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개로왕

2014. 1. 25. 00:03우리 역사 바로알기

 

 

          백제 개로왕

 

 

      

三國史記  卷第二十五 百濟本紀 第三
개로왕(蓋鹵王)
    二十一年秋九月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되다  (475년 9월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호] 21년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 (巨璉)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한성(漢城)을 포위했다. [譯註 001]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하여 성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 [譯註 002]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 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백제에 가서 첩자 노릇을 할 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때 중 도림 (道琳) [譯註 003] 이 이에 응하여 말했다. "소승이 원래 도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마시고 일을 시켜 주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합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그를 보내 백제를 속이도록 하였다. 이에 도림 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체하고 백제로 왔다. 


    당시의 백제 왕 근개루 [譯註 004] 는 장기와 바둑 [譯註 005] 을 좋아하였다. 도림 이 대궐 문에 이르러 "제가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상당한 묘수의 경지를 알고 있으니, 왕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들여 대국을 하여 보니 과연 국수였다. 왕은 마침내 그를 상객으로 대우하고 매우 친하게 여겨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 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서 말했다. "저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 여기시지 않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나, 다만 한 가지 재주로 보답했을 뿐이고,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제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것이로다." 도림 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 언덕, 강, 바다이니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지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기세와 부유한 치적으로 남들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성곽은 수축되지 않았고 궁실은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 [註 001]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이는 대왕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왕이 말했다. "좋다! 내가 그리 하겠다." 이에 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註 002] , 그 안에는 궁실, 누각, 사대 [譯註 006] 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욱리하 (郁里河) [譯註 007] 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 [註 003] 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고, 사성(蛇城) 동쪽으로부터 숭산 (崇山) [註 004]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註 005]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하여져서 나라는 누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도림 이 도망해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장수왕 이 기뻐하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근개루 가 이 말을 듣고 아들 문주 에게 말했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譯註 008] 잇도록 하라." 문주 가 곧 목협만치 (木劦滿致) [註 006] 와 조미걸취 (祖彌桀取) 목협 [譯註 009] [譯註 010] , 조미 [註 007] 는 모두 복성 [譯註 011] 인데, 《수서(隋書)》에서는 목협을 두 개의 성 [譯註 012] 으로 보았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이때 고구려의 대로 (對盧) 제우 (齊于), 재증걸루 (再曾桀婁), 고이만년 (古尒萬年) [註 008] 재증, 고이 [註 009] [譯註 013] 는 모두 복성 [註 010] 이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 지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 [註 011] 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 [譯註 014]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걸루 와 만년 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註 012] 

 


    註 001 개로왕은 즉위한 후 20여 년이 지난 후에 노지(露地)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는 부왕의 뼈를 장사하였는데, 이는 비유왕  이 정변에 희생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삼국사기》백제본기에 개로왕 14년까지가 공백인 점도 그의 집권 과정에 정변이 일어난 사실을 반증한다. 백제는 개로왕 초기의 기록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은 왕위계승 문제로 지배세력 간의 내분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양기석, 1990, 앞의 글  , 119~123쪽).

 

    註 002 이 기사는 漢城도읍기의 都城이 土城이었음을 보여준다. 흙을 쪄서 성을 쌓은 예로서는 중국의 경우 《晉書》 권130 赫連勃勃傳에 “阿利性尤工巧 然殘忍刻暴 乃烝土築城 錐入一寸 卽殺作者 而幷築之”라 한 기사를 들 수 있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백제 토성으로서 대표적인 것이 몽촌토성과 풍납리토성이다. 이들 토성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흙을 쪄서 축조한 흔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신 이 토성의 축조는 판축의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風納洞土城에 대해서는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풍납리포함층조사보고》,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총간 제3책, 1967 참조. 夢村土城에 대해서는 몽촌토성발굴조사단, 《夢村土城發掘調査報告》, 1985와 서울대 박물관, 《夢村土城--동남지구 발굴조사보고--》, 1985 및 《夢村土城--서남지구 발굴조사보고--》, 1989 참조).

