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900년 역사 - 문헌학 고증 중심 / 윤복현 님의 글 중에서

2014. 1. 21. 03:32우리 역사 바로알기

 

 

 

 

 

      

[사료]문헌학이 고증하는 900년 고구려 [2]

민족영웅 코리아대칸 (younbok****)

주소복사 조회 553 08.09.09 00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던
고리(코리)국에서 출발하는 

천자국 고구려 900년의 역사
 
[한단고기]44대 단군 ‘구물’ 기원전 425년.
-삼한(진.번.마한)의 국호를 ‘대부여’로 개정
-도읍을 아사달에서 장당경으로 천도.


북부여를 개국한 해모수는 고리국 왕실의 후손이며,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부여를 졸본부여로 변경한 고두막한이 바로 단군조선47대 고열가의 후손으로서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동명성왕!
 
기존 국사교과서에는 B.C.37년으로 추정…
  그러나 한무제(漢武帝. B.C.140∼135년)가 朝鮮을 滅할 때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두었다고…



1.건국

  ★ 고구려(高句麗), 즉 구려(句驪)의 건국 시기는 B.C.232년, 망한 것은 A.D.668년이다. 그러므로 900년간 고구려는 지속되었다.
  고구려(高句麗)를 말한다면 구려(句麗), 또는 고려(高麗), 또는 고리(高酈)라고도 한다.

  ★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다른 사서(史書)들은 고구려 건국을 B.C.37년으로 보고 있으나, 漢나라 무제(武帝. B.C.140∼135년)가 朝鮮을 滅할 때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두었다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高句驪縣은 漢나라 武帝 때 있었으므로 그보다 1백 년 훨씬 이전에 이미 句麗國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三國史記 高句麗篇 28대 보장왕(寶藏王28대. A.D.634∼668년) 27년을 보자.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高句麗自秦漢之後』

  고구려는 한나라와 같은 뿌리이며, 9백년간 존속했으며, 진한(秦漢)의 뒤를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존 국사교과서에서 건국연대를 BC.37년으로 잡는다면, 고구려의 존속기간은 725년에 불과하다.

  ★ 고구려는 본시 부여국(扶餘國)에서 발생한 것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ㆍ삼국유사(三國遺事)ㆍ후한서 동이전(後漢書東夷傳)ㆍ삼국지(三國志)ㆍ진서(晉書)ㆍ송서(宋書)ㆍ남제서(南齊書)ㆍ양서(梁書)ㆍ위서(魏書)ㆍ주서(周書)ㆍ수서(隋書)ㆍ남사(南史)ㆍ구당서(舊唐書)ㆍ당서(唐書)ㆍ북사(北史)ㆍ통전(通典)ㆍ통지(通志)ㆍ태평어람(太平御覽)ㆍ책부원구(冊府元龜)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부여국의 뿌리는 고리국(櫜離國)이다. 본래 고구려는 고리국(櫜離國)의 뿌리에서 유래되었었다.


그러기에 고구려는 고리국(櫜離國)에서 고리국(槀離國)으로, 또는 구려(句驪)에서 고리(高酈)로 이어져 내려왔다.
  고리국(櫜離國)과 부여국이 있던 곳에서 고구려가 발생했다.




  ★ 양서(梁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高句麗者, 其先出自東明, 東明本北夷櫜離王之子, 離王出行, 其侍兒於後任娠, 離王還欲殺之, 侍兒曰, 前見天上有氣, 如大雞子, 來降我, 因以有娠, 王囚之, 後遂生男, 王置之豕牢, 豕以口氣噓之, 不死, 王以爲神, 乃聽收養, 長而善射, 王忌其猛, 後欲殺之, 東明乃奔走, 南至淹滯水, 以弓擊水, 魚鼈皆浮爲橋, 東明乘之得渡, 至扶餘而王焉, 其後支別爲句驪種也, 其國漢之玄菟郡也』

