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의 刊本 <雅正遺稿> 제8권 부록 < 先考府君의 遺事> / 한국고전종합DB에서(번역원 자료)
2014. 2. 28. 12:27ㆍ야생화, 식물 & 버섯 이야기
간본 아정유고 제8권 | 원문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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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附錄) |
선고부군(先考府君)의 유사(遺事) |
선군(先君)께서 처음 탄생하시던 날 저녁, 왕고(王考)의 꿈에 어떤 노인이 말하기를 ‘반드시 특이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종대(鍾大) 두 글자로 이름을 짓게 하라.’ 하였다.
3세 때에 이웃에 사는 기생이 돈 한 닢을 주니 곧 더럽다고 땅에 던졌는데, 잘못 던져 신발에 떨어지자 수건으로 그 신발을 닦아냈다.
어렸을 때 집안 사람들이, 나가 노는 곳을 잃어버렸다가 저녁때야 청벽(廳壁) 뒤 풀더미 속에서 찾았는데, 이는 대개 벽에 바른 옛글을 보기에 몰두해서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던 것이니, 천성적으로 학문을 좋아하였던 것이다.
겨우 6~7세에 선배가 정(井) 자를 글제로 내주며 시(詩)를 지으라 하자, 거침없이 ‘땅의 두터움을 믿는 사람이 우물을 판다. [信厚人鏧井]’고 대답하니, 선배들이 기특히 여기며 장래를 기대하였다.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는 잠시도 수질(首絰)과 띠를 풀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슬피 울부짖으므로 이웃 사람들은 귀를 막기까지 하였다.
선군(先君)의 중부(仲父)가 일찍 별세하셨으므로 중모(仲母)와 한집에 살면서 친어머니처럼 섬겼다. 중모의 상을 당하자 예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시고,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의 기구를 모두 여기저기서 빌려 준비하였다. 집에는 노복들이 없어 친히 저자에 가 면포(綿布)를 사다가 예대로 염장(殮葬)하였는데, 몹시 추운 때라 손과 얼굴이 다 얼어터졌다.
왕고(王考)의 연세는 더해가고 가세는 점점 가난해졌다. 봉양할 음식이 몹시 군색한 것을 선군은 스스로 안타깝게 생각하여 입에 맞는 음식이 있으면 왕고에게 드리기 전에는 차마 들지 못하였다. 왕고의 생신(生辰)을 당할 때마다 늘 음식을 장만하고 손님들을 맞이하여 극히 즐겁게 놀다가 헤어지게 하였다. 일찍이 한 해도 거르는 일이 없으므로 손님들 역시 그날을 기억하여 청하지 않아도 찾아오곤 하였다.
평생에 산업(産業)을 생각하지 않았다. 빙벽(氷檗) 같은 지조라 기한(飢寒) 때문에 그 본성을 변하지 않았으며, 좌와기거(坐臥起居)에도 일정한 법도가 있어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으며, 항상 단정히 꿇어앉아 태도를 흐트리지 않았다. 심부름을 시켜도 비복(婢僕)을 불러 시키는 일이 드물었으며 문밖으로 기침소리도 내지 않았으므로 집안 사람들은 간혹 외출하였는가 의심하였다. 책이나 책상 그리고 벼루도 방정하게 정리하여 그 위치가 어지럽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과 온종일 같이 있어도 장중하되 잘난 체하지 않았으며, 서로 동화(同和)되어도 친압하지 않았다. 간혹 하는 익살스러운 해학도 인정에 꼭 맞게 하였으며, 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 담소가 무르익어도 그 장중한 태도를 외인에게 엄격히 보여, 외인들은 감히 선군에게 분수없는 농담을 하지 못하였다. 만약 남의 옳지 못한 것을 보면 매우 엄격하게 문책하여 격려하되, 그 사람이 고치면 곧 그의 과실을 마음속에 두지 않았다.
남과 사귀되 8~9세 위만 되면 반드시 절하며, 나이가 비슷하더라도 먼저 평교(平交)를 허락하지 않으므로 오랠수록 서로 존경하였다. 친구들의 초대를 받을 때에는 언제나 ‘사세를 보아서 가겠노라.’ 대답하니, 이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겨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음식을 갖추어 놓고 초청하는 자에게는 가지 않았으나 술을 갖춘 곳에는 갔으며, 남의 초대를 받아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다가도 봉화(烽火)가 보이면 즉시 집으로 돌아오곤 하여, 일찍이 집을 떠나 밖에서 자는 예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남에게 수학하지 않고 왕고(王考)께서 먼저 《십구사략(十九史略)》을 가르치셨는데, 태고로부터의 주석(注釋)을 상고하여 그 긴요한 말을 초(鈔)하였고, 의심나는 것을 물어 미처 이해되지 않으면 반드시 조용한 곳에 앉아 깊이 생각해 궁구하여 그 귀추를 안 다음에 비로소 기뻐하며 웃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대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하기에 끼니까지 잊었다. 간혹 그날 배울 과목을 배우지 못하면 어른의 옷자락을 잡고 울며 따라다녔으며, 왕고(王考)께서 출타(出他) 중에 글 뜻이 통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책을 끼고 남에게 업혀 이웃 장로(長老)에게 나아가서 질문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사략》한 권을 다 읽기 전에 익히 강독한 것처럼 문리가 통창(通暢)하였다. 글을 읽을 적에는 해시계를 벽에다 5시간이 되도록 만들어 놓고, 때가 되면 여러 아이들과 놀다가도 그 노리개를 다 버리고 어른이 경계하기 전에 들어와 1시간에 10번, 하루 50번 읽는 것을 일과(日課)로 삼았다.
한 권의 책을 얻으면 반드시 보고 또 초(鈔)하여 잠시도 책을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섭렵한 책이 수만 권이 넘고 초한 책도 거의 수백 권이 된다. 여행을 할 때도 반드시 수중에 책을 휴대하고, 심지어는 종이ㆍ벼루ㆍ붓ㆍ먹까지 싸가지고 다녔다. 주막에서나 배[舟]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으며, 기이한 말이나 이상한 소리를 들으면 듣는 즉시 기록하였다. 그리고 초목(草木)ㆍ금수(禽獸)ㆍ충어(蟲魚)의 학에 밝아 전부(田父)나 야로(野老)를 만나게 되면 그 방언으로 부르는 명칭을 물은 다음, 《본초(本草)》를 상고하여 언문(諺文)으로 번역하곤 하였다.
