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문경 구곡시가(九曲詩歌)의 경물인식과 형상화 / Ⅴ. 결 론 / 부 록

2014. 5. 14. 15:19나의 이야기






       


문경 구곡시가의 경물인식과 형상화/결론/부록  문경의 구곡원림 / 문경시 발간자료 

2012/02/1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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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서론구곡원림과 구곡시가의 연원과 전개문경의 구곡원림과 구곡시가경물인식과 형상화

  

 

 

 

 문경의 구곡원림  

 

 

 Ⅳ. 문경 구곡시가(九曲詩歌)의 경물인식과 형상화 / Ⅴ. 결 론 / 부 록

 

  

   Ⅳ. 문경 구곡시가(九曲詩歌)의 경물인식과 형상화

문경시의 구곡원림(九曲園林)을 대상으로 창작된 「선유구곡시(仙遊九曲詩)」, 「쌍룡구곡시(雙龍九曲詩)」, 「화지구곡시(花枝九曲詩)」, 「석문구곡시(石門九曲詩)」는 「무이도가(武夷櫂歌)」의 차운시이고 「석문구곡가(石門九曲歌)」는 가사이다. 이러한 구곡시와 구곡가는 산수시가의 일종으로서 사림파 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구곡가계 시가의 전형에 충실한 작품들이다. 지금까지는 문경시의 구곡원림 각 굽이의 위치와 경관을 현장조사와 구곡시와 구곡가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구곡시와 구곡가에 나타난 경·물인식(景物認識)과 문학적 형상화(形象化)의 방법에 대하여 살펴본다.


  산수시(山水詩) 및 전원시(田園詩)에 나타난 자연관, 경물인식의 방법, 자아와 대상과의 관련성 등에 대한 연구가 다각도로 수행되어 일찍이 포저(浦渚) 조익(趙翼)은 산수시와 조도시(造道詩)로, 이민홍(李敏弘)은 입도차제(入道次第)와 인물기흥(因物起興)으로, 조동일(趙東日)은 경치.흥취.이치로, 정민(鄭珉)은 철학적 관물, 실학적 관물, 미학적 관물로, 김동준(金東俊)은 경물을 통해 시적 자아의 경험적 주관을 표출한 누정한시, 경물을 통해 시적 자아의 이념적 주관을 표출한 누정한시, 경물 묘사에서 촉발된 흥취를 유로시킨 누정한시(樓亭漢詩), 손오규(孫五圭) 이념의 표상, 자족의 공간, 유미적 형상으로, 장우락은 이물관물(以物觀物), 관물찰리(觀物察理), 관물찰세(觀物察世) 유형화하기도 하였다.

산수시에 있어서 시인이 경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 방법은 시적 자아가 인식 대상인 경물을 객관화하여 경물로부터 촉발된 감흥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인물기흥적인 시, 흥취를 드러내는 시가되는데 대부분의 산수시가 이에 속한다. 경험적 인식 방법은 시적 자아가 대상인 경물을 개인적인 경험을 기준으로 주관적으로 인식하여 갈등과 상상을 드러냄으로써 비판적인 시, 초월적인 시를 낳게 되는데 저항시인 및 방외인(方外人)들의 산수시가 대개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념적 인식 방법은 시적 자아가 대상인 경물을 이념의 프리즘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입도차제적인 시, 이치를 드러내는 시가 되는데 성리학적 이념이 투철한 도학파들의 시가 대부분 이에 속한다. 이 때 시간과 공간을 통한 경물인식은 이념과의 부합 여부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구곡시와 구곡가의 경우 경물 인식의 방법은 객관적 인식과 이념적 인식으로 나눌 수 있다. 문경시의 구곡시와 구곡가 중에서 「선유구곡시」, 「쌍룡구곡시」, 「석문구곡가」의 경물인식은 이념적 인식 방법을, 「화지구곡시」의 경물인식은 객관적 인식 방법을 취하고 있다.

靜處從看動處情  마음으로 정처에서 동처를 바라보니
   潭心活活水方淸  못속이 활발하니 못물이 맑아지네
   本來淸活休相溷  본래의 맑은 마음 흐리게 하지 말아라
   一理虛明道自生  이치가 허명하면 도는 절로 생기리라
   虛明一理本吾心  허명한 이치가 본디 내 마음이거늘
   枉被紛囂容染深  부질없이 세상사에 깊이 물들었네
   到得玆臺思一洗  이 대에 이르러 한번 씻길 생각하니
   肯留滓穢分毫侵  어찌 묵은 때를 추호라도 두겠는가

앞의 시는 「선유구곡시」제3곡시이고 뒤의 시는 제4곡시이다. ‘활수(活水)’에서 속기(俗氣)를 벗어나는 수신(修身)을 보고 ‘정수(淨水)’에서 청정한 도체(道體), 본성을 발견하였다. ‘활수’와 ‘정수’, 혼탁한 인심(人心)과 허령불매한 도심(道心)은 혼잡될 수 없고 허명(虛明)한 도는 저절로 밝혀지기 마련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속세에서 마음 공부를 게을리함을 반성하고 세심(洗心)하여 인욕(人慾)을 벗고자하는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주관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선유구곡시는 그 굽이의 명칭에도 성리학적 이념이 드러나지만 전편에 걸쳐 경물인식이 이념적인 주관적 인식 방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쌍룡구곡시」의 경물인식도 「선유구곡시」와 유사하다.

二曲峭然志道石  이곡이라 가파른 지도석이
   橫流截立定如磶  횡류를 막아서니 진실로 주춧돌 같아라
   飛淙奔瀑時相過  나는 물줄기 힘찬 폭포수 때로 지나는데
   猶不回頭去益白  머리를 돌리지 않고 흘러가니 더욱 희네
   四曲戾天千尺臺  사곡이라 하늘에 이르는 높은 누대
   無人曾昔到崔嵬  일찍이 높은 이곳 이르는 이 없어라
   惟有巢鳶能識性  둥지 튼 솔개만이 그 본성 알아서
   長風九萬任飛回  구만리 긴 바람 타고 날아 휘도네

앞의 시는 「쌍룡구곡시」제2곡시이고 뒤의 시는 제4곡시이다. 제2곡시에서는 개울물을 수시로 변하는 경물, 즉 인욕의 세계로 보고 개울가에 높이 치솟은 흰 바위산인 지도석(志道石)을 청정한 도심, 항상성을 지닌 도체로 인식하고 ‘나는 물줄기’와 ‘폭포수’도 때로 지나지만 곁눈질하지 않고 허령한 도심과 같이 변함 없이 맑고 깨끗하다고 보았다. 제4곡시에서는 여천대(戾天臺)는 천 길이나 높기 때문에 속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청정한 곳으로 보고 하늘을 나는 본성을 지닌 솔개만이 경물과 조화롭게 창공을 휘돈다고 인식하였다. 「선유구곡시」보다는 객관적인 경물 묘사가 다소 드러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주관적 인식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위의 시는 「석문구곡가」제9곡시이다. 제9곡시에서는 관어석(觀魚石)이라는 경물을 보고 고기는 연못에서 놀고 솔개는 하늘에서 나는, 만물이 유행하는 원리를 주관적으로 인식하였고 인욕을 닦는 세심당(洗心堂)이 그윽하고 고요한데도 불구하고 다시 석문을 굳게 닫고 존심양성하고자 하는 성리학자다운 태도와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에 「화지구곡시」에서는 경물인식이 객관화되어 촉발된 감흥을 묘사함으로써 시적 자아의 흥취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사실적인 묘사와 객관적인 서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一曲何無泛釣船  일곡이라 어찌하여 고깃배 띄움이 없겠는가
   中間澄闊似江川  중간이 맑고 넓어 강이나 내와 같은데
   官居坐倚晨昏閣  관아의 신혼각에 기대 앉아 있노라니
   野色村光靄靄烟  들판과 마을 모습이 안개 속에 아련하네
   四曲川橫臥立岩  사곡이라 시냇물이 바위들을 둘러 흐르니
   亂松覃葛影毿毿  우거진 소나무와 칡 그림자 길고도 기네
   幽村軋軋鳴前碓  조용한 마을 삐걱 소리는 옛날의 방아요
   斷麓蒼蒼照下潭  가파른 산기슭의 푸른빛 연못에 비쳐 있네

앞의 시는 「화지구곡시」제1곡시이고 뒤의 시는 제4곡시이다. 제1곡시에서는 고깃배를 충분히 띄울 수 있는 맑고 넓은 공간과 관루에서 바라다 보이는 새벽의 들색과 마을빛이 안개로 아롱져 조화로운 정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서정적 자아의 만족스런 새벽 정취를 드러내고 있다. 제4곡에서는 입암(立巖)을 둘러 흐르는 시냇물의 유유함, 소나무를 뒤덮고 있는 칡넝쿨의 짙은 그림자가 한가로움을 불러일으키고, 높은 산 그림자가 연못에 잠기는 지극히 고요한 세계에 쿵더쿵 방아 찧는 소리가 들린다고 묘사함으로써 풍요로움을 한층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제1곡과 제4곡의 경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서정적 자아는 우수나 갈등도 없이 오직 한가롭고 만족스런 정취를 만끽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화지구곡시」의 다른 굽이에서도 대체로 경물의 객관적 묘사를 통해 자아의 흥취를 표출하고 있으나 다만 제3곡시에서 “칡 우거진 밭의 김매는 노래 어여쁘네(葛畝鋤歌又可憐)”라 하고 제8곡시에서 “언덕 위의 작은 가게 생계가 처량하니(依崖小店棲生計)”라 하여 경험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문경시의 구곡시와 구곡가의 시적 형상화 방법은 어떠할까? 우선 이념적 인식을 바탕으로 창작된 「선유구곡시」, 「쌍룡구곡시」,「석문구곡가」의 시적 형상화 방법을 살펴보면, 이들 시가에 두드러진 특징은 맑고 밝으며 고요하고 삽상한 이미지로 청정한 도심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유구곡시」에서는 주로 청(淸), 허명(虛明),한(寒), 탁(濯), 명(明), 풍욕(風浴), 기우(沂雩), 경(鏡), 청(晴), 「쌍룡구곡시」에서는 백(白), 섬(閃), 초연(超然), 적적(寂寂), 광(曠), 명(明), 징(澄), 「석문구곡가」에서는 ‘말근’, 청(淸),염계(濂溪), 통활(通豁), 창창(蒼蒼), 왕왕(汪汪), ‘푸른’, 백(白),광풍제월(光風霽月), 앵앵(嚶嚶), 유적(幽寂)과 같은 이미지어를 사용하여 밝고 맑고 삽상하고 활기찬 경물 묘사를 함으로써 허령불매한 도심과 천지만물의 자연스런 유행의 이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경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창작된 「화지구곡시」의 경우는 맑고 깨끗하며 고요하고 한가로운 이미지의 시어를 많이 사용하고 사실적인 묘사의 방법을 통하여 자아의 흥취를 효과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이 시에 쓰인 징청(澄淸), 징활(澄闊), 창창(蒼蒼),백(白), 한(寒), 활연(豁然) 등은 맑고 깨끗한 이미지로, 한(閑),심(深), 유(幽), 고(孤), 소소(簫疎) 등은 고요하고 한가로운 이미지로 자아의 명징(明澄)한 흥취를 표출하고 있다. 특히 징청(澄淸), 소명(昭明), 징활(澄闊) 애애(靄靄), 삼삼(毿毿), 알알(軋軋), 창창(蒼蒼), 소소(簫疎), 영회(縈洄), 활연(闊然) 등의 사실적인 묘사는 산수의 아름다운 경물에 촉발된 자아의 감흥을 적절히 표출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Ⅴ. 결  론

문경시는 선유구곡(仙遊九曲), 쌍룡구곡(雙龍九曲), 화지구곡(花枝九曲), 석문구곡(石門九曲) 등 유명 구곡원림(九曲園林)이 4개나 존재하는데 선유구곡 원림과 쌍룡구곡 원림은 보존 상태도 양호하고 각 굽이의 지점도 비교적 고증이 용이했으나 화지구곡 원림은 저수지 설치 공사로 인하여 훼손이 심각하였고 석문 구곡원림은 고증에 어려움이 많았다.