 

    註 003 한강 유역에서 확인된 백제 한성시대의 묘제는 크게 土壙墓系 묘제, 積石塚系 묘제, 複合墓制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積石塚은 石村洞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큰 돌로 壇을 쌓아 만들었다. 토광묘는 封土 가까이에 기와나 石片을 한 겹 덮은 것이 특색이다. 可樂洞 3호분은 土壙에 木棺을 넣고 棺 밖에 토기를 부장하였으며, 高句麗系 黑陶壺가 출토되었다. 複合墓制로는 葺石封土墳·圍石封土墳·土壙積石墓 등이 있다(임영진, 「백제한성시대고분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5 참조). 본 기사에 보이는 ‘큰 돌을 가져다가 만든 石槨무덤’을 積石塚으로 보아 석촌동 4호분이 이에 해당되지 않을까 추론하는 견해도 있다(김원룡, 《제3판 한국고고학개설》, 일지사, 1986, 179쪽).

 

    註 004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현재의 경기도 河南市 倉隅洞 동남방의 黔丹山에 비정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393쪽).

 

    註 005 개로왕 때에 축조한 제방은 동쪽 종점(崇山之北)에 해당하는 아차산 대안인 고덕동 일대에서 시작하여 삼성동토성에 이르렀으며, 단순한 제방이 아니라 풍납토성  등 중심 성곽의 외곽으로 확장된 시가지를 감싸면서 군사 방어적 기능까지 수행한 나성(羅城)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이도학, 《새로쓰는 백제사》, 푸른역사, 1997  , 1997, 159쪽 | 여호규, 2002, 앞의 글  , 10쪽).

 

    註 006 목현만치가 웅진 천도 후 왜국으로 건너가 소아씨(蘇我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본 견해가 있다( 이근우, 1994,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삼서에 관한 연구」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 85∼91쪽).

 

    註 007 백제의 複姓의 하나. 이 祖彌는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7년(513)조에 나오는 姐彌文貴 將軍의 ‘姐彌’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南齊書》 권58 열전 백제전에 보이는 姐瑾의 ‘姐’는 姐彌의 ‘彌’를 생략하여 單姓化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祖彌’·‘姐彌’를 ‘차미’로 읽고 이를 眞의 訓 ‘참’과 관련시켜 眞氏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今西龍, 《百濟史硏究》, 1934, 297∼298쪽) 받아들이기 어렵다.

 

    註 008 고이만년  과 재증걸루는 장수왕이 475년에 백제를 공격할 때 고구려군의 선봉에 서서 군사를 거느리고 온 인물이다. 이들은 전제왕권이 확립된 469년 이후 자신감의 발로에서 추진한 대토목 공사를 반대하는 등 개로왕  과 그를 지지하는 집단에 맞섰다가 정쟁에 패배하여 고구려로 망명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김수태, 1998, 「백제 개로왕대의 대고구려전」 , 《백제사상의 전쟁》, 충남대 백제연구소  , 149쪽).

 

    註 009 이병도는 북성은 한수 이북의 구위례성(舊慰禮城), 남성은 한성(하남위례성)으로 보았다(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 491쪽). 그리고 북한 학계도 고구려군이 먼저 북한성(오늘날의 서울)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남한성(경기도 광주지방)을 공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91, 《조선전사3-고구려사》  , 151쪽). 그러나 북성은 풍납토성  으로 남성은 몽촌토성  으로 보고 양자를 합하여 한성이라 보는 견해(김기섭, 1990, 앞의 글, 59쪽)가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광개토왕릉비  에는 396년 고구려군이 아리수 곧 한강을 도하하여 백제 도성을 공격한 사실이 기록되어 북성과 남성 모두 한강 남안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여호규, 2002, 앞의 글  , 5쪽).