윤 단성 가기(尹丹城可基 가기는 단성의 원을 지냈다)가 늘 말하기를 ‘공의 20살 때에 장흥방(長興坊)에 집이 있었는데, 하루는 밤 늦게 이웃에서 돌아오니 한 여자가 공(公)의 침구에서 자고 있었다. 공이 책망해 내쫓았는데, 이는 바로 여염집 미녀(美女)로서 공의 집 행랑채에 피신해 와 있던 자였다.’ 하였으며, 윤장(尹丈)은 이웃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 늘 선군의 여색 멀리하는 것에 대해 탄복하기를 ‘여색이 근접할 때면 문득 그 친구의 그 당시 일이 생각나서 또한 감히 함부로 부정한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친구의 도움에 힘을 얻게 된 것이 이와 같다.’ 하였다.
선군(先君)의 족질(族姪) 광석(光錫)은 그 호가 심계(心溪)인데, 젊어서부터 선군과 종유하였다. 그는 기절한 용기를 믿고 갑자기 학문을 버리려 하므로 선군이 편지를 보내 말리는 한편, 성리학(性理學)을 권하여 드디어 크게 깨닫게 되었다. 직재(直齋) 김종후(金鍾厚) 선생에게 사사하여 학업이 아주 독실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글을 올려 무도(武道)를 억제하고 학문을 하게 한 것을 사례하며 선군에게 그 공을 돌리므로 선군은 이에 자처하지 않고 또한 편지를 보내어 사례하였다.
일찍이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과 교분이 두터웠는데, 담헌이 호남(湖南)의 지방관으로 나가게 되자, 선군의 가난함을 민망히 여겨 몹시 간절하게 불렀는데, 선군이 사양하기를 ‘공문(公門)에 기식하는 것이 어찌 내 집에 자유로이 있는 것만 하랴.’ 하고 끝내 응하지 않았다.
유 가평 득공(柳加平得恭 득공은 가평의 원을 지냈다)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중추(中秋) 어느 날 저녁 때 청장방(靑莊方)을 지나가는데,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다가 나를 보고는 반겨하였다. 얼마 동안 담화하다가 그 문도(門徒)들에게 물으니 밥을 짓지 못한 지 벌써 이틀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 옛날의 고사(高士)도 이에 지날 수 없다.’ 하였다.
소시부터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을 읽을 적에는 사람들이 그 얼굴을 잊을 정도였으나, 해마다 화창한 봄날이 되면 문득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 먼데를 관망하고 시주(詩酒)를 즐기면서 이곳저곳 거의 날마다 탐방(探訪)을 계속하며 말하기를 ‘일년 중 가장 좋은 풍경이 모춘(暮春) 10여 일에 불과하므로 이때는 헛되이 보낼 수 없다.’ 하였으니, 그 활발하고 호매한 기상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평소 술을 즐겨 마셨는데 관직에 종사하고부터 술을 끊고 말씀하시기를 ‘마시면 과음하기 쉽고 과음하면 반드시 일을 그르친다.’ 하였다. 단것을 즐겨 꿀을 1되까지 들었으며, 흡연(吸煙)을 가장 싫어하고 하돈(河豚 복어)을 들지 않았다. 항상 하돈 먹는 사람을 경계하기를 ‘어찌 구복을 채우기 위하여 생명을 망각하랴.’ 하였다.
머리는 반드시 밤에 빗으며 말씀하시기를 ‘낮에는 일이 많다.’ 하고, 발은 반드시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씻으며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은 종에게 발을 씻기는데, 어찌 차마 나의 더러운 때로 남의 손을 더럽히랴. 어찌 그처럼 인애(仁愛)한 마음이 적으냐.’ 하였다.
진취(進取)를 도외시하고 공령문(功令文)을 짓기 좋아하지 않으며 말씀하시기를 ‘과거란 남과 맞서 경쟁하는 일이라 크게 본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니, 문을 닫고 조용히 들어앉아 옛사람들의 글을 열람하며 나의 식견을 넓히는 것만 못하다.’ 하더니, 검서(檢書)에 선임되어서는 ‘지존(至尊)께서 나에게 좋은 벼슬을 내리시며, 또 친히 응제(應製)를 고평하심으로써 특별한 칭찬을 받게 되었으니, 등과(登科)한 것과 무엇이 다르랴.’ 하고 과장(科場)에 들어가지 않았다.
자봉(自奉)이 몹시 검소하여 관직에 있을 때에도 옷 입는 것이 집에 있을 때와 다름없었다. 집이 가난하여도 일찍이 기한(飢寒) 두 글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집안 식구들 역시
그 말을 듣지 못하였다. 털끝 만한 것이라도 남에게 구하지 않았으며, 평생 동안 남에게 빈 당나귀와 말은 역력히 다 세고 있었으며, 비록 잡용(雜用)이라도 서로 바꾸지 않으며 말씀하시기를 ‘그 폐단은 종당 다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젊어서 나의 나쁜 부시[火刀]로 남의 좋은 부시와 바꾸었는데 지금 후회가 된다.’ 하였으며, 말년에는 더욱 즐기는 음식을 절감하였다. 한나절이 되도록 조반이 이르지 않아도 늦다고 말하지 않고, 밤늦게까지 촛불이 켜지지 않아도 어둡다고 말씀하지 않았다. 돈주머니 끈을 풀지 않고 뒤주 뚜껑을 열지 않은 지 여러 해나 되었다.
집에 서적이 없어서 늘 남에게 빌어 보았는데, 비록 비장(祕藏)한 책이라도 선군께서 빌려달라고 간청하면 반드시 빌려 주며 말하기를 ‘모(某)는 참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모의 눈을 거치지 않는 책이라면 어찌 책 구실을 하랴.’ 하면서, 좋은 책이 있으면 빌려달라 하기도 전에 먼저 싸서 보내 주곤 하였다. 선군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남의 서책을 빌려도 남에게 전차(轉借)하거나 파손하거나 더럽히지 않고 기한을 어기지 않으므로 남들 역시 빌려 주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였다.
책에서 충신열사(忠臣烈士)들의 사적을 보면 반드시 흥분하여 감탄하며 강개(慷慨)의 눈물을 흘렸다. 일찍이 남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명(明) 나라 백성이다.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ㆍ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ㆍ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ㆍ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연간의 명신 처사(名臣處士)를 많이 사귀는데, 눈앞에서 아첨하다가 돌아서서 눈흘기는 지금 세상보다 나은 것 같다. 참으로 슬픈 일이로다.’ 하였다.
