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봉 크로니길 / 한경닷컴 기사
2014. 2. 23. 12:44ㆍ산 이야기
한국의 바윗길을 가다(18) 인수봉 크로니길 / 바위와 열정 그리고 우정이 남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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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경제 입력 2011.05.24 18:50
[김성률 기자] 친구 또는 벗을 의미하는 '크로니(crony)길'은 인수봉 남동면 건양길의 오른쪽, 생공사길의 왼쪽에 위치한 길이다. 크로니길을 등반하다보면 동남면 대침니길과 건양길, 거봉길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굽이굽이 바윗길이 길다는 의미도 되겠다.
크로니길은 크로니산악회에 의해서 개척되었다. 크로니산악회는 1970년 3월부터 2개월에 걸쳐서 크로니길을 열었다. 펜듈럼이라는 등반방식을 인수봉에 처음으로 도입했으며 개척 당시만 해도 수준급의 클라이머가 아니면 붙을 수 없는 난이도가 높은 코스였다.
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 제작한 인수봉 등반 루트 안내판을 보면 크로니길을 아홉 마디로 구분해놓았다. 등반거리는 모두 237미터에 최고난이도는 펜듈럼구간인 다섯째 마디의 5.10a.
둘째 마디는 거리 29미터, 난이도 5.7의 크게 어렵지 않은 슬랩구간이다. 셋째 마디는 거리 25미터에 슬랩과 밴드로 이루어진 난이도 5.8의 구간. 셋째 마디가 끝나면 약간의 긴장이 되는 넷째 마디다. 바로 크로니길의 크럭스인 난이도 5.10a의 펜듈럼 구간인 것. 약간 까다로운 홀드를 밟고 일어서서 곧바로 위로 올라가면 최근에는 개폐식으로 바뀐 링이 설치되어 있다. 이 링에 자일을 통과시키고 다시 아래로 클라이밍 다운을 한다. 그 다음 동판이 보이는 곳에서 왼쪽으로 뛰어넘어서 오르는 펜듈럼 구간이다.
크로니길의 개척자들은 어쩌면 이렇게 멋진 생각을 해냈을까? 세월을 뛰어넘은 지금도 바위꾼들의 크로니길에 대한 인기가 높은 것은 이렇게 시대를 앞서간 등반철학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섯째 마디는 거리 21미터, 난이도 5.9의 슬랩과 크랙으로 이루어진 구간이다. 출발이 다소 힘들지만 바늘땀을 뜨듯이 실크랙의 홀드를 찾아 하나씩 잡고 차분히 오르다보면 어느새 여섯째 마디. 거리 26미터, 난이도 5.8의 크랙구간이다. 일곱째 마디는 슬랩구간 다음에 크랙구간이 섞여있는 거리 26미터, 난이도 5.8의 구간이다. 일곱째 마디를 마치면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오른쪽으로 가면 여정길, 왼쪽으로 가면 동양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여덟째 마디는 거리 24미터 난이도 5.7의 크랙구간이다. 이 구간을 마치면 왼쪽의 하늘길과 연결된다. 마지막 아홉째 마디는 난이도 5.8, 거리 약 50미터에 이르는 크랙구간이다.
기자는 크로니산악회(http://cafe.naver.com/alpinecrony) 김홍경 회장의 허락을 받아 개척 당시의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다소 길기는 하지만 크로니길 개척에 참여한 박영배(북한산등산학교 교장) 회원의 글로 크로니길 개척사를 다시 한 번 새겨본다.
박영배 교장은 1973년 인수봉 크로니길 개척에 참여했고 1977년에 설악산 토왕폭 초등, 1978년에는 설악산 적벽 초등. 제주도 일출봉 동벽을 초등했으며 1979, 1980, 1981년에 스위스 아이거 북벽을 등반했다. 1979년에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등산학교를 수료하고 1982년에 알프스 그랑드조라스 북벽을 등반했다. 1985, 1986, 1988, 1990년도에는 네팔 동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장을 지낸 산악인이다.
크로니는 현재에도 등반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전통의 산악회이다. 그런데 크로니의 원래 이름은 에델바이스였다고 한다. 다시 박영배 회원의 글을 읽어 보자.
