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구곡원림(九曲園林)과 구곡시가(九曲詩歌)의 연원과 전개

2014. 5. 14. 15:15나의 이야기






        

 문경의 구곡원림  

 

 

 Ⅱ. 구곡원림(九曲園林)과 구곡시가(九曲詩歌)의 연원과 전개 

 

  

  원림(園林)은 정원(庭園)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의 정원처럼 집 안에 있는 공간에다 나무를 심고 우물을 판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원림은 집 밖에 펼쳐 있는 공간으로, 산과 내가 존재하는 넓은 공간을 의미한다. 즉 원림(園林)은 동산과 숲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정사와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1) 원림은 형태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인간의 우주에 대한 이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중당(中唐) 이전의 중국 원림이 광대한 규모를 기본원칙으로 하면서 그 안에 천지만물을 빠짐없이 구비하려고 한 것도 근본적으로 원림을 통해 무한 광대한 우주를 체현하기 위함이었다.2)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원림(園林), 임천(林泉), 가원(家園), 임원(林園) 등으로 불렀다. 원림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정원이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명치시대에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도심 속의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 작업을 통하여 만든 공간이니 곧 건물 앞의 뜰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일본식 정원과는 다르게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때부터 원림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인들과는 달리 자연을 거역하거나 자연을 훼손하면서 정원을 꾸미지 않았다. 동산이나 계곡 그리고 하찮은 길이라도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았고 생긴 그대로 이용하였다. 용의 그림에 눈을 그려 넣듯 한 모퉁이에 건축물을 세워 자연 풍광을 한층 빛나게 하고 자연과 건축을 하나가 되게 하였다. 예를 들면, 창덕궁 후원은 인위적인 조경을 한 일본식 정원과는 다르게 우리나라 전통 정원의 성격을 그대로 담고 있다. 개념적으로 창덕궁 후원은 정원이 아닌 원림이다. 현재 원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곳으로는 장흥의 부춘정 원림, 담양의 독수정원림·명옥헌 원림·소쇄원 원림, 화순의 임대정 원림 등이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전통 원림은 궁중원림(宮中園林), 관아원림(官衙園林), 복거원림(卜居園林) 등으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복거원림은 사제(私第)를 중심으로 하는 거제원림(居第園林)과 사제와는 별도로 경영되는 별업원림(別業園林)으로 구별된다. 이 두 원림은 모두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성되어 그 기법이 유가원림의 기법을 취하였다. 유가의 전통적 원림은 거제원림보다 별업원림이 중요했다. 이 별업원림을 살펴보면, 사제에 부설되는 별당원림(別堂園林)과 사제와는 별도로 부설되는 별서원림(別墅園林), 명산에다 정사(精舍)를 지어서 거하는 구곡원림(九曲園林) 등으로 구분된다.
3) 이 중에서 구곡원림은 중국 송(宋)나라 이후에 나타나는 원림인데 그 직접적인 시원(始源)은 남송의 주자(朱子)가 경영했던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찾을 수 있다.

 

 

  1. 구곡원림과 구곡시가의 연원(淵源) 

 

주자(朱子)4)는 말년에 벼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 은거(隱居)를 하였다. 그의 은거는 정사(精舍)를 짓고 그 곳에서 자연과 함께 하며 수양하는 삶이었다. 주자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하며 수양할 수 있었다. 주자는 1169년에 어머니 축씨(祝氏)가 세상을 떠나자 건양(建陽)에 있는 후산(後山)의 천호(天湖)에 장사를 지내고 이곳을 한천(寒泉)이라 이름하였다. 그는 이곳에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살면서 주자가례(朱子家禮) , 근사록(近思錄) 등을 지었다. 1175년에는 건양 서북쪽에 자리하는 운곡(雲谷)에다 초당을 짓고서 회암(晦庵)이라 이름하고 기거하며 「운곡기(雲谷記)」를 지었다.1179년에는 남강군지사(南康軍知事)를 지내면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중수하였다.

 
  1183년에는 무이산(武夷山)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은거하며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지었다. 「무이정사잡영」은 정사(精舍), 인지당(仁智堂), 은구재(隱求齋), 지숙료(止宿寮), 석문오(石門塢), 관선재(觀善齋), 한서관(寒暑館), 만대정(晩對亭), 철적정(鐵笛亭), 조기(釣磯), 다조(多竈), 어정(漁艇) 등 무이정사 주변의 누정(樓亭) 및 지형을 시로 읊었다. 1184년에는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었는데 이 시는 중국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 남쪽에 있는 무이계(武夷溪)의 아홉 굽이 경치를 읊은 것이다.

 
  무이산(武夷山)은 원래 무이산(武彛山)이라 했는데 옛날 이 산에 신인(神人) 무이군(武夷君)이 살았다 하여 무이산(武夷山)이라 이름하였다. 120리에 걸쳐 자리한 무이산은 36봉우리와 37암석이 있고 시내가 그 사이를 흐르면서 아홉 굽이의 절경을 이루는데 제1곡은 승진동(升眞洞), 제2곡은 옥녀봉(玉女峯), 제3곡은 선조대(仙釣臺), 제4곡은 금계동(金鷄洞), 제5곡은 무이정사(武夷精舍), 제6곡은 선장봉(仙掌峯), 제7곡은 석당사(石唐寺), 제8곡은 고루암(鼓樓巖), 제9곡은 신촌시(新村市)이다.

 
  주자는 1192년에는 건양의 서남쪽 삼계(三桂)에 고정(考亭)을 지었고 1194년에는 죽림정사(竹林精舍) 혹은 창주정사(滄州精舍)를 지어 장주지사(漳州知事)를 역임한 후에 만년을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주자의 이러한 삶을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 조선의 사림들은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퇴계가 평강현감(平康縣監) 김경엄(金景嚴)의 서첩(書帖)에 써서 준, 다음과 같은 발문[跋金景嚴戣所求七君子贊及箴銘朱文公棲息講道處帖]을 보면 알 수 있다.

 
  선생은 처음 건녕부(建寧府) 숭안현(崇安縣) 오부리(五夫里) 병산(屛山) 아래 담계(潭溪) 위에 사셨다. 오고 가며 서식(棲息)할 따름이고 항상 거처하지 않았으니 모두 민중(閩中) 땅이었다.

先生初居建寧府崇安縣五夫里屛山之下潭溪之上往來棲息而已非恒處皆閩中地也

순희(淳熙) 6년 기해년(1178) 선생의 나이 50세에 비로소 남강군(南康軍)을 맡아 부임하여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을 중건하시고 3년의 임기를 채우고 돌아가시니 이로부터 다시 백록동(白鹿洞)에 이르지 않으셨다. 대체로 남강군은 강동(江東)에 속하여 민중과는 매우 멀어 재임할 때에 조정에 청하여 동주(洞主)가 되기를 원했으나 회보(回報)를 받지 못하니 실로 다시 이를 인연이 없었다. 10년 계묘년(1183) 선생의 나이 54세에 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었다. 한원길(韓元吉)의 무이정사 기문(記文)에 “원회(元晦)는 오부리에 살았는데 무이정사에서 가까웠다.그 외포(外圃) 같은 곳은 겨를이 있다면 노닐 수 있었다.” 라고하였다. 광종(光宗) 소희(紹熙) 2년에 이르러 선생의 나이 62세에 장주(漳州)로부터 돌아와 건양(建陽)의 동유교(同由橋)에 우거하다 비로소 고정(考亭)에 집을 지어 오부리로부터 옮겨 사셨는데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여기에 지어졌다. 대체로 옮겨 사신후에 9년 동안 선생은 병환이 심하니 향년이 71세였다.

淳熙六年己亥先生年五十始以知南康軍赴任興建白鹿書院三年秩滿而歸自是不復至白鹿洞蓋南康屬江東距閩中絶遠當在任日請於朝願爲洞主而不報則固無緣再至矣十年癸卯先生年五十四又作武夷精舍韓元吉精舍記元晦居于五夫在武夷一舍而近若其外圃暇則遊焉云至光宗紹熙二年先生年六十二歸自漳州寓建陽之同由橋始築室考亭自五夫而遷居竹林精舍於是作焉蓋遷居後九年而先生易簀享年七十一矣5)

이처럼 주자는 무이산에 한천정사, 무이정사, 고정정사, 죽림정사 등 많은 정사를 짓고 구곡원림을 경영하며 심성을 수양하고 도학을 닦았다. 주자는 이 과정에서 「무이도가(武夷櫂歌)」즉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지었는데 이 시는 후대에 중국 문인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수용하여 창작하는데 전범이 되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주자처럼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에 구곡원림(九曲園林)을 경영하면서 구곡시(九曲詩)와 구곡가(九曲歌)를 짓고 각 원림을 대상으로 구곡도(九曲圖)를 그렸다. 그러면 구곡원림의 연원이 되는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한다.

 
  무이구곡(武夷九曲)은 현재 중국 복건성(福建省) 무이산시(武夷山市)에 자리하는데 무이산맥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가 아홉 굽이 계곡을 이루는 곳이다. 아홉 굽이의 거리는 약 9.5㎞정도이며 양쪽으로 솟아 있는 높은 산 사이로 시내가 흘러서 관광객이 대나무로 만든 뗏목을 타고 유람할 수 있다. 옛날에는 제1곡에서 배를 타고 제9곡까지 거슬러 올랐지만 현재는 제9곡에서 배를 타고 물살을 따라서 제1곡에 이른다. 배를 타고 제9곡에서 제1곡에 이르는 시간이 2시간 정도가 걸리니 무이구곡은 매우 큰 공간으로 이루어진 원림이 아닐 수 없다. 주자는 무이구곡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武夷山上有仙靈  무이산 위에는 선령이 있어
   山下寒流曲曲淸  산 아래 차가운 시내 굽이굽이 맑아라
   欲識箇中奇絶處  그 중에 기절처를 알고자 하니
   櫂歌閑聽兩三聲  뱃노래 두세 소리 한가롭게 들린다
6)

주자는, 무이산 위에는 선령이 있어서 산 아래에 흐르는 차가운 시내가 굽이굽이 맑다고 하였다. 무이구곡을 흐르는 무이계는 무이산맥을 관통하여 흐르는 시내이다. 그러므로 일년 내내 일정한 수량으로 흐르는데 물의 깊이는 그렇게 깊지 않다. 이 시내가 무이산을 휘돌아 흐르면서 곳곳에 기절처(奇絶處)를 만드는데 이것이 아홉굽이이다. 당시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 무이계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을 하였으니 어부들의 뱃노래가 들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주자가 이 노래에 의탁하여 무이구곡의 절경을 차례차례 시로 읊어내니 이것이 바로 「무이도가(武夷櫂歌)」곧 「무이구곡가(무이구곡가)」이다.

 
  무이구곡(武夷九曲) 제1곡은 승진동(升眞洞)이다. 제1곡의 왼쪽에는 만정봉(幔亭峯)이 솟아 있고 오른쪽에는 대왕봉(大王峯)이 자리한다. 앞을 바라보면 멀리 솟아 있는 옥녀봉(玉女峯)이 선명히 보인다. 그 외에도 주위에는 철판장(鐵板嶂), 경대(鏡臺), 인석(印石), 수광석(水光石) 등이 자리하여 절승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도교(道敎)의 고장이라 무이계 옆으로 무이궁(武夷宮)이 자리하고 있다. 주자는 이 굽이에서 고깃배에 오르며 제1곡시를 지었다.