일찍이 사신을 따라 연도(燕都)에 들어가 산천풍물(山川風物)을 구경하면서 유명한 사람들과 많이 어울려 수작하며 놀았는데, 절강(浙江) 사람 추루(秋) 반정균(潘庭筠)이 당시 서길사(庶吉士)로서 ‘청장관(靑莊館)’ 3자를 써 주므로 그것을 새겨 거실에 걸었다.
53세까지 사셨는데 머리카락 하나도 세지 않고 얼굴은 소명하며 단아하였다. 중국에 들어갔을 때 반추루가 선군의 그 빛나는 안채(眼彩)를 보고 크게 기이하게 여겨 이인(異人)의 미목(眉目)으로 지목하였다. 소시부터 글을 보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줄곧 초(鈔)하였으나 일찍이 눈이 아프거나 해서 폐지한 일은 없었다.
그 사람의 용모를 보고는 이미 성품을 판별하였으며 또 남의 심정을 잘 엿보실 줄 알았는데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유사시를 당하게 된다면 적국의 기모(機謀)를 탐지해 엿봄에도 거의 사람을 엿보는 것에 못지 않으리라.’ 하였다.
장기ㆍ바둑ㆍ주사위 따위 잡된 놀이를 베풀지 않으면서 늘 자제들에게 경계하시기를 ‘잡된 놀이는 군자가 할 일이 아니다. 너희들이 글 읽기가 싫거든 차라리 낮잠을 잘지언정 이러한 잡된 놀이로 심지를 무너뜨리고 공부를 방해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친구들의 집에 갔을 때 만약 놀이 기구를 베풀면 반드시 몇 마디 하고는 일어서므로 사람들은 그 놀이를 숨기고 혹시라도 선군께서 볼까 염려하였다.
중이나 무당 따위를 엄격히 금절시켜 가문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점이나 풍수 지리 같은 등속의 말을 믿지 않아 평생에 한 번도 술가(術家)와 관상이나 운명을 논란한 적이 없었다.
《사소절(士小節)》 3편을 저술하여 자신을 살피고 또 자제 및 부녀를 가르쳤는데 선군의 실행이 이 책에 다 실려 있다.
선군께서 선배 중에 가장 심복하는 이는 취설(醉雪) 유후(柳逅)와 현천(玄川) 원중거(元重擧)인데, 이 두 분 역시 남달리 선군을 애중하였다. 유공(柳公)이 만년에 삼호(三湖)에 살게 되었는데, 선군께서는 도보(徒步)를 꺼리지 않고 찾아가 해가 져야 돌아오곤 하였으며, 원공(元公)이 일찍이 그의 아들을 막내누이에게 정혼(定婚)시키고 윤단성(尹丹城)에게 말하기를, ‘내 자부(子婦)가 모(某)의 10분의 1만 닮는다면 내 또한 조금도 여한이 없겠다.’ 하였다.
언젠가는 윤단성ㆍ유가평(柳加平)ㆍ박 부여 제가(朴扶餘齊家)와 봉사(奉事) 서상수(徐常修)의 집에 모였는데, 우리 일가 심계(心溪)와 진사(進士) 변일휴(邊日休) 또한 함께 이르러 존덕성(尊德性)ㆍ도문학(道問學) 두 가지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심계는 도문학을 먼저로 내세우고, 변장(邊丈)은 존덕성을 먼저로 내세우면서 언쟁을 마지아니하니, 좌중은 심계를 옳다 하는 이도 있고 변장을 옳다 하는 이도 있었다. 널리 증거를 찾아 대기도 하고 잘못 해석하기도 하며 이랬다저랬다 변증하므로 선군께서 웃으면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시험삼아 통쾌하게 말하라. 내가 다 기록하리라.’ 하고 드디어 장축(長軸)을 펴놓고 여러 사람이 다투어 변론하는 말을 기록하는데, 귀로 그 말을 들으면서 손으로는 초하여 문장을 만들었는데, 계명(鷄鳴) 때가 되도록 붓을 잠시도 멈추지 않고 종이를 이어가며 연달아 써서 의젓한 성리대문자(性理大文字)를 이루었다. 선군은 남들과 함께 노닐 때도 다만 시주(詩酒)로만 소요하지는 않았다.
선군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기질이 부녀나 어린아이처럼 나약하나 항상 기거(起居)를 삼가고 음식을 조절하기에 힘썼다. 그러므로 지병이 없다.’ 하며, 늘 함양정신 이회기상(涵養精神理會氣像) 8자를 좌우(座右)에 써 두었다.
어떤 이가 선비의 본분(本分)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대략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어른에게 공경하며, 낮에 밭갈이하고 밤에 글을 읽는 것뿐이다.’ 하고, 또 일을 살핌에 무엇을 먼저 해야 되느냐고 물으니 ‘분함을 참고 욕심을 막고 음식을 절제하고 말을 삼가는 이 네 가지가 온갖 복잡한 일을 살필 수 있다.’ 하였다.
일찍이 불초(不肖)에게 훈계하시기를 ‘무릇 사람이 일용행사(日用行事)에 반드시 십분 의심이 없고 만전불패(萬全不敗)를 기한 뒤에 곧 감행하되 특별히 남과 달리할 필요도 없거니와 또한 구차하게 세속을 따를 것도 없으며, 또 사귐에 있어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은미하여 측량하기 어려우나 그 말을 듣고 그 용모를 관찰하면 선악을 거의 알 수 있다. 네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공부할 때 진실로 그들이 착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한적한 곳에 혼자 거처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불초가 일찍이 《서유기(西遊記)》ㆍ《삼국연의(三國演義)》를 보는데 선군께서 보고 크게 책망하시기를 ‘이러한 잡서(雜書)는 정사(正史)를 어지럽히고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엄한 아비가 되는 동시 좋은 스승이 되기도 하였다. 어찌 나의 자식이 나쁜 길로 들어가게 하겠는가?’ 하므로 불초가 그 훈계를 받들어 감히 다시는 연사(演史)와 패기(稗記)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간혹 선군께 지은 시문(詩文)을 보여달라고 간청하면 내보이기를 즐겨하지 않으면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사고(私稿)가 진귀한 것이 아니라서 한 번 남에게 보이면 사흘 동안 부끄럽기에 상자에 깊이 넣어 두었는데, 스스로 나오게 될 날이 있으리라.’ 하였다.