  고구려의 선조는 東明으로부터 나왔다. 동명은 본래 북이(北夷) 고리국(櫜離國)의 왕자이다.
  고리국왕이 출타한 후 그 시녀가 후에 임신을 하였다. 고리왕이 돌아와 죽이려고 했다.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天上의 기운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큰 계란같은 것이 내게 내려왔다. 그로인해 임신을 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고리왕은 듣지 않고 가두어 버렸다.
  그 후 아들을 낳았다. 왕은 그 아들을 돼지우리에 두게 했으나 돼지는 입으로 기(氣)를 불기만하고 죽이지 아니했다. 고리왕은 이상히 여겨 神이 위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 그 얘기를 듣고는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점점 성장하면서 명사수가 되었다.
  왕은 그 용맹스러움을 꺼려 다시 죽이려 했다.
  東明은 달아나 남쪽인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렀다. 군사들이 뒤쫓아와 활을 쏘았으나 물에 떨어졌다. 물고기와 자라 등 모두 떠올라 다리를 놓았으므로 東明은 그 등에 올라타고는 무사히 강을 건넜다.
  그리고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그 후 가지로 떨어져나가 구려(句驪)가 되었다. 그 나라는 한(漢)나라 때의 현도군(玄菟郡)이다.

 ◇ 고리국(櫜離國)은 지금의 북경(北京) 남쪽인 고안현(固安縣)이며, 고리국에서 갈라져나온 부여국은 고안현 서남(西南)에 있는 신성(神城)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부여국은 고리국 서쪽인 지금의 여현(蠡縣) 지방에 있었다(梁書 高句麗編 참고).

  본래 고리국(槀離國)에서 갈라져 나온 부여국은 나라가 커짐에 따라 동부여(東扶餘)와 남부여(南扶餘), 그리고 북부여(北扶餘) 등으로 갈라지게 된다.





  ★ 그러므로 高句麗의 建國은 고리국에서 생겼다는 說, 扶餘 解夫婁王의 庶子로 생겼다는 說, 또한 扶餘의 별종(別種)는 몇 가지의 建國說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高句麗는 三韓의 君長으로부터 高氏로 이어져 왔으며 高氏의 먼 祖上은 堯, 舜임을 通典에는 紀錄하고 있다.
  여하간 高句麗의 建國은 三韓의 뿌리인 韓에서 고리국(藁離國)으로부터 扶餘, 句驪로 基源되었음을 正史에서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고리국(櫜離國. B.C.260∼230년)에서 파생된 구려(句驪)는 獨立하여 나라를 세우고 大陸 여러 곳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後漢書 句驪편을 보면 句驪는 一名 맥이(貊耳)라 했으며 河伯의 後裔로서 강물을 위주로 살았다고 했다. 그로 인해 소수맥(小水貊)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했다. 句驪人들은 활을 가지고 다니기를 좋아했으므로 맥궁(貊弓)이라고도 했다고 적고 있다.

 

2.시조

 

고구려의 운조(雲祖)는,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

  ★ 高句麗가 高氏의 姓을 使用하게 된 것은 高陽氏로부터라는 說이 있고 또한 高辛氏라는 說이 있다.

  ◇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19代 廣開土王 17年 3月의 記錄에는 고구려가 고양씨(高陽氏)로부터 내려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十七年 春三月, 遣使北燕, 且敍宗族, 北燕王雲遣侍御史李拔之, 雲祖父高和句麗之屬, 自云高陽氏之苗裔』

  17년 봄 3월에 북연(北燕)에 使臣을 파견하여 종족의 예를 베풀었다. 북연의 왕 雲도 시어사 이발을 보내어 답례했다.
  운의 조부 고화(高和)는 고구려에 속한다고 여겨, 스스로 말하기를 고양씨(高陽氏)의 후예라고 했다.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B.C.2554년)씨는 황제(黃帝)의 손자이다.

 ◇ 한편 三國史記 百濟本紀 義慈王편에는 고신씨(高辛氏)로 기록하고 있다.

    『高句麗亦以高辛氏後姓高氏』
  고구려는 고신씨의 후예이므로, 성(姓)이 고씨(高氏)이다.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B.C.2476년)는 黃帝의 증손자이다.
  어찌 되었던 高句麗의 운조(雲祖)가 高陽氏이거나 高辛氏이거나, 고구려의 혈통은 黃帝의 後孫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 黃帝는 25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그중 14명만 姓을 하사받았는데 史書에 記錄되어 있는 이름은 6명이다.
  黃帝의 아들 창의(昌意)는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를 낳았다. 고로 黃帝의 孫子인 高陽氏로부터 句驪 또는 高句麗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黃帝의 아들 현효(玄囂)는 교극(蟜極)을 낳았는데, 교극의 아들이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이다. 이는 山海經과 史記 五帝本紀에 記錄하고 있다.
  高氏의 뿌리가 이어져내려 온 것은 문헌상으로 보면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B.C.2482년)이다. 제곡고신씨는 황제(黃帝.B.C.2679년)의 증손자이며, 요왕검(堯王儉.B.C.2357년)의 아버지이다.

