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나이 손칠규 / 네이버 블로그 <한국의 산천>글 중에서

2014. 2. 14. 23:13산 이야기

 

 

 

 

      

산사나이 손칠규

 

 

    내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된것은 80년도 초반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대관령으로 가서 그곳에서 낡은 찝차를 타고 초원을 누비며 아마추어햄 무선안테나를  높이 세우고..목장개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 그가 오늘 아침 신문기사 한면을 장식하고 있다. 아래 관련기사.

 

[박종인이 만난 외길인생] "음악에, 산에, 말에… 나는 세번 미쳤다"
전설의 山사나이에서 種馬산업 代父된 손칠규
글·사진=박종인 기자

 

     "불가능한 꿈은 없다(Seven Summits)'라는 책이 있다. 딕 배스와 프랭크 웰즈라는 미국 기업가 2명의 호주를 포함한 7개 대륙 최고봉 도전기를 담은 논픽션이다. 남미 아콩카과(6959m)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베이스캠프에서 미친 한국인을 만났다. 운동화를 신고 장비도 없이 정상에 가겠다는 넋 나간 사람이었다. 그가 정상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고 이후 그를 본 적이 없다. 실종된 게 틀림없다…."

그 미친 한국인이 손칠규(孫七奎·58)다. 어릴 적 음악에 미쳐 작곡을 전공하더니 산에 미쳐 산을 집 삼아 돌아다니던 그가 지금은 강원도 평창에서 말에 미쳐 말을 기르며 산다. 그 이야기다.

 


▲ 말 등에 올라탄 손칠규의 눈빛이 매섭다. 젊은 날 산에 미쳤던 그가 지금은 말을 기르며 살고 있다. 그가 말했다.“ 소 머리에 파리가 앉았다고 소가 정복당했나. 산은 버릴 수도 정복할 수도 없는 존재다.”


 

 

■경주마들이 뛰노는 강원도 평창

 

    영동고속도로 속사IC로 나와 진부 쪽으로 가면 도로변에 검은 말만 달랑 그려놓은 간판이 보인다. 작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갑자기 사위가 확 열리고 그림 같은 초원이 나타난다. 그 풍경 속에 늘씬하고 미끈한 경주마들이 뛰어다닌다. 두미울 목장은 넓이 100만평에 100필 넘는 말을 기르는 국내 최대의 민간 종마장이다.

손칠규는 그 목장 주인이다. 1983년, 젊은 시절 설립했던 사업을 처분해 목장을 만들었다. 전직 음악교사였던 그는 농촌의 부활을 꿈꾸고 중간 유통을 배제한 도-농 직결 기업을 설립했었다.

    그 꿈을 접고 직원 100명이던 공장을 처분해 산 게 버려진 평창 땅이다. 손칠규는 다른 축산업자들을 규합해 평창종마법인을 설립했다. 이제 종마 산업은 평창군의 주력산업이 됐다. 국내 종마산업의 대부로 변신하기까지 손칠규의 인생 내력은 이러하다.

 


■정미소집 아들 손칠규

 

    대구시 달성군에서 과수원과 정미소를 운영했던 손칠규의 집은 부자였다. 장남인 칠규는 몸이 왜소했다. 아버지는 약한 아들을 보고 얼른 친구 사귀라며 다섯 살 때 초등학교에 보냈다. 친구들은 키 작고 어린 부잣집 동급생을 왕따시켰다. 외로운 아이는 친구 있는 곳은 어디든 혼자 찾아 다녔다.

 

    "방학 때였다. 동네 앞산이 와룡산인데 사귀고 싶은 아이가 자기 집이 산 너머라고 했다. 그래서 산을 넘어 친구를 찾아갔다. 1학년 때였다." 어른 배꼽 높이만한 아이가 아침에 출발해 별이 뜰 때까지 산을 넘었다. 집에서는 아들이 실종됐다고 난리가 났다. 와룡산은 연전에 개구리 소년들 유해가 발견돼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산이다.

그에게 친구는 대개 음악이었다. 음(音)과 음이 만드는 장엄한 화음, 그게 좋았다. 내친 김에 서울 예원중에 들어갔다. 고교도 예고로 진학했다. 대구 계명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해 마음껏 음악을 했다. "그때는 내가 음악 천재인 줄 알았다. 내 딴에는 독창적인 예술을 한다고 별의 별 화음과 비화음을 섞어가며 작곡을 했다." 그리고 대학 산악회에 입회하면서 산에 미쳐 버렸다.

