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문화탐방에서 본 향례 ㅡ 신시와 서양고대사

2013. 5. 14. 08:07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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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反正) 세계사 게재의 변(辯)- (4)
신시와 서양 고대사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7. 신시시대의 전개 및 한민족과 세계역사의 관계

[역사 플러스코리아]안재세 전문위원= 새로이 밝혀지고 있는 수많은 유물과 유적에 의한 역사적 사실들을 두고서 옛 시대를 단지 '야만적'이라고만 생각하려는 것은 올바르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다. 이 시대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중에서도 현대문명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전기이용장치, 비행에 관한 기록, 그 밖에도 현대과학 기술로도 건설하기 힘든 터무니없이 거대한 건축 등이 얼마든지 널려있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의 역사책인 구약에는 바빌론에 세워졌던 '바벨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늘까지 닿는 높은 탑을 세우려던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결국 신의 노여움을 받아 서로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태가 일어나서, 탑의 건설은 성공시키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가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간에 그 시대에 그만한 건축을 하려고 마음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건축기술은 있었다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몽골지방에도 그러한 대규모 신전같은 피라밋이 많이 발견되어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는데, 그 피라밋들도 약 6,000여년 전의 건축물들이라고 한다.

  세계정복을 시도했던 징기스칸이 출현했던 몽골이기는 하지만, 현재까지도 유목인들이 아득한 들판을 덮을 듯한 양떼를 몰고 다니고 있는 황량한 몽골 고원에 이집트의 피라밋을 능가하는 거대한 피라밋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지금도 몽골지방에는 그 흔한 고층건물조차 별로 없는 상태이니까, 누가 무엇때문에 그 황량하게만 보이는 고원의 벌판에 그처럼 거대한 유적을 남겼는지가 만일 밝혀질 수 있다면 그 것처럼 흥미로운 일도 많지않을 것이다. 아시아대륙의 명실상부한 중앙이기에 더욱 흥미진진하다.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는 열하 남부지역의 홍산문화 유적지는 이러한 몽골지방의 대피라밋과 어떤 연관성을 느끼게 한다. 

  배달환웅의 개척이래 한창 문명을 꽃피워 가던 신시는 서쪽에서부터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하족(夏族)들에 의하여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하족들은 욕심이 많은 족속들로서, 세계의 모든 문명을 자기들이 만든 것처럼 꾸미고 싶어하는 허영심이 강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 훌륭한 것처럼 보이는 생활을 하는 종족들에 대해서는 가만히 두고 보지를 못하는 이상한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복희씨가 애써 가르쳐 준 신시의 문명조차도 그들의 특유한 패권지향적 성격 때문에 올바르게 발전해 가지를 못했다. 신시의 발달했던 문명 중에서 그들이 취한 것은 홍익인간의 가르침에 따라 서로 도와가며 사는 방법보다는 말초적인 물질문명에 치우쳤다. 그들은 그러한 물질문명을 곧장 전쟁하는데 써먹게 되었고, 자기들의 스승인 신시에 대하여 반항하면서 신시의 영토를 탐내어 점령하려고 벼르게 되었다.