一曲溪邊上釣船  일곡이라 시냇가에서 고깃배에 오르니
   幔亭峰影蘸晴川  만정봉의 그림자가 청천에 잠긴다
   虹橋一斷無消息  홍교가 한번 끊어지니 소식이 없고
   萬壑千岩銷翠煙  만학천암이 푸른 안개에 가려지네
7)

무이구곡 제1곡은 배를 탈 수 있을 정도로 평평한 굽이이다. 왼쪽에 솟아 있는 만정봉이 무이계(武夷溪)의 맑은 수면 위에 비치고 제3곡에 있었던 홍교(虹橋)는 지금 끊어져 소식이 없는 상태이다. 앞으로 바라보니 만학천암(萬壑千巖)이 푸른 안개에 가려있다. 그래서 주자는 제1곡에서 바라보며 느낀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실제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옛날 무이계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하였는데 그 고깃배를 타고 주자는 유람을 시작하였다. 만정봉의 그림자가 청천에 드리우는 제1곡에서 홍교가 걸려 있었던 멀리 아홉굽이를 바라보며 주자는 유람의 흥취에 빠졌던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아홉의 기절처(奇絶處)를 유람할 기대에 마음이 들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배를 저어 제2곡으로 향하였다.

무이구곡 제2곡은 옥녀봉(玉女峯)이다. 무이계 왼쪽에 하늘 높이 솟은 바위산이 옥녀봉이다. 대나무 뗏목을 타고 바라보는 옥녀봉은 매우 웅장하면서도 아름답다. 옥녀봉 위에는 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이를 사람들은 꽃을 꽂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옥녀봉이 그 앞으로 흐르는 무이계의 맑은 수면에 비치면 환상의 세계를 만든다. 평소에는 이 지방에 안개가 많이 끼는데 안개가 옥녀봉을 두르면 신선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옥녀봉 주위에도 많은 절경이 자리하는데 하늘의 옥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욕향담(浴香潭), 신선이 노닐었던 선방암(仙榜巖), 신선이 머물렀던 선관암(仙館巖) 등이 존재한다. 이러한 바위 벼랑과 연못이 어우러져 제2곡은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주자는 배를 타고 이곳에 이르러 제2곡시를 지었다.

二曲亭亭玉女峰  이곡이라 우뚝 솟은 옥녀봉은
   揷花臨水爲誰容  꽃을 꽂고 물에 임하니 누굴 위해 꾸몄는가
   道人不復陽臺夢  도인은 다시 양대를 꿈꾸지 않으며
   興入前山翠幾重  흥겹게 전산 몇 겹 푸르름 속으로 들어가네
8)

주자는 제2곡에 이르러 우뚝 솟은 옥녀봉을 보았다. 그 모습은머리에 꽃을 꽂고 물에 임해 있는 모습이다. 주자는 옥녀봉에게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아름답게 꾸몄는가’고 물었다. 옥녀봉은 제1곡의 오른쪽에 자리하는 대왕봉과 얽힌 전설을 가지고 있다. 땅을 다스리는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옥녀와 사랑을 나누는 전설로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며 사랑하지만 주변의 방해로 인하여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전설은 인간의 색욕(色欲)과 관계되는 이야기이다. 이를 염두에 두었던지 주자는 도인(道人)은 양대(陽臺)를 꿈꾸지 않는다 하였다. 도인은 이 무이산에 거주하는 도가의 무리를 말한다. 원래 무이산은 도교(道敎)의 성지였다. 주자가 은거했던 당시에는 많은 도인들이 이곳에 자리잡고 살아갔다. 양대는 남녀가 만나는 장소로 남녀가 서로 어울려 사랑을 나누는 장소이다. 이러한 장소를 꿈꾸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이 가지는 색욕을 끊는다는 의미이다.

무이구곡 제3곡은 선조대(仙釣臺)이다. 이 선조대는 강태공(姜太公)이 고기를 낚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제3곡 아래로 흐르는 무이계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낚시하는 강태공의 모습이 연상된다. 실제로 이 굽이는 물살이 바위 벼랑에 기대어 흘러가고 있어서 낚시 하기에 좋은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이 외에 제3곡에는 무이산 세 신선이 항상 모여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연선암(宴仙巖), 가학선(架壑船)과 홍교(虹橋)가 자리했던 소장봉(小藏峯)이 있다. 특히 가학선과 홍교는 주자의 시에서 중요한 시재(詩材)로 등장한다. 이곳은 고월인(古越人)이 살았던 지방이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신석기 시대에 무이산 일대는 고월인이 번성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무이산 계곡에 집단을 이루어 살았는데 나무를 잘라서 배를 잘 만들었다. 배는 고월인에게 매우 귀중한 재산이었으니 그들은 이 일대에서 고기를 잡고 생활하였다. 그래서 고월인은 사람이 죽었을 때 배를 만들어 그 안에 시체를 안장하는 장례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사람이 죽으면 배를 타고 다른 세계로 간다는 고월인의 의식에서 나온 풍습이었다. 고월인은 시체를 실은 배를 무이계 바위 벼랑 사이에 안치하였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곳에다 안치하였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주자는 제3곡에 이르러 시 한 수를 지었다.

三曲君看架壑船  삼곡이라 그대는 가학선을 보았는가
   不知停櫂幾何年  노를 멈춘 지 몇 년 되었는가 알지 못해라
   桑田海水今如許  상전벽해 지금은 어떠한가
   泡沫風燈敢自憐  포말과 풍등이라 감히 절로 안타깝다
9)

주자는 무이구곡 제3곡에서 가학선(架壑船)을 바라보았다. 그 옛날 고월인(古越人)이 장례 지낸 배가 바위 벼랑에 아직도 남아 있었다. 주자는 가학선이 여기서 배를 멈춘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생각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생각하였다. 즉 모든 사물이 변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고 인생무상(人生無常)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주자는 이러한 사물의 가변성(可變性)을 안타깝게 여겼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이 시에서 사물의 가변성을 안타깝게 여겼던 주자의 진솔한 마음을 도학적 관념으로 해석하여 가변성을 뛰어넘어 영원성(永遠性)을 지향한다고 인식하였다. 그들이 존숭하는 주자가 가변성에 안타까워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자가 이 굽이에서 가변성을 뛰어넘어 지향하려했던 영원성은 성리학자들이 지향하는 도(道)가 된다.

무이구곡 제4곡은 금계동(金鷄洞)이다. 금계동은 동서로 두 개의 큰 바위가 솟아 있는 굽이로서 동쪽은 대장봉(大藏峯)이, 서쪽은선조대(仙釣臺)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대장봉은 기이하게 솟은 바위 벼랑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한낮에도 해를 가릴 정도이다. 이 봉우리 정상에 금계동이 있다. 금계동은 제7곡에서 날아온 금계(金鷄)가 산다는 전설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장봉 아래는 와룡담(臥龍潭)이 있는데 푸른 물이 흘러왔다가 잠시 머물다 흘러간다. 와룡담은 그 밑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주자는 제4곡에 이르러 금계동과 와룡담을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읊었다.

四曲東西兩石岩  사곡이라 동쪽과 서쪽에 두 바위 자리한데
   岩花垂露碧㲯毿  바위에 핀 꽃에 이슬 내려 푸르게 드리운다
   金鷄叫罷無人見  금계의 울음소리 그치니 보이는 사람 없고
   月滿空山水滿潭  달빛 빈 산에 가득하고 물은 못에 가득하다1
0)

무이구곡 제4곡에 이르면 동쪽의 대장봉(大藏峯)이 보이고 서쪽의 선조대(仙釣臺)가 보인다. 두 봉우리는 모두 바위로 되어 있어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없는 바위 벼랑이다. 주자는 바위 벼랑 사이로 핀 꽃에 이슬이 드리운 모습을 바라보았고 금계동의 금계 울음소리가 그치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다. 실제로 금계동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바위 벼랑으로 이루어진 곳에 자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쉬 오를 수 있는 마을이 아니다. 주자는 이마을에 오르고 싶었지만 금계가 이제는 날아오지 않고 사람들도 살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다만 달빛이 비치는 산과 물이 가득한 와룡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물을 거슬러 제5곡을 향하여 나아갔던 것이다.

무이구곡 제5곡은 무이정사(武夷精舍)이다. 제5곡은 지세가 평평하고 넓으며 물의 흐름이 완만하다. 붉은 바위 벼랑에 푸른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주위에는 나무 숲이 둘러있는 굽이이다. 이 굽이에는 은병봉(隱屛峯), 접순봉(接笋峯), 갱의대(更衣臺), 주운봉(酒雲峯), 만대봉(晩對峯)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 굽이에는 은병봉 아래에 주자가 은거하며 제자를 가르쳤던 무이정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은 주자가 머물렀던 당시의 건물은 남아있지 않고 최근에 지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무이정사 뒤로 솟은 대은병은 무이정사를 안온하게 지켜주는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있다. 주자가 이곳에 은거하기 전까지 무이산은 도가(道家)들의 산이었다. 실제 무이정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원동(桃園洞)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계곡은 도가의 유적이 지금도 자리하고 있다. 특히 바위에 새겨진 노자(老子) 석상은 이 지역이 도가의 근거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주자가 여기에 은거한 이후에 무이산은 성리학의 성지가 되었고 ‘도남이굴(道南理窟)’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주자는 이곳에 이르러 제5곡시를 지었다.

五曲山高雲氣深  오곡이라 산이 높아 구름 기운 깊고
   長時烟雨暗平林  오랜 시간 안개비에 평림이 어둡다
   林間有容無人識  숲 사이에 객 있으나 아는 이 없어
   欸乃聲中萬古心  뱃노래 소리 중에 만고심이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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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는 자신의 은거지인 제5곡에 대하여 산이 높아 구름 기운이 깊은 곳이며 안개비가 자주 드리우는 평림(平林)이라 묘사하였다. 산이 높다는 것은 주위에 솟아 있는 여러 봉우리를 말하고 평림이라는 것은 무이정사가 자리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무이구곡에서 평평한 지세를 가진 곳은 제5곡과 제9곡이다. 이 중에서 산세의 아름다움과 평평한 지형이 조화를 이루는 굽이는 제5곡이라 할 수 있다. 제5곡의 평림에는 구름과 안개비가 자주 드리우고 내려서 차(茶)가잘 재배되는 장소이다. 실제로 무이정사 뒤를 돌아 천유봉(天游峯)으로 가는 길에 다동(茶洞)이 있는데 차밭으로 이루어진 마을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주자는 이러한 지형을 제5곡시에 묘사한 것이다. 주자는 숲 사이에 객이 있으나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숲사이에 있는 객은 바로 주자 자신이다.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성리학적 세계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무이정사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뱃노래 속에서 만고심(萬古心)을 찾았다. 만고심은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바로 주자가 추구하는 도(道)라고 할 수 있다.

무이구곡 제6곡은 선장봉(仙掌峯)이다. 선장봉은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이 산은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그 모양이 마치 치마를 펼쳐 놓은 듯하여 일명 쇄포암(曬布巖)이라 한다. 무이구곡 제5곡에서 배를 저어 제6곡에 들어서서 뒤를 바라보면 선장봉의 형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오히려 무이구곡 제6곡에서 제7곡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면 거대한 바위 벼랑에 세로로 줄을 그은 듯한 선장봉의 형상이 눈을 압도한다. 현재 이 선장봉은 천유봉(天游峯)으로 올라가는 길이 닦여 있는데 일일이 바위를 쪼아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관광객이 이 바위 계단을 올라서 천유봉 정상에 이르는 과정에 선장봉을 지나는데 선장봉 아래로 펼쳐진 제5곡과 제6곡의 경치는 무이구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이라 할 수 있다. 주자는 이 굽이에 이르러 제6곡시를 지어서 자신의 감회를 드러냈다.