 


■산에 미친 손칠규

 

    "나뭇잎이 바르르 떨리는 바람소리, 별, 달무리…. 그런 게 너무 좋았다. 감수성이 예민한 놈이라 음악도 산도 나한테는 똑같았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70년대, 용감한 학생은 거리로 나갔다. 조금 비겁한 사람은 음악다방에 처박혔고 나처럼 진짜 비겁한 사람은 산으로 숨었다."

집에 있던 외제 피아노와 다른 악기를 몽땅 팔아 최고급 등산장비를 샀다. 이탈리아제 돌로미테 이중등산화와 프랑스제 샤를레 모제 피켈, 아이젠처럼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빙벽 등반장비 일체로 중무장하고 팔공산으로 간 손칠규는 선배들에게 죽도록 맞았다. "팔공산 암벽에 그런 장비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오르면 되는 걸 무슨 사치를 하겠다고…." 선배들은 손칠규를 이상한 놈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커서도 어릴 때처럼 왕따당하고 살 것인가. 손칠규는 오토바이 타고 산에 올라 혼자 암벽을 탔다. 손칠규가 말한다. "당시 대구 산악계에서 암벽은 대접 받지 못하는 장르였다. 그런 걸 내가 하고 다녔으니 별로 환영 받지 못했다." 지금도 최고급 명품 카메라인 핫셀블러드 중형카메라가 바위 틈에 끼자 거기에 자일을 묶고 하산하기도 했다. 내려와서 후배한테 "그거 뺄 수 있으면 가져와라"라고 주문했다. 다행히 후배가 구조해낸 카메라는 지금도 쓰고 있다.

 

    바위 위로 오토바이 타다 넘어지고 스쿠버다이빙하다가 사고 나고 "이 부러질 짓"만 하고 다녔다. 세월이 흐른 지금 손칠규가 소유한 이빨은 90% 의치거나 남의 이빨이다. 결국 대학 졸업하고 군대 다녀온 뒤 음악교사로 일하다가 1년 만에 때려치웠다. 그리고 기업을 설립해 운영하면서 혼자 산을 다녔다. 산 귀신이 되어갔다.

설악산 토왕폭을 등반하고 있는데 집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큰일이 났으니 대구로 얼른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서둘러 가보니 결혼식 날짜가 잡혀 있었다. "장가도 안 가고 산에 미쳐 돌아다니니, 어른들이 그 꼴을 두고 못 본 거다. 그래서 지금 아내와 결혼했다." 손칠규는 밀양 손씨 38대 장손이다.

 


▲ 아콩카과에서 살아 돌아온 손칠규를 보도한 현지 신문.

 

 

■손칠규, 정영자, 비나, 바나, 그리고 자일

 

    아내 정영자는 어릴 적 집안끼리 정혼을 약조한 사이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와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은 한라산으로 갔다. 동계 한라산 등반에 초죽음이 된 새 색시를 남겨두고 손칠규는 다시 토왕폭으로 가서 한 달 만에 돌아왔다. 뻑 하면 해외 원정을 떠나 몇 달씩 있다고 돌아왔다.

 

    아내가 말했다. "훗날 뭔가 될 사람 같아서 결혼했다. 힘든 거? 이 사람은 지금도 내가 힘든 거 모른다. 그렇지?" 손칠규가 활짝 웃으며 아내를 토닥거린다. 정영자는 남편 후배가 찾아오면 소주 한 박스에 삼겹살을 내놓는다. 하루 있다 가겠다는 사람들 1박2일씩 붙잡아 술 먹이고 고기 먹이는 통 큰 누나가 됐다. 그 사이에 딸 둘,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이름은? 장녀는 '비나'. 등산용 고리다. 둘째 딸은 '바나'. 불 지피는 버너다. 막내아들은 '자일'. 등산용 밧줄이다. 아버지한테 혼날까봐 셋 모두 그럴 듯한 한자로 이름을 지었다. 둘째 딸은 호적에 '미나'로 올라가 있다. "아버지가 이름 적은 종이를 잃어버렸다. 동사무소 직원이랑 두 사람이 머리를 싸매며 이름을 추정하다가 '도저히 사람 이름이 '바나'일 수 없다'며 미나라고 올려버렸다." 세 자녀는 장성해 화가로, 수의사로, 조각가로 활동 중이다. 그러다 1982년 11월, 운명의 남미 원정을 떠났다. 이번에도 단독 원정이었다. 
   

