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에서 - 다섯(끝)

2013. 11. 2. 22:42여행 이야기

 

 

 

 

 

  세조 능침의 무인석 - 투구에    국화문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코가 높고 크며(북방계 수렵인[여진족 등] 또는 유목민의 특징),

                                눈썹이 진한 것(남방계 해상농경인의 특징)으로 보아

 

                                북방 부여계 도래인의 후손과 남방계 원주민의 혼혈의 후손일 가능성이 큼.

 

 

 

 

 

 

세조 능침의 호위 무인석 -  태양의 상징화한 국화문은 우리민족 고유 선도(仙道)의 표상임.

                           선도는 고조선에서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天地花郞)     ,

 

                           고구려에서 조의선인, 백제에서 무절(武節), 신라에서 화랑도, 고려에서 국선,

                           재가화상 등으로 시대와 국가를 달리함에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우리 한민족의

 

                           고유사상과 무술의 기초토양이 되었다.

                                일례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 양만춘 안시성주, 연개소문 등이 조의선인

               

                            출신이며, 조의는 검은 옷을 입고 명산대천을 찾아서 수련하는 청년단체를,

                            그 조의들의 지도자를 조의선인이라고 하며,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시에

 

                            동원된 20만명의 군대가 조의들의 조직이 국란을 맞이하여 차출 투입된 것이다.

 

 

 

 

 

 

 

      

    세종(단종의 할아버지)은 건강이 좋지 못해지자 당시 세자였던 문종(단종의 아버지)에게 섭정을 하게 한다. 그러나 본래 병약했던지라(그래서 대신들 중에는 애초부터 수양대군을 세자로 삼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함) 8년 간의 섭정 동안 업무 과중으로 인해 문종 역시 재위 기간을 대부분 병상에서 보내야 했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 결국 문종은 등극 후 2년 반도 채 안 되어 12살인 아들 홍위를 남겨 두고 세상을 뜨고 만다.

 

    단종의 어머니는 문종에게 세 번째로 시집 온 세자빈으로(레즈비언 사건 등으로 두 명의 세자빈이 폐출됨) 그녀가 바로 현덕왕후 권씨이다. 드디어 맘을 주게 되는 여인을 세자빈으로 들인(본래는 당시 세자였던 문종의 후궁이었음) 문종이었지만 자신은 병약하였고 현덕왕후 역시 난산 끝에 단종을 출산하다 세상을 뜨니, 이로 인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은 더욱 쉬워진다. 당시 왕실에는 단종 내외를 지켜줄 만한 어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왕대비는커녕 대비의 자리에 있었어야 할 어머니마저 돌아가신지 오래이니... 그래서 어린 단종은 자랄 때에도 덕이 높기로 이름 난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서열상 단종의 서조모)가 유모가 되어 키워 준다. 그러나 후궁인 처지라 혜빈 역시 낄 틈이 없었다. 하지만 단종을 위해 애쓰는 혜빈, 세종과 그녀의 소생인 세 아들이 단종을 돕기 위해 분투한다.(이들 중 장남인 한남군과 3남인 영풍군이 훗날 정조 대에 이르러 금성대군과 더불어 단종을 위해 애쓴 6종친(육종영六宗英)에 봉해진다.)

 

    문종이 승하한 후 바로 즉위했지만, 어린 단종은 말 그대로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가 없었기에 형식적인 결재를 해 주는데만 그치게 되고, 급기야 수양대군의 세력이 커질 대로 커져버리게 되었을 때는 어디에 옥새를 찍으면 될지만 묻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의정부는 물론 6조 직계제(6조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과 직접 연계하는 것)마저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이렇게 왕권이 약해지고 신권이 강해지자 세종의 아들(단종의 숙부)들이 세력을 모으기 시작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 것이 바로 차남인 수양대군이다. 이렇게 해서 왕실은 무수히 많은 피를 보게 되는 것이다.

 

    수양대군의 구실은 조카인 어린 임금을 보호하겠다는 것으로, 결국 그 유명한 계유정난(1453)을 일으킨다. 이때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안평대군(세종의 3남)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죄명을 붙여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 역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정난 이후 일어난 사건 중 '이징옥의 난'이 있다. 함길도 절제사였던 이징옥이 대립 세력인 김종서계 사람임이 맘에 걸렸던 수양대군은 이징옥을 파직하고 후임으로 박호문을 임명하는데, 처음에는 이징옥도 인사 이동에 수긍해 인수 인계까지 한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도성으로 향하던 중 정난 소식을 들은 이징옥이 발길을 돌려 박호문을 죽이고 난을 일으켜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 후, 여진의 후원을 약속 받고 두만강을 건너려 했지만 정종, 이행검 등에 의해 아들 3형제와 함께 살해되었다.

 

    이렇듯 신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라 직접 단종을 대신해 서무를 관장하며 왕권까지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단종은 여산 송씨 가문에서 중전(정순왕후)을 맞이하고, 숙부였던 수양대군을 믿고 의지했던 예전과는 달리 여러 숙부들과 대신들이 하나 둘 죽어 나가는 것을 의심에 찬 눈초리로 보며 그제서야 숙부가 다른 뜻을 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왕위를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번번이 수양대군의 세력에 의해 좌절되는데, 그때마다 수양대군은 오직 조카인 단종을 보호하기 위한 일이라며 잡아떼기만 할 뿐이었다.(수양대군 입장에서는 정권에 대한 욕심이 없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고, 또 그때까지만 해도 본심을 드러내기엔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측근인 금성대군(세종의 6남)과 궁인, 신하들마저 유배와 죽음을 당하게 되자 극도의 두려움을 느낀 단종은 자신과 중전을 해치는 일 만큼은 하지 말기를 청하며 왕위를 내 놓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드디어 수양대군이 등극하니... 그가 바로 조선의 7대 임금 세조!

 

    그러나 민심은 여전히 어린 임금과 중전에게 있는데다 충신들의 절개가 맞물리니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는 이들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이른바 '상왕(단종) 복위' 사건(1456)으로 여섯 신하가 죽음을 맞는다. 예지력이 돋보였다고 전해지는 한명회의 조언과 더불어 동참했던 김질, 그의 장인인 정창손의 밀고로 죽게 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이 목숨으로 절개를 지켰다 하여 '사육신'이라  일컬어지게 된 것이다. 수양대군이 보기에는 역적이니 본인들은 물론이오, 집안의 사내들은 다 처형되고 아녀자들은 관비가 되는 등 그야말로 멸문지화를 당한다.

    그밖에도 김문기, 권자신 등 여러 선비들까지 조금이라도 가담한 자들은 모두 처형되어 신하들의 씨가 말랐다 할 정도였다.

 

    또한 목숨은 부지했으나 충심으로 벼슬을 버린 여섯 신하를 '생육신'이라 하는데 김시습, 이맹전, 원호, 조여, 성담수, 남효온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뜻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1457)되어 영월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한다. 이 때 다시 만날 것을 소망하면서 중전과 헤어지며 건넌 다리가 바로 '영도교'(청계천에 위치)이다.

    하지만 영영 못보게 되는 두 사람, 그것은 같은 해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단종은 아예 서인으로 강등되고 결국 한 달 뒤 수양대군(세조)이 보낸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뜨고 만다.

    이를 두고 백성들은 단종이 조금만 더 살았더라도 조선은 더욱 태평하였을 것이라며 영특했던 어린 임금을 기렸다고 전해진다.

 

    둘 다 어렸던데다 시국의 아픔 때문인지 단종은 중전인 정순왕후와의 사이에서 후사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수양대군(세조)의 세력이 중전마저 없앨 생각으로 어떻게든 구실을 잡으려 했지만 백성들의 보살핌으로 중전은 80세를 넘겼을 정도로 장수를 누렸다. 어쩌면 단종의 뒤를 이을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여론의 악화가 신경쓰였던 수양대군이 그나마라도 모른 척 해 주어 정순왕후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참고로 등극 후 수양대군(세조)은 말년에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의 혼백에 시달려 이 때문에 의경세자(요절한 세조의 장남, 예종의 형)가 죽은 후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까지 범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명회의 두 딸을 아들인 예종의 비(장순왕후)와 손자인 성종의 비(공혜왕후)로 맞았지만 모두 요절하였는데, 이 때 백성들은 '임금(세조)도 부원군(한명회)도 벌을 받는 것'이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또 피부병으로 고생한 것도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난 후부터라니, 즉위 내내 자신이 행한 일이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음을 모르지 않았던 듯 싶다.

 

 

                                                                                                              <다음지식>에서

 

 

 

 

 

 

 

정희왕후 윤씨의 능침으로 가는 관리용 샛길.......

 

 

 

 

 

 

 

 

 

 

 

 

 

 

 

 

 

 

 

 

참취  꽃

 

 

 

 

 

 

 

 

 

 

 

 

 

 

꽃담의 별무늬 장식

 

 

 

 


   
세종대왕 시대의 문화적 황금기가 끝나고 몸이 허약한 큰아들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조선 왕실은 다시금 임금 자리를 노리는 왕자들 사이에 와위를 둘러싼 암투가 벌어졌다. 그 대표적인 왕자가 수양대군이다. 원래 세종은 아들이 18명이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둘째인 수양대군이 가장 뛰어나고 야심이 컸다.
그는 자기 형인 문종이 단 2년도 제대로 임금 노릇을 못하고 죽고 겨우 12세빡에 되지 않은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웅지를 펴볼 결심으로 한명회, 권람 등 뛰어난 인재를 자시의 집으로 모았다. 즉 그는 어린 왕을 돕는다는 핑계로 정치를 마음대로 주무르던 원로 대신 김종서와 황보인 등이 혹시라도 딴마음을 먹으면 조선 왕조가 망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변을 일으키고 김종서 등을 죽여 정권을 잡은 것이다. 이것을 ⌈계유정난⌋이라고 한다.


    이렇게 무력으로 정권을 잡고서 역대 왕족으로는 유일하게 영의정이 되어 마음대로 정치를 하던 수양대군은 정인지, 권람, 한명회 등 자기 심복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나이어린 단종 임금은 왕위에 오른 지 3년도 못 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귀양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이를 옳지 않게 여긴 집현전 학사 출신의 성삼문, 이개, 하위지 등 문신들과 무신들이 반기를 들고 단종 복위를 꾀하나, 거사 계획은 사전에 밀고자의 고발로 발각되어 모두 처형당했다. 이것이 사육신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어린 단종은 끝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여불귀의 객이 되었고, 세조를 왕위에 추대한 정인지, 최항, 양성지, 신숙주, 서거정, 한명회 등이 중심이 되어 세종대왕의 업적에 버금가는 세조대왕 시기의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다.
이들은 실용적인 학문에 능하여 국민을 잘살게 하는 부국강병을 실현했으며,  국가 주도로 수많은 편찬 사업에 참여하여 주옥같은 책들을 널리 펴내는 데 공헌했다. 그래서 이들은 ⌈훈구파⌋ 또는 ⌈관학파⌋라고 불렸고, 성종 시대가지 정치를 주도하는 중심 세력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훈구파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세력이 향촌 사회를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성리학을 전공하고 대의 명분과 정통 사상에 투철했던 재야 유학자들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했다. 그리하여 고향 산천에 숨어 살면서 단종에 대한 충절을 끝가지 고지하며 두문 분출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풍자하며 방랑으로 일생을 마친 인물들도 있었다. 김시스블 비로산 권절, 원호, 조려 등 생육신들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김시습은 일찍이 세종대왕 때에 소년의 몸으로 임금 앞에서 뛰어난 시를 지어 장래가 기대되는 천재소년으로 칭송을 들었던 재사였다. 그러나 그는 속세를 등지고 승려의 행색으로 방랑하며 울적한 심정을 시나 소설로 풀 뿐이었다.


    이와 같이 단종을 위해서 몸바쳤던 사육신과 끝까지 절개를 지켰던 생육신의 의리와 충절은 숙종 때에 와서 높이 평가되어, 높은 벼슬을 내리고 사당을 지어 그들의 충절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도록 했다.
    한편 불교 신자였던 세조도 후에 과거를 깊이 뉘우치고 불도에 힘써 3.1운동의 진원지가 된 오늘날의 파고다 공원 자리에 원각사를 짓고 10층탑을 쌓았으며, 간경도감을 두어 불경을 찍어내 널리 보급하는 데 힘썼다. 또한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을 손수 한글로 지어 간행하기도 하고,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을 궁중으로 불러 사육신의 명복을 비는 제를 지내기도 했다.


    농업의 장려에도 힘을 기울여 궁중에 잠실을 설치해 왕후와 세자비로 하여금 누에를 치게 하여 양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모범이 되게 했다.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을 걱정하여 상평창을 설치하고 곡가를 조절하여 농민들이 살 길을 열어 주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밖에도 널리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를 쇄신하는 데 힘썼고, <동국통감>과 <국조보감> 등 훌륭한 역사책을 많이 편찬해 정치인들로 하여금 통치의 귀감으로 삼도록 했다. 그는 부국강병이 나라 발전의 근본임을 강조했으며, 손수<병정>, <병서대지>, <삼각전법> 등의 병서를 간행하기도 했다.또한 압록강 유역의 야인을 압록강 밖으로 몰아내고, 그곳에서 남쪽의 백성을 대거 이주시켜 토지를 개간하고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영구적으로 우리의 강토가 되게 했다.
세종의 많은 업적 가운데서 특히 <경국대전>을 펴내 조선 왕조를 훌륭한 법전을 가진 법치 국가로 만든 것은 아주 뛰어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피의 역사를 기록한 후 와위에 오른 세조였지만, 정치에 있어서는 태종과 세종에 못지 않은 훌륭한 정치를 배풀어 조선 왕조의 기초를 다지는 데 공헌햇으며, 대외적으로는 이장옥의 난과 이시애의 난을 잘 다스려 나라의 위신을 살렸던 것이다.

 

 

                                                 [출처] 조선 왕조의 성립/세종대왕의 업적/단종의 양위와 세조의 업적|작성자 돈마니

 

 

 

 

 

 

 

 

 

 

 

 

 

 

 

 

 

 

 

 

정희왕후 능침의 좌향을 보기 위한 휴대용 앙구일부

                    -  광릉은 배산의 운악산을 주산으로 삼고, 정남향의 세조릉은 건너 보이는 백령산을

                      안산(案山)으로 삼고, 남서향의 정희왕후릉은 마주보는 천령산을 안산으로 삼고 있다.

 

                      세조의 아버지인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해시계인 앙구일부를 조그만하게 휴대용으로

                      만들어 사대부들이나 무인들이 여행이나 공무수행시 활용토록 하였다.

 

                      휴대용 앙구일부는 나침빈과 해시계를 결합하고 방위와 시각, 그리고 태양의 남중고도에

                       따른 24절기를 파악할 수 잇도록 과학적으로 만들어져서, 부채 끝의 선추(扇錘) 등에

 

                       넣어서 늘 휴대하면 여러모로 편리하다.

 

 

 

 

 

 

조선왕조(朝鮮王朝)

 

 

    고려의 뒤를 이어 함경도 출신의 무장(武將)인 이성계(李成桂)가 신진 사대부(士大夫)와 협력하여 세운 왕조. 1392년 즉위한 태조(太祖) 이성계에서 1910년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지속되었다.

 

【건국】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려왕조는 권문세족(權門勢族)이 발호하는 가운데, 정치체제가 약화되고 왕권이 쇠퇴하였으며, 밖으로는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이 계속되는 등,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때에 이성계는 여진족(女眞族)·홍건적(紅巾賊)·왜구 등을 물리쳐 명성을 높이며 중앙정계에 진출,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의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여 구세력인 최영(崔瑩) 일파를 숙청하고, 또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마침내 1392년 7월 16일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나라를 개창하니, 이를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고도 한다.

 

【국호와 국도】 태조는 처음 민심의 동요를 생각하여 국호를 계속 고려라 하고 서울을 개경(開京)에 정하였으나, 곧 민심의 혁신을 위하여 국호의 개정과 천도를 단행하였다. 먼저 국호는 고조선(古朝鮮)의 계승자임을 밝히고자 하는 자부심과 사명감에서 조선(朝鮮)으로 정하고 이를 1393년(태조 2) 2월 15일부터 사용하였다. 국호의 제정과 아울러 국도의 결정에 대하여도 큰 관심을 보여 태조는 계룡산(鷄龍山) 부근과 무악(毋岳:현재 서울의 서쪽), 그리고 한양(漢陽:지금의 서울)을 후보지로 삼고 중신들과 오랫동안 논의하여 마침내 94년 1월, 농업생산력이 높고 교통과 군사의 요지인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하였다. 도성의 출입문으로서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을 비롯한 4대문을 세우고 이곳을 한성부(漢城府)라 이름하였다.

 

【건국이념】 조선왕조는 그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다음과 같은 3대 정책을 건국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첫째, 외교정책으로서 사대교린주의(事大交隣主義)를 채택, 중국 명(明)나라에 대하여는 종주국이라는 명분을 살려주면서, 사신의 왕래를 통하여 경제적·문화적 실리를 취하고, 아울러 새 왕조의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한편, 일본과 여진에 대해서는 교린을 내세워 우호적인 교제로 평화유지를 꾀하였으나, 그들이 변경을 혼란시키면 무력으로 제재하였다. 둘째, 문화정책으로서 숭유배불주의(崇儒排佛主義)를 내세워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정치·문화·사상계의 지도적 근본이념이 되게 하여 교육·과거·의례는 유교적인 체제로 바뀌어 갔다. 셋째, 경제정책으로서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채택, 건국 초부터 농업을 적극 장려하여 국민생활의 안정에 노력하였다.

 

【왕조의 발전】 조선왕조의 발전과정은 왕권의 강화, 제도의 정비, 사회구조, 대외관계의 변화에 따라 크게 6단계로 단계적 특성을 보였다. 제1기인 15세기에는 왕권이 확립되어 갔고, 제2기인 16세기에는 왕권의 약화와 더불어 사회체제가 변질되어 갔으며, 제3기인 17세기는 왜란(倭亂)·호란(胡亂)으로 동요되었던 사회구조를 정비하고 극복하는 과정이었고, 제4기인 18세기에는 정치적·경제적 안정과 더불어 문물이 융성하였으며, 제5기인 19세기 전반기에는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말미암아 정치질서가 붕괴되고 이에 따라 사회체제가 와해되고 농촌사회가 동요하였고, 마지막 제6기인 19세기 후반기에는 문호(門戶)의 개방과 더불어 밀어닥친 세계 열강의 각축 속에서 내외의 정세가 크게 격동하였다.

