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교남지 / 집주 문경사

2014. 5. 14. 19:40나의 이야기






       


2012/08/0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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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集註                         

  문     경     사  

 

 

23. 교남지(嶠南誌)  

 

차        례

  해 설
  번 역
      문경군(聞慶郡)
  연혁(沿革)
  지세 및 위치
  군명(郡名)
  관직(官職)
  성씨(姓氏)
  산천(山川)
  풍속

  형승(形勝)
  면리(面里)
  호구
  토지
  부세(賦稅)

  토산(土産)
  관공서
  교원(校院)
  사찰(寺刹)
  관안(官案)
  인물(人物)
  도로
  교량(橋梁)
  제언(堤堰)
  시장(市場)
  역우(驛郵)
  봉수(烽燧)
  총묘(塚墓)
  고적(古蹟)
  누정(樓亭)
  제영(題詠)
     상주군
     함창군
     예천군
     용궁군


  [해 설]

  교남은 영남을 말하며 정원호(鄭源鎬)가 경상도를 군별로 별권 편집한 76권 15책으로 1937년에 대구 경문당에서 인쇄본으로 발행했다. 저자는 각 군의지지(地誌)가 유실될까 걱정한 나머지 김세호(金世鎬) 상서(尙書)가 편찬한 옛 원고에 증보하여 교남지를 편찬했다고 했다.

  문경군은 36권에 수록되어 있고 수록 내용은 연혁, 위치, 군명 등 모두 28개 항목이다. 역대 문경현감은 김영화 군수까지 수록되고 10면 129개 동리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토지도 기존의 지목인 전답 외에 대지, 임야, 잡종지, 철도용지 등 현재처럼 13개 항목으로 구분하고 세금에서도 지세(地稅), 면세 부가세(面稅附加稅) 등 12개 항목의 징세액을 밝히고 있다. 학교도 보통학교, 소학교, 지방학림 등으로 구분하여 1930년에 세운 것까지 수록하였다.

  그러나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군 단위로 편집했으나 역사적인 기록을 모두 옮기지는 않아 예천, 상주에도 문경 관련 일부 기록이 남아 있고 인물이 보강되었지만 관안(官案)에는누락된 부분도 있다.

 

  [번 역]

 

문  경  군(聞慶郡)
 

  [연혁(沿革)]
   본래는 신라의 관문현(冠文縣)인데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이라고도 하고 관현(冠縣)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이 관산으로 고치어 고령군(古寧郡)에 소속시켰다. 고려 때에 문희군(聞喜郡)으로 고치고 현종이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공양왕이 감무를 두고 조선조 태종 때 현감을 두었다.
   속현 가은현(加恩縣) : 군의 남쪽 41리에 있고 본래 신라의 가해현(加害縣)이었는데 경덕왕이 가선(嘉善)이라고 고치어 고령군(古寧郡)의 소속으로 하였다.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이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공양왕 때에 문경현에 소속하게 되었다.
   호계현(虎溪縣) : 군의 동남쪽 4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호측현이었으며 배산성(拜山城)이라고도 하였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고령군(古寧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이 상주에 소속시켰으며, 조선조 태종 때에 문경현에 소속되었다. 
   1896년(고종 건양 원년)에 군으로 고치고 1914년(대정 3년) 용궁 서면(西面) 및 신읍면(新邑面) 송천리(松川里), 함창군 동면(東面) 영응(永應) 전촌(錢村) 율곡(栗谷) 3동, 북면(北面) 해곡(海谷) 덕통(德通) 2동, 영천군(榮川郡 : 현재 예천) 상리면(上里面) 월경동(月境洞)을 본 군에 합쳤다.

  [지세 및 위치]
   경상북도의 북쪽 끝에 있다. 소백산이 꿈틀꿈틀 서쪽으로 뻗어 조령으로 치솟았다. 서쪽과 북쪽은 충청도와 경계를 짓고 동쪽으로는 예천, 남쪽으로는 상주와 맞닿는다. 소야천이 계립령에서 발원하여 가은천과 합쳐 상주의 낙강에 흘러든다. 들은 적고 산이 많다. 동경 128도 22분, 북위 36도 56분이다. 면적은 60방리(方里)이다.

  [군명(郡名)]
   관문(冠文),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 관산(冠山), 문희(聞喜), 문경(聞慶)

  [관직(官職)]
   군수 : 1인
   군속(郡屬) 기타 : 각 약간명
   옛 관원(舊官員) : 현감(縣監)[음직(蔭職) 6품관으로 수성장을 겸했으며, 1752년(임신 : 영조 28년)에 따로 조령진을 설치했다.], 찰방(察訪)[문과 츨신 6품관], 별장(別將)[무과 출신 4품관], 훈도(訓導), 각1인

  [성씨(姓氏)]
   문경현 : 최(崔)씨, 장(蔣)씨, 박(朴)씨, 송(宋)씨, 전(錢)씨, 김(金)씨[선산], 박(朴)씨[은풍]
   가은 : 전(全)씨, 윤(尹)씨, 변(邊)씨, 연(延)씨, 길(吉)씨
   호계 : 백(白)씨, 황(黃)씨, 김(金)씨, 나(羅)씨, 방(芳)씨
   병곡(柄谷) : 방(方)씨, 신(辛)씨[다른데서 왔다.]
   견천(絹川) : 방(方)씨[고곡, 적촌, 소산천, 마량도 같다.], 황(黃)씨[다른데서 왔다.]
   벌천(伐川) : 심(沈)씨
   잉을항(仍乙項) : 고(高)씨[이상 여지승람(輿勝)]
   이(李)씨, 신(申)씨, 김(金)씨, 민(閔)씨, 채(蔡)씨, 남(南)씨, 원(元)씨, 정(鄭)씨, 주(周)씨, 권(權)씨, 홍(洪)씨, 배(裵)씨, 임(林)씨, 안(安)씨, 전(田)씨, 유(柳)씨, 엄(嚴)씨

  [산천(山川)]
   주흘산(主屹山) : 군의 북쪽 5리에 있고 계립령에서 뻗어 온 진산(鎭山 : 도성이나 각 고을을 진호하는 주산)이다.
   관혜산(冠兮山) : 군의 남쪽 4리에 있고 주흘산에서 뻗어왔다.
   희양산(曦陽山) : 가은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소둔산에서 뻗어 왔으며 3면이 모두 석벽인데 옛 성과 군창이 있다.
   재목산(梓木山) : 가은현의 남쪽 3리에 있고 갈령(葛嶺)에서 뻗어왔다.
   장산(獐山) : 호계현의 북쪽 1리에 있고 야운령에서 뻗어 왔다.
   봉명산(鳳鳴山) : 군의 동쪽 8리에 있고 야운령에서 뻗어 왔다.
   소둔산(所屯山) : 군의 남쪽 15리에 있고 이화현에서 뻗어 왔다.
   화산(華山) : 군의 서쪽 67리에 있고 불일산에서 뻗어 왔다.
   이화현(伊火峴) : 군의 서쪽 18리, 충청도 연풍군 경계와 닿고 공정산에서 뻗어 왔다.
   계립령(
立嶺) : 세상에서 부르기를 지릅산[麻骨山]이라 하는데 방언으로 비슷하다. 군의 북쪽 28리에 있고 대미산에서 뻗어 왔다. 신라 때 옛 길이다.
   조령(鳥嶺) : 군의 서쪽 27리, 연풍현의 경계에 있는데 계립령에서 뻗어 왔다. 세상에서는 새재[草岾]로 부른다.


    오숙(吳숙)의 시

 사물의 중요함을 잠시봐도 조화롭고
북쪽서 뻗은 고개 여기서 웅장하다.
물이 떨어지니 폭포로 장엄하고
원래 상주진이 새재길로 통했는데
화각(畵角) 부는 공중에 새벽 안개 걷히고
대장 깃발 땅을 떨쳐 바람에 휘날린다.
이번 길에 선비의 초라함을 씻으니
만리 밖 해뜨는 곳이 눈에 있구나.

 
     허적(許적)의 시

 벼랑 끼고 돌던 길 논두렁을 만나도
높은 산 험한 고개 다시 솟았다.
남북으로 나눈 땅에 관문을 거듭하고
세력은 천지간에 한 기세로 웅장하다.
구릉의 신비한 폭포 산림 속을 푹 적시고
옥대의 아름다운 집에 조용히 앉아 있다.
세인들 이 험한 곳 오르고 보니
애써고 부지런히 일을 한 조화일세.