 

■아콩카과에 오르다

 

    "남미 산들을 원정하고 싶은데 여권 만들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그때 칠레에서 열리는 세계산악인회의 참석을 명분으로 여권을 만들었다." 6000m급 이상 등정 기록이 있을 것, 암벽 및 빙벽 경험 있을 것, 영어 또는 스페인어 능통할 것. 그런 조건을 충족시키고 칠레로 떠났다.

회의는 뒷전이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접경지대에 있는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반 루트를 타고 베이스캠프를 지나 정상 아래에 장비를 묻어놓고 내려왔다. 남벽을 타고 오른 뒤 사용할 장비였다." 아콩카과 벽은 '지저분한 벽면'이라 불린다. 바위도 거칠고 땅도 거칠고 기상도 거친 루트다.

 

    "정상에 가겠다고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더니 미국 원정대들이 나더러 미친 놈이라고 했다. 그 사람들한테 인사하고 올라가서 장비 묻어놓고 내려오니 와인 퍼 마시고 자고 있더라." 오르는 사람만 봤고 내려오는 걸 보지 못했으니 "미친 한국인 실종됐다"는 기록이 나왔다.

정상 정복은 성공했다. 산꼭대기에 작은 철 십자가가 박혀 있었는데, 거기에 태극기 묶어놓고 내려올 때까지는 좋았다. "갑자기 발 밑이 꺼져 내리더니 내가 한없이 추락하는 것이다." 눈보라 속에서 손칠규는 눈사태까지 만나 직하방으로 추락했다.

 

    "700m 떨어지는 동안 영화 한편 다 봤다"고 했다. 까맣게 잊었던 여섯 살 때 기억부터 아내 정영자의 화난 얼굴, 그리고 자기 상가에서 신나게 술 퍼마셔댈 친구 놈, 술 대신에 꺼이꺼이 울고 있을 친구 놈 등등 그 몇 분 사이에 인생을 총정리했다. 그런데 추락 속도가 빨라서 눈사태를 추월하더니 떨어진 곳이 눈 덮인 경사면이라 몸 부서지지 않고 미끄러지며 멈추는 게 아닌가. 살아난 것이다. 그때부터 지옥이었다.

 

 

■"개미는 매운 맛"

 

    사방을 둘러보니 빙하지대요, 하늘 끝까지 360도 설산이었다. 닷새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걸었다. 절벽에 간신히 붙어서 전진했다. "그런데 지층이 끊기고 내 몸보다 짧은 거리 앞에서 다시 길이 시작됐다. 평지였으면 그냥 뛰었겠지만 천길 낭떠러지라, 이틀을 고민하다가 펄쩍 뛰었다. 반대편 길에 엎어지며 이빨이 바위에 부딪쳐 부러졌다. 그런데 얼마나 웃음이 나오는지. 있지 않은가, 정말 행복하고 통쾌한 웃음."

하지만 사람 흔적은 없었다. "원수 같은 놈, 자기 장가가는 날도 모르고 식구들 애간장 태우다가 산으로 신혼여행 가서 신부를 초주검으로 만들더니 결국은 과부를 만들었구나"라고 저주할 장모,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더니 결국 지구 반대편에서 끝장이 났구나"하고 동정 반 야유 반을 퍼부어댈 산악계 사람들이 떠올랐다.

 

    계곡을 만났다. 물을 한껏 마시고 개미 세 마리를 잡아먹었다. 닷새 만에 먹는 식량이었다. 개미 맛은? "맵다"고 했다. 다음날 매미를 잡아먹었다. 새끼 오리가 보이길래 대가리를 쥐고 산채로 뜯어먹었다. 지금 먹으라면? "절대 안 먹는다. 미쳤나?"조난일지와 촬영은 빼놓지 않았다. 깨알 같이 수첩에 일기를 쓰고, 작은 미녹스 카메라로 '셀카'를 찍었다. 그리고 유서를 썼다. "나는 한국인 손칠규다. 언젠가 시체가 발견되면 한국에 알려달라. 이 카메라, 절대 열지 말고 대사관으로 보내달라. 정상부터 여기까지 다 찍혀 있다." 그리고 신(神)한테 욕을 퍼부었다. 죽이려면 그냥 죽이라고, 왜 이 따위로 죽을 만하면 살려내서 약을 올리냐고.