  선유구곡(仙遊九曲) 원림(園林)은 둔덕산 계곡을 따라 약 1.7㎞에 걸쳐 전개되고 있는데 제1곡 옥하대(玉霞臺)로부터 제9곡 옥석대(玉舃臺)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평평한 암반으로 되어 있어서 거대한 석조를 연상케 하며 맑은 물과 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다행히 제2곡 영사석(靈槎石)으로부터 제9곡까지 각 지점에 구곡의 이름이 석각(石刻)되어 선명히 남아 있으나 제1곡만은 홍수로 유실되어 지점이 불분명했으므로 금번 조사를 통하여 고증하였다.


  조선 말엽에 선유구곡 하류에 다시 선유칠곡(仙遊七曲)이 설정되어 경영되었는데 기존의 밝혀진 4개의 굽이 이외에 금번 조사에서 3개의 굽이를 고증하였다. 「선유구곡시」로는 외재(畏齋) 정태진(丁泰鎭)이 지은 「내선유구곡시(內仙遊九曲詩)」가 「외선유구곡시(外仙遊九曲詩)」와 함께 전하고 있는데 이 「내선유구곡시」는 본격적인 입도차제를 노래했다기보다는 각 굽이의 경물을 통하여 성리학적 이념을 표출한 감흥존양(感興存養)의 시라고 볼 수 있다.


  쌍룡구곡(雙龍九曲) 원림(園林)은 도장산 기슭 쌍룡천과 내서천의 약 5㎞에 걸쳐져 있는데 제1곡 입문(入門)으로부터 제9곡 홍유동(紅流洞)까지 기암절벽과 맑은 물이 조화를 이루어 절승을 이루고 있다. 「쌍룡구곡시」는 「선유구곡시」보다는 유교적 이념을 뚜렷이 표출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경물에 대한 이념적 인식을 통한 도학적(道學的)인 삶을 드러낸 입도차제(入道次第)의 시라할 수 있다.


  석문구곡(石門九曲) 원림(園林)은 제1곡 농청대(弄淸臺)로부터 제9곡 석문정(石門亭)까지 약 8.6㎞에 걸쳐 전개되는데 근품재(近品齋) 채헌(蔡瀗)이 직접 경영했던 원림으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나 제6곡 반정(潘亭)의 지점은 고증이 어려웠다. 「석문정구곡가」는 가사체(歌辭體)로 되어 있고 「석문정구곡시」는 무이도가(武夷櫂歌)의 차운시(次韻詩)로 되어 있는데 속세를 떠나 가어옹(假漁翁)의 삶을 살면서 도심(道心)을 닦고자 하는 지취(旨趣)를 표출하고 있다.화지구곡(花枝九曲) 원림(園林)은 제1곡 마포(馬浦)로부터 하늘재라고 부르는 제9곡 대원(大院)까지 약 15㎞에 걸쳐 전개되는데 제6곡 산문계(山門溪)는 저수지 공사로 훼손되었고 제4곡 고요성(古要城)과 제8곡 관음원(觀音院)이 금번 조사에서 새로 고증되었다. 옥소(玉所) 권섭(權燮)이 지은 「화지구곡시」는 경물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통하여 흥취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기호 사림파의 천기론적(天氣論的) 문학관과 권섭이 교유했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 작가들의 사실적인 표현기법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기호학파 구곡시가의 시적 경향을 정통으로 계승하고 있다.문경시의 구곡시와 구곡가의 시적 형상화는 주로 이미지를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이념적 인식을 바탕으로 창작된 「선유구곡시」, 「쌍룡구곡시」, 「석문구곡가」의 경우는 맑고 밝고 고요하고 삽상한 이미지로 청정한 도심(道心)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경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창작된 「화지구곡시」의 경우는 맑고 깨끗하며 고요하고 한가로운 이미지의 시어를 많이 사용하고 사실적인 묘사의 방법을 통하여 구곡(九曲)의 경물에 대한 자아의 흥취를 효과적으로 표출하였다.


  문경시의 구곡원림과 구곡시가는 그 경관의 빼어남과 시가의 문학적 의의를 볼 때 매우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들 4개소의 구곡원림과 구곡시가를 관광명소화하여 문경의 자연과 문화의 우수성을 알린다면 지방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본다. 문경시의 이들 구곡원림과 구곡시가를 관광명소화하는 방안으로는 첫째, 체계적인 홍보를 해야 한다. 우선 문경 관광안내도와 도로 표지판에 이를 명시하여 부각시킬 필요가 있고 각 구곡원림의 입구에 구곡원림의 약도를 그려 세워 그 중요성과 가치를 인식시켜야 한다.


  그리고 각 구곡의 굽이마다 입간판과 함께 개요와 구곡시 및 구곡가를 크게 게시할 필요가 있다.둘째, 구곡의 각 지점에 정자를 세워 이정표를 마련해야 한다. 정자를 세워 현판과 함께 구곡과 관련된 시가(詩歌)와 기문(記文) 등을 내부에 게시함으로써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고 관광객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면 관광명소화의 길이 앞당겨질 것이다. 정자를 하나 세우는데 약 1억원의 예산이 소요되는 만큼 장기적인 계획과 추진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에 대한 좋은 실례를 강원도 화천군이 6억원의 예산을 들여 곡운구곡(谷雲九曲)의 각 굽이마다 정자를 세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셋째, 세미나 또는 심포지움을 대대적으로 개최하여 문경시 구곡원림과 구곡시가의 가치와 우수성을 고양시키고 이에 대한 연구 책자를 발간, 배포하여 일반 사회인은 물론이고 학계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넷째, 인근 봉암사(鳳巖寺)의 불교문화 유적지와 신태식(申泰植)의 의병가사(義兵歌辭) 유적지를 묶어 문화관광(文化觀光) 벨트화를 추진해야 한다. 봉암사에는 최치원(崔致遠)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인 지증대사(智證大師) 적조탑비(寂照塔碑)와 정진대사(靜眞大師) 원오탑비(圓悟塔碑), 함허당(涵虛堂) 기화(己和)의 득통지탑(得通之塔) 등 유명한 대사들의 탑비문(塔碑文)과 최치원의 각종 친필 등 불교 및 유교 관련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고 선유구곡 입구에는 장편의 의병 서사가사(敍事歌辭)를 지은 신태식의 생가가 있는 만큼 상호 연계시켜 이 일대를 문학관광 단지로 개발하고 문경의 새재박물관, 유교문화관, 석탄박물관 등과 함께 문화관광 벨트를 조성함으로써 청소년들의 수학여행지로 만들고 정신 수련의 장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문경의 문화발전은 물론 청소년들의 정신함양을 증진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문경의 경제적인 발전도 가속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부 록】

학천정기(鶴泉亭記)
   사우정기(四友亭記)
   서쌍룡구곡시후(書雙龍九曲詩後)
   병천장기(甁泉亭記)
   존도서와기(尊道書窩記)
   주암정기(舟巖亭記)
   우암정기(友巖亭記)
   석문정사적(石門亭事蹟)
   근품채공 묘지명병서(近品蔡公墓地銘幷序)
   화지장기(花枝莊記)
   화지구곡기(花枝九曲記)

 

학천정기(鶴泉亭記)

선유동(仙遊洞)은 호서와 영남의 사이에 자리하여 내외의 구별이 있으니 수석의 경치가 이에 화양동(華陽洞)과 서로 백중하다. 도암(陶菴) 이재(李縡) 선생이 일찍이 파관(巴串; 화양동)에다 정자 몇 칸을 짓고 또한 그 체제를 따라서 종제(從弟)인 지암공(知菴公) 이유(李維)로 하여금 외동(外洞)에다 둔산정사(屯山精舍)를짓게 하였다. 용추(龍湫)가 그 위에서 흘러들고 학대(鶴臺)가 그 아래에 우뚝솟아 산림과 임천이 이미 비범한 경계가 아니거늘 하물며 선생이 지나간 정채(精彩)를 입음에 있어서랴. 이에 선유의 경치는 정사를 두게 되어 남쪽 지방에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는데 세상에 유람하고 완상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나서야 그 욕망을 그칠 수 있었다.


  그 후에 불행히도 희출(嘻出)의 재앙을 당하여 땅이 이미 황폐하고 무성한 풀들로 덮이니 다만 산이 높고 물이 긴 경치만을 보게 되어 여행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가리키며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지난 해 선생의 후손인 이인구(李寅九)와 이만용(李萬用)이 이 지경이 된 것을 탄식하며 이강준(李康準) 채영진(蔡永震) 김중진(金中鎭)과 함께 모의하고 말을 합하여 다시 정사를 세우고자 하니 원근의 사람들이 또한 소식을 듣고서 즐거워 힘껏 이를 도왔다. 아! 이것은 선생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運)이 사람을 깊이 감동시킨것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인멸되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 누가 그렇게 하였겠는가? 오직 그 옛터는 너무 외진 곳이라 화전(火田)을 당할까 두려워 사림(士林)들이 의논하여 다시 그 남쪽 1리 지점인 봉암(蜂巖) 옥석대(玉舃臺) 위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고쳐서 ‘학천(鶴泉)’이라 하니 비록 그 땅과 정자의 이름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 선생이 은거한 장소는 한가지이다. 정자가 이미 이루어져 또 곁에 누각 하나를 세우고 장차 선생의 유상(遺像)을 봉안하려 하니 선생을 존숭하는 도(道)가 한이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어찌 주자(朱子)가 말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하여 흥기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해의 봄에 많은 선비들이 강좌를 개설하고 나에게 청하니 내가 실로 감당할 수 없으나 또한 쇠퇴한 시대에 쉽게 만날 수 없는 일이라 이에 서로 함께 강론하고 전수하였다. 이에 그들을 위하여 말하기를 “여러 군자들이 선생을 위하여 이 정자를 중수했으니 존현(尊賢)의 정성과 모덕(慕德)의 마음이 지극하다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존숭하고 사모하는 실상이 어찌 다만 이 정자를 중수하는 일에 그칠 따름이겠는가? 그 반드시 일삼고 지켜야 할 바가 있으니 선생의 도(道)를 위하여 대학(大學) 에 나가지 않았다면 그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의 설을 밤낮으로 익혀서 의기양양하게 읊는다면 그 남긴 자취를 계승하고 퇴폐한 풍속을 고치는 것이 다시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하였다.슬프다. 지금의 세상은 천리(天理)가 날마다 쇠하고 인욕(人慾)이 날마다 자라니 시끄러운 세상은 유가의 학문에 나가지 못한다. 원컨대 여러 군자들은 서로 면려하여 선생의 도(道)를 영원히 없어 지지 않도록 한다면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 여러 유자들이 또한 정자에 기문을 청하니 마침내 이로써 고하노라. 임인년(1902) 8월하순 은진 송병선이 기록하다.