사람들이 시문(詩文)을 가지고 와 질문하고 평가해 줄 것을 간청하면 선군께서는 순순히 대답하였는데, 그 평점(評點)을 받은 자는 많이들 보장(葆藏)하였다.
어떤 이가 역대의 시(詩) 가운데서 어느 것이 가장 좋으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꿀벌이 꿀을 만들 적에는 가리는 꽃이 없다. 꿀벌이 만약 꽃을 가린다면 반드시 꿀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시를 하는 것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시를 하는 사람은 의당 여러 사람의 것을 널리 보아 거기에 재량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이 하는 시에 역대시의 격조가 각각 다 갖추어질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당(唐)ㆍ송(宋)ㆍ원(元)ㆍ명(明)에 각각 높이는 것이 있다 하는데, 이는 시를 말하는 철론(鐵論)이 아니다.’ 하였다.
본래부터 집이 가난하여 종이가 없었다. 소시부터 청판(廳板)에 자획을 익혔는데, 대여섯 쪽의 청판은 그로 인해 썩어버렸으며, 또 깎아내고 쓰곤 하여 청판이 종잇장처럼 얇아졌다. 대자(大字)는 전주(篆籒)와 같아서 안노공(顔魯公)의 가묘비(家廟碑)와 비슷하고, 세자(細字)는 승두(蠅頭)와 같았으나 사방이 방정하였다. 육서(六書)를 공부하여 비록 몹시 바쁘더라도 속자(俗字)와 위자(僞字)를 쓰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자획이 남의 눈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스스로 육서를 좋아한다 하면서 체세(體勢)만 숭상하고 자의(字義)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극히 아름답게 쓰더라도 호고(好古)하지 못함에야 어찌하랴?’ 하였다. 좌랑(佐郞) 유환덕(柳煥德)이 서법(書法)에 정밀하였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박차수(朴次修)의 그 기묘한 필법은 진실로 미칠 수가 없는데 청장(靑莊)의 그 고아한 화법이 실로 차수에게 밑돌지 않는다.’ 하였다.
산수(山水)와 송국(松菊)을 그리기 좋아하였고 더욱 지주(蜘蛛)와 황작(黃雀)을 잘 그렸다. 그러나 일삼아 종사하지 않았으므로 아는 이가 드물었다. 능호(凌壺) 이 인상(李麟祥)의 분지법(粉紙法)을 이용하였는데, 그 분지법은 쌀가루를 물에 타 거기에 종이를 축여 다듬질하여 종이 빛이 몹시 선결(鮮潔)해진 다음, 딴 종이로 난초와 댓잎사귀처럼 오려 그것을 분지(粉紙) 위에 놓고 먹이나 혹은 여러 가지 채색을 지면에 뿌려서 아롱아롱 빛나는 무늬가 그림처럼 아른거리게 하는 것이니, 그것을 탄우지(彈于紙)라 하였다. 또 밀[蠟]을 녹여 매화를 만들기 좋아하여 종이로 꽃받침을 만들고 털로 꽃술을 만들었는데, 일찍이 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을 지었다.
일찍이 글을 읽을 때 밤이면 추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므로, 《논어(論語)》 1질은 바람이 들어오는 곳에 쌓아 놓고 《한서(漢書)》를 나란히 잇대어 이불로 덮으니 친구들이 조롱하기를 ‘누가 형암(炯菴)을 가난하다 하랴? 《논어》 병풍과 《한서》 이불이 비단 장막과 비취 이불을 당할 수 있다.’고 하였다.
기물을 사용함에 특이한 생각을 많이 내었다. 왕고(王考)께서 나이 80이 가까워 기거와 보행이 불편해지자, 선군께서 공인(工人)을 시켜 의자를 만들게 하였는데, 그 제도는 열고 닫을 수 있도록 기계를 설치하여 굴신(屈伸)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고, 또 두 바퀴의 조그마한 수레를 만들었는데, 앞이 낮고 뒤가 높게 한 다음 위에는 의자를 설치하고 아래는 조그마한 함(函)을 설치하여 서책(書冊)과 금장(衾帳)을 간직할 수 있게 하였다. 한 사람이 뒤에서 밀면 하루 1백여 리를 가는데, 그 형체가 보습[犁]과 같으므로 이름을 여거(犁車)라 하였다. 멍에[轅]는 숟가락[匕] 형태의 꼬부라진 나무로 하여 비원(匕轅)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 공륜영축(廾輪迎軸)의 명칭이 있다. 대개 수레가 높으면 전복되기 쉽고 낮으면 사람이 반드시 몸을 굽히고 밀기에 힘을 쓰기가 불편하므로 숟가락의 형태로 된 멍에를 사용하였다. 앞이 낮고 뒤가 높게 하여 전복을 예방하고 미는 데 편리하며 노인을 편안하게 하였다. 다른 기물로 통기(通丌)ㆍ촉두(燭豆)가 있는데 이 모두가 선군께서 창조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선군의 문예(文藝)만을 칭찬하나 선배 중에 가장 교분이 두터운 이가 늘 감탄하기를 ‘독행(篤行)이 첫째요, 절조(節操)가 다음이요, 학식(學識)이 그 다음이요, 문예(文藝)가 맨 끝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정론이다.
책을 저술함에는 증거를 상고하여 정밀하게 변증하였다. 일찍이 곤충 초목ㆍ명물 도수(名物度數)ㆍ경제 방략(經濟方略), 그리고 금석 비판(金石碑板)에서부터 우리나라 제도와 외국 풍토에 이르기까지 세밀히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다.
