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미타경불과 극락정토
장휘옥 著/불교시대사 부처님의 이름을 외움으로써 보살로서 깨달음을 보장받고, 다시는 퇴전하지 않는 경지(阿惟越致, 正定聚不退)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설하며, 자력(自力)의 난행(難行)에 대해 타력(他力)의 이행(易行)을 세운 용수의 생각을 발전시킨 사람이 담란(曇鸞)이다. 담란은 이것을 아미타불 한 부처님에게만 한정하고, 또한 다시는 물러남이 없는 경지를 이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정토에 태어난 후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난행'과 '이행'의 대립을 다시 성도(聖道)와 정토(淨土)라는 대립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도작(道綽)이다. 여기에 자력과 타력, 난행과 이행, 성도와 정토라는 대립개념이 확립되어 이후 널리 일반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시각은 어느 사이엔가 정토교의 개념으로 확립되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한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아미타불을 어떻게 볼까, 그 정토를 어떻게 해석할까 하는 소위 불신관(佛身觀)이나 정토관(淨土觀) 등도 음으로 양으로 정토사상의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불교에서는 부처를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응신(應身, 또는 化身)의 삼신으로 분류한다. 법신이란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 그 자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법신은 소위 보편적 원리로서 무색무형의 법성(法性)이며, 보신불이나 응신불의 내면의 도리로서, 중생과 부처와 그 밖의 일체를 본연의 자세로 통일·유지한다. 예를들면 만물의 일체 현상, 즉 꽃이 피고 낙엽지는 모든 것을 법신의 설법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세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여 불신이라 보는 것에서 연유한다. 보신이란 진리로서의 법신의 현상(발로)인데, 부처님의 작용을 이상적으로 나타내는 부처로서, 불신(佛身)의 상호나 작용 모두가 완전한 인격신이다. 따라서 부처의 입장에서 말하면 법신이 인격적으로 나타난 것이 보시이지만, 중생의 입장에서말하면 발원 수행의 목적이 되는 부처로서, 자신이 성불하면 그와 같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불도 수행의 이상상(理想像)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서방정토가 보신인 아미타불의 정토라는 것은, 부처의 입장에서는 중생을 위한 이상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고, 중생의 입장에서는 보살행을 닦아 부처가 되는 장소로 나타난 것이다. 응신은 보신을 볼 수 없는 자를 불도로 인도하는 부처로서, 인간에게는 인간의 모습을, 동물에게는 동물의 모습을 나타내어 불도로 유인하는 부처님이다. 보신불을 보는 자는 보살행을 닦아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한 자다. 발원이란 이상(理想)을 보고 그것에 대해 원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발원자는 보신불을 볼 수 있지만, 아직 불도에 발원도 하지 않은 자는 보신불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응신불이 구제에 나서서 보살도에 대해 발원할 수 있게 이끌고, 보신을 볼 수 있게 가르치는 것이다. 아미타불을 소위 법신·보신·응신 가운데 보신이라 보고, 정토를 미망의 세계(三界)를 초월한 보토로 간주하는 견해는 담란에서 도작에 이르러 정착하고, 선도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의용(依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받드시 정토사상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일직이 정영사 혜원은 <대승의장(大乘義章)>의 '정토의(淨土義)' 에서 아미타불의 정토에 대해, 그것은 세간 일반의 어리석은 범부들이 번뇌를 가진 채로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켜 수행으로 감득하는 세계라 하여 사정토(事淨土)라 하고, 또한 아미타불의 48원과 그 수행으로 나타난 세계이기 때문에 원응토(願應土)라 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극락정토를 부처님만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어리석은 범부도 존재하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가 되었다. 혜원은 정토를 사정토(事淨土)와 상정토(相淨土)와 진정토(眞淨土) 셋으로 나누어 사정토는 어리석은 범부가 있는 곳, 상정토는 성문·연각·보살의 소위 삼승의 성자가 있는 곳, 진정토는 초지 이상의 보살이나 여러 부처님이 있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특히 진정토에 대해서는 진토(眞土)와 응토(應土)의 둘, 또는 법성토(法性土)와 실보토(實報土)와 원응토(圓應土)의 셋으로 나누지만, 나중의 셋은 앞의 둘을 나눈 것으로서, 법정토와 실보토가 진토이고 원응토가 응토이며, 또한 이 셋은 법(法)·보(報)·응(應)의 삼신에 대응하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응신이 되는데, 그가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이 부처님이 '무량수'라 불리기는 하지만, <관음수기경(觀音授記經)>에서 설하는 것처럼, 실은 수명에 끝이 있는데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것을 헤아릴 수 없을 뿐이라고 한 것에 따른다. 