鶴泉亭記

仙遊洞介於湖嶺有內外之別水石之勝與華陽相伯仲焉陶菴李先生嘗於巴串構亭數椽又依其制使從弟知陶菴公維就外洞築屯山精舍龍湫注其上鶴臺屹其下山林泉石已非凡境況被先生所過之精彩乎於是仙遊之景盡爲精舍之有而擅名于南州世之遊賞者靡不欲窮源乃已其後不幸被嘻出之災地旣廢而鞠爲茂草但見山高而水長行旅莫不指點而咨嗟矣去歲先生宗後裔寅九及萬用慨然於斯乃與李康準蔡永震金中鎭同謀合辭欲復營建遠近章甫亦樂聞而隨力助之噫此非先生之遺風餘韻感人深而至今有未沬者其孰使之而然哉惟其舊址太深邃恐被菑火士林議更移搆於其南一里蜂岩之玉舃臺上改名曰鶴泉雖其地與亭之名不同於精舍然其爲先生杖屨之所則一也亭旣成又建一閣于傍將以奉先生之遺像不惟於尊先生之道爲無憾也亦豈非晦翁所謂使人瞻望而興起焉者乎是年春多士設講座請余余固不敢當而亦衰世不易得之擧乃相與講曾傳仍爲之曰諸君子爲先生而重修此亭其尊賢之誠慕德之心可謂至矣然其尊慕之實豈直止於此亭之修而已其必有所事在焉夫先生之道不出乎大學則其於誠正修齊之說日夕講肄以致絃誦之洋洋則其挹遺馥而勵頹俗者當復何如哉嗚呼今之世天理日消人欲日長其所喧豗不趐如洙泗之斷斷願諸君子交相勉勵使先生之道不永墜於澒洞乾坤之際豈不盛矣哉多士又請記于亭遂以此告之時玄黙攝提格觀之下浣恩津宋秉璿記

 

사우정기(四友亭記)

문경 남쪽 60리 거리에 한 언덕이 있어 쌍룡(雙龍)이라 하였다. 화산(華山)이 그 북쪽에 있고 영수(潁水)가 그 동쪽에 흐르는데 달리 기이한 경관과 의취가 있어서 함께 하여 덕(德)을 볼 만한 것은 없지만 땅에서는 고산유수(高山流水)를 생각하고 하늘에서는 청풍명월(淸風明月)과 함께 할 따름이니 진실로 은자가 노닐고 군자가 살기에 합당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천백 년 동안 이곳에 한 사람이 없었는데 진실로 마땅히 공(公)을 이곳에 오지 않게 하였다면 강산이 여러 해 풍월의 한가함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아! 그 또한 명(命)이 있었던 것인가? 오직 우리 선고(先考)가 경술국치를 당하여 홀연히 편히 지낼 마음과 무심히 돌아갈 뜻을 두어 율리(栗里)로 돌아와 용강(龍崗)에 누워서 산이 비고 물이 흐르는 땅에서 시비(是非)를 잊고 바람 맑고 달이 밝은 하늘 아래에서 흉금을 털어놓았다. 매번 사우(四友)로써 정자를 지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는데 사(四)는 곧 산,물, 바람, 달이다. 불초(不肖)가 선친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여 접때 계추(癸秋)에 정자 몇 칸을 지어서 나의 손으로 사우(四友) 및 고산유수(高山流水) 명월청풍(明月淸風)을 적어서 편액하고 다시 구곡(九曲) 및 쌍계수석(雙溪水石) 사우산림(四友山林)을 명명하여 바위에다 새겼다.


  슬프다. 이 정자에 오르니 청산(靑山)은 높고 높으며 녹수(綠水)는 넓고 넓어라. 때에 혹 맑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흰 달이 하늘을 지나가면 우리 선친의 유유자적한 삶을 바라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오호라. 산과 내는 예전과 다르지 않고 바람과 달은 절로 있지만 인사(人事)는 옛날과 다르고 아득하니 이 한(恨)이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오직 바라노니, 자손들이 부지런히 지키고 보호하여 능히 광풍제월(光風霽月)의 무한히 좋은 뜻을 가지고 고산유수(高山流水)의 일반성과 유구함을 전하는데 이른다면 오늘날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四友亭記

聞喜南六十里有一崗焉曰雙龍華山在其北潁水流其東別無奇觀異趣之可與覽德而在地惟高山流水在天與明月淸風而已耳允合隱者盤旋君子棲息而歷來千百載無一人焉句當至使不援公江山未免閒多年風月吁其亦有命存焉歟惟我先考歲値金狗乃有忽沒安適之懷無心惓還之意歸來栗里退臥龍崗忘是非乎山空水流之地論胸襟於風淸月明之天每欲亭之以四友而未果四卽山水與風月也不肖孤懼先意之未遂曩者癸秋構數間手書四友及高山流水明月淸風而扁之更名九曲及雙溪水石四友山林而鐫之矣噫登斯亭也靑山峨峨綠水洋洋時或淸風一絲皓月長空則庶幾吾先子之優遊徜徉而不可得嗚呼山川依舊風月自在而人事異昔悠悠此恨曷有其極惟冀若子若孫克勤守護得使光風霽月的無限好意思傳至高山流水的一般與悠久則庶無負今日之意也

 

서쌍룡구곡시후(書雙龍九曲詩後)

땅이 이름이 있는 것은 역(易)이 상(象)이 있는 것과 같아 사람들이 그 뜻을 취하는데 달려있다. 속리(俗離) 동쪽 20리 거리에 세 산이 모이고 두 물이 합하는 곳이 있어 쌍룡(雙龍)이라 하니 사우정(四友亭)이 곧 그 땅이다. 저 용은 신령하니 사람들이 성인이 있는 것과 같고 쌍(雙)은 대체로 둘이기 때문에 잠룡(潛龍)과 현룡(見龍)이 있는 것을 말한다. 또 구곡(九曲)의 명칭을 두었는데 이것은 내가 명명한 것이다. 혹 그 땅의 이름을 인하여 명명한 것이 있는데 곧 지도(志道) 안도(安道)를 말한다. 혹 그 땅의 이름을 인하여 더하거나 뺀 것이 있는데 방화(放化) 홍류(紅流) 광명(廣明)을 말한다. 혹 그 땅의 유사함으로 인하여 이름한 것이 있는데 곧 입문(入門) 우연(于淵) 여천(戾天) 낙경(樂耕)을 말한다.


  입문(入門)은 도문(道門)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며 지도(志道)는 도에 뜻을 두는 것을 말하며 우연(于淵)과 여천(戾天)은 솔성(率性)을 말하며 방화(放化)는 대이화지(大而化之)를 말하며 안도(安道)는 도에 편안함을 말하니 이 육곡(六曲)은 공부의 진덕(進德)과 차제(次第)로써 말하여 곧 건괘(乾掛)의 초구(初九)인 잠룡물용(潛龍勿用)의 상(象)이고 정자(程子)의 이른바 회양사시(晦養俟時)라는 것이다. 그 낙경(樂耕)이라 하는 것은 안빈낙도(安貧樂道)를 말하니 곧 건괘의 구이(九二)로서 현룡재전(見龍在田)의 상이니 대순(大舜)이 밭 갈고 고기 잡는 바의 때이다. 그 광명(廣明)이라 하는 것은 천하에 명덕(明德)을 넓히는 것을 말하니 곧 건괘의 구사(九四) 구오(九五)의 상이다. 그 홍류(紅流)라 하는 것은 세상을 피하는 도원을 말하니 건괘의 상구(上九)로서 퇴손무회(退遜無悔)의 뜻이다. 이 삼곡(三曲)은 출처행장(出處行藏)으로 말한 것이다.


  아! 도(道)는 하나일 따름이니 성(聖)이다. 용(龍)은 인물의 다름이 있으나 신령함은 하나이다. 쌍(雙)은 잠룡과 현룡의 다름이 있지만 형상은 하나이다. 구(九)는 용사(用捨)의 구분이 있지만 덕은 하나이다. 세 산과 두 물에 이르러 셋이 아니고 둘이 아니니 그 나뉨에 근원하여 그 합함을 구하면 하나이다. 하나로 총괄하여 세산과 두 물의 쌍룡구곡 사이에 한 정자를 지으니 위로는 선군자(先君子)가 머무신 장소로 받들고 아래로는 후손들이 강마하는 장소로 주노라.

書雙龍九曲詩後

地之有名猶易之有象在人之取義焉俗離東二十里有三山會兩水合處曰雙龍四友亭卽其地也夫龍靈也猶人之有聖也而曰雙蓋二焉故也有潛龍見龍之謂也又有九曲之稱是余之所以命名也或有因其名而存之者乃志道安道之謂也或有因其近似者乃入門于淵戾天樂耕之謂也入門者入道門之謂也志道者志於道之謂也于淵戾天率性之謂也放化卽大而化之之謂也安道安於道之謂也此六曲以工夫之進德次第言之卽乾之初九潛龍勿用之象程子所謂晦養俟時者也其曰樂耕安貧樂道之謂也卽乾之九二見龍在田之象大舜所以田漁時者也其曰廣明廣明德於天下之謂卽乾之九四九五之象也其曰紅流遜世桃源之謂戒乾之上九退遜無悔之意此三曲以出處行藏言之也吁夫道一而已聖也龍也有人物之異而靈也一也雙也有潛見之殊而形也一也九也有用捨之分而德也一也至於三山兩水不是三不是兩而原其分求其合則一也總之一而構一亭於三山兩水雙龍九曲之間上以奉先君子杖屨之所下以貽來後裔講磨之資云爾

 

병천정기(甁泉亭記)

병천(甁泉)은 옛 이름이 병천(屛川)이니 두 산이 병풍 같기 때문에 이름하였다. 그 골짜기는 모두 큰 반타(盤陀)인데 돌빛이 미끌하여 얼음과 같으며 눈이 내리고 장마가 지면 울툭불툭한 바위들이 구불구불 기어간다. 물이 그 가운데를 흐르는데 영롱하고 기괴하여 형용할 수 없으니 거의 교룡(蛟龍)이 서려 있는 흔적 같다. 또 용유동(龍遊洞)이라 하였는데 물이 돌 사이에서 아래로 여러 못에 흘러들고 큰 돌이 덮여 있고 물이 흘러드는 지점이 병구(甁口)와 같은지라 선군(先君)이 다시 병천(甁泉)이라 이름하고 곧바로 그북쪽 언덕에 정자를 지어서 영롱정(玲瓏亭)이라 하였다. 가운데 네 기둥으로 방을 만들어 빙청실(氷淸室)이라 하고 바깥 둘레 여덟 기둥에서 동서는 헌(軒)을 만들고 남북은 협실(夾室)을 만드니 총괄하여 병천정사(甁泉精舍)라고 이름하였다.


  도장산(道藏山) 암벽이 매우 높이 솟아 바로 정자를 마주하고 있는데 이를 대면하면 아득하고 고요하다. 서쪽으로 바라보면 속리산(俗離山) 여러 봉우리가 구름과 안개 속에 있는데 빛깔이 서리 안개와 같다. 먼 정자의 노송(老松)은 모두 푸르고 울창하며 시냇물 소리는 뜰에서 나는데 밤낮으로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정자의 오른쪽으로부터 걸어서 시내 위로 수백 보를 거슬러 오르면 큰 바위가 있는데 두 시내가 만나는 지점을 조기(釣磯)라 한다. 남쪽에서 흘러오는 시내를 남간(南澗)이라 하는데 원류가 속리산에서 나온다.북쪽에서 흘러오는 시내를 북간(北澗)이라 하는데 원류가 청화산(靑華山)에서 나온다. 북간을 거슬러 오르면 깊은 골짜기를 만나는데 귀운동(歸雲洞)이라 한다. 동네 가운데에 열 기둥 집이 있는데청은당(淸隱堂)이라 한다. 남간을 거슬러 오르면 연좌암(宴坐岩) 아래에 이르는데 초당을 두어 남간정사(南澗精舍)라 한다. 정자에서 시내를 따라서 2리를 내려가면 청요담(淸瑤潭)이 되는데 큰 돌이 있어 못 위로 뻗어니 높이가 수십 척이고 정상은 평평하고 넓어 한 기둥 정자를 둔 듯하여 태극(太極)이라 이름하였다. 또 3리를 내려가면 용추(龍湫)가 되는데 아름다운 협곡을 가나간다. 또 5리를 내려가면 쌍룡사(雙龍寺)가 되는데 쌍룡사에서 용추까지는 돌빛이 검푸르고 두 암벽이 높이 솟아 있으며 그늘 진 숲이 험하고 막혀서 마치 신물(神物)이 있는 듯하여 하늘만이 고개 밖을 한정한다.