 
   대미산(黛眉山) : 군의 동북쪽 30리에 있고 소백산에서 뻗어와 본 군 여러 산이 여기서 비롯된다.
   공정산(公正山) : 새재의 서쪽 8리에 있고 조령에서 뻗어왔다.
   주현(周峴) : 희양산 서쪽에 있고 연풍의 경계이다.
   대야산(大耶山) : 가은현 서쪽 20리에 있으며 희양산에서 뻗어 와 기우제를 지내면 감응이 있다.
   불일산(佛日山) : 가은면 서남 30리에 있고 대야산에서 뻗어 왔으며 기우단(祈雨壇)이 있다.
   고모령(高毛嶺) : 대야산 남쪽 2리에 있고 통과하면 괴산 경계이다.
   갈령(葛嶺) : 가은현 남쪽 15리에 있고 속리산에서 뻗어 왔다.
   호항령(狐項嶺) : 군의 동쪽 35리에 있고 대미산에서 뻗어 왔다.
   황장봉산(黃腸封山) : 대미산 아래에 있고 둘레가 10리다.
   용뢰산(龍磊山) : 군의 동쪽 20리에 있고 고항령에서 뻗어 왔다. 운달산(雲達山)이라고도 하며 기우제를 지내면 감응이 있다.
   야운령(野雲嶺) : 군의 동쪽 20리에 있고 용뢰산에서 뻗어 왔다.
   소야천(所耶川) : 군의 남쪽 6리에 있다.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계립령에서 나오고 하나는 새재에서 나와 화봉원 앞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관갑에서 가은천에 흘러든다.
   가은천(加恩川) : 가은현에 있다.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속리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희양산에서 나와 합쳐 동쪽으로 흘러서 소야천에 든다.
   용연(龍淵) : 군의 남쪽 22리에 있고 가은천과 소야천이 합치는 곳이다.
   견탄(犬灘) : 호계면 서쪽 5리에 있는데 용연의 하류이다. 나루가 있으며 남쪽으로 흘러서 함창에 이른다.
   용추(龍湫) : 새재 아래 동화원 서북1리에 폭포가 있는데 4면 모두 돌이고 세상에서는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해 온다.
    어변갑(魚變甲)의 시

용이 꿈틀거려 소용돌이 헤치가도
잠긴 하늘에는 밝은 달이 새롭다.
개인 날 우레치고 흰 무지개 뻗치니
황홀타 누가 그 신비를 알리.

   
   인천(寅川) : 군의 동쪽 32리에 샘이 평지에서 솟아나는데 동서로 나누어 흘러 갈래샘[
泉]이라 한다.
   선유동(仙遊洞) : 대야산 동쪽 7리에 있다. 맑은 시내와 흰 바위가 어우러진 9곡(九曲)이 있으니 옥석대(玉
臺), 난생뢰(鸞笙瀨), 영귀암(詠歸巖), 탁청대(濯淸臺), 관란담(觀瀾潭), 세심대(洗心臺), 활청담(活淸潭), 영사석(靈
石), 옥하대(玉河臺) 모두 바위에 큰 글자로 새겨 있다. 그 서쪽의 외선유동(外仙遊洞) 역시 수석이 뛰어나다.
   용유동(龍遊洞) : 불일산 북쪽 5리에 있다. 흰 바위가 평탄하게 깔린 곳에 큰 시내가 흐르고 그 위에 여러 마리 용이 뒤엉켜 논 자국이 있어 용유동이라 한다. 그 아래 깊은 소[深湫]가 있다.
   백운대(白雲臺) : 봉암사 서쪽 2리에 있고 백석폭포(白石瀑布)의 경치가 뛰어나다.

  [풍속(風俗)]
   꾸밈이 적고 실질을 숭상함이 많아 순박하기가 성현의 도에 가깝다.

  [형승(形勝)]
   연애잔도(緣崖棧道) : 권근(權近)의 기문에 “관갑(串岬)이 가장 험하여 벼랑에 의지하여 사다리 길을 만들었다.” 라고 하였다.
   함관촉도(函關蜀道) : 어변갑(魚變甲)의 시에 방비의 시설이 “함곡관(函谷關) 같이 장하고 촉나라 길처럼 험해” 가기 힘들다고 하였다.

  [면리(面里)] : 10면 129리
   문경면(聞慶面)
  상리(上里), 하리(下里), 교촌리(校村里), 요성리(堯城里), 마원리(馬院里), 진안리(陣安里), 각서리(各西里), 하초리(下草里), 상초리(上草里), 고요리(古堯里), 팔영리(八靈里), 평천리(平川里), 관음리(觀音里), 중평리(中坪里), 갈평리(葛坪里), 용연리(龍淵里), 당포리(唐浦里)

   마성면(麻城面)
  남호리(南湖里), 모곡리(茅谷里), 정리(鼎里), 하내리(下乃里), 상내리(上乃里), 외어리(外於里), 배천리(倍泉里), 신현리(新峴里)

   가은면(加恩面)
  왕릉리(旺陵里), 갈전리(葛田里), 작천리(鵲泉里), 성저리(城底里), 성유리(城踰里), 전곡리(前谷里), 수예리(水曳里), 상괴리(上槐里), 하괴리(下槐里), 원북리(院北里), 죽문리(竹門里), 완장리(完章里), 민지리(泯池里)

   농암면(籠岩面)
  삼송리(三松里), 내서리(內西里), 화산리(華山里), 율수리(栗藪里), 종곡리(種谷里), 연천리(連川里), 궁기리(宮基里), 농암리(籠岩里), 갈동리(葛洞里), 사현리(沙峴里), 선곡리(仙谷里), 지동리(池洞里)

   호계면(虎溪面)
  견탄리(犬灘里), 별암리(鱉岩里), 호계리(虎溪里), 우로리(牛老里), 막곡리(幕谷里), 구산리(龜山里), 가도리(加道里), 선암리(仙岩里), 지천리(芝泉里), 부곡리(富谷里), 봉정리(鳳亭里), 봉서리(鳳棲里)

   호서남면(戶西南面)
  모전리(茅田里), 우지리(牛池里), 창리(倉里), 신기리(新機里), 불정리(佛井里), 공평리(孔坪里), 유곡리(幽谷里), 흥덕리(興德里), 점촌리(店村里), 영신리(永新里)

   영순면(永順面)
  달지리(達池里), 왕태리(旺泰里), 오룡리(五龍里), 금림리(錦林里), 이목리(梨木里), 말응리(末應里), 율곡리(栗谷里), 사근리(沙斤里), 포내리(浦內里), 김용리(金龍里), 의곡리(蟻谷里)

   산양면(山陽面)
  현리(縣里), 부암리(富岩里), 형천리(兄川里), 위만리(渭滿里), 우본리(愚本里), 과곡리(果谷里), 녹문리(鹿門里), 연소리(蓮沼里), 송림리(松林里), 신전리(薪田里), 평지리(平地里), 불암리(佛岩里), 존도리(存道里), 진정리(辰井里), 반곡리(盤谷里)

   산북면(山北面)
  서중리(書中里), 대상리(大上里), 대하리(大下里), 이곡리(梨谷里), 우곡리(于谷里), 석봉리(石鳳里), 김룡리(金龍里), 거산리(巨山里), 전두리(田頭里), 호암리(虎岩里), 종곡리(種谷里), 약석리(藥石里), 소야리(昭野里), 월천리(月川里), 지내리(池內里), 흑송리(黑松里), 가곡리(加谷里), 회룡리(回龍里), 내화리(內化里), 구구리(舊邱里), 가좌리(加佐里)

   동로면(東魯面)
  마광리(磨光里), 인곡리(仁谷里), 수평리(水坪里), 적성리(赤城里), 노은리(魯隱里), 간송리(磵松里), 생달리(生達里), 명전리(鳴田里), 석항리(石項里)

  [호구(戶口)]
   호수 : 16,829호
   인구 : 90,114인

  [토지(土地)]
   전(田) : 7,518정(町) 4반(反) 7무(畝)
   답(畓) : 7,237정 3반 2무
   대지(垈) : 695정 6반 7무
   임야 : 71,405정
   잡종지 : 1정 7반 5무
   사사지(寺社地) : 4정 1반 7무
   분묘지(墳墓地) : 113정 4반 2무
   도로 : 44정 1반 3무
   지소(池沼) : 9정 7반 2무
   구거(溝渠) : 4정 6반 9무
   하천 : 9반 19평
   철도 노선(鐵道路線) : 10정 5반 5무
   철도 용지(鐵道用地) : 13정 1반 1무

  [부세(賦稅)]
   지세(地稅) : 84,049원(圓)
   영업세(營業稅) : 197원
   주세(酒稅) : 31,187원
   광세(鑛稅) : 1,833원
   지세부과세(地稅附加稅) : 48,143원
   호세(戶稅) : 26,404원
   도축세(屠畜稅) : 1,179원
   어업세(漁業稅) : 5원
   차량세(車輛稅) : 2,304원
   부동산 취득세(取得稅) : 3,238원
   임야세(林野稅) : 6,476원
   면세부가세(面稅附加稅) : 95,466원

  [토산(土産)]
   은어, 벌꿀(蜂蜜), 석이버섯(石
), 송이버섯(松), 백화사(白花蛇), 해송자(海松子), 웅담, 인삼, 복령(茯)