 

〈확립기〉 태조(太祖)∼성종(成宗):태조의 치세는 이른바 창업기(創業期)로서, 국호를 정하고 도읍을 옮기며, 정치이념을 내세우고 문물제도를 정비함에 주력하였다. 이때에는 건국에 협조한 개국공신(開國功臣)이 실권을 장악하고 제도정비를 주도하였는데, 특히 조준은 전제개혁을 주관하여 새 왕조의 경제안정에 기여하였고,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을 편찬하여 통치이념의 방향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개국공신들의 세력 증대는 왕실과 알력을 빚었고, 두 차례에 걸쳐 왕자의 난이 일어나, 방원이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하륜(河崙)·권근(權近)의 도움을 받아 왕권중심으로 권력구조를 바꾸고, 관제를 개편하여 관료제도를 정비하였다. 양전사업(量田事業)을 강화하고 사원경제(寺院經濟)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의 재정기반을 굳혔으며, 조세·신분·호적제도를 개혁하여 양인(良人)을 늘리고 국역(國役)기반을 확대하였다. 사병혁파(私兵革罷), 신문고 설치, 사섬서(司贍署) 설치, 계미자(癸未字) 주조, 호패법(號牌法) 실시, 서얼차대(庶差待) 등은 이때에 이루어졌다. 태종 때에 다져진 정치·경제·군사적 안정을 바탕으로 세종 때에는 문화의 융성기를 맞았다. 세종은 모범적인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고자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유관(柳寬) 등과 같은 청렴하고 노련한 재상을 등용하여 민의(民意)에 부합된 정치를 하였다. 아울러 집현전을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성삼문(成三問)·신숙주(申叔舟) 등의 젊고 재주 있는 학자들로 하여금 고금의 문물제도를 깊이 연구하게 하여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게 하였으며, 한글을 창제하여 민족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국민복지 향상에도 유의하여 조세·형벌·의료제도를 개선하고, 의창(義倉)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측우기(測雨器)를 비롯한 각종 과학기계를 발명하였고, 아악(雅樂)을 정리하였다. 활자개량에도 힘써 많은 책을 간행하였는데, 《고려사(高麗史)》 《농사직설(農事直說)》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의방유취(醫方類聚)》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은 이때에 펴낸 것들이다. 세종은 또한 국토확장에도 힘을 기울여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동북지방을 개척하여 6진(六鎭)을 설치하게 하였고, 최윤덕(崔潤德)으로 하여금 서북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4군(四郡)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고, 3포(三浦)를 열어 일본과의 제한된 무역을 하였다.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단종이 즉위하였으나, 병약하고 연소하여 김종서 등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은 한명회(韓明澮)·양성지(梁誠之) 등의 협조를 얻어 무력으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세조(世祖)이다. 세조는 즉위하면서 단종의 복위를 꾀한 사육신(死六臣) 등을 제거하고 동북지방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반란을 진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어 부국강병책을 강력히 추진하여 국력을 키우는 데 힘썼으며,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여 국가수입을 늘렸고, 조직적이며 통일된 법전의 마련을 위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착수하는 한편, 민심을 수렴하고자 배불정책을 완화하여 원각사(圓覺寺)를 건조하고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하였다. 조선의 문물제도는 성종 때에 완성되었다. 성종은 특히, 유학을 장려하여 홍문관(弘文館)·독서당(讀書堂)을 설치하고, 서거정(徐居正) 등의 보필을 받아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비롯한 여러 서적을 편찬하였으며, 《경국대전》을 완성, 국가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사림을 등용하며 훈구(勳舊) 세력의 강화를 견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은 건국 이후 1세기에 걸쳐 집권체제를 위한 정비작업을 일단락지었다.

 

 

〈변질기〉 연산군(燕山君)∼선조(宣祖):훈구세력에 의하여 지배되던 조선왕조는,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士林)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함으로써 정치적 갈등을 보였는데,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사림세력은 더욱 커지고, 마침내 양자의 대립은 표면화되었다. 연산군의 거듭되는 실정을 계기로 무오사화(戊午士禍)·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연산군은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균형과 조화 위에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성종과는 달리 양파를 모두 배척하여 왕권을 전제화시키려 하여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켰으며, 특히 유자광(柳子光)·임사홍(任士洪) 등의 책동으로 끝내 정치도의를 상실한 채 국민에 대한 수탈을 자행하고 사치와 방탕으로 소일하다가 마침내 일부 유신(儒臣)들의 쿠데타로 쫓겨나고 중종(中宗)이 새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은 사림을 다시 중용하고 특히, 조광조(趙光祖)로 하여금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추진케 하여 무너진 유교정치를 부흥시켰다.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사림세력의 대거 등용을 꾀하였고,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성리학적 윤리와 향촌자치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사림의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높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여망에도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혁의 성격이 너무도 급진적이고 과격하여 반대파의 공세를 받고 마침내 정계에서 밀려났는데,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한다.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훈구파와 대립하였던 사람들은 몇 차례에 걸친 사화로 말미암아 많은 타격을 입고 향촌으로 물러나기도 하였으나, 서원(書院)과 향약을 바탕으로 향촌에 뿌리를 내리면서 그 세력을 확장하여, 명종 때에는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정권을 잡은 후에는 이들 사림들 사이에서 정권다툼이 일어나는데, 이를 당쟁(黨爭)이라 한다. 선조 때에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분파가 당쟁의 시작이다. 지배층의 대립으로 그때마다 옥사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게 되고, 정권이 자주 바뀌면서 왕권은 약화되고 정치질서는 동요되어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소수 양반들에 의한 토지겸병과 농장의 확대는 국가재정을 위축시키고 이에 따라 농민의 부담이 늘어났다. 특히 공납(貢納)·군역(軍役)·환곡(還穀)에 있어서 폐단이 깊어 갔다. 또한 관료제도와 과거제도의 폐단은 양반계층을 대량으로 배출하여 신분구조에도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와 같이 정치·경제·사회의 질서가 변질되고 국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이어서 호란을 맞게 되었다. 조광조·이이(李珥)로 대표되는 16세기의 사림정치는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방강화와 대외정책에 효과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정비기〉 광해군(光海君)∼숙종(肅宗):1592년에 시작되어 7년간 전개된 임진왜란의 피해는 막심하여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고 농촌은 황폐화하였으며 토지대장과 호적대장이 없어져 국가운영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왜군의 방화로 문화재의 손실도 커서 불국사·경복궁 등의 건물, 사고(史庫)의 서적 등이 소실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혁신적인 정치를 추진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을 비롯한 대북파(大北派)의 지지를 받아 즉위한 광해군은, 먼저 전란을 통해서 사림정치의 한계를 느끼고, 일부 사림들을 몰아내고 종친(宗親) 등의 정적을 대거 숙청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이어서 전쟁으로 피폐한 산업과 재정기반을 재건하고 국방을 강화하기 위하여 양전사업·호적사업을 실시하고, 동시에 성지(城池)와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또 전란 중에 질병이 많아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험에 비추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불에 타버린 사고를 다시 갖추었다. 대외정책에서도, 명나라가 약해지고 북방의 여진족이 강성해지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간파하여 여진족의 후금(後金)과도 친선을 도모하는 등, 실리적이고 탄력성 있는 중립적 외교를 추구하였다. 광해군의 실리적이고 혁신적인 정치는 명분을 중요시하는 사림들에게는 크게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광해군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는 등 유교적 윤리에 저촉되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은 사림의 지지를 받은 서인(西人)에 의하여 쫓겨나고 인조(仁祖)가 즉위하였다. 인조를 옹립한 서인정권은 광해군 때의 중립적 외교정책을 지양하고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내세웠다. 1627년 후금은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켰고, 이어 국호를 청(淸)이라 하고 사대(事大)를 요구하며 1636년 다시 침입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다. 인조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45일간 지내다가 끝내 청나라와 화의를 맺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었다. 서인정권은 여진족과의 항쟁과정에서 국방력 강화의 명분을 내세워 금위영(禁衛營)·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어영청(禦營廳) 등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여 이를 선조 때에 마련한 훈련도감(訓鍊都監)과 더불어 5군영이라 하였다.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孝宗)은, 특히 북벌(北伐)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방하고 이에 협력하는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 사림들을 등용하여 군비증강에 노력하였다. 이어서 왕위에 오른 현종(顯宗)과 숙종은 지나친 군비증강에서 오는 재정궁핍을 타개하고, 증대된 서인세력을 견제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남인(南人)들을 등용하였다. 서인과 남인은 예송논쟁(禮訟論爭)·세자책봉의 문제로 한동안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다. 이러한 당쟁의 격화로 정계는 혼란하였고 전후 복구를 위한 시책도 미봉적이었다. 황폐된 농촌사회의 구제와 탕진된 국가재정의 보완을 위한 개혁은 먼저 토지제도의 정비로 나타났고, 이어서 수취체제를 정비하여, 그 운영에 있어 협잡의 가능성이 많은 공법(貢法)에 대신하여 인조 때 영정법(永定法), 효종 때 양척동일법(量尺同一法)을 실시하여 전세(田稅)를 1결당 4두(斗)로 통일하였다. 그리고 지방 특산물이나 수공업제품을 현물로 바치는 공법제도에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나자 쌀로 바치는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였다. 대동법은 일찍이 선조 때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한 이래 인조 때 강원도에서, 효종 때 충청도·전라도에서, 그리고 숙종 때에는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정의 노력과 더불어 민간에서도 전란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활발해졌다. 농업기술이 진전되었고 상공업계도 활성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잉여산물의 교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화폐제도도 개혁되어 인조·효종 때에 부분적인 동전(銅錢)의 주조가 있었고, 숙종 때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전국적으로 사용되었다.

〈안정기〉 영조(英祖)∼정조(正祖):17세기의 조선은 두 차례의 전란을 극복하면서, 현실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정치·군사·경제 등 여러 면에서 개혁을 추진하여 어느 정도 사회가 정비되어 갔다. 18세기에는 이와 같은 사회안정을 바탕으로 국가적 노력과 사회변화가 연결되어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유통경제가 활기를 띠었으며,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사회건설을 이상으로 한 실학이 일어났으며, 서민문화(庶民文化)가 성장하였다. 이와 같은 18세기의 사회발전은 영조·정조의 치적에 힘입은 바 크다.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표방, 당인(黨人)을 고루 등용하여 관료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고, 당인들이 장악한 군사권을 왕권에 귀속시키며, 당쟁의 소굴처럼 된 일부의 서원을 철폐하였다. 한편, 《속오례의(續五禮儀)》 《속대전(續大典)》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무원록(無寃錄)》 등을 편찬하여 문물을 재정비하였다. 또한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여 그 부과에 있어 폐단이 많던 군역제도를 시정하고, 민의(民意)를 파악하고자 신문고제도를 부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로써 왕권이 크게 신장되었고, 관료정치가 정비되었으며, 민생안정에 기여하게 되었다. 정조 역시 영조의 왕권 강화정책을 계승·발전시켜 탕평책을 실시하는 한편,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정약용(丁若鏞) 등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하여 학술활동을 진흥시켰으며 활자개량에도 힘써 편찬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때에 편찬된 서적으로는 《대전통편(大典通編)》 《동문휘고(同文彙考)》 《전운옥편(全韻玉篇)》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탁지지(度支志)》 등이 있다. 요컨대, 18세기에는 사회변화에 대처하고 민생안정을 위한 정치적 노력이 경주되어 중흥정치(中興政治)를 실현시켰고, 한편 서민들의 문화의식이 고양되어 민족문화의 저변이 확대되었고 진폭이 확장되었다. 특히, 이 시기를 전후하여 융성한 실학운동은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한 사회개혁운동으로서, 유교적 기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으나 서서히 근대사회로 지향하는 데 기여하였다.

 

 

〈침체기〉 순조(純祖)∼철종(哲宗):영조·정조의 중흥정치로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던 조선사회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말미암아 흔들리게 되었다. 세도정치의 시작은 정조 때의 홍국영(洪國榮)에서 비롯되었으나, 본격적인 세도가 시작된 것은 어린 순조를 대신해서 장인인 김조순(金祖淳)이 정권을 잡았을 때부터이다. 그의 세도와 함께 내외의 중요 관직은 그의 집안인 안동김씨(安東金氏) 일문이 독점하였다. 헌종(憲宗) 때에 조인영(趙寅永)이 세도를 부려 풍양조씨(豊壤趙氏)가 득세한 때도 있었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세도는 다시 안동김씨에게로 돌아갔다. 60여 년에 걸친 세도정치로 왕권은 매우 약화되었고 부패와 부정이 급속도로 만연하여 매관매직(賣官賣職)과 회뢰(賄賂)가 공공연하게 행해졌고, 지방 각 고을에서는 탐관오리의 착취·횡령으로 국민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특히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국가재정이 파탄에 이르고, 농민들은 가난에 쪼들려 빚에 몰린 끝에 파산하여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거나 도둑떼에 들어갔다. 더구나 일문일족의 권력독점으로 양반사회제도가 밑바탕으로부터 흔들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농민들의 의식이 점차 높아져 곳곳에서 적극적인 반항을 시도하는 민란이 발생하였다. 1811년 순조 때 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은 한때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고, 이후 민란은 더욱 확산되어 철종 때에는 삼남지방(三南地方)을 비롯하여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이때 밖으로는 천주교와 함께 서양세력이 조선에 위협을 주었다. 이에 백성들은 정신적 위안을 얻고자 하여 도교(道敎)가 유행하고 천주교와 동학(東學)에 귀의하기도 하였다.

〈격동기〉 고종(高宗)∼순종(純宗):1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조선의 전통사회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안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양반계층에 저항하는 농민세력이 성장해갔으며, 밖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이 자라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철종의 뒤를 이어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국왕의 생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정권을 장악하자, 안으로는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열강의 접근에 대하여 쇄국정책으로 대항하였다. 그는 먼저 세도정치의 장본인인 안동김씨 일파를 몰아내고, 당파·신분·지방의 구별 없이 실력 본위로 인물을 등용하였다. 또 왕권강화를 위하여 비변사(備邊司)를 폐하고 의정부(議政府)의 기능을 회복하였고, 법치질서의 정비를 위하여 《대전회통(大典會通)》과 《육전조례(六典條例)》를 간행하였다. 또 삼정을 바로잡고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고자 탐관오리를 엄하게 징벌하고, 사치를 금하였으며,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하여 군포(軍布) 부담의 형평을 기하고,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여 환곡을 합리적으로 운영토록 하였고,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그리고 위축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의 위신을 높이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한편 외세의 침략적 접근을 막기 위하여 강경한 쇄국정책을 단행하여 먼저 천주교에 대탄압을 가하고, 이를 구실로 조선에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접근한 프랑스 함대를 격퇴하였다.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 이어서 미국 함대의 침공도 물리치며 쇄국정책을 강화하였으나, 대원군은 명성황후와 유림세력의 반발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조선은 근대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개항을 전후하여 동학사상, 개화사상,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이 자라났고, 정권을 장악한 명성황후 일파는 정치적 경륜이 부족하여 정계는 혼란만을 거듭하였다. 개화와 보수의 갈등은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고, 청·일 양국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에서 독점적 세력을 구축하려고 각축을 벌였다. 두 차례의 정변으로 조선에서의 정치적 세력이 약화된 일본은 경제적 침략을 강화하였다. 일본의 약탈적인 무역은 탐관오리의 수탈과 함께 농민층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쌀의 유출로 인한 물가의 앙등, 일본 어선의 진출에 따른 어민의 실업, 군란·정변 등에 따른 배상금 지불, 개화정책에 따르는 경비의 증대는 모두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불안한 농촌사회를 온상으로 하여 농민의 정신적 지주로 등장한 동학세력은 그 세력의 확장과 더불어 단순한 종교운동에서 벗어나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또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내세우며 마침내 94년 대대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동학운동을 진압하면서 조선정부에 대하여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내정개혁을 요구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일본의 침략을 용이하게 한 갑오개혁은 정치·사회·경제 등 모든 부문에 걸쳐 광범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한 것이었으나 개혁의 반발이 내외에서 일어났다. 특히 일본의 조선정부에 대한 간섭과 만주까지의 세력 확대는 남하정책(南下政策)을 꾸준히 추진하던 러시아의 견제를 받았다. 러시아의 세력이 대두되자 민씨정권은 배일친러정책으로 전환하였고, 이에 당황한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개혁을 더욱 급진적으로 추진하여, 종두법(種痘法)을 실시하고, 단발령(斷髮令)을 공포하였다. 이는 국민의 배일의식(排日意識)을 크게 고취시켰고, 그 결과 항일의병이 일어났다. 배일운동이 거세게 일자, 친러파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고,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자주권이 크게 손상되고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은 조선으로부터 많은 이권을 빼앗아 갔다. 이때를 당하여 안에서는 침략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적 각성과 근대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 갔다. 서재필(徐載弼)을 비롯한 일부 선각자들은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자주·자강과 자유·민권의 민족운동을 일으켰다. 독립협회에서는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면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근대화운동을 추진하였다. 1897년 8월 내외의 여론으로 마침내 고종도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還宮)하여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고, 왕을 황제(皇帝)라 칭하여 자주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은 근대국가로의 발전을 위하여 관제를 개혁하고 사회·경제적인 자강운동을 전개하였고, 특히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의 진흥에 힘썼다. 그러나 외세에 의존하는 고종과 보수적 집권층 때문에 대한제국은 일본·러시아 사이의 흥정 대상이 되어 갔다. 마침내 1904년 러·일전쟁에서 우위를 점한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밀약을 맺어 한국의 강점을 착실히 추진하였다. 즉, 일본은 러·일전쟁을 도발함과 동시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여 군사적 요지를 마음대로 점령한 데 이어 교통통신망을 장악하더니,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 이른바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실시하고, 마침내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을사조약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통감(統監)으로 부임, 이른바 보호정치(保護政治)를 실시하였다. 이어서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켜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조선 정부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이 주재하는 이른바 차관정치(次官政治)를 강행하였다. 1910년 8월 마침내 이완용(李完用) 등 을사5적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막을 내렸다.

 

 

【통치구조】 조선왕조가 지향한 통치체제의 성격은 유교적 양반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관념적으로는 왕권이 강화된 듯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약화되었다. 군왕은 재상(宰相)을 임명하고 재상과 정사를 협의하는 것이 주요 권한이며, 정책결정에서도 재가(裁可)하는 권한만을 가질 뿐, 주도권은 가지지 못하였고, 그 권한은 재상·언관(言官)·감찰관(監察官) 등에 의해 견제되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통치권은 군주가 아니라 재상에게 주어졌다. 《경국대전》에도 재상의 부서인 의정부가 정책결정에 있어 최고의 기관임을 규정하고 있다. 태종·세조 때에 일시적으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가 실시되어 의정부의 기능이 약화된 적도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재상중심체제였다. 한편, 경연(經筵)제도가 있어, 의정부 재상과 홍문관·승정원의 고관이 모여 국왕과 더불어 경사(經史)를 읽으면서 정책을 토론하였는데, 이것 역시 군왕의 독재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언관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구언제(求言制)·상소제(上疏制)·신문고(申聞鼓) 제도 등이 있어 언론이 크게 창달되었다. 조선은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하여 지방의 모든 군(郡)·현(縣)에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었고, 수령(守令)의 지위도 참상관(參上官)으로 높였으며, 상피제(相避制)를 실시하여 본향(本鄕)으로의 취임을 통제하고, 수령들의 토착화를 막기 위하여 임기제(任期制)를 강화하였다. 한편, 관찰사의 기능을 강화하고, 향리(鄕吏)의 지위를 약화시켰으며, 퇴직 관리들에 대한 통제를 가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에서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고 관료조직이 보다 합리적으로 조직된 것은 국민들이 토호나 향리의 사적인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국가의 공적 지배로 들어감으로써 국가기반의 확충이 보장됨을 뜻한다. 중앙집권의 강화로 교통과 통신조직이 전국적으로 짜여지고 행정능률이 개선되었다.

