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록 > 지리지 종관(終觀)에 따른 문경사 관견(管見) - 집주 문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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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0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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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삼국사기지리지고려사지리지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부 록

  

 

 

 集註                         

  문     경     사  

 

 

부 록 > 지리지 종관(終觀)에 따른 문경사 관견(管見)  

 

 차        례

  1. 들머리
   2. 문경의 지리와 역사
       1) 문경의 지리
       2) 문경사(聞慶史)
    3. 지리지로서 읍지
        1) 읍지 편찬의 필요성
           (1) 자료수집
           (2) 수령의 권한확립
           (3) 향촌(鄕村) 질서 재정비
           (4) 정치 군사적 목적
        2) 연대 추정
        3) 읍지의 편찬
        4) 편목(編目)
    4. 지리지 및 읍지에서의 문경
        1) 삼국사기지리지(三國史記地理志)
        2)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
        3)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4)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
        5)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6)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7)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
        8)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9) 조령진문경현지(鳥嶺鎭聞慶縣誌)
       10) 여지도서(輿地圖書)
       11) 문경현지(聞慶縣誌)
       12) 문경군 읍지(聞慶郡邑誌)
       13) 문경현지(聞慶縣誌) 
       14) 경상도 읍지
       15) 대동지지(大東地志)
       16) 경상북도 문경군 읍지(邑誌)
       17) 문경부지(聞慶府誌)
       18) 문경부 신정사례(聞慶府 新定事例)
       19) 영남읍지·1
       20) 영지요선(嶺誌要選)
       21) 영남읍지·2
       22) 조선환여승람(朝鮮환輿勝覽)
       23) 교남지(嶠南誌)
       24) 영남읍지의 유곡도 역지(驛誌) 및 시행사례(時行事例)
       25) 영남역지(嶺南驛誌) 
       26) 영남진지(嶺南鎭誌)
    5. 맺으며
    * 참고문헌

 

지리지(地理誌) 종관(縱觀)에 따른 문경사(聞慶史) 관견(管見)

  신후식(申厚湜)

  1. 들머리

  지리지의 한 단위인 읍지(邑誌)가 모여서 도지(道誌)를 이루고 도지가 모여서 전국의 지리지가 된다. 즉 지역사(地域史)가 모여서 국사(國史)가 된다. 지리지는 우리 민족의 역사책이며 자료집으로 역사와 문화는 물론 정치, 군사, 사회, 경제, 풍토, 지리, 언어, 문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지금도 여러 분야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된다.

  이같이 중요한 자료가 산재(散在)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 지역을 종관하여 지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국사를 갈다듬는 의미도 있다고 보고 문경지역을 택하여 관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현재의 문경시는 신라시대에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 관현(冠縣), 관문현(冠文縣), 관산현(冠山縣)이라 호칭되고 고려시대는 문희군(聞喜郡), 문경군(聞慶郡)으로 개칭되었고 조선시대에 문경현, 문경도호부(聞慶都護府), 문경군으로 변하여 일제 때 상주, 예천, 용궁군의 일부를 합쳤다. 정부수립 후에도 문경군이었는데 점촌시, 문경군으로 분리되었다가 문경시로 합친 곳이다.
 

  2. 문경의 지리와 역사

  1) 문경의 지리
  경상도의 서북쪽에 있는 문경시는 서쪽과 북쪽은 충청도와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예천군, 남쪽은 상주시와 맞닿는다. 백두대간이 뻗어와 태백산, 소백산을 이루고 죽령을 거쳐 문경의 대미산(黛眉山)으로 치솟으니 문경의 산들이 여기서 비롯되며 주흘산(主屹山)을 진산(鎭山)으로 문경 고을이 형성됐다. 
  희양산(曦陽山), 재목산(梓木山), 관혜산(冠兮山)에는 산신제를 지내고 황장봉산(黃腸封山), 용뢰산(龍磊山), 여산(廬山), 봉명산(鳳鳴山), 장산(獐山), 화산(華山), 소둔산(所屯山), 대야산(大耶山), 불일산(佛日山), 작성산(鵲城山), 천주산(天柱山), 공정산(公正山), 청화산(靑華山), 사불산(四佛山), 운달산(雲達山), 호항산(狐項山), 광림산(廣林山), 명월산(明月山), 여석산(礪石山), 오정산(烏井山), 기산(箕山), 어룡산(魚龍山), 월방산(月方山), 근품산(近品山), 통달산(通達山), 천마산(天馬山), 사직봉(社稷峯), 대방산(待榜山), 공덕봉(孔德峯), 천주봉(天柱峯), 국사봉(國師峯), 봉수봉(烽燧峯), 사선봉(四仙峯)이 소백산맥을 형성하며 서남을 달린다.
  이 소백산맥을 넘어 충청도와 연결짓는 계립령(계立嶺), 조령(鳥嶺), 이화현(伊火峴), 불한령(弗寒嶺), 고모령(高毛嶺), 갈재(葛峙), 호항령(狐項嶺), 주현(周峴), 외에도 부운령(浮雲嶺), 대조현(大鳥峴), 마전령(馬轉嶺) 등 크고 작은 재가 있다.
  그 사이를 소야천(蘇野川), 병천(甁川), 가은천(加恩川), 영수(영水), 관천(串川), 반계(磻溪), 화천(花川), 산양천(山陽川)이 흘러 낙동강에 들기전에 용연(龍淵), 견탄(犬灘), 동로소(東魯沼), 예의소(禮義沼)를 이루며, 어류동(御留洞), 용유동(龍遊洞), 선유동(仙遊洞), 야유암(夜遊巖), 응암(鷹巖), 용추(龍湫), 청학대(靑鶴臺), 봉황대(鳳凰臺), 백운대(白雲臺), 금하굴(金霞窟), 신암동굴(神巖洞窟) 같은 기이한 명승지를 형성했다.
  산이 많아 들이 넓지 못하나 만세제(萬歲堤), 기제(機堤), 진목제(眞木堤), 직곡제(直谷堤), 진정제(辰井堤), 연화제(蓮花堤), 이촌제(梨邨堤), 대사제(大寺堤), 고윤석제(高允石堤)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어 왔다.
  통신은 선암(禪巖), 탄항(炭項), 소산(所山) 봉수(烽燧)를 이용하고 갈평천(葛坪川), 토천(兎遷) 같은 사다리 길을 따라 나그네를 위한 조령원(鳥嶺院), 요광원(要光院), 관갑원(串岬院), 회연원(回淵院), 개경원(開慶院), 불정원(佛井院), 보통원(普通院), 동화원(桐華院), 견탄원(犬灘院), 화봉원(華封院), 반암원(班巖院)이 있었으나 시대 변천으로 폐지되었다.
  영남에서 서울을 갈 수 있는 고개가 몇 곳 있었으나 조선조 이래 새재를 가장 많이 이용했고, 영남대로(嶺南大路)의 유곡역(幽谷驛)은 좌,우,중도(左右中道)로 나누어지는 중요한 역으로 찰방이 요성(요城),덕통(德通),수산(守山), 낙양(洛陽),낙동(洛東),구미(九미),쌍계(雙溪),안계(安溪),대은(大隱),지보(知保),소계(召溪),연향(延香),낙원(洛源),상림(上林),낙서(洛西),장림(長林),낙평(洛平),안곡(安谷) 등 18개 역을 관장하니 현재의 상주,구미시,예천,군위,의성군에 있던 역이다.
 