1969년 3월 중순경 홍진만, 하정문, 유동옥, 박영배, 김성국, 방만익, 장병채, 정범진 등 8명의 창립멤버는 초대 회장에 홍진만, 초대리더에 유동옥을 선출했다. 매주 일요일에는 산행을 그리고 매주 목요일에는 종로5가 청자 다방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다.
그해 3월 마지막 일요일, 인수봉에서 창립 첫 산행을 가졌다. 등반지는 인수봉 기존A코스. 일행의 앞에는 다른 팀의 3명이 등반을 하고 있었는데 무척 느리게 오르고 있었다. 일행은 그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인수봉 정상까지 올랐다.
하강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들도 나타났다. 당시 인수봉 하강 코스는 구하강코스와 고령 산악회에서 설치한 오버행 하강 코스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행이 하강을 모두 마치고 자일을 사리고 있을 때 그팀 중 한명이 오버행에서 하강중 줄을 놓쳐 밑으로 떨어지는 추락사고를 당했다.
그해에 눈이 많이 내려서 추락한 사람은 사망하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 사람의 이름이 이병룡이었다. 그들은 일행에게 구조를 부탁했다. 당시에는 구조대도 없었고 119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일행은 구조 부탁을 승낙하면서 백운산장으로 내려가서 군용 탄카를 가져다가 그를 자일로 묶고 어두운 밤에도 불구하고 우이동까지 구조작업을 했다. 우이동에 내려오니 새벽2시였다. 그들 일행은 정명환, 이병룡, 박헌영이었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이들도 같은 산악회 회원이 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에델바이스 산악회라는 이름은 이미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산악회 이름을 '친구'란 의미의 크로니 산악회로 바꾸었다.
1969년 3월에 창립된 크로니산악회는 1970년 3월30일 크로니길을 개척했다. 크로니의 등반열정은 강하고도 막강했다. 크로니길에서 그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70년 10월24일부터 11월14일까지 인수봉설교벽을 개척했으며 1970년 1년 동안에는 서울근교 암벽 113개 코스에서 등반을 했고 암벽등급자료를 완성했다. 2011년인 지금에도 당일 산악회에서는 하기 힘든 열정과 노력이 아닐 수 없다.
1978년 3월23일부터 5월1일 사이에는 유동옥 회원의 안나푸르나 4봉(7,525m) 등정의 쾌거가 전해져왔다. 그러나 당시 최고의 기량을 가졌던 유동옥 회원은 동상에 걸려 발가락 7개를 잘라내야만 하는 안타까움도 겪었다.
1978년 8월, 당시에는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설악산 적벽을 초등해낸다.
1986년 11월20일부터 다음해 2월13일까지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1차 원정이 이루어졌고 1990년도에는 2차 등반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 인수봉을 등반하는 인구라 해보야 고작 50명 남짓일 당시 단일 산악회로 출발하여 4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렇게 큰 기록을 남긴 역사를 가진 산악회는 분명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친구와 바위와 우정이 좋아 거친 바위에 올랐던 크로니 산악회. 크로니산악회는 크로니를 대표하는 바윗길 크로니길에 큰 자부심과 애정을 갖고 있다. 올해 5월달 들어서도 보수작업을 했다. 이 땅에 바위와 클라이밍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바위와 열정 그리고 우정이 남긴 크로니길은 바윗꾼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길 중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사진제공 : 크로니산악회)
크로니길은 크로니산악회에 의해서 개척되었다. 크로니산악회는 1970년 3월부터 2개월에 걸쳐서 크로니길을 열었다. 펜듈럼이라는 등반방식을 인수봉에 처음으로 도입했으며 개척 당시만 해도 수준급의 클라이머가 아니면 붙을 수 없는 난이도가 높은 코스였다.
크로니길은 인수봉에서 가장 긴 코스였다. 적어도 구조대길이 새로 열리기 전에는… 237미터의 긴 바윗길 크로니길은 2010년 7월 구조대길이 열리면서 그 타이틀을 구조대길로 넘겨야만 했다. 그러나 길다고만 해서 좋은 길일까? 크로니길은 거리가 길뿐만 아니라 역사와 친구와 우정이 가득 담겨있는 인수의 아이돌에 다름 아니다.
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 제작한 인수봉 등반 루트 안내판을 보면 크로니길을 아홉 마디로 구분해놓았다. 등반거리는 모두 237미터에 최고난이도는 펜듈럼구간인 다섯째 마디의 5.10a.