12종의 책을 저술하였다. 《영처고(嬰處稿)》는 선군께서 소시에 저술한 시문(詩文)으로서 몸가짐과 행실 삼가기를 어린아이나 처자(處子)처럼 해야 한다고 말하였고 곧 그것으로 고명(稿名)을 붙인 것이요, 《청장관고(靑莊館稿)》의 청장(靑莊)은 곧 교청(鵁鶄 푸른 백로)의 별명으로서 강호(江湖)에 살면서 영위하는 것이 없고 오직 앞에 지나가는 고기만 먹기 때문에 일명 신천옹(信天翁)이라 하는데, 이를 자호(自號)로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는 곧 귀로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입으로 말한 것, 마음으로 생각한 것이요, 《사소절(士小節)》은 옛 성현들의 훈계를 끌어다가 잠경(箴警)을 만들고 요즈음 사람의 비근한 일을 엮어 관감(觀感)의 자료로 삼은 것이요, 《청비록(淸脾錄)》은 고금 명인들의 시화(詩話)를 실은 것이요, 《기년아람(紀年兒覽)》은 상고 시대서부터 시작하여 명(明)ㆍ청(淸) 및 춘추 시대 소국에 이르기까지 중화와 이적을 상세히 분별한 것이요, 《청령국지(蜻蛉國志)》는 일본(日本)의 세계(世系)ㆍ지도(地圖)ㆍ풍속(風俗)ㆍ언어(言語)ㆍ물산(物産)을 기록한 것이요, 《앙엽기(盎葉記)》는 곧 고금의 고거와 변증의 말을 기록한 것이요,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은 교남우승(嶠南郵丞)이 되었을 때 문견을 기록한 것이요, 《예기억(禮記臆)》은 《예기(禮記)》의 어려운 글자와 의심되는 뜻을 해석한 것이요, 《송사보유전(宋史補遺傳)》은 어명으로 《어정송사전(御定宋史筌)》을 편찬 교열할 적에 유민(遺民)의 열전(列傳) 및 고려(高麗)ㆍ요(遼)ㆍ금(金)ㆍ몽고(蒙古)의 전기를 보충한 것이요,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는 명(明) 나라 말년의 유민전을 편집한 것인데, 미처 산정(刪定)하지 못하였다.
병신년(1776, 영조 52)에 상의 명으로 규장각(奎章閣)을 세우고 학사(學士)를 두었다. 3년 뒤 기해년(1779, 정조 3)에 다시 검서관(檢書官) 4명을 두게 되었는데 선군께서 이 관직의 수위로 선임되었다. 상이 모든 검서들에게 명하여 규장각 팔경(奎章閣八景)에 대한 칠언근체시(七言近體詩) 8편을 짓게 하였는데 선군께서 거기에 장원을 차지하였으며, 또 등영주(登瀛州)에 대해 20운(韻)의 칠언배율(七言排律)을 짓게 하여 또다시 장원을 차지하여 상을 받았는데 모두 차등이 있었다.
친근한 반열에 출입한 지 15년 만에 그 영광과 총애를 한몸에 담았으며 상받는 것도 따라서 빈번하였다. 그러나 선군께서는 항상 감격하여 울며 겸손하고 근신함으로써 자신을 다스리며 본래의 지조를 바꾸지 않고, 메마른 옛 산택(山澤)에 의지하여 일찍이 한번도 경상(卿相)의 문하에 나아가지 아니하므로 이를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선군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의 사환(仕宦)이 모두가 국은(國恩)이다. 어찌 권문(權門)에 명함을 드려 분수 밖의 것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소시부터 독서와 저술을 좋아하였는데, 다행하게도 글을 숭상하는 세대를 만나고, 또 검서(檢書)의 직책에 있어, 늘 책을 편찬하는 일로 고관(古觀)에 비장된 책을 다 열람해 보게 되었으니, 할 일을 다 마쳤다.’ 하였다.
매양 교수(校讎)의 일을 당하면 문서가 구름과 산처럼 쌓이게 되었다. 비록 심신이 피로하여도 고달프다 하지 않으므로 동료들이 희롱하기를 ‘일이 극심해갈수록 흥취는 더욱 높아지니 괴이한 일이로다.’ 하였다.
매양 문자(文字)의 일을 당하면 선군께서는 대개 편마(編摩)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국조보감(國朝寶鑑)》ㆍ《갱장록(羹墻錄)》ㆍ《문원보불(文苑黼黻)》ㆍ《대전통편(大典通編)》의 종류다. 이 네 종목의 책에는 선군의 이름이 편집한 여러 신하들 밑에 나열되어 있다. 그 나머지도 고증하여 간행하였으나 성명이 오르지 아니한 것과 교감이 끝났으나 아직 간행되지 않은 것 또한 많다.
궐내에서 어제(御製)의 문자(文字)를 교정할 때 천안(天顔 임금의 얼굴)이 가까워서 글 읽는 소리를 나직이 하니, 상이 자주 하교하기를 ‘네 글 소리가 좋으니 음성을 높이라.’ 하였으며, 또 하교하기를 ‘너희들도 장차 늙으리라. 노쇠하기 전에 일대의 문헌(文獻)을 구성하여 고사(故事)를 천양하고 후인(後人)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선군은 이 하명을 받들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사근역(沙斤驛)에 오랜 공채(公債)가 있어 해마다 그 이식을 취하여 공비(公費)로 쓰기 위해 날마다 잔약한 백성을 들볶아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었는데, 선군께서 역승(驛丞)이 되어 상부에 알리고 그 제도를 혁파하였는데 우민(郵民)들은 지금까지 애모하고 있다. 그리고 우마(郵馬)가 유실되었을 때 우인(郵人)이 말을 바쳐 보충하는 것을 그 말이 길들지 않았다 하여 물리쳤는데, 하루는 평소 친숙한 함양(咸陽) 선비가 선군을 찾아와 ‘나에게 좋은 말 1필이 있으니 사라.’ 하기에 곧 끌어들이라 하여 보니, 바로 전일에 길들지 않았다고 물리친 말로서 화려한 고삐에 굴레만 바꾼 것이었다. 선군께서 정색하고 말씀하시기를 ‘내 듣건대 영남은 추로향(鄒魯鄕)이라 근칙(謹飭)한 선비가 많을 줄 생각하였는데 도리어 말을 가지고 사귀려 하는가?’ 하니, 그 사람은 얼굴이 붉어져 돌아갔다.
적성 현감(積城縣監)으로 있을 때 십고(十考)가 모두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청렴하면 위엄이 생기게 되고 공평하면 혜택이 미치게 된다.’ 하였다. 사람들이 간혹 봉록이 박한 것으로 선군께 말하면, 선군께서는 문득 안색을 변하면서 ‘내 일개 서생(書生)으로 성상께 친근하고 관직이 현재(縣宰)에 이르렀다. 위로는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하게 되고 아래로는 처자를 기르게 되었으니, 더 바랄 수 없는 영광이라 군은(君恩)을 찬송할 뿐이다. 어찌 감히 가난을 말할 수 있으랴?’ 하였다.