  용추(龍湫)를 따라 올라가면 지름길이 점점 평평하며 천석(泉石)이 맑고 깨끗하며 바위산이 아름답고 빼어나고 맑고 기이하고 훌륭하고 아름다워 마음이 상쾌하고 기분이 좋지만 감상할 겨를이 없다. 그러나 호서 사람들이 가서 노니는 곳은 모두 길에서 떨어진 바위 아래 부분이다. 굽어 돌아 동쪽으로 높이 솟은 고개를 넘어가면 남간의 원류를 만나는데 소(沼)에 흘러드는 까닭에 남간의 원류 몇 리 아래에다 양봉래(楊蓬萊; 양사언)가 동천(洞天) 2글자를 새겨서 유람의 시작을 표시했다. 북간의 암석은 붉은 빛을 띠고 있기때문에 일명 적석간(赤石澗)이라 하였다. 산골짜기가 둘러있어 고요하고 그윽하여 은둔할 수 있으나 땅이 거칠고 외지며 밭이 척박하여 살아갈 방법이 어려운지라 사는 백성들이 대체로 빈곤하다. 선친이 나이 20세에 처음 이곳에 노닐며 즐거워하였다. 이로부터 오고가고 머무는데 조금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선친은 산수를 사랑하고 좋아하여 노닐고 오름이 멀리까지 미쳤는데 매번 병천의 경치를 일컬어 칭찬하여 평하기를 “병천의 맑고 장대함은 법도가 있다.”라고 하였다. 숙종 29년(1703)에 비로소 영롱정을 짓고 차례로 당사(堂舍)를 두었으며 아름다운 경관을 구획하여 구곡(九曲)을 정했는데 병천이 곧 제6곡이다. 돌, 산, 시내, 연못 모두 이름을표시하고 정자와 누대의 부류는 규포(規布)를 많이 하며 샘물을 틔우고 못을 파서 꽃을 파종하고 과일나무를 심으며 서적을 반드시 보관하여 돌아와 이곳에서 늙은 계획을 세웠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이곳에서 살며 노닌 지가 겨우 반년에 지나지 않으니 슬프고 마음 아프도다. 정자의 동쪽에 또 승료(僧寮)를 두어 석우암(碩雨菴)이라 이름하고 승려를 살게 하여 정자를 지키도록 하였다. 정자가 세워진 지가 이미 오래되어 기울고 흔들려 지탱하기 어려운지라 임자년(1732) 여름에 헐고 새롭게 지으려 했으나 기근을 만나서 그만 두었다가 계축년(1733) 봄에 비로소 공사를 마쳤다. 수석(水石)에 대한 평은 선배의 시(詩)와 기(記)를 대략 갖추고 선군의 즐기고 좋아하며 경영한 자취는 한 폭의 그림과 한 권의 묵적(墨蹟)을 모으니 참석하면 그 상세함을 얻을 수 있으리라. 한정당(閒靜堂),송문흠(宋文欽)이 기록하다.

甁泉亭記甁泉舊名屛川以兩山如屛故名其壑皆大盤陀石色如滑如氷雪霔降出沒盤屈蜿蟺水由中行玲瓏怪巧不可名狀略如蛟龍盤攫之跡又謂之龍遊洞水由石間下注千潭而大石覆其注如甁口故先君更名曰甁泉卽其北阿爲亭曰玲瓏亭中四楹爲室曰氷淸室外周八楹東南爲軒西北爲夾室總名曰甁泉精舍道藏山岩壁斬峻直當亭面對之窅老然幽闃西見俗離諸峯在雲霞中爛如霜雪遠亭皆老松蒼翠文鬱溪聲在階庭日夜奔豗自亭右步沂溪上數百步有巨石當二溪之會曰釣磯自南來者曰南澗源出於俗離山自北來者曰北澗源出於靑華山沂北澗而上得邃谷曰歸雲洞洞中有屋十楹曰淸隱堂沂南澗而上至宴坐岩之下有草堂曰南澗精舍自亭沿溪而下二里爲淸瑤潭有巨石斗入潭上高可數十尺頂平廣擬置一柱亭名之曰太極又三里爲龍湫過玉峽又五里爲雙龍寺自雙龍至龍湫石色蒼黑兩壁矗天陰森險阻若有神物殆天所以限嶺外也循龍湫而上徑路稍夷泉石潔淨巖嶂秀美淸奇偉麗心爽神隆不暇應接而湖人之往遊者皆道離岳之足轉折而東踰掘削嶺得南澗之源沼流而入故就南澗之源數里下刻楊蓬萊洞天四字以識遊觀之始北澗巖石徵帶冊丹色故一名赤石澗洞壑回還窈窕深靚可以棲遁然地荒僻田疇瘠磽生理艱難居民大抵貧困先君年二十一始遊于此而樂之自此往來留連殆不虛歲先君愛好山水遊陟遠及而每稱甁泉之勝賞評之曰甁泉淸壯有法度肅宗二十九年癸未始築玲瓏亭次第置堂舍區劃形勝定爲九曲甁泉六曲也石巒溪潭皆標名號亭臺之屬多所規布踈泉鑿池蒔花種果書籍必藏於是以歸老之計而卒不遂焉其得棲息徜徉於斯僅及半歲嗚呼痛矣亭之東又置僧寮名曰碩雨菴以處緇流使守亭焉亭成已久傾撓難支壬子夏折以新之遭饑中輟癸丑春始畢事水石之評略具先輩詩記而先君樂好經營之跡有會圖一幅及墨蹟一卷可以參會而得其詳焉閒靜堂宋文欽記

 

존도서와기(尊道書窩記)

존도리(存道里)의 동쪽으로 수백 보 지점에 대(臺)가 있는데 농청(弄淸)이라 하였다. 대체로 누가 이름하였는지 알지 못하고 옛부터 이름이 전해왔다. 농청대 아래에 맑은 내가 있는데 그 원두가 대미산(岱眉山)에서 나와 10여 리를 흘러들어 이곳에 이르러 물이 고여 못을 이루고 또 남쪽으로 푸른 들판 바깥을 흘러서 낙동강에 들어간다. 농청대 위에는 작은 산이 있는데 월방산(月方山)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내려오다 동쪽으로 돌아 내에 이르러 멈춘다. 푸른 바위가 둘러 있는 것이 집의 담장 모양 같은데 오직 동남의 두 면은 물에 임해 두절되었다. 아래는 서려 있고 위는 평평하여 30여 명이 함께 앉을 수 있으니 곧 농청대가 있는 곳이다. 우측 곁에 층암(層巖)이 높다랗게 우뚝 솟아 가장 웅장하고 기이하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오고 가며 노닐고 완상하였는데 농청대 앞에는 조약돌이 많고 좋은 물고기가 모여들기 때문에 마치 촉강(蜀江)의 병혈(丙穴)과 같았다. 작은 집을 짓고 물고기를 잡아 어버이를 봉양하며 이로 인해 늘그막엔 장수(藏守)하는 장소로 삼고자 시를 지어뜻을 붙인 지가 1년이 되었다. 을사년 봄에 또 농청대 서쪽 수십 보 떨어진 지점인 귀암(龜巖) 위를 얻었는데 지세가 밝고도 굽이져 바람의 위협을 피하고 물의 기운을 멀리할 수 있으니 집을 짓는다면 덕스런 처소가 대 위에 훌륭하리라. 이에 언덕을 평평히 하여 땅을 넓혀서 그 아래에 먼저 작은 집을 지었다. 고용한 사람이 살면서 지키고 또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거의 산등성이와 물 언덕을 둘렀는데 세상이 어지럽고 병환에 시달려 띠집을 아직 짓지 못했다.


  기미년 가을에 재료를 모아서 건축을 시작하여 다음해 늦은 봄에 공사를 마쳤는데 뒤 칸은 실(室)이고 앞 칸은 헌(軒)이라 합하여삼 칸이다. 재(齋)는 졸수(拙修)라 하고 헌은 한계(寒溪)라 하고 통괄하여 이름하길 존도서와(尊道書窩)라 하였다. 날마다 그 가운데 기거하고 도서를 좌우에 배치하여 정신과 심성을 기르니 대체로 장차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거늘 세상의 어떤 즐거움이 이보다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다. 졸수재가 높아 달을 가장 많이 들이는데 때로 작은 구름이 모두 사라지면 날씨가 맑고 밝아 달빛이 집에 가득히 비친다. 일어나 멀리 바라보면 시내의 여울이 훤히 밝고 들판이 멀리 트이며 동남쪽의 이어진 산들이 안개와 이내 속에 은연히 비치니 아득한 가운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기쁘고도 상쾌하며 경치와 마음이 합하는지라 그 즐거움을 말로써 형용하여 사람에게 고할 수는 없다.


  평상의 거처에 일이 없어 오직 서사(書史)로써 스스로 즐겼는데 혹 심신의 기운이 피로하면 지팡이를 집고 소나무 제방과 버드나무 언덕 사이를 소요하며 혹 맑은 시내에 몸을 씻고 청대(淸臺) 언덕에서 옷을 떨치고 바람을 맞이하며 혹 낚시터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혹 모래터에서 갈매기를 희롱하니 시간과 장소를 따라서 그 즐거움 이 다함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몰래 만족하며 흥겹게 느끼는 바가 있는 것은 대체로 한가롭게 지내면서 기분이 산뜻한 것이니 다만 만흥(漫興)일 따름이다. 시내의 물고기와 산의 새들은 정신을 맑게 하는 한 사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몸이 점점 쇠약하고 뜻이 점점 약해져 고인의 실제 공부를 행하지 못하고 고인의 깊은 뜻을 엿보지 못했다.


  존도서와의 이름은 마을의 이름을 모방한 후에 존(存)자를 고쳐서 존(尊)자로 하였는데 이것은 나의 덕성을 높이고 나의 학문을 이끌려는 것이다. 그 뜻이 마음에 있으니 그 이름으로 인하여 더욱 힘을 쓰면 고명(高明)과 정미(精微)를 극진히 할 것이다. 비록 감히 스스로 기약하지 않을지라도 또한 지목하여 기약하지 않을 수 없으니 활을 쏘는 이가 활을 적중시키는 것과 같다. 이 집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미 이 집을 위하여 사물과 경치를 좇아서 각각 이름을 지었으며 시를 지은 것이 무릇 35수이다. 그리고 어담(魚潭)을 가져다 지금은 관어(觀魚)로 고치고 귀암(龜巖)을 가져다 또한 망추(望楸)로 고쳤으니 대체로 그 땅으로 인하여 나온 것이다.

