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산 , 목멱산 ,인왕산 타락산 / 대기만성 김민수 님의 글

2014. 1. 21. 04:58우리 역사 바로알기

 

 

 

 

백악산(白岳山), 목멱산(木覓山), 인왕산(仁王山), 타락산(陀駱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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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4123일 태조 이단(李旦)이 하룻밤을 재계(齋戒)하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천신인 황천(皇天)과 지신인 후토(后土)의 신()에게 제사를 올려 새 왕도의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告由文)조선 국왕 신 (태조인) 이단(李旦)은 문하 좌정승(門下 左政丞) 조준(趙浚)과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 및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 등을 거느리고서 한마음으로 재계와 목욕을 하고, 감히 밝게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에 고하나이다. 엎드려 아뢰건대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어 만물이 생성(生成)하고, 옛것을 개혁하고 새것을 이루어서 사방의 도회(都會)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니, 신 이단(李旦)은 외람되게도 어리석고 못난 자질로서 하늘이 은미(隱微)하게 사람을 돕거나 복()을 내리는 음즐(陰騭)의 기쁨을 얻어 고려가 장차 망하는 때를 당하여 조선(朝鮮) 유신(維新)의 명을 받은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너무나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게 되어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편히 지내지 못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마무리를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그 요령을 얻지 못했더니 일관(日官)이 고하기를 송도(松都)의 터는 지기(地氣)가 오래 되어 쇠해 가고, 화산(華山)의 남쪽은 지세(地勢)가 좋고 모든 술법에 맞으니 이 곳에 나가서 새 도읍을 정하라.’ 하므로, 신 단()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태묘에 고유하여 1025일에 한성으로 천도하려는 것인데, 유사(有司)가 또 고하기를, ‘태묘는 선왕의 신령을 봉안하는 곳이요, 궁궐은 신민의 정사를 듣는 곳이니, 모두 안 지을 수 없는 것이라.’ 하므로, 유사에게 분부하여 이 달 초4일에 기공하게 하였습니다. 크나큰 역사를 일으키매 이 백성의 괴로움이 많을 것이 염려되니 우러러 아뢰옵건대 황천께서는 신의 마음을 굽어 보살피사 비 오고 개는 날을 때 맞추어 주시고 공사가 잘되게 하여 큰 도읍을 만들고 편안히 살게 해서 위로 천명(天命)을 무궁하게 도우시고 아래로는 민생을 길이 보호해 주시면 신 이단(李旦)은 황천을 정성껏 받들어서 제사를 더욱 경건히 올릴 것이며 때와 기회를 경계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신하와 백성과 더불어 함께 태평을 누리겠나이다.”하였다.

 

 

    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서 산천(山川)의 신()에게 고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은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漢江)과 양진(楊津)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대개 옛날부터 도읍을 정하는 자는 반드시 산()을 봉하여 진()이라 하고, 물을 표()하여 기()라 하였다. 그러므로, 명산(名山) 대천(大川)으로 경내(境內)에 있는 것은 상시로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 등록한 것이니 그 것은 신령의 도움을 빌고 신령의 도움에 보답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변변치 못한 내가 신민의 추대에 부대끼어 조선 국왕의 자리에 앉아 사업을 삼가면서 이 나라를 다스린 지 이미 3년이라. 이 번에 일관의 말에 따라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태묘와 궁궐을 경영하기 위하여 이미 날짜를 정했으나, 크나큰 공사를 일으키는 데 백성들의 힘이 상하지나 아니할까 또는 비와 추위와 더위가 혹시나 그 때를 잃어버려 공사에 방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제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과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 한마음으로 재계하고 목욕하여 이 달 초3일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김입견을 보내서 폐백과 전물(奠物)을 갖추어 여러 신령에게 고하노니 이 번에 이 공사를 일으킨 것은 내 한 몸의 안일(安逸)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요, 이 제사를 지내서 백성들이 천명을 한없이 맞아들이자는 것이니 그대들 신령이 있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알아주어 음양(陰陽)을 탈없이 하고 병이 생기지 않게 하며 변고가 일지 않게 하여 큰 공사를 성취하고 큰 업적을 정하도록 하면 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도 감히 나 혼자만 편안히 지내지 않고 후세에 이르기까지 때를 따라서 제사를 지낼 것이니 신도 또한 영원히 먹을 것을 가지리라. 그러므로 이에 알리는 바이다.”하였다.

