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30. 21:22ㆍ경전 이야기
당나라로의 유입과 부흥 그리고 쇠퇴(발해와 신라에로의 유입) 네스토리우스 교단이 페르시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당나라로 세력을 넓힌 것은 당 태종 9년인 635년이었다.1) 당이라는 국가는 국제적인 문화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서도 문화 포용정책을 시행하였다. 파사국(波斯國:페르시아)은 당시 압박해오던 이슬람세력을 견제하기 교회를 이용하여 당과의 외교를 위해 아라본을 사절단장으로 임명. 21명의 선교사절단이 당나라로 파견되었다.2)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목적은 종교전파가 아니라 외교사절단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당 정부의 문화포용정책과 정치적 목적이 잘 맞물려 경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경교비에는 도덕경을 그대로 베낀 문장이 부분적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그것은 당조정이 노자(李耳)와 황실을 연관시키고 도교를 부흥시키려 했던 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당조정 또한 네스토리우스 교단에 대한 뒷받침으로 도교와 연관시켰던 것이다.3)
이것은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쇠퇴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도교의 힘을 빌어 민중에 등장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네스토리우스 교단을 또 다른 종교가 아닌 도교의 아류쯤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가 정부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정부는 이해관계가 있는 종교에 대해서만 지원을 해 주고, 종교는 그 종교만의 특수한 논리로 정부를 대변해 주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는 정치와는 이해관계에서 멀어져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이후 정부와 교회의 관계가 그러했고, 지금 살펴보고 있는 당정부와 네스토리우스 교단과의 관계도 그러하다.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포교 또한 정부의 입장을 적극 반영하였다. 《세존본시론》이라는 문서에는 마태복음 7장 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 서서 너희를 물어 뜯을지도 모른다”라는 것을 “정결한 것을 개처럼 짖는 사람에게 주지 말라. 진주를 돼지 같은 요인(遼人)에게 주지말라. 그것을 짓밟아 못쓰게 할까 두렵도다”로 고쳐 가르쳤다4). 이 문구의 요점은 성스러움을 개, 돼지에 의해 더럽히지 말라라는 것이다. 요인(遼人: 요동인=고구려인)이 성스러움을 더럽히는 존재로써 상징적으로 쓰여졌다는 것은 당시 당나라에서 고구려인들을 얼마나 증오하였는가를 경교계가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라 보여 질수 있다. 또한 과장된 추측일 수도 있겠지만,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을 때 거룩함을 더럽히는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 하여 종교적 타당성을 네스토리우스 교단에서 제공해주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후에도 살펴보겠지만, 임진왜란시에도 포루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조선정벌의 타당성을 그들의 교리를 통해 제공한 것과도 유사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당 정부와 가까운 사이였던 네스토리우스 교단이 그 신자인 곽자의나 이사5)의 벼슬이 높아짐에 따라 종교적 입지가 확고해져 부흥시대가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네스토리우스 교단이 국가권력의 비호아래 세력을 키웠던 만큼 권력자가 탄압을 하게 되자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첫 위기는 불교신자였던 측천무후의 즉위와 함께 찾아왔으며 두 번째 위기이자 경교의 분열을 가지온 사건은 당 무종(841~845)의 종교탄압 일명 회창법난(會昌法難) 때문이었다.
회창법난은 다분히 무종의 종교적 색채뿐이 아니라 안사의 난으로 인해 온 나라가 피폐해졌음에도 불교의 사원은 여전히 건재한데에 대한 불만과 함께 도교를 부흥시키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계산에서 저지른 사건이었다.
이에 무종은 회창2년부터 5년까지 불승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6)과 더불어 회창3년에 이르러서는 외래종교 또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7)
회창법란으로 인한 외래종교의 탄압은 곧바로 중국내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동방기독교가 발해와 신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하지만 발해와 신라로 유입되어 온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당나라에서 행했던 것처럼 토착화를 이루지 못하였고, 불교의 분파종교정도로 인식 되었던 것 같다. 훈춘(발해의 동경용원부)에서 발견된 삼존불에서 협시보살이 경교계의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있는 것이나8) 경주에서 성모마리아상으로 추측되는 관음상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혹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여러 가지 기록이 구약성서와 비슷하다고9) 하여 신라시대 경교전파 가능성의 근거로 사용한다. 하지만 정수일교수가 지적했듯이 문명현상의 보편성이란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위에 든 몇 가지 근거는 경교의 전래 가능성의 근거가 될 수는 있지만 절대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전파되어 왔다 하여도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안일한 타협주의로 인해 불교의 분파로 밖에 이해되지 못한 것 같다. ******************************************************* 1)《大秦景敎流行中國碑》‘大秦國有上德 日阿羅本 占靑雲而載眞經 望風律以馳艱險 貞觀九祀至於長安 帝使宰臣房公玄齡 惚仗西郊 賓迎人內’ 대진국(大秦國) 승려 아라본(阿羅本)이 진리의 경전(眞經)을 가지고 정관9년 장안에 다다르니 태종이 방현령을 서교(西郊)로 보내어 맞이하였다(賓迎人內)는 것이다. 2) 이관숙《중국 기독교사》P62 3)《大秦景敎流行中國碑》‘宗周德衰靑駕西昇 巨唐道光景風東扇’ 靑駕는 노자가 함곡관을 빠져 서쪽으로 갈 때 타고 갔다는 검은 소(靑牛)를 의미하고, 景風은 경교 사절단을 가르키는 것이다. 김호동《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P130 4) 김호동《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P144 5)《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따르면 이사는 곽자의의 오른팔이었으며, 경교의 문화를 크게 개방하여 부흥시켰다고 한다. 이관숙《중국 기독교사》P73~74 6)《入唐求法巡禮行記》 회창 2년 3월 보외승(保外僧), 무명승(無名僧)을 쫓아냄 10월 9일 전국에서 소련(燒練), 주술(呪術), 금기(禁忌)를 아는 사람, 군대에서 탈영하 고 절로 숨어든 사람, 몸에 몽둥이로 맞은 흔적이나 조문(鳥文)이 있는 사람, 계율을 지키지 않은 비구승과 비구니들을 모두 환속(還俗)한다. 7)《入唐求法巡禮行記》 회창 3년 4월 칙령으로써 전국의 마니교(摩尼敎)신도를 죽이게 했다. 8) 발해건국 1300주년 기획전(1998년 / 전쟁기념관) 9)《삼국유사》제 1권 신라시조 혁거세왕편의 “사량리 알영정가에 계룡이 나타나서 외쪽 겨드랑이 밑에서 동녀를 났었다”라는 기록과 구약성서에서의 이브 탄생과 결부시켰고, 태종 춘추공의 “경신년 4월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위에 모였고, 왕도의 사람들이 까닭없이 내달이 마치 잡으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놀라 자빠져 죽은 자가 백여명이요 재물을 잃은 자가 수없이 많았다”의 기록을 출애굽기 8:1~3까지의 기록과 연관시킨다.
|
'경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기독교사(6) - 한국판 십자군전쟁 (임진왜란) (0) | 2013.12.30 |
---|---|
한국기독교사(5)- 고려시대 , 다종교시대 / 역사문 이정기 님의 글 (0) | 2013.12.30 |
한국기독교사(3) - 네스토리우스파의 동방진출 / 역사문 이정기 님의 글 (0) | 2013.12.30 |
한국기독교사(2) 들어가는 말 / 역사문 이정기님의 글 (0) | 2013.12.30 |
한국기독교사(1) 차례 /역사문 이정기님의 글 (0) | 2013.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