六曲蒼屛遶碧灣  육곡이라 창병이 푸른 물굽이를 둘러있고
   茅茨終日掩柴關  띠집엔 종일토록 사립문을 닫았어라
   客來倚櫂岩花落  객이 와서 노 저으니 바위 꽃이 떨어지나
   猿鳥不驚春意閑  잣나비 새들 놀라지 않고 봄뜻이 한가롭네
12)

주자는 창병(蒼屛)이 푸른 물굽이를 둘러있다고 제6곡을 묘사하였다. 창병은 바로 선장봉(仙掌峯)을 말하는데 선장봉이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 있기 때문에 형용한 말이다. 푸른 물굽이는 선장봉 앞으로 흐르는 무이계(武夷溪)이다. 이 무이계가 선장봉 앞을 둘러서 흘러간다. 무이구곡 제6곡에서 제7곡으로 올라가는 배 위에서 뒤로 바라보면 선장봉 아래로 사람이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 아마도 당시에 띠집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띠집의 사립문이 종일토록 닫혀있으니 이곳에 은거하는 사람이 떠나고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굽이에 객이 노를 저어 오니 바위에 핀 꽃은 떨어지지만 잣나비와 새들은 놀라지 않는다. 평온하고 한가로운 무이구곡 제6곡의 정경을 그려냈다. 평온하고 한가함은 이 굽이의 정경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정경을 바라보는 주자의 마음도 평온하고 한가롭다. 무이구곡 제1곡에서 출발하여 옥녀봉(玉女峯), 가학선(架壑船) 등을 거치면서 색욕(色慾)과 인생무상(人生無常)의 감정으로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던 주자는 이 굽이에 이르러 평온하고 한가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무이구곡 제7곡은 석당사(石唐寺)이다. 그런데 지금은 석당사의 존재를 이 굽이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아마도 주자가 은거할 때 있었던 절인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제7곡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삼앙봉(三仰峯)이다. 세 봉우리가 연이어 있으며 모두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다. 이 외에도 제7곡에는 삼층봉(三層峯), 북곽암(北廓巖), 천대봉(天臺峯), 낭간암(琅玕巖),성고암(城高巖) 등의 봉우리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며 벌여 있다. 특히 성고암 아래에는 깊은 못이 있는데 이 못의 이름이 방생담(放生潭)이다. 송나라 단평(이종의 연호) 1년(1234) 단오절에 산중의 도사(道士)들이 모여서 이 못에 고기를 방생한 이후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에 구곡계에서는 고기를 잡는 일이 금지되었다 한다. 주자는 무이구곡 제7곡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七曲移船上碧灘  칠곡이라 배를 저어 벽탄에 오르며
   隱屛仙掌更回看  대은병과 선장봉을 다
시금 돌아본다
   却憐昨夜峰頭雨  어여쁠손 어젯밤 산 위에 내린 비가
   添得飛泉幾道寒  폭포수에 더해지니 얼마나 차가울까
13)

여기서 푸른 여울은 제7곡을 휘돌아 흐르는 물줄기를 말하는데 이 물줄기는 제8곡에서 흘러오는 물과 제7곡에 솟아 있는 여러 봉우리들에서 흘러오는 물이 합해 힘차게 흐르는 여울이다. 이 때문에 대나무 뗏목을 운행하는 사공들이 제7곡에서 배를 저어 나가기 위해서는 다소간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 굽이에서 뒤를 돌아보면 제6곡의 선장봉과 제5곡의 대은병이 보이는데, 선장봉의 주름 무늬가 온전히 보이고 대은병이 그 옆으로 봉우리 부분을 드러낸다. 무이구곡 제7곡에서 바라보는 선장봉과 대은병의 모습은 또한 절경이 아닐 수 없다. 거대한 바위 벼랑과 그 바위 틈 사이로 자라는 나무들이 어우러져 이루는 경관은 뗏목을 타고 유람하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주자는 제7곡에서 어젯밤 산 위에 비가 내렸는데 이 비가 폭포수에 더해지면 물이 얼마나 차가울까를 생각하였다. 주자가 이 굽이에서 물의 차가움을 생각한 것은 차가운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기운은 제7곡이 가지는 기운인 동시에 주자의 마음이기도 한다. 차가운 기운은 청정한 기운을 드러내는 매체이니 이 말을 하는 주자의 마음이 청정한 것이다.

무이구곡 제8곡은 고루암(鼓樓巖)이다. 제8곡은 물이 매번 크게 돌아 흐르는 굽이이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따라 산이 둘러 있는 형상이다. 산들의 모양이 다양한 형상을 취하고 있는데 물에서 가까운 곳은 두 마리 거북의 형상을 한 야산(野山)이 자리하고 멀리는 여자 젖꼭지 모양을 한 두 봉우리가 솟아 있어 그 이름을 쌍유봉(雙乳峯)이라 한다. 이 외에도 코끼리 코 모양을 한 상비암(象鼻巖), 낙타 모양의 낙타봉(駱駝峯), 개구리 모양의 청와석(靑蛙石), 고양이 모양의 묘아석(猫兒石), 바다 조개 모양의 해개석(海蚧石) 등 다양한 형태의 산들이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어서 완연히 물 위에 하나의 동물원을 이루고 있다. 제8곡에 이르면 이전의 지형과는 차이가 있는데 지금까지 무이계 가까이 솟아 있는 산들이 이 지점부터 멀어지면서 확 트인 경관이 차츰 펼쳐진다. 이러한 지형은 제9곡에 이르면 더욱 확장되어 넓은 평지를 이룬다. 주자는 제8곡에 이르러 이러한 경관을 바라보며 제8곡시를 읊었다.

八曲風烟勢欲開  팔곡의 바람 안개 개이려 하니
   鼓樓岩下水縈洄  고루암 아래에 물이 돌아 흐르네
   莫言此處無佳景  이곳에 가경이 없다고 말하지 말지니
   自是遊人不上來  절로 유인이 올라오지 않는구나
14)

주자가 무이구곡 제8곡에 이르니 무이산에 자주 드리우는 안개가 개이려 했는데 안개가 개이면서 눈 앞에 나타난 봉우리가 고루암(鼓樓巖)이다. 고루암 아래로는 물이 크게 한번 돌아흐르는데 그저 평범한 경치이다. 제8곡은 이전의 굽이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이전의 굽이는 높은 산이 시내에 가까이 자리하며 절경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지점에 이르면 산들이 멀어지고 평평한 지형이 점차로 나타나며 평이한 경관을 형성하니 이전의 절경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전부터 무이계를 유람하는 사람들은 제8곡에 이르러 가경(佳景)이 없다고 말하며 배를 돌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주자는 이 점을 염려하여 이곳에 가경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하였다. 유람하는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주자는 무이구곡 제8곡에 전개되는 평이한 경관을 통해서 가경을 볼 수 있었다.평이한 경관 속에서 가경을 볼 수 있어야 진정한 유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주자는 이 굽이에 가경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한 것이다. 주자는 이 굽이를 통하여 더욱 평이한 공간인 제9곡을 향하여 배를 저어 나갔다. 그 곳은 바로 무이구곡의 극처였다.

무이구곡 제9곡은 신촌(新村)이다. 신촌의 현재 지명은 성촌(星村)이다. 신촌에 이르면 확 트인 공간이 펼쳐지며 집들이 여기저기 자리하는 들판과 그 앞으로 흐르는 넓은 무이계(武夷溪)를 만난다. 지금은 이 굽이가 관광지가 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데 여기에서 대나무 뗏목을 타고서 유람을 시작하여 무이구곡 제1곡에 이르러 유람을 마친다. 이 공간은 이렇다 할 경관이 없는데 백운암(白雲巖),제운봉(齊雲峯), 장암(幛巖) 등의 산들이 멀리 야트막하게 자리한다. ‘구곡계(九曲溪)’ 라고 새겨진 돌팻말이 자리하는 시냇가에 관광객을 실어나를 뗏목들이 늘어서 있고 그 옆에 배를 운행하는 사공이 기다리고 있다. 무이계 주변에는 키가 크지 않은 나무들이 시내를 따라서 늘어서 있고 한쪽에는 마을 사람들이 경작하는 밭이 자리하고 있다. 무이구곡 제1곡에서 거슬러 올라온 유람객이라면 극처인 제9곡에 이르러 너무 평이한 경관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주자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제9곡에 이르러 시 한 수를 지었다.

九曲將窮眼豁然  구곡이 다하려 할 때에 눈 앞이 확 트이니
   桑麻雨露見平川  뽕나무와 삼 비와 이슬의 평천이 보이네
   漁郞更覓桃源路  어랑은 다시 도원 가는 길을 찾지 말지라
   除是人間別有天  이곳 외에 세상에 별천지가 있겠는가
15)

주자가 도착한 무이구곡 제9곡도 현재의 제9곡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자 앞에 펼쳐진 구곡의 경관은 눈 앞이 확트일 정도의 넓은 평지가 전개되고 그 가운데 평천(平川)이 흐르는 굽이였다. 평천 주변에 자리한 밭에는 뽕나무와 삼들이 재배되고 있었고 그 곳에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이한 경치를 구경하려 하는 사람들이 이 굽이에 이르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 평이한 경관에 ‘이 굽이가 무이구곡의 극처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자는 ‘유람하는 이들은 다시 도원(桃園)으로 가는 길을 찾지 말라’ 하였다. 도원은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인간이 살고 싶어 하는 이상향이다. 이상향은 아름다운 경치가 전개되는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이 굽이에 이르러 유람을 마치지 않고 더 아름다운 공간으로나아가 유람의 흥취를 즐기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자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이곳 외에 세상에 별천지(別天地)는 없다고 단언하였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공간이 바로 별천지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공간에 그들이 구하고자 하는 도(道)가 존재하니 이 공간이 별천지라는 말이다. 이것이 주자가 구하고자 했던 도이고 사람들이 구해야 할 도이다.

 

 

  2. 구곡원림과 구곡시가의 전개(展開)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주자(朱子)를 매우 존숭하였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성리학자들의 추앙은 남달랐다. 그들은 주자의 사상을 존숭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주자가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하며 무이구곡(武夷九曲)을 경영하고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은 것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주자가 경영한 무이구곡과 창작한 「무이도가」는 단순한 공간, 일반적인 시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삶을 매우 높이 평가하며 자신의 삶 속에 이를 구현하려 하였다.이러한 성리학자들의 의지가 구곡원림(九曲園林)을 경영하고 구곡시(九曲詩)를 짓고 구곡도(九曲圖)를 그리는 형태로 나타났다. 구곡원림의 경영은 자신이 살고 있는 강호를 무이산의 무이구곡처럼 아홉 굽이를 설정하고 경영하는 것이었다. 구곡시를 짓는 것은 자신이 경영하는 구곡원림의 각 굽이를 주자의 「무이도가」처럼 시로 짓는 것이며 구곡도를 그리는 것은 구곡원림의 각 굽이를 한 화폭(畵幅)에 그려내는 것이었다. 성리학자들은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주자의 삶을 영위하려 하였고 이를 통해 주자의 사상과 문학을 본받으려 하였다.