  堯王儉의 뒤를 이은 사람은 순(舜.B.C.2284년)임금이며, 다음은 夏, 殷, 周로부터 三韓으로 이어져 고리국(櫜離國), 句驪, 扶餘를 거쳐 후에 高句麗로 내려옴을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후한서(後漢書)ㆍ양서(梁書)에는 주몽이 고리국(櫜離國)의 왕자로 태어났다고 하고, 위서(魏書)ㆍ수서(隋書)ㆍ주서(周書)에는 부여에서 주몽(朱蒙)이 나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성은 고(高)씨요, 휘(諱)는 주몽(朱蒙), 혹은 추모(鄒牟), 혹은 상해(象解. 衆牟)라고도 한다.
   朱蒙은 22세 때 비류수(沸流水) 위쪽에 터전을 잡고 고구려(高句麗)라고 한 후 18년 뒤 40세에 승하(昇遐)했는데 龍山에 장사지낸 후 東明聖王이라 했다고 三國史記에는 적고 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高句麗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여왕이었던 해부루(解夫婁)는 늙어 자식이 없어 山川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다가 말이 연못가의 큰 돌이 있는 곳에서 눈물을 흘리자, 왕이 괴이하게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들추어보자 금색의 개구리 형상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했다.


  부여왕 해부루는 본시 북부여 사람이나, 피난하여 동부여로 왔다고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기록하고 있다.
   해부루(解夫婁) 왕이 죽은 후 금와(金蛙)가 왕위에 올랐다.
  어느날 금와는 태백산(太白山) 남쪽인 발수(渤水)로 나갔다가 하백녀(河伯女) 유화(柳花)가 동생과 함께 놀러나온 것을 보고, 금와는 자칭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하고, 하백녀 유화를 유인하여 압록변(鴨淥邊)에 있는 자기 방에 가두었다.


  ★ 여기서 발수(渤水)인 압록수(鴨淥水)가 있는 곳은 태백산(太白山) 남쪽이라 했는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통해 어느 지점인지 고증해 보기로 한다.
  발수(渤水)가 있는 곳은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 서쪽 태행산(太行山:본시 太白山) 동남쪽에 있는 지금의 하간현(河間縣)이다.
  이곳은 황하(黃河)의 샛강으로서, 황하의 흙탕물과는 달리 푸른물이 흐른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 압록수(鴨淥水)라 했다. 


  금와(金蛙)는 7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주몽(朱蒙)에 비해 기능(技能)이 미치지 못했다.
  금와의 장자(長子)였던 대소(帶素)는 왕에게 주몽을 죽일 것을 건의했으나, 왕이 듣지 않자 장군들과 주몽을 죽일 것을 모의했다.
  주몽의 어머니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주몽에게 도망을 가게 했다.
  이때 주몽은 오이(烏伊)ㆍ마리(摩離)ㆍ협보(陜父) 등 세 친구와 함께 엄호수(淹淲水)인 압록수(鴨淥水) 동북에 이르렀다고 되어있다.
  엄호수(淹淲水)는 일명 개사수(蓋斯水)라고 했다.

  여러 정사(正史)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구려는 처음 고리국(槀離國)에서 갈라져 나온 부여국(扶餘國)이 자리한 곳으로, 지금의 북경 南西쪽에 있는 신성(新城)에 있었다.
  고리국(槀離國)은 北京의 남쪽인 고안현(固安縣)이며, 고안현의 서남쪽에 신성(新城)이 있다.
  즉 신성에 있던 부여국에서 금와왕의 장남인 대소의 음모에 의해 주몽이 남쪽으로 세 친구와 함께 도망간 곳은 엄호수(淹淲水)이다.

  ※ 위서(魏書)와 북사(北史)에는, 주몽이 다다른 곳이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 했다. 주서(周書)에는 흘두골성(紇斗骨城)이라고 적고 있다.

  ※ 통전(通典)에서는,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이른 흘승골성(紇升骨城)에서 자리하고 살았을 때 나라의 국호를 구려(句驪)라 했다.
  주몽이 달아나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에서 살았다고 되어있다.
  흘승골성은 통전(通典)에서 보는바와 같이 漢나라 때 현도군이라 했다. 현도군은 한무제(漢武帝. B.C.140∼135년)시 조선 땅이었던 서경(西京) 즉 서안(西安)이었다.
  그 후 漢나라 소제(昭帝. B.C.80∼86년) 때 산서성(山西省) 진번군(眞番郡)이었던 지금의 태원(太原)을 현도군이라 했다.