 

〈관품〉 조선의 모든 관료는 동반(東班:문관)·서반(西班:무관)으로 구분되고, 이들 동·서반의 품계는 정(正)·종(從) 각 9품으로 나누어 도합 18품계를 정하여 각 관등의 품계를 일정하게 하였다. 18품계의 관등은 다시 정책결정관인 당상관(堂上官)과 행정집행관인 당하관(堂下官)으로 나뉘며, 당하관은 다시 참상관·참하관으로 구분되는데, 참하관은 참외(參外)라 하여 직계가 낮은 실무자였다.

 

〈중앙관제〉 중앙행정조직은 의정부와 6조(六曹)의 체제로 편제되었다. 의정부는 그 우두머리인 3정승, 즉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합좌기관(合坐機關)이다. 3정승은 국가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하고 그 합의사항을 국왕에게 품의하며, 왕의 재가는 역시 의정부를 거쳐 해당관부에 전달되었다.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조가 각기 맡은 임무는 고려의 6부와 별 차이가 없으나, 그 기능이 보다 강화되었다. 장관을 판서(判書), 차관을 참판(參判)이라 하는데, 이들 고급 행정관원은 정책결정에 참여하여 기능적 분화와 통일성을 조화시켰다. 이 밖에 왕명의 출납을 맡은 승정원(承政院)이 있어 그에 소속된 도승지(都承旨) 이하 6승지는 각기 6조의 행정업무를 분담하여 왕의 비서(書) 기능을 맡았으므로 때로는 다른 기관을 무시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행정기관을 견제하는 기구로서 홍문관(弘文館)·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이른바 3사(三司)가 있다. 이들 3사는 정책결정 및 집행과정의 착오와 부정을 막기 위한 언관으로서, 특히 사헌부는 백관을 규찰하는 감찰관이기도 하였으며 서경(署經)이라 하여 임명된 관리의 신분·내력 등을 조사하여 그 가부를 승인하는 임무도 맡았다. 홍문관은 집현전(集賢殿)의 후신으로서, 경적(經籍)을 모아 정사를 토론하고 문필을 다스려서 국왕의 고문 역할을 하였다. 사간원은 국왕의 정치에 대한 간쟁(諫爭)을 임무로 하였으므로, 3사는 의정부 6조의 행정기관을 견제하는 위치에서 권력의 편중을 막았다. 그리고 국왕의 명을 받아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義禁府), 역사를 편찬하는 춘추관(春秋館), 서울의 행정을 맡은 한성부(漢城府), 백성의 죄를 다스리는 포도청(捕盜廳) 등이 있다. 조선의 통치구조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변질되어 갔는데, 비변사(備邊司)가 정치의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비변사는 초기에 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을 중심으로 군무를 협의하던 임시기구였으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상설기구가 되면서 문무 고위관리들의 합의기관으로 확대되고 군사는 물론 정치·외교 등 일반 정무까지도 처결하였다. 비변사에는 위로 3정승으로부터 공조를 제외한 5조판서, 5군영의 대장들, 유수(留守)·대제학 그리고 군무에 능한 현·전직고관 등 당상관 이상의 문무 고위관리가 참여하였는데, 이로써 조선 전기의 최고 정무기관인 의정부의 기능은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가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 후 대원군에 의해 비변사가 폐지되고 의정부의 기능이 복구되었으나, 1880년 관제개혁 때 최고의 행정부로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 그 밑에 12사(司)를 두어 사무를 분장케 하고, 통리기무아문의 장관을 총리대신(總理大臣)이라 하였다. 이어서 임오군란 후 통리기무아문을 분리, 외무행정을 맡아 보는 통리아문(統理衙門:外衙門), 내무행정과 군국기무를 맡은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內衙門)을 설치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중앙에는 궁내부(宮內府)·의정부(議政府)의 2부와 내무·외무·탁지(度支)·군무(軍務)·법무·학무·공무·농상무(農商務)의 8아문을, 지방에는 8도를 고쳐 13도를 설치하였다. 곧이어 궁내부를 독립시키고, 의정부를 내각(內閣)으로 고쳐 내부·외부·탁지부·군부·법부·학부·농상공부의 7부를 직속시켜 내각의 장관을 총리대신이라 하고 각부의 장관을 대신이라 하였다. 그 밖에 특수기관으로 감찰업무를 맡은 도찰원(都察院), 자문기관인 중추원(中樞院), 회계를 맡은 회계심사원(會計審査院), 경찰업무를 맡은 경무청(警務廳), 최고재판소인 의금사(義禁司), 서울의 행정을 맡은 한성부 등이 설치되었다. 개화기 정치제도의 특징은 행정과 사법의 분리에 있다

                                                              

 

성균관(成均館)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에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개칭하면서부터이다. 충숙왕대인 1308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대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聖殿)과 동무(東)·서무(西)·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좨주(祭酒)·악정(樂正)·직강(直講)·박사(博士)·학정(學正)·학록(學錄)·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儒生)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蔭敍)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격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 점수 원점(圓點)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이 대과 초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의 생활은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자치적인 활동기구로 재회(齋會)가 있었다. 유생은 기숙사생활을 하는 동안 국가로부터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 등을 제공받았으며, 교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錢穀)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하였다. 유생은 또한 당대의 학문·정치현실에도 매우 민감하여 문묘종사(文廟從祀)나 정부의 불교숭상 움직임에 대해 집단 상소를 올렸으며,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권당(捲堂:수업거부) 또는 공관(空館)이라는 실력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학문의 전당으로서 관리의 모집단으로 주요한 기능을 한 성균관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교육재정이 궁핍화하고 과거제도가 불공정하게 운영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1894년의 갑오개혁은 성균관의 역사에서 중요한 굴절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면서 일정한 변모를 겪게 되었다.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 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태학지(太學志)》에는 성균관의 건물 배치도 및 성균관 제도의 변천과정, 유생의 활동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성균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

                                                                    

 

정도전(鄭道傳, 1337∼1398)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학자. 본관 봉화(奉化). 자 종지(宗之). 호 삼봉(三峰). 1362년(공민왕 11) 진사, 이듬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부모상으로 사직하였다. 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75년(우왕 1) 성균사예(成均司藝)·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고 이 해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親元排明)정책을 반대하다가 회진현(會津懸)에 유배되었다. 77년 유형을 마치고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83년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막료가 되었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 정몽주(鄭夢周)의 서장관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85년 성균좨주(成均祭酒), 이듬해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있다가 88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승진하였다. 이성계의 우익으로서 조준(趙浚)과 함께 전제개혁론을 주장, 89년(창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고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는데 적극 가담하여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君)에 책록되었다. 90년(공양왕 2) 경연지사(經延知事)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事兼成均大司成)·삼사부사(三司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듬해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자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가 되고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직 중, 구세력의 역습으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봉화로 유배되었다. 92년 한때 풀렸으나 정몽주의 탄핵으로 투옥되었고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나와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그 공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에 임명되어 사은 겸 정조사(謝恩兼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94년(태조 3) 한양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게 하고 95년 정총(鄭摠) 등과 《고려사》 37권을 찬진했으며, 97년 동북면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역참(驛站)을 신설했다. 제l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에게 참수되었다. 유학(儒學)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외교·행정·역사·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삼봉집(三峰集)》 《경제육전(經濟六典)》 《경제문감(經濟文鑑)》 《심기리편(心氣理篇)》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진법서(陳法書)》 《금남잡제(錦南雜題)》 등이 있고, 작품에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 <신도가(新都歌)> 등이 있다.

                                                

 

기화(己和, 1376∼1433)

 

    조선 전기의 승려. 본관 충주(忠州). 속성 유(劉). 이름 수이(守伊). 법호 득통(得通). 당호 함허(涵虛). 1396년(태조 5) 관악산 의상암(義湘庵)으로 출가하였으며, 이듬해 회암사(檜巖寺)로 가서 무학왕사(無學王師)에게 법요(法要)를 배운 후, 여러 곳을 다니다가 다시 회암사에 가서 홀로 수도에 정진하였다. 그 뒤 공덕산(功德山)의 대승사(大乘寺), 천마산(天摩山)의 관음굴(觀音窟), 불희사(佛禧寺) 등에서 학인(學人)들을 지도하고 자모산(慈母山) 연봉사(烟峰寺)에 들어가 함허당(涵處堂)이라 이름하고 3년간 수도를 계속하였다. 1420년(세종 2) 오대산에 가서 여러 성인들을 공양하고 월정사(月精寺)에 있을 때 세종이 청하여 대자어찰(大慈御刹)에 머물렀다. 4년 후 이를 사퇴하고 길상(吉祥)·공덕(功德)·운악(雲嶽) 등 여러 산을 편력하다가 31년 희양산(曦陽山)에 이르러 봉암사(峰巖寺)를 중수(重修)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에 《원각경소(圓覺經疏)》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현정론(顯正論)》 《반야참문(般若懺文)》 《윤관(綸貫)》 등이 있다.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己和)의 시문집. 규장각본은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본은 활자본. 1권. 표제(表題)는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 1988년 경인문화사에서 간행한 한국역대문집총서에 실려 있다. 1440년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간행. 전여필(全汝弼)의 서문과 제자 야부(T夫)의 행장이 있다. 1940년 월정사(月精寺)에서 활자본으로 중간하였는데, 여기에는 권상로(權相老)가 첨부한 <금강경서(金剛經序)>와 <법화경후발(法華經後跋)> 및 출가시(出家詩)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행장, 천가법어(薦駕法語) 27편, 찬·송·가·음(吟) 12편, 시문 92수, 시중(示衆)·권념(勸念) 2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가법어·제문·헌향·수어 등은 모두 죽은 자를 위한 법문이나 제문이다. <원각경송(圓覺經頌)>과 <법화경송(法華經頌)>은 《원각경》과 《법화경》의 중심 내용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종풍가(宗風歌)>는 7언 20구로 된 게송으로 오늘날 한국 불교의 사상적인 풍조를 축소해 놓은 듯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경음(自慶吟)>은 4언 80구로 부동지(不動地), 평등성지(平等性地), 일초칙입여래지(一超則入如來知)에 이른 자신의 심경을 가식없이 표현하였다. 그는 <미타찬(彌陀讚)>과 <안양찬(安養讚)>에서 아미타불에 대한 염불의 효험을 극구 찬양하였다. 조선 전기 배불의 도도한 흐름속에서 《현정론(顯正論)》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등의 저술을 통하여 이념적으로 유교와 불교의 공존을 모색하고자 노력했음에도 수많은 사원들이 헐리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승려로서의 심회를 노래한 시가 <유감(有感)>이다.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 진보(眞寶).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예안(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李%)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 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28년 진사가 되고 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박사(博士)·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39년 수찬(修撰)·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52년 대사성에 재임, 54년 형조·병조의 참의에 이어 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68년(선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기(氣) 이원(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修正天命圖說·聖學十圖·自省錄·朱書記疑·心經釋疑·宋季之明理學通錄·古鏡重磨方·朱子書節要·理學通錄·啓蒙傳疑·經書釋義·喪禮問答·戊辰封事·退溪書節要·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

                                                               

 

4단 7정론(四端七情論)

 

    조선시대의 석학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주장한 인생관의 논리적 학설. 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慾)을 말한다. 이황은, 4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이황의 이러한 학설은 그 후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200여 년 간에 걸쳐 유명한 사칠변론(四七辯論)을 일으킨 서막이 되었다. 즉 기대승(奇大升)은 이황에게 질문서를 보내어,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내세웠으며, 이를 다시 이이(李珥)가 뒷받침하여 이기이원론적 일원론(理氣二元論的一元論)을 말하여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이이의 기호학과(畿湖學派)가 대립, 부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는 마침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사이에 벌어진 당쟁(黨爭)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릉 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정치사상】 이이가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말~선조 초는 명종대에 정치를 좌우한 척신이 제거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상한 정치적 변동기였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尹元衡) 등 그간 정사를 전횡한 권신이 차례로 쫓겨나고, 을사사화 때 죄를 입은 사람들이 신원되는 등 정세가 일변함에 따라 사림이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의 정계 진출은 더욱 본격화되어 그동안 훈척정치하에서 이루어진 폐정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방안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의 고위관직을 상당부분 차지한 구신(舊臣)과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포진한 사림이 대치한 정국의 구도 속에서 구체제 인물에 대한 처리 방식을 놓고 사림간의 견해차이가 드러났는데, 강온의 입장차이에 따라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갈렸다. 이이는 처음에는 훈척으로부터 사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사림의 정치집단인 붕당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나, 이 때에 사림이 분열하자 붕당의 지나친 분파활동이 수반하는 폐단을 경계하며 사림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분열된 사림의 결합을 위한 그의 노력은 치열해져가는 정쟁(政爭)의 격화 속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자신마저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그의 붕당관은 그가 가진 시국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훈척정치 아래에서 파생된 많은 사회적 모순과 폐정을 개혁하여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제 막 정권담당층으로 자리굳힌 사림의 총력을 결집시킬 필요성에서 그 분열과 소모적인 논쟁을 경계한 것이다. 자기가 살던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 뒤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는 ‘중쇠기(中衰期)’라고 진단하고서, 시급한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변통(變通)을 통한 일대 경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의 저술을 통하여 안민(安民)을 위한 국정 개혁안을 선조에게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경장론(更張論)’이다. 《만언봉사》에 의하면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법을 마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시대가 바뀌면 법제도 맞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이 이루어져야 안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가 당시 조선 사회를 중쇠기로 파악한 구체적 증후로서 지배층의 기강 해이와 백성의 경제적 파탄을 들었는데, 그 원인은 각종 제도의 폐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잘못된 제도를 경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장의 구체적인 방법은 국가의 통치체제 정비를 통해 기강을 확립하고, 공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서원향약(西原鄕約)·해주향약(海州鄕約)·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등을 만들어 향약과 사창법을 실시함으로써 향촌에서의 농민생활 안정과 사족중심의 향촌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안민을 이루어 중세사회의 동요를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장론은 동·서인의 분쟁 격화와 선조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당대에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시의를 쫓아 실공(實功)과 실효를 강조한 현실적 면모를 보이는데, 진리란 현실 문제와 직결된 것이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점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이기론, 즉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한 율곡성리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철학사상】 16세기 전반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로 이기론·사단칠정론·인심도심설 등 이기심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어 이를 둘러싼 논쟁과 학문적 심화과정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정착되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간의 사칠논쟁, 이를 둘러싼 성혼과 이이와의 우율논변(牛栗論辨)이 벌어지고, 서경덕과 이황이 각기 기(氣)와 이(理)를 둘러싸고 학설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이는 이들의 주장을 아우르며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하였다. 이황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기뿐만 아니라 이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을 견지하여 ‘이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理發而氣隨之氣發而理乘之)’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사단칠정론에도 그대로 이어져 순선(純善)인 사단(四端)은 이발(理發)의 결과이고 유선악(有善惡)인 칠정(七情)은 기발(氣發)의 결과이므로, 결국 사단과 칠정을 별개로 취급하여 ‘사단대칠정’ 논리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이는 이발을 인정하지 않고 ‘발하는 것은 기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라고 하여 ‘기발이이승지’의 한 길(一途)만을 주장하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이것 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칠정은 정(情)의 전부이며, 사단은 칠정중에서 선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것이라고 하여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칠정포사단’의 논리를 전개하여 기대승의 사단칠정론에 찬동하였다. 이이의 경우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표현하였다. 이들이 이런 사상을 갖게된 현실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황의 경우 이이보다 35년 연상으로 훈척정치하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살면서 타락한 정치윤리와 도덕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보다는 이, 칠정보다는 사단, 인심보다는 도심에 역점을 두어 선(善)을 지향하는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이의 경우, 정권 담당층이 훈척에서 사림으로 교체되는 등 개선된 정치 여건속에서 시급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현실에 적극 참여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의리와 실사(實事)가 결합되고 이와 기가 통합된 일 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이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氣)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이가 현실 속에서는 구체적 기에 의해 규정되고 따라서 보편적 이는 구체적인 변화상을 떠나서는 추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주장한 경장론의 변통논리와 일맥 상통한다. 이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氣局) 속에는 항상 보편적 이(理通)가 존재한다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시하였다. 이를 서경덕의 주기론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 이이는 그가 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기불리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서경덕이 궁극적 존재를 기, 즉 태허지기(太虛之氣)로 인식한 데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여 궁극적 존재는 태허지기가 아니라 바로 이, 즉 태극지리(太極之理)라고 주장하여 이의 중요성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결국 이이는 서경덕의 기 위주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의 중요성을 들어 비판하고, 이황의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는 기의 중요성과 이기불리를 들어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 이기지묘를 주장하였으니,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상이한 주장을 균형있게 아우르며 그의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사화(士禍)

 