  2) 문경사(聞慶史)
  신라시대에는 고사갈이성, 관현 또는 관문현이었는데 156년(아달라왕 3년)에 계립령로를 개척하고 642년(선덕여왕 11년)에 김춘추(뒤에 무열왕)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구려 왕이 “마목현(麻木峴 : 麻骨岾, 계립령)과 죽령(竹嶺)은 본래 고구려의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 갈 수 없다.” 라고 하여 고구려와 신라간의 영토분쟁이 있었다.
  757년(경덕왕 16년)에 관산현으로 고치고 고령군(古寧郡 : 현 함창)에 소속했다.
  신라 말에 가은현에 아자개(阿慈介)는 농부였는데 뒤에 장군이 되었고 견훤(甄萱)을 낳았다.
  928년(태조 11년)에 고려 태조가 순행(巡行)하여 고사갈이성에 이르니 성주(城主) 흥달(興達)이 귀순하고 929년(태조 12년) 후백제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고려시대 초에 문희군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년)에 상주에 소속했으며 1362년(공민왕 1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문경의 어류성(御留城)에 머물렀으며 본 군에서 승첩보(勝捷報)를 들어 문경군으로 문경군으로 고쳤다.
  1390년(공양왕 2년)에 문경군에 감무(監務)를 설치하여 상주 소속의 가은현을 겸하였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년) 문경현에 현감을 두었고 1416년(태종 16) 상주 소속 호계현을 편입시켰다.
  1425년(세종 7년)의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문경현에 161호 2,564명, 가은현에 105호 1,526명, 산양현에 112호 1,339명, 영순현에 22호 273명이 살았고, 1454년(단종 2년)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문경현에 260호 1,065명, 가은현에 105호 720명, 산양현에 112호 667명, 영순현에 22호 132명이 살았다.
  성화(명나라 헌종의 연호)년간(成化年間, 1465~1487년)에 신승명(愼承命) 현감이 관찰사 교인처(交印處)로 교구정(交龜亭)을 조령의 용추 위에 건립했고, 1489년(성종 20년) 유곡도 우웅(禹雄) 찰방이 유곡역관(幽谷驛館)을 중수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신길원 현감은 현아(縣衙)에서 변기(邊璣) 조방장(助防將)은 조령을 지키다가 죽고 문경현이 왜군에 함락되었다.
  1680년(숙종 6년) 대미산 아래 둘레 10리를 봉산(封山)하여 황장목(黃腸木) 벌채(伐採)를 금지했다.
  1708년(숙종 34년) 남북 18리에 둘레 18,509보(步 : 거리를 재는 단위의 하나로 周尺으로 6자)의 조령산성(鳥嶺山城)을 쌓고 조령관(鳥嶺關), 조동문(鳥東門), 주흘관(主屹關)의 관문을 설치했으며, 1752년(영조 28년)에 조령진(鳥嶺鎭)을 설치하여 현감이 수성장을 겸하고 수성장사명기(守城將司命旗 : 수성장이 휘하의 군대를 지휘할 때 쓰던 기) 등 군기(軍器) 28종을 별도로 비치하였고, 1753년(영조 29년) 청도기(淸道旗 : 옛날 군대 또는 대기치大旗幟의 하나) 등 23종의 군기를 비치하였다.
  1765년경의 여지도서에는 읍방(邑坊), 신동방(身東坊), 초곡방(草谷坊), 신북방(身北坊), 신남방(身南坊), 호서방(戶西坊), 호남방(戶南坊), 호현방(戶縣坊), 가동방(加東坊), 가현방(加縣坊), 가남방(加南坊), 가서방(加西坊), 가북방(加北坊) 등 13방(坊)에 78개리(里)이고, 1759년(영조 35년)의 호구조사 결과 3,466호에 10,244명이다.
  1784년(정조 8년)에 새로 비치한 군기는 편전(片箭 : 총통에 넣어서 쏘는 하나로 된 火箭) 등 6종을 양참(兩站 : 요성참과 유곡참)과 봉수(烽燧)에 나누어 두었다.
  1786년(정조 10년)에 1방 12면 73리에 3,548호에 10,439명이 살았고, 1789년(정조 13년)의 문경현에는 1방(坊) 12면(面) 73리(里)로 3,553호에 10,452명이 살았다.
  1808년(순조 28년) 현감이 교자궁(校子弓) 등 15종의 군기(軍器)를 별도로 비치하고 1823년(순조 23년) 별장이 장전(長箭 : 싸울 때 쓰는 긴 화살) 등 4종을 산성에 비치했다.
  1832년경의 경상도읍지에 의하면 읍방 및 12면 73개 리(里)에 3,524호 10,704명이 살았다.
  1871년 조령 변란(變亂)을 일으킨 자와 그 가담자를 감영(監營)에 보고하지 않아 김영식(金英植) 현감이 파출(罷黜 : 파면) 되었다.
  1892년(고종 29년) 에 현감을 도호부사(都護府使)로 높이고 수성장을 관성장(管城將)으로 고쳐 함창, 용궁, 예천 3고을의 군사를 통제했으며, 1893년(고종 30년) 김정근(金禎根) 부사가 석현성(石峴城) 358파(把)를 쌓고 진남문(鎭南門)을 설치하여 수성 별장(別將)을 두었다.
  1895년 23부제(府制)로 개편되면서 상주, 용궁, 예천군으로 문경도호부가 분할되었다가 1896년(고종 건양 원년) 13도제(道制)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 문경군이 되고 1906년 상주군의 산서면, 산남면, 산동면, 산북면, 영순면과 예천군의 동로면과 화장면이 문경군에 편입되었다.
  임정기(臨政期)인 1911~1930년에 호계와 영순을 제외한 면마다 공립보통학교(公立普通學校) 7개소가 개교(開校)했다.
  1914년. 3. 1 호서면과 호남면을 합쳐 호서남면으로 하고 신북면이 문경면에 합쳤다. 용궁군 서면(西面) 및 신읍면(新邑面)의 송천리(松川里), 함창군 동면(東面)의 영응(永應), 전촌(錢村), 율곡(栗谷)이 문경군에 편입되어 영순면에 합쳤다. 함창군 북면(北面)의 해곡(海谷), 덕통(德通)리는 문경군에 편입되어 호서남면에 합치고 영천군(榮川郡 : 현 영주) 상리면(上里面) 월경동(越境洞)이 문경군에 편입되어 동로면에 합쳤다.
  1937년의 교남지에 의하면 10면 129개리에 16,829호 90,114명이 살았다.
  정부수립 후에도 문경군이었으며, 1949. 3. 10 문경면에 있던 군청을 호서남면으로 옮기고 1956. 8. 8 호서남면이 점촌읍으로 승격하여 1읍 9면이 되었다.
  1963년 1. 1 농암면 삼송리를 충북 괴산군 청천면으로 넘겨주고 1973. 7. 1 문경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가은면에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를 편입시켜 가은읍으로 승격하여 3읍 7면이 되었다.
  1986. 1. 1 점촌읍이 호계면 별암리 일부를 편입시켜 점촌시(店村市)로 승격하여 충현동, 중앙동, 신흥동, 신기동, 대성동, 모전동의 6개 동을 두었다.
  1989. 1. 1 상주군 함창읍 윤직리 일부를 점촌시 중앙동에 편입시키고 1994. 12. 30 점촌시 충현동을 점촌동으로 고쳤다.
  1995. 1. 1 점촌시와 문경군을 합쳐 문경시를 설치하여 2읍 7면 6동이 되었다.