첫째 마디는 크랙과 밴드로 이루어진 거리 26미터의 난이도 5.7구간의 구간이다. 첫째 마디부터 힘을 빼는 바윗길이 적지 않은데 그에 비하자면 크로니길의 출발은 마음이 편하다, 친구와도 같은 길이라 그럴까? 크랙을 타고 올라가 밴드를 만나면 밴드를 따라 왼쪽으로 이동하면 된다. 바윗길은 'ㄱ'자 처럼 구성되어 있다.
둘째 마디는 거리 29미터, 난이도 5.7의 크게 어렵지 않은 슬랩구간이다. 셋째 마디는 거리 25미터에 슬랩과 밴드로 이루어진 난이도 5.8의 구간. 셋째 마디가 끝나면 약간의 긴장이 되는 넷째 마디다. 바로 크로니길의 크럭스인 난이도 5.10a의 펜듈럼 구간인 것. 약간 까다로운 홀드를 밟고 일어서서 곧바로 위로 올라가면 최근에는 개폐식으로 바뀐 링이 설치되어 있다. 이 링에 자일을 통과시키고 다시 아래로 클라이밍 다운을 한다. 그 다음 동판이 보이는 곳에서 왼쪽으로 뛰어넘어서 오르는 펜듈럼 구간이다.
크로니길의 개척자들은 어쩌면 이렇게 멋진 생각을 해냈을까? 세월을 뛰어넘은 지금도 바위꾼들의 크로니길에 대한 인기가 높은 것은 이렇게 시대를 앞서간 등반철학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섯째 마디는 거리 21미터, 난이도 5.9의 슬랩과 크랙으로 이루어진 구간이다. 출발이 다소 힘들지만 바늘땀을 뜨듯이 실크랙의 홀드를 찾아 하나씩 잡고 차분히 오르다보면 어느새 여섯째 마디. 거리 26미터, 난이도 5.8의 크랙구간이다. 일곱째 마디는 슬랩구간 다음에 크랙구간이 섞여있는 거리 26미터, 난이도 5.8의 구간이다. 일곱째 마디를 마치면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오른쪽으로 가면 여정길, 왼쪽으로 가면 동양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여덟째 마디는 거리 24미터 난이도 5.7의 크랙구간이다. 이 구간을 마치면 왼쪽의 하늘길과 연결된다. 마지막 아홉째 마디는 난이도 5.8, 거리 약 50미터에 이르는 크랙구간이다.
크로니길 등반을 마치니 개척자들이 과연 이 길을 어떻게 냈을까 무척 궁금해졌다. 또 크로니라는 이름은 어떤 동기로 만들어진 이름일까?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기자는 크로니산악회(http://cafe.naver.com/alpinecrony) 김홍경 회장의 허락을 받아 개척 당시의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다소 길기는 하지만 크로니길 개척에 참여한 박영배(북한산등산학교 교장) 회원의 글로 크로니길 개척사를 다시 한 번 새겨본다.
박영배 교장은 1973년 인수봉 크로니길 개척에 참여했고 1977년에 설악산 토왕폭 초등, 1978년에는 설악산 적벽 초등. 제주도 일출봉 동벽을 초등했으며 1979, 1980, 1981년에 스위스 아이거 북벽을 등반했다. 1979년에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등산학교를 수료하고 1982년에 알프스 그랑드조라스 북벽을 등반했다. 1985, 1986, 1988, 1990년도에는 네팔 동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장을 지낸 산악인이다.
* * *1969년 초, 8명의 창립멤버인 초대회장 홍진만, 하정문, 유동옥, 박영배, 김성국, 방만익, 정범진, 장병채 8명은 당시 깊은 우정과 사랑, 그리고 겁 없이 바위에 열정을 가졌다.1970년 5월, 크로니의 전사들은 약15일간의 개척등반을 끝내고, 김연태 대원과 고대 인쇄소에 가서 등사기로 밀어 보고서를 만들었다. 동숭동 카톨릭 학생회관에서 여러 산악회 회장과 리더를 초청하여 보고회를 가졌다. 초청산악회는 검악산악회장, 요델의 김방원 형, 인수산장의 이경구 형 그리고 여러 산악회의 리더들이 초청되었다. 개척등반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원명단 리더 : 박영배대원 : 김성국, 방만익, 김연태, 이승용, 금창연, 김정기, 김원(김항원) 항원이는 당시 크로니 회원이 아니었기에 김원이라고 기재해 달라고 부탁해서 김원이라고 썼다. 개척 당시에는 서울고 산악부의 박찬영, 박기설도 잠시 합류했다.