    조선시대에 조신(朝臣) 및 선비들이 반대파에게 몰려 화(禍)를 입은 사건. 조선 개국 이래 역대의 임금이 문치(文治)에 힘을 쓰고 유학(儒學)을 장려했기 때문에 우수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고, 선비사회, 즉 유림(儒林)은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세조∼성종 때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 주의·사상·감정·정실(情實)·향토(鄕土)관계 등으로 여러 파별(派別)이 생겼는데, 개중에는 기미가 상통하는 파도 있었으나 서로 대립·반목하는 파도 있었다. 이를 네 파로 대별하면 훈구파(勳舊派)·절의파(節義派)·사림파(士林派)·청담파(淸談派) 등이다. 그 중의 훈구파는 세조의 찬역(簒逆)을 도와 높은 지위와 많은 녹전을 차지한 부귀가 겸전한 일파인데,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이석정(李石亭)·양성지(梁誠之)·권람(權擥)·신숙주(申叔舟)·강희맹(姜希孟)·서거정(徐巨正)·이극돈(李克墩) 등이다. 절의파는 세조의 찬역행위를 절대반대한 김시습(金時習) 등의 생육신(生六臣)을 중심으로 한 파이다. 사림파는 경상도 밀양(密陽) 출신인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일파이다. 사림파의 중심인물인 김종직은 동방성리학(性理學)의 정통을 이어받은 대학자로서 그의 제자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위(曺偉)·김일손(金馹孫)·유호인(兪好仁)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세조의 찬역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점에서는 절의파와 일맥상통하지만 적당한 기회를 얻으면 조정의 요직에 들어가 포부를 펴보려는 점에 있어서는 절의파와 생각을 달리하였다. 그러므로 훈구파에 있어서 정면의 적은 사림파였다. 청담파는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 서울 동대문 밖 죽림에 모여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세월을 보낸 일파로서 남효온(南孝溫)·홍유손(洪裕孫) 등이 대표적이다. 훈구파는 조정의 요직에 있어 세조∼성종 시대의 여러 가지 관찬사업(官撰事業), 즉 조정에서 간행하는 서적 편찬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한 나라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들의 녹전은 주로 경기도·충청도에 있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볼 때, 이들은 기호파(畿湖派)이고,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은 대개 경상도, 즉 영남(嶺南)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영남파라 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대립과 반목이 점점 심각해졌는데, 1498년(연산군 4) 두 파는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그 결과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파의 일격에 사림파는 패배하였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게재(揭載)한 것에서 발단이 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의하여 김종직은 이미 죽은 후였으므로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욕을 당하고 그 밖의 많은 제자들은 처형되거나 귀양갔다. 두 번째의 사화는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갑자사화는 투기가 심하여 왕비(王妃)의 자리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은 성종의 비(妃) 윤씨(尹氏)의 소생인 연산군이 성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후 생모(生母)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되자, 폐비에 찬성한 신하들과 평소에 연산군의 학정을 불평하던 일부 사림파의 선비들을 한데 묶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일어났다. 이것은 무오사화처럼, 훈구·사림파 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선비가 많이 죽음을 당하였다는 의미에서 사화이다. 세 번째의 기묘사화(己卯士禍)도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대립에서 발생한 사화이다. 훈구파의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훈에 비판적이던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일으켜 심정(沈貞)·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에게 타격을 가하려다 그들의 반격을 받아 패배한 사건이다. 조광조·김식(金湜)·기준(奇遵)·한충(韓忠)·김구(金絿)·김정(金淨)·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등의 기묘명현(己卯名賢)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네 번째는 1545년(인종 1)의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이것은 왕실의 외척인 윤임(尹任), 즉 대윤(大尹)과 같은 파평(坡平) 윤씨인 윤원형(尹元衡), 즉 소윤(小尹) 사이의 권력다툼에 말려들어 많은 선비가 타격을 받은 사건이다. 이것도 갑자사화의 경우처럼 선비사회 사이의 싸움은 아니지만 많은 선비가 희생되었기 때문에 사화라고 한다. 4대사화는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당쟁(黨爭)이 일어나기 전의 선비들에 대한 옥사였다. 그러나 사화는 소수인의 음모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고, 파당을 가진 다수인의 공공연한 논쟁이 따르는 대립과 투쟁에서 패자는 반역자로 몰려 지위를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고, 한 파가 승리하면 이에 대하여 새로운 반대파가 또 생겨 그것이 또다른 사화를 야기시켰다. 이러는 동안 정치의 기강은 더욱 문란해지고, 뜻있는 선비들은 관직을 버리고 당·서원 등을 세워 유생(儒生)들의 집합 또는 강학(講學)의 장소로 삼는 동시에, 그들 일족의 자녀교육을 하고 이를 통하여 동족적인 당파의 결합을 굳게 하였다. 이와 같이 사화에 의하여 육성된 정치비판과 반대파에 대한 복수관념은, 서원의 발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당쟁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뜻있는 선비들의 향토 복귀와 교육 실시는 고관대작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공리적·세속적인 관학(官學)에 대하여 수양과 사색을 주로 하는 진리탐구의 참다운 학문을 하겠다는 사조와 경향을 낳게 하고, 이로 인하여 사학(私學)의 대연원(大淵源)이 열리게 되었다.

                                                    

 

훈구파(勳舊派)

 

    조선 세조의 찬위(簒位)를 도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관료학자들.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권람(權擥)·서거정(徐居正)·양성지(梁誠之)·이석형(李石亨)·강희맹(姜希孟)·이극돈(李克墩) 등이 이 파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조의 공신(功臣)·충신(忠臣) 또는 어용학자(御用學者)들로서 높은 관직에 기용되었고, 관찬사업(官撰事業)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수차에 걸친 공신전(功臣田)의 지급을 통하여 막대한 농장(農莊)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신진사류(新進士類)인 사림파(士林派)의 등장으로 그 세력이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즉, 사림파는 훈구파에 대해 토지제도의 개혁을 요구함으로써 두 세력 사이에 충돌을 야기하였으며,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훈구파는 이 사화에서 영남유생과 싸워 승리했고,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도 사실상 승리하였다.

                                                    

 

사림(士林)

 

    조선 중기에 사회와 정치를 주도한 세력을 지칭하는 말. 고려 말·조선 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두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은 15세기 말엽에 와서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니는 정치세력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본래 지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중소지주 출신의 지식인으로,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기보다는 지방에서 유향소(留鄕所)를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해 오던 세력이었다. 학문적으로는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을 중시하였고, 경학의 기본 정신을 송대 신유학 가운데서도 성리학(性理學)에서 구하였다.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金宗直)이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 등의 제자를 배출하면서 그 세력이 커졌다. 성종 초에 김종직 등 영남출신 사류(士類)를 등용하면서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훈신(勳臣)들의 장기 집권에 따른 비리로 인해 동요하는 지방사회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세조 말에 혁파된 유향소제도를 부활하여 《주례(周禮)》의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기반이 강한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유향소가 권력가의 지방에 대한 수탈의 하부조직으로 악용되었다. 이에 지방에서는 사마소(司馬所)라는 독립기구를 만들어 대항하는 한편, 중앙에서는 삼사(三司) 등 주로 언론·문필 기관의 관직을 통해 정계로 진출하여 훈신·척신(戚臣) 계열의 비리를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에 대한 훈신·척신의 보복으로 사화가 발생하여 그 세력이 크게 제거되었지만, 중종대에 다시 정계에 진출하여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일종의 천거제인 현량과(賢良科)를 통해 자기 세력을 중앙으로 크게 진출시키고, 지방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주자(朱子)가 증손(增損)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군현마다 시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훈신·척신의 강한 반발로 또다시 사화가 발생하여 그 세력이 크게 꺾였다. 이후 지방에서 서원(書院)과 향약을 토대로 기반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다가, 16세기 후반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정치가 일단 종식되면서 중앙에 활발하게 진출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에는 척신정치의 척결문제를 둘러싸고 선배 관인과 후배 관인이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대립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붕당(朋黨)으로의 분기가 거듭되고 일부 세력의 도태를 겪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17세기 후반까지 학연을 기반으로 한 서인·남인(南人)을 중심으로 붕당정치의 질서를 수립하였다. 권력가들의 탄압을 뚫고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면서 자기들의 이념을 정치에 구현하려 한 전통은 그후 조선 후기의 지배층이 사회와 국정을 이끄는 기본정신이 되었다.

                                                                

 

서원(書院)

 

    조선 중기 이후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기관(私設機關). 서원의 명칭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궁중에 있던 서적(書籍)의 편수처(編修處)이던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에서 유리한 것인데, 송나라 때 지방의 사숙(私塾)에 조정(朝廷)에서 서원이라는 이름을 준 데서 학교의 명칭이 되어 수양(陽)·석고(石鼓)·악록(嶽麓)·백록동(白鹿洞) 등의 4대서원이 생겼으며, 특히 주자(朱子)가 강론(講論)을 하던 백록동서원은 유명하였다. 이 후 서원은 선현(先賢)과 향현(鄕賢)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를 아울러 갖추게 되었는데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서재(書齋)·서당(書堂)·정사(精舍)·선현사(先賢祠)·향현사(鄕賢祠) 등과 문익점(文益漸)을 제사하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1401년(태종 1) 단성(丹城)에, 김굉필(金宏弼)을 제사하는 천곡서원(川谷書院)이 1528년(중종 23) 성주(星州)에, 김구(金坵)를 제사하는 도동서원(道洞書院)이 34년(중종 29) 부안(扶安)에 각각 세워졌으나 모두 사(祠)와 재(齋)의 기능을 겸비한 서원은 없었는데, 42년(중종 37) 경상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관내 순흥(順興) 백운동(白雲洞)에 고려 유교(儒敎)의 중흥자(中興者) 안향(安珦)의 구가(舊家)가 있음을 알고 거기에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경적(經籍)을 구입하여 유생들을 모아 가르치니 이것이 사와 재를 겸비한 최초의 서원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그 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와서 이를 보고 중국 백록동 고사(古事)처럼 조정에서 사액(賜額)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명종은 50년(명종 5) 이를 권장하는 뜻에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친필로 쓴 액(額: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노비(奴婢)를 급부(給付)하면서 이들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免稅)·면역(免役)의 특권을 내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서원의 설치는 전국에 미쳐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24개에 이르렀고,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 설치한 것만 300여 개소에 이르러 1도에 80~90개의 서원이 세워졌으며, 국가 공인(公認)의 절차인 사액(賜額)의 청원에 따라 사액을 내린 서원도 늘어나 숙종 때만 해도 130여 개소에 이르렀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향현을 제사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 시정(時政)을 비판하는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형성하는 구실을 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증설되어감에 따라 혈연(血緣)·지연(地緣)관계나 학벌(學閥)·사제(師弟)·당파(黨派)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집단화(利益集團化)하는 경향을 띠게 되고 사액서원의 경우 부속된 토지는 면세되고, 노비는 면역되기 때문에 양민의 투탁(投託)을 유인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서원은 양민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軍役)을 기피하는 곳이 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군정(軍丁)의 부족을 초래하였고 불량유생의 협잡소굴이 되는가 하면 서원세력을 배경으로 수령(守令)을 좌우하는 등 작폐도 많았다. 또한 면세의 특권을 남용한 서원전(書院田)의 증가로 국고 수입을 감퇴시켰으며, 유생은 관학(官學)인 향교(鄕校)를 외면, 서원에 들어가 붕당(朋黨)에 가담하여 당쟁에 빠져 향교의 쇠퇴를 가속시켰다. 서원의 폐단에 대한 논란은 인조(仁祖) 이후 꾸준히 있었으나 특권 계급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1657년(효종 8) 서필원(徐必遠)은 서원의 폐단을 논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효종·숙종 때는 사액(賜額)에 대한 통제를 가하고 누설자(累設者)를 처벌하는 규정까지 두었으나 잦은 정권 교체로 오히려 증설되었다. 1738년(영조 14) 안동 김상헌(金尙憲)의 원향(院享)을 철폐한 것을 시발로 대대적인 서원 정비에 들어가 200여 개소를 철폐하였으나 그래도 700여 개소나 남아 있었으며 이 중 송시열(宋時烈)의 원향이 36개소나 되어 가장 많았고, 유명한 것으로는 도산서원(陶山書院)·송악서원(松嶽書院)·화양서원(華陽書院)·만동묘(萬東廟) 등이 있었다. 1864년(고종 1)에 집권한 대원군(大院君)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여, 서원의 설치를 엄금하고 그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d)의 천거로 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감찰·정언·수찬·교리·전한 등을 역임하고 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향약(鄕約)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시행주체·규모·지역 등에 따라 향규(鄕規)·일향약속(一鄕約束)·향립약조(鄕立約條)·향헌(鄕憲)·면약(面約)·동약(洞約)·동계(洞契)·동규(洞規)·촌약(村約)·촌계(村契)·이약(里約)·이사계(里社契)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다. 시행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예속(禮俗)을 보급하고, 농민들을 향촌사회에 긴박시켜 토지로부터의 이탈을 막고 공동체적으로 결속시킴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16세기에 농업 생산력의 증대, 이에 따른 상업의 발달 등 경제적 조건의 변화로 향촌사회가 동요하고, 훈구파의 향촌사회에 대한 수탈과 비리가 심화되었다. 이에 중종대에 정계에 진출한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파(士林派)는 훈척들의 지방통제 수단으로 이용되던 경재소(京在所)·유향소(留鄕所) 등의 철폐를 주장하고 그 대안으로서 향약의 보급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소농민경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한 중소지주층의 향촌 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일단 좌절되었으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선조대에 와서 각 지방의 여건에 따라 서원(書院)이 중심이 되어 자연촌, 즉 이(里)를 단위로 시행하였다. 이 시기에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에 의해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의 강령인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바로잡아주며, 예속을 서로 권장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준다는 취지를 살려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이 마련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족세력은 하층민들을 통제하고 사족 중심의 신분질서를 강화할 목적에서 양반신분의 상계(上契)와 상민신분의 하계(下契)를 합친 형태의 동약(洞約)을 만들었다. 보통 몇 개의 자연촌을 합친 규모로 운영되었으며, 목천동약(木川洞約)과 영조 때의 퇴계학파 최흥원(崔興遠)이 이황의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증보하여 사용한 《부인동동약(夫仁洞洞約)》이 유명하다. 또한 1571년(선조 4) 이이는 《여씨향약》 및 《예안향약》을 근거로 《서원향약(西原鄕約)》과 이를 자신이 수정 증보하여 77년에  《해주향약(海州鄕約)》을 만들었는데, 이들 향약은 조선후기에 가장 널리 보급된 한국 향약으로서는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유향(儒鄕)이 나누어져 사족의 영향력이 약화된 반면에, 면리제(面里制)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수령권(守令權)이 강화되어, 지방관이 주도하여 향약이 확산되어 갔다. 면을 단위로 하여 기존의 동계·촌계를 하부단위로 편입시켜 신분에 관계없이 지역주민 전부를 의무적으로 참여시켰다. 18세기 중엽 이후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던 기존의 수취체제가 수령에 의한 향약의 하부구조로서 공동납체계 속에 포함되면서 그 성격이 변모되어갔고, 동계운영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하층민의 요구와 입장이 첨예하게 표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층민이 참여하기를 꺼리거나 하계안이 없어지는 현상이 일반화되어, 사족이 주도하는 동약에서의 운영권은 기층민간의 생활공동체로서의 촌계류(村契類) 조직과 마찰을 일으키고 점차 기층민의 입장이 반영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19세기 중 후반 서학(西學)·동학(東學) 등 주자학적 질서를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함에 따라 향약의 조직은 위정척사운동에 활용되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측에서 미풍양속이라는 미명 아래 식민통치에 활용하였다.

                                                       

 

사색 당파(四色黨派)

 

동인(東人)

    조선 중기의 정파.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 정계를 장악한 사림파(士林派)들 가운데서 후배 관인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어 주로 선배들로 구성된 서인(西人)에 맞섰다. 명칭은 후배측 입장에서 분파의 계기를 이룬 김효원(金孝元)의 집이 동쪽에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중심 구성원은 유성룡(柳成龍)·이산해(李山海)·이발(李潑)·우성전(禹性傳)·최영경(崔永慶) 등이었다. 대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로 구성되어 처음부터 학연적 성격이 짙었다. 특히 심성(心性)을 강조하면서 훈척정치(勳戚政治)와의 투쟁과정에서 사상적 지주로 형성되어온 이황의 학문이 사상적 중심이 되었던 만큼, 구체제의 요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렬하고 훈구정치의 인물과 체제를 급격히 청산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그리하여 수뢰혐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 등의 방식으로 서인을 압박하였으나, 그러한 공세적 입장으로 인하여 오히려 시류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이 가담함으로써 순수성이 훼손되는 부작용도 겪었다. 1582년(선조 15) 이이(李珥)가 중재 노력을 포기하고 서인을 자처한 이후로 그들과의 사이에 굳어진 양당체제에서 명분과 실력면으로 우위를 점하였다. 89년 자파 인물인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수세에 몰렸으나, 2년 후 서인 지도자 정철(鄭澈)이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에 의해 축출되자 세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 전부터의 내부적 입장 차이가 이때 서인에 대한 공세를 둘러싸고 격화되어, 정철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는 이산해·정인홍(鄭仁弘) 중심의 북인(北人)과 온건론을 주장하는 우성전·유성룡 등의 남인(南人)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조식의 문인이고 후자는 이황의 문인이라는 학연적 성격을 가졌다. 남인과 북인으로의 분기 이후에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동질성(同質性)이 사라지고 모두 동인이라는 명칭도 의미를 잃었다.

