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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라 쓰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자기 재산을 제 마음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자기 집 대문 앞에서 병들어 고통 받고 있는
거지 라자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순교자 성월의 마지막 주일 미사에 참여하며
우리가 가진 것을 다시 주님께 돌려 드리도록 다짐합시다.
아모스 예언자는 남부 유다(시온)와 북부 이스라엘(사마리아)의
지도자들이 흥청거리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들은 자기 동족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온갖 사치스러운 연회를 벌이고 있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동료이자 아들처럼 여기는 티모테오에게 권고한다.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도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아 많은 이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라고 권하는 것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하여 이 세상의 삶과
죽은 뒤의 삶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암시하신다. 이 세상에서
누린 호화로운 삶이 죽은 뒤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복음).
<이제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6,1ㄱㄴ.4-7
전능하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수금 소리에 따라 되잖은 노래를 불러 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들을 만들어 낸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계명을 지키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6,11ㄱㄷ-16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대에게 지시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손홍규 작가의 ‘투명 인간’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아버지가 마치 투명 인간처럼 취급되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감히 표현해 보건대, 오늘날 우리 사회가
‘투명 인간의 집합체’로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하철 안에서도 많은 사람이 ‘스마트폰’에 매달려 있습니다.
행인에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이 있어도 함부로 나서길 꺼립니다.
정의감에 불타 나섰다가는 오히려 봉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는 학우들끼리 서로 투명 인간이 되어 버리고,
가정에서도 식구들끼리 투명 인간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거지 라자로는
부자에게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부자는 값비싼 옷을 즐겨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집 대문 앞에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는 거지를 보지 못합니다. 늘 그 대문을 지나치면서도
어떻게 그를 보지 못했을까요? 정말 투명 인간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와는 무관한 사람’,
‘내가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람’,
‘괜히 도와주었다가 나에게 달라붙을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아도 보지 않은 척하며 그냥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자기의 옷 가운데 하나라도 그에게 걸쳐 주었다면,
자기의 음식 가운데 조금이라도 덜어 주었다면,
거지 라자로는 한층 더 인간답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투명 인간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투명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는 현상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 Ubi caritas Deus ibi est 사랑이 있는 곳에 주님 계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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