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30. 21:27ㆍ경전 이야기
고려시대, 다종교사회
고려는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국제성을 띤 국가이다.
고구려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교류가 있었고, 백제 또한 동남아사아를 넘어 인도까지 교류범위를 넓혔다. 남북국시대 신라와 발해의 교역 범위는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못하지만 발해는 비단길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교류, 신라의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페르시아와도 교역을 하였다.
고려의 교역 범위 또한 상당히 넓고, 문화의 성격도 국제성을 띤 개방적인 사회였다.
개방적인 성격은 종교양상에도 나타난다. 문헌상 보이는 고려시대 종교는 불교, 도교, 유교, 이슬람교 등이다. 흔히 고려를 불교국가라고 평하지만, 고려는 불교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팔관회는 성황(城隍)신앙과 향도(香徒)신앙을 결합한 것으로 불교와 무교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1)
고려문화의 국제성은 귀화인 포용정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사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중국인, 발해인, 거란인, 여진인 등이 주류를 이뤘고, 후기에는 일본인, 색목인(色目人), 회회인(回回)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2)
고려는 귀화한 사람들에게 고려에 동화할 수 있도록 하였다.3) 그에 따라 귀화인들 중에 벼슬에 올라 활약한 인물들도 있었고, 그들의 문화를 전파해 준 인물도 있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종족이 회회인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슬람 사원격에 해당하는 예궁(禮宮)을 짓고, 회회사문(回回沙門:이슬람 지도자)주도하에 대조회송축(大朝會頌祝:이슬람교의 예배의식)도 고려의 궁궐에 열곤 했다.4)
그렇다면 이런 국제성을 띤 고려에 동방기독교가 전파되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문헌상 기록으로는 동방기독교의 고려 진출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글쓴이 또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동방기독교의 고려 전파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근거를 알아보고 그것에 문제점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한국기독교의 역사》에는 이러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원대의 야리가온이 유행했던 시기는 우리나라 고려 왕조의 무인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후기에 속한다. 13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려는 몽고족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다. 1231년 사르타이(撤禮塔)가 이끄는 몽고군이 한국을 침략한 이후 1259년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기까지 무려 7차례 걸쳐 공략하였다. 몽고족이 중국의 송을 완전히 멸망시킨 후 원이라는 나라를 세운 1264년 이후 고려는 관계개선을 통해 활발한 교류를 추진했다. 정치․경제적인 교류뿐 아니라 문화․종교적인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특히《고려사》에 보면 몽고인들이 고려로 귀화한 경우와 함께 티베트인․서역인(西域人)들도 끼어 고려에 귀화하는 예가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몽고와 고려 사이의 교류를 통해 몽고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야리가온 신앙이 고려인들에게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추정이 나올 수 있다. 이러한 주장도 당대 경교가 통일신라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과 같은 논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5)
위 글의 요점은 고려와 몽고와의 관계를 통해 몽고에서 야리가온 즉, 동방기독교가 성행했으니 고려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사가들은 고려의 동방기독교 전파에 대한 공통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총체적인 주장과 더불어 몇 가지 증거를 제시하곤 한다.
1)려몽 연합군의 일본정벌시 사용되었던 무기에 십자가 문양을 가진 문양이 많이 있다.
2)기독교인이 많았던 원대 황실에서 원의 세조(쿠빌라이 칸)의 딸(장목왕후)이 고려로 시집을 오게 된 것.
3)고려에 영향력을 끼쳤던 내안(乃顔)의 내전 시에는 그의 군대가 십자가의 軍旗를 날리며 전쟁에 임하였다.6)
총체적인 문제는 가장 후에 논하기로 하고 1번과 2번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원나라의 종교에 대해 알아야 한다. 칭기스칸의 집권시대부터 몽고의 종교정책은 다종교지향주의였다. 투르크족이 믿었던 이슬람교와 위구르족과 카룰룩 투르크족이 믿었던 동방기독교와 불교, 중국의 도교 등 당대 믿었던 종교에 대해서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것은 종교포용정책에는 정치적인 요인과 신앙적인 요인이 작용하였다.
소수에 불과한 몽고가 다수의 피지배인들을 정복하고 통치하기 위해서는 반감을 가질 요소를 없애야 했다. 몽고는 그 지방민들이 믿었던 종교를 존중하였으며 색목인들의 우대정책으로 인해 그들의 종교가 몽골족 내로 침투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위의 근거 1번과 2번은 개별신앙을 존중한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 고려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동방기독교의 영향력을 크게 본 결과라 할 수 있다.
더구나 2번의 근거로 장목왕후의 예를 들었는데, 장목왕후가 기독교신자인지에 대해서는 불투명하다. 오히려 장목왕후는 불교신자의 색채가 나는 인물이었다.