  3. 지리지로서 읍지

  읍지란 지리지의 한 단위로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항을 기록한 문서로 한 고을의 역사 및 지리에 관한 중요한 문헌이다.
  조선 초의 팔도지리지와 신찬팔도지리지를 작성할 때는 공문서로 각 고을에 편집 기준을 하달하여 보고를 받은 관계로 고을에서 별도 읍지를 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1) 읍지 편찬의 필요성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서 파생되어 읍지를 편찬했는데 김종직(金宗直)이 1477년(성종 8년)경 편찬한 일선읍지(一善邑誌 : 현 선산)가 그 효시이고 편찬 목적은 시대에 따라 다르나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1) 자료수집
  읍지 편찬은 인적·물적 자원의 정확한 파악을 위한 자료의 수집에 있다. 정조 때 해동읍지(海東邑誌) 편찬을 논의할 때 동국여지승람이 시문(詩文)에 치중하고 있다며 사실적인 읍지를 만들기 위해 시문 가운데서도 사실과 다른 부분은 제외시키도록 했다.
  지방행정과 재정의 구체적 양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는 물론 정치·경제·지리·사회·문화·군사·문학·교통·통신 등 지방사 연구에 중요하고 필수적인 자료이다. 특히 함주지(咸州誌), 영가지(永嘉誌), 일선지 등 지방 유림과 선비들이 독자적으로 편찬한 읍지가 보다 상세하고 풍부한 사료(史料)를 담고 있다.
  임진, 병자 양란(兩亂) 이후 파괴된 사회질서가 정비되고 새로운 면리제(面里制) 도입 등 행정력이 침투하면서 지방의 지리, 인문 및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도가 증가하여 지리지의 수요를 증대시켰다.

    (2) 수령의 권한 확립
  조선조 초와 같이 향리(鄕吏)들이 지방 토호 세력으로 강하게 남아 있을 때는 수령의 권한 확립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김종직의 일선지(一善誌) 서문에는 강종활이(强宗猾吏)로부터 지방민을 보호하고 부역을 감하려는 목적을 들고 있다. 지방 수령은 임기에 따라 바뀌는데 비해 향리는 한 지역에서 세습하고 있어 강력하고 교활한 향리들에 의하여 농락당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말의 읍지에 사례를 첨부한 것도 이서배(吏胥輩)들의 모법(冒法)에 의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막아 지방 재정을 확충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일면도 있다.

    (3) 향촌(鄕村) 질서 재정비
  임란 전에 발행된 함주지는 각리(各里)의 호구, 전결(田結), 군기, 제언(堤堰), 관개(灌漑)는 물론 촌파(村婆), 천예(賤隸)의 효열(孝烈)과 같은 조그만 일도 기록하고 가담(街談) 이언(里彦) 중에 전할 만한 것은 속되더라도 모두 실어 임진왜란 직전의 안민선속(安民善俗)의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양란의 영향으로 향촌 질서가 피폐해지자 다툼이 빈번하고 특히, 전결(田結), 산경(山境), 선묘(先墓) 등의 소속을 판명하는데 임란 전 자료가 절실했으며, 또한 효제충열(孝弟忠烈) 사상을 고취시켜 사회의 지배 이념을 부활시켜 성리학적 윤리관에 입각한 향촌 질서의 재편과 강화에도 필요했다.

    (4) 정치,군사적 목적
  서민은 의식주의 바탕으로 관리에게는 자기의 치지(治地)로서 한 지방은 중요한 구획이었다. 나라의 일부인 임지(任地)는 사수(死守)하는 것이 수령의 임무였기에 임진왜란 때 신길원(申吉元) 현감은 문경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공법(貢法)체계의 문란과 함께 조세제도의 붕괴에 따라 읍지가 각 지방의 모든 분야를 종합하는 성격에서 지방 재정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인 면이 부각되면서 읍사례, 역지, 진지를 포함하여 지방 재정 타계 방법으로 읍지를 제작했다. 
  조선 초기에도 지도 제작의 주안점은 군사사항으로 징병에 필요한 거리를 표시하여 작성했고 지리지 및 지도에 관읍간의 정확한 거리며 산성(山城), 진영(鎭營) 등 군사기지들이 망라되어 세밀할수록 중요한 국가의 기밀이라 정치,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제작 이용되었다.
  1482년(성종 13년)에 양성지가 지리지와 지도가 민간에 산재하면 국가 기밀이 누설된다는 건의에 따라 1505년(연산군 11년) 7월에는 문서와 여지승람을 모두 관부(官府)에만 비치토록 하여 지리지와 지도가 민간에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2) 연대추정
  문경현지(신만증 교정본)가 1789년(정조 13년) 3월에 편찬되는 등 몇 종(고종 13년인 1786년 최석봉의 영지요선, 1936년 이병연의 조선환여승람, 1937년 정원호의 교남지) 외에는 읍지의 간행시기나 작성시기가 명기되어 있지 않아 연대 추정 근거로 삼는 것은 각읍의 선생안(先生案), 호구, 전결(田結)의 기록연대, 서원사액(書院賜額), 지명변천 등을 참고로 하여 추정하는데 수록된 내용의 연대와 필사 또는 발간 연대는 다를 수도 있다.
  필사본 팔도지리지(필자 소장본)는 경상우도에 문경현이 실린데 착안하여 경상도의 분도가 1407년(태종 7년) 9월, 1519년(중종 14년) 6월 13일, 1592년(선조 25년) 8월 7일, 1595년(선조 28년) 2월 4일에 있어 1596년 이후가 되며 칠곡부(柒谷府)의 기록에서 인조 때로 볼 수 있고, 조찬한(趙纘韓 1572~1631년)의 정자 기록 역시 인조 때를 뒷받침하여 효종 때로 추정했다.
  동국여지지는 저작자, 발간 연대 등의 연구가 미진하나 수록 내용이 효종 때라 현종 때로 추정했고, 신사국(申思國) 수택본인 조령진문경현지는 읍지가 실린 교유록(交游錄)의 서문은 1749년(영조 25년) 5월이나 전세(田稅) 등이 기묘년 기준이라 1760년경으로 볼 수 있고 여지도서는 호구가 기묘(己卯, 1759년) 장적(帳籍:호적)이라 1765년(영조 41년)경에 편찬한 읍지들로 추정했다.
  이영기 소장본 문경현지는 호구와 수조(收租)에서 기묘년(1759년)을 기준했고, 조령진 설진(設鎭)기록이 금상(今上) 임신년(壬申年)인 점으로 보아 내용은 영조 때(1725년~1775년)로 볼 수 있고, 문경군 읍지(계명대학교 소장본)는 인물난의 김시진에 관한 기록에 영조라는 묘호를 쓴 점으로 보아 정조 때로 볼 수 있다.
  경상도읍지는 1832년(순조 32년)경에 편찬한 지리지로 19세기초 연구에 사료적 가치가 있고, 1861년(철종 12년)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간행했는데 대동지지는 여지승람의 착오를 정정 보완하기 위한 이 때의 지리지로 동국여지고(東國輿地攷)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문경군 읍지는 행정구역 개편 이후라 표제(表題)만으로도 짐작이 가며 관안에서 이정규 현감(1784~1785년)까지 수록하고 있으나 전부(田賦) 등의 기록이 1845년(헌종 11년)이 하한(下限)이고 문경부지(聞慶府誌)는 표지에 문경현 읍지라 하고 경상북도를 추기하였으나 내용 첫 쪽에 문경부지로 적힌 필사본인데 조적 등의 기록이 1845년(헌종 11년_이 하한이라 문경부로 승격된 1892년 이후에 다른 문경현지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경부신정사례(聞慶府新定事例)는 문경현이 문경도호부로 1892년 승격하고 새로 정한 수입과 지출에 관한 예산서이고 영남읍지 1은 호구가 1786년(정조 10년) 기준이고 전부(田賦:地租)는 1845년(헌종 11년) 기준이나 문경현선생안이 김영식 현감까지 기록하고 있어 문경현이 민란으로 혼란하던 1871년에 작성됐음을 알 수 있었으며, 영남읍지 2는 1892년(고종 29년) 현감이 도호부사로 승격된 사실과 석현성 신축(1893년) 기록이 있어 연대를 추정할 수 있었다.
  영남역지는 1894년(고종 20년) 11월부터 1895년 1월에 걸쳐 경상도내 각 역도(驛道)의 찰방이 작성한 역지를 의정부(議政府)에서 모아 편찬한 사례위주의지지(地枝)로 1895년 우역제도(郵驛制度)가 폐지되기 직전에 작성된 역지 및 사례이기 때문에 조선후기 역참제도(驛站制度)를 종합적으로 알 수 있는 지방교통사이다.
 