 

    註 010 이 기사에 의할 때 당시 백제의 도성은 北城과 南城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의 王城에 대해서는 몽촌토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왕성이 몽촌토성일 경우 몽촌토성의 북쪽에 있는 風納洞토성이 북성에 비정될 수 있겠다. (몽촌토성에 대해서는 서울대학교 박물관, 《몽촌토성-동부지구발굴보고서》, 1987| 《몽촌토성-동남지구발굴보고서》, 1988| 《몽촌토성-서남지구발굴보고서》, 1989 참조. 한편 풍납동토성에 대해서는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풍납리포함층조사보고》,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총간 제3책, 1967 참조). 그런데 근래 풍납동토성 내부의 발굴결과 백제시대의 주거지 등이 출토되고 있어 향후 연구가 기대된다.

 

    註 011 여기서의 남성은 왕이 살고 있던 居城을 말한다. 北城이 풍납동토성이라고 하면 남성은 夢村토성에 비정할 수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0년조에는 “百濟記云 蓋鹵王乙卯年冬 狛大軍來攻大城 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尉禮”라 하여 大城·王城·慰禮가 보인다. 여기에 보이는 大城은 바로 王城이며, 본 기사의 북성과 남성을 합하여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慰禮는 都城을 지칭하는 말이다. (한성시기 백제의 도성구조에 대해서는 김기섭, 「백제전기 도성에 관한 일고찰」, 《 청계사 학》 7, 1990 참조).

 

    註 012 再曾桀婁와 古尒萬年은 백제 개로왕대의 사람으로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이 사실과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개로왕조에는 원년에서 14년까지 아무런 기사가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개로왕 초기에 정변이 생겨 그 결과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고구려로 도망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한국의 국가형성」하, 《한국학보》 3, 일지사, 1976, 139쪽).

 

 

 

 

   譯註 001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63년조에 나온다. 그런데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한 시기에 대해서는 개로왕 20년(474)으로 기록한 자료(《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자비마립간 17년 秋七月條), 476년으로 기록한 자료(《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0년조)도 있다. 그러나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0년조에 인용된 《百濟記》에는 “蓋鹵王乙卯年冬 狛大軍來攻大城七日七夜王城降陷”이라 하여 乙卯年(475: 개로왕 21년)으로 되어 있고, 또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조에는 63년(475)조에 기록되어 있어 475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譯註 002 장수왕의 명을 받들어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齊于)는 군사를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북성인 풍납토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성인 몽촌토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개로왕은 포위된 성이 위태로워 탈출을 시도하다가 재증걸루  등에게 사로잡혀 온갖 수모를 겪었다. 재증걸루는 개로왕을 포박하여 장수왕이 머물고 있던 아차산  의 본영으로 보내 죽음에 처하게 하였다.

 

    譯註 003 고구려의 승려이다. 장수왕(長壽王)  의 밀사로 백제에 들어가 뛰어난 바둑 솜씨를 이용하여 개로왕  의 신임을 얻었다. 개로왕을 설득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하도록 하여 백성을 곤궁에 빠뜨렸으며, 장수왕아 백제를 쳐서 수도인 한성(漢城)을 함락하는 데 공을 세웠다.

 

    譯註 004 백제 21대 개로왕을 말한다.

 

    譯註 005 博은 장기와 바둑, 고누 등 대국하는 놀이를 말한다. 局戱라고도 한다. 奕은 ‘圍棊’로 바둑을 의미한다. ‘博奕’이라는 용어는 《論語》 陽貨篇의 “子曰飽食終日 無所用心難矣 不有博弈者乎 爲之猶賢乎已”에 대한 集註에 “正義曰…博說文簙局戱也…圍棊謂之弈”이라 하고 있다. 博의 古字는 ‘簙’이며 이는 12줄로 되어 있는 局面에서 흑·백 6말로 되어 있는 고누를 말한다. ‘棊’는 ‘棋’ 또는 ‘碁’라고도 쓰며 이는 바둑을 의미하는데 山海關 이동의 魯·齊 지방에서는 이를 ‘奕’이라고 불렀다. 唐나라 이전의 바둑은 가로·세로 17줄에 289점이었고, 현재는 가로·세로 19줄에 361점이다. 장기는 漢나라 이후의 놀이로서 局戱의 하나이다. 바둑에 관한 기사로는 《삼국사기》 권48 열전 都彌傳 “(蓋婁王)謂其婦曰 我久聞爾好 與都彌博得之”라 것과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 “有投壺樗蒲等雜戱 然尤尙奕棊”라 한 것을 들 수 있다.