 
  그 사실을 기록하니 무한한 풍수(風樹)의 감회가 있다.농청대 위에는 작은 시렁을 엮어서 우산 모양 같이 하여 바람과 햇빛을 피하고자 하였고 농청대 아래엔 작은 배를 띄워 때로 아래위로 오르내리고자 하였으나 짐짓 겨를이 없었다. 혹자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장수(藏修)의 소원을 두었으니 깊은 산과 골짜기에 그윽하고 경치 좋은 곳을 택하여 세상일과 상간하지 않아야지 이처럼 넓은 들판 곁은 저자와 가깝고 도로와 가까워 귀와 눈에 접하는 이들이 매우 많아 마음속으로 그대의 처소가 아니라 할까 두렵다.” 하니 내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매우 옳으니 나 또한 이것으로 불만을 삼았다. 그러나 다만 근처엔 산이 없는지라 분수에 맞게 취하여 나의 경계로 삼았다. 주부자도 이미 말하기를 ‘짐짓 무리를 떠나고 사물을 끊어서 한 외진 곳에 의탁하면 이 땅이 달리 한 구역을 이룬다.’ 하였으니 마을과 가까운지는 알지 못하겠고 산기슭 너머에 있는 저자와 도로는 모두 몇 리 밖이다. 그리고 소연한 한 집은 홀로 암석 위에 있어 광활한 가운데 그윽한 형상이 있고 교야의 사이에 산림의 모습이 있다. 더욱이 나는 일찍이 퇴계 선생의 ‘인연을 따라서 점점 이룬다’는 말에 의미를 두었다.” 하였다.


  경영한 지가 이미 수십 년의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제 비로소 완성하니 심은 소나무는 높이가 십여 척이고 대나무는 거의 숲을 이루고 드리운 버드나무는 모래섬과 물가 사이를 덮어서 가리니 진실로 다행스럽다. 그러나 동산은 아름답지만 주인의 마음은 매우 황폐하니 유평보와 같다면 진실로 근심할 만하고 다행스럽지는 않다. 인하여 이 설을 함께 적고 기문을 짓는다. 임술년 춘정월 신사에 한계 산인이 기록하다.

尊道書窩記

存道村之東數百步有臺曰弄淸蓋不知何人所名而自古傳稱臺下有淸川其源出於岱眉山流入十餘里到此渟泓成潭又南流莽蒼之外入於洛江臺上有小山月方一枝南落東轉至川而止者也蒼巖環擁若屋壁樣惟東南兩面臨水陡絶下蟠上平合坐數三十人卽臺之所在而右傍層巖屹立百尺最雄且奇余自少時往來遊賞以臺前多石礫聚嘉魚若蜀江之丙穴欲築小室漁釣養親因爲暮境藏修之所作詩寄意者有年矣乙巳春又得地於臺西數十步龜巖之上埶曠且隩可以避風威遠水氣作室德處勝於臺上迺夷阜拓地而其下先築小寮倩人居守又爲之栽松種竹殆遍於山岡水岸而風埃顚倒憂病汨沒久未成茅棟己未秋始鳩材營建翌年暮春訖功而後室前軒合三間齋曰拙修軒曰寒溪總而名之曰尊道書窩寢處於其中左圖右書頤神養性蓋將終老於此而不知世間何樂可以勝於此也齋高得月最多有時纖雲掃盡天氣淸朗月光流滿於一室起而遠望則川灘虛明原野遼廓東南列峀隱暎於煙嵐杳茫之中不覺欣然灑然景與意會其樂不可以形於言而告於人也端居無事惟以書史自娛或氣倦則扶杖逍遙於松堤柳岸之間或濯身淸川而振衣迎風於淸臺之畔或釣魚於磯或狎鷗於沙隨時隨處其樂無窮然而心中竊有所慨然興感者蓋優游蕭散只是漫興溪山魚鳥不過爲䟽精瀹神之一物而惟其年漸衰志漸頹無以做古人之實工無以窺古人之閫奧也窩名旣倣村號改存爲尊而尊吾之德性道吾之問學其意包在於中庶幾因其名而益加勉勵則極高明盡精微雖不敢自期而亦不可不指以爲期如射者之的也此屋未就已爲之逐物逐景各命名而賦詩凡三十五絶而取魚潭今改以觀魚龜巖亦改以望楸蓋出於因其地記其實而有無限風樹之懷臺上欲結小架若雨傘樣以避風日臺下欲汎小艇有時泝洄於上下而姑未暇也或曰子旣有藏修之願則窮山邃壑擇幽勝處不與塵事相干似此廣野之傍近於市近於路而接於耳目者甚多竊恐非子之所也余曰君之言甚善吾亦以此爲嫌而但近處無山隨分占取做自家境界朱夫子已言之且離群絶物倚於一偏而此地別成一區不知村閭之近隔一麓市與路皆是數里之外而蕭然一屋獨在於巖石之上廣闊中有幽隩狀郊野間有山林態矣況吾嘗有味於退陶隨緣漸就之語經紀已至數十年之久而今始得就所種之木松長十餘尺竹幾成林垂柳掩映於洲渚之間誠幸矣然山園甚佳而主人心田甚荒如劉平甫則誠可憂而非可幸也因幷書是說而爲之記壬戌春正月辛巳寒溪散人記

 

주암정기(舟巖亭記)

웅연(熊淵)의 남쪽에 큰 바위가 있어 형상이 배와 같은데 벼랑에 정박하여 길게 매어놓았다. 옛날에 우리 선조 상사(上舍) 부군(府君)이 일찍이 시내를 거슬러 오르며 노닐고 즐기면서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붙였다. 이로 인해 주암(舟巖)으로 이름하였으나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다. 그 후에 이 바위를 지나며 노닐던 일들이 모두 사람은 갔지만 이름은 남아있게 되었다.


  뒷날에 집안 일로 인하여 모임을 가졌는데 사손(嗣孫)인 종진(宗鎭)씨가 정색을 하고 나에게 말하기를 “대범한 사람은 선조의 평소에 다니던 곳이라도 오히려 그 유적을 보호하여 혹 글씨를 새기고 집을 지어 기념을 표하는 일이 많은데 하물며 이 바위는 앞 세대에 뜻을 붙인 곳임에랴. 마을에 머물러 살아갈 때 날마다 접하지 않는 날이 없으니 어찌 한 집을 경영하여 바깥에 머물며 우러러 사모하길 견씨가 정자를 생각하는 듯이 하지 않겠는가?” 하니 내가 말하기를 “옳도다. 옳도다. 다만 각 집안이 힘이 약해 크게 베풀 수 없어서 대대로 다만 마음으로 경영할 뿐이었다. 만약 다시 일을 시작한다면어찌 내년이 올해이고 또 내년이 올해가 되겠는가?” 하였다.


  이에 곧바로 의논하여 약간의 재물을 모아서 마침 인근 마을의 빈 관청과 버려진 땅을 매입하고 긴 낫을 가져다가 (풀을 베고) 그 티끌을 (제거하고) 그 틈을 보완하니 방이 집에 동쪽 서쪽 가운데 세 개인데 집의 칸이 너무 좁아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었다. 임오년 3월에 일을 시작하여 이 해 9월에 공사를 마치니 대체로 그 때의 형편에 따라서 짓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취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가 혹 있으나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천주봉(天柱峯)이북쪽에 솟아 있어 완연히 만 길의 베를 걸어놓은 듯하고 금강(錦江)이 남쪽으로 흘러들며 의연히 한 세대의 금람(錦纜)을 모은다.


  기타 자연의 아름다움은 안개가 드리운 경관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니 우리 집안에 전해지는 도(道)를 위한 한 이름난 구역이 되기에 충분하다. 지금 이곳에 정자를 지어 다만 구차하게 편하기를 취할 뿐 긍횡(肯橫)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조의 도를 지키는 일이 어찌 집의 넓고 좁음에 달려있겠는가? 오직 유지(遺志)를 우러러 체득하며 잘 계승하고 잘 구하기를 생각하면 이에 더함이 없게 될 것이다. 대체로 부군은 강명(剛明)한 의지와 통민(通敏)한 학문을 가졌으니 주암으로 인하여 호를 한 것이 어찌 마음대로 한 것이겠는가? 슬프도다. 부군은 밝은 시대 나라를 경영할 재목으로 능히 나라의 신하가 되어 한 시대를 반석의 편안함에 놓을 수 있었으니 이것이 본분이었으나 불행히도 중도에서 갑자기 돌아가시니 자손들이 지금 한스러움이 다함이 없어서 여러 후손들이 선조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 본분을 지키고 힘써서 행하며 선조가 남겨 놓은 일을 빠뜨리지 않고 후손에게 물려주길 꾀해야지 어찌 한 정자를 지은 일로 일이 마쳤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진실로 저 바위 형상을 보면, 비록 물결 위에 떠 있더라도 중후하여 옮겨지지 않으며 설령 배를 육지로 옮길 힘이 있더라도 움직일 수 없으며 또 혹 반석이 새는 시대에도 영원히 가라앉을 염려가 없으리라. 하늘이 이 바위 배를 간직하여 일찍이 우리 선조를 기다렸고 오늘날 자손에게 전하는데 이르렀는가? 무릇 이곳에 오르고 이곳에 노니는 이들은 다만 표제(標題)의 화려하지 않음과 원림(園林)의 광활하지 않음에 마음을 두지 말고 다만 그 아래위로 침몰하지 않고 또한 세상과 더불어 부침하지 않음을 볼지어다. 높이 솟은 것이 마치 대하(大河)의 중류에 지주석 같은지라 돌이켜 이 몸을생각하며 건너갈지어다. 또한 이 정자가 이 바위에 실려 있어 가벼이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사람과 사물이 서로 얻는다고 말할 수 있으니 이로써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본분을 헤아리지 않고 망령되이 전말을 간략히 서술하여 기문을 삼노라. 갑신년 9월 일 후손 채홍탁이 삼가 적노라.

舟巖亭記

熊淵之南有大巖形如舟而泊崖長繫昔吾先祖上舍府君嘗泝洄遊賞題詠寄意因以舟巖爲標號竟未售志而早世後之過此巖遊此巖者咸有人去名存之盛日因門事而會嗣孫宗鎭氏愀然語余曰大凡人於祖先尋常行過之處猶尙保護其遺躅或題刻焉建築焉以表記念者多況此巖先世之所寄意處在里閈之停起居動靜無日不相接則盍經始一屋外寓羹慕如甄氏思亭乎余曰是哉是哉但各家綿力不能巨張以至歷世而徒爲心上營者也若復延拕則焉如夫明年如是又明年亦如是耶乃卽輪議鳩聚若干物適買隣里空廨棄地取長釤其垢輔其罅室東西中於堂間架偏狹僅可以容膝始事於壬午三月訖役於是年九月盖遷就於時歲然也醉中不稱意者或有之然憑欄而眺望則天柱北屹宛然掛萬丈布巾錦江南注依然褒一世錦纜其他泉石之美煙霞之勝森列眼界者足爲吾家傳授之道一名區也今此爲亭只取苟完不曰肯橫然衛先之道豈在屋之廣狹惟在乎仰體遺志思所以善繼善逑是之爲無忝爾光盖府君以剛明之志通敏之學因舟巖爲號者豈從然也哉嗚呼府君以晟代經濟之材能作巨川之舟楫措一世盤石之安是所分內而不幸中途奄殂子今爲無窮之恨也凡我諸仍以祖先之心爲心守分飭行不墜先緖貽謨後昆豈但以一亭之成謂能事畢耶誠觀夫巖形雖若泛在奔波之上厚重不遷設有盪舟之力莫可運動又或漏般之世永無沈覆之慮仰天秘此巖舟曾待我上祖而傳至子今日耶凡登於斯遊於斯者毋徒以欀題之不甚華麗園林之猶未廣闊爲心第見其不隋沒下上又不與世浮沈屹然若大河之中流砥柱反以思此身之涉也亦如此亭之載是巖知所以不輕動則可謂人與物相得以是企望焉不揆妄率略敍顚末以爲記甲申九月日九代孫鴻鐸謹識

 

우암정기(友巖亭記)

산양천이 적성산의 남쪽에서 나와 남쪽으로 나아가서 그 옛날 추향(樞鄕)인 권 선생의 청대(淸臺)가 되었다. 청대로부터 위로 4․ 5리 지점에 수풀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승경(勝景)이 있는데 인천(仁川) 채군상(蔡君尙) 옹이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내가 금년 봄에 한 번 올라가니 정자의 좌우는 모두 푸른 바위이고 앞은 시냇물이 임해 있어 맑은 물이 급하게 흐르는 소리가 자주 자주 난간에 들려왔다. 시내밖엔 밝고 밝은 모래이고 고요한 별장인데 별장이 자리하는 옛 현은 아침과 저녁에 연기 꽃과 시내의 아지랑이가 숲의 푸르럼과 서로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이었다.