 

서인(西人)

    조선 중기의 정파. 15세기 말 이후 중앙에 진출하여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탄압을 이겨내고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정계를 장악한 사림파(士林派)들 가운데서, 훈구정치(勳舊政治)의 인물과 체제를 급격히 청산하려는 후배 관인들인 동인(東人)에 대립한 선배 세대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명칭은 분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심의겸(沈義謙)의 집이 도성 안 서쪽에 있었던 데서 기인하였다. 초기에는 학문적 구심이나 확고한 중심인물이 없었지만, 중립적 입장에 서서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려던 이이(李珥)가 동인 일부의 극단적인 주장에 그 노력을 포기하고 서인임을 자처하게 되자 그와 성혼(成渾)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선조대 중반까지 적극적인 체제 개혁을 내세운 동인의 공격을 받는 수세적인 입장에 있다가, 1588년(선조 21) 모반을 기도했다는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계기로 정철(鄭澈)이 중심이 되어 동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정철이 국왕의 후계를 세우자고 건의한 것이 선조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곧 실세하였다. 그 후 정치의 주도권을 남인과 북인에게 넘겨준 상태에 있었으나, 광해군대 북인이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입지가 좁아지자 1623년에 무력을 동원하여 인조를 추대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였다[仁祖反正]. 인조대에는 공신세력과 일반 사류들의 대립이 계속되어 통일된 정파적 입장을 가지고 정치를 운영하지는 못하였고, 효종 즉위 후에 공신세력을 축출함으로써 강력하게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김육(金堉)과 김집(金集)의 대립 등 그 내부에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그 후 현종대 왕실 상례(喪禮)문제 등을 쟁점으로 남인과 크게 대립하였고[禮訟] 숙종대에 들어가서도 계속되는 공방전에 진퇴를 거듭하였으나 1694년의 남인 축출로 권력을 확고히 함으로써 조선 후기까지 중앙권력은 대개 이들의 후계세력이 장악하였다. 숙종 초기에 이미 그 내부에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분파되었고,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蕩平策) 밑에서 정치세력과 명분의 재편이 이루어졌으므로, 한 정파로서 어느 정도 통일된 입장을 유지한 것은 숙종대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황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하고 이이와 성혼의 권위를 적극 내세웠으므로 그들을 성균관(成均館)의 공자 사당[文廟]에 모시려는 정책이 남인과의 대립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그 학통은 김장생(金長生)·김집·송시열(宋時烈) 등에게 이어졌고, 17세기에는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예론(禮論)의 정리를 과제로 하였다. 학문과 정치의 주제로 삼은 명(明)나라에 대한 사대나 왕실 상례 등이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으나, 조선 후기에는 그것들 자체가 사회 주도이념으로서의 구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구성원들은 대동법(大同法)·호포제(戶布制)와 같은 구체적인 정책이나 농사 방법 등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남인(南人)

    조선 중·후기 동인(東人)으로부터 북인(北人)과 함께 분파된 정파. 1588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이용하여 동인에 타격을 가한 서인에 대해, 절충적 입장을 지킨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을 중심으로 성립하여, 적극적인 서인 배격을 주장한 정인홍(鄭仁弘)·이발(李潑) 등의 북인과 맞섰다. 학맥으로 이황(李滉)의 제자와 지역적으로 경상좌도의 기반에서 성장한 사림이 중심이 되었다. 시비의 분별보다 정파간의 협동에 의한 정국의 안정에 중점을 두는 입장을 지녔으며, 임진왜란 중에 서인·북인 세력과 공존하면서 정국을 주도해 전란 극복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의 싸움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 강력한 주전론의 비판을 받아, 전란 말기에 실세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북인의 독주에 대해 서인과 함께 비판적 입장을 취하다가, 인조를 추대한 서인의 정변(인조반정)을 인정하고 이원익(李元翼)·정경세(鄭經世)·장현광(張顯光) 등을 중심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이때는 몇몇 쟁점에서 서인과 대립하기도 하나, 그보다는 오히려 서인 일반과 손잡고 공신세력의 권력독점과 대청 강화책을 비판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대체로 공신과 서인세력에 눌려 열세를 면치 못하였으나 기호지역 출신인 허목(許穆)·허적(許積)과 북인의 후예인 윤휴(尹) 등이 크게 진출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기호 출신과 영남 출신은 입장에 차이를 보이면서, 중앙 정치에서의 활동과 새로운 사상의 탐구에 기호남인이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왕실 상례를 둘러싼 논쟁[禮訟]에서 왕가의 특수성을 주장하여 상복 기간을 길게 잡는 이론으로 서인과 대립하던 중, 1674년의 2차 논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현종 말기와 숙종 초년의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대거 숙청되고, 9년 뒤 정국을 뒤집었으나, 다시 5년 만에 서인에 밀려 실세하였다. 그 뒤로는 영조·정조대의 탕평책 아래에서 오광운(吳光運)·채제공(蔡濟恭) 등을 중심으로 큰 역할을 한 적도 있으나, 서인·노론이 주도하는 정치판도를 뒤집지는 못하다가 정조가 죽은 뒤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대체로 국왕권의 강화와 소농민의 안정을 추구하는 입장을 지키면서, 국왕보다 사족(士族)의 정치 주도권을 강조하는 서인과 이념적으로 대조되었다. 특히 17세기 이후로는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으로 대표되는 실학파의 한 흐름을 배출하였다. 이들의 업적에는 광범위한 개혁론이 포함되는데, 거기에는 실세한 시기가 많은 데서 기인한 강렬한 현실비판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익이 화폐 유통을 반대한 것, 적서차별 철폐에 대한 소극적 입장, 신분제 극복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 것 등에서 드러나듯이 복고적인 입장도 강하게 나타난다. 한편, 새로운 사상에 대한 탐구는 천주교(天主敎)를 수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북인(北人)

    조선 중기의 정파. 16세기 후반에 성립된 동인으로부터 남인과 함께 분파되었다. 1588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이용하여 동인을 숙청하였다가 곧 실세한 서인에 대해, 정인홍(鄭仁弘)·이발(李潑) 등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배격과 유성룡(柳成龍) 등의 공존의 입장이 대립하였고 이들이 각기 북인과 남인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학통상으로는 동인이 이황(李滉)과 조식(曺植) 및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던 중 이황의 제자들이 주로 남인이 된 데 비해 북인은 조식 및 서경덕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주전론(主戰論)을 펼친 명분을 바탕으로 연소한 신진들의 지지를 모아 전란 후 정국을 주도하였지만, 전란 후유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현실 정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바탕으로 대북(大北) 대 소북(小北), 대북내에서의 골북(骨北)·육북(肉北) 등으로 분파가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서인과 남인에 비해 복잡한 학통도 한 원인이 되었다. 몇 차례의 부침을 겪은 끝에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피해를 극복하는 데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학통상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정인홍이 시도한 이언적(李彦迪)과 이황 배격[晦退辨斥]이 실패로 돌아간 후, 선조의 적자(嫡子)이자 국왕의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선조비(宣祖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축출하려는 정책을 펴면서 서인과 남인을 크게 배격하였다. 그것이 결국 자기 입지를 더욱 좁히는 결과로, 무력을 동원한 서인의 광해군 축출[仁祖反正]로 정계에서 숙청되었다. 그 후 남이공(南以恭)·정온(鄭蘊) 등이 인조대 정치에 참여하였으나 정파로서의 의미는 소멸되었고 일부 인물들은 남인과 행동을 함께하였다. 사상은, 정통 주자성리학과 거리를 둔, 조식을 스승으로 하였던 데 나타나듯이, 서인 및 남인과 어느 정도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으나, 명(明)이 후금(後金)과의 싸움에 군대를 동원하라고 요구하였을 때에는 광해군과는 달리 대개 출병에 찬성하는 등 사대 명분론 등에서는 다른 사림들과 입장을 함께하였다.

                

                                             

 

예학(禮學)

 

    예(禮)의 본질과 의의, 내용의 옳고 그름을 탐구하는 유학(儒學)의 한 분야. 본래 중국 고대의 종교적 제사의식(祭祀儀式)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예는 주대(周代)에 와서 인간행위의 규범이자 사회질서의 근간으로 정형화되면서 고대문화 전반을 의미하였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유학을 창시한 공자(孔子)는 바로 이러한 예에 정통했던 인물로 예치(禮治)를 행함으로써 당시 혼란했던 사회를 바로 잡으려고 하였으며, 예의 형식뿐만 아니라 본질을 강조하였다. 공자에 의해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던 예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말 순자(荀子)에 의해 적극적으로 계승되었다. 그는 예를 인간이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보편적 이치(理致)로 보았으며, 그 객관적 사회성을 강조하여 사회 전체의 틀 또는 규범적 지침으로까지 확대하여 규정하였다. 한대(漢代)에 이르러 유학이 공식적인 국가이념으로 정착되면서 편찬되었던 삼례(三禮), 즉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는 주로 순자가 예에 관하여 내린 해석을 바탕으로 그때까지 전승되어 온 예에 관한 이론과 시행내용을 종합한 것이었는데, 이는 곧 예학의 성립을 의미하였다. 이후 한대와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금문학파(今文學派)와 고문학파(古文學派)의 논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예학은 당시 사상계·정치계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예의 적용을 둘러싼 논의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남북조시대와 당대(唐代)를 거치면서 예는 국가·왕실의 예인 오례(五禮)와 사가(私家)의 예인 가례(家禮)로 분화하였으며, 송대(宋代)에 성리학(性理學)이 성립되고 주자(朱子)에 의해 《주자가례》가 저술되면서 가례의 비중이 점점 커져갔다. 주자는 예를 ‘천리가 절도에 맞게 드러난 것이요, 인간사에 본받아야 할 규범(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이라고 정의하여 성리학의 철학적 기반인 이기론(理氣論)과 예의 본질을 연관지어 설명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처럼 예학은 예의 이론[禮論]과 예의 견해[禮說]를 중심으로 전개 발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예가 언제 전래되었는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기》가 국학(國學)의 교수과목인 것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부터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가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은 고려 말에 《주자가례》가 도입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이 지배이념으로 되면서부터였다. 그리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하였던 전기에는 제도적 성격이 강한 《주례》와 왕실의 예인 오례가 강조되었으며, 성종대(成宗代)에 이를 집대성한 《국조오례(國朝五禮)》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사림(士林)이 등장하는 중기에 오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국조오례의파(國朝五禮儀派)와 고례파(古禮派)의 대립으로 상징되는 여러 차례의 전례논쟁(典禮論爭)을 거치면서 예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家禮輯覽)》과 정구(鄭逑)의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등 수준 높은 예서(禮書)들이 많이 저술되었으며, 학파에 따라 예론이나 예설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차이는 17세기 예송(禮訟)에서 《주자가례》 《의례》 등을 중시하며 왕례(王禮)와 사례(士禮)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왕사동례(王士同禮)와 《예기》 《주례》 등을 중시하며 왕례와 사례의 차이를 강조하는 왕사부동례(王士不同禮)로 나타났다. 예송(禮訟)에서의 사상적 차이는 중세 사회체제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연결되었으며, 때문에 예송은 조선 후기사회로 가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만 했던 하나의 과정이었다. 후기에는 왕권이 강화되면서 국가가 왕실의 예를 다시 정리하고 향례(鄕禮)를 장악하려는 모습이 나타났지만, 그 사회적 비중은 상당히 줄어들고 그나마 세도정치기(勢道政治期)에는 정약용(丁若鏞) 등 몇몇 학자들에 의해 《주례》가 다시 주목을 받았을 뿐 거의 형해화(形骸化)되어 버렸다. 이처럼 예학은 시기에 따라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끼쳐왔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 예학이 가지는 위치와 영향에 대해서는 시기별로 좀더 세밀한 평가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된, 인간과 동식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이론. 같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이고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이다. 조선조 중기까지의 성리학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된 것은 하늘과 사람의 관계였다. 그 결과 사람의 삶의 바탕이 되는 하늘의 이치를 근거로 하여 하늘과 사람이 본래 하나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논리에서 보면 동물이나 식물의 삶도 본질적으로 하늘의 이치를 바탕으로 하므로 역시 하늘과 하나라는 사실이 성립된다. 이러한 이론이 성립되면 관심의 대상이 저절로 사람과 동식물의 관계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조선조 후기에 인물성동이론이 활발하게 전개된 까닭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에서는 원래 인간의 본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에 따르면, 본연지성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존재가 되지만 기질지성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각각 기질에 따라서 구별되는 존재로 파악된다. 그런데 이때 의문이 일어나는 것은 본연지성의 입장에서 볼 때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모두 동일한 존재가 되는가 어떤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은 주로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제기되었다. 1678년(숙종 4) 권상유(權尙游)가 주희의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 있는 “혼연한 태극의 전체가 모든 물체에 각기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다”는 말에 의심을 품고 그의 형 권상하(權尙夏)에게 질문하였을 때, 권상하는 “이(理)를 말하면 온전하지 않음이 없으나 성(性)을 말하면 편벽된 것과 온전한 것이 있다”고 답하였다. 이로부터 권상하의 문하에 인물성동이론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의 논쟁을 출신지역에 따라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도 한다. 이간은 사람과 동물이 다르고 사람들 상호간에도 서로 다른 것은 기질의 차이 때문이므로 본연지성의 입장에서는 모두 같다고 파악함으로써 인물성동이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비하여 한원진은, 본연지성을 주장하는 근거는 성즉리설(性卽理說)인데, 성즉리란 성즉리지재기(性卽理之在氣)의 줄임말로 볼 수 있으므로 본연지성이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기(氣)에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파악함으로써 기질지성의 실재성을 부각시키고 이를 근거로 해서 인물성이론을 주장하였다.

                                                        

 

 

실학(實學)

 

    조선 후기인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이학(理學:성리학)과 예학(禮學)으로 대표된 당시의 전통유학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유학의 한 분파의 학문 및 사상. 이 실학은 첫째 전근대의식에 대립되는 근대의식 및 근대지향의식, 둘째 몰민족의식에 대립되는 민족의식을 척도로 하여 재구성된 조선 후기 유학의 개신적(改新的) 사상으로서, 조선 후기에 일어난 개신유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그 두 척도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존립 번영을 전제로 한 근대지향, 근대지향을 전제로 한 민족의 존립 번영이라는 일체(一體)의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실학은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 두 척도를 아울러 충족시키는 경우가 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관례로 보면 민족의식의 면에서는 뚜렷한 것이 없더라도 근대지향의식에 뚜렷한 특징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실학에 포함시켜 온 일이 많다. 조선 후기에 있어 근대지향의식이란 매우 선각적인 것일 뿐더러 당시의 상황으로는 후일의 일부 계열과 같이 반민족적인 근대지향이 될 여지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반대로 근대지향의식 면에서는 뚜렷한 것이 없으면서 민족의식 면에 뚜렷한 특징이 있는 경우는 반드시 실학에 포함시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민족의식은 민족의 형성 이래 수시로 발현된 것으로서 실학계만이 전유(專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근대적 혹은 근대지향적이라 함은 물론 서양 근대의 여러 특징적인 양상을 모델로 하고 지칭하는 것인데, 그 중에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일체로 하는 새로운 ‘국민’의 개념, 이 사상적 기반 위의 새로운 국민국가관 등 그것을 서양 국민주의와의 비교에 역점을 두고 살펴보는 견해가 두드러진다. 또 민족의식 면에서의 특징으로는 첫째로 중국 중심의 화(華)·이(夷) 사상을 암암리에 전제로 한 국제질서를 탈피하고 한민족(韓民族) 중심의 자각을 드러낸 경우, 둘째 그러한 민족의 자각이 단지 민족감정으로 끝나지 않고 역사·지리·언어·군사 등에 걸쳐 민족에 초점을 둔 지식체계의 형성으로 나타난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실학이라는 새 개념의 형성과정】본래 실학이라는 용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학의 본령에 충실한 학풍(學風)’을 뜻하는 것으로서 시대에 따라 수기와 치인의 중점이 달랐다. 조선 후기의 실학파 제유(諸儒)도 그들 자신의 학문을 실학으로 자처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의 원의(原義)가 그러하더라도 그것을 ‘이학(理學) 편중에서 탈피한 개신유학’ 혹은 ‘민족의식과 근대지향의식에 충실한 개신유학’이라는 뜻으로 전용하여 그것이 일반에 통용되는 한 괴이한 것은 아니며, 이와 같은 전의(轉義)는 이미 1930년대 이래 수십 년 간 대체로 순조롭게 일반에게 받아들여져 왔다. 조선 후기 실학이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의 두 척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조선 후기 실학이라는 개념의 형성과정에서 입증된다. 1870년대는 조선 후기 실학의 최종단계에 해당하며, 이때에 이미 실학파 제유는 서양 근대문명을 배경으로 한 외세의 충격을 실감하고 있었다. 1880년대와 1900년대에는 외세의 충격에 직면하여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의 복합으로서의 사상적인 대응이 요구되었다. 개화(開化)·자강(自强) 사상이 그 대표적인 것이며, 그들의 상당수는 조선 후기 실학사상과 인적(人的) 및 사상적 맥락을 가졌었고, 또 실사구시(實事求是)·이용후생(利用厚生) 등 실학파가 즐겨 표방하던 것을 이어받았다. 또 뒤에는 실용의 학문으로서의 실학이 민중 가운데에 고취되었다. 1910년대와 20년대에는 외세의 충격에 대처하는 현실적 방안으로서라기보다도 사상사적(思想史的) 대상으로서 조선 후기 실학이 주목되었다. 민족의식과 거기서 연유한 근대지향의식은 일본의 지배하에서 더욱 당연한 현실의 요구였으나, 조선 후기 실학은 현실타개의 방안으로는 벌써 뒤늦은 것이었고, 다만 민족적 주체성에 입각한 역사적 근거로서 그것이 재평가되어야 할 단계였던 것이다. 30년에는 실학이라는 말의 새 개념, 즉 오늘날 통용되는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조선학(朝鮮學)이라는 개념의 모색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면서 동시대에 이루어졌으며, 한편으로 그 실학을 서양근대사상과 대비하여 이것을 근대사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전개되었다.

【유학의 전개형태로서의 실학】 유학은 크게 보아 ① 의리지학(義理之學:철학), ② 고거지학(考據之學) 혹은 고증지학(考證之學:문헌비판적 고전학), ③ 사장지학(詞章之學)혹은 사장지학(辭章之學:문학), ④ 경세지학(經世之學) 혹은 경제지학(經濟之學:법정·경제·군사 등의 정책론 및 그 사상·역사·지리 등도 포함될 수 있다) 등을 포괄하는 지식체계이며, 또 유학은 시대를 따라 인물을 따라 각기 특징을 달리하는 여러 유형을 보여왔다. 유학의 의리학적 측면은 주자학(朱子學)이나 양명학(陽明學)이나 서양의 충격에 대처할 만큼 근대적인 것으로 발전하지 못하였고 그것은 현재도 유학이 계속 추구하는 과제이니 만큼 유학의 전통적인 의리학에서는 근대지향적인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민족의식에서는 주자학도 양명학도 의리의 실천으로써 그 본령을 발휘한 예가 많다. 조선 후기 실학과 제유의 의리학에 대한 태도는 회의적인 것이 많고, 의리학 특히 주자학이 독점하다시피한 사상계에 대하여 비판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 주목된다. 유학의 고증학적 측면은 유학의 의리·사상·경세 등 다른 부문과 같은 연구대상상(硏究對象上) 구분이라기보다 연구방법상의 문제였다. 그 엄밀한 실증적·귀납적인 방벙은 근대적이라 할만한 것이었으나 대개는 학문을 위한 학문에 그쳐, 그 주대상인 경학(經學)도 유학의 사상내용을 확대하는 데로 끌어가지 못하였으며, 그 밖의 대상에서도 사회과학으로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자연과학에 이르러는 별다른 관심을 표시하지 않아 사상적인 근대지향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 고증학은 비정치적인 것으로 시종하여 민족의식과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과 제유 가운데에는 이 고증학에도 힘을 기울인 예가 많았으며 넓은 의미의 실증적인 연구가 성행하였다. 또한 유학의 사장학적 측면은 오늘날의 학이라는 개념으로 보기는 어려우나 유학의 체계에서는 중요한 일부로 간주되어 왔다. 조선 후기 실학과 제유의 문학작품 가운데에는 근대지향적인 관점, 민족적인 관점에서 가장 실학정신을 담은 것이 많다. 유학의 경세학적 측면은 근대지향적인 관점에서나 민족적인 관점에서나 가장 실학적인 요소가 담길 수 있는 분야이며 또한 조선 후기 실학의 핵심적인 부분은 역시 현실문제에 직결되는 이 경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학의 체계에서는 정확하게 그 위치를 부여하기 어려우면서 조선 후기 실학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에 자연과학(自然科學) 및 기술(技術)이 있다. 근대지향적인 요소를 찾아볼 가능성은 여기에도 많이 내포되어 있다.