선군께서 현감으로 계실 때 상의 명을 받들어 《어정송사전(御定宋史筌)》을 편집 교정하였으니 이는 모두 40책이었다. 선군께서는 군정을 뽑고 부세를 거둘 때라도 일찍이 하루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한 쌍의 조그마한 상자를 비치하고 손수 노끈으로 묶어 놓은 다음 불초(不肖)에게 경계하기를 ‘벼슬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만약 서울에 있을 때 체직되거든 《송사전(宋史筌)》을 반드시 이 상자에 넣고 노끈으로 단단히 묶으라.’ 하시더니, 뒤에 과연 서울에 계실 때 체직되었다.
일찍이 집안 사람들에게 절용(節用)을 경계하며 말하기를 ‘《주역(周易)》에, 절제하기를 제도로 하면 재산을 손상하지 않고 백성을 해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국가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조그마한 고을임에랴?’ 하고, 월름(月廩)을 나누어 일름(日廩)을 만들어 미(米)ㆍ염(鹽)ㆍ신(薪)ㆍ채(菜)를 하루도 그 한계를 넘지 않게 하더니, 관직에서 물러날 때 털끝만큼도 범한 것이 없었고 집에 돌아오는 날에는 경핍(罄乏)하기가 전과 같았다.
고을 청사가 퇴락하고 비가 새어 거처할 수가 없었다. 도임하던 날부터 영선(營繕)에 뜻을 두고 늠봉(廩俸)을 덜어 공사에 소요되는 양식과 재목을 모아 단묘(壇廟)ㆍ당헌(唐軒)ㆍ누관(樓觀)ㆍ창름(倉廩)을 한꺼번에 수리하였다. 이때 서공 유방(徐公有防)이 경기 관찰사가 되어 순찰하다가 현재(縣齋)를 둘러보고 탄식하기를 ‘잔미한 적성에서 어떻게 이를 판출하였는가? 그대의 기국을 이처럼 잔폐한 고을에 두기는 아깝다.’ 하였다.
어떤 이가 이르기를 ‘토목(土木)이 풍부하니 어찌 옛 습관을 따라 스스로 산업을 영위하지 않으랴? 이것이 참으로 요즈음 세상의 능한 관리다.’ 하니, 선군께서 정색하며 ‘관리가 되어 사재(私財)를 영위하는 자는 나라의 적이다. 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어찌 차마 나라의 적이 될 수 있으랴.’ 하였다.
원으로 있을 때였다. 그 고을에 세미(稅米)를 훔친 자가 있었는데 곤장으로 쳐도 승복하지 않았다. 선군께서는 좌우를 물리치고 도둑을 앞으로 가까이 오라 하여 조용히 말하기를 ‘항산(恒産)이 없는 사람은 항심(恒心)조차 없는 법이다. 네가 도둑질한 것이 어찌 본심에서 그랬으랴? 네가 만약 승복하지 않으면 그 죄 응당 사형을 당할 것이다. 내 차마 너를 죽이지 못하겠노라.’ 하니, 도둑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세미 얼마를 아무 곳 아무 언덕에 묻었다.’고 말하여 그곳에 가 파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읍인들은 지금까지 그 일을 일컫는다.
현감으로 있을 때였다. 밭을 가지고 송사하여 20년 동안 판결을 보지 못하는 자가 있었는데, 선군께서 그 문권(文券)을 들이라 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도장을 찍은 언저리에 약간의 칼질한 흔적이 있었다. 이는 곧 토지 문권의 종이를 긁어 얇게 만든 다음, 거기에다 전주(田主)의 도장을 훔쳐 본떠서 붙이고 흐릿한 먹으로 본뜬 언저리를 칠하여 그 칼질한 흔적을 가리운 것으로서 사람들은 능히 이를 살필 수 없었는데, 선군께서 그 도장의 본뜬 곳을 발라내어 칼질한 흔적을 보여 주자 송사하는 자가 곧 승복하였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감히 위조 문권으로 쟁송하지 못하였다.
고을 남쪽에 청학동(靑鶴洞)이 있으니 노송(老松)과 수석(水石)으로 깊숙하여 아낄 만한 곳이었다. 옛날에 지은 정자가 다 퇴락해 없어졌으므로 선군께서 두어 간을 새로 지어 우취옹정(又醉翁亭)이란 편액을 걸어 놓고, 한가로운 날이면 손수 제작한 조그마한 수레를 타고 혼자 가서 소요하며 즐기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상께서 일찍이 제신(諸臣)에게 명하여 《여지지(輿地誌)》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선군 또한 이에 참여하였다. 이때 선군께서 현아(縣衙)에 계시면서 현지(縣志)를 수찬하되 효열(孝烈)ㆍ고적(古蹟)을 널리 찾아내어 매우 세밀하게 하여 그 자세한 것을 서국(書局)에 보내니, 서국의 여러 사람들은 이를 보고 감탄하기를 ‘우리나라 주군(州郡)이 3백 여가 되는데 《적성현지(積城縣誌)》처럼 상세한 것은 없다.’ 하였다.
갑진년(1784, 정조 8)에 상(上)이 영릉(永陵)에 거둥하여 친히 칠언절구시(七言絶句詩) 한 수를 지으시고 여러 차원(差員)에게 갱진(賡進)을 명하였는데, 선군 역시 차원으로 응제(應製)하여 파평관(坡平館)에 함께 게판(揭板)되었다.
선군의 중제(仲弟)가 또 검서(檢書)로 들어갔는데, 이때 선군이 원으로 있으면서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형제의 식록(食祿)이 너무 과만하여 외람되다. 무슨 재주로 이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겠는가? 오직 근검(勤儉) 두 글자로 너를 훈계하니, 너는 이를 명심하여 공무를 부지런히 받들고 자신을 검소하게 지키라.’ 하였다.
집에는 말[乘]도 기르지 못했거니와 말을 다루는 하인조차 없었다. 선군이 중제와 함께 아침저녁 이문원(摛文院)을 출입하면서 여노(女奴)로 하여금 모화(帽靴)를 싸 가지고 따르게 하며 항상 말하기를 ‘도보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의 본색이다. 우리는 마땅히 근력으로 성은에 보답하리라.’ 하였다.