 
  구곡원림(九曲園林)을 경영하고 구곡시(九曲詩)를 짓고 구곡도(九曲圖)를 그리는 행위는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의 전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이도가」에는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이 묘사되어 있고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의 소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이도가」가 언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주자대전(朱子大全) 이 고려 말에 유입되었다는 사실
16)과 서거정(徐居正)이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차운하여「주문공무이정사용문공운(朱文公武夷精舍用文公韻)」을 지었다는 사실17) 등을 볼 때 「무이도가」는 고려 말에 전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주자의 「무이도가」를 하나의 시 작품으로 인식하였을 뿐, 실제로 구곡원림을 경영하고 구곡시를 짓고 구곡도를 그리지는 않았다. 이러한 삶의 형태는 16세기에 이르러 성리학이 지배사상으로 등장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곡원림의 경영과 구곡시가의 창작은 기록상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1479-1560)의 운문구곡(雲門九曲)과 「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가 최초이다. 박하담은 중종 31년(1536)에 경북 청도의 운문산(雲門山)을 비롯한 동창천(東創川) 일대의 빼어난 승경(勝景)을 구곡으로 경영하면서 「운문구곡가」를 지었다.
18)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도산구곡(陶山九曲)을,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는 고산구곡(高山九曲)을 경영하였다. 이 밖에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직접 경영했던 구곡원림으로 유명한 것을 들면,

 한강(寒岡) 정 구(鄭逑; 1543-1620)의 무흘구곡(武屹九曲),
   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 1599-1678)의 오대구곡(梧臺九曲),
   우암(尤巖)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화양구곡(華陽九曲),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의 곡운구곡(谷雲九曲),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황강구곡(黃江九曲),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의 성고구곡(城皐九曲),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 1664-1730)의 횡계구곡(橫溪九曲),
   옥소(玉所) 권 섭(權燮; 1671-1759)의 화지구곡(花枝九曲),
   근품재(近品齋) 채헌(蔡瀗; 1715-1795)의 석문구곡(石門九曲),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우이동구곡(牛耳洞九曲),
   경암(敬菴) 이한응(李漢膺; 1778-1864)의 춘양구곡(春陽九曲),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의 포천구곡(布川九曲),
   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 1832-1893)의 옥계구곡(玉溪九曲),
   후산(厚山) 이도복(李道復; 1862-1938)의 이산구곡(駬山九曲)

등이 있다. 이 외에 퇴계가 지정했다고 전해지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죽계구곡(竹溪九曲), 그리고 충북 괴산군의 외선유구곡(外仙遊九曲)19)도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대개 주자의 「무이도가」를 연상하며 자신들이 경영했던 구곡원림을 구곡시가, 즉 한시(漢詩), 시조(時調), 가사(歌辭) 등의 형태로 읊었다. 조선 중엽 이후로는 많은 구곡시(九曲詩)와 구곡가(九曲歌)가 창작되었는데 이를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우선 한문구곡시(漢文九曲詩)와 국문구곡가(國文九曲歌)로 나누어지고 한문구곡시는 창작구곡시(創作九曲詩)와 한역구곡시(漢譯九曲詩)로 나누어진다. 창작구곡시는 「무이도가」의 차운시 형식으로 직접 경영하던 구곡원림을 노래한 원림구곡가(園林九曲歌)와 차운구곡시(次韻九曲詩), 화운구곡시(和韻九曲詩) 등으로 나누어진다. 한편 국문구곡가는 시조체 구곡가(時調體九曲歌), 가사체 구곡가(歌辭體九曲歌)로 나누어진다.

 

 

 

 

 

 

 園林九曲歌

 

 

 

 

 創作九曲詩

 

 次韻九曲詩

 

 

 

 

 

 

 和韻九曲詩

 

 

 漢文九曲詩

 

 

 

 

 

 

 

 

 漢譯九曲詩

 

 

 九曲歌系 詩歌

→ 

 

 

 

 

 

 

 

 

 

 時調體九曲歌

 

 

 

 

 國文九曲歌

 

 

 

 

 

 

 

 

 歌辭體九曲歌

 

 

원림구곡가(園林九曲歌)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직접 경영하던 구곡원림을 대상으로 읊은 시로서 구곡시가 중에서 국문구곡가와 함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각 구곡원림의 주인들이 모두 그 원림을 대상으로 한 구곡시가를 지은 것은 아니다. 도산구곡(陶山九曲)과 죽계구곡(竹溪九曲)을 경영한 퇴계 이황은 이를 대상으로 구곡시가를 남기지 않았는데 정조(正祖) 때에 와서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이 「도산구곡가(陶山九曲歌)」를 지어 구곡을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우암의 화양구곡(華陽九曲)과 수암의 황강구곡(黃江九曲)은 권섭이 이들을 대신하여 「화양구곡가(華陽九曲歌)」와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를 지었으며 곡운 김수증은 「곡운구곡가(谷雲九曲歌)」에서 서시와 제1곡시만 짓고 나머지는 자식과 종자(從子) 및 외손(外孫)이 짓도록 하였다. 그 밖의 원림구곡가는 대체로 자신들의 구곡원림을 소재로 그 아름다운 경치와 은거하는 즐거움을 읊고 있다. 박하담의 「운문구곡가」, 정구의 「무흘구곡가」, 권섭의 「화지구곡가」, 정만양의 「횡계구곡가」, 이한응의 「춘양구곡가」, 이원조의 「포천구곡가」등은 자신들이 직접 경영하던 구곡원림을 소재로 하여 읊은 원림구곡가이다. 차운구곡시(次韻九曲詩)는 수적인 면에서 볼 때 구곡시 중에서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성리학이 그 난숙기를 맞은 조선 중엽 이후 이름난 성리학자들은 대체로 한 번쯤 「무이도가」의 차운시를 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원림구곡시를 지은 이들은 거의 차운구곡시를 남기고 있다. 퇴계 이황의 「한거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십수(閒居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十首)」, 한강 정구의 「앙화주부자무이구곡시운십수(仰和朱夫子武夷九曲詩韻十首)」,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1783-1819)의 「경차무이도가십수(敬次武夷櫂歌十首)」, 경암(敬巖) 이한응(李漢膺)의 「경차무이도가(敬次武夷櫂歌)」등과 같이 차운구곡시는 실경(實景)을 근거로 하지 않고 「무이도가」나 무이지 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이 이상적으로 희원(希願)하던 주자의 삶과 주자학적 세계를 관념적으로 표출해 놓은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화운구곡시(和韻九曲詩)는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지은 한문구곡시를 보고 재차운(再次韻)하여 지은 구곡시이다. 정종로의 「차운암오시랑대익기증운병보기구곡십절봉정(次雲巖吳侍郞大益寄贈韻並步其九曲十絶奉呈)」시는 운암(雲巖) 오대익(吳大益)이 기증한 구곡시에 화운한 것이고20) 박승동(朴昇東)의 「차고산구곡담(次高山九曲潭)」시는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을 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우연히 옛 상자에서 「무이도가」를 차운한 「고산구곡담시」를 발견하고 이를 기뻐하여 화운한 것이다.21) 이 외에도 화운구곡시에는 「무이도가」를 차운은 했으되 율곡의 고산구곡(高山九曲)의 세계를 읊은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화운시도 있다.

국문구곡가(國文九曲歌)는 시조체 구곡가(時調體九曲歌)와 가사체 구곡가(歌辭體九曲歌)가 있는데 시조체 구곡가에는 연시조로된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가」, 수헌 이중경의 「오대구곡가」, 옥소 권섭의 「황강구곡가」가 있다. 그리고 가사체 구곡가는 근품재 채헌의 「석문구곡가」, 성재 류중교의 「옥계구곡가」, 후산 이도복의 「이산구곡가」등이 있다.

이러한 구곡시가는 영남 사림의 구곡시가와 호남 사림의 구곡시가라는 두 계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는 구곡시가 작자들의 지역적 차이보다 이들이 지닌 철학의 차이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퇴계 이황을 위시한 영남학파들은 주리론적 사상을 가진 반면에 율곡 이이를 위시한 기호학파들은 주기론적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히 그들의 사고, 세계관, 자연관 등은 상호 다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두 사림이 모두 주자의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 해석과 관점의 차이에 따라 그들이 지은 작품의 세계도 다르게 나타났다.

 

2.1 영남(嶺南) 사림(士林)의 구곡원림과 구곡시가

영남(嶺南) 사림(士林)의 구곡시가(九曲詩歌) 중에서 중요한 작품을 들면 다음과 같다.

박하담(朴河淡) 「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
   이 황(李滉) 「도산구곡가(陶山九曲歌)」
   정 구(鄭逑) 「무흘구곡가(武屹九曲歌)」
   이중경(李重慶) 「오대구곡가(梧臺九曲歌)」
   이형상(李衡祥) 「성고구곡가(城皐九曲歌)」
   정만양(鄭萬陽) 「횡계구곡가(橫溪九曲歌)」
   채 헌(蔡瀗) 「석문구곡가(石門九曲歌)」
   이한응(李漢膺) 「춘양구곡가(春陽九曲歌)」
   이원조(李源祚) 「포천구곡가(布川九曲歌)」

「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는 박하담(朴河淡)이 지은 구곡시(九曲詩)로 현재 확인되는 조선시대 최초의 구곡시이다. 박하담은 자를 응천(應千), 호를 소요당(逍遙堂)이라고 하는데 성종 10년(1479)에 청도군 북면 수야리(水也里)에서 태어나 1516년에 생원시에 합격, 여러 직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20세 때에 동향 선배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우졸자(迂拙子) 박한주(朴漢柱) 등이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를 당하고 41세 때에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등이 화를 당하자 둔세(遯世)의 뜻을 굳혔다. 그리고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와 협력하여 사창(社倉)을 지어 백성에게 환곡법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운문산 아래 입암(立巖)의 눌연(訥淵) 위에 소요당(逍遙堂)을 짓고 남명(南冥) 조식(曺植),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삼족당 김대유, 경재(警齋) 곽순(郭珣) 등과 교유하였다.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등과도 통문(通文)이 있어 서로 질의하고 토론한 영남의 거유로서 심경 ,근사록 , 주역 , 가례 등을 강론하였으며 「춘추대일통론(春秋大一統論)」을 저술하였다.

박하담은 58세 때인 1536년에 운문산(雲門山)에 구곡원림을 경영하며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운문구곡가」를 지었다.

天闢雲門地毓靈  하늘이 운문 열어 땅이 더욱 신령하니
   箇中山水自然淸  이 중에 산수가 자연스레 맑아라
   逍遙笻屐尋眞境  지팡이 짚고 쏘다니며 진경을 찾아
   歌和武夷曲曲聲  무이도가 굽이굽이 소리 화답하네

一曲淸流一葉船  일곡이라 맑은 물에 조각배 띄우니
   源頭知有若耶川  원두에 약야천이 있음을 알겠어라
   溯洄古渡茫然立  옛 나룻터 거슬러 올라 망연히 서니
   巖出雲端鳥叫烟  바위 구름 끝에 솟고 새 안개 속에 우네
   二曲中開石鼓峰  이곡이라 가운데 석고봉이 열리고
   宛如雲樂舞昭容  구름은 즐겁게 춤추는 밝은 얼굴이네
   吾人到此心無妓  내 이곳에 이르니 기생 생각 없어
   夢外陽臺路幾重  꿈 밖의 양대길은 얼마나 되는가

三曲橫坡等藕船  삼곡이라 빗긴 언덕 신선배 모양이고
   仙遊物外晝如年  신선이 물외에 노니니 일년이 하루네
   腸間五累今消盡  마음 속 오루를 이제야 씻어내니
   寶鑑明明我最憐  밝고 밝은 마음을 내 가장 아끼네

四曲環溪四面巖  사곡이라 시내가 사방의 바위 둘러 있고
   瑤花異草影毿毿  어여쁜 꽃 기이한 풀 그림자 길고 기네
   天門洞壑多奇絶  천문동 골짜기엔 절경이 많은데
   石氣摩雲月印潭  돌은 구름에 닿고 달은 못에 잠기네

五曲山高地愈深  오곡이라 산이 높고 땅이 더욱 깊어
   烟霞多處靄平林  안개 많은 곳에 평림이 빽빽하다
   焚香黙坐看周易  향을 사르고 묵묵히 앉아 주역을 읽어가니
   內院淸凉養性心  내원이 맑고 서늘하여 심성을 기르네