  [관공서]
   군청, 경찰서, 경찰주재소(同駐在所), 면소(面所), 등기소
   옛 공해(舊公해) : 객관(客館), 징원당(澄源堂)[동헌(東軒)], 향사당(鄕射堂), 인리청(人吏廳), 읍창(邑倉), 가은창(加恩倉)[가은면에 있다.], 호계창(戶界倉)[호서남면에 있다.], 산성창(山城倉)[초곡성 내에 있다.], 호적고(戶籍庫), 군기고(軍器庫)

  [교원(校院)]
   향교(鄕校) :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소설위(小設位)
   한천사(寒泉祠) : 군의 남쪽 가실목[加項]에 있고, 1697년(숙종 23년 정축)에 건립했다. 사직(司直) 안귀손, 주부(主簿 ; 주부를 지낸 적은 없고 거창현감을 지냈으나 은거하여 다른 기록은 처사로 기록하고 있어 착오 기록 같음) 신숙빈, 사전(師傳) 성만징(成晩徵)을 향사한다.
   소양서원(瀟陽書院) : 군의 남쪽 소양동에 있고 1712년(숙종 38년 임진)에 창했다. 우상(右相) 정언신(鄭彦信), 인백당 김락춘, 군수 남영(南嶸), 응교(應敎) 심대부(沈大孚), 사전(師傳) 이심(李
)을 향사했다.
   노양각(盧陽閣) : 군의 남쪽 부암에 있다. 충장공(忠莊公) 천만리(千萬里) 영정이 있는데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기리는 글을 썼다.
   단묘(壇廟) 사직단(社稷壇) :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의 북쪽 2리에 있다.
   여단(
壇) :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주흘산사(主屹山祠) : 사전(祠典)에 실려 있기를 “봄 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 소사(小祠)를 지낸다.”고 하였다.
   희양산사(曦陽山祠), 재목산사(梓木山祠), 장산사(獐山祠) : 모두 명령에 따라 본관이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관혜산사(冠兮山祠) : 주흘산에서 부제(附祭)한다.
   학교 문경공립보통학교(聞慶公普校) : 1911년(신해)에 세웠다.
   문경심상소학교(聞慶尋小校) : 1915년(을묘)에 세웠다.
   농암공립보통학교(籠巖公普校) : 1920년(경신)에 세웠다.
   산북공립보통학교(山北公普校) : 1920년(경신)에 세웠다.
   호서남공립보통학교(戶西南公普校) : 1922년(임술)에 세웠다.
   마성공립보통학교(麻城公普校) : 1925년(을축)에 세웠다.
   동로공립보통학교(東魯公普校) : 1929년(기사)에 세웠다.
   가은공립보통학교(加恩公普校) : 1930년(경오)에 세웠다.
   산양공립보통학교(山陽公普校) : 1930년(경오)에 세웠다.
   지방학림(地方學林) : 1917년(정사)에 세웠다.

  [사찰(寺刹)]
   봉암사(鳳巖寺) : 희양산에 있는데 양산사(陽山寺)라고도 한다. 신라 헌강왕 때 창건했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중 지징(智澄 ; 智證의 착오 기록임)의 비와 이몽유(李夢游)가 지은 중 정진원오(靜眞圓晤)비가 있고 이덕수(李德壽)가 지은 중 상봉(霜峰)의 비가 있다. 절의 북쪽에 있는 2층 극락전은 신라 경덕왕이 창건한 것으로 조선조 세조의 어필(御筆)이 보관되어 있다.
   김룡사(金龍寺) : 산북면에 있다.
   혜국사(惠國寺) : 조령성 안에 있다.
   운암사(雲巖寺) : 유곡 서쪽 5리에 있다.
   석천암(石泉庵) : 농암면 삼송리에 있다.
   심원사(深源寺), 원적사(圓寂寺) : 모두 내서리에 있다.
   대승사(大乘寺) : 산북면 전두리에 있다.
   오정사(烏井寺) : 선암산에 있다.
   추심사(推尋寺) : 화산에 있다.

  [관안(官案)]
   고려 흥달(興達) : 927년(태조 10년)에 강주(康州)를 순행하려고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을 지날 때 성주 흥달이 먼저 그 아들을 보내 귀순하였으므로 태조가 가상히 여겨 청주록(靑州綠)을 하사하였고, 맏아들 준달(俊達)은 진주록(珍州綠)을, 둘째 아들 웅달(雄達)은 한수록(寒水綠)을, 셋째 아들 옥달(玉達)은 장천록(長淺綠)을 하사하였다.
   조선 허종항(許從恒), 조추(趙秋)[세종조 때 모두 현감으로서 다스린 업적이 있다.], 신단(申湍)[비가 있다.], 신길원(申吉元)[임진왜란에 순절했다.], 윤호연(尹浩然), 김지회(金之誨), 정사온(鄭思溫), 이화(李화), 유계룡(柳季龍), 조직(趙稷), 홍이일(洪履一), 심종직(沈宗直)[비가 있다], 김인룡(金仁龍), 김해(金해), 남진(南鎭), 조홍서(趙弘瑞), 최무(崔茂), 이경절(李景節), 허섬(許暹), 이호(李灝), 구숙(具숙), 김형(金珩), 한의(韓의), 홍처준(洪處濬)[비가 있다], 이동빈(李東彬), 윤창수(尹昌壽), 허윤(許崙), 김구(金垢), 권연(權衍), 박황(朴愰), 김흥지(金興祉), 조변(趙변), 김빈(金빈), 곽문용(郭文溶), 권선(權선), 김남갑(金南甲), 이행경(李行敬), 홍정(洪淨), 이중번(李重蕃), 박번(朴蕃), 송세정(宋世鼎), 원덕하(元德夏), 최두명(崔斗明), 이덕령(李德齡)[진휼비(賑恤碑)가 있다], 이성조(李聖肇), 이선함(李善咸), 홍시걸(洪時傑), 이세항(李世恒), 이중창(李重昌), 송정번(宋廷蕃), 조영기(趙永期), 김희로(金希魯)[비가 있다], 홍우행(洪禹行), 유선(柳선), 황태하(黃泰河), 이명직(李命稷), 구명규(具命奎), 정석범(鄭錫範), 윤휘정(尹彙貞), 원정규(元鼎揆 ; 문경군 선생안에는 元弼揆임), 정즙(鄭즙), 김윤(金潤), 서종벽(徐宗壁)[비가 있다], 윤재중(尹在重), 윤면교(尹勉敎), 이의익(李宜益), 이완(李완), 홍응린(洪應麟), 조계(趙棨), 이복해(李福海), 윤상임(尹尙任), 홍역(洪역), 심빈(沈빈), 임정(任정), 이보중(李普中), 송준명(宋準明), 김재악(金載岳), 한태유(韓泰裕), 박인영(朴仁榮), 최경(崔炅), 서중수(徐重修), 김동진(金東鎭), 이정규(李正圭), 김이호(金履鎬), 김재명(金在明), 박이원(朴이源), 이영원(李永瑗), 송윤재(宋倫載), 서흥보(徐興輔), 이철조(李喆祚), 엄사면(嚴思勉), 박철원(朴喆源), 권익(權익), 김재범(金在範), 최두현(崔斗顯), 김이정(金履禎 ; 문경군 선생안에는 金履진임), 이강재(李綱在), 홍노영(洪魯榮)[비가 있다], 이상재(李尙在 ; 문경군 선생안에는 李常在임), 심의만(沈宜晩), 김병선(金炳先 ; 문경군 선생안에는 후임으로 申錫履, 吳肯默, 鄭海尙, 李廷耆, 趙元和, 鄭聲敎, 朴齋賓, 沈有澤, 吳台善, 林冕洙, 兪致良, 金0淳, 李秉路, 李鳳雲, 李國寧, 李福愚, 李國榮, 趙在淳, 金英植, 李鎬肅, 兪鎭龜, 金益承, 宋在和, 金龍鎭, 鄭寅壽, 朴海聞, 安鍾悳, 安昌烈, 鄭東箕, 李寅冕, 趙重世, 金禎根 등이 더 있다.), 신철희(申喆熙 ; 문경군 선생안에는 후임으로 趙秉弘, 李啓興이 있다.), 이재하(李宰夏), 김광제(金光濟), 김영년(金永年), 김현태(金顯兌), 신용진(辛龍鎭), 황의필(黃義弼 ; 문경군 선생안에는 후임으로 沈완鎭, 成斗植이 있다.), 백원필(白元弼 ; 문경군 선생안에는 후임으로 兪萬兼, 尹貫一, 朴正純이 있다.), 박영진(朴英鎭 ; 문경군 선생안에는 성두식의 후임이다.), 전성오(全省吾 ; 문경군 선생안에는 김성오이고 정규원의 후임이다.), 정규원(鄭圭瑗), 김영화(金永華)

