 왕생하는 자만 왕생을 얻는다고 설했다.
혜원이 불우법의 성문은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지 못한다고 하고, 원효는 불우법의 성문만이 왕생할 수 있다고 한 점은 서로 다르지만, 혜원이 우법과 불우법은 추·묘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정토에 태어난다고 설한 것처럼, 원효도 결국에는 정성의 이승이라도 무여열반을 나온 후에는 보리심을 발하여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이 점에서도 양자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원효가 우법과 불우법을 말한 것은 법상종(法相宗)에서 말하는 결정종성과 부정종성에 대비하여 신역불교와 구역불교를 융회하고 삼승교와 일승교를 조화하려는 취의에 근거한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정토론>의 이승종불생을 해석할 때도 그것은 결정종성의 이승이 없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해석하여 정성이승의 왕생 형태를 취했지만 결국 정성이승(定性二乘)에도 다른 의미에서 왕생의 가능성을 인정해 조화로운 일승설의 특성을 발휘했다.

경흥


경흥은 정성이승과 부정성이승(不定性二乘)을 구별하고, 왕생을 하는 데는 반드시 발보리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부정성이승만이 왕생할 수 있고, 보리심을 발하지 않는 정성이승은 왕생할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원래 정토교에서는 성문의 왕생을 완전히 폐쇄하지는 않았다. 소승의 계행을 가진 자라도 왕생할 수 있다고 설한 선도는 물론, 담란과 혜원과 같이 성문의 자격 그대로 왕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자라도, 성문이 왕생의 요건으로서 보리심을 발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았다.
또한 원효도 경흥과 마찬가지로 성문에 정성과 부정성의 사람으로 구별하여, 부정성은 보리심을 발해서 왕생을 얻지만 정성은 보리심을 발하지 않기 때문에 왕생하지 못한다고 설했지만, 그러나 원효가 정성이승이 왕생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은 절대적 의의를 가지는 것은 아니였다.
원효가 정성이승은 왕생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종성이 결정된 이승으로서 아직 무여열반에 들지 않아 보리심을 발하지 못한 자에 한한 것이기 때문에, 정성의 이승이라 하더라도 무여열반을 나온 직후에는 즉시로 보리심을 발할 수가 있으므로 결국에는 왕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경흥의 견해는 전혀 다르다. 그는 법상종 출신이기 때문에 정성이승이 무여열반에 든 후 그곳에서 나와 재차 마음을 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물며 무여열반에서 나온 후에 대승의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종성(種性)의 차별은 본질적으로 변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경흥은 정성의 이승은 영원히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아미타불의 원력도 여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승불교의 극치라 해야 할 정토교도 성상별론(性相別論)을 엄수하는 법상교학 앞에서는 차질을 가져 오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범부의 왕생이 확인되더라도 영구히 구제받지 못하는 근기가 있음을 보고, 이것을 방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불타구제의 비원(悲願)을 이상화한 아미타불의 가르침에 치명적인 타격이다. 법상교학에 입각한 경흥의 정토사상은 실로 이와 같은 근본적이 모순이 태동하고 있었다.

회감


경흥설의 보완으로 나온 것이 선도의 제자인 회감의 설이다. 회감(懷感)은 <석정토군의론>에서 회심하여 대승의 보리심을 내는 자는 곧 부처로서 이승이라 해서는 안 된다. 원래 성문이나 아라한이라 부르는 것은 소승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승에도 통하는 호칭이다. 말하자면 대승에는 대승의 성문과 아라한이 있다. 극락의 성문과 아라한은 모두 무상보리를 구하는 대승인으로서, 모두 보살이라 해야 한다. 다만 성문과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구별하는 것은 우회해서 왕생하느냐, 곧바로 왕생하느냐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극락의 성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체 중생에게 들려주기 때문에 성문이라 하고, 극락의 아라한은 일체 세간의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아라한이라 하므로, 결코 소승의 과보를 증득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극락의 성문과 아라한을 대승이라 부르며, 이승의 왕생을 긍정한 회감의 설은, 재차 극락을 이상적인 대승의 국토로 보는 견해로 되돌렸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글쓴이 : 파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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