六曲林扃對石灣  육곡이라 숲의 문이 돌굽이 마주하고
   猿啼花笑不相關  잣나비 울고 꽃 피어도 상관하지 않네
   生生物理觀天地  생생의 사물 이치 천지에 보이니
   能使遊人倚櫂閑  유인으로 노에 의지하여 한가롭게 하노라

七曲登臨下白灘  칠곡이라 올라보니 아래로 백탄이고
   岧嶢梵宇隔林看  우뚝 솟은 절간이 숲 너머에 보이네
   披雲巨手今安在  구름 헤친 큰 손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秋月精神水面寒  가을 달의 정신은 수면처럼 차가워라

八曲雲林合復開  팔곡이라 운림이 닫혔다 열리니
   道人峰下小溪洄  도인봉 아래에 작은 시내 흐르네
   此閑佳景人知少  이 한가한 가경을 아는 이 적으니
   ○○○翁伴詠來  늙은이 짝하여 읊조리며 오네

九曲山窮水瑩然  구곡이라 산이 다하는데 물이 맑으니
   游鱗潑潑躍平川  노는 고기 발발히 평천을 뛰어오른다
   漁舟此日桃源覓  고깃배 이 날에 도원을 찾으니
   別有雲門一洞天  달리 운문에 한 동천이 있어라
22)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차운하여 시를 짓고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감상하며 무이지(武夷志) 를 읽고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상상하는 본격적 삶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퇴계는 어느 날 무이지 를 읽고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이 시의 제목은 「한거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십수(閒居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十首)」인데 이를 풀이하면 ‘한가롭게 지내면서 무이지 를 읽고 「구곡도가」를 차운한 10수’이다. 시의 제목에서 이 시가 어떻게 지어졌는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무이지 는 중국 무이지방의 풍물을 기록한 책이다. 물론 무이산과 무이구곡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실려 있다. 퇴계는 이 책을 읽고 상상 속에서 무이구곡을 유람하고 그 감회를 주자의 「무이도가」의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기 위하여 차운을 하였다. 퇴계가 지은 구곡시(九曲詩)의 대상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강호(江湖)가 아니라 그 옛날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구곡이었다. 그는 이 시를 지으면서 무이구곡이 가지는 아름다운 경관을 이렇게 읊었다.

不是仙山託異靈  선산은 이령을 붙이지 않나니
   滄洲遊跡想餘淸  창주의 유적을 생각함에 맑아라
   故能感激前宵夢  그러므로 전날 밤의 꿈에 감격하여
   一櫂賡歌九曲聲  노를 두드리며 구곡가를 이어서 부르네

我從一曲覓漁船  내가 일곡에서 고깃배에 찾아 오르니
   天柱依然瞰逝川  천주봉이 의연하게 서천을 굽어보네
   一自眞儒吟賞後  진유가 한 번 음상한 후로부터는
   同亭無復管風烟  동정에 다시 풍연을 관장함이 없어라

二曲仙娥化碧峰  이곡이라 선녀가 변화한 푸른 봉우리
   天姸絶世靚修容  아름답고 빼어나게 단장한 얼굴이라
   不應更覬傾城薦  다시는 경국지색 엿보지 않노라니
   閭闔雲深一萬重  오두막엔 구름이 깊고 깊게 드리우네

三曲懸厓揷巨船  삼곡이라 높은 벼랑에 큰 배가 걸려 있어
   空飛須此怪當年  공중을 날아와 걸린 그 때가 괴이하다
   濟川畢竟如何用  내를 건넘에 마침내 어떻게 할 것인가
   萬劫空煩鬼護憐  오랜 세월 귀신 보호와 사랑이 부질없네

四曲仙機靜夜巖  사곡이라 선기암은 밤이 되어 고요한데
   金鷄唱曉羽毛毿  금계에 새벽 되니 깃털이 길게 보이네
   此間更有風流在  이 사이에 참으로 풍류가 있으니
   披得羊裘釣月潭  양구 벗고 월담에서 낚시를 하리라

當年五曲入山深  그 때 오곡은 산 깊이 들어가니
   大隱還須隱藪林  대은이 도리어 수풀 속에 은거하네
   擬把瑤琴彈夜月  요금을 빗겨 안고 달밤에 타노라니
   山前荷簣肯知心  산 앞의 하궤자가 이 마음 알겠는가
   六曲回環碧玉灣  육곡이라 푸른 옥만이 둘러 있고
   靈蹤何許但雲關  신령한 자취는 어디인가 운관뿐이로다
   落花流水來深處  물 위에 꽃잎은 심처에서 오나니
   始覺仙家日月閑  비로소 알겠네 선가의 한가로움을

七曲橕篙又一灘  칠곡이라 노를 잡고 또 한 여울 오르니
   天壺奇勝最堪看  천호봉의 기이한 풍경 가장 볼 만하네
   何當喚取流霞酌  어찌하면 신선 먹는 유하주를 얻어서
   醉挾飛仙鶴背寒  취하여 비선을 끼고 학의 등을 타려나

八曲雲屛護水開  팔곡이라 구름이 걷히니 호수가 열리고
   飄然一棹任旋洄  표연히 노에 맡기고 물 위를 선회하네
   樓巖可識天公意  고루암은 조물주의 뜻을 가히 알아서
   鼓得遊人究竟來  유인을 불러서 끝까지 찾아오게 하네

九曲山開只曠然  구곡이라 산이 열리니 눈 앞이 트이고
   人烟墟落俯長川  사람 사는 촌락이 장천을 내려다 보네
   勸君莫道斯遊極  그대는 이곳이 유극이라 말하지 말라
   妙處猶須別一天  묘처는 오히려 모름지기 별천지가 있어라
23)

퇴계는 도산(陶山)의 북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처음 은거지로 삼았다가 후에 도산의 남쪽에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농운정사(朧雲精舍)를 세우며 구곡원림을 경영하였다.24) 그가 지은 「희작칠대삼곡시(戱作七臺三曲詩)」중에 3곡으로 석담곡(石潭曲), 천사곡(川沙曲), 단사곡(丹沙曲)이라는 명칭이 보이고 그 주(註)에도 “월란암은 산이 가깝고 물이 임하여 잘린 것이 누대의 형상과 같은 것이 무릇 7곳이고 물에 산을 둘러 굽이를 이룬 것이 무릇 3곳이다.(月瀾庵近山臨水而斷如臺形者凡七水繞山成曲者凡三)”25) 라고 한 것을 볼 때에도 당시 이미 어느 정도 구곡원림이 지정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청량산(淸凉山)의 계곡을 따라 낙천(洛川)이 굽이굽이 흐르면서 절경을 이루는 도산구곡 원림은 오가산지(吾家山志) 에 의하면 제1곡이 운암(雲巖), 제2곡이 월천(月川), 제3곡이 오담(鰲淡), 제4곡이 분천(汾川), 제5곡이 탁영(濯纓), 제6곡이 천사(川砂), 제7곡이 단사(丹砂), 제8곡이 고산(孤山), 제9곡이 청량(淸凉) 등이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제5곡에 마련했는데 이는 주자가 무이구곡의 제5곡에 무이정사를 건립한 것과 같이 역(易)의 구오(九五), 즉 비룡재천격(飛龍在天格)인 양오(陽五)를 택했으니 성리학자로서의 주도면밀함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퇴계는 도산 구곡원림을 대상으로 구곡가를 짓지 않았으나 정조 때의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이 「도산구곡가」를 지어 오늘날에 전하고 있는데 이 시에서 도산구곡의 대체적인 경관을 짐작할 수 있다.26)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경북 성주(星州) 출신으로 이황(李滉)․조식(曺植)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73년(선조 6)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계속 관직을 사임하며 학문에만 힘썼다. 1591년 통천군수(通川郡守)에 부임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 군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도록 선도하였다. 1594년 우승지, 강원도관찰사, 공조참판 등을 지냈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관련된 사람들을 석방하라는 상소를 올리고 귀향하였으며 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상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하였으며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유생들을 가르쳤다. 경서,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모든 분야에 통달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한강 정구는 주자가 무이정사를 짓고 무이구곡을 경영하였듯이, 퇴계가 도산서당을 짓고 도산구곡을 경영하였듯이 무흘정사(武屹精舍)를 짓고 무흘구곡(武屹九曲)을 경영하였다. 즉 그가 나서 자란 성주군 수륜면의 봉비암(鳳飛巖)으로부터 김천시 증산면 용추(龍湫)까지 넓은 지역을 구곡원림으로 설정하고 경영하면서 대가천(大加川)의 시내를 따라서 펼쳐지는 가경을 대상으로 「무흘구곡가」를 지었다.

天下山誰最著靈  천하의 산중에 어느 것이 가장 신령한가
   人間無似此幽淸  세상에 이같이 그윽하고 청정함이 없어라
   紫陽況復曾棲息  더욱이 주자가 다시 서식하니
   萬古長流道德聲  오래도록 도덕성이 길이 흐르네

一曲灘頭泛釣船  일곡이라 여울가에 고깃배를 띄우니
   風絲繚繞夕陽川  석양이 드리운 시내에 실바람이 둘러도네
   誰知捐盡人間念  그 누가 알리오 세상 근심 모두 버리고
   唯執檀槳拂晩煙  박달 노를 잡고 늦은 안개 헤칠 줄을

二曲佳妹化作峰  이곡이라 어여쁜 여인이 산봉우리되어
   春花秋葉靚粧容  봄꽃과 가을잎으로 아름답게 단장했네
   當年若使靈均識  그 때에 굴원으로 알게 하였다면
   添却離騷說一重  이소에다 한두 구절 더했으리라

三曲誰藏此壑船  삼곡이라 누가 이 골짜기에 배를 숨겼는가
   夜無人負已千年  밤에 질 사람 없어 이미 천년을 흘렀네
   大川病涉知何限  큰 내는 건너기 어렵거늘 끝이 어디인가
   用濟無由只自憐  건널 방법 없으니 다만 절로 가련하네

四曲雲收百尺巖  사곡이라 백척암에 구름이 걷히니
   巖頭花草帶風髮  바위 위에 꽃과 풀이 바람에 흩날리네
   箇中誰會淸如許  그 중에 누가 이러한 청정함을 만나겠나
   霽月天心影落潭  하늘에 개인 달 그림자가 못에 드리우네

五曲淸潭幾許深  오곡이라 맑은 못이 얼마나 깊은가
   潭邊松竹自成林  못가의 솔과 대가 절로 수풀 이루네
   幅巾人坐高堂上  유건 쓴 이 높은 당 위에 앉아서
   講說人心與道心  인심과 도심을 강설하네

六曲茅茨枕短灣  육곡이라 띠집이 짧은 물굽이에 자리하니
   世紛遮隔幾重關  세상의 시비를 막는 것이 몇 겹이나 되는가
   高人一去今何處  고인은 한번 가니 지금은 어느 곳인가
   風月空餘萬古閑  풍월이 속절없이 남아 만고에 한가롭네

七曲層巒繞石灘  칠곡이라 층층의 봉우리 돌여울 둘러 있어
   風光又是未曾看  이러한 풍광 또한 일찍이 보지를 못했어라
   山靈好事驚眠鶴  산령이 잠든 학을 깨우는 일 좋아하니
   松露無端落面寒  소나무 이슬이 무단히 얼굴에 떨어져 차갑네

八曲披襟眼益開  팔곡이라 옷깃을 헤치니 눈이 더욱 열리는데
   川流如去復如廻  시내가 흘러가다 다시 돌아오는 듯하여라
   煙雲花鳥渾成趣  안개 구름 꽃 새 모두 정취를 이루니
   不管遊人來不來  유인이 오든 말든 관계하지 않을래라

九曲回頭更喟然  구곡이라 머리 돌려 다시 탄식하니
   我心非爲好山川  나의 마음 산천을 좋아하지 않아라
   源頭自有難言妙  원두는 말하기 어려운 묘처가 있으니
   捨此何須問別天  이를 버리고 어찌 별천지를 묻겠는가
27)

무흘구곡은 제1곡이 봉비암, 제2곡이 한강대(寒岡臺), 제3곡이 무학정(舞鶴亭), 제4곡이 입암(立巖), 제5곡이 사인암(捨印巖),제6곡이 옥류동(玉流洞), 제7곡이 만월담(滿月潭), 제8곡이 와룡암(臥龍巖), 제9곡이 용추이다. 무흘구곡은 한강이 27세 되던 1569년(선조 2)에 성주 창평(蒼坪)에 복거하면서 경영이 시작되어 1573년 한강정사, 1604년에 무흘정사를 건립하고 1612년에 노곡정사(蘆谷精舍), 사양정사(泗陽精舍)로 이주하기까지 무흘구곡의 경영이 지속되었다.