  [인물(人物)]
   문과(文科) 신라 아자개(阿慈介) : 가은현 사람으로 아들 넷이 있었는데 견훤(甄萱)은 그 중의 한 아들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밭을 갈고 어머니가 수풀에 눕혀 두고 점심을 했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고기(古記)에 “견훤의 어머니가 시집가기 전 어느 날 그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일 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나이가 와서 잠자리를 같이 하고 간다.’ 하므로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네가 실을 바늘에 꿰어 그 옷에 찔러 놓아라.’ 하여 그대로 하였다. 날이 밝자 그 실을 찾으니 북쪽 담 밑 큰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찔려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아이를 베어 견훤을 낳았다고 하였다.” 고 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는 실을 따라가 보니 절 집의 기와를 쌓아 둔 훤초(萱草) 가운데 있어 그 절 이름을 추심사라 했다.
   조선 홍인걸(洪仁傑) : 본관이 남양으로 덕렴(德濂)의 아들이다. 선조 때 진사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가 되었다. 삼척부사 때 부왕과 일본을 가다가 풍랑을 만나 정라포에 정박한 유구의 태자를 만났다. 그의 동생 인간(仁侃)이 태자가 가진 진귀한 물건에 탐을 내서 인걸에게 부탁하자 헛되이 죽이고 감영에 거짓 보고를 하였다. 수의사도 노경임(盧景任)이 잡아 올리라는 장문에 의해 잡아들여 인걸이 옥중에서 죽었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묘갈을 지었고 최삼조(崔參祚)가 유구태자를 애도하는 시에       

요 임금의 말로는 걸왕 실체 못 밝히듯
형벌은 내렸으나 어느 때나 한을 풀까`
양인 셋 구덩이 들어 속죄를 생각하나
두 아들 배 타고 가다 못된 도적 만났구나
해골이 드러나서 들풀에 얽혀 있어
혼백이나 고국가는 어버이 없는 이 서러움
죽서루 아래 흐른 도도한 물길마저
긴 띠를 이루어 가며 여러 해 봄 흐느낀다.

         
   김상적(金尙績) : 본관이 강릉으로 청간공(淸簡公) 시습(時習)의 후손이다. 호는 위촌(渭村)이고 광해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이 되었다. 시폐를 시정하라는 상소와 1618년(무오)에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장차 부르짖음이 문지기에 이르고 부모의 명령을 그쳤으나 시끄러운 이이첨을 애도하는 글을 스스로 지은 일로 인해서 사직하고 충의를 위해 분개하며 보냈다. 인조 때 풍기군수에 제수되고 문집이 있다.
   이연묵(李淵默) : 본관이 진성으로 송재(松齋) 우의 후손이다. 호는 송암(松菴)이고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에 이르고 유고(遺稿)가 있다.
   민조영(閔祖榮) : 기정(起貞)의 후손이다. 호는 회은(晦隱)이고 순조 때 문과에 올라 장령(掌令)이 되었다. 만언소를 올려 올곧다는 말을 들었다. 저서로 육문초정(六文初程), 여사관견(麗史管見), 인면회통(因勉會通) 등 여러 책이 있다.
   이원호(李元浩) : 본관이 진성으로 온계(溫溪) 해(瀣)의 후손이다. 호는 송계(松溪)로 고종 때 문과에 올라 지평(持平)을 지내고 풍의가 온화하고 후덕하여 선비와 친우가 추앙하였으나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기호(李琦浩) : 해(瀣)의 후손으로 호는 청초(聽蕉)이고 고종 때 문과에 올라 비서승(秘書承)을 지냈다. 문학을 하여 시를 잘 지었으며 유고가 있다.
   일천(逸薦) 조선 김낙춘(金樂春) : 본관이 순천으로 현감 약평(若枰)의 후손으로 호는 인백당(忍百堂)이다. 일찍이 사마(司馬)에 합격하였으나 파방된 일로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고 성정을 가라앉혀 외부로 드러나지 않고 경전(經典)을 배우는데만 마음을 붙이고 춘추(春秋)만이 성인(聖人)의 친필이라고 하여 더욱 완상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재기가 중하게 보여 칭찬의 시를 지어 주어 장려했다.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추천하여 좌랑(佐郞) 세마(洗馬)에 모두 취임하지 않고 감사하는 시에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친상에 여묘살이를 했다. 문집이 있다.
   신필정(申弼貞) : 필성의 동생으로 호는 병옹(病翁)이며 배움에 힘써 추천으로 주부(主簿)를 내렸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관찰사의 장계에 의하여 집의(執義)에 증직(贈職) 되었고 저서로 훈몽역의(訓蒙易義)가 있다.
   음사(蔭仕) 조선 조온보(趙溫寶) : 본관이 횡성으로 판서 정수(貞壽)의 아들로 정선군수를 지내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으며 본 군에 처음 거주하게 됐다.
   여성열(余成烈) : 본관이 의령으로 호조판서 중부(中富)의 아들이다. 세종 때 병정(兵正)을 지내고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여건(余健) : 성열의 손자로 정랑(正郞)을 지냈다.
   여균(余筠) : 성열의 증손으로 세조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안귀손(安貴孫) : 사직(司直)을 지내고 덕행이 순수하고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김이원(金理元) : 낙춘의 아들로 호는 의암(義岩)이다. 선조 때 찰방(察訪)을 지내고 효도와 학문에 힘썼으며 만년에 의상대(義尙臺)를 쌓고 그 아래 하강정(下江亭)에서 소요하며 즐겼다. 현감 이경절(李景節)이 묘갈을 지었다.
   박로(朴櫓) : 본관이 반남으로 문정공(文正公) 상충(尙衷)의 후손이다. 선조 때 참봉을 지내고 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자취를 감추고 부(賦)와 시를 썼다.
   노경좌(盧景佐) : 본관이 안강으로 진사 수성(守誠)의 아들이다. 호는 월계(月溪)로 선조 때 강릉낭(康陵郎)을 지내고 유고가 있다. 
   김숙(金璹) : 낙춘의 손자로 금부도사를 지냈다.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경서 강의에 밝았다.
   김의지(金義之) : 본관이 청풍으로 좌윤(左尹)을 지냈으며 서울에서 본 군에 이사하여 살았다. 옥천(玉川) 조덕린(趙德
)이 묘갈을 지었다.
   박현복(朴顯福) : 상충(尙衷)의 후손으로 효종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신필성(申弼成) : 본관이 평산으로 문희공(文僖公) 개(
)의 후손이다. 호는 여봉(廬峰)이고 숙종 때 진사에 합격하여 별검(別檢)을 지냈고,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문인으로 문행(文行)이 있다.
   민기정(閔起貞) : 여흥인으로 묵헌(默軒) 지(漬)의 후손으로 교위(校尉)를 지냈다.
   최택헌(崔澤憲) : 본관이 해주로 부제학(副提學) 만리(萬理)의 후손이다. 호는 운포(雲圃)이고 철종 때 참봉을 지내고 유고가 있다.
   김용하(金溶夏) : 문기(文起)의 후손으로 고종 때 감찰(監察)을 지내고 지조가 있으며 주위에 구휼하기를 좋아했다.
   이명호(李明浩) : 해(瀣)의 후손으로 호는 석남(石南)이며 고종 때 진사로 금부도사[禁都]를 지냈으며 문행을 겸비하고 문집이 있다.
   정기규(鄭琪逵) : 본관이 청주로 호는 송초(松梢)며 고종 때 감찰을 지내고 배움에 정성을 쏟았으며 개간하여 밭을 넓혔으며 어려운 이웃을 도운 의로운 선비다. 범암(泛菴) 유연즙(柳淵楫)이 묘갈을 지었다.
   무과(武科) 조선 원태구(元泰龜) : 원주인이고 문정공(文靖公) 효이(孝而)의 후손이다. 영조 때 무과에 올라 현감을 지내고 본 군에 처음 거주하게 됐다.
   천우대(千禹大) : 상(祥)의 후손으로 무과에 올라 첨사(僉使)를 지냈다. 철종 때 명에 따라 쌀 300곡(斛 : 10말)을 내어 광주(廣州)의 기민(飢民)을 진휼했다. 적량에 송덕비가 있다.
   생진(生進) 조선 김택용(金澤龍) : 낙춘의 후손으로 경종 때 생원이다.
   김봉로(金鳳魯) : 의지(義之)의 후손으로 영조 때 진사이며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묘갈을 지었다.
   김성호(金性浩) : 택용의 손자로 정조 때 생원이다.
   이태행(李泰行) : 해(瀣)의 후손으로 호는 동야(東野)이고 현종 때 생원으로 문행이 있어 선비와 벗의 추앙을 받았고 유고가 있다. 판서(判書) 김익용(金益容)이 묘갈을 지었다.
   이선호(李善浩) : 해(瀣)의 후손으로 호는 봉남(鳳南)이며 고종 때 진사로 성행이 맑고 곧으며 뜻을 힘써 행했다.
   이인화(李麟和) : 해(瀣)의 후손으로 고종 때 진사이다.
   충의(忠義) 조선 천만리(千萬理) : 본관이 영양이다.
   천상(千祥) : 만리의 아들로 모두 고성(固城)을 참고할 것.
   김남(金南) : 문기의 후손으로 호는 철석헌(鐵石軒)이고 선조 때 임진왜란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진에 참여하여 공을 많이 세우고 부사직(副司直)에 제수되고 군자정(軍資正)에 증직됐다.
   여춘(余春) : 균의 현손으로 호는 죽헌(竹軒)이다. 임진왜란에 곽재우(郭再佑)의 창의에 가담한 기록이 있다. 지암(芝菴) 유준목(柳畯睦)이 묘갈을 지었다.
   유행(儒行) 조선 신숙빈(申叔彬) : 개(
)의 손자로 지조와 행실이 고결하고 은거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김이범(金履範) : 택용의 아들로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문인이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고 여러 차례 추천이 있었으며 수직(壽職)으로 부호군에 이르고 유고가 있다.
   문학(文學) 조선 김의지(金義之) : 본관이 김령으로 문촌(文村) 문기(文起)의 증손이다. 호는 동은(東隱)이고 단종 때 화를 입은 후 늘 평량자를 썼고, 매 휘일(諱日)에 어룡산에 올라 북쪽의 노릉(魯陵)을 향해 통곡하고 자규시(子規詩)를 읊었다. 별사(別祠) 모견당(慕鵑堂)이 있다.
   김상복(金尙福) : 문기의 후손으로 호는 불치와(不恥窩)이다. 인조 병자호란에 영장(營將) 최진립(崔震立)의 군과 함께 용인에 이르렀으나 화친이 맺어진 것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수직(壽職)으로 절충(折衝)에 오르고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정방시(鄭邦時) : 본관이 청주로 호는 죽림재(竹林齋)이며 문행이 있고 공조참의에 증직 되었다.
   정검주(鄭儉周) : 방시의 손자로 성격이 인후하고 문학에 힘썼고 저서로 7서조변록(七書條辨錄)이 있다.
   천종대(千宗大) : 상(祥)의 후손으로 문행이 있고 철종 때 특몽황단(特蒙皇壇)을 참배했다.