【실학파】 조선 후기 실학파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은 다음과 같다. ① 제1기:한백겸(韓百謙:1551∼1615)·류몽인(柳夢寅:1559~1623)·이수광(李光:1563~1628)·허균(許筠:1568~1618). ② 제2기:유형원(柳馨遠:1622~73)·박세당(朴世堂:1629~1703)·김만중(金萬重:1637~92)·정제두(鄭齊斗:1649~1736)·이이명(李命:1658~1722)·정상기(鄭尙驥:1678~1752)·이익(李瀷:1681~1763)·이중환(李重煥:1690~1760)·유수원(柳壽垣:1694~1755)·정항령(鄭恒齡:1700~?)·신후담(愼後聃:1702~61)·안정복(安鼎福:1712~91)·신경준(申景濬:1712~81)·위백규(魏伯珪:1712~98)·홍대용(洪大容:1731~91)·이긍익(李肯翊:1736~1806)·이만운(李萬運:1736~?)·박지원(朴趾源:1737~1805)·이덕무(李德懋:1741~93)·우하영(禹夏永:1741~1812)·유득공(柳得恭:1749~?)·박제가(朴齊家:1750~?)·성해응(成海應:1760~1839)·정약용(丁若鏞:1762~1836)·한치윤(韓致奫:1765~1814)·유희(柳僖:1773~1837)·③제3기:김정희(金正喜:1786~1856)·이규경(李圭景:1788~?)·김정호(金正浩:?~1864)·최한기(崔漢綺:1803~1879)·이제마(李濟馬:1836~1900) 등이 흔히 손꼽혀 왔으며 시기별로는 유형원·이익·정약용이 각각 한 시대를 대표한다는 견해도 있다. 또 그 주장의 내용과 시대를 아울러 고려하여 ① 이익을 대종(大宗)으로 하는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토지제도 및 행정기구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는 학파, ②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 기구 일반 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하는 학파, ③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루게 된 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경서 및 금석(金石)·전고(典故)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학파로, 정약용을 이 3개 유파의 집대성자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조선 중기의 실학자. 본관 문화(文化). 자 덕부(德夫). 호 반계(磻溪). 서울 출생.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 《서경(書經)》 <우공기주편(禹貢冀州編)>을 읽고 매우 감탄하였다고 한다. 외숙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에게 사사하였고, 문장에 뛰어나서 21세에 《백경사잠(百警四箴)》을 지었다. 23세 때 할머니 상(喪)을 당하고, 27세에 어머니 상, 30세 때 할아버지 상을 당하여 전후 9년간 상복을 입었으며, 지평(砥平)·여주(驪州) 등지로 옮겨 살았다. 이러한 환경변화는 사상과 생활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653년(효종 4) 부안현 우반동(愚磻洞)에 정착하였다.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면서 수차 전국을 유람하였다. 65·66년 두 차례에 걸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는 한편, 구휼(救恤)을 위하여 양곡을 비치하게 하고, 큰 배 4,5척과 마필(馬匹) 등을 비치하여 구급(救急)에 대비하게 하였다. 학문은 성리학·역사·지리·병법·음운(音韻)·선술(仙術)·문학 등에 두루 미쳤다. 당시 조선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피폐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한 처방이 필요하였다. 이에 저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통하여 전반적인 제도개편을 구상하였다. 중농사상에 입각하여 토지 겸병(兼倂)을 억제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전제(田制)를 개편, 세제·녹봉제(祿俸制)의 확립, 과거제의 폐지와 천거제의 실시, 신분·직업의 세습제 탈피와 기회균등의 구현, 관제·학제의 전면 개편 등을 주장하였다. 뒷날 이익(李瀷)·홍대용(洪大容)·정약용(丁若鏞) 등에게 이어져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였으나, 정책으로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다만 학문적 가치가 인정되어, 1770년(영조 46) 영조의 명으로 《반계수록》 26권이 간행되었다. 실학을 최초로 체계화하였으며, 이 밖에 20여 종의 저서와 문집을 남겼으나 남아 있지 않고, 위의 《반계수록》과 《군현제(郡縣制)》 1권이 전할 뿐이다. 호조참의(戶曹參議)·찬선(贊善)에 추증되었고, 부안 동림서원(東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반남. 자 계긍(季肯). 호 서계(西溪)·잠수(潛). 시호 문정(文貞). 참판 정(炡)의 아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장원, 64년 부수찬(副修撰)으로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67년 수찬에 이어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장형(杖刑)을 받았다. 그 해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예조참의 등을 지낸 뒤, 94년 갑술옥사에 소론이 득세하자 승지로 특진하였다. 이어서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03년 중추부판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사변록(思辨錄)》을 저술,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에 반주자(反朱子)로서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혀 삭직, 유배 도중 옥과(玉果)에서 죽었다. 사직(司直)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신원되었다.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 등보다 앞선 시대의 실학파 학자로서,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하였으며, 글씨도 잘썼다. 저서로 《사변록》 외에 《색경(穡經)》 《서계집》 등이 있다.

           

                                                        

 

이익(李瀷, 1681∼176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여주(驪州). 자 자신(子新). 호 성호(星湖).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응시, 낙방하였다. 이듬해 형 잠(潛)이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다가 당쟁의 제물로 장살(杖殺)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낙향,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처음 성리학(性理學)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차 이이(李珥)·유형원(柳馨遠)의 학문에 심취하였는데, 특히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천문·지리·율산(律算)·의학(醫學)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였으며,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투철한 주체의식과 비판정신을 토대로 그의 주요저서인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을 통해 당시의 사회제도를 실증적으로 분석·비판하여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중농사상(重農思想)에 입각하여 전제(田制)개혁의 방향을 개인의 토지점유를 제한하여 전주(田主)의 몰락을 방지하려는 한전론(限田論)에서 찾았으며, 노비신분을 점차적으로 해방시킬 것 등을 주장하는 한편 당쟁의 발생은 이해(利害)의 상반에서 오는 것이라고 분석, 양반도 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이론을 주장하였다. 인재등용에 대해서는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공거제(貢擧制)를 아울러 실시할 것 등도 제시하였다. 27년(영조 3)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63년 83세의 고령에 이르자 나라에서는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로 승자(陞資)의 은전을 베풀었으나 그 해에 죽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그의 학문은 직계 후학들에 의하여 계승·발전되었다. 초서(草書)에 능했으며 저서에는 앞에 든 것 외에도 《성호집(星湖集)》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 《사서삼경》 《근사록(近史錄)》 등이 있고, 편저에 《사칠신편(四七新編)》 《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 《자복편(自卜編)》 《관물편(觀物編)》 《백언해(百諺解)》 등이 있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 남양(南陽). 자 덕보(德保). 호 담헌(湛軒)·홍지(弘之). 북학파(北學派)의 학자인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학풍은 유학(儒學)보다도 군국(軍國)·경제(經濟)에 전심하였다. 1765년(영조 41) 숙부인 억(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 베이징[北京]에서 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육비(陸飛) 등과 사귀어 경의(經義)·성리(性理)·역사·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또 천주당(天主堂)에 가서 서양 문물을 견학하고 독일 사람인 흠천감정(欽天監正) 할레르슈타인[劉松齡], 부감(副監) 고가이슬[鮑友管]과 면담했으며, 관상대(觀象臺)를 견학하여 천문(天文)지식을 넓혔다. 귀국 후 수차 과거에 실패하고 75년 음보로 선공감(繕工監) 감역이 되었다. 그 후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감찰·태인(泰仁)현감 등을 거쳐 80년(정조 4) 영주(榮州)군수가 되었다. 북학파의 선구자로 지구(地球)의 자전설(自轉說)을 설파하였고, 균전제(均田制)·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 과거제도를 폐지하여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 등용, 신분의 차이없이 8세 이상의 모든 아동에게 교육시켜야 한다는 혁신적인 개혁사상을 제창하였다. 저서에 《담헌설총(湛軒說叢)》이 있고, 편서(編書)에 《건정필담(乾淨筆談)》 《주해수용(籌解需用)》 《담헌연기(湛軒燕記)》 《임하경륜(林下經綸)》 《사서문의(四書問疑)》 《항전척독(抗傳尺牘)》 《삼경문변(三經問辨)》 등이 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소설가. 본관 반남(潘南). 자 중미(仲美). 호 연암(燕巖).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홍대용·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正卿大夫)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馬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 밀양(密陽). 자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 초정(楚亭)·정유(貞)·위항도인(葦杭道人). 19세 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1776년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합작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78년(정조 2)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 등에게 새 학문을 배우고 귀국하여 《북학의(北學議)》 <내외편(內外篇)>을 저술, 이듬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고, 그 뒤 진하사(進賀使)·동지사(冬至使)를 수행,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94년 춘당대(春塘臺) 무과에 장원하여 오위장(五衛將)에 오르고, 이듬해 영평현감(永平縣監)으로 나갔다. 98년 《북학의》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하고, 1801년(순조 1) 사은사를 수행, 네 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사건(凶書事件)에 사돈 윤가기(尹可基)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연좌로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풀려났다. 저서에 《명농초고(明農草藁)》 《정유시고(貞詩稿)》 《유정집(亭集)》이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翁)·태수(苔)·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안.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 출생. 1776년(정조 즉위)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 본관 경주. 자 원춘(元春). 호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예산 출생.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48년 풀려나왔고, 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이 있다.

                                 

 

                             

 

최한기(崔漢綺, 1803∼1875)

 

    조선 후기의 실학자·과학사상가. 본관 삭녕(朔寧). 자 운로(芸老). 호 혜강(惠崗)·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기화당(氣和堂). 1825년(순조 25) 사마시(司馬試) 급제 후 학문에 전념하다가 72년(고종 9) 아들 병대(柄大)가 고종의 시종이 되자,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지냈다.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와 교분이 두터웠으며, 수많은 저작을 통해 경험주의적 인식론(認識論)을 확립하여 일체의 선험적(先驗的) 이론이나 학설을 배격하고 사물을 수학적·실증적으로 파악할 것을 주장, 한국 사상사에 근대적 합리주의를 싹트게 했다. 이런 기초 위에서 진보적 역사관을 수립하고 현실문제를 비판, 과감한 개혁을 부르짖었으며, 외국과의 대등한 교류를 주장하는 등 실학파 학자들의 전통을 계승하여, 뒤이어 등장하는 개화사상가들의 선구가 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외국에서 높이 평가되어 그의 주저들이 중국에서 간행·소개되었으나, 한국 학계에서는 최근에야 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천문·지리·농학·의학·수학 등 학문 전반에 박학하여 1,0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현재는 15종 80여 권만이 남아 있다. 저서에 《농정회요(農政會要)》 《육해법(陸海法)》 《청구도제(靑丘圖題)》 《만국경위지구도(萬國經緯地球圖)》 《추측록(推測錄)》 《강관론(講官論)》 《신기통(神氣通)》 《기측체의(氣測體義)》 《감평(鑑平)》 《의상리수(儀象理數)》 《심기도설(心器圖說)》 《소차유찬(疏箚類纂)》 《습산진벌(習算津筏)》 《우주책(宇宙策)》 《지구전요(地球典要)》 《인정(人政)》 《명남루집(明南樓集)》 등이 있다.

                  

 

                                              

 

위정척사(衛正斥邪)

 

    조선 후기 유교적인 질서를 보존하고 외국세력 및 문물의 침투를 배척한 논리 및 운동. 문호개방 이후 개화사상이 고조되고 정부의 개화정책이 외세의 침투에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어 주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유생들이 주도해 나갔는데, 그 논리 및 운동은 외세의 침투상황에 따라 단계적으로 전개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에는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 등이 서양세력의 침범은 국가 존망의 위기를 조성한다고 주장하면서 서양문물을 배척하고 통상에 반대하였다. 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뒤에는 최익현(崔益鉉)이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내세워 개항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고, 척사의 대상이 일본으로 확대되었다. 81년(고종 18) 김굉집(金宏集)이 일본에서 들여온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보급시키면서 각 지방의 유생들이 격렬히 비판하는 상소를 하였고, 정부의 개화정책을 반대하는 정치적 움직임으로 확대되어 개화와 보수 두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빚어졌다. 그뒤 통상무역이 전개되고 미곡수출이 진전되면서 농민층의 몰락이 가속화되자, 농민몰락과 관련된 여러 원인들을 제시하고 그 안정책을 건의하였다. 1894~95년 갑오·을미 개혁을 계기로 개화파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개화망국론(開化亡國論)을 펴고, 개화파 정부와 일본세력에 대하여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군주의 결단에 호소하고 정부에 건의하는 상소운동의 한계를 깨달으면서 일부는 항일의병전쟁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주체적인 근대화를 위한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정치체제와 사회·경제 질서를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는 점에서 전근대적인 성격이 강하였으나, 국내의 현실적인 정치·사회 문제의 개선 및 개혁을 포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동학(東學)

 

    1860년(철종 11) 경주(慶州) 사람 최제우(崔濟愚)에 의하여 창도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신흥종교. 최제우는 전통적인 유교(儒敎)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교 경전을 배워, 성년이 되어서는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당시 한국은 어린 헌종왕의 즉위로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계속되면서 정권다툼으로 지배층의 알력이 극도에 달하였고, 양반과 토호(土豪)들은 백성들에 대한 횡포와 착취를 자행함으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등, 사회는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더구나 일본을 비롯한 외세(外勢)의 간섭이 날로 심해져 국운이 위기에 처하는 한편, 국민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유교·불교가 극도로 부패하여 조정은 민중을 제도(濟度)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새로 들어온 서학(西學: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팽창하여 그 이질적인 사고(思考)와 행동이 우리의 전통적인 그것과 서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때 최제우는 서학에 대처하여 민족의 주체성과 도덕관을 바로 세우고, 국권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道)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양산(梁山) 천수산(千壽山)의 암굴 속에서 수도하면서 도를 갈구(渴求)한 지 수년 만에 ‘한울님(上帝)’의 계시를 받아 ‘동학’이라는 대도(大道)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동학은 서학에 대응할 만한 동토(東土) 한국의 종교라는 뜻으로, 그 사상의 기본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儒)·불(佛)·선(仙:道敎)의 교리를 토대로 하여,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에 두고 있다. ‘인내천’의 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는 종래의 유교적 윤리와 퇴폐한 양반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계시는 ‘동학’이란 교명(敎名)과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이라고 한다. 영부란 백지(白紙)에 한울님의 계시에 따라 그린 일종의 부적(符籍)으로, 궁을형(弓乙形)으로 되어 있고 때로는 태극부(太極符)·궁을부(弓乙符)라고도 부른다. 주문은 13자로 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의 본주(本呪)와 8자로 된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강령주(降靈呪) 등이 있다. 이 영부와 주문은 동학을 포교하는 데 중요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는데, 예컨대 주문을 외면서 칼춤을 추고 영부를 불에 태워,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면 빈곤에서 해방되고, 병자는 병이 나아 장수하며 영세무궁(永世無窮)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동학은 신분·적서(嫡庶)제도 등에도 반기를 들어 이를 비판하였으므로, 그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교리는 당시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하던 삼남지방에서 신속히 전파되었다. 포교를 시작한 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이같은 추세를 지켜보던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적 집단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라고 단정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되어, 최제우는 이듬해 대구에서 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최제우를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순교한 후에도 조정의 탄압이 계속되자 교인들은 지하로 숨어들어가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었고, 한편 최제우의 뒤를 이은 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海月)은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에서 은밀히 교세를 정비·강화하였다. 전부터 내려오던 접주(接主)제도를 확대 개편하여, 교인들의 일단(一團)을 ‘포(包)’라 하고 여기에 포주(包主)를 두었다. 포주 위에는 접주·대접주, 그 위에 도주(道主)·대도주를 두는 한편, 포주·접주 밑에는 ‘육임(六任)’이라 하여 교장(敎長)·교수(敎授)·교집(敎執)·교강(敎綱)·대중(大中)·중정(中正)을 두었다. 이와 같이 대중 속에 조직된 동학은 94년(고종 31)에 발생한 동학농민전쟁의 주체가 되었고, 이 때 사형을 당한 최시형의 뒤를 이은 3세 교주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여 계속 교세확장에 힘쓰게 되었다. 한편 동학은 이 때 시천교(侍天敎)라는 또 하나의 교파가 분리되었다.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군에서 시작된 동학계(東學系) 농민의 혁명운동. 그 규모와 이념적인 면에서 농민봉기로 보지 않고 정치개혁을 외친 하나의 혁명으로 간주하며, 또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外勢)에 항거하였으므로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역사적 배경】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해이(解弛)하기 시작한 18세기부터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곧 농업·산업·수공업·신분제도 등 하부구조에서의 봉건적 구성의 붕괴가 바로 사회의식에 반영되어 실학(實學)의 발생과 평민의식의 대두를 보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실례로서 1811년(순조 11)에 있었던 홍경래의 난을 들 수 있으며, 그 후 62년(철종 13) 진주(晉州)의 농민봉기를 시초로 삼남 각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三政)에 대한 반항으로, 이미 이때부터 혁명 발생의 역사적 배경은 조성되고 있었다. 혁명의 이념적 바탕이 된 동학은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풍수사상과 유(儒)·불(佛)·선(仙)의 교리를 토대로 서학(西學:기독교)에 대항하여 ‘인내천(人乃天):천심즉인심(天心則人心)’을 내걸고, 새로운 세계는 내세(來世)가 아니라 현세에 있음을 갈파하여, 당시 재야에 있던 양반계급은 물론 학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 커다란 종교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체포, 64년 사형에 처하였다. 교도들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궐기하여 혁명에 호소하자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뒤에 그 동학군을 영도한 인물로 전봉준(全琫準)이 등장하였다.