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은 혁혁한 문벌의 후예로서 1599년(선조 22)에 외가인 예천군의 고평리(高坪里)에서 태어나 외조부인 반몽벽(潘夢壁)과 외숙인 동주(東洲) 반로(潘)에게 글을 배웠고 약포(藥圃)의 아들인 동호(東湖) 정윤위(鄭允偉)를 사사하여 약포와 퇴계의 학문에 간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20세 되던 해에 고향으로 돌아와 강호지락(江湖之樂)을 즐기게 되었다. 그의 나이 44세 때인 1642년(인조 20)에 운문산을 유람하다 청도군 하남면 오대(烏臺)의 절승을 발견하고 이곳에 오대정사(梧臺精舍)인 봉서정(鳳棲亭)을 세워 구곡원림을 경영하며 오대어부가구곡(梧臺漁父歌九曲)」을 지었다.

「오대어부가구곡」은 수헌 이중경이 58세 때인 1656년(효종 7)에 지어져 구곡가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서곡(序曲)이 없이 시조 9장으로만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수헌은 이 외에도 「어부사오장(漁父詞五章)」, 「어부별곡전삼장(漁父別曲前三章)」, 「어부별곡후삼장(漁父別曲後三章)」등의 시조를 지었는데 「오대어부가구곡」과 「어부사오장」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어부가」장가 9장과 단가 5장을 연상하여 지은 듯하나 실제로는 「무이도가」를 계승하여 창작한 구곡가이다. 따라서 이 구곡가는 형식은 어부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은 구곡가의 내용을 취하고 있는 어부사와 구곡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시조이다.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으로 1680년(숙종 6)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호조좌랑으로 있을 때 동지사가 가지고 가는 세폐포(歲幣布)가 병자호란 이후 바치던 보포(報布)보다 더 긴 것을 보고 장차 폐가 될 것을 걱정하여 끊어버리고 보냈다. 이어 여러 곳에 지방관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703년 제주목사(濟州牧使)가 되어 석전제(釋奠祭)를 행하던 3읍(邑)의 성묘(聖廟)를 수리하였고 덕망 높은 선비를 뽑아 교학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고(高), 부(夫), 양(良; 뒤에 梁으로 고침)의 삼성사(三姓祠)를 건립하는 등 유교를 장려하였다. 이에 도민들은 송덕비를 세워 그의 덕행을 기렸다. 그 뒤 30년간 영천(永川)에서 학문과 후학양성에 몰두하며 지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경상도소모사(慶尙道召募使)로서 공을 세웠으나 노론의 무고로 한때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 1796년(정조 20)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영천의 성남서원(城南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만년에 영천시에 호연정(浩然亭)을 짓고 성고구곡(城皐九曲)을 경영하며 「성고구곡가(城皐九曲歌)」를 지었는데 제1곡은범월병(泛月屛), 제2곡은 서운암(棲雲巖), 제3곡은 하수구(下水龜), 제4곡은 만세정(晩洗亭), 제5곡은 야연층(惹烟層), 제6곡은 적파탄(寂波灘), 제7곡 정부장(鼎扶莊), 제8곡은 사박협(沙搏峽),제9곡 청통사(淸通社) 등으로 되어 있다.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동생 규양(葵陽)과 함께 학문에 몰두하며 저술에만 힘썼다.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성리학, 예학, 천문, 지리, 율려(律呂) 등에 두루 조예가 깊었다. 그는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을 지지하여 이(理)는 본연이요, 기(氣)는 성절(性節)로서 만물을 생성케 하는 우주의 근원이라 하였다. 1724년(경종 4) 순릉참봉(順陵參奉), 그 뒤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영천(永川)의 횡계서원(橫溪書院)에 제향되었다.

훈수 정만양은 1701년(숙종 27)에 화북면 횡계동에 복거하며 횡계구곡(橫溪九曲)을 경영하게 되었으니 동생 지수(篪叟) 정규양이 횡계의 수석이 빼어난 제3곡에 태고와(太古窩)를 짓자 제1곡에 육유재(六有齋)를 지어 서식하였다. 1704년에는 제2곡에 ‘지지유정(知止有定)’의 뜻을 취하여 정재(定齋)를 세워 강학을 하니 제자들이 날로 모여들어 두 와(窩)로서는 모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크게 개축하여 옥간정(玉磵亭)이라 하였다. 원근의 시객들이 더욱 운집하여 태고와의 사이에 진수재(進修齋)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시내를 따라서 5리쯤 올라가 서사(書社)를 지어서 여러 생도들의 강마지소(講磨之所)로 삼았다. 그리고 작은 배를 만들어 홍류담에 띄워 놓고 아이들로 어부사, 적벽부 등을 송영하게 하였다. 이러한 삶 속에서 훈지는 「횡계구곡가」를 지었다.

「춘양구곡가(春陽九曲歌)」는 경암(敬巖) 이한응(李漢膺)이 지은 구곡가이다. 경암은 자는 중모(仲模)이고 호는 경암(敬庵)이며 본관은 진보(眞寶)로 경북 안동(安東) 출신이며 이진굉(李鎭紘)의 아들이다. 그는 과거에 관심을 두지 않고 궁리진성(窮理盡性)에 뜻을 두어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849년(헌종 15) 천거를 받아 가감역(假監役)을 지내고 1857년(철종 8)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1860년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경암 이한응은 평생 후진 양성에 뜻을 두어 이만준(李晩埈) 등의 문인을 두었으며 또한 저술에 전념하여 주자(朱子), 장식(張軾),여조겸(呂祖謙)과 이황(李滉)의 저서 중에서 622조의 글을 뽑아 14권의 속근사록(續近思錄) 을 만들었다. 그는 주로 이황의 학설을 따랐는데, 사단(四端)·칠정(七情)은 인심(人心)·도심(道心)의 다른 명칭일 뿐이며 인심은 기(氣)를 주로 하고 도심은 이(理)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라 하였다. 또 인심·도심은 사단·칠정의총명(總名)이고 사단·칠정은 인심·도심의 조건(條件)이라 하여이이(李珥), 기대승(奇大升)의 학설은 현혹되기 쉽지만 결코 옳지 않고 이황의 학설이 옳다고 하였다. 또 실리(實理)의 작용은 능연(能然)의 소이(所以)라 하여 사단․칠정이 대대(對待)할 때 나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중용(中庸) 과 대학(大學) 에 관심이 깊어 혈구(絜矩)의 의미를 ‘추기탁물(推己度物)’로 표현하였다. 또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을 설명하여 삼강령을 기본으로 하고 지지(知止) 다음을 공효(功效)로, 성의(誠意)를 긴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성인(聖人)과 중인(衆人)을 구별하여 성인은 천(天)과 합하고 현인(賢人)은 천을 배우지만 중인은 천과 어긋나므로 각자 구별을 두어 수양할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경암 이한응은 봉화군 춘양면에 춘양구곡을 경영하였는데 춘양은 신령한 골짜기와 맑은 시내를 가졌다. 춘양의 물은 태백산 서남 두 계곡으로부터 흘러오다가 남류로 합하여 낙강(洛江)으로 들어가서 수백리를 흐른다. 태백산은 신령하고 빼어나며 방박한데 춘양이 그 중심에 처함으로써 그윽하고 깊을 뿐만 아니라 시내가 흐르면서 가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경암은 적연(笛淵)으로부터 도연(道淵)까지 구곡을 설정하고 「춘양구곡가」를 지었다.

춘양구곡은 제1곡이 적연, 제2곡이 옥천(玉川), 제3곡이 풍대(風臺), 제4곡이 연지(硯池), 제5곡이 창애(蒼崖), 제6곡이 쌍계(雙溪), 제7곡이 서담(書潭), 제8곡이 한정(寒亭), 제9곡이 도연이다.「포천구곡가(布川九曲歌)」의 원래 명칭은 「포천구곡차무이도가(布川九曲次武夷櫂歌)」로서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가 지은 구곡가이다. 응와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경상도 성주 출신이다.1809년(순조 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812년 권지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고 1815년 부정자, 이듬해 저작을 거쳐 봉상시직장 겸 승문원 박사에 임명되었다. 1818년 성균관 전적, 사헌부감찰, 예부 감찰, 예조·형조   좌랑이 되고 이듬해 지평이 되었다. 이 해 말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20년 정언이 되고, 이어 지평으로 자리를 옮겼다. 1826년 성균관 직강을 거쳐 1830년 정언에 임명되었다. 1833년 시강원 사서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1836년 정언 겸 실록 편수관이 되었으나 소(疏)를 올려 사직하였다.

1849년 장령을 거쳐 군자감 정이 되었는데 이 때 척사 통문(斥邪通文)을 지어 경상도의 각 향교와 서원에 발송하였다. 1840년 강릉 부사, 이듬해 제주 목사가 되었으며, 1843년 용양위 부호군·형조 참의를 지냈다. 1844년 승문원 우승지 겸 경연 참찬관·춘추관 편수관에 임명되고 이어 우부승지,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852년말 대사간에 임명되고, 이듬해 좌승지 겸 상의원 부제조를 거쳐 경연 참찬관을 지냈다.1854년 대사간에 임명되고, 1856년 다시 대사간이 되었으며,이어 용양위 부호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거쳐 병조 참판이 되었다. 1864년 호군으로 향약과 삭강(朔講)을 실시하기를 주장하자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오가작통(五家作統)의 구식(舊式)과 더불어 거듭 밝혀 8도(道)와 4도(都)에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대왕대비에게 묻자 우선 이원조의 고향인 성주에 실시하여 실효가있으면 차차 시행하게 하도록 하였다. 이 해 다시 대사간·병조 참판을 거쳐 이듬해 한성부 판윤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특지로 발탁되었다.이어 용양위 대호군 겸 지의금부사·지춘추관사가 되고 기소에 들어갔다. 고종 3년(1866) 공조 판서에 임명되고, 1869년 정헌대부에 오르고, 1871년 숭정대부 용양위 상호군겸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남인(南人)으로 청환(淸宦)을 두루 거쳤으나 산수에 뜻을 두어 성주군 포천에 구곡원림을 경영하면서 「포천구곡가」를 지었다.32) 포천구곡은 제1곡이 법림(法林), 제2곡이 조연(槽淵),제3곡이 백석(白石), 제4곡이 포천석(布川石), 제5곡이 당폭(堂瀑), 제6곡이 사연(沙淵), 제7곡이 석탑(石塔), 제8곡이 반선대(盤船臺), 제9곡이 홍개(洪開)이다.