   효자(孝子) 조선 조형(趙珩) :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재부정(司宰副正)에 이르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묘(廬墓)를 피눈물을 흘리며 3년동안 하였으며 할머니 상에도 그렇게 하였다. 세종 때에 가자(加資)하고 정려를 세웠다.
   김정주(金鼎周) : 낙춘의 증손으로 어려서부터 효행으로 칭송받았다. 5살에 조모 상을 당하여 날씨가 몹시 춥자 부친을 위하여 기와를 달구어서 주위에 둘러 세우고 식으면 반복하여 한기를 녹였다. 들에서 자두 등 과실을 보면 따먹지 않고 익기를 기다려 따다가 부친에게 공양했다. 그 동생 역시 효자로 친병에 손가락을 잘라 향리에서 칭송했다.
   주득천(周得天) : 양인(良人)으로 어머니가 눈이 멀어 수십년을 떠나지 않고 차고 더운 음식과 약을 드렸다. 매가 꿩을 떨어뜨리는 기적이 있었고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여 효도로 부역을 면제받았다.
   김시진(金始振) :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간 멀건 죽으로 연명하였다. 86세에 국상을 당하여 고기를 먹지 않고 죽으로 연명하다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했다. 도신(道臣)이 장계를 올려 판서(判書)에 증직되었다.
   김호섭(金虎燮) : 시습(時習)의 증손으로 교수를 지냈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회생시켰으며 문사(文詞)에 능하고 예서(隸書)를 잘 썼다.
   박완수(朴完壽) : 상충(尙衷)의 후손으로 친병에 꿩고기를 먹고 싶어하자 꿩이 스스로 날아들어 구하고 의사가 와서 괴산의 신이 꿈에 현몽하여 영삼을 얻을 수 있었고 손가락을 갈아 혈분을 고르게 하여 병이 나았다. 감찰에 제수되고 만수재(晩修齋) 이시좌(李時佐)가 묘갈을 지었다.
   신식(申湜) : 어머니의 병에 얼음을 깨고 고기를 얻었으며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었으며 상을 당하여 워낙 애통하여 파리하게 여위었다. 철종 때 정려를 세우도록 명령이 있었다.
   노병국(盧秉國) : 수성(守誠)의 후손으로 철종 때 참봉을 지냈다. 일찍이 외로운 집의 어려운 살림에서 조모에게 기천과 금강에서 매일 고기를 낚아서 공양하여 사람들은 금수효자(錦수孝子)라고 불렀고 병이 들자 옆에서 변을 맛보아 병을 진단하고 하늘에 빌었다. 백졸암(百拙菴) 권응정(權應靖)이 묘갈을 지었다.
   김용주(金溶周) : 문기(文起)의 후손으로 호는 백헌(栢軒)이며 아버지의 병에 변을 맛보아 진단하고 하늘에 축원하니 향리에서는 포상을 청하여 교관(敎官)에 증직되고 정려를 세우도록 명령한 유사(遺事)가 있다. 박화진(朴華鎭)이 묘갈을 지었다.
   김경권(金慶權) : 용주의 아들이며 아버지를 위하여 효규각(孝규閣), 몽정각(蒙旌閣)을 짓고 비석을 세워 대대로 효자라고 했다.
   김만흥(金萬興) : 문기의 후손으로 부모를 섬기는 일에 효도를 다하여 향리에서 칭찬하여 상을 내렸다.
   정겸흥(鄭謙興) : 방시의 후손으로 부모를 효도로 섬겼다. 3형제의 우애가 돈독하여 향리에서 칭송했다.
   정순연(鄭舜年) : 본관이 청주로 천성이 효성스러워 친병에 여러 달 동안 변을 맛보아 진단하며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는 등의 효행으로 향리에서 칭찬하는 장계가 있었다.
   김교원(金敎元) : 본관이 경주로 참판에 증직된 각지(覺之)의 후손이다. 부모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여 향리에서 칭찬하여 상을 내리고 수직(壽職)으로 가선(嘉善)을 지냈다.
  열녀(烈女) 조선 최씨(崔氏) : 강릉인 치운(致雲)의 딸이고 사직(司直) 안귀손(安貴孫)의 부인이다. 시와 글씨에 널리 통하여 남편이 죽으니 제문(祭文)에       

       
  정려를 세우도록 명령했다.
   윤소사(尹召史) : 정병(正兵) 조막룡(趙莫龍)의 부인이다. 인조 때 병자난에 남편이 쌍령(雙嶺)에서 죽자 6년간 소복을 하니 그 아버지가 가엽게 여겨 뜻을 꺾으려 하자 따르지 않고 스스로 목을 메어 자결했다. 정려(旌閭)를 세우도록 명령했다.
   김씨(金氏) : 안동인 판서 득신(得臣)의 후손이고 순천인 김하범(金夏範)의 부인이다. 남편을 구하기 위하여 호랑이 앞에 먼저 나갔으며 시아버지 드릴 음식을 구하러 갈 때 호랑이가 보호하여 눈 덮인 고개를 넘겨다 주었다. 관청에 세금을 늘 먼저 바치는 모범을 보였다. 사림에서 여러 차례 장계를 올려 포상을 청했다.
   이씨(李氏) : 본관이 양성으로 중곤(重坤)의 딸이고 강릉인 김록기(金錄起)의 부인이다. 출가하기 전에 남편이 죽자 상례에 따라 극진히 하고 시아버지와 어머니를 효도로 받들어 향리에서 포상하고 칭찬하는 많은 시가 있다.

  [도로(道路)]
   1등 : 1선(線) 7리(里) 24정(町)
   2등 : 1선 2리 24정
   3등 : 1선 1리 23정
   등외 : 12선 69리 22정
   철도 경북선 : 7천(천 : ㎞) 2미(米 : m)

  [교량(橋梁)]
   마포원교(馬砲院橋) : 화봉원 앞내에 있다.
   소야천교(所耶川橋) : 소야천에 있다.
   회연교(回淵橋) : 용연 하류에 있다.

  [제언(堤堰)]
   만세제(萬歲堤) : 군의 동남쪽 35리에 있다.
   기제(機堤) : 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비계제(比溪堤) : 군의 남쪽 30리에 있었다. 옛날 1784년(갑진 : 정조 8년)에 경작하여 폐지됐다.

  [시장(市場)]
   문경시장 : 하리에 있고 2일, 7일에 장을 연다.
   왕릉시장 : 가은면에 있고 3일, 8일에 장을 연다.
   농암시장 : 농암면에 있고 5일, 10일에 장을 연다.
   점촌시장 : 호서남면에 있고 2일, 7일에 장을 연다.
   산양시장 : 산양면에 있고 4일, 9일에 장을 연다.
   대상시장 : 산북면에 있고 3일, 8일에 장을 연다.
   적성시장 : 동로면에 있다.
   갈평시장 : 문경면에 있다.