 

    譯註 006 臺는 흙을 높이 쌓고 위를 평평하게 하여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고, 榭는 목조로 집을 지어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을 말한다. 《尙書》 泰書 上 第1의 “惟宮室臺榭陂池侈服 以殘害于爾萬姓[注 土高曰臺 有木曰榭…正義曰…釋宮又云 闍謂爲之臺 有木者謂之榭 李巡曰臺積土爲之 所以觀望也 臺上有屋 謂之榭 又云 無室曰榭 四方而高曰臺]”라고 한 기사 참조.

 

    譯註 007 지금의 한강을 말한다. 광개토왕릉비문  에는 아리수(阿利水)로 되어 있다.

 

    譯註 008 원문에 社는 본래 토지의 主神이고 稷은 穀神이다. 옛날 천자와 제후는 반드시 社稷壇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어 국가의 存亡을 같이 하였으므로 轉하여 國家(王朝)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譯註 009 고구려의 관명(官名)이다.

 

    譯註 010 백제의 귀족가문의 姓으로 複姓의 하나. 이 목협씨는 후에 單姓化될 때 가문의 分枝化에 의해 木氏와 劦氏로 나뉘어졌다.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백제의 大姓八族의 하나로서의 木氏와 劦氏는 木劦氏의 分枝化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日本書紀》에는 ‘木刕不麻甲背’(《日本書紀》권17 繼體紀 10년조), ‘中部德率 木刕今敦’(《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3년조) 등의 예에서 보듯이 ‘木刕’를 姓으로 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劦’과 ‘刕’는 字形이 유사하고, ‘刕’와 ‘羅’는 음운이 상통하므로 ‘木劦’·‘木刕’·‘木羅’는 同一 實體에 대한 異表記라고 할 수 있다.

 

    譯註 011 성이 두 字 이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대체적으로 單字姓이나 중국 주변의 민족들은 複姓이 대부분이다(《魏書》 권113 官氏志 참조). 백제의 姓도 왕실의 姓인 夫餘氏나 大姓八族의 하나인 沙宅氏 등에서 보듯이 복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접촉이 빈번하게 되면서 單字姓制를 채용하게 되었다. 夫餘氏가 餘氏로, 沙宅氏가 沙氏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백제의 성씨에 대해서는 이홍식, 「백제인명고」, 《한국고대사의 연구》, 신구문화사, 1971 참조).

 

    譯註 012 木劦을 木氏와 劦氏로 나누어 본 것을 말한다. 이 목씨와 협씨는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는 각각 백제의 大姓八族(沙氏·燕氏·解氏·劦氏·眞氏·國氏·木氏·苩氏)의 하나로 나온다.

 

    譯註 013 백제의 複姓의 하나. 《日本書紀》 권15 顯宗紀 3년조에 古爾解가 보이는데 ‘尒’와 ‘爾’는 상통하는 字이다. 따라서 고이해의 ‘古爾’도 복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譯註 014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의 아차산성을 말한다.

 

 

 

주제분류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색인어<이름> 거련, 장수왕, 도림, 도림, 근개루, 도림, 도림, 도림, 도림, 장수왕, 근개루, 문주, 문주, 목협만치, 조미걸취, 대로, 제우, 재증걸루, 고이만년, 걸루, 걸루, 만년 <지명> 욱리하, 숭산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