 

2.2 기호(畿湖) 사림(士林)의 구곡원림과 구곡시가

기호(畿湖) 사림(士林)의 구곡시가(九曲詩歌) 중에서 중요한 작품을 들면 다음과 같다.이 이(李珥)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송시열(宋時烈) 「화양구곡가(華陽九曲歌)」 김수증(金壽增) 「곡운구곡가(谷雲九曲歌)」 권 섭(權燮)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 권 섭(權燮) 「화지구곡가(花枝九曲歌)」 류중교(柳重敎) 「옥계구곡가(玉溪九曲歌)」 이도복(李道復) 「이산구곡가(駬山九曲歌)」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황해도(黃海道) 고산군(高山郡)에 소재한 석담구곡(石潭九曲)의 경관을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로 지어 읊었다. 이 「고산구곡가」는 퇴계 이황의 구곡시(九曲詩)와는 달리 시조(時調)의 형식을 빌어서 지었으니 구곡가(九曲歌)가 된다. 율곡은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단순히 차운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구곡원림(九曲園林)을 경영하고 이 원림의 경관을 대상으로 10수의 시조를 지은 것이다. 따라서 율곡의 「고산구곡가」는 「무이도가」의 조선화(朝鮮化)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단순히 모방하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것으로 만든 것이었다. 또한 「고산구곡가」는 「무이도가」와 달리 각 굽이마다 지명을 언급하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제1곡은 관암(冠巖), 제2곡은 화암(花巖), …… 제8곡은 금탄(琴灘), 제9곡은 문산(文山) 등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33) 이러한 방식은 이후 조선시대 구곡시가에서 보편적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시조는 「고산구곡가」의 서시이다. 율곡은 황해도 석담구곡에 집을 짓고 은거하였다. 처음에 이곳을 모르던 사람들이 율곡이 이 굽이에 은거를 시작하자 모두 찾아왔다. 율곡이 이 석담구곡에 은거를 시작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무이산을 상상하고 주자를 배우겠다는 의식에서였다. 무이산을 상상한다는 말은 무이구곡을 이 석담에다 경영하겠다는 의미이며 주자를 배우겠다는 말은 주자의 삶을 이 굽이에 구현하겠다는 의미이다. 주자가 무이구곡 제5곡에 무이정사를 지어놓고 제자를 가르치며 은거한 삶을 이 석담구곡에서 구현하겠다는 의미이다. 벗들이 이 굽이를 찾아오는 이유는 율곡과 뜻을 같이 하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이다.

구곡가의 창작은 율곡에 머무르지 않고 계승되어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다. 율곡을 존숭하는 노론계 문인들은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한역(漢譯)하여 구곡시(九曲詩)를 지었다. 이러한 작업에 주도적 역을 한 인물로 송시열(宋時烈)이 있었다. 그는 김수증(金壽增)이 보내온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를 보고 난 후, 이구곡도에다 구곡시를 적어서 장정(裝幀)하려 하였다. 이에 이 일을 그의 문인인 권상하(權尙夏)에게 맡겼는데 권상하는 먼저 구곡시를 차운할 사람을 선정하였다. 선정된 문인으로 김수증(金壽增), 김수항(金壽恒), 권상하(權尙夏), 송주석(宋疇錫), 김창흡(金昌翕),이희조(李喜朝), 김창협(金昌協), 정호(鄭澔), 이여(李畬) 등 아홉 명이 선정되었다. 선정된 문인들은 「고산구곡시」한 수씩을 분배 받아 구곡시를 지었는데 이렇게 지어진 구곡시는 「고산구곡도」와 함께 장정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송시열과 권상하가 구곡시를 지을 문인들을 선정하는 과정이다. 이들은 문인들을 선정할 때 매우 신중한 자세를 가졌는데 이것은 구곡시를 지은 목적이 율곡의 학통(學統)을 계승하고 서인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五百天鍾地炳靈  오랜 시간 천종이라 땅이 밝고 신령하니
   栗翁姿稟粹而淸  율옹의 자질과 품격이 순수하고 맑아라
   高山九曲幽深處  고산의 아홉 굽이 그윽하고 깊은 곳에
   汨㶁寒流點瑟聲  찬 시내 물소리 거문고 소리를 내도다
   尤庵宋時烈

一曲松間漾玉船  일곡이라 송간에 옥선을 띄우니
   冠巖初日暎前川  관암에 솟는 해가 앞내를 비추네
   携笻坐待佳朋至  지팡이 짚고 앉아 좋은 벗 오기를 기다리니
   遠岫平蕪捲夕煙  먼 산과 평무에 저녁 연기 걷히어라
   文谷金壽恒

二曲僊巖花暎峰  이곡이라 선암의 꽃들이 봉우리에 빛나니
   碧波流水漾春容  푸른 물결 흐르는 물 위로 봄꽃이 떠가네
   落紅解使漁郞識  지는 꽃이 흩어져 어랑이 알게 될지언정
   休說桃源隔萬里  도원이 만리나 떨어졌다 말하지 말지어다
   霽月宋奎濂

三曲曾聞詠壑船  삼곡이라 일찍이 학선을 읊조림 들었는데
   上游移櫂問何年  위로 노닐며 노 저어 간 것이 몇 년인가
   山禽解說滄桑事  산새가 상전이 벽해된 일들을 말하는데
   下上其音正可憐  아래 위의 산새 소리 진실로 어여쁘네
   丈巖鄭澔

四曲松崖萬丈巖  사곡이라 송애는 만 길의 바위로다
   日斜林影翠毿毿  해 저무니 숲 그림자 푸른 빛을 띄네
   怡情正在幽深處  기쁜 뜻은 실로 그윽하고 깊은 곳에 있으니
   雲白山靑集一潭  흰 구름 푸른 산 한 연못에 드리우네
   睡谷李畬

五曲雲煙深復深  오곡이라 구름과 안개가 깊고도 깊으니
   武夷精舍此山林  무이의 정사가 이 산의 숲 속에 자리하네
   修然杖屢淸溪上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맑은 시내 오르니
   誰會吟風詠月心  그 누가 음풍농월하는 마음을 알아줄까
   谷雲金壽增

六曲春深釣綠灣  육곡이라 봄이 깊어 푸른 시내에서 낚시하고
   歸時溪月照松關  돌아오는 때에 시내 달이 송관을 비추네
   濠梁上下天機活  해자 다리 아래 위로 천기가 활발하니
   魚我相忘果孰閑  물고기와 내가 서로 잊어 그 누가 한가한가
   三淵金昌翕

七曲風巖倒碧灘  칠곡이라 풍암이 푸른 여울에 드리우고
   錦屛秋色鏡中看  금병의 가을 빛이 잔잔한 수면에 보인다
   悠然獨坐忘歸路  유연히 홀로 앉아 돌아갈 길 잊으니
   一任霜風拂面寒  한결같이 서리 바람 맞아 얼굴이 차갑네
   遂庵權尙夏

八曲溪山何處開  팔곡이라 산과 시내 어디에서 열리는가
   琴灘終日好沿洄  종일토록 즐겨 금탄을 따라서 걸어가네
   牙絃欲奏無人和  거문고 연주하려 하나 화답하는 이 없어
   獨對靑天霽月來  홀로 푸른 산 마주하고 달과 함께 돌아오네
   芝村李喜朝

九曲文巖雪皓然  구곡이라 문암은 눈이 하얗게 쌓이니
   奇形掩盡舊山川  기이한 형상이 옛 산천을 다 덮어라
   遊人謾說無佳景  유인은 가경이 없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未肯窮尋此洞天  이 동천을 즐겨 끝가지 찾지를 않노라35)
   校理宋疇錫

율곡의 문인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사사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華陽洞)에 암서재(巖棲齋)를 건립하고 화양구곡(華陽九曲) 원림(園林)을 경영하였다. 우암은 화양동에 은거하며 경영했던 화양구곡은 제1곡이 경천벽(擎天壁), 제2곡이 양천(陽川), 제3곡이 읍궁암(泣弓巖), 제4곡이 금사담(金沙潭), 제5곡이 첨성대(瞻星臺), 제6곡 능운대(凌雲臺), 제7곡 와룡담(臥龍潭), 제8곡 학소대(鶴巢臺), 제9곡이 파관(巴串)이다. 그런데 우암은 화양구곡 원림에 대한 구곡시를 남기지 않았다. 대신 옥소 권섭이 「화양구곡시(華陽九曲詩)」10수를 지었다.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장손으로 태어나 1650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평강현감(平康縣監)을 거쳐 성천부사(成川府使), 후에 한성좌윤(漢城佐尹),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수증은 1670년부터 강원도 화천군에 소재하는 화악산의 곡운(谷雲)이 절승지임을 발견하고 정사를 짓기시작하였는데 1675년 성천부사로 재임하다 우암과 아우 김수항(金壽恒)이 유배를 당하자 곡운으로 들어가 은거할 뜻을 굳혔고 기사사화(1689) 이후 이곳에 은거하게 되었다.

김수증이 곡운구곡(谷雲九曲)을 발견하게 된 동기는 평강현감으로 부임하며 곡운에서 불과 30리 떨어져 있는 서오지촌(鋤吾志村)을 지나가다 곡운의 경치가 수려하다는 말을 듣고 1670년(현종11)에 직접 탐승(探勝)한 데 있다. 곡운은 원래 사탄(史呑)이라 했는데 이 향음(鄕音)을 고쳐서 곡운이라 이름하고 이를 그의 호(號)로 삼았다. 이 해 가을부터 집을 짓기 시작하여 1675년 겨울에는 7칸의 모사(茅舍)를 완성하고 식구들은 데려다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3칸의 초당을 지어 곡운정사(谷雲精舍)라 편액하고 다시 농수정(籠水亭)을 짓고 가묘(家廟)를 세웠다. 그 후 1681년에 외직으로 다시 나갔다가 기사사화로 인해 곡운으로 돌아와 화음동(華陰洞)에 집을 다시 고쳐 짓고 은거하였다.

이와 같이 김수증은 1670년부터 정사를 짓고 곡운(谷雲) 구곡원림(九曲園林)을 경영하면서 「곡운구곡가(谷雲九曲歌)」를 지었다.37) 김수증은 「곡운구곡가」의 서시와 제1곡 방화계(傍花溪)를 짓고 나서 제2곡 청옥협(淸玉峽)은 아들 창국(昌國)이, 제3곡 신녀협(神女峽)은 종자(從子)인 창집(昌集)이, 제4곡 백운담(白雲潭)은 종자인 창협(昌協)이, 제5곡 명옥뢰(鳴玉瀨)는 종자인 창흡(昌翕)이, 제6곡 와룡담(臥龍潭)은 아들 창직(昌直)이, 제7곡 명월계(明月溪)는 종자인 창업(昌業)이, 제8곡 융의연(隆義淵)은 종자인 창집(昌緝)이, 제9곡 첩석대(疊石臺)는 외손 홍유인(洪有人)이 짓도록 하였다.

김수증은 곡운에 정사를 건립한 후 1년만인 1671년에 「곡운정사기(谷雲精舍記)」를 우암에게 쓰게 하였고 우암 및 다른 문인들과 합작으로 「고산구곡가」의 화운시를 지었으며 1673년에는 해주의 석담서원(石潭書院)을 찾아가 율곡을 숭앙하는 시를 짓기도 하는 등 구곡원림의 경영과 구곡시 창작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김수증의 종현손(從玄孫)들도 「구운구곡가」를 각각 1수씩 분담해 화운하여 「곡운구곡도」에 후첩(後帖)하기도 하였다.「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는 옥소 권섭이 그의 백부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은거했던 충북 제천군 한수면 황강(黃江) 일대의 승경을 노래한 시조이다. 권상하는 1641년(인조 19)에 태어나 우암 송시열을 사사하여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그는 우암이 자헌대비(慈憲大妃) 복상문제(服喪問題)로 덕원(德源)에 유배되자 황강의 원림에 은거하며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였다.