  [역우(驛郵)]
   점촌역, 문경우편소(郵便所), 점촌우편소
   옛 역원(舊驛院) 유곡역(幽谷驛) :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찰방 1인이 있고 유곡도(幽谷道)에 속한 18역이 요성(요城), 덕통(德通), 수산(守山), 낙양(洛陽), 낙동(洛東), 구미(仇尾), 쌍계(雙溪), 안계(安溪), 대은(大隱), 지보(知保), 소계(召溪), 연향(延香), 낙원(洛原), 상림(上林), 낙서(洛西), 장림(長林), 낙평(洛平), 안곡(安谷)이다. 1489년(성종 20년 기유)에 중수했고 홍귀달의 기문이 있다.
  홍언충(洪彦忠)의 시       

역관에 베개 배고 누웠으니 맑은 바람마저 외롭고
오랜 느티나무 가에서 석잔 술을 기울인다.
이번 가는 길 살아서 돌아올 날 알지 못하나
마음은 여유로와 모든 일을 하늘에 맡긴다.
 

      
   요성역(
耳卯 
城驛) :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이규보(李奎報)의 시       

유곡의 하루 밤을 술 취해 자고나서
요성길 한나절에 말 멍에 풀어 쉰다.
돌아온 완적(阮籍)은 휘파람만 오래 불고
쓸쓸한 상여(相如)는 벼슬에 싫증났네.
역 아전들 송영(送迎)은 언제쯤 끝이나고
사신들의 내왕은 어느 때 멎으려나
나 같이 한가로운 길손은 다행이다
와도 번거롭히잖고 가는 것도 마음대로니

       
  김군수(金君綏)의 시       
          
   조령원(鳥嶺院) : 조령의 등성이 동쪽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관음원(觀音院) : 계립령 아래에 있다.
   관갑원(串岬院) : 관갑의 북쪽에 있다.
   회연원(回淵院) : 용연의 위에 있다.
   문경원(聞慶院) : 호계현 서쪽 3리에 있다.
   불정원(佛井院) : 호계현 서쪽 8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 호계현 남쪽에 있다.
   동화원(桐華院) : 군의 서북 15리에 있다.
   견탄원(犬灘院) : 견탄의 북쪽 언덕에 있다.
    권근(權近)의 기문(記文)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반드시 큰 재가 있는데 그 재를 넘어서 약 100리 길은 모두 큰 산 사이를 가야 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관갑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남떠러지를 따라 사다릿길을 열어 사람과 말들이 겨우 통행한다. 위는 험한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에는 깊은 시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떨고 무서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내를 건너는데 그 내가 견탄이다. 견탄은 호계현의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 가는 요충이요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여울 위에는 전에 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퇴락한지 오래되어 길손이 쉴 곳이 없다. 화엄대사(華嚴大師) 진공(眞公)이 일찍이 여기를 지나다가 개탄하여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키려고 곧 그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띠를 베어 거처할 집을 세웠다. 또 길손을 접대해 가면서 여러 사람을 잘 달래어 재물과 사람의 힘을 모아서 나무를 베어 오고 기와를 굽는 등 공사를 일으켜서 몇 칸 집을 세워 걸어다니는 길손이 머물러 자는 곳으로 하였다.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자리를 달리하고 사람과 가축의 처소를 따로 하였다. 또 그 남쪽에 누각 몇 칸을 지어서 길가는 이는 거기서 쉬어가고 구경하는 이는 올라가 보며 지친 사람은 거기서 쉬고 더운 사람은 시원하게 하려고 몇 해 안되어 준공하였다.

  또 그의 제자들과 함께 모진 돌을 깎아서 치우고 비탈을 깎아 평평하게 하여 관갑의 길을 보수하였으므로 좁은 길 위험한 사다릿길이 모두 평탄해졌다. 그리하여 다니는 사람들이 평지를 밟는 것과 같아서 걸어가도 몸을 구부릴 필요가 없고 타고 가도 마음이 떨리지 않아 다시는 떨어질 위험이 없게 되었으니 대사의 마음씀이 부지런하다 할 것이며 사람에게 이롭게 함이 크다 할 것이다.

  이제 우리 형님 반룡대사(盤龍大師)가 서울 오는 것을 기인하여 나에게 누각의 기문을 써 달라고 하는데 화엄대사와 반룡대사는 같이 뽑힌 이들이다.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겠음으로 삼가 주례(周禮)를 살피건데 무릇 나라의 들에는 10리 길에 초막[廬]이 있고 30리에 여관[宿]이 있었으며 또 후세에는 10리에 장정(長亭) 하나, 5리에 단정(短亭) 하나씩이 있었는데 모두 나그네를 위한 것이었다. 나라에서 역을 두어 사명(使命)을 전하고 원을 두어 상인과 여행자에게 혜택을 주되 공사(公私)의 구별, 상하(上下)의 구별이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역에는 각각 관리가 있어 그 직책에 힘썼으나 원에는 다만 밭을 주고 사람을 모집하여 그것을 주관하게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평원의 기름진 땅이 있어도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가끔 있었으니 하물며 깊은 산골의 험하고 메마른 곳임에랴. 들에 있어서는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원집이 사람과 말은 지치고, 범이나 표범의 두려움, 도둑의 염려 등 길손의 걱정은 이에서 더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대사가 이 원을 일으켜 위험하고 호젓한 길에 사람들을 들게 한 것은 그 공이 다른 원을 지은 데 비하여 천백 배나 더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벗이 일찍이 불법(佛法)에서는 모든 유익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길과 다리를 보수하고 원집을 짓는 것도 그 중의 한가지 일이니 그 공덕 보은지설(功德報恩之說)을 나는 배우지 않아 잘 모르지마는 대사는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화봉원(華封院) : 군의 남쪽 40리에 있고 세상에서는 초곡원이라 했다.
    유희(劉曦)의 시       

벼슬에서 좌천되어 남녘으로 16역 지나
오늘 아침 비로소 경상도에 들었다.
요성 근처 두어 마장 떨어진 곳에
궁벽한 군 하나 문경이라 부른다.
변두리 새 원집은 형세가 엄숙하고
찬란한 금빛과 푸른 빛이 뒤섞여서
동쪽의 작은 누각 뛰어난 경치에다
훌륭한 글들은 옛 팔영(八영)을 압도한다.
아름답구나 이 집을 그 누가 지었는고
이름은 광문(光文)이요 성씨는 민(閔)씨로다.
나 또한 그 민공의 문하에 사람이라
이 건물 창건 보고 더욱 더 공경하네.
아 이 사람이 세상에 머물면서
천하를 경영하면 별 탈이 없었을 걸
어쩌랴 하늘 위에 옥루(玉樓)를 이룩하니
기러기가 하늘 나는 듯 그림자도 머물잖아
티끌 세상과는 떨어져 아득하이
다만 이 한몸이 오램을 탄식한다.
 

    
     이규보의 시       

만가지 인연이 재처럼 찬 노거사(老居士)도
붉은 마음 있어 성인 임금 받든다.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축원하려는데
어찌하여 화봉의 이름 혼자 차지했는고

       
  [봉수(烽燧)]
   선암산(禪巖山) 봉수 :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북쪽으로 탄항산에 응답하고 동쪽은 상주 소산에 응답하고 남쪽으로 함창 성산에 응답한다.
   탄항산(炭項山) 봉수 : 현의 북쪽 31리에 있다. 남쪽으로 선암산에 응답하고 서쪽으로 연풍의 지릅산[麻骨山]에 응답한다.

  [총묘(塚墓 : 무덤)]
   신상철 묘(申尙哲墓) : 오리동에 있고 이민구(李敏求)가 묘갈을 지었다.
   김낙춘 묘(金樂春墓) : 창양동(창陽洞)에 있고 권상일(權相一)이 지은 묘갈이 있다.

