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문화탐방에서 본 향례 ㅡ 홍산(紅山)문화

2013. 5. 14. 07:57향 이야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화가 <홍산문화>입니다.
이 홍산 문화는 실로 엄청난 문화입니다.


이 문화를 발굴하므로 인해서
중국은 황하중심 문화 전파론을 지양하고
이른 바 '다중심문화론'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산동 반도에서 발견되는 북신문화-대문구-용산문화가
바로 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문화가 바로 고조선 중심지였다고 우리나라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는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국학자 “부사년”이 주장하였던 이하동서설의 주인공인 夷가 바로 고조선인이거나 그 선조였다는 이론으로까지 확산될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학계의 일부에서도 이 문화를 가지고 고조선이 실제로 기원전 2333 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 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고조선의 중심이 평양으로 주장하는 학자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문화는 또한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하여
꾸준히 강단 사학계를 한반도 중심의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했던
재야사학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홍산 문화는
황하문명 보다도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한 유적이 보이며
성곽이나 왕궁터등이 발견되어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까지 되었습니다.

환단고기에서 나오는 배달국이
바로 홍산 문화(B.C.4500∼B.C.2500),
더 나아가 홍산 문화의 전신인 흥륭화 문화, 신락 문화(B.C.6000∼B.C.5000)를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산 문화는 요녕 지역과 내몽고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6천년(B.C.4,000)의 신석기시대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됩니다.
홍산 문화는 앙소 문화의 채도와 그전 단계의 연속 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 등을 융합하여 한 단계 발전하여 전개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고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 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東夷族'의 활동지역을 문헌상으로 보면, 하북성 동북부와 산동 일대, 양자강하류 유역 등입니다.

산동 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북신 문화인데,
북신 문화는 7천년 전까지 소급되어지고 황하의 자산, 배리강 문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B.C. 4500년경의 이지역 대문구 문화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습니다. 대문구문화는 하남성 서쪽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써 東夷系 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됩니다.

홍산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입니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 판을 잘라 묘실 벽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상류 역 요녕성 우하량 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 은 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합니다.

역사상에서 홍산 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 단계인 홍산 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고유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고전이나 사서에 나오는
황제헌원과 대결을 벌였던 치우의 세력근거지로도 지적이 되기도 하는데
황제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 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기]에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홍산 문화 이후 하가점 하층문화(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는데 홍산 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 문화는 바로 고조선의 문화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홍산(紅山) 문화는
소하연(小河沿) 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 문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거의 공식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소하연 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하층 문화,
구체적으로 풍하(豊下)문화에서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서기전 2천4백년 경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기원 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 요동, 요서 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 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기까지 합니다.

이 홍산 문화의 발견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파장이 실로 큽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 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 문화”를 들고 있습니다.

즉 홍산 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 산동 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북신 문화-대문구 문화-용산 문화-악석 문화로 이어지는 산동 문화와 흥륭화 문화, 신락 문화-홍산 문화-하가점하층 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도 산동 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이었나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전백찬” 같은 중국학자의 일부가 사적 상에 보이는 辰國(고조선?)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홍산 문화는 고조선인의 선조가 일으킨 문명일까?


분명한 것은 중국학계에서도 은나라 때까지 화하 족이 하북성과 산동성을 넘어오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홍산 문화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동이족이 과연 “고조선인”이냐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을 예전의 평양에서 요서, 요동 등 요녕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기원도 그곳에서 발생하여 한반도로 이주를 해왔다는 이론이
점차로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기 때문에 홍산 문화의 주인공 나아가서 중국의

문화의 중요한 획을 그었던 세력이 누구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을 떠나서 분명한 것은 이 문화가 고조선을 건국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표) 시대별, 지역별 문화 현황


중국 작가협회 회원이자
소주(蘇州)시 산문학회 부회장 겸 강소성 곤산(昆山)시 문화국 부국장
“진익(陳益)”은 치우의 정체에 대해 중국인의 선조는 치우이고
치우의 선조는 바로 오월(吳越)의 조상이라 말한다.


오월은 임혜상이 바로 동이족이라 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사료에 흔적만 겨우 보이는 희미, 모호한  하(夏) 이전의 시대를 만장(漫長:뭐가 뭔지 모르는 시대) 시대라 하고, 중국의 역사가 3황이니 5제니 하여 역사를 덮어버렸으나, 오월문화는 세세대대 (양자강)강남의 땅에 토착한 사람들이니,
그들이 곧 오월의 조상, 선조라 말한다.

안원전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