【제1차 농민운동】 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여 조선을 일본의 시장화하는 한편, 조선에서 쌀을 반출해 감으로써 물가를 자극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이중으로 억압하였고, 일본인 어부들의 횡포는 조선 어민의 생활을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선(汽船)이 조선 연안에서 무역에 종사함은 물론, 세미(歲米) 운송을 위한 기선의 도입으로 종래의 조군(漕軍)과 선상(船商)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 위에 세미운송의 책임자인 전운사(轉運使)의 횡포 또한 막심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사정 속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가중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무렵 고부군수로 조병갑(趙秉甲)이 부임하였다. 신임 군수는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를 거두어 들이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여 냥을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다하였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은 학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동학의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있는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94년 1월 10일 새벽, 1,000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고, “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아라, 각 포구의 어염선세(漁鹽船稅)를 혁파하라,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각읍의 수령·이서(吏胥)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시키라”는 등의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고 노도와 같은 형세로 고부관아에 밀어닥쳤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전라감사(全羅監司)로부터 고부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군수 조병갑을 체포 압송하게 하는 한편, 용안현감(龍安縣監) 박원명(朴源明)을 후임으로 부임하게 하고, 이어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使)로 보냈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도내 형편을 잘 아는 광주사람으로, 그의 적절한 조처에 의하여 군중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전봉준은 피신하여 정세를 관망하다가 이 기회에 고질의 뿌리를 뽑아야 하겠다고 판단,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교조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94년 3월 하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構)·부안(扶安)·고창(高敞)·흥덕(興德)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이 먼저 점령한 백산(白山)으로 모여드니,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전봉준은 대오를 정비한 다음 거사의 대의를 선포하였다. 곧,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③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盡滅)시킬 것 등의 4대강령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들의 탐학에 시달리던 인근 각처의 동학군과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앞을 다투어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태인의 동학군은 3월 29일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하여 관속(官屬)들을 응징하고 무기를 탈취하니 혁명군의 기세는 한층 더 충천하였다.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이재섭(李在燮) 등에게 명하여 영병(領兵) 250명과 보부상대(褓負商隊) 수천 명을 이끌고 동학군을 섬멸하라고 하였다.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관군은 도교산(道橋山)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황토현(黃土峴)에서 싸움을 벌였다. 관군은 철저히 참패하여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였다.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불과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면서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으며,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이서가(吏胥家)에 방화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군사 800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전주성(全州城)에 입성한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京軍)과 동학군은 월평리(月平里)의 황룡촌(黃龍村)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일대 격전의 결과 경군은 대패하였고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한편 홍계훈의 경군은 28일에야 전주성 밖에 이르러 완산(完山)에 포진하고 포격을 가하였다. 동학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가하였으나 소총과 죽창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차 수세에 몰려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홍계훈은 이 때를 이용하여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시작하였으니, 즉 정부는 고부군수·전라감사·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과 폐정(弊政)의 시정을 약속하였다. 때마침 앞서 요청하였던 청(淸)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일본은 일본대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持久戰)을 벌이는 것은 불리할 뿐더러 청·일 양군이 출동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정부군의 선무공작에 순응하여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강화(講和)가 성립된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하고 동학군은 폐정개혁의 실시와 교세확장을 위하여 전라도 53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은 이미 상륙하였고,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제2차 농민운동】 전라도 각읍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정치의 실현을 꾀하던 전봉준은 일병(日兵)이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고, 청·일 양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폐정개혁을 논할 때가 아니라 항일투쟁을 벌일 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신곡(新穀)이 여무는 시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9월에 접어들자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孫華中)은 광주에서 궐기하였으며, 호남·호서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전봉준은 전주 삼례(參禮)를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고 대군을 인솔, 일단 논산에 집결한 뒤 3방향으로 나누어 공주(公州)로 향하였다. 또한 각지의 수령들도 수원·옥천 등 요지를 점거하여 동학군을 원호하였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관군과 일본군은 급히 증원부대를 요청, 동학군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0월 21일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의 10만 호서군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을 공격,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상대방의 막강한 근대적 무기와 화력으로 인해 우금치(于金峙)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여 논산·금구·태인 등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서 재기를 꾀하던 중, 11월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미증유(未曾有)의 광범한 민중의 무장봉기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1년 동안에 걸쳐 30∼40만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났고, 이들의 개혁의지는 이후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다.

                                                             

천도교(天道敎)

 

    조선 후기 1860년(철종 11)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를 교조(敎祖)로 하는 동학(東學)을 1905년 제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가 천도교로 개칭한 종교.

【창도과정】 최제우는 전통적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후기는 국내적으로는 외척(外戚)의 세도정치와 양반·토호들이 일반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자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민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무력침략의 위기를 맞던 시대였다. 최제우는 21세에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도(道)를 얻고자 주류팔로(周流八路)의 길에 나서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 양산 천성산 암굴에서 수도하고 도를 갈구하여 1860년 4월 5일 ‘한울님(하느님)’으로부터 인류 구제의 도인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도의 이름을 ‘무극대도’라고만 하였다.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하여 많은 교도들이 모이자, 관(官)과 유생들이 혹세무민한다는 구실로 탄압하여 부득이 전남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특히 1862년 1월경에 지은 《논학문(論學文:東學論)》에서 처음으로 무극대도는 천도(天道)이며 그 학은 서학이 아닌 ‘동학(東學)’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동학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이 해에 다시 경주의 박대여(朴大汝) 집에 머물면서 포교하자, 충청·전라 지방에서까지 수천 명의 교도들이 모여들자 교도들을 조직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1862년 12월 동학의 신앙공동체인 접(接)제도를 설치하고 접주(接主) 16명을 임명하였다. 최제우는 1863년 3월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와 대대적인 포교활동에 나섰다. 접주들로 하여금 교도들을 수십 명씩 동원하여 용담정에 와서 강도(講道)를 받게 하는가 하면, 동학 교단 책임을 맡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해월(海月) 최경상(崔慶翔:時亨)을 선임하였다. 한편 관의 탄압을 예견하고 그 해 8월 14일에는 도통(道統)을 최경상에게 완전히 물려주었다. 날이 갈수록 동학 교세가 커지자, 놀란 조정은 그해 12월 10일에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를 파견,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3월 10일 대구에서 정형을 집행하여 최제우는 41세를 일기로 순도하였다.

【종교사상】 동학, 즉 천도교는 신, 즉 한울님을 모시는 유신적(有神的) 종교인데, 신관을 비롯하여 인간관·윤리관·역사관·수행체제가 모두 독특하다. ① 신앙대상인 한울님(天主)은 유일신으로 인격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모시고 있는 초월적이면서 내재하는 신이며, 아직도 참뜻을 펴려고 애쓰는 신이다. 그러나 창조주나 심판의 신은 아니다. 그리고 신은 영적인 것과 기적(氣的)인 것을 아울러 갖고 있다고 본다. ② 인내천(人乃天)으로 대표되는 천도교의 인간관은 사람을 한울님처럼 존엄한 존재로 본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엄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람의 존엄성이 곧 한울님의 존엄성과 같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인간평등과 존엄성을 신앙의 실천적인 핵심으로 삼는다. ③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대표되는 윤리관은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자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고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처럼 섬겨야 한다. 1920년대의 천도교가 어린이운동의 목표로 어린이의 윤리적 해방을 내세웠던 것도 역시 어린이도 한울님을 모셨다고 보는 천도교의 신앙에서 연유된 것이다. ④ 천도교는 개체 영(靈)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으나 영생론을 주장한다. 영생은 종교적인 높은 체험의 경지에 이르면 가난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시간 속에서도 영원을 살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⑤ 천도교의 역사관은 발전론과 순환론을 겸한 파동형(波動形:起伏盛衰論) 사관으로 보며, 문명의 단위를 동·서로 양분하여 지금은 대전환의 시기인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시점으로 본다. 즉 지금까지의 문명은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문명이 전개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⑥ 천도교는 현세주의적인 종교로서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정치·경제·문화 체제가 이루어지도록 힘써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자는 종교이다. 그 과정에서 평등한 인간구제, 부유한 사회구제를 위한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 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사회변동을 위한 현실참여에 적극적이 된다.

【수행체제】 천도교의 수행은 개인적으로는 청원(請願)과 기복(祈福)이 수반되지만, 신앙체제를 확립하여 도성입덕(道成立德)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으며, 집단적으로는 신앙공동체를 이루면서 희생·봉사로써 보국안민(輔國安民)·포덕천하(布德天下)·광제창생(廣濟蒼生)에 이바지하는 데 두고 있다. 그의 실행을 위해서 성(誠)·경(敬)·신(信)을 실천 윤리의 준칙(準則)으로 삼고 있으며, 종교행위로는 ① 주문(呪文), ② 청수(淸水), ③ 심고(心告), ④ 경전봉독(經典奉讀), ⑤ 기도, ⑥ 성미(誠米), ⑦ 시일식(侍日式), ⑧ 기념식 등이 있다. 주문은 본 주문이 13자로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이며, 강령주문(降靈呪文)은 8자로서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다. 이 글을 수없이 반복하여 외우는데, 그 목적은 마음을 닦고(修心), 기운을 바르게(正氣) 하는 데 있다. 심고는 “한울님 감응하시기를 축원하면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다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청수는 모든 제례의식 때 깨끗한 물을 그릇에 떠다 바치는 것이며, 경전봉독은 《천도교 경전》(《東經大典》과 《龍潭遺詞》)을 경건하게 읽는 것이다. 기도는 심고·청수봉전(奉奠)·주문 읽는 것을 시간과 날짜를 정해놓고 행하는 것을 말하며, 성미는 우리들이 끼니마다 먹는 음식을 한울님의 녹(祿)이라고 생각하여 끼니마다 쌀 등을 한 숟가락씩 뜨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모아서 교단에 바친다. 시일식은 1주일에 한 번(일요일에 교당에서 행함) 집회하여 의식을 행하는 것이며, 기념식은 창도일(創道日) 등 기념할 만한 날에 의식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 주문·청수·시일·성미·기도를 특히 오관(五款)이라 하여 교인의 의무로 정하고 있다. 제사의식은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제수를 모시는 사람을 향해 차려놓는데, 이것은 조상이나 스승님의 영(靈)도 내 안에 모셔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끝으로 천도교의 수행기본(修行基本)은 기원만도, 깨달음만도 아닌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의 은총과 자력을 겸하는 데 있다.

【천도교의 약사】 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순도한 이후 교세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제2세 교조 해월 최경상의 노력으로 다시 복구, 1870년경에는 신도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해지방에서 이필제(李弼濟)가 주축이 되어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일으켜 71년 3월 10일 군아(郡衙) 습격과 8월 2일의 문경 초곡 군기고 습격사건으로 300여 교도가 희생되어 또다시 타격을 받았다. 75년 최경상은 이름을 시형(時亨)으로 고치고 강원도 지방과 충청도 지방의 포교를 시작, 많은 교도를 얻었다. 이때 최시형은 양천주(養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적 수도요령과, 위생 등 생활의 합리화를 내세워 민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리하여 80년에는 강원도 인제와 단양 천동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典)》과 《용담유사(龍潭遺事)》를 최초로 목판 간행하여 경전종교로서의 기틀을 세웠다. 이후 충청도 지방으로, 89년경에는 교세가 전라도 지방까지 뻗치기에 이르렀다. 92년경에 이르자 신앙자유를 내세워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대대적인 민중시위를 벌였는데 이후부터 교세는 급격히 늘어났다. 이듬해인 93년에는 서울 광화문 앞에서 정부를 상대로 한 종교 자유화와 교조신원을 소청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자 3월에는 충북 보은 장내리에서 수만 교도들이 모여 보국안민·척왜양이(斥倭洋夷)를 내세운 반봉건·반제국주의적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94년 3월에 이르러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全琫準) 고부 접주에 의해 고부민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전봉준·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華中)·김덕명(金德明) 등 지방의 동학 대접주가 공동으로 동학군을 동원, 동학혁명으로 발전시켰다. 5월에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이루어져 53곳에 집강소(執綱所:군사위원회 같은 것)가 설치되어 폐정(廢政)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결국 청국이 패퇴하기 시작하자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하려 들었는데 이때 최시형은 전 동학군에 기포령(起包令)을 내려 반제국주의 무력항쟁에 나서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퇴, 수만의 희생을 내고 막을 내렸다. 이로부터 4년 뒤인 98년에는 최시형마저 체포되어 6월에 순도함으로써 동학(천도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00년에는 지도급 인물 중 손천민(孫天民)과 김연국(金演局)이 체포되어 손천민이 순도하자, 위기를 느낀 제3세 교조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는 1901∼1902년에 망명길에 나서 상하이[上海]까지 갔다가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1906년 1월까지 머물렀으며,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국내 동학군을 동원하여 진보회(進步會)를 조직, 10월 8일 360곳에서 30만 명이 색옷입기와 단발을 단행하는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한국 근대화의 민중운동이었으나 동학군이 주동이 되었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곧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국내 지도자인 이용구(李容九)가 단독으로 일진회(一進會)와 합동,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자행하였다.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근대적 종교체제를 갖추는 데 힘썼다. 1906년 1월 말경에 귀국하여 2월부터 천도교 중앙총부를 설치하고, 9월에는 이용구를 포함한 교도 62명을 출교 처분하였다. 10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종교적 수행을 강화하는 한편 보국안민이라는 슬로건 아래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국민교육을 위해 800여 개의 강습소를 설치, 기본교육에 힘썼으며 보성전문학교·동덕여학교를 경영 또는 보조하는가 하면, 16개 학교에 보조금을 제공하였다. 19년 3월 1일 천도교는 그리스도교계·불교계 인사 및 학생들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위한 대민중시위를 주도하였다. 22년 5월 19일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가 생애를 마치자 한때 교세는 주춤하였다. 그러나 청년들에 의해 19년 9월에 발족한 천도교 청년교리 강연부를 토대로 20년 3월에 천도교청년회를 조직, 종합잡지 《개벽(開闢)》을 간행함으로써 문화운동이 시작되었고, 21년에는 어린이운동의 선구자인 천도교소년회를 발족시켰다. 22년 9월에는 천도교청년회를 천도교청년당(黨)으로 발전시켜 여성운동·농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때 천도교가 간행한 잡지만도 《개벽》을 비롯하여 《신여성》 《어린이》 《학생》 《농민》 《천도교 월보》 《신인간》 《별건곤(別乾坤)》 《자수대학강의》 등이 있었는데,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서 35년 이후부터는 거의 마비상태에 들어갔다. 그러자 천도교 청년들은 오심당(吾心黨:22년 조직)을 조직, 35∼36년에 조선독립운동을 꾀하다 발각되어 많은 인사가 체포·구금되었고, 38년에는 제4세 대도주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가 주도한 멸왜기도사건(滅委祈禱事件)이 발각되어 수십 명이 체포·구금되기도 하였다. 45년 8·15광복 이후 국토가 양단되자 북한에서는 천도교 북조선종무원과 천도교 청우당(靑友黨)을 조직, 활동하였는데 280만 교인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48년 북한측이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반대, 이미 분단정권을 세우고 국토 분단을 영구화하려 하자, 48년 2월에 3·1재현운동, 즉 남북통일 총선거운동을 전개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1만 70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로부터 조직적인 탄압을 받았는데 그래도 많은 교도들은 영우회(靈友會)라는 이름 아래 국토통일운동을 계속하였다. 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한에서는 많은 교도들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천도교의 조직과 현황】 천도교의 조직은 교조가 제정한 접(接)이 기본을 이루면서 포(包)와 도소(都所)로 발전하였다. 접은 40∼50호를 단위로 한 기본조직이며, 포는 여러 개의 접을 포용하는 조직이다. 이 접과 포의 조직은 모두 전교자(傳敎者)와 수교자(受敎者)의 인간관계를 통한 지역적인 조직이다. 이것이 천도교로 바뀌면서 1906년부터 발족한 지방교구제와 병존하게 되어 양원 조직을 이루었다. 즉 접을 토대로 한 조직으로 연원(淵源)조직이 있는 한편, 행정구역 단위로 마련한 교구조직이 있다. 연원조직은 접 → 교훈 → 도훈 → 도정으로 200호 단위의 조직이며, 교구조직은 면에 전교실, 군에 교구, 중앙에 중앙총부가 있다. 94년 현재, 교회 조직은 최고결의기관으로 전국대의원대회와 중간 결의기관으로 종의원(宗議院)이 있고, 집행기관으로는 종무(宗務)위원회가, 감사기관으로는 중앙감사원이 있다. 또 재산을 관리하는 천도교 유지재단이 있다. 용담수도원 등 수도원이 10개, 2,000개 교구에 교도수는 100만 명이 넘는다. 연호(年號)는 창도 해인 1860년을 ‘포덕(布德) 1년’으로 하는 포덕 연호를 쓰고 있다.

                                                             

 

개화사상(開化思想)

 

    조선 후기에 개화파가 발전시킨 부르주아적 개혁사상. 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와 역관 출신 오경석(吳慶錫), 의관 출신 유홍기(劉鴻基) 등이었다. 이미 실학적 학풍을 체득한 박규수는 1861년과 72년 두 차례 북경에 가서 자본주의 열강의 무력에 굴복한 청의 현실을 목격하였고, 66년 평안도감사 시절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을 직접 겪으면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지닌 열강에게 대항하려면 문호개방을 통한 조선의 부국강병이 절실하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중인 출신의 역관 오경석은 50년대부터 사신을 따라 천진·북경 등지를 드나들면서 중국에 유입된 새로운 서구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서양문물을 소개한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志略)》 《만국공보(萬國公報)》 등의 신서(新書)를 가지고 왔다. 이 책들은 모두 화이론적 세계관에 젖어 있던 봉건 지배층에게는 이단이었지만, 쇄국정책을 펴던 조선에서 세계정세와 서구사회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입문서이기도 하였다. 오경석은 자연히 시대에 뒤떨어진 조선 봉건사회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고, 자신의 동지이자 절친한 친구인 의관 출신 유홍기에게 자신이 중국에서 구입해온 책과 보고 들은 것을 전하며 함께 연구할 것을 권하였다. 두 사람은 구입한 문명서적을 바탕으로 세계정세를 연구하여 사회제도로서의 자본주의를 이해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조선이 얼마나 뒤떨어졌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낡은 봉건제도를 청산하지 않고는 구미열강의 침략으로 나라가 멸망하리라고 생각하고, 나라의 발전을 위한 일대혁신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세계 대세에 상응하여 조선의 정치·경제·문화 생활을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박영교(朴泳敎)·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김윤식(金允植)·유길준(兪吉濬) 등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이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그 핵심적 내용은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들이 제시한 ‘14개조 정강’에서 총체적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정치면에서는 대외적으로 청나라와 종속관계를 청산하려는 것이며, 대내적으로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한 정치개혁이었다. 사회면에서도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여 중세적 신분제를 청산하려는 것이었으며, 경제면에서는 개화파들이 지주전호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국가재정을 강화하려고 지조법(地租法)의 개혁만을 내세웠다. 상공업면에서도 자본주의적 기업의 육성 문제나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하였지만, 자본주의적 산업경제로의 발전을 지향하였다. 이와 같이 개화사상은 조선사회의 자본주의화를 그 사상의 기본적인 방향으로 설정하면서도, 지주적 토지소유의 옹호·발전을 통한 지주경영의 자본가적 경영에로의 개편을 구상, 지주 및 지주와 거의 이해가 일치하는 대상인(大商人)을 근대사회의 건설주체로 설정하였다. 이와 같이 개화사상은 우선 당시 봉건적 토지소유 제도와 농민에 대한 봉건적 착취의 청산에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진 농민보다는 지주의 입장을 옹호함으로써 농민들의 반봉건적 개혁역량과 결합하지 못하는 계급적 한계를 드러내었다. 또한 지주 중심의 개혁방향은, 지주제 존속을 바탕으로 한 조선사회의 식민지화에 혈안이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투쟁할 내적 근거를 약하게 하였고, 그 결과 개화사상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사상적 한계를 띠었다. 한편, 개화사상은 기본적으로 개혁의 방향에는 일치하면서도 부르주아적 개혁의 방법을 두고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청의 양무론(洋務論)적 입장에서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을 도입하되 개혁정책은 민씨정권과의 타협 아래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온건적 입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뿐만 아니라 사상·제도까지 도입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철저한 개혁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민씨정권의 타도를 통해 권력을 쟁취한 뒤 급진적으로 추진하자는 변법(變法)적 입장이었다. 이후 온건적 입장은 갑오개혁,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의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주도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으로 이어졌고, 급진적 입장은 1884년의 갑신정변,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 독립협회의 개혁사상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이래 조선봉건사회가 당면했던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부국강병한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던 개화사상은, 이전의 실학사상(實學思想)이나 봉건유생들의 척사사상(斥邪思想)보다는 진일보한 부르주아적 개혁사상이었다. 그러나 지주적 기반을 가진 개화파의 계급적 한계와 당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에 대한 인식의 불철저로 말미암아 조선사회의 자주적 근대화를 이끌어내는 사상으로까지는 자리잡지 못하였다.