상이 일찍이 선군 및 내구(內舅) 백공 동수(白公東脩)ㆍ박 부여 제가(朴扶餘齊家 부여의 원으로 있었다)에게 격(擊)ㆍ척(刺) 등 24기(技)의 편집을 명하고 장용영(壯勇營)에 서국(書局)을 열었는데, 매기(每技) 밑에 소해(疏解)ㆍ논단(論斷)ㆍ도보(圖譜)를 만든 다음 특별히 박장(朴丈)에게 명하여 해서로써 간행하게 하였다. 또 언해(諺解) 한 권을 만들어 영내(營內)의 장사(將士)로 하여금 강습하게 하고,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로 서명을 지었다. 책이 거의 완성되자 상께서 칭찬하기를 ‘근래 편서(編書)가 많으나 그 범례와 체제 및 조각의 자획이 이 책만한 것이 없다.’ 하고 그 판(版)에 기름을 먹여 오래 전해지도록 하였다.
상이 장용영의 춘첩(春帖)을 짓고 곧 책자에 등초하라 하였는데, 해마다 입춘(立春) 때면 선군이 지은 것을 많이 썼다고 한다.
경술년(1790, 정조 14) 여름에 호남(湖南) 여자 김은애(金銀愛)가, 음행했다고 모함한 이웃 노파의 소행을 원통하게 여겨 칼로 그 노파를 찔러 죽였고, 신해년(1791, 정조 15) 여름에 상이 도하(都下)의 여자로서 혼기가 지나 시집가지 못한 신씨(申氏)ㆍ김씨(金氏) 두 사람에게 정혼하게 하고 혼구(婚具)를 마련해 주라고 명하였는데, 상이 모두 선군을 명하여 이들에 대한 전(傳)을 짓게 하였다. 두 전이 모두 내각일력(內閣日曆)에 실려 있다.
경술년(1790, 정조 14)에 상의 명의로 용주사(龍珠寺) 전각(殿閣) 및 승방의 주련(柱聯) 16구를 지었는데, 이어 나무판에 새겨 걸도록 하였다.
상이 일찍이 선군의 문(文)이 산림(山林)의 기상이 있다고 허여하였으며 또 《성시전도(城市全圖)》에 대한 백운시(百韻詩)를 지어 올렸는데, 상께서 친히 평점하여 그 시권(詩卷)에 쓰기를 아(雅)라 하니 선군께서 말씀하시기를 ‘구중궁궐에서 내린 한 글자의 포상이 천신(賤臣)의 평생을 결단할 수 있다.’ 하고 드디어 아정(雅亭)이라 자호하였다.
궐내에서 책을 편집할 때 상이 1개의 귤(橘)을 내렸으니. 이것은 대귤(大橘)로서 숙종 때 해외로부터 들여와 탐라도(耽羅島)에 심게 하였던 것이다. 선군께서 품고 나와 왕고(王考)에게 드렸다.
선군께 두 아우가 있었는데, 중제(仲弟)는 검서(檢書), 계씨(季氏)는 장용영 지구관(壯勇營知彀官)이었다. 등석(燈夕) 이튿날 상께서 지구관에게 커다란 등(燈) 하나를 하사하여 노부(老父)에게 드리게 하였는데, 그 등은 팔모로 되어 모마다 채색 종이를 오려 꾸민 것이라, 가져다가 당중(堂中)에 거니 그 광채가 온 집에 찬란하였다. 이에 술을 장만하고 손을 맞아 임금에게 감사하고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리는 뜻을 나타내고, 곧 성 북청 대중(成北靑大中)에게 부탁하여 《어사등기(御賜燈記)》를 짓게 하였다.
일찍이 어명으로 운서(韻書)를 엮어 올렸으니 이는 《규장전운(奎章全韻)》이다. 자획은 모두 육서(六書)를 썼고, 주석은 여러 운서를 참고하였으며, 협운(叶韻)ㆍ통운(通韻) 역시 자세히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선군이 돌아가신 뒤 갑인년(1794, 정조 18) 겨울에 상께서 간행(刊行)을 명하는 동시에 중부(仲父) 및 불초 광규(光葵)로 하여금 교정하고 그 간행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판(版)은 큰 것과 작은 것 두 가지가 있다.
일찍이 운서(韻書) 편집으로 인해 입시하였을 때 상이 선군에게 이르기를 ‘근자에 약원(藥院)에서 제조한 입효제중단(立效濟衆丹)은 곧 내가 명령하여 만든 것인데, 소합원(蘇合元)에 비하면 더욱 신효하다.’ 하니, 선군께서 대답하시기를 ‘신의 아비가 연로하고 병이 많았는데, 납약(臘藥)으로 하사하신 이 약을 복용할 때마다 효과를 보아 감격의 울음을 참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상께서 특별히 5백 정을 하사하였다.
상이 각신(閣臣)으로 하여금 역대 제가(諸家)의 시(詩)를 선집하고 선군으로 그에 대한 서명을 지으라 하니, 선군께서 ‘시관(詩觀)’이라 하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고 대답하니 상이 이에 윤허하였다. 선군께서는 곧 《시관》중의 당(唐)ㆍ송(宋)ㆍ명(明)의 대 시인의 소전(小傳)을 찬술하였다.
장용영 지구관(壯勇營知彀官) 등이 선군에게 부탁하여 지은 어사기(御射記)를 상이 보고 좋아하며 누가 지은 것이냐고 묻자 모두 사실대로 대답하였는데, 어사기 중 ‘우리 태조는 타고나신 지혜와 용맹이다[粤惟我太祖天錫勇智]’라는 구절을 상이 ‘우리 성조[粤惟我聖祖]’로 개정하고 곧 근시(近侍)에게 명하기를 ‘소중한 것이니 받들어 간직하라.’ 하므로 박 부여 제가(朴扶餘齊家)가 이를 써서 판각하여 청벽에 걸었다
임자년(1792, 정조16) 가을이다. 선군의 계제(季弟)가 무과(武科)에 올랐는데 때마침 선군께서 이문원(摛文院)에 숙직하였다. 상이 선군과 신은(新恩 새로 급제한 아정의 아우를 가리킴)을 불러 상의 앞에서 마주서서 춤을 추게 하고 곧 풍악과 연수(宴需)를 내린 다음에 출직(出直)을 명하였다. 거의 한밤중이 되어 선인문(宣仁門)을 나서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사방에 모여 서서 기뻐 날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군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상께서 천신(賤臣)의 형제를 불러 춤을 추이니 더없는 영광이다.’ 하고, 또다시 중제ㆍ계제와 함께 어버이 곁에 춤을 추어 한껏 즐겁게 해드렸다.