  [고적(古蹟)]
   벌천부곡(伐川部谷) : 군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곡(高谷)부곡, 견천(絹川)부곡, 소산천(小山川)부곡, 마량(馬良)부곡 : 호계에 있다.
   잉을항소(仍乙項所) :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고모성(姑母城) : 군의 남쪽 20리에 돌로 쌓아 둘레가 990자다. 양쪽 골짜기를 묶은 중반 같은데 그 아래로 큰 내와 길이 지나는데 경상좌 우도가 만나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지키는 줄 알고 두려워 여러 차례 확인하고서야 지키는 병력이 없음을 알고 춤을 추고 지나갔다.
   고부성(姑夫城) : 토천의 남쪽 높은 산 위에 있는데 고모성과 마주보며 지금은 퇴락하여 모두 못쓰게 됐다.
   요성(
耳卯 
城) : 군의 동남쪽 4리에 돌로 쌓은 둘레 550자로 지금은 못쓰게 됐다.
   견훤산성(甄萱山城) : 가은현 서남쪽 5리에 돌로 쌓아 둘레가 565자이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희양산성(曦陽山城) : 군의 서쪽 50리에 있다.
   조령산성(鳥嶺山城) : 1708년(숙종 34년 무자)에 남북 18리에 둘레 18,509보의 성을 쌓았다. 성이 3곳 있는데 하나는 새재의 위에 영남과 호서의 경계에 있고 하나는 응암의 북쪽 소위 중성이고, 하나는 초곡에 있는데 군창도 있다. 3성이 모두 홍예문으로 큰 길이 통하며 영성(嶺城)은 조령관(鳥嶺關), 중성(中城)은 조동관(鳥東關), 초곡성(草谷城)은 주흘관(主屹關)이라 하고, 또 물이 흐르는 곳에도 홍예문을 두어 성내 여러 개울물이 모두 이곳으로 나간다.
  조령은 계립령에서 비롯되며 달항(達項)에서 둘로 나누어진다. 한 맥은 주흘산의 깎아지른 여러 바위 봉우리를 이루고 또 한 맥이 조령을 휘돌아 공정산을 이룬다. 돌부리가 높고 산세가 굳세며 주흘산의 맞닿는 곳부터 자연성곽을 이룬다. 조령의 등성마루 북쪽에서부터 충주의 달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탄한 길이 나선다. 남쪽 길은 본 현의 견탄에 이르러서야 평원을 만날 수 있다. 산이 거듭되어 첩첩이 산봉우리가 쌓여 개의 이빨같이 서로 견제하니 하늘이 낸 요충의 험지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삼한(三韓)때 흥달(興達)이 축성한 고사갈이성이라 한다. 고모성, 고부성 및 요성, 희양석성이 서로 의지하는 형세로 남은 터가 아직도 존재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은 이곳을 보고 한탄하기를 “이렇게 험한 곳을 지키지 않은 신총병(申摠兵)은 무모하다.” 고 했다.
     장유(張維)의 부(賦)에       

아아 이 고개는 대단히 높고 높아서
웅장하고 빼나기로 나라에서 이름난 곳
여러 산 끌어와서 둘러 앉히고
그윽한 골짜기 나눠 언덕 이루니
오솔길에 사람 자취 이어지는데
위험한 사다리길이 산등성에 걸렸다.
여러 골짜기에 고개는 협착한데
양의 창자같은 한가닥 길이 있다.
하늘에 낸 험한 곳에 적이 없음을 믿고
어찌 많다고 만족하여 자랑할건가.

         
   관갑천(串岬遷) : 토천(兎遷)이라고도 하며 용연의 동쪽 벼랑으로 반석에 사다리길을 만들었는데 거의 6, 7리나 되며 세상에 전해 오기를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쳐 와서 이곳에 이르니 길을 잃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곳으로 길을 열어 갈 수 있어 토천이라 불렀다.” 고 한다. 옛날 돌로 쌓은 성터가 있다.
   조천(潮泉) : 조천은 둘이 있다. 하나는 소둔산에 있는 것으로 물이 바위 구멍으로부터 매일 아침, 저녁으로 솟아 넘쳐 3리까지 가서 멎는 것이 마치 밀물과 썰물이 오가는 것과 같다. 하나는 정곡리에 있는 것으로 흙구멍에서 매일 3번 뿜어 넘쳐 동구로 흘러 소야천으로 들어가는데 물미리[水椎]라 한다.
   어류동(御遊洞) : 조령의 동쪽으로 공민왕이 계단적(契丹賊)을 피해와 머물러 어류동이라 전하고 궁실(宮室)터가 있다.
   야유암(夜遊巖) : 봉암사 동쪽에 있는데 넓고 맑고 깨끗하여 밤에도 놀 수 있어 야유암이라 하고 세상에 전해 오기를 최치원(崔致遠)이 놀던 곳이라 하며, 취적대(取適臺) 3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누정(樓亭)]
   경운루(慶雲樓) : 객관 동남쪽에 있었다.
     이지강(李之剛)의 시       

고을의 누각이 겹겹으로 산에 쌓여
조령 길 몇 번을 따라서 돌았던고
뜰 가로 돌아드는 시냇물이 흐느끼듯
마당에 얼룩지며 가득하게 낀 이끼로다.
고기잡이 등불이 시내를 건너가고
나무꾼의 노래 소리 구름 속 나오는데
많은 시흥들이 경치에 홀렸는지
붓을 들고도 감히 쓰지 못한다.

         
   교귀정(交龜亭) : 조령의 용연 위에 있다. 관찰사 교인처(交印處)로 성종 때 현감 신승명(愼承命)이 건립했다.
     김종직(金宗直)의 시       

교귀정에 오르니 천지가 오만해도
서릿빛 구레나룻서 큰 것을 깨달았다.
물소리는 음악 같이 스스로 격려하며
수천 바위는 노을 들어 그림이구나
시로써 읊기 전에 새 먼저 날아갔고
눈물 쓰린 이 회포는 원숭이 애끓음 같아
남쪽 길 이미 막히어 쌍척후를 보내고
달 밝은 오늘밤을 어느 마을서 자야할까.

       
   천교정(遷喬亭) : 유곡역(幽谷驛)에 있다.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貴達)의 기문(記文)이 있다. 기문을 벽에 걸었으나 연산조 갑자사화 때 관명으로 철거토록 하였다. 역리 방결(方潔)이 밤에 10개를 안고 돌아가 갈무려 두었다가 중종반정 후에 다시 달았다.
   열무정(閱武亭) : 소야천가에 있다. 조령진의 군병을 조련한 곳이다.
   비홍정(飛鴻亭) : 군의 동쪽 5리에 수석이 뛰어난 곳이었으나 지금은 없다.
     허적(許적)의 시       

옛사람 이미 날아간 기러기 같아
남은 자취 없고 시내 위에 정자만 있다.
고목은 겨울 바람에 절절이 휘둘리고
거친 언덕 지는 해는 연기로 어둡구나.
층암절벽이 거울처럼 비쳐오니
푸른 물 찬 흐름은 병풍을 두른 것 같다.
돌에 기대 시 읊은 사이 숲에 어둠 내려도
멀리는 외로운 학이 물가를 바장인다.

       
   봉생정(鳳笙亭) : 군의 남쪽 40리에 있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세웠다.
   영류정(映流亭) : 군의 남쪽 소양동에 있다. 인백당 김낙춘을 위하여 건립했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명명하고 지은 시에       

물은 청산을 끼고 산은 물길을 안아
거울 속 빛과 그림자로 조용히 함께 떠올라
백년간 아껴 온 비경을 인간이 얻어보니
아름다운 꽃다운 나이 정취 또한 그윽해

 
     
    오주(梧洲) 김연(金連)의 기문이 있다.
   모견당(慕鵑堂) : 군의 남쪽 과곡리에 있고 동은(東隱) 김의지(金義之)가 건립했다.
   죽헌정(竹軒亭) : 군의 남쪽 송죽리에 죽헌(竹軒) 여춘(余春)을 위하여 건립했다.
   죽림정(竹林亭) ; 군의 서쪽 우로동에 있고 죽림재(竹林齋) 정방시(鄭邦時)를 위하여 건립했다.
   소원정(溯源亭) : 군의 동쪽 탑동에 있다. 금수(錦수) 노병국(盧秉國)이 건립했다.
   금하정(金霞亭) : 군의 남쪽 재악산 밑에 석하(石下) 김상보(金商輔)가 건립했다.
   취송정(翠松亭) : 영수 위에 있다. 춘해(春海) 최찬(崔瓚)이 건립했다. 근처에 조대(釣臺)를 쌓고 스스로 읊은 시가 있다.
   학음정(鶴陰亭) : 과곡리에 있고 백헌(柏軒) 김용주(金溶周)가 건립했다.

  [제영(題詠)]
   최수(崔脩)의 시에       

북쪽을 바라보니 산천이 막혀있고
남쪽으로 와서는 세월만 흘러간다.
달리는 여울은 골짜기를 늘 울리고
눈 쌓인 벼랑 아래 그늘이 뒤덮었다.
충성된 절조만은 마음에 가득하나
화사한 얼굴엔 백발만 늘어난다,
이름 얻는 길에서 무엇을 이뤘던고
부질없이 벼슬 싫단 노래만 읊었노라.
 

 
   정포(鄭包)의 시에       
   김구경(金久)의 시에       
   
 

상   주   군

 

  [연혁(沿革)]
   속현(屬縣) 산양현 : 본래 신라 근품현(近品縣)인데 근암(近岩)이라고도 하며 경덕왕이 가유(嘉猷)로 고치고 예천군 소속이 되었다.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년)에 상주목에 소속하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명종이 없애고 전대로 소속시켰으며 1906년(광무 10년)에 문경군에 소속했으며 군에서 북쪽으로 63리다.
   영순현 : 군의 35리로 북면 임하촌인데 고려 때 태씨 성을 가진 사람이 도적을 잡은 공로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1906년(광무 10년) 문경군에 소속했다.

   진관(鎭管) 현 5 : 문경, 함창, 개령, 지례, 고령
   1896년(고종 건양 원년)에 군으로 고치고 1914년(대정 3년) 함창군과 문경군 달산(達山), 모전(茅田) 2동리가 본 군에 편입했다.