  3) 읍지의 변천
  경상도지리지, 속찬팔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는 같은 계열의 지리서이다. 지리지에 지도가 삽입되기는 양성지가 편찬한 팔도지리지가 그 효시이며 동국여지승람이 다음이다. 동국여지승람이 1478년(성종 9년) 제작된 이래 조선시대 지리지를 대표하게 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수정 보완 계획에 그치고 이루지 못했으나 이러한 독사(讀史)지리지의 영향을 받아 각관읍의 읍지가 편찬되었다. 시문과 명분을 앞세웠던 양반들이 읍지를 편찬할 때 동국여지승람을 체본(體本)으로 삼아 유학(儒學) 성했던 하삼도(下三道) 지방의 큰 고을일수록 거듭 편찬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지리지로서의 시사성을 재인식하여 영조 때까지 개수(改修) 또는 속찬(續撰)작업이 4차례나 진행되었으나 완성시키지 못하고 문헌비고(文獻備考)라는 새로운 형태로 편집되었다.
  이러한 개편작업에서 파생된 것이 읍지 편찬과 지도의 작성이며, 1757년(영조 33년) 여지도서에는 전도(全圖), 감영도(監營圖), 병영도(兵營圖), 수영도(水營圖), 통영도(統營圖), 각 관읍도(官邑圖) 등이 회화식(繪畵式) 표현이지만  수록했고, 동국여지승람 이후 나타난 새로운 읍지 편찬의 경향을 종합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읍지로는 지도 12매도 첨부한 영가지(永嘉誌)를 권기(權紀)가 1608년(선조 41년)에 완성했고, 동경잡기(東京雜記)는 1669년(현종 10년) 민주면(閔周冕)이 완성했으며, 경상도의 이은(李은) 방백은 71개 읍의 읍지와 지도를 첨부하여 재임시(1767년~1768년) 완성했음을 청하현 읍지의 옛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전국적인 읍지 편찬은 1899년(광무 3년)에 있었으나 한달 이내에 작성하라는 훈령을 내려 전시대의 읍지를 정서 하는데 그치기는 했지만 현재 읍지의 대부분이 고종 때 읍지의 개수작업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4) 편목(編目)
  읍지는 각 읍을 단위로한 인간과 자연환경 사이에 시간적·공간적인 제반 사실에 대한 종합적인 기록의 지방지이다. 각 읍의 지도가 첫머리에 수록되고 사표(四標),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관직, 성씨, 산천, 풍속, 방리, 호구, 전부, 군액(軍額), 성지(城池), 임수(林藪), 군기(軍器), 창고, 관방, 진보, 봉수(烽燧), 학교, 단묘(壇廟), 능묘(陵墓), 불우(佛宇), 궁실, 공해, 누정, 도로, 교량, 도서, 제언, 장시, 역원, 목장, 형승, 고적, 토산, 진공(進貢), 봉품, 환적(宦蹟), 과거, 인물, 제영, 비판(책판) 등을 기록하고 있으나 시대와 읍지에 따라 편목의 구성이 다르다.
  경상도지리지 내용은 예조(禮曹)의 통첩에 따라 도내의 행정구역 단위별로 인물과 자연방면의 계역(界域), 관방(關防), 공물(貢物), 진영(鎭營), 토의경종(土宜耕種), 토지비척(肥脊), 호구, 성씨, 인물, 봉화(烽火), 기후, 풍혈(風穴) 등 13개 항목을 기준으로 서술했으며 특히 군사관계와 조세(租稅), 공부(貢賦)가 자세히 기록됐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연혁, 사경(四境), 산천, 궐토(闕土), 풍기(風氣), 토의(土宜), 호구(戶口), 군정(軍丁), 성씨, 간전(墾田), 토산(土産), 토공(土貢), 약재, 목장, 어량(魚梁), 염소(鹽所), 철장(鐵場), 도자기소(陶磁器所), 고적(古跡), 역전(驛田), 조운(漕運) 등 20개 항목인데 지방의 특색을 파악하고 산업을 중시하여 땅과 인간의 상관론에 맞게 항목을 배열했다.
  경상도속찬지리지는 29개 항목으로 인문 지리와 경제에 관한 항목인 제언(堤堰:댐), 지택(池澤:못), 염분, 약재, 어량(魚梁), 도자기소, 철장(鐵場), 향(鄕), 소(所), 부곡(部谷)과 국방에 관한 항목인 양계절도사(兩界節度使), 야인소재(野人所在), 강무장(講武場), 연대봉화(煙臺烽火), 역참(驛站)이 증가했으며 국세(國勢)에 관한 항목인 호구, 공물(貢物)이 없는 대신 누대(樓臺), 제영(題詠), 승사(僧寺), 원우(院宇), 정려(旌閭) 같은 항목이 증가되어 예속(禮俗)분야에 관한 기록이 강화되었다.
  동국여지승람을 1485년(성종 16년) 김종직(金宗直)이 시문과 인물 등을 교정하고 고적, 성씨, 봉수 등의 편목을 신설하여 1차 수정했는데 연혁, 풍속, 형승(形勝), 명산, 대천, 고성(古城), 대채(大砦), 묘사(廟社), 궁실(宮室), 5부(五部), 방리(坊里), 사직(司職), 능침(陵寢), 사단(祠壇), 학교, 정문(旌門), 사찰(寺刹), 사묘(祠墓), 토산(土産), 공부(貢賦), 창고, 누대(樓臺), 원우(院宇), 관방(關防), 참역(站驛), 인물, 제영(題詠) 등 28개 항목으로 자연 지리서라기 보다 인문 지리서에 가깝고고사(故事), 고전(古傳)에 치우친 역사지리서에 바탕을 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은 각도의 연혁과 총론 관원을 적은 다음 관청 단위의 연혁, 관원, 군명, 성씨, 풍속, 형승, 산천, 토산, 성곽, 관방, 봉수, 누정, 학교, 역원, 교량, 위치, 불우, 사묘, 능묘, 고적, 명환, 인물, 시인의 제영 등을 기재하고 연혁, 성씨, 산천, 역원, 고적, 인물이 강조되고 동국여지승람 이후에 증보된 것은 신증으로 밝혔으나 세종 때 지리지의 장점인 토지의 면적, 조세, 인구 등 경제·군사·행정적 측면이 약화되고 인물, 예속, 시문 등이 강화되었다.