 

 

    13951229일 이조에 명하여 백악(白岳)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목멱(木覓)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은 제사를 올릴 수 없게 하였다. 1398319일 태조가 광주(廣州)의 새로 주조(鑄造)한 종()이 이루어졌으므로 백악(白岳)과 목멱(木覓)에 제사를 베풀었다. 1408522일 태종이 백악(白岳목멱(木覓한강(漢江)의 신()에게 비를 빌고, 각전(各殿)의 공상(供上)하는 약주(藥酒)를 정지하였다. 140975일 태묘와 백악(白岳목멱(木覓)에 비가 개기를 빌었다. 141226일 백악(白岳목멱(木覓)의 신주(神主)를 고쳐서 만들었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백악·목멱의 신주가 만든 지가 오래고, 또 옛 제도에 합하지 않으니 홍무 예제(洪武 禮制)에 의하여 고쳐서 만드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141375일 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 등을 북교(北郊백악(白岳목멱(木覓양진(楊津한강(漢江)에 보내어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1422114일 세종이 도성(都城)을 수축하는 일로 목멱산(木覓山)과 백악(白岳)의 산신(山神)에게 제사 지내어 알렸다. 143384일 세종이 경연에 나아갔다. 땅의 생김새를 보고 길흉을 판단하는 상지(相地) 이양달(李陽達)이 아뢰기를, “경복궁(景福宮) 명당의 물은 왼편 물이 도교의 초제(醮祭)를 주관하던 도관(道觀)인 소격전(昭格殿) 골짜기 근처에서부터 나오고, 오른편 물이 백악과 인왕산 기슭에서부터 나와서 중학천(中學川)이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설치한 혜정교(惠政橋) 아래에 이르러 좌우의 물이 합류하여 돌아 싸고 내려가니, 등지고 흐른다고 말할 수 없사오며, 궁성 서문 밖의 작은 냇물이 노비 문서와 노비 관련 소송을 관장하는 도관(都官) 북쪽에 이르러 오른편 물과 합류하여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내려가니, 바로 옛 사람의 명당 상류수 이론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하필 공교하게 파서 비뚜로 흐르게 하겠습니까. 신의 마음에는 예전대로 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되옵니다. 지리서에 이르기를, ‘왼편에 물 있고 왼편에 산 있으면 재물이 쉽게 생기고, 오른편 활로 오른편을 안은 것은 그 다음 간다. 음택(陰宅)이나 양택(陽宅)이나 다 이러하되 왼편의 산에서 기울어져 흐르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습니다.”하니, 아뢴 것을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수(曆數), 점주(占籌), 측후(測候), 각루(刻漏)를 관장하는 관상감(觀象監)의 풍수학(風水學)에 내려 보냈다.

  

 

 