 

    기력이 완전히 쇠진했다. "동공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바지 속으로 오줌이 새 나왔다. 구멍 막을 힘도 없었던 거다." 죽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이번에는 신에게 싹싹 빌었다. 살려만 주신다면 정말 열심히 살겠다, 신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처참하게 신한테 항복했다"고 했다.

바위에 자빠져 있는데 오른쪽 뒤편으로 희끄무레한 뭔가가 느껴지는 것이다. 담배 쥐듯이 손가락 두 개로 잡아보니까 뱀이었다. "머리랑 꼬리를 잡고 잡아당겼더니 껍질이랑 내장이 튀어나왔다. 막 포식하고 쉬던 참이었는지, 뱃속에 카멜레온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뱀이랑 카멜레온을 씹어먹었다. 다음날 뱀 독이 올라 온몸이 퉁퉁 부었다. 그렇게 장장 여드레를 빙하와 사막을 헤매다가 사슴 사냥꾼을 만나 빵을 먹고 잠을 잔 다음 이튿날 군부대까지 내려가 조사를 받고 귀국했으니, 그게 1983년 1월 이야기다. 현지 신문들은 그의 생환 소식, 그리고 그가 묶어둔 태극기를 가지고 내려온 다른 원정대 이야기를 대서특필했다. "아무도 모르겠지"하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더니 이미 외신으로 조난 전말기를 접한 동료, 가족들이 "이 문제아 두고 보자"며 벼르고 있었다.


 
▲ 2005년 손칠규는‘휴먼원정대’원정대장으로 히말라야로 떠났다.

초모랑마 등정 후 하산 도중 조난 당한 산악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떠난 원정대였다. 사진 제공=손칠규

 

 

■손칠규, 전설이 되다

 

     그리고 이듬해 목장에 은둔했다. 하지만 소년기 때 그를 지배한 음악, 그리고 청년기를 매혹한 산과는 이별하지 않았다. 2004년 5월. 산악계 후배 박무택이 히말라야 초모랑마에서 내려오다가 죽었다. 백준호, 장민과 함께였다. 박무택은 원정 며칠 전 손칠규를 찾아와 조언을 구하다가 "형님, 나도 말 타게 해주이소"하며 말꼬리를 붙잡고 뛰어다니던 후배였다. 2005년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휴먼원정대'가 히말라야로 떠났다. 산악계에서 손칠규를 원정대장으로 추대했다. 등반대장은 엄홍길이 맡았다. 설산에서 손칠규는 통곡했다. "준호야, 민아, 무택아! 집에 가자!" 산을 버리지 못하는, 아니 평생을 산과 함께 한 사내의 진한 울음이었다.

 

     지금도 그는 수시로 전국 산을 산보한다. 아내는 후배들에게 소주 한 박스와 삼겹살 내는 걸 잊지 않는다. 지난달에는 전직 대통령 노무현이 예고도 없이 찾아와 그에게 세상을 묻고 갔다. 또 이름만 대면 삼척 동자도 아는 젊은 기업가가 그를 찾아와 산행을 청하고 있다. 그가 말했다. "산을 어떻게 버리나. 산은 저기 있을 뿐인데."

자칭 음악 천재, 자칭 독창적인 산꾼이었던 손칠규가 환갑을 바라보며 회고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껍질을 꽁꽁 싸맨 양파였다. 내 것만 고집하고 내가 최고인 줄 알고 살았다. 지금은 껍질을 한풀한풀 벗기며 산다. 다 벗기면 그 속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게 나였다. 산을 정복해? 어떻게! 소 머리에 파리가 앉았다고 소를 정복했나."

이 가을, 평창에 가면 은둔한 사내 하나를 만날 수 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데 그 사내는 자기를 조금씩 비우며 우화(羽化)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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