  옹의 집이 별장의 가운데 자리하여 정자와 마주하고 있는데 부르면 들리는 거리였다. 내가 정자에 오르니 곧바로 술을 가져오라 하였고 술이 곧바로 이르니 옹이 손수 나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이 날에 비가 새롭게 수풀을 지나가니 들판을 깨끗이 하여 시야가 확 트이는 듯하였다. 옹이 창을 열고 그 남쪽의 돌이 고요히 마주하고 서로 나란하게 있는 것을 가리키며 형제암(兄弟巖)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애암(愛巖)이라 하였다. 그 동쪽에 시내가 아래위로 흐르는데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형천(兄川)이라 하고 말계(末溪)라고 하였다.

 
  내가 기뻐하며 정자를 이름한 뜻을 알고 옹의 형제 전원(田園)을 보니 산기슭 창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이로써 옹의 정자가 거처하는 방에서 멀지 않으니 땅이 기다림이 있었다. 탄식하여 말하기를 “천성(天性)을 되돌리는 일을 사람들이 능히 말하지만 재화(財貨)를 중시하고 처자(妻子)를 사랑하면 벗할 수 없다. 옹이 일찍이 세상의 일들을 잊고서 천성을 기르는 일을 즐겨했기 때문에 벗의 성(性)을 보존하였다. 경제적 문제에 힘을 써고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하게 되면 벗할 수 없다. 옹은 근검하게 생활하여 집안을 부유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벗의 도(道)를 다하였다. 시경(詩經) 에 이르기를 ‘형과 아우가, 서로 좋아하고, 서로 도모함이 없으리로다’ 하였으니 벗의 정(情)을 말하고 또 이르기를 ‘내 날로 매진하거든, 너도 달로 나아가라’ 하였으니 벗의 의(義)를 말하고 또 이르기를 ‘백씨가 질나팔을 불거든 중씨는 젓대를 부는지라’ 하였으니 벗의 낙(樂)을 말한다. 정(情)이 지극하고 의(義)가 지극한 이후에 낙(樂)이 이에 온전하다.” 하니 옹이 술을 따르며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또 탄식하여 말하기를 “벗의 도(道)는 옛날에 형제의 의(義)가 있었기 때문에 우복(友卜)이라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사해의 안이 모두 형제이다.’ 하였으니 형제의 정(情)이다. 논어(論語) 말하기를 ‘벗들 간에는 간절하고 자상히 권면한다.’ 하였으니 형제의 의(義)이다. 「소아(小雅)」에 이르기를 ‘자라를 삶고 잉어를 회를 쳐서, 여러 벗들에게 술과 음식을 올린다.’ 하였으니 형제의 낙(樂)이다. 옹은 능히 시서(詩書)를 잘 읽어 성령(性靈)을 펼치고 천진(天眞)을 통하니 유연함이 있도다.” 하니 옹이 또한 술을 따르며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내가 이에 옛 노래와 시에 의거하여 옹을 위해 시경 , 「상체(常棣)」의 마지막 장을 읊으니 옹이 두려운 모습으로 「녹명(鹿鳴)」3장을 읊었다. 옹이 기뻐하여 또 「오암치수류(吾巖峙水流)」1장을읊으며 말하기를 “오직 남쪽엔 솟아 있는 명(命)이 있고, 오직 동쪽엔 흐르는 성(性)이 있도다. 부르는 이 너이고 화답하는 이 나이니 억만 년이 이르도록 영원하리라.” 하니 옹이 만족하며 마침내 크게 술을 따르며 말하기를 “벗의 가르침이 지극하다. 기문을 짓기를 청하노라.” 하였다.

友巖亭記

山陽川出赤城山之南南出爲故樞鄕權氏先生之淸臺自淸臺而上四五里有林樹巖石之勝仁川蔡翁君尙築亭其上余以今年春一登焉亭左右皆蒼巖前臨川水淸駛聲數數入檻川外明明沙靜墅墅古縣朝暮烟花與川靄林翠相涵如畵翁家直墅之中亭子對焉招呼相聞余登翁卽呼酒酒卽至翁手酌余是日雨新過林樹如滌野望廓然翁拓窓指點其南之石靜峙相比者曰兄弟巖又其南曰愛巖其東之川上下解演入矚者曰兄川曰末溪云余欣然識名亭之意觀翁兄弟田園麓牖相望者以之而翁之築無遠居室則地有待焉歎曰反天性也人能言之然重貨財私妻子則不能友翁早謝事好養性故保友之性善窮餓役愛惡則不能友翁勤儉能肥家故盡友之道詩曰兄及弟矣式相好矣無相猶矣言友之情也又曰我日斯邁而月斯征言友之義也又曰伯氏吹塤仲氏吹篪言友之樂也情之至義之盡而後樂之斯全矣翁酌曰諾又歎曰朋友道古有兄弟義故曰友卜子曰四海之內皆兄弟兄弟情也經曰朋友切切偲偲兄弟義也小雅曰炰鼈膾鯉飮御諸友兄弟樂也翁能善讀詩書暢於性靈融於天眞有油然者矣翁又酌曰諾余乃案古歌詩爲翁賦常棣之卒章翁竦然賦鳴之三章翁怡然又賦吾巖峙水流之一章曰維南有峙峙之命矣維東有流流之性矣唱汝和余至萬億有永矣翁逌逌卒大酌曰友之訓至矣請爲記昭陽作噩重陽節晋陽鄭象觀撰

 

석문정사적(石門亭事蹟)

정자를 석문(石門)으로 이름하니, 어찌하여 이것을 취하였는가? 토착민의 옛이름에서 기인하는데 토착민이 말하기를, 옛날에 하(夏)나라 우(禹) 임금 시대에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 돌을 파서 물길을 내니 이로 인해 문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오히려 상고할 수 없는 말이니 막연하여 믿을 수 없다. 진실로 상리(常理)로써 추측하면 하늘이 아득히 열리는 처음에 땅이 솟아올라 내가 되고 그 땅이 맺어져 산이 되어 이 산의 석문을 두니 곧바로 산과 내의 맑은 기운이 맺어져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조물주가 이로써 승계(勝界)를 삼아서 오늘날 유람의 땅으로 남게 하였는가? 이것은 알 수 없다.


  석문을 통괄하여 말한다면 월현(月峴)이고 태백산이 그 조산(祖山)이다. 풍수지리책에 이른 바 덕재산(德哉山)이 이 산을 말하는데 한 산기슭이 동쪽으로부터 와서 정자의 왼쪽에 벽립하고 한 산기슭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정자의 오른쪽에 벽립하니 천연의 두 부채가 서로 마주하고 있는 듯하여 석문이라 이름함은 이러한 까닭이오정히 산이 뾰족하여 마이(馬耳)라 이름하고 물이 굽어 파강(巴江)이라 이름한 것과 같다. 안타깝다. 주인된 자가 저 기상에 벽립하지 못하고 다만 산천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할 뿐이로다. 석문의 서쪽에는 물이 있어 아래로 흐르는데 곧 산양천(山陽川)의 상류이다. 물의 성질이 맑고 깨끗하며 물의 맛이 달고 차니 둑을 쌓아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하고 깊이 파서 어룡(魚龍)이 사는 집을 만든다면 이 산에 이 물이 있는 것이 마땅하게 되리니 지역이 북쪽으로 70리 정도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태백산(太白山)과의 거리가 거의 200리인데 이를 두른 집들은 다 기록할 수 없거늘 오직 이곳에는 주인이 없었다. 천황(天荒)의 땅을 맡아 지은 지가 이에 몇 년이나 되었는가? 평소에는 묵객과 유인이 아름다운 경치를 완상하는 곳이었고 늙은이가 또한 이 산을 매우 좋아하였을 따름이다.


  청년 시절 소과(小科)에 합격한 후에는 과거 시험 보길 그만두고 때때로 정신이 평온하면 그 위에서 소요하다가 소요로 부족하여 띠집을 지어서 서식의 장소로 삼으려 하였는데 다만 일 때문에 겨를이 없어서 때에 뒷날을 기다리다 이루지 못한 지가 1년이 되었다. 이에 집의 아이 시옥(蓍玉)이가 나의 뜻을 알아 네 칸의 집을 지어 비를 긋게 하고 기와를 이어서 달을 맞게 하고 문을 열어 도랑을 틔워서 꽃에 물을 대고 계단을 쌓아서 꽃을 심으니 대사(臺榭)의 모양이 차례로 조성되는 늙은이의 소원이 이에 이루어져 주자 시의 ‘하루 띠집이 이루어지니, 거연히 나의 천석이로다’ 라는 시구가 또한 거의 가까웠다.


  꽃이 피는 아침과 달이 뜨는 저녁마다, 종족과 더불어는 화수(花樹)의 모임을 열고 친지와 더불어는 난정(蘭亭)의 노닒을 가지면서 경계를 깨뜨리고 다 함께 놀면서도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았다. 이에 주인이 팔경(八景)으로 표제를 넉넉히 하니 한두 동지들이 또한 따라서 화답하였다. 하나 귀암(龜巖)이라 하고 하나 용담(龍潭)이라 하며 석문정의 남쪽에 월파탄(月波灘)이 있고 북쪽에 관란대(觀瀾臺)가 있으며 그 왼쪽을 말하면 창애(蒼崖)가 높이 솟아 마주하고 그 오른쪽을 말하면 월현(月峴)이 두 손 마주 잡고 머리 숙여 인사하며 기타 이화정(梨花亭) 쌍승방(雙僧坊) 같은 것은 그윽하고 아득하지 않음이 없으며 용암(龍巖)의 곁에는 또 조대(釣臺)가 있는데 짐작건대 이 위에 반계촌(磻溪村)이 있어 강태공이 낚시하는 장소가 되리라.난간에 기대어 난간 밖을 내려다 보면 영남과 호남을 왕래하는 지점을 마주 하게 되는데 산과 물이 이곳에 끊이지 않으며 나무하는아이와 소 먹이는 사람이 이곳에 아침과 저녁으로 들러니 도연명의 ‘집을 지어 사람 사는 곳에 두노라’ 하는 것이다. 정자가 어찌 반드시 고요해야 하겠는가? 돌아보건대 이 늙은이 나이가 팔십이라 더욱 세상의 고뇌를 느끼니 고해(苦海)에서 벗어나 한가로운 곳에서 노닐며 여생을 보낸다면 이것 또한 태평한 세상에 하나의 훌륭한 일이로다. 애오라지 생각을 간략히 서술하니 군자의 한 마디 말씀을거듭 빌리고자 하노라.