일찍이 공무에서 물러나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보잘것없는 미천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성은을 입어 조서를 받은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으나, 진실로 두어 이랑 전원(田園)을 얻어 험식이나마 생계를 유지하며 자손을 가르치고 책을 저술하면서 여년을 마치는 것이 바로 나의 본뜻이다.’ 하였다.
평소에는 아무리 더워도 건(巾)과 버선을 벗지 않았는데, 병이 심해지자 스스로 벗어버렸다. 선군의 중제가 집안 사람들을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공(公)의 병이 위중하다. 우리 백씨(伯氏)는 아무리 더워도 건(巾)을 벗거나 발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상하다. 공의 병세가 위중한 줄 알겠노라.’ 하였다.
병세가 위독하여도 심히 걱정하지 않으며 기거와 언어가 태연하였다. 자제들이 약을 달여 드릴 때마다 저지하며 ‘어찌 약을 쓸 일이냐.’ 하였다. 이때 상이 선군의 문(文)이 패관잡설(稗官雜說)에 가깝다 하여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라 하였는데, 운명하기 전날까지도 응제(應製)가 늦어짐을 걱정하며 때로 침통한 기색이 있었다. 돌아보고 중제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버이를 모시고 계제(季弟)의 집으로 가서 잘 봉양하라.’ 하였는데, 이날 밤까지도 정신이 혼미하지 않아 불초(不肖)에게 명하여《어정팔자백선문(御定八子百選文)》몇 편을 송독하게 하면서 손수 음조를 맞추더니, 임종할 때가 되자 다시 의관을 정제하고 누웠다.
일가 어른 판서공(判書公) 경무(敬懋)가 항상 말하기를 ‘우리 종족이 몹시 외로우나 심계(心溪)의 이학(理學)과 청장(靑莊)의 문장(文章)이 있어 성대하다 할 수 있다. 다른 문벌이 부럽지 않다.’ 하더니, 선군의 부음(訃音)을 듣고 탄식하기를 ‘끝났구나 우리 일가의 대들보가 부러졌구나.’ 하였으며, 길가는 부녀자나 어린이들도 슬퍼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이 선군이 돌아간 것을 듣고 몹시 애석해 하면서 내각(內閣)에 명하여 특별한 부의를 내리고, 계축년 등지에 갑인력(甲寅曆) 1책, 갑인년에 또 을묘력(乙卯曆) 1책, 을묘년에 또 역서(曆書)를 하사하였는데, 모두 피봉에 쓰기를 ‘고 검서관 이덕무가(故檢書官李德懋家)’라 하였다.
선군께서 벼슬한 지 15년 동안 내사(內賜)가 잦았다. 서적(書籍) ㆍ 복용(服用) ㆍ 식품(食品) ㆍ 채품(菜品) ㆍ 과곡(果穀) ㆍ 어족(魚族) ㆍ 약환(藥丸)의 유가 모두 1백 39종이요, 거듭 하사한 각종의 회수를 합치면 5백 20여 번이나 된다. 그러므로 특별히《내사표(內賜表)》 1책을 지어 성은의 감사를 기록한다 하였다.
을묘년(1795, 정조 19) 4월 초 3일에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 운서(韻書)를 간행하는 일로서 생각해 보니, 고 검서관 이덕무의 재식(才識)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듣건대 그 아들이 거상을 마쳤다 하니, 이광규(李光葵)를 검서관으로 특차(特差)하라. 《차오산집(車五山集)》도 조가에서 간행해 주는데, 하물며 이덕무의 문(文)과 그 노고임에랴? 그들 가력(家力)으로 어떻게 그 유고(遺稿)를 간행할 수 있겠는가? 책의 간행을 계기로 유치전(留置錢) 5백 냥을 특별히 내리라. 요즈음 세속이 비록 시여(施與)에 인색하나 세속을 바루는 이때를 당하여 마땅히 이러한 일로부터 일으키리라. 각신(閣臣)으로서 지금 장임(將任)ㆍ외임(外任)을 띠고 있는 자를 적어 올리고 문신(文臣)으로서 요직에 있는 자와 번임(藩任)으로 웅부(雄府)에 있는 자는 각각 힘에 따라 도와서 속히 인쇄에 붙이도록 하라. 지친의 훈장(訓將)이 어찌 괄시할 수 있으랴?’ 하고 곧 은교(恩敎) 1통을 써서 주라 하였다. 이날 종족친붕(宗族親朋)이 서로 돌아보며 축하하기를 ‘공(公)이 생전에 지조를 지키고 공부에 근실하며 편찬하는 일에 힘쓰더니, 사후에 이르러서도 지존(至尊)께서 그 재주를 생각하고 그 가난함을 염려하여 곧 아들을 녹용(錄用)하고 유고를 간행하라는 명이 있었다. 은영(恩榮)이 미치는 것이 구천(九泉)에서만 깊이 감격할 뿐 아니라, 또한 한 세상을 흥기시킬 것이다.’ 하였다. 이에 불초가 슬피 울며 삼가 사당 앞에서 은교(恩敎)를 읽었다.
참판(參判) 이서구(李書九)가 선군과 한 마을에 살며 교분이 좋았다. 왕복한 서찰이 수백 편에 이르렀는데, 비록 손톱만한 쪽지라도 하나하나 죄다 배접해 간직해 두었다가, 선군이 돌아간 뒤에 다 싸서 돌려보냈다. 선군의 글을 아낀 것이 이와 같았다.
유고(遺稿)의 초선(抄選)과 교수(校讐)는 직각(直閣) 윤공 행임(尹公行恁)이 그 일을 주관하였으니 이 역시 상의 명에서였다. 시문(詩文)이 모두 14권인데 4책으로 산정(刪定)하여 간행하였다. 그 나머지 각종 저서는 모두 50여 권으로서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 선군의 행검과 언행이 《사소절(士小節)》 3편에 많이 나타나 있으나 불초 광규(光葵)가 듣고 목격하여 기억해 둘 만한 것에 대하여 오래 갈수록 인몰될까 염려되기에 슬피 울며 위와 같이 찬한다.
[주D-001]십고(十考) : 열 차례의 고사(考査). 관원의 근무 성적을 고사함에 있어 경관(京官)은 각 관청, 지방관은 각 감사(監司)가 실시하는데, 5년 동안 열 차례가 되는 것을 말한다.
- 한국고전문화번역원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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