    1443629일 우사단(雩祀壇)과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과 삼각산(三角山백악산(白岳山목멱산(木覓山한강에 비를 빌고, 또 무당과 승려들을 모아 용()의 형상과 유사한 도마뱀 10마리를 잡아서 독 안에 넣고 나뭇잎으로 덮은 후 동자 수십 명이 푸른 옷을 입고 손과 발을 푸른색으로 염색하여 버들가지를 물에 적셔 도마뱀이 들어 있는 독을 두드리면서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게 하고 비가 오도록 해라. 그러면 너를 놓아주겠다.’라고 외치면서 독을 돌게 하고 끝나면 놓아 보내는 석척(蜥踢) 기우제를 지냈다. 76일 예조에서 아뢰기를, “근일(近日)의 한재(旱災)가 매우 두렵사오니 흥덕(興德장의(藏義승가(僧伽개경(開慶회암(檜岩) 등의 절에 승려들을 시켜서 비가 내릴 때까지 기도하게 하고, 아울러 명통사(明通寺)에서도 기도하게 하고, 삼각(三角백악(白岳목멱(木覓송악(松岳감악(紺岳개성(開城덕적(德積삼성(三聖) 등지에도 또한 기도하게 하고, 또 한기(旱氣)가 있는 각도는 사전(祀典) 외의 영험(靈驗)이 있는 산천(山川)에 역시 치제(致祭)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145255일 문종의 병환이 낫지 않으므로, 태묘·사직(社稷소격전(昭格殿)과 삼각산(三角山백악(白岳목멱산(木覓山)의 신()에게 기도하였다. 1463129일 취로정(翠露亭) 연못 가에 호랑이 발자취가 있었으므로, 세조가 밤에 입직(入直)한 여러 장수를 불러서 말하기를, “좌상(左廂우상(右廂)은 백악산(白岳山인왕산(仁王山) 등지를 몰이하라. 만약 살펴서 호랑이가 있는 곳을 알게 되면 내가 마땅히 친히 가겠다.”하였다.146916일 예종이 발에 생긴 질병인 족질(足疾)이 있은 지 오래 되어도 낫지 아니하여, 목멱산(木覓山)과 백악산(白岳山한강(漢江원각사(圓覺寺복세암(福世菴) 등에 기도(祈禱)하게 하였다. 도승지 권감(權瑊)은 또한 향()을 받아 가지고 내불당(內佛堂)으로 갔다.

 

 

    1503119일 전교하기를,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복세암(福世菴인왕사(仁王寺금강굴(金剛窟) 및 정자지(鄭子芝) 11인의 집을 모두 철거하고, 변대해(邊大海) 20인의 집은 뒷산에 담을 쌓아 막아 올라가 바라보지 못하게 하며, 백악산(白岳山인왕산(仁王山사직산(社稷山)에 올라가 바라보는 사람은 성 밑에 사는 사람을 시켜 금지하게 하라.”하였다.1111일 전교하기를, “백악산(白岳山인왕산(仁王山사직산(社稷山)에 올라가 바라보는 사람을, 산 밑에 사는 사람을 시켜 금하더라도,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금하기 어려우니, 혹 담을 쌓아서 막고 혹 가시 울타리를 두르며, 또 도적의 방비와 화재 예방을 위해 순청(巡廳)의 순라군(巡邏軍)이 밤에 거처한 경수소(警守所)를 설치하여 밤낮으로 검찰하라.”하였다.1112일 전교하기를, “대궐 안을 내려다보는 곳인 성균관 북쪽 산에서 타락산(駝駱山)에 이르기까지 올라가 바라보는 사람을 역시 산 밑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금하게 하라. 홍한충(洪漢忠) 37인의 집 뒷산에서 대궐 안이 바라다보이니, 담을 쌓아 막아서 올라가 바라보지 못하게 하라.”하였다. 1504716일 여러 재상(宰相)에게 전교하기를, “내가 이제 담을 쌓는 한계를 살피건대, 충훈부(忠勳府) 뒤로부터 탁경지(卓敬志)의 집으로 또 이세좌(李世佐)의 집 위로 또 오천정(烏川正)의 집 동산으로 또 상림원(尙林苑)으로 또 경복궁(景福宮)의 성 모퉁이로 또 내불당(內佛堂청안군(淸安君)의 집 등으로 해서 남산(南山) 기슭까지, 다시 옮겨서 타락산(駝駱山)까지는 그 산등성이에서 인가를 모두 헐고, 화약고(火藥庫소격서(昭格署)는 유사(有司)를 시켜 곧 헐어서 창의문(昌義門) 밖으로 옮기고 그 건너편 산 밖을 한계로 삼아야 하겠으니, 명일 우승지(右承旨) 이상 한성부·병조·공조가 함께 가서 살펴서 정하라. 철거한 뒤에 내가 다시 보리라.”하였다.