  팔도지리지는 수록 항목 구분은 하지 않고 건치연혁, 형승, 산천, 역원, 인물 등으로 간략하나 전국의 내용을 알 수 있고, 동국여지지는 수록 편목에서 토지를 한전(旱田)과 수전(水田)으로 나누어 빈칸으로 두어 국가의 전제(田制)를 수정한 후 기록토록 했으며, 조령진 문경현지(신사국 수택본)는 내용이 간략하며 도로, 방리 등 39개 편목에 이른다. 특히 논, 밭, 봉름 등 재정사항과 진공,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등 조세부분을 세분하여 파악하고 조령진의 군병도 기록하고 있다.
  여지도서는 여지도(與地圖)와 서(書)를 합한 것으로 지도를 중시했고 편찬 목적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의 개수(改修)와 속성(續成)에 있어 강역(疆域:나라에 붙은 땅. 국경), 방리(坊里:조선조 때 행정구역으로 오늘날의 면과 리에 해당), 형승(形勝:지세와 경치가 뛰어남), 성지(城池: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 둘레에 깊이 파 놓은 해자), 공해(公해:관가 소유의 건물), 제언(堤堰:댐), 물산(物産:그 지방에서 나는 산물), 총묘(塚墓:무덤), 진보(鎭堡:鎭), 명환(名宦:높고 좋은 자리에 있는 벼슬), 한전(旱田:밭), 수전(水田:논), 봉름(俸름:관리에 봉급으로 주는 쌀), 군병(軍兵:군사) 등 38개 편목으로 승람이 미치지 못한 부분을 포함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초하였으나 방리, 제언, 전결, 부세(賦稅:세금을 정하여 부과함) 등의 항목을 첨가하여 사회경제적 내용이 강화되었다. 또한 읍지의 첫머리에 방리, 도로, 호수, 인구를 위치시켜 18세기에 상업의 발달, 도로의 중요성, 지역간의 교류를 위한 유통망을 표시했다. 조세 수취와 관련하여 진공,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봉름 등으로 세분화 한 것은 조세를 정확히 파악하여 중앙의 재정 확충과 지방의 통치를 더욱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
  문경현지(신만증 교정본)는 첫 쪽에 현지도(縣地圖)가 있고 건치연혁, 군명 등 38개 항목을수록하고 있으나 여지도서와 비교하면 군병, 관애, 사찰, 물산 등은 명칭이 바뀌고 한전, 수전, 전세, 대동, 균세는 한 항목으로 합쳐지고 능묘, 장시, 과거, 비판이 추가됐다.
  경상도 읍지는 건치연혁, 군명, 인물, 제영(題詠), 비판(碑板) 등 40개 항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여지도서 보다 항목 구성이 체계적이다. 특히 군사면에서는 산성창의 조적, 군기가 4회에 걸쳐 보충한 내역별로 기록되어 있고 사실적이라 19세기 초기 연구에 사료적 가치가 더욱 크다.
  대동지지는 동국여지승람식 체제를 바꾸어 대명일통지의 형식을 취하여 고사, 고전,시문, 인물은 생략하고 현황 파악에 주력하여 방면, 전결, 호구, 도리(道里)를 상세히 기록했고 역사의식에 입각한 전고(典故) 항목을 설치하여 고증했다.
  경상북도 문경군 읍지는 건치연혁, 군명 등 35개 편목으로 방리명과 호구 수에서 당시의 동리 규모를 알 수 있고, 영지요선은 동국여지승람과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대한 불만에서 편찬을 시작했으나 항목이 연혁, 산천 등 13개 항목으로 대단히 적으며 특히 경제분야인 전답, 진공(進貢), 조적, 전세(田稅), 대동(大同), 균세(均稅), 봉름이며 군병(軍兵)부분 기록이 없고 제영에서 몇 편의 시가 추가되었으나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며 영남읍지는 읍 사례가 거의 모든 읍에 수록되어 있어 종합적인 인문지리서에서 지방재정 자료로서 기능이 추가됐다.
  조선환여승람은 총목록에서 조선지리총설, 도내지리총설이 있고 해당 군의 지리부와 인문부로 나누고 있다. 도내 지리 총설은 위치 및 경제, 연혁, 산악, 하천, 해만(海灣) 및 도서(島嶼:섬)가 기록되어 있다. 지리부는지지편(地誌篇)으로 군사표(郡四標) 등 25개 항으로 나누어 수록했으나 풍속, 면리(面里), 시장, 제언(堤堰), 도로, 학교, 관공서, 부세(賦稅), 토지는 편목에 없다. 인물편은 도학편(道學篇)에 유현(儒賢) 등 7개 항목, 덕업편(德業篇)에 훈신(勳臣) 등 13개 항목, 삼강편(三綱篇)에 충신 등 3개 항목, 과환편(科宦篇)에 문과(文科) 등 7개 항목으로 나누어 인물난이 모두 31개 항목으로 세분되었다.
  교남지는 연혁, 위치, 군명 등 모두 28개 항목이며 10면 129개 동리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토지는 지목이 전답 외에 대지, 임야, 잡종지, 철도용지 등 현재처럼 13개 항목으로 구분하고 세금에서도 지세(地稅), 면세부가세(面稅附加稅) 등 12개 항목의 징세액을 밝히고 인물은 11개 항목이며 학교도 보통학교, 소학교, 지방학림 등으로 구분하였다. 
  읍사례는 별도의 편목이 없으나 영남읍지 2에 첨부된 문경부 사례의 편목은 배삭(排朔:한 달에 얼마씩 나누어 분배함), 배삭 외 소출(排朔外所出:매달 나누어 분배하는 것 외의 수량), 삭하(朔下:하급 벼슬아치나 밑에 부리던 사람에게 주던 급료), 응하(應下),연례(年例) 응하(應下:지불할 액수), 배삭 외 잡종(雜種), 각종 절까(折價:물건을 교환할 때 그 값을 겨누어 수량을 정함) 및 작용(作用), 식례(式例), 호총(戶摠), 결총(結摠), 환총(還摠), 군총(軍摠:한 군영에 속해 있는 여러 종류의 군졸) 등의 편목을 두고 있다.


