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에 살다 / 박인식 기자

2014. 2. 15. 01:50산 이야기

 

 

 

 

       [설악에 살다] (16) 권경업과 배종순

▶부산합동등반대의 베이스 캠프였던 군용텐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권경업,김문식, 강창호, 배종순,이종양,이정희씨(왼쪽부터)


그는 오랫동안 말도 안되는 짓을 일삼고 다녔는데, 알고보니 그의 사형(師兄) 배종순씨가 그런 행동의 원조였다.

대구 팔공산악회의 오상균씨가 언젠가 `별 해괴한 친구`를 산에서 만났다며 혀를 껄껄 찬 적이 있다.

"부산 산악인들과 대구 팔공산에서 합동산행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부산에서 온 어떤 산꾼이 모닥불 곁에서 반바지에 반팔 옷차림으로 밤늦도록 앉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정말 추위에 강한 체질인가보다 하고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가까이 가봤어요. 그러나 웬걸. 얼굴이 청동빛으로 얼어 붙은 데다 가느다란 팔다리를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물어봤죠. 안 춥냐고요. 그랬더니 이 양반 대답이 걸작이더라고요."

"보면 모르냐. 이렇게 떨고 있는 걸."

"그럼 옷이 없는 모양이군요. 빌려줄까요."


"옷은 나도 많구마."

"그런데 왜 이런 겨울산에서 반바지만 입고 떨고 있나요."

"귀찮게시리 자꾸 물어보네. 이건 어떤 산선배의 가르침을 따르는거구마. 그 선배 말이 토왕폭을 오르거나 알프스의 아이거북벽을 등반할라카마 이 정도 추위는 알몸으로 견뎌내야 한다고 했구마는. 지금 나는 토왕폭과 아이거북벽 등반 훈련 중인기라."

그 다음날 오상균씨는 부산에서 온 이 괴짜와 함께 팔공산 병풍암을 등반했다. 꽤 까다로운 코스를 오르는데, 그 괴짜는 여전히 반바지차림으로 손에는 속칭 고구마장갑이라는 면장갑을 두 개씩이나 끼고 있어 바위틈 사이를 제대로 잡지 못해 쩔쩔 맸다.

전날 밤처럼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오씨는 "장갑을 벗고 오르면 되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아참, 또 귀찮게 하는구마. 내가 지금 팔공산 병풍암을 오르고 있는 줄 아능교. 천만에! 나는 지금 아이거북벽에 붙어있는기라. 그런 곳에서 맨손으로 등반하다가는 손가락 모두 동상 걸려 잘려버릴 꺼구마는. 이런 지혜 모두들 그 위대한 산선배한테서 배웠구마는."

오씨가 팔공산에서 만났다는 그 부산 괴짜가 권경업씨였으며, 그에게 그런 산행법을 가르쳐준 이가 바로 권씨의 토왕폭 자일 파트너였던 배종순씨였다.

토왕폭 제2등에 성공한 부산 엑셀시오산악회의 배종순씨가 1986년 어느 봄날 서울로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배씨는 토왕폭 등반 때의 또 다른 자일 파트너였던 김원겸씨와 아이거북벽 겨울 원정에 나설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82년과 83년 이태에 걸쳐 두 번의 알프스 등반 경험이 있는 내게 알프스 현지 사정에 대해 자문하고 싶었던 것이다.

광화문의 어느 술집에서 우리는 알프스는 건성으로 건너 뛰어넘고 토왕폭 얘기를 안주삼아 강소주를 마구 들이켰다. 배종순씨는 77년 1월 토왕폭을 두 번째로 오를 때 소토왕골에서 훈련 산행을 가진 뒤 비룡폭포 위에 설치한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다가 토왕폭 쪽에서 들려왔다는 어떤 비명 소리에 대한 궁금증을 털어놨다.



[설악에 살다] (17) 배종순의 하얀산

▶부산합동대원들이 짐을 나르던 중 토왕폭 초입에서 잠시 쉬고 있다.

