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문화탐방에서 본 향례 ㅡ 웅진천도 /향토문화대전

2013. 5. 14. 08:01향 이야기

 

 

 

향토문화대전

 

  • [정의]

    475년 백제 문주왕이 왕도를 한성(현 서울)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옮긴 사실.

  • [개설]

    백제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은 3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 왕도인 한성을 공략하였으며, 개로왕은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한성이 함락되었다. 그 과정에서 개로왕은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한성에서 즉위한 문주왕(文周王)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자 그해 10월에 웅진으로 천도를 하였다.

  • [역사적 배경]

    개로왕 대에 백제고구려의 침략을 받게 된 원인은 대내·외적인 요인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대외적인 요인으로는, 고구려 장수왕평양 천도 이후 지속적인 남진정책을 펼쳐 백제에 대한 압박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개로왕은 북위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고구려에 대응하는 한편,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통해 견제함으로써 고구려와의 긴장관계를 초래하였다.

    대내적인 요인으로는, 개로왕의 전제왕권 강화에 따른 정국의 혼란이다. 개로왕은 전제왕권 강화를 위해 왕족의 중용을 통한 귀족세력의 견제를 꾀하였다. 또한 왕권의 대외적 위상을 강화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간첩승이었던 도림의 간언에 속아 대규모 토목공사를 실시함으로써 귀족세력의 분열과 국가경제의 파탄을 초래하였다. 특히 백제 귀족세력 가운데 일부는 고구려로 도망하였으며, 토목공사로 인해 정치와 경제가 혼란해지자 도림장수왕에게 이와 같은 상황을 전함으로써 장수왕백제를 공략할 수 있도록 하였다.

  • [목적]

    웅진 천도는 한성의 함락과 그로 인한 한성의 황폐화, 그리고 비록 고구려군이 한강 이북으로 철수는 하였지만 잠재되어 있는 남침의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국가의 재건을 추진하고자 웅진으로 천도를 하였다.

  • [발단]

    고구려 장수왕은 3만의 군사를 동원해 4도로 군사를 나누어 한성을 공략하였다. 백제는 7일 만에 북성을 함락 당했으며, 고구려군은 다시 남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개로왕남성을 빠져나와 피신하던 도중에 고구려 군사들에게 잡혀 아차성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신라로 구원병을 얻으러 갔던 문주가 1만의 구원병을 데리고 도착하였으나 이미 한성은 고구려군에 함락되어 폐허가 되고 개로왕은 전사한 뒤였다.

  • [경과]

    고구려한강 이북의 아차산에 보루를 만들어 군사를 주둔시키자 백제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475년 9월 한성에서 왕위에 오른 문주왕목협만치(木協滿致), 조미걸취(祖彌桀取) 등의 신하와 함께 그해 10월에 웅진으로 급히 도읍을 옮겼다. 문주왕웅진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지적되고 있다. 그 중에는 웅진 지역에 대세력가가 없었다는 점과, 천도 이전에 웅진성이 축조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또는 문주왕이 즉위 전 웅진성의 담로에 파견된 자제(子弟)·종족(種族) 중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외에도 공산성에서 출토된 동경에 주목하여 공주를 고대 교통로상의 중요한 도진(渡津)으로 군사적 거점이 설치되었을 가능성과, 한성기에 진행된 금강 이남지역으로의 지배력 확산 등도 언급되었다.

  • [결과]

    웅진에 도읍한 문주왕은 ‘왜’에 가 있던 곤지를 불러들여 내신좌평에 앉히는 등 귀족세력들을 견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곤지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한성 귀족인 해구가 병권을 장악하면서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그러나 문주왕진씨를 비롯한 금강 유역 귀족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해씨를 견제함에 따라, 해구는 도적을 시켜 문주왕을 시해하기에 이른다.

    삼근왕을 왕위에 올린 해구는 전권을 장악하였지만 귀족세력들의 견제로 수세에 몰리게 된다. 결국 해구연씨와 함께 대두산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씨 등에 의해 진압되고, 삼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성왕에 의해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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