石門亭事蹟

亭以石門名奚取於斯因土人舊號而土人言肇昔夏禹之汨鴻也鑿石而導水因以成門云而此猶無稽之言邈乎無以爲信而誠以理之常者推之天鴻濛開闢之初融而爲川結而爲山則此山之有石門卽山川淑氣之結而成者也抑造物者以是爲勝界留與今日遊觀之地者耶是未可知也石門統言之則月峴而太白山其祖山也堪輿書所謂德哉山其斯之謂而一麓自東而來壁立於亭之左一麓自西而來壁立於亭之右天然若兩扇相對者然石門之有號以是故也正猶夫山尖名馬耳水屈號巴江而惜乎爲主人者無壁立這氣像而徒使專美於山川也石門之西有水流下乃山陽川上流水性淸且澈水味甘且冽堤而利民人之生深而爲魚龍之窟則宜乎是山之有是水在治北七十里許此之距太白殆二百里環是而屋者不可勝記而獨於此無主焉任作天荒之地者幾何年于玆居常爲墨客遊人之所指艶賞處而老拙亦酷愛此山耳靑年小成之後因廢擧子業時乎神和則逍遙乎其上逍遙之不足準擬誅茅以爲棲息之所而第緣事有所未遑時有所待後未果者有年矣迺者家兒蓍玉體吾志而搆成四間屋子庇雨也瓦以縫之迎月也戶以闢之決渠而灌花築階而植卉臺榭模樣次第而造成老夫之願於是乎得遂朱晦翁詩一日茅棟成居然我泉石之句亦庶幾近之矣每於花朝月夕與宗族而作花樹之會與親知而屬蘭亭之遊缺界圓遊無踰於是主人以八景標題以侈之而一二同志又隨而和之一曰龜巖一曰龍潭而亭之南有月波灘亭之北有觀瀾臺言其左則蒼崖陡峙言其右則月峴拱揖若其他梨花亭雙僧坊無非幽夐者而龍巖之傍又有釣臺意者此上有磻溪村其爲太公釣璜之臺歟憑欄而俯視欄外當湖嶺來往之交水尺山尺絡繹於斯樵童牧竪朝暮於斯陶令所以結廬在人境者也亭何必岑寂爲哉顧此老拙年强八耋益覺世念俱灰擺脫苦海優游閒區以送餘年是亦昭代之一盛事耳聊以略叙思欲借重於君子之一語云爾歲黃猿淸和石門亭主人書

 

근품채공 묘지명병서(近品蔡公墓地銘幷序)

공(公)의 휘는 헌(瀗), 자는 계징(季澄), 호는 근품(近品)으로본관이 인천(仁川)이다. 고려시대 휘 선무(先茂)가 인천백(仁川伯)에 봉해져 본관의 조상을 얻게 되었다. 휘 보문(寶文)에 이르러 보문각(寶文閣)과 대제학(大提學)의 벼슬을 하니 동방의 이름난 집안이 되었다. 휘 귀하(貴河)는 전서(典書)의 벼슬을 하였는데 고려의 사직이 바뀐 후에도 법도를 지키고 의리를 가지니 세상 사람들이 다의당(多義堂)라 일컬었다. 조선시대 휘 수(壽)는 지중추(知中樞)의 벼슬을 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공훈으로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지니 비로소 함녕(咸寧)에 살게 되었다. 휘 소권(紹權)을 낳았는데 형조 판서를 하였다. 고조 휘 득호(得湖)는 통정(通政)의 벼슬을 하였고 산양면 현리(縣里)에 복거하였다. 증조 휘 득하(得夏)는 참봉(參奉)의 벼슬을 하였고 호가 공북헌(拱北軒)이다. 할아버지 휘 두귀(斗龜)는 부호군(副護軍)이었다. 아버지 휘 윤형(允亨)은 호가 은양(隱陽)이고 능히 집안의 학문을 이었다. 어머니는 경주 이씨로 사인 이주(爾冑)의 딸이니 공을 현리 옛집에서 낳았다.태어나 이질(異質)과 총명(聰明)이 남들보다 뛰어남이 있어 번거롭게 가르치고 독려하지 않아도 문리가 절로 해결되었다. 점점 성장함에 만송(晩松) 홍상조(洪相朝) 문하에 유학하였는데 제자백가는 깊이 통하고 널리 깨닫지 않음이 없었고 과거 과목 공부 같은 것 또한 남들보다 뛰어난 의표(意表)가 많았다. 다시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선생의 문하에 예물을 가지고 알현하고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니 특별히 사문(師門)의 칭찬을 받았다. 선생의 역책(易簀)을 수리하니 이전과 다름이 없었는데 날마다 백중과 더불어 책상을 이어서 즐기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병진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나물 밥을 먹고 거적을 베고서 건질(巾絰)을 벗지 않았으며 날마다 묘소에 오르는데 바람 불고 비가 온다고 그만두지 않았다. 임술년에 부친상을 당하니 슬퍼함과 몸이 마르기가 모친상과 같았다. 쾌재정(快哉亭)이 임진과 병자의 병란에 훼손되었는데 이를 원곡(圓谷)에 다시 짓고 수리하여 8칸의 집을 세워 재계하고 목욕하는 집을 갖추니 조은(釣隱) 이세택(李世澤) 죽하(竹下) 이천섭(李天燮) 정와(靜窩) 조석철(趙錫喆) 임여(臨汝) 류재규(柳齋氵+奎)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와은(臥隱) 김한동(金翰東)이 사이좋게 지내면서 번갈아 오고 가며 도의를 강론하고 연마하며 고서 천여 권을 구입하여 그 글의 깊은 뜻을 곰곰이 생각하길 그만두지 않았다. 원릉(元陵) 기미년엔 향해(鄕解)에 합격하였으나 형위(荊圍)에는 이롭지 않았고 경신년엔 생원 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였고 계유년엔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11인에 1등이었다. 갑인년에 문숙공(文肅公) 채제태(蔡濟泰)가 연회의 자리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는데 공이 이미 늙었다.


  사는 곳에서 북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지점에 석문동(石門洞)이 있는데 양쪽의 언덕이 대치하여 높이 솟으니 자못 임천(林泉)의절승(絶勝)이 있는지라 그 곁에 정자를 짓고서 석문이라 편액하였다. 이에 벗들을 맞이하고 손님을 초청하여 샘물 소리 바위 빛깔 사이에서 노니니 훨훨 속세를 벗어나는 형상이 있었다. 경전을 얘기하고 시를 읊조리며 거의 헛된 날이 없었으니 모두 남주(南州)의 좋은 주인이라 하였다. 을묘년 12월 24일에 침실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81세였다. 대승사(大乘寺) 동네 입구 인좌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아내 숙부인은 영산(永山) 김씨 운기(雲紀)의 따님인데 부덕이 있었다. 묘소는 월곡(月谷) 해좌에 있다.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시옥(蓍玉)인데 장사랑(將仕郞)이고 따님은 류경춘(柳慶春) 조용수(趙龍洙)에게 시집갔다. 시옥의 아들은 주동(柱東)이고 따님은 권녹인(權祿仁) 김재정(金在貞) 권세영(權世永)에게 시집갔다. 생원 류경춘의 아들은 문조(文祚) 순조(純祚)이고 따님은 어석오(魚錫五)에게 시집갔다. 조용수의 아들은 술요(述堯)이다. 주동의 아들은 창우(昌禹)이다. 권세영의 아들은 순정(巡珽)이고 따님은 정상순(鄭象順) 황종현(黃宗鉉)에게 시집갔다. 김재정의 아들은 탁수(卓洙) 장수(章洙)이고 따님은 이휘돈(李彙敦) 김낙렴(金洛濂)에게 시집갔다. 권녹인의 아들은 병찬(秉瓚) 병호(秉琥) 병규(秉珪)이고 따님은 강헌영(姜憲永)에게 시집갔다. 창우의 아들은 주택(周澤) 주호(周灝) 주해(周海)이고 따님은 김중후(金重垕) 이박(李璞) 조계동(趙啓東)에게 시집갔다. 이하는 번거로워 기록하지 않는다.

近品蔡公墓地銘幷序公諱瀗字季澄號近品仁川人麗朝有諱先茂封仁川伯爲得貫之祖至諱寶文官寶文閣大提學爲東方著族諱貴河官典書麗社旣屋守岡僕義世稱多義堂李朝有諱壽官知中樞以靖國勳封仁川君始居咸寧生諱紹權刑曹判書高祖諱得湖官通政卜居於山陽縣里曾祖諱得夏參奉號拱北軒祖諱斗龜副護軍考諱允亨號陽隱克承家學妣慶州李氏士人爾冑女生公於縣里舊第生有異質聰明過人不煩敎督而文理自解稍長遊於晩松洪公相朝之門諸子百家靡不淹貫如功令課亦多出人意表復贄謁于淸臺權先生相一之門薰陶服膺特蒙師門獎許先生易簀加麻相拂日與伯仲聯床湛樂手不釋卷丙辰遭內艱蔬食枕苫不脫巾絰逐日上墓不廢風日壬戌丁外憂哀毁骨立一如前喪快哉亭毁於丁壬兵燹重創而修葺圓谷建八間屋子以備齊沐之宮與李釣隱世澤李竹下天燮趙靜窩錫喆柳臨汝齋氵+奎鄭立齋宗魯金臥隱翰東友善迭相往來講磨道義購得古書千餘卷玩索不撤元陵己未中鄕解不利於荊圍庚申中監試兩場癸酉中生員試一等十一人甲寅蔡文肅公濟泰啓于筵中除以僉樞公已耄矣所居北十里許有石門洞兩岸對峙絶壁千尋頗有林泉之勝作亭於其傍扁之以石門乃邀友速客徜徉乎泉聲岳色之間翛然有出塵之像而談經哦詩殆無虛日皆以爲南州好主人以乙卯十二月二十四日考終于寢享年八十一葬於大乘寺洞口寅坐原配淑夫人永山金氏雲紀女有婦德墓在月谷亥坐生一男二女男蓍玉將仕郞女柳慶春趙龍洙蓍玉嗣男柱東女權祿仁金在貞權世永生員柳男文祚純祚女魚錫五趙男述堯柱東嗣男昌禹權男巡珽女鄭象順黃宗鉉金男卓洙章洙女李彙敦金洛濂權男秉瓚秉琥秉珪女姜憲永昌禹男周澤周灝周海女金重垕李璞趙啓東以下繁不錄.

 

화지장기(花枝莊記)

화지장은 문경현 관문에서 10리 거리인 신북동 가운데 있다. 감나무가 숲을 이루고 엄연히 100호에 가까운 마을이 있으며 큰 돌산 이 바깥에 솟아 있고 사방은 산기슭이 낮게 드리웠다. 그 안은 시냇물이 맑고 힘차게 마을을 둘러서 흐르고 너럭바위와 굽은 누대, 낮은 폭포와 작은 연못 등이 절로 한 좋은 경관을 이루어 그 기이함을 즐길 만하였다. 그 앞으로 넓은 들판에 소나무 숲이 그늘을 드리우고 활 쏘는 사람들이 때때로 큰 회나무 아래 모여 서서 북을 둥둥 두드리기도 하고 마을의 노인과 젊은이들이 아침저녁으로 시내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즐겁게 놀기도 하면서 또한 종종 여름의 적막함을 깨뜨렸다.


  내가 이에 별장을 짓고 날마다 마을 노인들과 함께 좋은 친구같이 마주 앉고 지팡이를 들고 나가 시내를 따라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마을 가운데 그윽한 곳을 깊숙이 들어가 쌍계사에 이르러 중들과 앉아서 놀기도 하였다. 휘영각(輝映閣)의 호수를 오고가며 다른말이 없다가 마을 노인을 불러내어 함께 나가 배회하며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조금 가다 오른쪽 산기슭에 있는 휘영각 아래에 앉아 있기도 하였다.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아서 깨끗한 회와 흰 쌀밥을 먹으면서 하루가 다할 때까지 즐거워하였다. 편히 지내면서 쉬다가 어두워질 때 집에 돌아와서 누우면 꿈속에서도 기분이 좋았다.