"정말 이상한 소리였어요. 우리 부산합동대는 당시 초등에 성공한 크로니팀의 박영배씨와 송병민씨가 서로 고립되는 위기 상황이 벌어진 줄 몰랐거든요. 때문에 그 소리의 주인공이 박씨나 송씨일 거라고는 전혀 짐작조차 못했어요. 오히려 토왕폭이 크로니의 산꾼들에게 처녀를 내주던 광경을 지켜보다 말고 돌아선 에코팀의 투박한 총각들이 내지른 고함인가 했지요."

배종순씨는 토왕골 들목에 있는 비룡폭포 위쪽 베이스캠프에서 하산하는 유기수씨의 에코팀을 만났었다.

"그때 기수형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는데 아무 대꾸도 없더군요. 어디 그 말이 제대로 들리기나 했겠어요. 하지만 다른 후배들은 몹시 흥분해 있더라고요. 그들 가운데 누가 홧김에 지른 고함이 아니었을까요?"

하긴 서로 연결한 자일을 놓쳐버린 박영배씨와 송병민씨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고함을 내질렀겠지만, 그 소리가 멀리 떨어진 비룡폭포까지는 전해지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배종순씨가 추측하는 그 `에코설`도 곧이 들리지는 않았다. 유기수씨는 바위에서 떨어질 때 `앙카`소리조차 지르지 않고 자신의 추락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무섭도록 냉정한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몸이 깨져도 소리치지 않는 바위 같은 유기수씨는 속으로만 노래하는 `침묵의 산꾼`을 대표했다.

"아니! 그럼 누가 그런 소리를 질러댔단 말이오?"

유기수씨의 에코팀에서 낸 소리가 아닐 거라는 내 주장에 배종순씨는 짜증스레 반응했다. 내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것처럼 들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더 짓궂게 내질렀다.

"그럼, 정말 그런 소리를 듣긴 들은 거요?"

"거참! 박형도 답답하네. 우리가 왜 없는 얘기를 꾸며내겠소. 나뿐만 아니라 그때 비룡폭포 위에 있던 부산합동대의 대원들이 다 들었다니까."

그제야 나도 고백했다.

"사실 권경업씨에게서도 그런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그렇다니까. 그럼 그게 사람 목소리가 아니라 혹시 토왕폭이 낸, 토왕의 소리가 아닐까요? 왜 얼음이 얼거나 깨질 때 비명소리를 지르잖아요. 아무튼 그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해요. 아무래도 다시 들어보러 토왕폭으로 가봐야겠어요."

그렇게 그 소리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그 토왕폭의 사나이는 그해 겨울 아이거 북벽으로 떠났는데 다시는 토왕골을 찾아갈 수 없었다. 그는 토왕폭에서 줄을 함께 묶었던 자일 파트너 김원겸씨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죽음의 빙벽`으로 불리는 아이거 북벽을 겨울에 완등했으나, 하산길에 악천후를 만나 두 사람 모두 정상 부근 설원에서 탈진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부산합동대의 토왕폭 제2등의 하객인지 그들이 등반을 마친 1977년 1월 25일, 두 명의 산꾼이 토왕골로 찾아 들었다.

그들은 토왕폭을 뚜렷이 볼 수 있는 폭포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가 3백m 길이로 드리워진 얼음기둥을 서너 시간 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내려갔다.



[설악에 살다] (18) 마운틴빌라의 도전

▶토왕폭 앞에 선 부산합동대원들. 앞줄 오른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권경업,김원겸,배종순,한선진씨,한 사람 건너 이정호 강창호씨.


하산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권경업씨는 그런 상념에 잠겼었다. 권씨의 상념은 그때로부터 정확히 1년 앞을 내다본 통찰이었다.

장경덕 대장이 이끄는 서울고 산악부 OB회인 마운틴빌라의 토왕폭 등반대 9명은 크로니팀이 토왕폭을 초등한 지 꼭 1년 만인 1978년 1월 11일 토왕골로 들어갔다. 한 해 전 권경업씨가 만난 두 산사나이들은 마운틴빌라팀의 정찰대원이었던 것이다.