1689년 우암이 기사환국으로 사사 당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만동묘(萬東廟)를 건립하였다. 이 후 숙종으로부터 우의정, 좌의정 등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옥소는 수암을 백부로서보다 도학자로 존숭하여 황강구곡(黃江九曲) 원림(園林)을 대상으로 한 구곡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황강구곡가」10수를 지었고 이와 함께 한역시도 남겼다.

「황강구곡도기(黃江九曲圖記)」에 의하면 황강구곡은 청주(淸州)와 청풍(淸風)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제1곡은 대암(對巖), 제2곡은 화암(花巖), 제3곡은 황강(黃江), 제4곡은 황공탄(皇恐灘), 제5곡은 권호(權湖), 제6곡은 금병(錦屛), 제7곡은 부용벽(芙蓉壁),제8곡은 능강(陵江), 제9곡은 구담(龜潭)에 이르는 아홉 굽이의 절경인데 「황강구곡가」는 서시와 함께 이 절경을 한 수씩의 시조로 읊은 구곡가이다. 황강구곡은 경치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수암과 옥소와 깊은 인연이 깃든 곳이다. 제3곡인 황강은 권상하의 선조 3대가 살던 곳으로 근처에 산소가 있고, 제9곡인 구담봉(龜潭峯)은 한강 남쪽으로 몇 리를 올라가야 하는 곳이지만 수암과 옥소는 이곳을 정원처럼 드나들며 풍유의 생활을 하였고 옥소는 구담봉 강 건너편에 정자를 지어놓고 구담봉을 완상하였으며 구담봉 뒤에 자신의 유택(幽宅)까지 마련해 놓고 비문(碑文)도 직접 지어 두었다가 그곳에 묻혔다.

「옥계구곡가(玉溪九曲歌)」는 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가 지은 「옥계조(玉溪操)를 이른 것인데 이는 10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곡(曲)의 구분을 분명히 명시하지 아니하고 압축하여 읊은 단형 가사체 구곡가이다. 류중교는 1832년(순조 32)에 태어나고 자를 치정(穉程), 호를 성재라 했으며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의 문인으로 1876년(고종 13)에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은거하였다. 그런데 그의 문집인 성재선생문집 별집에 수록되어 있는 「동요율격(東謠律格)」에는 자서를 곁들여 율곡의 「고산가(高山歌)」와 「옥계조」를 실어 놓고 있다.

이 「옥계조(玉溪操)」는 금곡(琴曲)으로 되어 있는데 제목 아래 주(註)에 따르면, 옥계구곡(玉溪九曲)은 가평군 화악산(華岳山) 아래에 자리한 구곡원림으로 제1곡은 와룡추(臥龍湫), 제2곡은 무송암(撫松巖), 제3곡은 탁영뢰(濯纓瀨), 제4곡은 고슬담(鼓瑟潭), 제5곡은 일사대(一絲臺) 제6곡은 추월담(秋月潭), 제7곡은 청풍협(靑楓峽), 제8곡은 귀유연(龜遊淵), 제9곡은 농완계(弄緩溪)로 구성되어 있다.40) 「옥계조」에서 제1행 2구는 제1곡을 읊은 것이고 제2행에서 제10행은 제2곡부터 제8곡까지, 제11행과 제12행은 제9곡을 읊었으니 「옥계구곡가」는 변형구곡가라 할 수 있다. 「이산구곡가(駬山九曲歌)」는 이도복(李道復)이 지은 가사체의 구곡가이다. 이도복은 1862년(철종 13)에 월암(月庵) 이동범(李東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를 양래(陽來), 호를 후산(厚山)이라 하였다.

그는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연재(淵齋) 송병준(宋秉濬),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면우(勉宇) 곽종석(郭鐘錫),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간재(艮齋) 전우(田愚) 등과교유하였으며 1905년에 면우를 만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부르짖으며 천하를 안정시킬 정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며 영남 사림을 모아 계를 맺고 고향인 신안동에 수운정을 짓고 민족정기를 일으키면서 유학 진흥에 진력하기도 하고 이완용 등 7적을 토벌하자는 글을 종가(鍾街)에 내걸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자 영남과 호남의 유서 깊은 고적을 두루 답사한 뒤 진안 마이산(馬耳山) 골짜기로 들어가 이산정사(駬山精舍)를 짓고 은거하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마이산에서 발원하여 섬진강 상류를 이루는 백마천의 좌포 대두산 아래 이산구곡(駬山九曲)을 경영하면서 「이산구곡가(駬山九曲歌)」를 지었다.이산구곡은 「마이산기(馬耳山記)」에 의하면 제1곡은 대두산(大頭山), 제2곡은 귀소(龜沼), 제3곡은 광대봉(廣大峯), 제4곡은용연(龍淵), 제5곡은 마이정사(馬耳精舍), 제6곡은 나옹암(懶翁菴), 제7곡은 금당사(金塘寺), 제9곡은 마이정(馬耳頂)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구곡가를 지은 연대는 마이정사를 짓고 유림에게 보낸 윤고문(輪古文)을 살펴보면, 이 윤고문을 보낼 때인 1925년 쯤으로 추증된다. 이도복은 서사에서 이산구곡이 무이구곡, 고산구곡, 화양구곡 못지 않은 승지임을 노래하고 마이산에서 발원하여 섬진강 상류를 이루는 백마천(白馬川)의 대두산까지 설정된 구곡의 경관을 읊으면서 최익현, 송병준 등의 절의를 찬양함으로써 유교적 이상을 드려내려고 하였다.

 

 1)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창작과비평사.

 2)金昌元, 「壺中天地의 園林美學과 陶山十二曲의 江湖」, 國語國文學118, 國語國文學會,1997.

 3)李殷昌, 「韓國儒家傳統園林의 硏究」, 「한국전통문화연구」4, 효성여대 전통문화연구소, 1988.

 4)주자(朱子; 1130-1200):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으로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출생하였다. 선조는 대대로 휘주원(徽州源; 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 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장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 남헌(張南軒) 여 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 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 사상사에서 공전(空前)의 사변철학 (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5)李滉, 退溪集권43, 跋, 「跋金景嚴戣所求七君子贊及箴銘朱文公棲息講道處帖」.

 6)朱子, 朱子大全, 권9, 詩, 「淳熙甲辰中春精舍閑居戱作武夷櫂歌十首呈諸同遊相與一笑」序詩.

 7)朱子, 朱子大全, 권9, 詩, 「淳熙甲辰中春精舍閑居戱作武夷櫂歌十首呈諸同遊相與一笑」第一曲詩.

 8)朱子, 朱子大全, 권9, 詩, 「淳熙甲辰中春精舍閑居戱作武夷櫂歌十首呈諸同遊相與一笑」第二曲詩.

 9)朱子, 朱子大全, 권9, 詩, 「淳熙甲辰中春精舍閑居戱武夷櫂歌十首呈諸同遊相與一笑」第三曲詩.

 10)朱子, 朱子大全, 권9, 詩, 「淳熙甲辰中春精舍閑居戱作武夷櫂歌十首呈諸同遊相與一笑」第四曲詩.

 11)朱子, 朱子大全, 권9, 詩, 「淳熙甲辰中春精舍閑居戱作武夷櫂歌十首呈諸同遊相與一笑」第五曲詩.

 12)朱子, 朱子大全, 권9, 詩, 「淳熙甲辰中春精舍閑居戱作武夷櫂歌十首呈諸同遊相與一笑」第六曲詩.

 13)朱子, 朱子大全, 권9, 詩, 「淳熙甲辰中春精舍閑居戱作武夷櫂歌十首呈諸同遊相與一笑」第七曲詩.

 14)朱子, 朱子大全, 권9, 詩, 「淳熙甲辰中春精舍閑居戱作武夷櫂歌十首呈諸同遊相與一笑」第八曲詩.

 15)朱子, 朱子大全, 권9, 詩, 「淳熙甲辰中春精舍閑居戱作武夷櫂歌十首呈諸同遊相與一笑」第九曲詩.

 16)庚寅忠烈王十六年留燕京手抄朱子書又摹寫孔子朱子眞像朱子書未及盛行於世先生始得見之心自篤好知其爲孔門正脈遂手錄其書又寫孔朱眞像而歸自是講求朱書深致博約之工(晦軒先生年譜)

 17)兪俊英, 「九曲圖의 發生과 機能에 대하여」, 考古美術151, 한국미술사학회, 1981.

 18)朴河淡, 逍遙堂集권2, 「附錄」年譜.先生旣卜築立巖以雲門山水有九曲之勝遂次武夷櫂歌以寓逍遙嘯詠之趣

 19)외선유구곡은 충북 괴산군 괴산읍으로부터 덕평을 지나 송면리 동북쪽 약 2㎞에 걸쳐 펼쳐지는 절승지이다. 퇴계 이황이 송정리의 함평이씨 가를 찾아왔다가 이곳의 산수가 너무 절묘하고 풍광이 수려하여 9개월이나 머물었다고 한다. 이 외선유구곡은 1752년 이상간, 김시찬, 이보상, 정슬조 등에 의해 서렁되었다.

 20)이 시는 제1곡 대은담(大隱潭), 제2곡 황정동(黃庭洞), 제3곡 수운정(水雲亭), 제4곡 연단굴(鍊丹窟), 제5곡 도광벽(道光壁), 제6곡 사선대(四仙臺), 제7곡 사인암(舍人巖), 제8곡 도화담(桃花潭), 제9곡 운선동(雲仙洞)에 대해 읊고 있다.

 21)朴昇東, 渼江集권1, 詩, 「次高山九曲潭詩」註.海州之高山九曲澄潭栗谷翁杖屨之所也末學後生尙不得一往觀未嘗不在夢想之中矣偶閱家藏古有九曲詩而用武夷韻也讀之欣然和之.

 22)朴河淡, 逍遙堂集권1, 詩, 「雲門九曲歌」.

 23)李滉, 退溪全書권1, 詩, 「閑居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十首」.

 24)李滉, 吾家山誌권1, 「陶山雜詠幷記」.

 25)李滉, 退溪集권1, 詩, 「戱作七臺三曲詩」.

 26)李家淳, 「陶山九曲歌」.仙芝東出一支靈汾洛遙連紫井淸地萬世千同聖揆遺詩重聽櫂歌聲一曲巖雲繞壑船小庵西出見烏川當年講易論文地山菊江楓鎖瞑烟二曲芙蓉第幾峯林中一鳥謝塵容滿川風月同心賞浩劫溪山隔萬重三曲鰲潭客問船文僖尸祝自庚年燭幽一鑑神襟契講樹氷輪尙入憐四曲淸川繞象巖漁歌驚起鷺毛毿蟠桃江寺留淸韻仙伯風流共一潭五曲盤陀水更深艮岺南望入雲林傳觴繫纜芳塵在誰議通泉百世心六曲長虹抱玉灣瀾臺遙望白雲關紫霞西塢幽人屋萬卷中藏一味閑七曲仙臺印孔灘雲靑水綠畵中看伯陽眞訣留千古莫遺金丹鼎火寒八曲堅頑一斧開孤山孤絶石潭洄主人好是惺惺老見許眞工了會來九曲淸凉更屹然祝融南下俯長川始知極處梯難上十二峯巒盡揷天

 27)鄭逑, 寒岡全集권2, 詩, 「仰和朱夫子武夷九曲詩韻十首」.

 

목차서론구곡원림과 구곡시가의 연원과전개문경의 구곡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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