                                                                    

 

증산교(甑山敎)

 

    1901년 고부(古阜) 출신의 유생(儒生) 강일순(姜一淳)이 전주(全州) 모악산(母岳山) 아래에서 창도한 흠치교(敎)와, 나중에 그의 부인 고씨(高氏)가 창도한 태을교(太乙敎)를 비롯하여 현재의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에 이르기까지, 이 계열의 교파를 통틀어 이르는 말. 교주 강일순의 도호(道號)가 증산(甑山)이었으므로 증산교 또는 증산교단이라고 하며, 일제강점기에는 흠치교라고 하였다. 1894년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강일순은 전국을 떠돌다가 모악산 대원사(大願寺)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고 동학과 마찬가지인 ‘후천선계개벽(後天仙界開闢)’을 주장하는 흠치교를 창설하였다. 그 교리는 ‘천지공사(天地公事)’로 집약되며, 그것은 다시 운도공사(運度公事)·신도공사(神道公事)·인도공사(人道公事)로 구분된다. 그는 여러 가지 이적(異蹟)을 행하였다고 전한다. 그가 죽은 후 교인들이 흩어지자 1911년 그의 부인이 태을교를 만들어 교인들을 다시 모았으나, 그 후 보천교(普天敎)·미륵불교·모악교(母岳敎)·용화교(龍華敎)·증산대도·태극도·대순진리회 등 많은 파로 갈리었다.

                                                                 

 

원불교(圓佛敎)

 

    1916년 전북 익산시(益山市)에서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이 개창한 불교의 한 유파. 우주의 근본원리인 일원상(一圓相, 즉 ∥의 모양)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종교로, 진리적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통하여 낙원세계를 실현시키려는 이상을 내세우고 있다.

【약사(略史)】 교조 중빈은 전남 영광(靈光)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우주와 인생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머리에 가득찬 의문을 한학(漢學)공부로는 풀 수가 없었으므로, 범인(凡人)보다는 높은 차원의 경지에 있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의심의 해답을 얻고자 산상기도와 도사(道士)를 찾는 일에 열중하였다. 이같은 그의 구도정신은 결국 그를 외부로부터의 문제해결을 포기하고 독자적 수도 고행에 들어가게 만들었는데, 어떤 일정한 수행법을 택하지도 못한 채 망아(忘我)의 침잠(沈潛)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폐인이 되었다. 5년여의 침잠 끝에 1916년 4월 28일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깨어난 그에게는 우주와 세계의 새로운 질서가 뚜렷이 드러나 보였다는데, 그 질서를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불생 불멸(不生不滅)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를 천명하였다. 그후 그는 유(儒)·불(佛)·선(仙) 3교의 경전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교의 성서 등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특히 《금강경(金剛經)》이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일치함을 깨닫고 근본 진리를 밝히는 데는 불법(佛法)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여 석가를 선각자로 존숭하는 동시에 불교와의 인연을 스스로 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펴기 위하여서는 종래의 불교와는 크게 다른 새 불교·새 교단을 설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물질이 개벽(開闢)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었다. 동시에 그는 새 교단 창립과 새 세상 구제(救濟)의 대책을 법어(法語)로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수신(修身)의 요법(要法), 제가(齊家)의 요법, 강자 약자(强者弱者)의 진화상(進化上)의 요법, 지도인(指導人)으로서 준비할 점 등으로 되어 있다. 이같은 개교(開敎)의 기치 아래 최초의 법어로써 16년 새 교단을 열 의사를 표명하자, 마을사람들을 중심으로 인근에서 40여 명이 모였다. 그는 이 가운데서 8명을 선발하고 후에 정산(鼎山) 송규(宋奎:후에 一代宗法師)를 맞아 도합 9명을 새 교단 창립의 첫 제자로 삼았다. 원불교에서는 이 해를 원기(圓紀) 1년으로 삼고 있다. 그는 불교의 현대화·생활화를 주장하면서 신앙의 대상을 불상(佛像)이 아닌 법신불(法身佛)의 일원상(一圓相)으로 삼고, 시주(施主)·동냥·불공 등을 폐지하는 대신에 각자가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며 교화사업을 시행한다는 이른바 ‘생활불교’를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17년 저축조합의 조직을 필두로, 18년에는 바다를 막는 간척사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2만 6,000평의 논을 조성하고, 그후 엿공장·과수원·농축장·양잠·한약방 등 생산적인 경영을 하여 새 교단 창립의 경제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19년에는 9명의 제자와 함께 대기도(大祈禱)를 시작하여 3개월 후 최종 기도에서 ‘백지혈인(白指血印)의 법인성사(法認聖事)’라는 기적(奇蹟)을 낳고, 여기에서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여 신성(信誠)·단결(團結)·공심(公心)을 더욱 굳건히 하였는데, 이것이 곧 교단 창립의 얼이 되었다. 24년, 마침내 서중안(徐中安) 등이 발기인이 되어 전북 익산에서 불법연구회를 창설하고 중빈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38년에는 《불교정전(佛敎正典)》을 간행하여 기본원리인 일원상의 진리를 포명(布明)하였으나, 일본 관헌의 탄압이 계속되어 겨우 교단을 유지해 나갔다. 43년 교주가 죽자 송규가 종법사(宗法師)가 되어 교통(敎統)을 계승하고, 광복 후 47년에는 교명을 원불교로 개칭하는 한편, 교육·자선(慈善)·교화(敎化)의 3대 실천목표를 세워 포교에 힘쓰다가, 62년 규가 죽자 김대거(金大擧)가 2대 종법사에 취임하였다.

【교리】 법신불 일원상을 최고의 종지(宗旨)로 삼는데, 일원상의 신앙은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을 목표로, 어느 곳 어느 때나 신앙심을 지키어 천지(天地)·부모·동포·법률의 4은(四恩)에 보답하는 것을 불공으로 삼고, 자력양성(自力養成)·지자본위(智者本位)·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공도자 숭배(公導者崇拜)의 4요(四要)를 실천함으로써 복락의 길을 닦자는 것이다. 일원상의 수행이념은 무시선(無時禪)·무처선(無處禪)을 표준으로 하여, 언제 어디서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신수양·사리연구(事理硏究)·작업취사(作業取捨)의 3학(學)을 수행하여 신(信)·분(忿)·의(疑)·성(誠)의 ‘진행 4조(進行四條:추진할 네 가지)’로써 불신(不信)·탐욕·나(懶)·우(愚)의 ‘사연 4조(捨捐四條:버려야 할 네 가지)’를 제거하는 8조의 실행에 의하여 원만한 인격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법신불 일원상을 대상으로 신앙하고 수행하는 정각정행(正覺正行)·지은보은(知恩報恩)·불법활용(佛法活用)·무아봉공(無我奉公)을 4대 강령으로 삼고 있다.

【현황】 익산에 있는 중앙총부(中央總部)에서 교단을 총괄운영하고 지방에 교구(敎區)와 교당(敎堂)을 두고 있으며, 그 운영기구로서 종법사(宗法師)를 중심으로 수위단회(首位團會)·중앙교의회(中央敎議會)·교정위원회(敎政委員會) 및 교정원(敎政院)과 감찰원 등이 있다. 교당에는 교무(敎務)와 교도가 있는데, 교도는 10인을 1단으로 하는 10인 1단 교화단(敎化團)을 조직하는 것이 특색이다. 각종 연구소 외에 교육기관으로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영산선원(靈山禪院) 등의 종합대학, 전문대학 1, 중·고등학교 6, 선원(禪院) 3개처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교당별로 설치한 유치원·유아원과 양로원·보육원·수양원 등 자선기관도 운영하고 있다. 한편, 교단 직영의 산업체로 제약회사를 비롯하여 4개의 농원과 정미소·원예원 등이 있으며, 복지기관으로 양·한방(洋韓方)의 종합병원과 보화당한의원 등이 전국 주요도시에 있다. 문화사업으로 경전의 출판과 《원광(圓光)》 《원불교신보(新報)》 등 정기간행물도 간행하고 있다. 1993년 현재 20개의 국내 교구에 520여 교당과, 미국·일본·캐나다·중국 등 3개의 해외교구에 20여 개의 해외 교당이 있으며, 신도수는 100여 만명에 이른다.

                                                             

 

신흥 종교(new religion)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제도종교에 비하여 성립 시기가 오래 되지 않은 종교. 이때 ‘새롭다’라는 의미는 기성종교와의 관련하에서만 쓰일 수 있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흔히 신흥종교라고도 일컬어져 왔으나 이 용어는 신종교가 교리·의례·조직의 측면에서 기성종교에 비해 정교화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결핍된 종교라는 부정적인 함축을 띠고 있기 때문에 보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용어로 신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신종교의 발생 원인은 아노미(anomie), 상대적 박탈감, 전통적 가치관 또는 기성 제도종교의 설득력 상실, 문화접변에 따른 충격 등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위기’마다 신종교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신종교가 사회적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므로 각각의 구체적 사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신종교는 교리혼합주의(syncretism),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 현실주의적 구원관, 임박한 종말론의 강조, 선민사상, 신자 집단 내의 강력한 연대감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신종교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개항기, 일제강점기와 1960∼70년대 산업화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신종교는 동학계(東學系)·증산계(甑山系)·단군계(檀君系)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외에도 유교계·불교계·남학계(南學系)·기독교계·무속계의 신종교가 발생하였다. 이들 신종교는 《정감록(鄭鑑錄)》·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 등 종말론적 대망사상과 미륵신앙, 그리고 운세사상이 사상적 기반이 되어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표방했다. 동학(東學)의 최제우나 남학(南學)의 이운규(李雲圭), 정역(正易)의 김항(金恒), 증산교(甑山敎)의 강일순(姜一淳) 등의 세계관은 모두 후천개벽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 시기 신종교의 효시인 동학의 성립에는 해체기에 직면한 조선봉건사회의 체제모순과 서양제국의 침략에 따른 대내외적 위기, 18세기 중엽 이후 빈발하던 민란, 그리고 유교의 위상 약화와 천주교의 확산이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특히 18세기 중엽 이후 빈발하던 민란은 동학의 성립 배경이자 동학이 대규모 민중종교운동으로 확대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동학은 최제우(崔濟愚)에 의해서 1860년 경상도 경주에서 성립되었다. 후천개벽을 선포했으며 연원제(淵源制) 조직원리에 기초한 접(接)과 포(包)조직을 통해서 포교를 행하였다.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이르러 삼남 일대로 교세가 크게 확대되었다. 94년에는 교단 차원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과 민중의 변혁적 열망이 결합하여 동학농민전쟁을 수행하였다. 동학농민전쟁 이후에는 강원도·황해도·평안도 등지로 교세가 확산되어 전국 일원으로 널리 분포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천도교청년당(天道敎靑年黨)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적 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동학계 신종교는 천도교를 비롯해서 시천교(侍天敎)·수운교(水雲敎)·동학본부 등이 있다. 증산교는 증산 강일순에 의해서 1901년 전라도 모악산에서 성립되었다. 후천개벽과 해원상생(解寃相生)이 주요 교리이다. 핵심 주문인 ‘태을주(太乙呪)’의 첫머리가 ‘흠치흠치()’로 시작하기 때문에 흠치교로 불리기도 한다. 창교주 사후 극심한 분열의 모습을 보여 일제강점기에만 100여 개의 분파가 성립하였다. 주요 증산계 신종교는 보천교(普天敎)·태을교(太乙敎)·태극도(太極道), 그리고 1972년 태극도에서 파생하여 박한경(朴漢慶)이 설립한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와 1980년 안경전이 설립한 증산도가 있다. 대종교(大倧敎)는 홍암(弘巖) 나철(羅喆)에 의해서 단군신화의 모티프를 근간으로 1909년에 성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등 강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외에도 단군계 신종교는 한얼교·개천교(開天敎)·단군영모회 등이 있다. 원불교는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에 의해서 1916년에 성립된 종교이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표어 아래 종교신앙과 생활실천의 일치를 주장한다. 이 밖에도 금강도(金剛道)·각세도(覺世道)·봉남교(奉南敎:일명 찬물교), 강대성이 설립한 유교계 신종교인 갱정유도(更正儒道)가 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시기에는 기독교계 신종교가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는데, 이는 기독교의 급성장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이들 신종교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과정에서 뿌리뽑힘의 위기를 겪고 있는 도시 대중들에게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고 심리적 소속감을 부여하는 통로로 작용하였다. 기독교계 신종교는 대체로 신비주의적 지향을 강하게 띠고 있으며, 기독교적인 메시아니즘(messianism)과 종말론, 그리고 토착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전 시기의 신종교가 사회개벽 지향적, 공동체적, 농촌중심형이라면 기독교적 종말론의 강조, 개인구원 중심, 도시형 종교라는 점이 이 시기 신종교의 특징이다. 통일교(정식 명칭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전도관(傳道館)·승리제단(勝利祭壇)·애천교회 등이 대표적이다. 1954년 문선명(文鮮明)이 설립한 통일교는 반공주의와 성적 타락을 주장하는 등 독특한 성경해석을 하고 있으며 주된 교리서로 《원리강론》이 있다. 국내보다 일본·미국 등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크게 확산하였다. 박태선(朴泰善)이 설립한 전도관은 메시아를 자처하여 1950년대부터 전도관과 신앙촌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펼쳤다. 승리제단(일명 영생교)은 조희성이 전도관으로부터 독립하여 1980년에 설립하였다. 임박한 종말과 영생 불사를 주장하고 있다. 이외에도 관성교·무량천도와 같은 무속계 신종교도 있다. 외래 신종교로는 일본계의 창가학회(創價學會:일명 남묘호랭교)·천리교, 미국계의 여호와의 증인·모르몬교·안식교, 그리고 중국계의 일관도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종교는 왜색(倭色) 시비로, 여호와의 증인교는 수혈거부와 집총거부 등으로 사회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종교는 사회구조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신종교의 발생은 사회변동에 대한 반응이자 동시에 사회변동의 촉발제가 되기도 한다. 신종교의 발생은 그 자체가 당대의 사회적 위기상황이나 기성종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기성종교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며, 그 사회와 종교를 혁신하기 위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다. 이로 인하여 기성종교와 사회로부터 이단·사이비종교·사교(邪敎) 등으로 배척받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신종교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상당 부분 자의적인 것이거나 결과론적인 것으로 신종교가 지니는 사회고발적 성향이나 창조성을 무시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기성종교나 사회제도의 관점에서 신종교에 가하는 평가를 신종교 일반의 성격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2006-06-19 17:08 | 출처 : 본인작성

 

 

 

                                                                                                   <다음지식>에서  내끄....님의 답변 중에서 발췌

 

 

 

 

 

 

 

 

 

 

 

 

 

 

 

 

 

 

 

 

 

 

 배우고 익히고............

 

 

 

 

윤왕후의 혼유석

 

 

 

 

망부석(신라 재생 박제상의 아내가 치술령에서 돌이 되었다는 설화에서 온....)과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난간석 동자주.

 

 

 

 

석물의 구색 갖춤.

 

 

 

 

 

 

 

 

 

 

늘........ 두고두고 수고하시고 봉사하시는 정경식 사무총장 어르신.........

 

 

 

 

 

 

 

 

 

 

 

 

 

 

 

 

 

 

 

 

 

 

 

 

 

 

 

 

 

 

 

경인란(625동란)의 흔적......

 

 

 

 

우의정에 해당하는 오른편의 문인석 - 문인이라 무술을 배우지 못하여 총알을 미처 피하지 못하였나 보다.

                                                    무인석들을 잘 피하였던 데.........

 

                                                    그나마 관복 긑단 근처에 맞아서 상처는 안났겠다.

                                                    그것봐라!! 공부만 하지들 말고 무술도 좀 배워..........

 

 

 

 

석등 - 양각의  길상화와 앙련으로 장식

 

 

 

 

홀을 든 문인석 - 외모는 서북인 즉 북방계 유목민의 후손인 고구려계 후손의 문사로 보임.

 

 

 

 

 

문인석

 

 

 

 

무인석

 

 

 

 

 

 

 

 

 

 

 

 

 

 

 

 

 

 

 

 

유각년 삼반 어르신들..............

 

 

 

 

응급처치

 

 

 

 

무인석 - 말을 타기 쉽게 치마형 갑옷을 입었고, 기마자세에서는

              치마단 부분이 무인의 다리와 말의 복부를 방호하는 역활을 한다.

 

 

 

 

 석등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 능침

 

 

 

 

무인석의 뒷태..........

 

 

 

 

왕후 능이여서 石羊의 배 아래 빈공간부에도 모란당초문을 새겼다.

 

 

 

 

비각, 정자각 그리고 숲과 하늘..........

 

 

 

 

비각과 정자각

 

 

 

 

정려문 - 삼태극 표시

        - 부여, 고조선, 고구려 시대부터 있어온 우리 민족 고유의 선도(仙道)에서

           하단전과 상단전에서 기의 모음(結氣)와 흩뿌림(氣散)의 방법을 도식화한 것이다

 

 

 

 

 

 전나무 피해목에 찾아온 가을빛.......

 

 

 

 

 

햇님반!!   달님반 모이세요!!........ 가방을 제자리에 벗어 반듯하게 놓고나서........

그러고는 맨몸으로 답사를 가다..... 역시 어릴 때 부터 여자(보모선상님)를 잘 만나야.........

 

 

 

 

다 익은 산딸나무 열매

 

 

 

 

산딸나무는 봄에 작은 꽃이 피며, 이 자잘한 꽃의 단점을 보완하여 매개곤충들을

            유인하기 위하여 흰색 또는 연한 분홍색 반엽들이 십자상으로 마주 나서.

 

            꽃잎이나 꽃받침 처럼 보이게 함.  이를 두고 십자가를 상징으로 하는 모교단에서는

            성목(聖木)으로 삼고, 십자가나 관을 산딸나무로 만들었다는 설화가 있으나,

 

            구약성서의 모태가 되는 바빌로니아의 설형문자 점토판, 신 구약성서, 쿠란 경 어디에도

            문자화되어 기록된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소위 <카드라 복음서>에서 인용되었을

 

            가능성이 큼.

 

 

           

 

 

 

 

산딸나무 열매 - 연한 단맛이 나고 조직이 물러 잼 등 저장식품으로 이용.

                       신맛 즉 과일산이 적어 사과나 꽃사과, 오미자 등을 소량 섞어면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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