12일 토왕폭 하단 아래쪽에 베이스를 치고 장경덕·최영규 대원이 오후 4시쯤 등반을 시작해 동대 테라스까지 진출한 후 자일을 고정시켜 놓고 캠프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 오전 9시30분 등반을 재개한 두 대원은 오후 4시쯤 하단 등반을 끝냈다. 놀라운 속도였다.

1월 15일, 전날 상단 80m까지 설치해둔 자일을 타고 최영규·김기환 대원은 오전 8시30분쯤 상단 등반에 들어갔다. 그들은 재빨리 움직여 오후 4시쯤 1백10m 지점에 세번째 테라스를 깎았다. 이제 위쪽으로 남은 토왕빙벽의 길이는 20여m에 불과했다.

뒤쪽을 맡은 김기환 대원을 제3 테라스로 올려놓고서 최영규 대원은 어둠 속의 토왕폭을 줄기차게 올랐다. 오후 11시30분까지 확보를 보고 있던 김대원의 손에서 자일은 계속 위쪽으로 빠져나갔다. 그 자일 끝을 맨 최대원의 위쪽으로 토왕은 정수리 부분 7m 정도를 남겨 두고 있었다.

토왕폭 완등의 고빗사위를 완전히 넘어선 것이다. 그 고빗사위가 끝나는 지점에 뿌리를 내린 나무 한 그루가 앞선 최대원의 눈에 들어 왔다. 최대원은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그 나무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 나무를 잡고 밑둥의 굵은 우듬지에 확보줄만 걸면 초등과 2등 때 12일씩이나 걸린 등반시간을 나흘로 줄이는 기록을 세우며 토왕폭 3등의 영광을 손에 쥐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 순간 `아악!`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밑에서 확보를 보고 있던 김대원의 손에 잡힌 자일이 어둠 속으로 마구 빠져나갔다. 나무를 향해 나아가던 최대원의 해머가 완전히 박히지 않은 눈더미에서 빠져나오는 바람에 최대원이 그대로 떨어진 것이었다.

30여m 밑으로 떨어지던 최대원은 김대원의 필사적인 확보로 제3 테라스 아래쪽 5∼6m 지점에서 멈춰 외줄에 매달리게 됐지만 추락 도중 양쪽 발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김대원은 안간힘을 다해 부상한 최대원을 테라스로 끌어올렸다.

테라스의 두 대원은 하강하기로 했다. 김대원이 먼저 제2 테라스로 내려섰다. 하지만 뒤이어 내려온 최대원은 부러진 발목 때문에 제대로 하강하지 못해 자일을 엉키게 만들었다. 그 바람에 두번째 테라스로 내려서지 못하고 빙벽에 꼼짝없이 매달리게 됐다. 그것으로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끝났다.

토왕폭으로 골짜기의 물을 몰고 가는 함지덕 위로 찬 조각달이 걸리고, 사위는 조용해졌다. 다만 초조한 시간만 흘렀다. 날이 밝으려면 다섯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섭씨 영하 16도로 곤두박질친 설악의 날씨는 구조대에게 해 뜨기를 기다릴 만한 짬을 주지 않았다.



[설악에 살다] (19) 최영규 대원 구출기

▶토왕폭 빙벽 하단부 동대 테라스를 향해 오르고
있는 권경업씨의 뒤에서 김원겸씨가 밧줄을 잡아주고 있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고 판단한 장경덕 대장은 때마침 토왕폭 하단을 등반하고 야영 중이던 서울 봔트클럽의 최영국 대원과 마운틴빌라의 이건성.이만영 대원을 데리고 오른쪽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층 가까워진 왼쪽 빙벽에서 새어나오는 김대원의 신음이 구조대원들의 가슴을 갈가리 찢었다.

"경덕이형! 손이 썩어들어가요. 빨리 구해줘요."

다른 대원들은 중단에 파놓은 설동(雪洞) 위쪽까지 나아가 조난당해 토왕의 빙벽에 매달린 김기환.최영규 대원에게 소리쳤다.

"기환이형, 영규형! 나 의근이야. 자지마. 자면 안돼. 손발을 계속 움직여!"

최대원은 혼수상태에 빠져 반응이 없었고, 김대원은 침착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한 다음 요구사항을 말했다.