  화지장(花枝莊) 산속에는 네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문경으로 나가고, 하나는 대원(大院)을 넘어 청풍(淸風)과 충주(忠州)로 가는 길이고, 하나는 마전령(馬轉嶺)을 넘어 풍기와 예천으로 가는 길이고, 하나는 화지장을 거쳐 쌍계사를 지나 여러 계곡을 돌고 돌아 운달산(雲達山)의 높고 험한 봉우리를 넘으면 김룡사(金龍寺)대승사(大乘寺)와 산양(山陽) 낙동(洛東)에 이르는 길과 만난다. 내가 한천장(寒泉庄)에서부터 대원 길로 해서 왕래하는 거리가 70리 가까운데 길에는 돌이 많고 평평하지 않으며 좁은 길에 물과 돌이 어우러져 곳곳마다 즐길 만하다. 월악산(月岳山) 덕주사(德周寺)는 그 길의 중간에 있는데 쉬어 가기에 편하다.

 
  소백산(小白山) 서쪽에는 영남과 호서의 사이에 대미산(戴眉山)이 솟아 대원령(大院嶺)과 조령(鳥嶺)이 된다. 희양산(曦陽山)이 동쪽으로 한 가지가 뻗어 나와 마전령이 된다. 운달산의 토잔(兎棧)은 문경의 큰 관문을 이룬다. 조령의 안에는 주흘산이 있고 운달산 안에는 봉명산(鳳鳴山)이 있어서 작은 관문을 이룬다. 한 큰 시내가 대원령에서 내려오다 30리쯤 되는 곳에 세 겹의 골짜기가 만들어졌는데, 그 안에 관음원(觀音院), 중평(中坪), 황장산(黃腸山), 용연촌(龍淵村)과 산기슭 넘어 평천(平川)이 있고 마을 안에는 용추(龍湫), 산문촌(山門村), 고요성(古要城)이 있으며 마을 밖에는 광수원촌(廣水院村), 요성역촌(要城驛村), 문경읍촌(聞慶邑村)이 있다. 화지장은 산문과 고요성의 사이에 있다. 산기슭이 굽어 도는 안에는 닭과 개들의 소리가 한가롭고 사람과 물건이 모두 태평스러워 마치 무릉도원 같다.


  운달산이 서북쪽으로 뻗어가 화지장의 뒤에 진산(鎭山)이 된 것을 신향산(新香山)이라 한다. 장(莊)의 이름을 화지(花枝)라고 한 것은 곧 그 산의 이름이 향(香)자를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사(靜社)에 그렇게 써 붙이고 작은 누각에 이르기를 ‘화옹정(華翁亭)’이라고 했으며 정자 앞에 높이 솟은 것은 백장봉(白丈峯)이다.

花枝莊記

花枝莊在聞慶縣門十里身北洞中枾木成林儼然有近百村落大石山外峙而四周低麓盤其內溪水激激澄澄繞村而流盤巖曲臺淺瀑小泓自成一勝奇可怡悅其前一帶平原松林掩映而射夫幾人時來聚立於大槐之下矢鼓鼕鼕村之老少朝暮打語於溪中笑樂爲戱亦可種種破寂余乃築庄日日與村老對坐如良契携杖而出沿溪上下深入洞中奧處得雙溪之寺與僧輩坐弄輝映之湖出來無他語呼村翁與之出徘徊哦咏造次而行坐於右麓外輝映之閣投網而得魚雪膾白飯及日爲喜嘯傲偃仰歸來蒼蒼而臥夢寐亦自翕然莊之山中有四條路一出于聞慶一踰大院而走淸風忠州一踰馬轉而走豊基醴泉一由莊中過雙溪寺而回轉萬夾踰雲達峻極之巓則金龍大乘之寺山陽洛東之會通焉余自寒泉往來於大院之路七十里而近路多石不平而徑行水石處處可喜月岳之德周寺在中半休憩爲便小白之西立戴眉山於湖嶺之間爲大院嶺鳥嶺曦陽山東分一枝爲馬轉嶺雲達山兎棧成聞慶之大門戶鳥嶺之內立主屹山雲達之內立鳳鳴山成小門戶一大川自大院來三十里之中爲三重洞壑內則觀音院中坪黃腸山龍淵寺隔麓之坪川村中則龍湫山門村古要城村外則廣水院村聞慶邑村花枝之莊在山門古要城之間回麓之內鷄犬幽閑民物熙皞如武陵桃源雲達之山迤西北而鎭于莊之後者爲新香山莊之名花枝則宜其山之爲香於是乎有靜社之題其小小之閣曰華翁亭亭前之聳立者爲百丈峯.

 

화지구곡기(花枝九曲記)

사람이 거처하는 곳을 구곡(九曲)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 옛 사람이 그 굽이의 수를 아홉으로 정한 것은 모두 형상을 취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후인들은 단지모방하고 따를 뿐이다. 지금 나의 화지동 별장도 구곡이라는 이름을 지었으니 이 또한 웃음을 살 만하다. 그러나 이미 이름을 지었으니 일단 차례대로 논하여 글을 짓는다.


  제1곡은 마포원(馬浦院)이다. 물이 잔잔하고 넓어서 배를 띄울 만한데 배는 없다. 두 다리가 가로 놓여 있고 큰 길이 숫돌같이 평탄하다. 관청의 누각에 기대어 내려다보면 밤나무 숲이 마을을 가리고 푸른 안개가 들판을 감싸고 있는데 맑고 탁 트인 것이 마치 강호의 경치 같다. 제2곡은 향교촌(鄕校村)이다. 주흘산이 뒤쪽에서 진산으로 솟아있으며 하늘을 가로지른 밝고 흰 모습이 금강산이나 설악산과 같다. 그 아래 널찍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는 향교는 옛 성인을 봉안하여 윤리를 밝히며 모범이 되는 곳이다.제3곡은 광수원(廣水院)이다. 작은 마을이 언덕 아래에 있고 그 앞에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처음에 광수라고 이름 붙인 것을 보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4곡은 고요성(古要城)이다. 나무가 우거진 조그마한 언덕 안에 작은 평지가 있다. 울창한 숲 안으로 마을이 언뜻언뜻 보이고 큰 냇물이 그 밖으로 흐르며 물레방아가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이곳은 역참이었는데 지금은 없다. 그 위로 1리도 안 되는 곳에 큰 산의 우뚝 솟은 바위가 하늘에 맛닿을 정도로 높고 그 안에 골짜기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다. 빽빽한 숲이 마치 큰 절의 산문처럼 그 입구를 가리고 있으며 빙 돌아 돌어가면 둥그렇고 깨끗하면서 밝은 곳이 있다. 거기에 백여 명의 주민이 즐비하게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천여 그루나 되는 감나무가 둘러 있는데 가을이 되어 감이 붉게 익으면 아름다운 모습이 마치 무릉도원 같다. 그 남쪽 일대 송라(松蘿)가 우거진 곳에 바로 나의 집이 있다. 삿갓을 쓰고 호미를 메고 왕래하는 모습이 그림 같다.


  멀고 가까운 곳에 절이 있어서 종소리가 서로 들려오면 온갖 정취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것이 제5곡이다. 아침저녁으로 앉았다 누웠다 하며 편안히 지낸다. 거기서 몇 걸음 나가면 산문계(山門溪)가 있는데 교묘하게 생긴 절벽과 층대 평평 한 흰 바위가 격렬한 여울 맑은 못과 함께 형세를 이루어 지극히 그윽한 정취가 있다. 내가 거기에 휘영각(輝映閣) 하나를 짓고 석실에 암자를 만들어 두고 흥을 붙일 만한 곳으로 삼았다. 이것이 제6곡이다. 제7곡은 갈평(葛坪)이다. 그 땅의 형세가 평평하고 넓으며 한 줄기 냇물이 길게 흐른다. 그 가운데에 황장봉산(黃腸封山)이 있어서 푸르고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몇 개의 자그마한 동굴이 산에 의지해 뚫려 있는데, 이것은 분명 관문을 막는 중요성 때문에 만든 것이다. 조정에서 영남 지역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언제이루어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관음원에는 몇 개의 가게가 언덕에 의지해 있으며 모두 술을 팔아 생계를 삼는다. 그 위아래 물이 흐르는 깊숙한 골짜기 사이에 신녀담과 세이동이 있는데 이곳들은 모두 작은 정자를 짓고 즐길 만하니 이것이 제8곡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오르면 큰 고개의 중턱이다. 그 이름은 대원(大院)인데 곡의 아홉 번째로서 여기가 끝이다. 산이 높아 하늘이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앞으로 나아가면 조령이 있고 뒤로는월악이 솟아 있어서 앞뒤로 서로 조응하는 형세가 된다. 땅의 형세가 여기에 오르면 다시 환하게 툭 트여서 위로는 하늘의 해와 달에 닿을 듯하고 아래로는 아득하게 세상 밖의 경치가 펼쳐진다. ‘여기부터 구경꾼이 올라오지 않으니 인간 세상이 아닌 별천지라네(自是遊人不上來除是人間別有天)’라는 시구를 읊조리다 보면 마음이 한가로워진다. 이미 그 안에 내 거처를 두었고 이미 ‘구곡’이라는 이름이 있으며 또한 그것을 글로 기술했으니 마땅히 나의 후손들이 그것을 알아야 하겠기에 이렇게 기록한다.

花枝九曲記

必人居之稱九曲其來久矣古人以九數其曲皆有取象之義而後人則只依倣而爲例耳今我花枝之莊亦以九曲名之又可笑旣名之矣且論次而文之其曰一曲爲馬浦院者其水平闊似泛舟而無舟雙橋橫架大道如砥倚官樓而俯視之栗林隱村翠煙籠野澄曠如江湖景色其曰二曲爲鄕校村主屹山鎭後橫天皓白如金剛雪岳其下廣貌屹然奉先聖於其中爲明倫首善之所其曰三曲爲廣水院小村依隴千畝在前始名廣水是然疑於滄桑變故其曰四曲爲古要城童童一拳之阜中小坪而蒼蒼內有村落隱映大川流其外水碓軋軋而鳴是郵傳之今廢其上未一里大岳巉巖而際天呀然一洞壑林樹翳其口如大伽藍山門紆廻穿入圓淨而昭明百餘居民櫛比成村千柿繞之及秋爛纈勝似武陵桃源其陽一帶松蘿有我之廬籉簑鋤犁往來如畵僧寺近遠若鐘聲之相聞百種之趣未可勝言是爲第五曲坐臥朝暮安此身世其步屧之外有山門溪絶壁層臺之巧平巖之白與激湍渟淵而爲勢極有窈窕趣味我作一架輝映之閣又作山門广於石室之內以寓一宗興寄是爲諸六曲其曲之第七者爲葛坪坪勢平廣一水流長中有黃腸之封蒼鬱成林數三峒戶小小依山是宜作關防之重廟筭嶺度不知何日成就其曰觀音院數店倚岸沽酒資生其上其下碕流奧峽之間神女潭洗耳洞皆可作小亭而怡悅者爲第八曲步步登登而去爲大嶺之腰其名大院曲之第九而終焉天所以限南北也前去爲鳥嶺外立有月岳爲掎角之形地勢登此復豁然而開上可接天中日月下濛濛然世外雲煙咏來自是遊人不上來除是人間別有天之句意想悠然旣有我居於中間旣有九曲之名號又有記述之文則宜使我孫知之玆識之

 

목차서론구곡원림과 구곡시가의 연원과전개문경의 구곡원림과 구곡시가경물인식과 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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