  4. 지리지 및 읍지에서의 문경

  1) 삼국사기지리지(三國史記地理志)
  우리나라 역사책으로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는 1145년(고려 인종 23년)경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정사(正史)로 1512년(중종 7년) 이계복(李繼福)이 다시 간행한 것이 보물(제525호)로 지정되어 완질이 전한다,
  삼국사기는 기전체(紀傳體)로 쓴 본기(本紀) 및 지(志)와 열전(列傳) 가운데 잡지(雜誌)의 지리에 현재의 문경지역이 신라 9주(州)의 하나인 상주의 2개 군에 나누어 있다. 즉 상주의 예천군과 고령군(古寧郡:현 함창)으로 예천군의 영현(領縣)인 안인현(安仁縣), 가유현(嘉猷縣)과 고령군의 영현인 가선현(嘉善縣), 관산현(冠山縣), 호계현(虎溪縣)의 연혁만 기록하고 있다.
 

  2)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
  고려사도 기전체로 쓴 역사책으로 1451년(문종 1년)에 완성하여 1455년(세조 1년)의 주자본과 중종 때 목판본이 전해온다.
  고려사는 세가(世家), 지(志), 표(表), 열전, 목록으로 구성되어 고려사지리지는 고려시대 지리에 관한 유일한 기록인데 현재의 문경지역이 경상도 상주목의 영순현, 문경군, 산양현, 호계현, 가은현으로 연혁만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3)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필사본으로 1425년(세종 7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 觀察使)인 하연(河演) 등이 독립된 지리지로 최초로 작성했으며 내용이 풍부하고 상세하여 조선 전기(前期) 지방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경상도의 총설(總說)과 각론(各論)을 기록하고 경주도, 안동도, 상주도, 진주도의 4도(道)로 나누었다. 문경지역은 상주도의 문경현에 가은은 겸현으로 호계는 속현으로 기록되고 상주목의 무림부곡과 속현으로 산양, 영순현 및 안동도의 예천군 동로소(冬老所)에 수록되었다. 처음으로 편목을 도입하여 13개 항의 자세한 자료가 수록되었다.


  4)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
  세종실록에 실린 독자적 지리서로 8도의 138군현을수록하여 15세기 역사지리학과 지방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인문, 자연, 지리와 경제, 군사적 내용을 상세히 기술하여 그 뒤의 지리지 편찬에 기본이 되었다.
  현재의 문경지역은 경상도의 문경현과 속현으로 가은, 호계현 및 예천군 동로소, 상주목의 속현인 산양, 영순현, 무림부곡에 기록되어 있다.


  5)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경상도지리지의 속편(續編)인 필사본(筆寫本) 1책으로 1469년(예종 1년)에 김해부사 이맹현(李孟賢) 등이 편찬하여 전하지 않는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誌)의 내용도 짐작할 수 있다.
  체제와 내용은 경상도지리지와 비슷하나 총론(總論)없이 각론(各論)에 입각하여 경주, 안동, 상주, 진주 등 4계(界)로 구별하였다.
  현재의 문경지역은 경상도의 안동도, 예천군 동로소, 상주도 상주목, 무림부곡과 문경현에 기록되어 있고 공문서 전달과 여행객의 편의를 도모하는 교통시설인 역과 원(院)이 처음 기록됐다.


  6)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을 중종의 증수 명령에 따라 홍언필(洪彦弼) 등이 1531년(중종 26년)에 완성한 지리책이다.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성종 12년) 50권으로 편찬되었으나 전하지 않고 1485년(성종 16년) 김종직(金宗直)이 교정하고 편목을 신설하여 1487년(성종 18년) 신찬동국여지승람을 간행했다.
  1501년(연산 7년)에 성현(成俔) 등이 교정과 보충을 끝내고 1524년(중종 19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되고 1526년(중종 21년) 이행 등이 신증 보편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찬진하고 1531년(중종 26년)에 인출하였으나 1611년(광해군 3년)에 복간(覆刊)한 목판본(木版本)이 규장각 도서로 소장되어 있다.
  각도의 지도가 처음으로 첨부되었고 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集成編)이며 조선말까지 큰 영향을 끼친 종합백과전서로 여러분야 자료가 수록된 중요한 고전(古典)이다.
  현재의 문경지역은 경상도의 문경현 외에 상주목과 예천군에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7)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
  함경도 등 앞부분이 없어 책이름도 알 수 없는 팔도지리지(필자 소장)로 필사본이다.
  경상우도의 첫머리에 문경현이 기록되어 있어 내용은 1596년 이후가 되며 칠곡부(柒谷府)의 기록에서 인조 때로 볼 수 있고 참의(參議) 조찬한(趙纘韓 1572년~1631년)의 정자 기록에도 인조 때를 뒷받침하여 효종조로 1650년대로 추정된다.
  수록 편목은 구분없이 간략하나 같은 시점의 전국적인 내용을 수록했다는 점에 뜻이 있다.
  현재의 문경지역은 경상우도의 문경현 외에 상주목과 경상좌도의 예천군에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8)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임진왜란 후의 전국적인 지리 사항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10책에 8도의 각 고을이 수록되어 있으나 경상좌도 36개 고을이 누락된 현종 때 발간으로 추정되는 지리지다.
  편찬에 참고한 책은 군 현지는 물론 중국의 사서(史書)까지 참고하여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이후 고조된 역사 지리적인 관심이 반영되었다.
  현재의 문경지역은 문경현 외에 상주목에 부분적으로 수록되고 예천군은 좌도라 누락되었다.
  기존 지리지의 제영 외에 허적(許적)의 시 등 5편을 증보했다.


  9) 조령진문경현지(鳥嶺鎭聞慶縣誌)
  필자가 소장한 지구록(知舊錄)에 실린 읍지로 신사국(申思國, 뒤에 敬日로 개명)의 육필본으로 병옹(病翁 申弼貞)이 사귄 인물들을 기록한 교유록(交游錄) 뒤에 초록(抄錄)되어 있다.
  교유록 서문은 1749년(영조 25년) 5월이나 전세(田稅) 등에서 기묘년을 기준한 점으로 보아 1760년경으로 볼 수 있다.
  수록내용은 간략하나 재정 사항과 조세 부분을 세분했고 조령진의 군병도 기록하고 있다.


  10) 여지도서(輿地圖書)
  여지도(與地圖)와 서(書)를 합한 책이름에서도 지도를 중시했는데 홍양한(洪良漢)이 건의하여 편찬한 지리지다. 호구가 기묘(己卯) 장적(帳籍:호적)인 점으로 보아 1765년(영조 41년)경에 편찬한 읍지로 55책 필사본이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전한다.
  295개 읍지, 17개 영지(營誌), 1개 진지(鎭誌)를수록하여 313개의 지지(地誌)가 수록되어 있고 지도는 각 도의 전도(全圖), 감영도(監營圖), 각 관읍도(觀邑圖) 등을수록하고 있어 당시의 지리 인식에 새로운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현재의 문경지역은 문경현 외에 상주목과 예천군에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편찬 목적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개수(改修)와 속성(續成)에 있었기 때문에 동국여지승람에 기초하여 사회경제적인 내용을 보강하고 상업의 발달, 도로의 중요성, 지역간의 교류를 위한 유통망을 표시했으며 조세를 정확히 파악하여 중앙의 지방통치를 더욱 강화했다.
  신길원 현감이 임진왜란에 순절한 사실을 기록한 충열비문을 처음 수록했다.


  11) 문경현지(聞慶縣誌)
  이영기(李英基) 소장의 필사본으로 영조 때로 추정할 수 있으나 방리(坊里)나 산천에서 현(縣)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군(郡)을 기준으로 한 점을 보면 문경군(1896년)이 생긴 이후에 영조 때의 군지를 필사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나그네의 숙소인 원(院)이 고적난에 수록되어 원의 기능이 쇠퇴했음을 알 수 있다.


