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2014. 4. 7. 02:03파미르 이야기

 

 

 

 

 

      

마르코폴로 - [동방견문록] 세계사

2010/11/30 02:31

복사 http://blog.naver.com/donmany0203/30097988206

전용뷰어 보기

 

 

   “황제들과 국왕들, 공작들과 후작들, 백작들, 기사들과 도시민, 그리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세계 여러 지역들의 신기한 일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이 책을 가져가서 읽어달라고 청하시오.” 마르코 폴로의 구술을 바탕으로 [동방견문록]을 집필한 루스티첼로는 13세기 당시의 낮은 문자 해독률을 감안하여 위와 같이 독자들에게 권했다. 유럽인들의 동양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동방견문록]의 화자(話者)이자 주인공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 및 숙부와 함께 당시로서는 미증유의 긴 여정에 나섰다.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떠난 긴 여정

   베네치아 상인 니콜로 폴로와 마페오 폴로 형제는, 육로를 통해 몽골 제국의 영토를 가로질러 중국까지 여행했다. 1260년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하여 1269년 베네치아로 돌아온 그들의 여정은 이러했다. 지중해를 건넌 뒤 흑해를 동쪽으로 항해하여 킵차크한국(남부 러시아의 몽골 왕조)에 도착해 1년 간 머무른 뒤, 다시 동쪽으로 출발해 부하라(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주의 주도)에 도착해 3년을 머물렀고, 쿠빌라이칸의 조정을 방문하고 육로를 거쳐 3년 만에 지중해 동부 연안 항구 도시 아크레에 도착해 지중해를 건너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폴로 형제는 1271년 다시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이번에는 니콜로 폴로의 17살 난 아들 마르코 폴로도 동행했다. 바그다드를 거쳐 바스라로 간 그들은 해로로 중국을 향하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자 육로를 택해 페르시아를 거쳐 아무다리야 강, 파미르 고원을 통과해 타림 분지에 도착했고 카슈가르, 호탄, 롭노르 등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오아시스 지역을 지나 오늘날 중국의 간쑤성(甘肅省) 서부 오아시스 지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1년을 머무른 일행은 1274년 원(元)나라 세조 쿠빌라이칸의 여름 궁전이 있는 상도(上都 네이멍구자치구 남부)에 도착했다. 마르코 폴로는 17년 간 원나라에 머물면서 그 수도 대도(大都 베이징)는 물론, 오늘날 중국의 산시(山西), 산시(陝西), 쓰촨(四川), 윈난(雲南),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장쑤(江蘇), 저장(浙江), 푸젠(福建) 지역 등을 여행했다. 적어도 마르코 폴로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쿠빌라이칸의 깊은 신임을 받아 양저우(揚州)에서 관리로 일하기도 했다. 마르코 폴로 일행은 페르시아의 몽골 왕조 일한국으로 시집가는 원나라 공주의 호송단에 참가하여 수마트라, 말레이, 스리랑카, 인도 서남부 말라바르를 거쳐 페르시아의 호르무즈에 도착했고 1295년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동방견문록] 사실의 기록? 상상과 윤색의 판타지?

   이들이 베네치아로 돌아오고 4년 뒤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동방무역로의 지배권을 둘러 싼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포로가 된 마르코 폴로는 제노바의 감옥에 갇혀 피사 출신 작가 루스티첼로에게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루스티첼로는 그것을 받아 적었다. 1298년부터 1299년 사이 감옥에서 이루어진 이 구술(口述)의 결과가 [세계의 기술(記述)](Divisament dou monde), 즉 [동방견문록]이다. [일밀리오네](Il Milione)라는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임종을 앞둔 마르코 폴로에게 친구들은 영혼의 안식을 위해 [동방견문록]에 실린 ‘거짓말’들을 취소하고 회개하라 권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본 것들의 절반도 다 이야기하지 못했다.”

 

 

마르코 폴로

마르코 폴로를 접견하는 쿠빌라이 상상도

 

 

    마르코 폴로는 교양을 쌓은 인물이 아니었다. 구술을 받아 적은 루스티첼로 역시 ‘이야기 제조업자’였다. 예컨대 쿠빌라이칸이 마르코 폴로 일행을 환영하는 장면의 묘사는 아서 왕 전설에서 트리스탄이 처음 궁정으로 왔을 때의 장면을 루스티첼로가 그대로 따와 고쳤다는 게 정설이다. 애당초 [동방견문록]은 학술적으로 엄밀한 여행보고서도 아니었고 관찰한 것을 정확하고 치밀하게 기술하는 책도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동방견문록]이 필사되고 번역되면서 무수히 많은 윤색과 첨삭이 가해졌기 때문에, 오늘날 140여 개의 판본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원본(原本)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다.

