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장의 사진 - 토왕빙폭 초등 : 크로니산악회 박영배 회장 / 월간 산 기사

2014. 2. 23. 12:29산 이야기

 

 

 

 

 

      

[새연재ㅣ이 한 장의 사진] "열정으로 빙폭 녹이던 뜨거운 청춘이 그립다!"
 
 

 

1977년 토왕성 빙폭 초등한 크로니산악회 등반대 김태성 회장이 전하는 초등 당시 분위기와 장비 이야기

“토왕성 빙폭은 겨울만 되면 고향처럼 생각나는 곳입니다. 혈기왕성하던 20대 청춘들이 모여서 초등을 꿈꾸며 매일 밤 추위에 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등반의 어려움과 경쟁, 배고픔 때문에 힘도 들었지만 열정만큼은 대단했던 시절이었죠.”

설악산 토왕성폭포는 등반길이 300m가 넘는 남한 최대 규모의 빙폭으로, 우리나라 클라이머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도전의 대상이었다. 여러 팀의 시도에도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던 이 빙폭은 1977년 1월 12일 크로니산악회가 초등한다. 당시 첫 등정을 노리며 여러 팀이 경쟁을 벌이던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

당시 등반대의 리더를 맡았던 현 크로니산악회 김태성(61) 회장은 토왕 빙폭 앞에서 찍은 대원들의 단체사진을 보며 “옷차림이며 얼굴이 멀쩡한 것을 보니 등반 전에 찍은 사진”이라면서 “2주 후에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며 웃었다. 이 기념사진에 나온 크로니산악회 대원들은 모두 7명으로, 오른쪽부터 박영배(67) 대장, 임상섭(58), 남순철(63), 이건호(60), 이창재(62), 고 송병민(59), 김태성 대원 순이다. 왼쪽 끝에 서 있는 사람은 강원대산악부의 정계조(59)씨로 베이스캠프를 방문했다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1977년 토왕성 빙폭 초등한 크로니산악회 등반대

    “이 사진은 당시 대원으로 참가했던 고 서정학씨가 찍었습니다. 지금 보니 토왕빙폭 초등을 꿈꾸던 비장한 각오가 사람들 표정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네요. 다들 대학 다니던 혈기왕성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군대를 막 제대하고 복학을 앞두고 있던 겨울이었습니다. 박영배 선배가 후배들을 독려해 팀을 꾸렸습니다.”

김 회장은 당시 상단을 등반하며 머리에 커다란 얼음이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헬멧이 깨지며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사진을 보면 오른쪽 아래쪽에 놓여 있는 하얀 헬멧이 사고 때 쓰고 있던 겁니다. 당시 빙벽등반은 요즘과 달리 스텝커팅으로 발 자리를 만들면서 올라갔습니다. 그러니 낙빙이 많을 수밖에요. 그래도 그렇게 큰 얼음이 떨어질지는 몰랐어요. 선등하던 영배 형 확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얼음이 쏟아져 내렸어요. 머리에 충격이 있어서 헬멧을 만져 보니 5cm 정도 되는 구멍이 뚫려 있더군요. 그 다음부터는 무서워서 배낭을 머리에 이고 빌레이를 봤습니다.”

위험한 순간도 여러 번 있었지만 등반대가 큰 사고 없이 초등이 가능했던 데는 장비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첨단 장비였던 바르트호그를 사용한 것이 결정적이다. 단단한 청빙에서 설치하기 쉽고 회수 방법도 비교적 단순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산악인에게 구한 바르트호그 한 개를 원본으로 스무 개 정도를 모래내금강 공장에서 맞췄습니다. 1년 전 하단을 올랐던 경험 덕분에 장비를 효율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어요. 요즘 장비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사진에 나온 장비들을 보면 당시의 등반을 상상할 수 있다. 눈에 꽂혀 있는 나무 손잡이 피켈 한 자루와 아이스해머가 등반 작업을 위한 주요 장비였다. 크램폰은 당시 최신형이던 일제 타니 제품으로 프런트포인팅이 가능한 제품. 착용한 벨트는 상단이거나 전신용이 주를 이루고 있고, 인공등반을 위해 무거운 줄사다리가 필수품이었다. 얼면 밀리는 나일론 줄 대신 군용자일을 사용해 등강기 속도를 올린 것도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당시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래도 집안에 여유가 있어서 장비 구입에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창재 대원이 등산장비 봉제업에 몸담고 있어서 돔형 던롭 텐트를 직접 만들어 사용해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초라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다른 팀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좋은 장비들이었어요.”

    최신 장비의 도움을 받았지만 역시 토왕 빙폭 초등의 가장 큰 공신은 대원들의 의지였다. 박영배 대장이 앞에서 가장 열심히 벽을 올랐고, 막내 임상섭 대원과 고 송병민 대원이 특유의 뚝심으로 개척의 첨병 역할을 했다. 산악회 회원들이 격려차 방문해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어요. 온도계의 눈금이 한낮에도 영하 10℃를 넘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추위 속에 하루 세끼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하던 막내 대원들이 고생이 많았죠. 지금은 모두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세월이 지나며 이제 사진 속의 젊은이들은 백발의 노병이 됐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산에 대한 열정은 뜨겁다. 지금도 등반대에 참가했던 일부 대원들은 매주 바위와 빙벽을 오르며 녹슬지 않은 실력을 뽐내고 있다. 그 사이 몇 사람은 세상을 떠나 이제 얼굴을 볼 수 없게 됐다. 시간이 지나며 사람은 변한다. 하지만 사진은 기록으로 남아 결국 영원한 전설이 된다.


 

                                                                                                    <월간 산>誌 기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