  당시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수메르의 훌륭한 문명이 야만족인 아카드족들에게 파괴된 후 다시 문명의 암흑 속을 더듬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고, 이집트는 야만적인 힉소스 등의 습격에 시달리면서 그 찬란했던 고대문명을 잊어 가고 있었다. 하족들은 무엇보다도 신시가 이미 개척하여 문명생활을 하고 있는 살기좋은 옥토를 원하여, 자기들의 분수도 모른 채 염치없게도 신시를 넘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약 4,800여년 전(서기전 2,800여년) 제14세 치우 환웅 시대에 이르러서 심화되는데, 그 무렵에 하족들은 예의고 염치고 가리지 않고 호시탐탐 신시의 영토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자세한 정황이 하족들의 옛이야기들인 신화·전설 및 심지어는 하족들의 역사책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도 등장하게끔 되었으나, 하족들 편리한대로 꾸민 '옛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많았다. 자세하고도 이론정연한 이야기는 오히려 한민족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앞서 신시의 제8세 환웅인 안부연(安夫連)환웅 시절에 그의 신하인 소전(小典)의 아들 '신농(神農)'이 황하의 중류인 위수(강수라고도 한다)유역에서 하족들을 다스리다가, 그들의 일부를 거느리고 황하 하류지방인 산동지방의 곡부(曲阜)라는 곳에서 작은 나라를 이루게 되었다. 이 때만 해도 산 하나 넘어서 하나의 나라, 강 하나 건너서 또 하나의 나라라는 식으로 군데군데 신시의 부속국가격인 나라들이 흩어져서 제각기 살아가고 있던 때였다. 신농은 복희씨가 다스리던 하족들을 합쳐서 좀 더 사람답게 가르치려는 뜻이 있었으나, 천성이 완악한 일부 하족들은 결국 신농의 가르침마저 우습게 알고, 단지 신시의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만들려는 욕심만 커졌을 뿐이었다. 그들이 배운 문명의 지식은 다만 정복과 자기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고, 홍익인간이라는 훌륭한 가르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이때 하족들을 거느리고 신시를 침범했던 자는 황제(黃帝)라고 불리웠으며, 하족들은 지금까지도 반란자 황제를 아주 위대한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믿고 기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지나지방에서 전해 오는 기록에 의하면 황제도 사실은 하족이 아니라 신시의 주민중 하나였으나, 자기가 신시를 장악하고 싶어서 욕심많은 하족들을 이용하여 난리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때의 난리는 사상최대라고 일컬어져 올 정도로 처참을 극한 재난이었다. 지금의 지나지방 서북부인 감숙성 지역에서 난리를 일으킨 황제는 파죽자세로 신시를 향해서 쳐들어 왔으나, 열네번째 환웅인 치우 환웅이 황제의 대군을 지금의 북경서북부 지방인 탁록(琢?鹿)이라는 곳에서 격파하고 반란자들을 처단하니, 그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 피가 흘러서 강을 이루었다고 한다. 대패한 황제는 일단 도망갔다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치우환웅 및 그 장수들은 평화로운 신시를 지키기 위하여 거듭 황제를 격파했으나, 결국에는 끈질기게 대드는 황제에게 약간의 땅을 허락해 주는 양보를 하며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타이르고 전쟁을 끝냈다. 이로써 황제는 신시의 서쪽 변방 한 귀퉁이에 나마 자기의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큰 화근이 되어 후일에 신시의 강토는 그러한 야만족들이 날뛰는 뒤죽박죽의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8. 유럽지방의 여명

  지금 지구상에서 숱한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는 서양인들의 조상들은 제4빙기 이후 현생인류의 세계사가 펼쳐질 무렵 어디에 있었는가? 브리튼섬의 일부지역에서 발견되어 근래에 유명해진 스톤 헨지가 매우 발달했던 옛 문명의 흔적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빙하에 오랜 동안 덮여 있던 유럽지방에서 그 옛 문명이 제대로 이어질 수 없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치 옛 한국(환국)의 문명이 얼어붙은 시베리아에서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들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빙하가 물러간 후 유럽지방에는 먼 곳으로부터의 이주자들이 한명씩 다시 발을 들여 놓기 시작하였으나,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서부 유럽평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하는 동유럽 지방의 좋지 못한 기후와 척박한 토질 때문에, 환국으로부터 퍼져나갔던 인류문명이 유럽지방에서도 함께 발전하기는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유럽 지방에서 빙하가 물러간 원인은 따뜻한 멕시코만 난류의 흐름을 대서양상에서 막고 있던 거대한 아틀란티스섬이 사라진 때문이라는 연구도 있음). 다만 중동지방과 이집트 지방에 뿌려졌던 문명의 씨앗은 먼 후일에 조금씩 지중해를 건너서 그리이스·로마 지역으로 이동해 가고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유럽 지방에 살고 있던 원시 부족들은 지금의 백인종(인도·아리안족)들과는 완전히 별개의 종족들이다. 지금의 유럽지방 백인종들은 서기 3,4세기 경에 몽골지방으로부터 서쪽으로 향한 흉노족의 대공세에 의하여 중앙아시아 서부변경(즉, 남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지역)에 있던 근거지로부터 밀려난 동고트족들의 침략을 받고 쫓겨간 야만의 게르만 종족이, 동유럽지방으로부터 로마의 영토였던 서부 및 중부유럽지역으로 대거 이동하는 소위 '게르만민족 대이동'이라는 유랑생활을 거쳐서, 대략 지금의 위치에 그 나름대로 자리잡고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9. 지중해문명