오전 4시30분쯤 장대장은 조난 대원들의 졸음을 쫓아 주려고 서울고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낮고 조용한 음률의 목소리가 토왕골로 퍼져 나갔다.

"인왕의 억센 바위…."

아래쪽 설동에서도, 빙벽의 최대원도 따라 불렀다. 어둠 속 토왕폭은 그들의 노래 소리로 가득 찼다.

장대장의 눈에서는 별빛을 받은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그 별빛으로 반짝이는 눈물을 보는 순간 불가사의한 힘에 휩싸인 장대장은 허리까지 빠지는 눈더미를 헤치며 정신없이 정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전 7시쯤 정상에 닿은 장대장은 40m짜리 자일 4동을 연결해 먼저 김기환 대원을 끌어올렸다. 4시간 30분 동안의 격렬한 몸놀림 끝에 네 명의 구조대원은 김대원의 얼굴이 토왕폭 상단 설사면 위로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생명의 불꽂이 사그라져가던 그 얼굴을 얼싸안은 토왕폭 사나이들의 눈은 격정으로 이글거렸다.

점심 때쯤 최영규 대원도 구조돼 정상으로 옮겨졌다. 최대원의 왼손은 심한 동상에 걸려 있었고, 양쪽 발목은 부러져 40도 정도 안쪽으로 꺾여 있었다. 그곳에서는 신발을 벗겨 볼 수도 없었다.

오후의 햇살이 걷히자 기온은 더욱 떨어졌고, 잠잠하던 토왕골은 다시 거센 바람에 휩싸였다.

그날 저녁무렵에야 최대원이 중단 설동까지 무사히 옮겨진 것을 확인한 장대장은 김대원을 부축해 골짜기로 들어섰다.

토왕은 이미 비정한 산으로 변했고, 바람결은 냉혹했다. 하지만 그 바람과 추위도 토왕폭 사나이들을 얼릴 수는 없었다. 오후 10시30분쯤 중단 설동에서 김대원은 먼저 내려온 최대원과 재회했다.

이튿날 에코클럽의 박일환씨, 광주서 올라온 바자울산악회의 토왕폭 정찰대, 동굴사진가 석동일씨 등의 도움으로 하단 아래로 옮겨진 최대원은 곧장 서울 백병원으로 후송됐다. 마운틴빌라 회원인 권철수 정형외과장의 집도로 최대원은 동상 걸린 오른쪽 발가락 모두와 왼손 약지 한 마디를 잘라냈다. 마운틴빌라팀의 속도 등반은 그렇게 미완성으로 끝났다.



[설악에 살다] (20) 돈키호테 손칠규

▶ 윤대표씨가 1999년 여름 북한산 선인봉 하늘길을 오르고 있다.

손칠규씨는 피아노를 팔아 등산장비를 샀다. 이는 등산장비를 팔아 피아노를 샀다는 것보다도 상식 밖의 일이다.

손씨의 행위는 가계 형편상 피아노를 팔아 등산장비를 살 여유도 없는 사람이나 등산장비를 팔아 피아노를 구입하는 사람, 양쪽 모두를 약오르게 만든다. 그래서 일까. 이웃에 살던 미국인 선교사가 남기고 간 외제 피아노였기에 그걸 팔아 이탈리아제 돌로미테 이중 등산화와 프랑스제 샤를레 모제 피켈.아이젠 등의 빙벽 등반장비 일체를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외제로만 사서 산으로 간 날 그는 선배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가 외제 빙벽 등반장비로 중무장하고 찾아간 곳은 대구 팔공산이었는데, 선배들은 도대체 얼음도 없는 팔공산에서 그런 장비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손칠규씨를 마구 나무랐던 것이다.