그러나 한편 '대비원(大悲願)의 힘의 작용으로 곧바로 진토(眞土)를 얻는다' 고도 설하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정토에는 진토와 응토 두 가지를 생각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천태지의에 의해 더욱 정리되지만, 사고방식은 같다. 즉 법신·보신·응신의 삼신에 네 종류의 정토를 생각하고, 법신은 상적광토(常寂光土), 보신은 실보무장애토(實報無障碍土), 응신은 방편유여토(方便有余土)와 범성동거토(凡聖同居土)를 대응하고, 범성동거토를 다시 예토와 정토로 나누어 예토는 사바세계, 정토는 극락이라 하여 둘 다 어리석은 자나 삼승의 성자들이 동거하는 세계라 하였다. 이것은 혜원의 사정토(事淨土) 이하의 세 종류와 거의 대응하며, 아미타불의 수명도 무량하다고 생각 하지 않는 점 등, 표현에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 사고방식은 같다. 조금 후대에 삼론의 길장도 혜원과 지의의 사상을 이어받아 거의 차이는 없지만, <관무량수경의소>에서 정토를 설명하면서 당시 강남과 북지에서 유행하던 설을 소개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정토는 일반론(通論)으로서는 48원을 인(因)으로 하여 그 과보로 얻은 정토이기 때문에 보토지만, 그 특수성에 유의(別門)하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보살에게는 본래의 모습(本)과 임시의 모습(迹) 두 가지가 있다. 임시의 모습에서 말하면, 보살로서는 아직 어리석은 채로(범부) 서원을 세워 갖가지 수행을 한 뒤에 정토를 얻었기 때문에 그 정토는 보토지만, 본래의 모습에서 말하면, 이 보살은 실은 깨달음으로서 궁극적 경지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수행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토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다만 응현한 것이므로 응토라고 한다. 이 설은 강남과 북지의 양설을 절충한 것이지만, 길장은 응토에서는 수명의 장단이나 육체의 대소 등 일정한 한도가 있다(分段)고 본다. 도작은 담란의 설을 이어 아미타정토를 보토라 주장하였다. 그는 <안락집(安樂集)>의 '삼신삼토의(三身三土義)'에서 <대승동성경(大乘同性經)>에 아미타불이나 연화개부성왕여래(蓮華開敷星王如來) 등의 정토에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모두 '보신불(報身佛)'이라고 하는 설을 증거로 삼고 있다. 그리고 <관음수기경>에 아미타불이 입멸한 후에는 관세음보살이 다음 부처로 출현한다고 한 것을 취하여, 부처의 수명에 한계가 있다고 논한 혜원 등의 견해에 대해, 보신(報身)에는 '은몰의 상(隱沒의 相)'이 있다고 답하고, 같은 <관음수기경>과 <구경일승보성론>의 설로 증명하였다. 여기서 '은몰의 상' 이란 일시적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필요할 때는 언제나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도작은 정토에는 보토와 화토(化土) 두 종류가 있는데, 극락은 보토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며, 지혜가 얕은 이는 상토(相土)에 태어나고, 수승한 자는 법성정토(法性淨土)에서 '무생(無生)의 생(生)'을 얻는다고 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도작의 설을 이어받은 가재(迦材)는 극락을 법신·보신·화신의 세 정토에 모두 해당된다(通報化)고 하였는데, 선도(善導)는 이 설을 수정해서 아미타불을 보신, 정토를 보토라 하고, 이곳에는 아무리 근기가 낮고 어리석은 범부라도 태어날 수 있다고 설하였다. 선도 이후에는 별로 언급할 것이 없지만, 선도를 이은 회감(懷感)의 설에 흥미로운 차이점이 있어 간략히 첨가한다. 회감은 극락에 대해, 오직 변화토(唯化), 오직 타수용토(唯報), 타수용토와 변화토에 통하는 것(通報化)의 세 가지 설을 소개하고, 자신의 입장은 보토설(唯報)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법상종 출신이기 때문인지, 유식설에 의해 정토도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점은 특이하다. 그는 세간의 어리석은 사람이 받는 세계는 번뇌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정토는 생사를 되풀이하는 미망의 세계(三界)를 벗어난 세계가 아니며, 또한 부처님의 서원의 힘으로 정토에 태어난다고는 하지만 부처님이 만들어 낸 청정한 국토에 태어난 것이 아니므로, 그 청정한 국토에 의탁해서 나타난 매우 비슷한 정토를 볼 뿐이라고 하였다. 즉 그의 <석정토군의론>의 말을 빌리면, 사람은 "여래의 더러움이 없는 국토(無漏土)에 의해 스스로의 마음이 변현해서 번뇌의 국토(有漏土)를 만들어 내어, 그 가운데 태어난다. ······그것은 번뇌의 국토이기는 하지만 여래의 더러움이 없는 국토와 매우 닮아 있으며 온갖 악이나 근심이 없다."고 하였다. 정토에 태어난다고는 하지만, 사람은 여래의 청정한 국토를 보지 못한다고 하기 때문에, 선도의 견해와 많은 차이가 있다. 이후 아미타불과 정토에 대해서는,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으로서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정토도 마음이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유심정토(唯心淨土)'의 설이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선종에서 설한 것이지만, 같은 선종이라도 연수(延壽)는 이 설을 취하면서 서방정토를 부정하는 선가(禪家)의 일반적 태도에 반대하고 정토를 찾는 것을 제창했다. 유심정토설은 천태종에서는 지례(知禮)와 준식(遵式) 등이 역설하였으며, 또한 조금 후대에 천태의 영향을 받은 율종의 원조도 이것을 설하지만, 이들 여러 학승들은 별도로 부처님을 관상(觀想)하는 염불과 결합해서 논의를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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