  동방에서 문명의 빛이 다시 비치기 시작한 이후 무려 3,000여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유럽 지방에서도 문명의 그림자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주로 아시아와 맞닿은 지중해 연안에 살던 소위 라틴계 종족들에 의해 유럽지방의 문명은 시작되었다. 뒤늦게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우게 된 그들은, 그나마 동방신시의 훌륭한 문명이나 신시를 뒤이어서 훌륭한 국가를 다시 이룬 단군조선 등의 좋은 문명을 배우게된 게 아니라, 한참 야만적이고도 살벌한 패권다툼이 진행되고 있던 서남아시아 지역(오리엔트)의 전쟁문화부터 배우게 되었으므로, 필경 그 시작부터 호전적 전쟁이 그칠 새가 없는 암흑의 역사를 모방해 가게 되었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부족국가나 도시국가 등의 소규모 국가들을 세웠던 그리이스의 예를 살펴보자. 고대 그리이스의 대 문호인 호머의 일리아드·오딧세이 및 그리이스 신화 등에서 우리는 오로지 전쟁에 의한 전리품 획득세력확장·패권다툼·전쟁노예 확보같은 살벌한 싸움질 얘기들을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신화라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집단의식 등을 가장 잘 요약해서 표현해 주는 귀중한 자료인데, 우리민족의 신화에 보이는 평화지향적이고 문명지향적인 밝은 세상을 만드는 이야기보다는, 도덕적으로 가장 불량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도 못한 소위 '신'들의 이야기가 무슨 무슨 영웅신화니, 창조신화니 해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는 참으로 얼마나 더 한심했었을까 하는 상상에 도달한다. 지금에 와서는 어느 정도의 물질문명을 발달시켰다고 한껏 뽐내고는 있지만, 그 문명이라는 게 결국은 인류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무지막지한 물질문명이고 보면, '시작이 좋아야 끝이 좋다'라는 옛 성현들의 말씀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쨌든 그것도 문명은 문명이라고 그리이스를 중심한 지중해연안에서도 다수의 건축물들을 비롯한 사람살던 흔적들이 남아 있기는 하다. 여기에서는 서양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서양 최초의 문명이라는 그리이스 문명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리엔트 지방의 영향을 멀리서나마 받을 수 있었던 유럽지방 남부의 지중해연안은 서기전 6,000년내지 7,000년경에 이르러 신석기 문명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고 알려져 오고 있다. 오리엔트에 가까운 크레타섬에서 더욱 빠른 문명이 성립된 점을 보면 그 시대에 이미 많은 해상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서기전 3,000내지 2,600여년 경에는 오리엔트로부터 청동기를 모방해서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그 세력이 여전히 매우 미미한 야만인들에 불과했다.