손씨는 선배들로부터 맞아 생긴 몸의 상처보다 마음 속에 키우고 있던 토왕폭 등반에 대한 열정이 상처를 입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아주 서러웠다. 대구 왕골산악회의 회원으로 발군의 클라이밍 실력을 가졌던 그는 당시 쟁쟁한 산꾼들의 꿈인 토왕폭 초등을 이루겠다는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피아노와 바꿔치기한 외제 빙벽 등반장비들이 팔공산과는 궁합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안 손씨는 남들이 들으면 농담이라며 웃고 말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 그의 집에는 커다란 과일 저장창고가 있었다. 손씨는 그 창고의 벽을 얼리고, 또 얼음을 쌓아 다양한 형태를 갖춘 빙벽 훈련장을 만들었다.

토왕폭 초등자를 꿈꾸며 그는 매일 창고 속에서 피켈을 휘두르며 얼음을 깨뜨려 놓았다. 그러나 겨울산간학교(한국등산학교의 전신)에서 배운 '피올레 캉'이니 '피올레 라마세'니 하는 프랑스식 오리걸음을 연습하기에 빙벽이 너무 가팔랐다. 그래서 이 엉뚱한 사나이는 더욱 황당한 생각을 하게 됐다. 아이젠을 신고 집 마루에서 프랑스식 오리걸음을 흉내냈다. 그 바람에 마룻바닥이 온통 울퉁불퉁해졌다. 마루에 엎어져 피켈을 휘두르며 프런트 포인팅까지 연습한 탓에 마루는 곧 부서졌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는 토왕폭이 곧은 소리를 내며 곧게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이는 모두 의치(義齒)다. 오토바이 타기와 암벽 등반, 그리고 스킨 스쿠버 다이빙 등 이가 부러질 짓만 골라서 좋아했기 때문이다. 고교 때부터 즐긴 오토바이 질주로 이가 모두 부서졌는데, 그 뒤 다이빙을 하다가 물 속 바위에 얼굴을 들이받는 바람에 새로 끼운 앞니가 다시 몽땅 내려앉고 말았다.

손씨의 취미에서 사진을 빼놓을 수 없다. 남들은 가질 엄두조차 못 냈던 핫셀 블라드를 '소품으로 쓴다'고 큰 소리쳐 다른 사진쟁이들의 간을 뜨끔하게 만들기도 했다.



[설악에 살다] (21) 손칠규의 열정

▶ 토왕폭 등반을 마친 손칠규씨(左)와 윤대표씨가 기념촬영을 했다.

손칠규씨는 제대한 뒤 대학시절 전공(작곡)을 살려 포항에서 음악교사를 한 적이 있다. 그땐 사진 찍는 재미로 지낼 만했다고 한다. 시험 시간에 커닝하는 아이들의 표정, 매질하는 어느 여선생의 모습. 봄날 교무실에서 입 벌리고 침 흘리며 잠든 노처녀 수학선생의 표정 등을 카메라에 몰래 잡아 대문짝 만하게 인화해 음악실에 걸어 뒀었다. 그러다가 토요일만 되면 요란한 파열음을 내는 오토바이를 몰고 대구 근교의 산으로 사라져버리는 이 괴짜 음악선생은 침 흘리며 잠든 여선생의 사진이 화근이 돼 인연없는 교육계를 떠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작은 토왕폭이 된, 얼음 창고와 마루에서 토왕폭을 오르기 위한 등반훈련을 거듭했다.

손씨는 1977년 12월 말 설악의 토왕폭으로 정찰등반을 떠났다. 같은 해 1월에 크로니산악회와 부산합동대에 초등과 제2등의 영예를 잇따라 내준 토왕폭이었지만. 손씨는 7년 가까이 키워온 토왕폭 등정의 꿈을 접을 수 없었다.

토왕골에 들어가 토왕폭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중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하산하게 됐다.

대구의 집으로 가보니 어이없게도 자신의 혼수함이 알지도 못하는 어느 처녀의 집에 가 있었다. 그는 설악에서 바로 내려온 산행 차림으로 배낭을 진 채 그 처녀의 집으로 가서 신랑으로서 인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손씨의 부모는 종손인 그를 대학 재학 시절부터 결혼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들이 산으로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번에는 아들이 설악의 토왕골에 들어가 있는 틈을 노려 두 집안의 어른들끼리 기습적으로 합의, 이 문제아의 결혼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그는 숙제하는 기분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신혼여행은 한라산으로 갔다. 한라산에서 며칠을 함께 보낸 뒤 신부를 대구 근교의 처가에 맡겨두고 78년 1월 말 곧장 설악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토왕골에는 토왕폭을 함께 오르기로 약속한 악우회의 윤대표씨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손씨는 집안뿐 아니라 대구 산악계에서도 단단히 찍힌 문제아이자 이단자였다. 짐 잘 지고 밥 많이 먹고 술 또한 잘 마시면 선배들에게서 좋은 후배 나타났다고 귀염받는 분위기 속에서 손씨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 데다 남들은 걷기 산행에 열을 올릴 때도 바윗길만 고집했다.