  그러나 漢나라를 멸망시킨 왕망(王莽)이, 나라이름을 신(新)이라 하고,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의 고성(故城)을 현도(玄都)라 했다.

 

3.도읍지

 

당서(唐書)에 의하면, 평양성(平壤城)은 장안성(長安城)
          …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

  ★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동옥저국(東沃沮國)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옥저는 고구려가 있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개마대산에 있는 개마현(蓋馬縣)의 이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하며, 그 산이 있는 곳은 지금의 평양성(平壤城) 서쪽이다.
  즉 평양성은 왕험성(王險城:王儉城)이라고 되어있다.

  ★ 왕검성(王儉城)은 왕험성(王險城)이며, 일명 험독성(險瀆城)이라고 사기(史記)에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왕검성인 평양성은 고구려의 건국 당시에는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 평양성의 서쪽에 개마대산이 있었고, 고구려가 있던 평양성 서쪽에는 옥저국이 있었음을 후한서(後漢書)에는 기록되어 있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398쪽에 보면, 동옥저국(東沃沮國)은 고구려의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었다고 했다.
  본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구려는 지금의 서경(西京)인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었음을 고증하고 있다.

  ★ 고구려의 도읍지(都邑地)에 대하여, 후한서(後漢書)에는 개마현(蓋馬縣)이라 했다. 개마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하며,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平壤城) 서쪽이라 했다.
  즉 평양(平壤)은 왕험성(王險城) 또는 왕검성(王儉城)이라 했다.
  
 ★ 구당서(舊唐書) 고구려(高句麗) 편에는 다음과 같다.
  고구려국의 도읍지는 평양성(平壤城)이며, 평양성은 漢나라 때의 낙랑군(樂浪郡)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 漢樂浪郡也』
 
  ★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1168쪽에는, 한(漢)나라 무제(武帝. B.C.140∼135년), 즉 조선왕이었던 우거(右渠)가 두었던 조선의 땅으로서 서경(西京)이라고 했다.

  ★ 통전(通典)에서는, 고구려는 본래 조선의 땅이며, 한나라 무제(武帝)가 두었던 낙랑군에 속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삼한(三韓)의 군주로 이어져 온 것은 고구려이며, 중국대륙이 고토(故土)이며, 먼 조상은 요순(堯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三國史記 高句麗篇을 보면, 10대 산상왕(山上王. A.D.55년)) 13년 10월에 환도(丸都)에 도읍지를 옮겼다.
  여기서 환도성(丸都城)은 고구려의 옛 도읍지였다고 했다. 환도성은 환도산(丸都山) 아래로 비류수(沸流水)가 흐르는 동쪽이라 했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51쪽을 보자.

  『丸都, 高句麗故鄕.「通典」城在丸都山下沸流水之東.「唐書地理志」自鴨綠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泝流, 東北三十里至泊汋口, 得渤海之境, 又泝流五百里至丸都城, 故高麗王都, 按城在今遼寧輯安縣, 有魏母丘儉破高句麗勒功碑』

  丸都는 高句麗의 옛 都邑地이다. 通典에 의하면 城이 있는 곳은 丸都山 아래 비류수(沸流水)가 東으로 흐른다. 唐書地理志에 따르면 압록강(鴨綠江) 입구로부터 뱃길로 1백여 리이다. 작은 배로 거슬러 올라 흘러가야 한다. 東北으로 30里에 이르면 박작구(泊汋口)에 이른다. 그리하여 渤海의 경계에 닿게 된다.
  또한 물길로 거슬러 가면 5百里에 丸都城에 이른다. 이곳이 옛 高句麗王의 都邑地이다.
  안황보밀(按皇甫謐)에 의하면 城이 있는 곳은 지금의 遼寧에 있는 집안현(輯安縣)이라 했다. 魏나라 모구검(母丘儉)이 공격해 왔을 때 고구려(高句麗)를 격파한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本文에서 보면 丸都城은 丸都山 아래 비류수(沸流水)가 東으로 흐르는 곳이라고 했으므로 비류수를 地名辭典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519쪽을 보면 沸流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奉天에 있는 동가강(佟家江)이라 했으며, 通典에는 환도성이 있는 丸都山 아래 沸流水가 동으로 흐른다고 했다. 中國地圖를 보면 奉天에는 강이 東으로 흐를 곳이 없고 모두 南으로 흐르고 있다. 