  12) 문경군읍지(聞慶郡邑誌)
  계명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필사본 읍지로 정조 대로 추정되나 표지가 문경군 읍지라 문경군이 된 뒤에 정조 때 현지를 필사한 것 같고 내용은 문경현지(이영기 소장본)와 거의 같으나 인물난에 이삼용, 이진웅 부자(父子)가 추가된 점이 다르다.


  13) 문경현지(聞慶縣誌)
  1789년(정조 13년) 3월에 신만증(申萬增)이 교정(校正)한 것으로 연대가 밝혀진 최초의 문경현지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
  첫 쪽에 현지도(縣地圖)가 있고 38개 항목을 수록했으며, 읍방(邑坊) 외에는 방(坊)이 면(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길원 현감의 충렬비 전반부와 이지강, 함부림 등의 시에서도 일부가 생략됐고, 김낙춘, 신상철의 묘갈문이 수록되고 이안눌이 쓴 역리(驛吏)의 전기가 실려 있다.


  14) 경상도읍지
  1832년(순조 32년)경에 편찬한 지리지로 필사본 20책에 71읍이 전부 수록되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현재의 문경지역은 문경현 외에 상주목과 예천군에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첫머리에 채색지도가 있고 산성창의 조적과 함께 군기(軍器)를 보충한 사항을 자세히 기록하여 군사면을 강조했으며 환적난에 역대 현감 100명이 수록되고 향교에도 교생(校生), 유생(儒生), 동몽(童蒙)의 수를 기록하는 등 체계적 내용이 광범위하고 풍부하다.


  15)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는 1861년(철종 12년)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제작 간행했으며 대동지지는 여지승람의 착오를 정정 보완하기 위하여 편찬한 지리서로 동국여지고(東國輿地攷)라고도 하는 필사본 32권 15책이다.
  내용은 총괄, 팔도지지(八道地志), 산수고(山水考), 변방고(邊方考), 정리고(程里考), 역대지(歷代志) 등 6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동국여지승람식 체제에서 대명일통지의 형식을 취한 지리지로 국내외 65종의 방대한 서적을 인용하여 현황 파악에 주력했다. 1828년(순조 무자년)의 방면, 전결, 호구, 도리(道里)와 함께 전고(典故) 항목도 두어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현재의 문경지역이 문경현 외에 상주, 예천에 부분적으로 수록되었다.


  16) 경상북도 문경군 읍지(邑誌)
   경상북도 문경군 읍지라는 표제(表題)만으로도 행정구역 개편 이후로 짐작이 가며 첫 쪽에 문경현지로 적힌 필사본 1책이 규장각에 있다.
  1899년(광무 3년)에 전국적인 읍지 편찬이 있었는데 30일 이내에 작성해 올리라는 훈령에 따라 기존의 읍지를 정서하는데 그쳤고 읍사례는 분책되었는데 이 읍지도 그 가운데 하나다.
  책머리에 매우 큰 채색지도가 있고 이정규 현감(1784~1785년)까지 수록했으나 전부(田賦) 등의 기록이 1845년(헌종 11년)이고 장시(場市)가 처음 수록됐다.


  17) 문경부지(聞慶府誌)
  표지에 문경현 읍지로 적고 그 아래에 경상북도를 추기하고 내용 첫 쪽에는 문경부지로 적힌 필사본 1책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있다.
  내용은 건치연혁(建置沿革) 등 34개 항목이나 규장각 장서인 문경군 읍지와 몇몇 곳의 오기(誤記)까지 같을 정도다. 문경부로 승격된 1892년 이후에 다른 문경현지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8) 문경부신정사례(聞慶府新定事例)
  문경현이 1892년 문경도호부로 승격하고 새로 정한 사례로 규장각 장서에 있다.
  읍사례란 지방행정 집행을 위한 예산계획서 및 지출명세서의 성격을 가진 수입과 지출에 관한 기록이다. 이 같은 읍사례는 지방행정의 구체적인 파악과 수지개선에 일차적인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이 사례를 근거로 해서 지방재정을 집행함으로서 관리나 서리가 법을 빗대어 가렴주구하는 일을 근절하여 지방재정의 피폐 고갈을 막아 통치 질서를 확립하는 데도 필요한 수단이었다.
  당시 지방재정의 실정과 상납(上納) 진공(進貢)의 물명(物名), 수량, 가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19) 영남읍지 1
  1871년(고종 8년)경에 편찬한 17책이 규장각 도서에 있으나 체제나 내용의 기재방식이 통일되지 않고 다른 계통의 읍지를 전사했기 때문에 사료의 신빙성이 약하다.
  별첨된 문경현 선생안에 김영식 현감까지 기록하고 있어 문경현이 민란으로 혼란하던 1871년에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첨부된 읍사례(邑事例), 진지(鎭誌), 역지(驛誌), 목장지(牧場誌)에 사료적 가치가 높고 12책에 유곡역지(幽谷驛誌)가 수록되어 있다.


  20) 영지요선(嶺誌要選)
  1876년(고종 13년)에 영남여지(嶺南輿誌) 15권이 번잡하여 중요한 것만 뽑아 2권으로 최석봉(崔錫鳳)이 편찬했다.
  동국여지승람과 동국문헌비고에 대한 불만에서 편찬을 시작했으나 수록 편목이 연혁, 산천 등 13개 항목으로 적고, 제영은 증보했으나 경제분야[전답, 진공(進貢), 조적, 전세(田稅), 대동(大同), 균세(均稅), 봉름]와 군병(軍兵)부분이 없는 등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


  21) 영남읍지 2
  1894년 11월부터 1895년(고종 32년) 5월 사이에 경상도 각 읍에서 작성한 읍지를 의정부에서 합편한 34책의 필사본이 규장각에 있다.
  대구부와 예천군 외에는 모든 읍지에 사례가 부록된 점으로 보아 지방행정의 구체적인 파악과 수지개선에 목표를 둔 것 같다. 읍 사례가 읍지의 중심 내용으로 발전한 것은 지방재정에 대한 파악과 개선 목적도 있고, 1896년의 지방제도 개혁을 위한 자료수집의 일환이라 추측되며 조선후기 영남지방의 재정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문경도호부 승격 및 석현성 신축 사실이 수록됐으며 부록으로 문경부 사례성책이 실려있다.


  22) 조선환여승람(朝鮮환輿勝覽)
  1936년 이병연(李秉延)이 자국정신(自國精神)을 깨우치기 위해 편집 발행한 지리지다.
  총목록에서 조선 지리총설, 도내 지리총설, 해당 군의 지리부와 인문부로 나누고 지리부는지지편(地誌篇)으로 여러 항목을수록하고 인물편은 도학편(道學篇), 덕업편(德業篇), 삼강편(三綱篇), 과환편(科宦篇)으로 나누어 인물편의 비중을 높였다.
  충신편에 이강년(李康秊) 순절(1908년) 사실과 이황(李滉)의 사군정(思君亭) 등 누정(樓亭) 관련 시와 윤상(尹祥)의 팔영(八詠) 등 시문 8편을 추가했다.
  행정구역이 현재의 문경지역으로 개편된 뒤에 처음 발간했으나 함창, 용궁, 예천, 상주군에도 문경관련 기록이 일부있다.