또 그는 이중섭이 그린 바닷게 등짝처럼 생긴 키슬링이라는 대형 배낭 대신 날렵한 외제 배낭을 메고서 외제 신발을 신고 바위만을 쳐다보고 다녔으니 산선배들의 눈 밖에 나는 건 당연했다. 특히 오토바이를 타고 팔공산 바윗골까지 달려가 암벽 등반을 하는 바람에 산선배들에게서 미움을 톡톡히 샀다.



[설악에 살다] (22) '대표 산쟁이' 윤대표

▶ 이진우(左).신성삼씨가 캠프에서 토왕성 빙폭을 등반하고 있는 윤대표.손칠규씨를 지켜보고 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설악의 토왕골로 달려간 손칠규씨는 1978년 2월 2일 악우회의 토왕폭 등반대와 합류했다.

신성삼.임근성.백승기.이진섭.이진우 대원의 지원을 받은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은 대구 왕골산악회의 손칠규 대원과 자일을 함께 묶고 다음날 오전 11시30분 토왕폭 하단에 붙었다.

하단의 동굴을 거치지 않는 왼쪽 루트를 통해 먼저 오르기 시작한 윤대장은 오후 1시 무렵 동대테라스에 올라섰다. 그는 77년 2월 악우회 후배인 유한규 대원과 토왕폭에 도전했을 때 동대테라스에서 심한 낙수(落水)를 만나 돌아서고 말았었다.

그때 유대원은 발톱을 여섯개나 뽑아야 하는 심한 동상에 걸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줄기가 동대테라스의 오른쪽으로 트여 다행히 등반루트에는 낙수가 심하지 않았다.

뒤따라 오르던 손대원은 오후 4시쯤 하단에 완전히 올아섰다. 4시간30분 만에 하단 등반을 끝냈다.

2월 4일 오전 11시40분. 윤대표 대장과 손칠규 대원은 상단 등반에 들어갔다.

토왕폭 상단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물이 흥건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윤대표씨라면 대표라는 이름 그대로 국가 대표급 산악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쩌자고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이라도 따게 되면 낳고 이름 지어준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릴 수 있는 인기 스포츠 종목의 '대표'가 아니라, 도대체 밥이 나오길하나 돈이 되길하나 부른 배마저 쉽게 꺼져버리고 마는 그놈의 산에 미쳐버린 '등산대표'가 되고 말았을까.

아버지의 이 같은 탄식은 아들의 이름을 '대표'로 지은 자업자득인지도 모른다. 윤대표의 아버지 윤선씨는 윤대표라는 이름을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윤선씨가 알고 있는 윤대표라는 이름은 자랑스러운 대표적인 대장부였다. 아버지는 그런 대표적인 장부가 되라는 마음에서 아들의 이름을 대표라고 지었다. 아버지가 바랐던 '장부대표'와 지금의 산대표가 된 윤대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윤대표는 체격은 작은 편이나 '겁없는 산사나이'라는 이미지에 어울리는 외모를 지녔다. 한눈에 야무진 외골수임을 느끼게 한다. 검고 반듯한 얼굴을 가로지르는 짙은 눈썹은 당겨진 활시위에 놓인 화살 같은 긴장감을 준다.

. 윤대표는 산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결벽증을 가진 '윤대표의 산'이다. 그에게는 오직 산만 산이다. 삶의 다른 국면을 산으로 대체하는 산쟁이들이 있지만 윤대표는 그마저 거부한다. 술도 담배도 모른다. 그에게 술과 담배는 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수도 적다. 말도 그에게는 산이 아니다. 입으로 산을 오르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얄미울 수 없단다. 파트너란 어떤 벽을 겨누고 뜻을 같이 했을 때 함께 오르는 동료에 지나지 않는다.