  약 천여년간 꾸준히 세력을 다져간 그리이스의 주민들은 지금의 그리이스 주민들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셈족과 지중해지방 원주민의 혼혈족'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서기전 1,400년 경에 이르러 이들 혼혈족들은 지중해의 해상 요충지인 크레타섬에 매우 강력한 왕권국가를 건설하여 대규모의 건축물 등을 비롯한 많은 문명의 유적들을 남겼다. 특히 미노스왕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크놋소스궁전은 사방이 약 180미터씩이나 되는 큰 건물로, 하수도 및 수세식변소 시설까지 완비되어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크레타문명을 건설한 혼혈인들은 크레타인이라고도 불리우며, 크레타문명을 한편으로는 미노아문명이라고도 한다. 그들은 독특한 문자를 만들어 썼으나 아직도 해독이 안되고 있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크레타문명은 그 전성기였던 서기전 1,400년경을 지나면서 그리이스 반도지역으로부터 대거 침입한 미케네인들에 의하여 파괴된 후 미케네시대로 이어졌다. 곧 이어서 도리아인들이 그리이스에 등장하기 이전까지인 미케네시대까지의 문명을 통틀어서 '에게문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이스반도 남쪽에 멀리 떨어져 있던 크레타섬에는 '미노스의 궁전'이라는 유적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 발견된 미로는 그리이스 신화에도 나오는 유명한 유물로서, 그 곳에서는 다름 아닌 잔혹한 인신공양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중해 동부지역을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는 크레타의 왕은 그처럼 사람이 빠져 나올 수 없는 미로를 만들고, 거기에 왕 자신의 아들이었다고 하는 '소머리에 사람 몸을 한 괴물'을 살게 하고서, 이웃 나라에게는 괴물의 먹이로 매년 여러 명의 젊은 사람들을 바치게 했다는 소름끼치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물론 그 이야기는 괴물먹이로 바쳐졌던 아테네의 테세우스라는 젊은이가 그 괴물을 처치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테세우스는 일약 아테네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그 이야기는, 신흥의 도리아인 세력을 공포정책을 써서라도 억제하여 계속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자 했던 미케네인들에 대항하여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얻은 도리아인들의 등장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험준한 알프스산줄기 동쪽의 다뉴브강 유역평원과 흑해연안은 비교적 인간생활에 적합한 지역이었으므로, 문명의 중심지에서는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온갖 야만 종족들이 들끓고 있었다. 아리아 인종에 속하는 도리아인들도 이런 종족중의 일부로서 지금의 그리이스 서북지방에 살고 있었다. 서기전 13세기에 헝가리평원에서 세력을 확장한 일루리아인이 남쪽으로 쳐들어 오자, 도리아인들은 이들에게 쫓겨나서 삶의 터전을 잃고 정처없이 유랑의 길을 떠났다. 그 중의 일부는 더욱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서 이미 자리를 잡고 살고 있던 미케네인들을 정복하며 정착하였고, 다른 일부는 에게해를 건너가 소아시아 반도에서 문명생활을 누리고 있던 힛타이트(핫티)의 변방에 몰려들어갔다. 그들은 다소나마 평화롭게 살아가던 힛타이트왕국의 소아시아 지역에 큰 소란을 야기시켜 가면서 소아시아의 서쪽과 남쪽 해안지대에 정착해 갔다. 이들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힛타이트왕국 내부에 분열이 야기되어 국력이 약화된 결과, 힛타이트는 새로 일어난 앗시리아왕국에게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당시 멸망의 비운을 맞았던 힛타이트왕국은 다민족 다언어국가로서, 수메르어·악카드어를 비롯한 7개의 언어가 사용될 정도로 대단히 복잡한 사회였고, 서기전 2,000년경에는 철기를 사용하여 강력한 무력을 자랑했었으며, 보복보다도 배상에 의한 화해를 장려하는 훌륭한 법전도 구비한 문명사회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호전적인 도리아인들은 그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그리이스 신화를 남겼으나, 숱한 소왕국(小王國)들로 나뉘어져서 저희들끼리도 서로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난장판을 만들며 수백년을 지내어 갔다.

  그리이스 신화에서 볼 수 있는 기묘한 현상은, 여러 신들까지도 사람보다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비도덕적인 성격을 가진 이상한 변종들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트로이의 목마'로 더 잘 알려진 트로이의 전쟁도, 다름아니라 몇몇 허영심에 사로잡힌 '여신'들의 어이없는 경쟁과 질투에 의해서 벌어진 한심한 전쟁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한 이야기를 예로 들자면 끝이 없으므로 대강 그 중의 한가지 무난한 예를 들었는데, 신들조차도 욕심·질투·투쟁·난잡한 남녀관계, 심지어는 그야말로 동물적인 교접(즉, 수간;獸姦) 등으로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인간들이라고 해서 신들을 뛰어 넘어서 홀로 올바른 생각과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으리라고 판단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로 보여진다. 서양문명은 그처럼 요람기부터 이미 숱한 문제점들을 안고 자라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