  ◇ 비류수(沸流水)는 지금의 河南省 동쪽으로 흐르는 黃河의 支流로 高麗末까지 압록강(鴨綠江)이라 했으므로 渤海의 경계에서 거슬러 흐르는 곳에 丸都城이 있고 丸都山 아래 沸流水는 발해만으로 흘러 東으로 가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沸流水가 동으로 흐른다는 말이 맞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은 1931년에 저술된 책이기 때문에 먼 훗날 高句麗가 망한 뒤 奉天쪽으로 丸都城이나 丸都山이라는 地名을 옮긴 것을 記錄한데 불과하다고 보아야한다. 왜냐하면 강물이 흐르는 것은 추호의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丸都城이 河南省 開封縣 부근에 있었다면 高句麗末 羅唐 연합군에 의해 밀린 곳으로 보아야한다.

  ★ 11대 동천왕(東川王) 21년 2월에는 평양성을 새로 쌓았다. 평양성은 본래 요왕검(堯王儉)인 요(堯)임금이 있던 곳으로, 도읍을 왕검성(王儉城)으로, 백성과 사당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13년 7월에는 평양성에서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겼는데, 성이 있던 곳은 지금의 서경(西京) 즉 서안(西安) 동쪽인 목멱산(木覓山)이라 했다.
  그 후 20대 장수왕(長壽王) 15년에는 다시 평양성으로 옮겨왔다고 했다.
  24대 양원왕(陽原王) 8년에는 장안성(長安城)을 쌓았으며
    『八年築長安城』
  25대 平原王 28년에는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겼다.
    『移都長安城』

  ★ 그 후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은 동쪽인 낙양(洛陽)으로 밀려났고, 다시 북경(北京) 아래에 있는 서수현(徐水縣)으로 평양성을 옮겼으나, 다시 밀려 산서성(山西省) 북쪽 대동부(大同府)로 옮겼다가, 다시 밀려 지금의 심양(瀋陽) 옛 봉천(奉天)으로 평양성을 옮겼으나 A.D.668년 고구려는 끝내 망하고 말았다.

 

4.고구려 광역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 의하면,
  살수(薩水)의 이북에는 고구려, 살수(薩水) 이남으로는 후한(後漢)이…

 ★ 대무신왕(大武神王) 27年 9월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樂浪)를 쳐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大武神王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伐樂浪 取具地爲郡縣 薩水以南屬漢…』


  ★ 6대 대조대왕(大祖大王) 때의 기록을 보자.

  『四年,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4년 7월에 동옥저를 쳐서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나라의 경계가 동쪽으로는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


  ★ 동천왕(東川王) 때의 기록.

  『二十年 秋九月…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 不能陳 遂自樂浪而退…』

   (이때) 왕이 군사를 三道로 나누어 급히 치니 위나라 군사(魏軍)이 요란하여 진을 이루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 방면을 거쳐 퇴거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살수(薩水)의 이북에는 고구려, 살수(薩水) 이남으로는 후한(後漢)이 위치해 있다. 그리고 위(魏)나라 역시 살수(薩水) 이남의 땅에 자리잡고 있다.


  ★  산해경(山海經) 18권 海內經의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朝鮮今樂浪郡也 天毒卽天竺國…』

  산해경에 있어 해내경(海內經)이란 대륙의 중앙을 뜻한다. 사해(四海)를 통치하다의 어원이기도 하다.
  중원 중심의 동해에서 북해의 끝머리에 나라가 있었으니 조선 천독이다.

  ◇ 곽박(郭璞)의 주(註)에 의하면 조선은 낙랑군에 있고, 천축은 천축국이다.

  ◇ 朝鮮人들이 너무도 영리하고 용맹스럽고 지혜가 있어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별명처럼 불려진 것이 신독(身毒) 또는 천독(天毒)이다. 그리고 후일 천축(天竺)으로 불리어 中天竺ㆍ北天竺ㆍ西天竺ㆍ南天竺ㆍ東天竺으로 불리게 되었다.