친구도 산이 아닌 것이다. 그런 친구를 따라 가는 곳은 강남일 뿐, 산이 아니다. 때문에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자일을 함께 묶을 수 있고, 그만한 파트너가 없을 때는 혼자 오른다.

그런 윤대표씨를 산에 입문시킨 사람은 친형인 윤인표씨다. 대학에서 산악부원으로 활동하던 형은 70년 고교를 막 졸업한 동생을 데리고 서울 도봉산 선인봉의 남쪽 코스를 올랐다. '형제 산행'은 그후 3년간 계속됐다.



[설악에 살다] (23) '시리우스' 윤대표

▶ 아이거 베이스캠프에서 베타호른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한 허욱.조윤희.윤대표씨(왼쪽부터).

형과 자일을 묶고 지냈던 1973년 무렵 윤대표씨는 신문에 실린 회원모집 광고를 보고 엠포르산악회에 가입했다.

엠포르산악회에서 최고의 공격수로 떠오른 그는 어느 날 서울 합정동로타리를 지나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스위스제 헹케 비브람(겨울용 중등산화)을 신고 있는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다. 윤씨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비브람의 주인이 악우회 회원 백승기씨였다. 그 인연으로 윤씨는 76년 10월 악우회에 몸담게 됐다.

악우회 회원들과 77년 도봉산 선인봉의 모든 코스를 연결해 오르는 연장등반에 성공했고, 이듬 해에는 설악산 선녀봉을 초등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손칠규씨와 자일을 함께 묶고 토왕폭 제3등에 도전한 것이다.

무예의 고수처럼 세 자루의 아이스 해머를 적절히 휘두른 윤대표 대장은 78년 2월 4일 오후 4시쯤 토왕폭 상단 3분의 2 지점에 자리잡은 테라스에 올라섰다. 뒤이어 손칠규 대원은 5시15분쯤 테라스에 닿았다.

그 테라스 윗쪽의 이른바 '얼음 골짜기'에서 윤대장은 토왕폭 등반의 최대 고비를 맞았다. 얼음 골짜기는 암벽 위를 살얼음으로 살짝 도배해 놓은 듯했다. 그 얼음층이 너무 얇아 아이젠과 아이스 해머의 이빨을 제대로 물어주지 못했다.

그 골짜기에서 진퇴양난에 빠진 윤대표 대장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피로와 허기로 지쳐가는 몸으로 사지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 치는 토왕폭의 사나이를 두고 해는 함지덕 머리 위로 훌쩍 넘어가 버렸다. 동시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두 손의 감각과 의식을 잃어가던 윤대장은 푸석푸석한 얼음에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순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위기 상황임을 몸에 일깨워주려고 윤대장은 자신의 손가락을 마구 깨물었다.

자꾸만 허물어져 내리는 도배 빙벽이어서 아이젠의 앞이빨을 박는 프론트 포인팅 기술이 통하지 않았다. 때문에 윤대장은 킥 스텝으로 억지 발디딤을 만들거나 양무릎을 얼음벽에 바싹 붙이며 어둠 속의 얼음 골짜기를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야했다.

오후 7시40분, 그렇게 사투를 벌여 얼음 골짜기를 무사히 빠져나온 윤대장은 뒤따라 올라온 손칠규 대원을 정상에서 뜨겁게 껴안았다. 1박2일에 걸쳐 12시간30분 만에 이룬 토왕폭 빙벽 제3등이었다.

이 등반에서 토왕폭 빙벽 3백m 구간을 앞장서 오른 윤대표씨는 1년 뒤인 79년과 80년 두차례에 걸져 당시 한국산악계 최대 과제였던 알프스 3대 북벽(아이거 북벽.마터호른 북벽.그랑드 죠라스 북벽)을 한국 산악인으로는 처음으로 등정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 위업의 자일 파트너였던 허욱씨와 연계시켜 윤대표가 산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나는 겨울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는 시리우스라는 별에 비유한 적이 있다.