1969년 말 하정문, 유동옥이 군 입대 할 무렵에 이병용, 정명환, 이순화, 박헌영, 오국성, 김연태, 김인국, 박정화, 유인화, 김수경 한국은행팀 이현지와 여러 명이 크로니의 한 식구가 되었다.1970년 초에는 건대산악부 박원병으로 부터 김항원, 김연호를 소개 받았다. 정명환의 사촌동생인 이승용과 금창연, 김정기도 그 당시 알게 되었다. 나는 김항원과 개인적으로 같이 등반을 하면서 급속히 친밀해져 가고 있었다. 나는 개척등반을 제의 하였고, 그는 나에게 방원이 형이 제작한 록 함마를 선물하면서 중간에 합류의사를 밝혔다.나와 김성국, 방만익 3명은 홍진관 회장에서 개척보고를 하고 크로니의 모든 장비를 동원하여 홍 회장에게 자동차 볼트를 지원받았다.개척등반 장비는 군용자 40M 4동, 군용 US 스틸카라비나 30개, 점핑세트 4조, 레다 3조, 개인 함마, 봉봉하켄, 앵글하켄, 리스하겐 다수, 군용버너, 군용코펠 등 이 모든 장비가 지금은 볼 수 없는 장비였다.당시 인수봉의 코스는 기존 A.B코스, 취나드 A.B코스, 동양길, 비둘기길, 하켄 B코스 정도였다.
(중략)등반 넷째 날지금의 벙어리 크랙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볼트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정석 개척등반의 규칙은 자연적인 스랩, 크랙에 하켄을 설치하면서 등반하는 것이었다. 무차별 볼트작업은 생각하지 못했고 의미없는 등반방식이라 생각하였다. 전진용 볼트 5-6개 이상이 소요된다면 개척등반을 포기해야 된다.벙어리 크랙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전진용 볼트작업을 하였다. 5개의 전진용 볼트를 설치하고 마지막 볼트에서 7미터 정도 내려와 펜듈럼으로 침니를 건너뛰어 벙어리 크랙밑에 진입하였다. 확보용 볼트를 설치하고 벙어리 크랙을 보니 풀과 이끼가 가득 끼어있었다.풀과 이끼를 제거하지 않으면 오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베이스캠프로 철수하여 긴 회의에 들어갔다. 풀과 이끼 제거 작업을 어떤 방식으로 제거하느냐… 기존 B코스로 올라가 벙어리 크랙 위에 확보용 볼트를 설치했다. 벙어리 크랙으로 하강하여 긴 나무와 해머로 풀과 이끼의 제거 작업에 들어갔다. 제거하고 보니 벙어리크랙으로 형성 되어있음을 알게 되었다. 풀과 이끼 제거작업에 하루가 소요되었다.다음 날 벙어리 크랙에 흙이 많이 있었는데 아침부터 봄비가 내리고 있어 백운산장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즈음 김항원, 김연태, 이승용, 금창연, 김정기 대원이 합류하여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비로 인해 이틀간 휴식을 취했다.
등반 다섯째 날벙어리 크랙밑에 확보용 볼트에서 전진용 볼트를 하나 설치하고 크랙출입에 작은 봉봉하켄을 설치하고 레다에 올라서니 벙어리 크랙에 하켄을 설치할 수 없는 크랙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더이상 전진할 수 없어 베이스 캠프로 철수하였다.그날 밤 벙어리 크랙을 어떻게 오를 수 있을까 회의에 들어갔다. 결론은 우드하켄을 제작 설치하기로 합의하고 취침. 다음 날 백운산장 영구 형님에게 사정이야기를 하고 톱과 낫을 빌려 우드하켄을 제작하였다. 여러 모양의 우드하켄을 만들어 버너에 쇠꼬챙이를 달구워 구멍을 뚫고 슬링을 끼우니 훌륭한 우드하켄이 제작되었다.(중략)등반 9일 째방만익의 선등으로 오르는데 긴 크랙에 이끼가 조금 끼어있어 등반에 어려움이 있었다. 중간에 작은 소나무도 있었고, 앵글과 봉봉하켄이 5개 정도 소요되었고, 긴 크랙을 무사히 올라 정상에 섰다.