  ★ 낙랑 땅에는 살수(薩水)가 흐르고.
  후한(後漢)과 고구려, 후일의 위(魏)와 고구려의 접경 지역이었던 薩水.
  천축으로 불리던 조선이 자리했던 방대한 지역의 낙랑 땅.
  그곳에 고구려가 있었다.


  ★ 위서(魏書)에 기록된 고구려의 강역을 보자.



『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敖至其所居平壤城. 訪其方事云. 遼東南一千里. 東至柵城. 南至小海. 北至舊扶餘. 民戶參倍於前魏時. 其地東西二千里. 南北一千里. 民皆土著. 隨山谷而居. 衣布帛及皮. 土田薄塉. 蠶農不足以自供. 故其人節飮食. 其俗婬好歌舞. 夜則男女羣聚而戱. 無貴賤之節, 然潔淨自喜, 其王好治宮室, 其官名有謁奢. 太奢. 大兄. 小兄之號』

  …요동(遼東)의 남쪽으로 1천리이다. 동쪽으로는 책성(柵城)이 있고, 남으로는 소해(小海)에 이른다. 북으로는 옛 부여에 이른다…그 땅은 동서 2천리요 남북 1천리이다.
  고대에는 5.6㎞가 10리였다. 수서(隋書) 역시 같은 기록을 하고 있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 771쪽에는 고구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高句驪國 其先出自扶餘. 漢時避難居於卒本水. 因稱卒本扶餘. 地爲漢之玄菟郡. 屬有三縣. 高句驪其一也. 因以爲國號. 其彊域西距遼東千里. 南與朝鮮. 濊貊. 東與沃沮. 北與扶餘接. 今奉天通化縣以北迄於吉林伊通一帶皆是. 其後至隋而大. 北越夫餘至於靺鞨. 卽今郭爾羅斯界. 唐總章元年. 爲李勣等所滅. 一作高句驪. 又稱句麗. 高麗. 又作高酈』

  고구려국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 한나라 때 피난하여 졸본수(卒本水)에 살았다. 그로인해 졸본부여라고 했다.
  그 땅은 한(漢)나라가 있던 현도군(玄菟郡)이며, 속해 있던 세 곳의 현(縣) 중 한 곳이 고구려(高句驪)였다. 그런 까닭에 나라이름을 고구려라고 했다.
  고구려 건국 초의 현도군은 지금의 산서성 태원(太原)을 말한다.
이곳 태원은 북경(北京)의 서남 쪽이며, 서울에서 부산의 거리 정도이다.
  그러나 그후 현도군은 섬서성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으로 옮기게 되었다.

  고구려의 강역은 서역(西域)에서 요동(遼東) 1천 리까지였다. 고구려가 현도군(玄菟郡:산서성 太原)에 건국할 당시, 남쪽으로는 조선(朝鮮)과 예맥(濊貊)이 있었다. 동쪽으로는 옥저(沃沮)이며, 북으로는 부여(扶餘)가 인접해 있었다.  지금의 봉천(奉天)이었던 심양(瀋陽)과 길림성 통화현(通化縣)의 북쪽 일대 모두가 고구려의 강역이었다.  그 후 수(隋)나라 때에는, 북으로는 부여를 지나 말갈까지 광대해졌다. 즉 지금의 곽이라사(郭爾羅斯) 경계까지였다.  여기서 곽이라사 경계라면, 지금의 내몽고 철리목맹(哲里木盟)의 사부(四部)의 하나다. 이곳은 길림성 서북 지방을 말한다.
 
 ★ 자치통감(資治通鑑) 196권 당태종(唐太宗) 정관(貞觀) 15년의 기록에는, 고구려가 있던 곳은 본래 사군(四郡)의 땅이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사군(四郡)이란 낙랑(樂浪)ㆍ현도(玄菟)ㆍ임둔(臨屯)ㆍ진번(眞番)을 말한다. 이곳은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 이상과 같은 기록을 고증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자치통감(資治通鑑) 200권 당기(唐紀) 17 高宗 이치(李治. A.D.628∼683년) 용삭(龍朔. A.D.661∼663년) 2년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高麗百濟河北之民』
  즉 고구려 백제는 지금의 북경 지방인 하북성(河北省)의 백성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고구려 26대 영양왕(嬰陽王 AD.563년) 18년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高句麗本箕子所封之址』
  고구려는 본시 기자가 봉(封)해진 땅이다.
  그렇다면 기자는 어디에 있었는가. 다름 아닌 산서성(山西省), 섬서성(陝西省) 일대이다.