[설악에 살다] (24) 70~80년대 두 별

▶ 보우회 회원들이 1971년 여름 울산암 중앙벽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오른쪽 앉아 있는 사람부터 시계방향으로 홍석하.김진교.정종욱.최효중.이강오씨.


큰개자리의 으뜸 별인 시리우스는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력을 탄생시킨 기준 항성이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아킬레스같이 넓은 가슴을 지닌 청년들을 징집할 때 그들의 시력을 측정하는 별로 유명해졌다.

윤대표씨와 허욱씨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한국 산쟁이를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별로 떠오르게 했다는 점에서 찬란한 시리우스다.

그리고 세계적 클라이머의 모암(母巖)인 알프스 3대 북벽을 함께 오름으로써 한국 산꾼의 클라이밍 기량을 클라이머 수준을 평가하는 국제적인 잣대로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그들은 분명 태양력의 기준이 된 시리우스다.

밝은 눈의 그리스 청년은 시리우스가 두 개의 별임을 볼 수 있었다. 시리우스가 연성(連星)인 까닭이다. 시리우스는 하나의 별에 또 다른 별이 끼고 돌아 더욱 빛나는 두 개의 별이다.

윤대표라는 별을 허욱이라는 별이, 또 허욱이라는 별의 둘레를 윤대표라는 별이 알피니즘을 축(軸)으로 삼아 설악과 알프스에서 미친 듯 돌아갈 때, 두 별은 시리우스처럼 하나의 별로 한국 산악계에 찬연히 빛났다.

두 별 사이에 구심력과 그 반대 방향의 원심력이 팽팽히 맞설 때만 연성 현상이 나타난다. 그 당기는 힘과 미는 힘만큼이나 윤씨와 허씨의 개성은 판이했지만 서로의 힘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연성으로 공전하면서 공존할 수 있었다.

도시락 싸들고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 모두에게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반찬이 여러 가지 있을 때 어떤 것부터 먹느냐?"

순서없이 젓가락 놀리는 사람도 있지만 고집있는 친구는 도시락 비우는데도 나름대로 순서를 갖고 있다.

"그야 맛있는 것부터 먹지요."

허욱씨가 선뜻 답했다.

"…맛없는 것부터…."

윤대표씨의 조심스러운 대답이었다.

'까오기'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허씨는 여러 면에서 파트너 윤씨와 대조적이다.

윤씨 앞에서는 괜히 주눅들던 산악인들도 허씨를 만나면 봄바람에 녹는 눈처럼 부드러워진다.

허씨는 덩치가 큰 편인 데다 '완력등반의 1인자'라는 소문에 어울리는 체력을 가졌지만 얼굴 생김새는 그렇지 않다. 순한 느낌을 주는 이목구비가 검고 굵은 안경테 위로 부드럽게 그려지는 게 허씨의 초상이다.

윤씨가 고주파의 강렬한 성격을 지닌 데 비해 익살스러운 떠버리 허씨는 큰 진폭의 인간성을 지녔다. 설악을 좋아하기는 윤씨 못지않아, 설악의 여러 암릉과 암벽에는 초등자로서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허씨는 대학 입학 후 보우회(보성고 산악부 OB회)의 홍석하(현 월간 '사람과 산' 발행인).최효중.이강오 선배들과 함께 설악의 여러 암벽을 누비며 보우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72년에는 설악의 곰길을 초등했고 73년에는 설악의 공룡능선을 암릉릿지로 개척 등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설악의 울산암에 여러 개의 등산로를 열기도 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정리=김세준 기자

*** 필자 약력

▶1951년 경북 청도 출생

▶연세대 졸업

▶조선일보 '월간 산' 기자

▶월간 '사람과 산' 발행인 겸 편집인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전 연세산악회 회장

▶전 대학산악연맹 부회장

▶장편소설 '만년설' '백두대간' '종이비행기',
기행에세이집 '반딧불이 되도록 그리운'
'방랑보다 황홀한 인생은 없다'
'사람의 산' 등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