  23) 교남지
  교남지는 정원호(鄭源鎬)가 각 군의지지(地誌)가 유실될까 걱정하여 경상도를 군별로 편집한 15책을 1937년에 경문당에서 인쇄했다.
  역대 군수는 김영화(金泳華) 군수까지 수록되고 10면 129개 동리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토지의 지목과 세금 항목이 더욱 세분되고 징세액도 기록했으며 학교도 1930년에 세운 것까지 수록하였다.
  예천, 상주, 함창, 용궁군에도 문경관련 기록이 남아 있고 인물이 대폭 보강되었지만 관안(官案)에는 일부 누락되었다.


  24) 영남읍지의 유곡도 역지(驛誌) 및 시행사례(時行事例)
  영남읍지의 12책에 안기역, 장수역, 김천역과 함께 실려있다. 경상도는 일본과의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역참제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유곡역지에는 역대 찰방(察訪) 150여명의 선생안(先生案) 및 본 역의 현황과 시행사례에 이어 18개 속역의 내용을 같은 체제로 기록하고 있어 당시 유곡역도를 연구할 수 있는 지방교통사 자료이다.


  25) 영남역지(嶺南驛誌)
  1894년(고종 20년) 11월부터 1895년 1월에 걸쳐 경상도 내 각 역도(驛道)의 찰방이 작성한 역지를 의정부에서 모아 편찬한 사례위주의지지(地誌)로 필사본 2책이 규장각에 있다.
  유곡역은 조령을 넘어서면서 좌도(左道)와 우도(右道), 중도(中道) 등 3개의 길로 갈라지는 중요한 역인데 유곡도(幽谷道) 역지(驛誌) 및 사례(事例)에는 지리지보다는 사례 위주로 본 역과 18개 속역(屬驛)을수록하고 있다.
  1895년 조선조 우역제도가 폐지되기 직전에 작성된 역지 및 사례이기 때문에 조선 후기 역참제도의 구조, 위치, 재정, 관원, 건물 등에 관한 자료이다.


  26) 영남진지(嶺南鎭誌)
  1894년(고종 31년) 11월부터 1895년 1월까지 경상도 각 진(鎭)에서 작성한 진지를 의정부에서 합편(合編)한 필사본 3책이 규장각에 있다.
  각 진별로 진장(鎭將)이 작성하였기 때문에 체제가 일정하지 않은 사례 위주 기록으로 1895년 각 도의 수영(水營) 및 군영(軍營)이 해체되기 직전에 편찬된 진지로서 조선후기 영남지역의 수군 편제와 각 진의 재정구조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조령진(鳥嶺鎭)은 1894년 11월에 전해오던 사례를 기록했는데 조령산성의 별장으로부터 문지기에 이르기까지 지급한 요미(料米)와 번전(番錢)을 기록하여 조령진의 지출구조를 알 수 있다.


 5. 맺으며

  지역사를 한문으로 쓴 그대로 방치하기 보다 종합하여 번역하면 풍부한 사료를 얻을 수 있고 지역사 복원도 가능하여 지방문화사업으로 추진할 만하다.
  토지의 비척도에서부터 전답의 변화와 황무지로 변해 온 사유, 수리를 위한 못의 건설 등 농업사(農業史) 연구도 가능하며 토의경종이며 특산물 등은 지금도 개발 가능한 특작물의 적지를 고찰할 수가 있다.
  방면과 호수와 인구 변화를 통해 고을의 융성을 연구할 수 있고 지방행정을 맡았던 음직 6품관의 현감과 무과츨신 4품관의 별장, 문과츨신 6품관인 찰방에 이르기까지 역대 수령과 관속의 변화에서는 지방행정사를 얻을 수 있다.
  관방과 요해처, 산성 및 군비의 변동사항을 추적하면 향토방위 나아가 국방의 자료가 되고 성씨의 변화와 인물을 조사하면 한 지역을 움직여 온 세력의 추정이 가능하다.
  한 예로 시문(詩文)을 간략히 종합하여 개괄해 보고자 한다.
  지리지 및 읍지에 44명의 문사(文士)가 문경을 예찬하고 기록한 54편의 시문을 161회 수록하고 있다. 지리지며 읍지에 실린 시와 기문, 비문만 모아도 훌륭한 문집이 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13명의 문사가 팔경(八景)을 읊은 시, 원루(院樓)를 읊은 시, 유곡역 중수기, 사불산 유산기(遊山記), 미륵암 중수기 등 15편의 시문이 실린 이래 시문이 없는 지리지는 조령진 문경현지, 대동지지 뿐이다.
  팔도지리지, 동국여지지, 영지요선에는 10편 이내의 적은 시문을 실었으나 경상도 읍지와 조선환여승람에 26편이나 수록했고, 동국여지지와 조선환여승람은 많은 시문을 증보하고 있다.
  시문의 수록내용으로 봐서 여지도서, 문경현지(이영기 소장), 문경군 읍지(계대 소장본)는 같은 계열이며, 문경현지(신만증 교열본), 경상북도 문경군 읍지, 문경부지, 영남읍지1, 영남읍지2는 같은 계열이다.
  홍귀달의 유곡역 중수기와 이안눌쓴  역리의 전기를 연이어 수록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더 세분해 보면 문경현지와 영남읍지1이 같은 계열로 바르게 수록한 반면 경상북도 읍지, 문경부지, 영남읍지2는 중수기 후반부와 전기의 전반부를 누락시키는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어 같은 계열로 볼 수 있다.
  이 같이 모든 분야를 추적하여 한 지방의 선인(先人)들이 이룬 자취를 밝힌다면 오늘날 우리 삶에 큰 도움이 있을 것이다.
  이 관견에서는 읍지 및 지리지를 통한 한 지역을 종관하기에 앞서 읍지의 편찬 목적을 지방 자료의 수집 및 보전, 이서배로부터 수령의 권한확립, 양란 이후 향촌 질서 재정비, 지방재정 및 지리지의 소장과 관련하여 정치 및 군사적 목적에서 찾아보았다.
  연대 추정 근거를 실재 지리지에서 적용해 보고 읍지의 변천 사항을 고찰하면서 편목의 변화에 따른 읍지의 편찬 의도를 추론하여 사료로서 신빙성을 고찰했으며, 문경을 종관한 읍지 및 지리지 26종의 간략한 해설과 수록 내용을 개략적으로 밝혔다.
  종관한 결과가 문경의 지리와 역사인데 지리에서 조수(潮水)를 하는 샘인 조천(潮泉), 동굴 등은 개발 가능한 자연자원으로 제시하며 역사에서 지방행정구역요람에도 빠진 문경도호부 승격 기록을 찾아 지역민의 자긍심을 심을 수 있었다.
  하나의 읍지만 해도 백과사전과 같은데 한 지역의 지리지며 읍지를 종합한다는 것은 자료의 집성(集成)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26종의 지리지며 읍지를 각급 도서관이며 자료실에서 발굴하여 5년에 걸쳐 이해하기 쉽도록 번역하고 주(註)를 달아 원문을 포함하여 1,2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문경사(聞慶史)를 탈고(脫稿)했다. 이 책이 발간되는 날 관심있는 분들이 분야마다 종관하여 깊이 있는 연구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관견을 한정된 지면에 약술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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