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덤 外 / 知然山 김 일 곤

2013. 10. 26. 11:25

 

 

 


꽃 무덤

                         知然山  김일곤

지천으로 지은
꽃 궁궐
비바람에 무너집니다.

꽃잎도 길이 있어야 가는지
바람 흩날리는 날
젖은 땅바닥에
그 경계의 길을 냅니다.

꽃피는 날 그리 힘들었어도
꽃 지는 날은 한 순간이구나
벚나무 꽃잎들이
꽃상여 메고 가는 길
강물도 멈칫멈칫 되돌아봅니다.

바람 머문 어느 강기슭
돌올한 꽃 무덤
지리산 뻐꾹새가
한나절이나 울다 갑니다.

 


* 시마을동인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4-11 10:17)

 

 

 

 

늙은 벚나무 / 김일곤

내 걸어온 발길, 나무로 치면
키 낮은 늙은 벚나무.
비바람에 잘 부러지고
우듬지와 가지 보기 좋게 자를라치면 곧잘 썩어서
벌레들의 침실이 되는 벚나무.
마음에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날
거칠고 시꺼멓고 오돌토돌 못 생긴 몸뚱어리
구불구불한 발가락마다
붉은 봉숭아 꽃물 같은 아픈 상처 자르고 싶었다.
겨우 피웠던 꽃
열흘이 길다 떨어지고 가슴 숭숭한 허무
그래도 꽃을 피울 수가 있어.
행복 한 줌 줄 수 있고
먼 길 달려온 매미 잠시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어.
위안을 했던가, 어쨌던가.
어둡고 아팠던 길 다시 걷는다면
이런 발쯤은 되어야 하겠지.
성깔도 좀 죽이고
비바람에도 조금은 더 견뎌 내고
벌, 나비 좀 더 포근히 안아 주어야겠지.
오죽했으면 시인묵객이
늙은 벚나무 안았다가 놓아 버렸을까 마는
이제라도 마음을 쓸듯 날마다 하늘 한구석 쓸다가
흥이 나면 구름 들고 따라가리.


 

농담(農談) / 김일곤

사람만 애기 못 낳는 게 아니다.
작년 옥수수 농사를 망쳐 올해는 모종 삼천 주를 샀다.
불임종자들이 몰려오고 있는 탓이다.
언제부터인가 돈과 양이 많은 것들만 찾고 있은 사이
탐욕이 장난을 치고
불임종자가 틈새를 노린 것이다.
신품종 옥수수 그 놈은
토종옥수수를 근처에도 못 오게 한다.
어느 시인의 시에서
고추 녀석이 농담(弄談)를 했다고 하던가.
사람 입맛에 꼭 맞다 해서 채소가 된 것인데
불임만 시키면 도로 꽃으로 가겠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그러나 저러나 옆구리 허전한 것은
그 토종 옥수수맛을 잊은 탓도 있지만
토종 맛을 지키던 풍습이
그 서늘한 씨종자를 받던 농부가
어느 새 사라졌기 때문.
처마에 씨종자 매달던 농부가 그리운 때다.

 

 

 

시인 김일곤 : 광주 모 초등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