박영배 회원은 "그 당시 모든 대원들이 연약한 장비와 개척등반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강한 정신력과 크로니의 진정한 우정과 사랑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크로니는 현재에도 등반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전통의 산악회이다. 그런데 크로니의 원래 이름은 에델바이스였다고 한다. 다시 박영배 회원의 글을 읽어 보자.
1969년 3월 중순경 홍진만, 하정문, 유동옥, 박영배, 김성국, 방만익, 장병채, 정범진 등 8명의 창립멤버는 초대 회장에 홍진만, 초대리더에 유동옥을 선출했다. 매주 일요일에는 산행을 그리고 매주 목요일에는 종로5가 청자 다방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다.
그해 3월 마지막 일요일, 인수봉에서 창립 첫 산행을 가졌다. 등반지는 인수봉 기존A코스. 일행의 앞에는 다른 팀의 3명이 등반을 하고 있었는데 무척 느리게 오르고 있었다. 일행은 그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인수봉 정상까지 올랐다.
하강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들도 나타났다. 당시 인수봉 하강 코스는 구하강코스와 고령 산악회에서 설치한 오버행 하강 코스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행이 하강을 모두 마치고 자일을 사리고 있을 때 그팀 중 한명이 오버행에서 하강중 줄을 놓쳐 밑으로 떨어지는 추락사고를 당했다.
그해에 눈이 많이 내려서 추락한 사람은 사망하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 사람의 이름이 이병룡이었다. 그들은 일행에게 구조를 부탁했다. 당시에는 구조대도 없었고 119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일행은 구조 부탁을 승낙하면서 백운산장으로 내려가서 군용 탄카를 가져다가 그를 자일로 묶고 어두운 밤에도 불구하고 우이동까지 구조작업을 했다. 우이동에 내려오니 새벽2시였다. 그들 일행은 정명환, 이병룡, 박헌영이었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이들도 같은 산악회 회원이 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에델바이스 산악회라는 이름은 이미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산악회 이름을 '친구'란 의미의 크로니 산악회로 바꾸었다.
1969년 3월에 창립된 크로니산악회는 1970년 3월30일 크로니길을 개척했다. 크로니의 등반열정은 강하고도 막강했다. 크로니길에서 그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70년 10월24일부터 11월14일까지 인수봉설교벽을 개척했으며 1970년 1년 동안에는 서울근교 암벽 113개 코스에서 등반을 했고 암벽등급자료를 완성했다. 2011년인 지금에도 당일 산악회에서는 하기 힘든 열정과 노력이 아닐 수 없다.
1975년 10월8일부터 4일 동안에는 설악산 남벽을 초등했고 1976년 12월29일부터 다음해 1월14일까지는 드디어 설악산 토왕폭 빙벽을 초등하는 쾌거를 이루고야 만다.
1978년 3월23일부터 5월1일 사이에는 유동옥 회원의 안나푸르나 4봉(7,525m) 등정의 쾌거가 전해져왔다. 그러나 당시 최고의 기량을 가졌던 유동옥 회원은 동상에 걸려 발가락 7개를 잘라내야만 하는 안타까움도 겪었다.
1978년 8월, 당시에는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설악산 적벽을 초등해낸다.
1986년 11월20일부터 다음해 2월13일까지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1차 원정이 이루어졌고 1990년도에는 2차 등반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 인수봉을 등반하는 인구라 해보야 고작 50명 남짓일 당시 단일 산악회로 출발하여 4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렇게 큰 기록을 남긴 역사를 가진 산악회는 분명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친구와 바위와 우정이 좋아 거친 바위에 올랐던 크로니 산악회. 크로니산악회는 크로니를 대표하는 바윗길 크로니길에 큰 자부심과 애정을 갖고 있다. 올해 5월달 들어서도 보수작업을 했다. 이 땅에 바위와 클라이밍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바위와 열정 그리고 우정이 남긴 크로니길은 바윗꾼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길 중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사진제공 : 크로니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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