  [성씨(姓氏)]
   산양 : 유(庾), 신(申), 채(蔡), 방(方)씨
   영순 : 태(太)씨
   무림(茂林) : 손(孫), 김(金), 심(沈)씨 모두 속성(續姓)이다.

  [산천]
   사불산(四佛山) : 산양현 북쪽에 있는데 동쪽으로 죽령이 연하고 남쪽으로 화장(華藏)을 끌어당기었으니 이 산의 이름은 사불이며 혹은 공덕(功德)이라고도 한다. 산에 사방 10자쯤 되는 돌이 있는데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을 새겨 별봉(別峯)에 안치되어 있다. 신라 진평왕이 그 산에 순행하여 구경하고 그 옆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이름을 대승이라 하였다. 산의 곤방에 절이 있는데 이름은 백련사(白蓮寺)이다. 뜰 좌우에 미면정(米麵亭)이 있고 또 의상(義湘)이 설법하던 대(臺)가 있고 종려나무 삿갓과 주석 지팡이가 있다. 1242년(고려 고종 29년)에 최자(崔滋)가 상주목사로 와서 찾아보니 옛 궁전에 원효(元曉), 의상(義湘)의 진용(眞容)이 있고 삿갓과 지팡이도 아직 탈이 없었다. 문밖 50보쯤 되는 곳에 높이가 3자나 되는 돌 하나가 있는데 서로 전하기를 금호석(禁虎石)이라고 한다. 20보쯤 되는 곳에 샘이 있어 바위틈에서 졸졸 솟아 나오고 소나무, 가래나무가 울밀하고 아래에 반석이 있어 30명은 앉을 만하니 이름이 냉천장(冷泉亭)이다. 최공이 이에 법조(法曹) 왕공(王公)에게 명하여 역사를 통독하고 새롭게 하여 불우(佛宇), 조당(祖堂), 승료(僧寮), 객실(客室)로부터 허백루(虛白樓)에 이르고 또 냉천정 아래에 누교(樓橋)를 만들어서 이름을 신청교(神淸橋)라 하고 조계산인(曹溪山人) 탁연(卓然)에 명하여 써서 부치게 하였다. 만덕산(萬德山) 백련사가 호남에 있고 공덕산은 강동(江東)에 있어 동백련(東白蓮)이라고 불러서 구별하였다.
   대조현(大鳥峴) : 산양현 북쪽에 있는데 군에서 88리에 있으며 운달산에서 뻗어왔다.
   마전산(馬轉山) : 군의 북쪽 100여리에 있고 대미산이 남쪽으로 뻗어와 이 산을 이루고 옛날에는 계립령을 가는 통로다.
   운달산(雲達山) : 산양현 북쪽 30리에 있으며 마전산에서 남쪽으로 뻗어왔다.
   근암산(近巖山) : 산양현 북쪽 1리에 있고 예천 용문산에서 뻗어왔다.
   통달산(通達山) : 영수의 서쪽 1리에 있고 함창 재악산에서 뻗어왔다.
   낙동강(洛東江) : 군 동쪽 36리에 있다. 문경의 용연(龍淵)과 군위 병천(幷川)의 여러 물이 군의 동북쪽에 이르러 용궁의 하풍진에 합하여 남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선산 경계로 들어가는데 바다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따라 명칭은 다르나 총칭 낙동강이라 하고 가야진이라고도 한다.
   화천(花川) : 문경 주흘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낙강에 든다.
   영수(영水) :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하여 문경 봉생에서 소야천과 합치고 영순의 남쪽으로 흘러 함창의 이안천과 합쳐 낙강에 든다.
 * 영 : 삼수변+穎

   산양천(山陽川) : 대미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반계수가 되고 용궁에 이르러 옥천과 합쳐 낙강에 든다.
   반계(磻溪) : 마전산에서 발원하여 대승, 김룡, 미면의 여러 물을 합쳐 산양천이 된다.
   병천(甁川) : 군의 북쪽 용유동으로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영수의 상류가 된다.
   백암(白岩) : 군의 북쪽인 선암촌의 남쪽에 있는데 김득배(金得培)가 운명한 곳이다.

  [토산(土産)]
   옥등석(玉燈石) : 대조현(大鳥峴)에서 난다.

  [관공서]
   산양창 : 군의 북쪽 63리에 있다.

  [교원(校院)]
   근암서원(近巖書院) : 군의 북쪽 60리에 있다. 1664년(현종 갑진)에 창건하고 교리(校理) 홍언충(洪彦忠), 문익공(文翼公) 이덕형(李德馨), 전한(典翰) 김홍민(金弘敏), 사간(司諫) 홍여하(洪汝河), 처사(處士) 이구(李
), 별제(別提) 이만부(李萬敷), 희정공(僖靖公) 권상일(權相一)을 제향한다.
   웅연서원(熊淵書院) : 군의 북쪽 60리에 있다. 1768년(영조 무자)에 건립하고 정조 때 서원으로 올려 전서(典書) 채귀하(蔡貴河), 양정공(襄靖公) 채수(蔡壽), 판서 채소권(蔡紹權), 별좌(別座) 채득기(蔡得沂)를 제향한다.
   도천사(道川祠) : 군의 북쪽 60리에 있다. 1818년(순조 무인)에 건립하여 군수 황정간(黃廷幹), 찰방 신경(申경), 진사 황상중(黃尙中)을 제향한다.
   죽곡사(竹谷祠) : 군의 북쪽 50리에 있고 1844년(헌종 갑진)에 세우고 주부(主簿) 고윤종(高胤宗), 군수 고흥운(高興雲), 사예(司藝) 고인계(高仁繼), 승지(承旨) 고유(高裕)를 제향한다.

  [사찰]
   미륵암(彌勒庵) : 사불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고 권근(權近)의 기문이 있다.
   대승사(大乘寺) : 사불산에 있으며 신라 진평왕 때 세웠으며 1785년(영조 을사) 의학대사(義學大師)가 세 번째 고치고 불상을 모셨다.
   김룡사(金龍寺) : 운달산에 있으며 1624년(조선 인조 갑자년)에 중 혜총(慧聰)이 창건했다.
   내원암(內院庵) : 김룡사 북쪽 7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미면사(米麵寺) : 대승사 남쪽 10리에 있다.

 

  함   창   군
 

  [산천]
   관천(串川) : 군의 동쪽 7리에 있고 문경 견탄의 하류로 저곡천과 합류하여 하풍진으로 들어간다.

  [제언(堤堰)]
   호남보(虎南洑) : 관천 하류에 있다.
   수정보(水晶洑) : 군의 동쪽 15리에 있다.
   대조보(大鳥洑) : 수정보 아래에 있다.

  [옛 역원(舊驛院)]
   다방원(茶方院)

  [능묘(陵墓)]
   홍귀달(洪貴達) 묘 : 군의 동쪽인 전촌에 있고 남곤(南袞)이 비문을 지었다.
   홍여하(洪汝河) 묘 : 율리 뒤에 있다.

  [누정(樓亭)]
   애경당(愛敬堂) : 군의 동쪽 10리에 있는데 홍귀달이 건립하고 스스로 기문을 지었다.
   산택재(山澤齋) : 군의 동쪽 율리에 있는데 홍여하가 건립하고 김이만(金履萬)의 시가 있다.

 

  예   천   군
 

  [연혁]
   속현(屬縣) 안인현(安仁縣) : 김부식은 “본래 난산현(蘭山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보주의 영현으로 하였으나 지금은 알 수 없다.” 고 했다. 1906년(광무 10년) 화장(化庄), 동로(東魯) 2면을 떼어 문경군에 주고 안동군 감천면을 옮겨왔으며 1924년(대정 13년) 영주군 상, 하리 2면과 용궁군을 본 군에 합쳤다.

  [성씨(姓氏)]
   동로(冬老) : 김(金), 임(林)씨 모두 속성으로 이상은 여승(輿勝)에 실려 있다.

  [산천]
   작성산(鵲城山) : 군의 북쪽 75리에 있다. 황장목을 베지 못하도록 둘레 40리를 나라에서 금했다.
   천주산(天柱山) : 군의 북쪽 50리에 기둥 같이 똑 바로 솟아 있어 천주산이라 한다.
   호항령(狐項嶺) : 군의 북쪽 70리에 있다.

  [교원(校院)]
   의산서원(義山書院) ; 군의 서쪽 위만에 있으며   년(영조 병자년)에 건립했으며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를 제향한다.

  [사찰]
   천주사(天柱寺) : 천주산에 있다.

 

  용   궁   군
 

  [산천]
   왕의산(王衣山) :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와서 이곳에 머물며 옷을 걸어서 왕의산이라 했다.

  [교원(校院)]
   용곡사(龍谷祠) : 군의 서쪽 10리에 있으며 1685년(숙종 을축년)에 건립하여 인의(仁儀) 강응청(姜應淸), 이조정랑(吏曹正郞) 강재(姜齋), 현감(縣監) 강우(姜우)를 제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