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22. 13:58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한성(漢城) 목멱산(木覓山) 봉수대(烽燧臺)
한성(漢城) 목멱산(木覓山) 봉수대(烽燧臺)는 경봉수(京烽燧)라고 하며 조선시대 전국의 봉수(烽燧)를 매일 받아 병조(兵曹)에 보고하는 중앙 봉수소였다. 조선 세종 대에 봉수제는 크게 정비되고 발전된 체제를 갖추었으며 조선의 봉수(烽燧)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인 목멱산(남산)의 경봉수(京烽燧), 해륙변경(海陸邊境)의 1선에 위치하여 연대라고 호칭된 연변봉수(沿邊烽燧),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로 구분되며, 기간 선로상의 직선봉수(直線烽燧)와 그 보조선상의 간선봉수(間線烽燧)으로 구분한다. 봉수(烽燧)는 중앙의 경우는 병조(兵曹)의 무비사(武備司)가, 지방의 경우는 관찰사(觀察使), 수령(守令)과 병사(兵使),수사(水使),도절제사(都節制使),순찰사(巡察使) 등의 군사책임자가 그 임무를 맡았다. 봉수는 동서남북의 어느 변경에 위치한 봉수대(烽燧臺)에서 올린 봉화 (烽火)이든 12시간이면 한성에 도착하였지만 봉수군의 태만, 봉수대의 관리 소홀로 불거(不擧),불통되거나 전달 소요시간이 지연되는 경우도 많았다.
봉수대에서는 올리는 횃불의 수로 정세의 느리고 급함을 나타냈는데, 평상시에는 1거(炬), 적이 해상에 나타나거나 국경에 나타나면 2거(炬), 적이 해안에 가까이 오거나 적이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거(炬), 우리 병선(兵船)과 접전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4거(炬), 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에 침범한 적과 접전하면 5거(炬)를 올리도록 하였다.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안개․구름․비․바람 등으로 봉수에 의해 전달이 불가능할 때 봉수대는 포성(砲聲)과 각성(角聲)으로 수비군인에게 급보를 알리고,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서 알리기도 하였다. 한성 목멱산(木覓山)의 경봉수(京烽燧)에는 봉수군(烽燧軍)과 오장(伍長)을 오원(五員)이라 하여 배치하는 외에, 금군(禁軍) 중에서 고액 녹봉자(祿俸者)를 봉수군장에 임명, 번갈아 근무하면서 변방으로부터 올라온 정보를 병조(兵曹)에 보고하게 했다. 경봉수는 정원 20명에 5개소의 봉수마다 4명씩 상하 양번(上下 兩番)으로 나누었고, 봉수군은 출퇴번(出退番)의 편의를 위하여 반드시 주민을 중심으로 차출하였다.
한성(漢城) 목멱산(木覓山) 봉수대(烽燧臺)는 천도한 후부터 1895년까지 500여 년간 존속되었고 목멱산(木覓山)에 있는 5개의 봉수소(熢燧所)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병조에 종합 보고하였으며 병조(兵曹)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承政院)에 보고하여 임금에게 알리고, 변란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즉시 승정원에 보고하였다. 목멱산(木覓山) 봉수대(烽燧臺)는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1봉(熢)으로부터 5봉(熢)에 이르는 5개가 있었으며 1봉(熢)은 함경도ㆍ강원도ㆍ경기도를 거쳐오는 봉수, 2봉(熢)은 경상도ㆍ충청도ㆍ경기도를 거쳐오는 봉수, 3봉(熢)은 평안도ㆍ황해도ㆍ경기도의 내륙을 거쳐오는 봉수, 4봉(熢)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바닷길과 경기도의 육로를 통해오는 봉수, 5봉(熢)은 전라도의 해안과 충청도 내륙 경기도 해안을 거쳐오는 봉수(熢燧)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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