  다음 문장을 계속 살펴보기로 한다.
  『漢晋皆爲郡縣, 今乃不臣, 別爲異域, 先帝欲征之久矣』
  한나라, 진나라가 모두 군과 현을 두었다. 그러나 지금 신하들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고로 그곳은 별천지인 다른 곳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선대의 왕들이 그곳을 정벌하기 위해 얼마나 오래도록 욕심을 갖고 있었던가, 라고 기록하고 있다.

 

5.고구려 왕들의 연대표

 

高 句 麗 年 代 表(一名 駒驪)

高璉(一名 朱蒙), 낙랑군정동대장군(樂浪郡征東大將軍)
(宋書卷九十七 列傳 第五十七 2392쪽 본문참고)
※ 高句麗建國. B.C.232년, 亡 A.D.668년. 900년간







고구려 건국사(한단고기 중심)




44대 단군 ‘구물’
기원전 425년.
-삼한(진,번,막-마)의 국호를 ‘대부여’로 개정
-도읍을 아사달에서 장당경으로 천도.

대부여 47대 마지막 단군 ‘고열가’
기원전 239년.
-해모수. 종실의 인물로 고리국의 제후, 웅심산에서 거병하여 아사달에 도읍하고 ‘북부여’ 건국 1대 단군이 됨.
(국호를 ‘북부여’라 함은 ‘대부여’의 북쪽에 위치했기 때문)
-고열가. 스스로 제위를 내놓음, 이후 5가에 의해 6년간 공화정치가 행해짐, 이후 북부여에 병합 됨.

북부여 2대 단군 ‘모수리’
기원전 195년.
-위만. 한나라를 배신하고 번조선(번한, 대부여의 제후국)에 망명, 이후 무리를 이끌고 번조선을 강탈, 번조선이 위만에게 넘어가자 5가는 상장군 ‘탁’을 추대하여 월지로 이동 ‘중마한’을 건국(후삼한-중마한, 진한, 변한).

북부여 4대 단군 ‘고우루’
기원전 120년.
-우거(번조선-위만의 손자)를 공격했으나 실패함.
-고진, 해모수의 차남, 고구려현에 후로 봉해짐.
-한무제(유철). 우거를 멸하고 쳐들어오자 고두막한(고구려후-동명왕)이 거병하여 한나라를 막아냄, 고두막한은 고우루에게 물러날것을 요구함.
-고우루의 붕어후 동생 해부루는 도읍을 가섭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여 제후국이 됨, 이후 2대 ‘금와’와 3대 ‘대소’에 이르러 고구려에 병합.

북부여 5대 단군 ‘고두막한’
기원전 79년.
-고모수. (옥저후-고진의 손자), 서압록에서 만난 하백의 딸 ‘유화’와의 사이에 ‘주몽’을 낳음.
-유화. 고모수 사망후에 동부여로 들어가나 고주몽은 모함으로 북부여로 쫓겨옴.
-고주몽. 북부여 6대 단군 고무서의 사위가 되어 대통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건국, 연호를 “옛 땅을 회복한다”는 뜻의 ‘다물’이라 함, 이때는 이미 부인 예씨가 있었으며 소서노는 후에 3번째 부인이 되었음.

고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할 때 물길에 막히자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어찌하면 좋은가!” 해서 물위로 떠오른 자라의 등을 밟고 건넜다는 설화가 있는데, 여기서 천제는 단제. 즉, 단군을 의미함으로 북부여의 1대 단군 해모수의 아들이라 하게 되었음. 

 
그리고, 동부여의 왕자 대소의 추격을 피하여 엄리대수를 건너는 설화는 북부여 5대 단군 고두막한의 설화와 동일하여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고리국 출신 해모수의 손자인 추모가 단군조선47대 단군 고열가 후손 고두막한의 계승자임을 강조하고 있음. 그리고, 추모는 자기 선조의 뿌리인 고리국을 복원시키는 차원에서 국호를 고구리국로 변경함. 그리고 유리명왕의 6남인 재사의 아들인 6대 태조왕때는 본래 성씨가 해씨임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마지막 보장왕때까지 왕들의 성을 고씨로 정하여 단군조선(마지막47대 고열가=>북부여 5대 고두막한)의 국통을 계승한 국가였음을 천명함

 

 

 

              미디어다음 아고라 <민족영웅 코리아대칸> 윤복현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