 

 

 

    15051118일 전교하기를, “궁궐은 깊숙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근래에 비록 여러 번 통행금지 표지인 금표(禁標)를 세웠지만 범하는 자가 끊기지 않으니 이 것은 인가가 궁성에 너무 접근해 있는 까닭이다. 동서의 성 터를 마땅히 물려야 할 것이니, 동으로는 후원을 환하게 바라볼 수 없는 곳까지 한계하고, 타락산(駝駱山) 고지에도 아울러 담을 쌓아 사람들로 하여금 올라가서 바라 볼 수 없게 할 것이며, 서쪽으로는 관상감(觀象監) 고개로부터 예빈시(禮賓寺) 모퉁이에 이르기까지와 경복궁 성의 서남 모퉁이부터 똑바로 서편으로 나가되 줄을 띠어 한계하여 한계 안에 있는 인가는 기한을 정하여 철거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 담 쌓았던 터는 각자가 평평하게 골라놓게 하라. 나간 후에 그 한계를 따라 성을 쌓되 전부터 있던 성을 파괴할 필요가 없이 안팎으로 성이 있는 것도 또한 가하다. 또 성을 쌓을 때에 석면(石面)이 울툭불툭 하면 사람이 더위잡고 올라올 수 있으니 매우 불가하다. 그러니 대석(臺石)을 넓게 하고, 쌓아 올리는 석면(石面)도 또한 마땅히 평직(平直)으로 올려야 한다. 또 태묘의 3면에 있는 인가도 또한 마땅히 철거해야 하니, 동으로는 연지(蓮池)의 예전 큰 길까지, 서로는 창덕궁 동행랑(東行廊)까지, 남으로는 큰길까지 한계를 지어 철거하고 담을 쌓아라.”하였다.15041213일 전교하기를, “도성 안 동서 통제구역을 설정하고 그 경계에 세운 통행금지 표지인 금표(禁標)에는 담을 쌓지 말고 성을 쌓되, 그 높이와 넓이를 경복궁 성과 한결같이 하고, 또 경복궁 서쪽 가시 울타리는 궁성 서쪽 모퉁이로부터 바로 인왕산까지 걸쳐 물려서 치고, 또 성 밖의 동서 금표는 일찍이 목책(木柵)을 치도록 명하였으나, 지금 담을 쌓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1616324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따라 땅의 길흉을 판별하는 풍수가(風水家)인 성지(性智)와 술사인 시문룡(施文龍) 등에게 인왕산 아래에다 새 궁궐의 터를 잡게 하였다. 16261217일 인왕산(仁王山) 곡성(曲城) 밖에서 호랑이가 나무꾼을 잡아먹고 이어 15대 국왕 광종(묘호 추상)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廢黜)시킨 서궁(西宮:인경궁이 훼철된 후 피우처로 창건한 경희궁이 서궐이 되었다) 인경궁(仁慶宮) 후원으로 넘어 들어왔는데 원유사 제조(苑囿司 提調)와 도감대장(都監大將총융대장(摠戎大將)이 두 영()의 군병을 거느리고 뒤쫓아 잡았다.16901215일 숙종이 승지(承旨중신(重臣)을 풍운뇌우(風雲雷雨산천(山川우사(雩祀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覔山백악산(白岳山한강(漢江) 등에 나누어 보내어 나라에서 음력 11·12월에 눈이 내리기를 기원한 기설제(祈雪祭)를 지내게 하였다.188312일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에서 삼청동(三淸洞) 병기(兵器)기치(旗幟) 그 밖의 군수품을 만드는 군기창(軍器廠) 북창(北倉) 근처에 호랑이에게 당하는 화()인 호환(虎患)이 있다고 하여 총포(銃砲)를 이용하여 야생 짐승을 잡는 포수(砲手)를 보내 잡아오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오후 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인 유시(酉時) 경에 인왕산(仁王山) 밑에서 작은 표범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삼가 이 것을 받들어 올리는 봉진(奉進)합니다. 범을 잡은 장수와 병졸인 장졸(將卒)들에게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에서 전례를 꼼꼼하게 따져서 검토하는 상고(詳考)하여 시상(施賞)하고 이어 사냥을 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에게 아뢰었다.

 

 

 

 

 네이버 블로그 < 역사박물관, 조선왕실, 대한제국 황실, 고궁박물관 > 김민수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