 

   마르코 폴로는 그 아버지 및 숙부와 함께 뼛속까지 상인인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중국의 종교, 사상, 문학, 미술 등은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상업과 물산(物産), 물질적 번영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에게 ‘좋은 것’이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것이었다. 더구나 기사(騎士) 무용담과 로맨스 작가였던 루스티첼로의 윤색을 거치면서, 당시 유럽인들의 흥미를 유발할만한 내용에 주안점을 두고 자주 심한 과장이 더해졌다. 마르코 폴로,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와 루스티첼로가 전하는 동방의 막대한 풍요는 이후 유럽인들의 호기심과 탐험욕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콜럼버스가 [동방견문록]을 갖고 항해를 떠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마르코 폴로와 [동방견문록]의 역사적 의미도 바로 그런 것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요컨대 그 기록의 사실성 여부와는 별도로 ‘풍요와 부(富)의 동방 및 중국’이라는 이미지를 창출하여 유행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이른바 대항해시대의 많은 상인과 탐험가들을 이끌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문헌비평적 검토를 거친다는 것을 전제로, [동방견문록]은 13세기 중앙아시아와 몽골, 중국 등에 관한 역사, 지리, 풍속을 담은 보기 드문 사료이기도 하다.

 

 

마르코 폴로는 정말로 중국을 방문했을까?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양저우(揚州)에서 관리로 일했다고 주장했지만, 원나라 사료를 비롯한 중국의 그 어떤 사료에도 마르코 폴로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주장대로 쿠빌라이칸의 신임을 받으며 관리까지 지냈다면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페르시아(일한국)로 시집가는 공주를 호송하는 호송단에 참가했다고 주장하는 데, 중국측 기록에 이 호송에 관한 내용이 남아 있지만 마르코 폴로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동방견문록]의 124장. 칸의 군대가 버마(미얀마) 지역에서 전투를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 상상도

 

 

   그 밖에도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젓가락 사용이나 차 마시는 풍습, 한자(漢字), 전족 풍습, 만리장성, 인쇄술 등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 여행 일정이 상당 부분 누락돼 있거나 혼동되어 있어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정이라는 것,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투석기 제작법을 몽골인들에게 가르쳐주어 몽골군이 1268년 양양(襄陽)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그 때는 그가 도착하기 전이었다는 것(중국 측 기록에는 아랍 기술자의 도움으로 1273년에 함락시킨 것으로 되어 있음), 몽골이 중국의 강남 지방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은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는 점 등등, 중국여행 여부를 의심케 만드는 사항들이 적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으며, [동방견문록]은 그가 주로 페르시아 상인들에게 전해들은 풍문에 상상과 윤색을 가하여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13~15세기 유럽에서 나온 여행기들 가운데 상당수는 ‘들리는 소문’들을 적당히 짜깁기 하여 상상을 덧붙인 것들이다. 중국에 가지 않더라도 중국에 관한 여행기를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가 실제로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내용이 많다는 반론이 유력하다.   예컨대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킨 뒤 많은 성벽을 허물었다는 내용은 서양 측 자료들 가운데는 [동방견문록]에만 실려 있다. 쿠빌라이칸이 주요 간선 도로옆에 나무를 심어라 명했다는 기록도 역시 서양 자료로는 [동방견문록]이 유일하다. 이 명령은 중국 측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도 원나라의 풍습, 국가 행사, 쿠빌라이칸 개인에 관한 내용, 중국 각지의 풍토와 물산, 도시 생활에 대한 자세한 기록 등은 그가 실제로 중국을 방문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 여행의 역사적 배경

   폴로 일행의 여정이 가능했던 것은 대략 7세기부터 13세기 중반까지 동서 교통로의 가운데를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이, 1258년 몽골군에 의한 바그다드 함락을 결정적인 계기로 위축되었던 것에서 그 조건을 찾을 수 있다. 몽골 제국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이슬람 세력(사라젠 제국)이라는 장벽이 낮아진 셈이었다. 무자비한 정복 전쟁의 결과였을지언정, 몽골이 이룩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는 몽골 제국의 영역 안에서 비교적 안전한 여행을 가능케 했다. 예컨대 마르코 폴로 일행은 몽골제국의 영역에서 안전한 통행을 보장해주는 칸의 문장(紋章)이 담긴 황금판, 즉 패자(牌子)를 갖고 다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베네치아를 비롯한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이 동방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거두었다는 점, 십자군에 참여한 유럽인들을 통해 미지의 이질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커졌다는 것 등도 중요한 조건이다.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