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30. 21:18ㆍ경전 이야기
네스토리우스파의 동방진출
한국 천주교의 역사 200년, 기독교의 역사 100년이라는 말을 한다. 개신교의 한국전래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전래가능성은 이미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부터 있었다. 남북국시대 경교(景敎)의 전래와 그 이전 가야로의 토마전래설이 그것이다.
토마스 행전(僞經)에 의한 토마의 인도전래 이야기와1) 토마의 제자 아가이의 중앙아시아 전도설과 더불어 1987년 경북 영풍군에서 외래의 색깔을 띠는 석상이 발견됨에 따라 토마의 기독교전래설의 근거로 사용되었다.2) 하지만 아직까지는 근거가 부족하여 가설에 머물고 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전래이전 가장 뚜렷한 그리스도교계 교단이 아시아로 전파된 예는 당나라에 의한 경교(景敎)수입이다.
흔히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이단이라고 하여 정통기독교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시기를 논할 때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제외를 시킨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 교단을 이단으로 단정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3)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페소스 3차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려 쫓겨난 네스토리우스를 추종한 그의 세력들이 그를 추종한 그의 세력들이 그를 총교주로 하여 만든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이미 천 년도 더 전에 한반도로 전파되었다.
발해와 신라에 유입되었던 네스토리우스 교단. 그것이 종교적 형태로서든 문화적 형태로서든 간에 전파된 것은 사실이었고, 발해에서 협시보살이 걸고 있는 목걸이가 십자가인 것과 불국사에 아기를 안고 있는 석상4)이 있음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한반도에서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포교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네스토리우스는 당대 교회의 큰 축을 이루고 있었던 안디옥파에 속했던 인물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안디옥 교주, 콘스탄티노플의 교부까지 이행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이단이란 오명을 받아 파문되었던 까닭은 성모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써 인정하지 않음에 있었다고 한다.5) 이것은 곧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결정, 431년 8월 동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네스토리우스를 최종적으로 파면시켰다.6)
네스토리우스는 이후 4년동안 은둔을 즐기다가 유프레피우스 수도원에서 끌려나와 정처없는 유배의 길에 올랐다. 아라바아에서 이집트로 끌려다니던 네스토리우스는 439년이후 사망하였는데,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7)
489년 안디옥파의 인물들을 배출시켰던 에데사 신학교가 제노황제에 의해 폐쇄되자 네스토리우스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바르 소마의 지도하에 페르시아로 들어가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갈데아 혹은 아시라아 그리스도인이라 하였으나 단성론자들은 그들을 네스토리우스파라 부르게 되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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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Ⅰ》P24~25
김호동《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P15
2) 경북 영풍군 평은면 왕유리 뒷산에 한 석상이 1987년 8월 발견되었다. 이에 9월 한국역사학회에서는
그 석상을 토마의 석상이라고 발표하였다. 그것은 석상 밑 부분에‘ם?’이라는 히브리어가 있었고,
탁본한 결과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耶蘇花王 引導者 刀馬 明’이라하여 도마의 이름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경산군 자연면 일언동 인흥사에서는 어린양을 두 손으로 가슴에 안고 있는 조각과 기도하
는 모양의 조각이 발견되어 기독교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추측을 하고 있다.
이장식《아시아 고대 기독교사》P373~394
3) 교리논쟁의 문제는 기독론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이 단락에서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할 때 전체적인 논점에 대해 설명하기로 하겠다.
4) 정수일 교수는 이것을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라고 추정한다.
정수일《고대문명 교류사》P592~594
5) 네스토리우스 교단이 배척했던 네 가지는
첫 번째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 숭배하는 행위
두 번째 화상(畵像)사용
세 번째 연옥교리
네 번째 화체설
필립 샤프 《니케아시대와 이후의 기독교》
6) 431년 6월 7일.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안디옥파가 약속된 날짜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키킬루
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회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네스토리우스를 파면하였다. 이에 6월 29일 안디옥 주교
요한네스 등이 역으로 키킬루스를 파면하는 결정을 내렸고 7월 9일 동로마 황제의 특사는 키킬루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필립 샤프《니케아 시대와 이후의 기독교》
김호동《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P89~96
7) 이후 네스토리우스는 단성론자들에 의해 대대로 멸시의 대상이 되다가 루터 이후 그의 올곧은 성품
으로 인해 동정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필립 샤프《니케아시대와 이후의 기독교》
8) 필립 샤프《니케아시대와 이후의 기독교》
김호동《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P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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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히브리어가 표현이 안되는군요..
다음 카페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 이정기 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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