충렬왕과 장목왕후가 묘각사(妙覺寺)에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절에 금탑을 세웠다는 것과 쿠빌라이가 장목왕후를 위해 제주도에 원찰(願刹)을 세웠다는 것은 장목왕후의 종교가 기독교가 아닌 불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므로 2번 근거는 성립될 수 없다.
또한 2번 근거에는 기독교인이 많았던 원 황실이라고 하였으나, 그것은 역시 기독교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쿠빌라이 당시 원나라에는 강남의 도교, 강북의 유교, 원황실에는 도교와 불교가 주를 이루었다. 몽케칸 시절 그는 유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손가락이요, 불교는 손바닥이라는 말까지 하였고, 도교와 불교의 종교회의까지 열리기까지 되었다.7)
동방기독교가 원 황실에 유행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주가 된 것은 도교와 불교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외래종교가 아닌 샤머니즘이었다.
몽고의 종교정책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몽고는 텡그리(天)를 숭상했고, 사람과 텡그리를 이어주는 샤먼을 존중했다. 칭기스칸시대 대 샤먼이었던 쿠쿠추나 쿠쿠추의 아버지인 뭉릭의 역할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몽고는 天사상을 가진 불교8), 도교, 유교, 이슬람교와 함께 기독교를 중시한 것이었지 기독교가 특별한 매력이 있어서거나 진리를 담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9)
3번의 논거는 乃顔의 종교적 성향과 고려에 대한 영향력 행사라는 면에서 든 것이다.
1번, 2번의 설명에서 이미 말했듯이 다종교지향주의를 표방했던 몽고에서 내안이라는 인물의 종교적색채는 개별신앙에 불과한 것이다. 다만 그가 고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시 되는 것은《고려사》에서 조차 내안에 대한 기록은 그가 쿠빌라이 칸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을때 충렬왕은 장군 유비(柳庇)를 선두로 한 원군을 보냈다는 기록과10) 그 잔당이 고려로 쳐들어와 왕은 강화도로 피신하고 원나라에 원군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내안의 고려에 대한 영향력은 설명조차 힘든 부분이므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원나라 시기 민중들에는 백련교 등의 밀교가 성행하였다. 민중들의 반원감정 때문이다.
고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큰 영향을 받았으니 민중들에게는 반원감정이 넘쳐났을 거라는 것은 추론이 가능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만약 몽고의 기독교신자들에 의해 고려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한 숫자이며 반원감정을 가진 민중들에게는 전파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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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훈요십조의 6조 “팔관(八關)은 천령(天靈:하느님), 오악(五嶽)과, 명산(名山), 대천(大川)과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즉, 팔관회의 성격은 불교+풍수지리 사상+무속신앙의 결합체였다.
《고려사》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성황신앙은 마을과 공동체를 지켜주는 신을 믿는 것으로 무속과 관련된 것이고, 향도신앙는 지방사
사회의 신앙으로 미륵불의 구제신앙으로 불교적 성격을 띤 것이다.
박종기《5백년 고려사》P207~224
2) 고려에 귀화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성으로는 청해 이씨(여진), 연안 안씨(몽골), 경주 설씨(위구르), 충주 매씨와 남양 제갈씨(중국), 화산 이씨와 정선 이씨(베트남), 덕수 장씨(아라비아), 우륵 김씨(일본) 등이다.
3) 광종 16년 7월
왕이 귀화해 온 중국사람에게 예를 갖추어 후대하여 신하들의 집과 딸들을 골라 그들에게 주었다.
정종 4년(1038)
여진이 비록 다른 종족이나 이미 귀화하여 이름이 우리 호적에 올라서 일반백성이나 같으니…
4) 회회사문에 의한 대조회송축이 금지된 것은 세종대왕때로써 후에 언급하겠다.
5)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구기독교역사Ⅰ》P37
6) 박희찬《경교의 당 시대 선교와 한국 전래 가능성 연구》안양신학대학 석사논문
이 논거는 오윤태氏의 《한국기독교사(景敎史編)》을 인용한 것이다.
7) 이경규《원대의 종교정책과 기독교》중국사 연구 제 15집
8) 많은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 무신론이라고 논하나 불교는 무신론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불교교리를 논할 때 언급하기로 하겠다.
9) 1275년 쿠빌라이는“칭기스칸 황제의 거룩한 칙령에 和尙(불승), 也里可溫(네스토리우스 승려), 先生(도교의 도사), 答矢蠻(무슬림 종교지도자)을 토제세와 상세 또는 어떠한 징발의 대상도 되지 않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하늘의 도움을 기도하고 황제의 행복을 간구하게 하라고 되어 있다”라는 칙령을 내렸다.
르네 그루쎄《유라시아 유목제국사》P325
10) 충렬왕 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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