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사 료 > Ⅰ. 조선왕조실록 /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2014. 5. 14. 20:57나의 이야기






       

제1편 사 료 > Ⅰ. 조선왕조실록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 문경문화원 자료 

2012/06/20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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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후백제 연표사 료설 화유적과 지명문경지역의 유적문경지역의 지명그외지역 유적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제1편 사  료 > Ⅰ. 조선왕조실록  

  1. 세종 149 지리지/공주목/은진현
  2. 세종 150 지리지/경상도/안동대도호부/ 안동대도호부
  3. 세종 151 지리지/전라도/전라도
  4. 세종 151 지리지/전라도/전주부/전주부
  5. 세종 151 지리지/전라도/나주목/나주목
  6. 세종 151 지리지/전라도/장흥도호부/순천도호부
  7. 세종 151 지리지/전라도/장흥도호부/무진
  8. 성종6년 5월17일 석강에서 궁실짓는 문제

 

 

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 세종 149 지리지 / 충청도 / 공주목 / 은진현

   은진현(恩津縣)

  덕은(德恩)은 본래 백제의 덕근군인데, 신라에서 덕근군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덕은으로 고쳤다. 시진은 본래 백제의 가지내현인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덕은군의 영현을 삼았고, 고려 현종 9년에 2현을 모두 공주 임내에 붙였다. 채운향은 예전에 시진현에 붙였었는데, 본조 태조 6년 정축에 덕은·시진·채운향을 병합하여 덕은감무를 두었고, 금상 원년 기해에 은진현감으로 고쳤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고산에 이르기 22리, 서쪽으로 임천에 이르기 20리, 남쪽으로 여산에 이르기 12리, 북쪽으로 이산에 이르기 10리이다. 호수가 5백6호요, 인구가 1천7백17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2명이요, 수호군이 52명이요, 선군이 2백58명이다.

  덕은의 성이 2이니, 이·김이요, 망성(亡姓)이 3이니 유(兪)·배(裵)·조(趙)요, 속성(續姓)이 2이니 장(張)·정(鄭)이다. 시진(市津)의 성이 3이니 배(裵)·임(林)·송(宋)이요, 망성이 2이니 양(梁)·전(全)이요, 속성이 2이니 박(朴)·이(李)이다.【지금 향역(鄕役)에 종사한다.】채운향(彩雲鄕)의 성이 1이니 임(林)이요, 망성이 4이니 배(裵)·송(宋)·양(梁)·양(良)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4천2백7결이요,【논이 더 많다.】토의(土宜)는 오곡과 조·팥·메밀·뽕나무·닥나무·왕골·밤나무이다. 토공(土貢)은 밀[황납黃蠟]·대추·지초·자리·여우가죽·삵괭이가죽·잘[산달피山獺皮]·종이요, 약재는 인삼이요, 토산은 사철(沙鐵)이다.【현의 남쪽 7리. 작지(鵲旨)·웅전(熊田)·토곶(吐串) 등지에서 나는데 모두 하품이다.】

  시진산석성(市津山石城)【현의 서북쪽 9리에 있는데, <지세가>평탄하며, 둘레 4백59보가 되고, 안에 샘 1, 우물 3이 있다.】후백제왕 견훤의 묘(墓)【현의 남쪽 12리 풍계촌(風界村)에 있다.】시진포(市津浦)【예전에 이루진(利樓津)이 있었는데, 서쪽으로 용안(龍安) 광두원(廣頭院)에, 북쪽으로 본현의 노산(爐山)에 응한다.】노산(爐山)이다.【현의 북쪽에 있는데 북쪽으로 이산(尼山)산성에 응한다.】관족사(灌足寺)【현의 북쪽에 있다. 돌미륵(石彌勒)이 있는데, 높이가 54척이다.】

 

  2. 세종 150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안동 대도호부

   안동 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본래 고타야군(古陀耶郡)인데, 경덕왕이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 13년 경인데<태조가>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후백제의 임금 견훤과 더불어 고창(古昌)에서 싸워 패배시켰는데, 고을 사람 김선평·권행·장길 등이 태조를 도와 공이 있으므로, 선평은 대광(大匡)을, 행과 길은 각각 대상(大相)을 삼고, 그 고을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다. 뒤에 영가군(永嘉郡)으로 고쳤다가, 성종 14년 을미에 길주자사(吉州刺史)로 고치고, 현종 3년 임자에 안무사(按撫使)로, 9년 무오에 지길주사(知吉州事)로 고쳤다가, 21년 경오에【송나라 인종 천성 8년】다시 지안동부사(知安東府使)로 삼았다. 

  명종 계축년에【송나라 광종 소희 4년】남적(南賊) 김삼·효심 등이 주군(州郡)을 약탈하니, 국가에서 해마다 연달아 군사를 보내어 비로소 이를 토평(討平)하였는데, 본부(本府)에서 보좌(輔佐)한 공이 있기 때문에, 정사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신종(神宗) 7년 갑자에【송나라 영종 가태 4년.】동경(東京)의 별초(別抄) 패좌 등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본부(本府)에서 이를 막아 깨뜨린 공이 있음으로써 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충렬왕 34년 무신에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쳤고, 공민왕 10년 신축에【지정 21년】홍건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순행하여 수레를 <본부(本府)에>멈추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마음을 다해 공궤(供饋)하였으므로 임인년에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능라군(綾羅郡)이다.【창녕국(昌寧國)·지평군(地平郡)·고령군(古寧郡)·석릉군(石陵郡)·일계군(一界郡)·화산군(花山郡)·고장군(古藏郡) 등은 모두 신라 때의 칭호이다.】속현이 8이니, 임하현은 본디 고구려의 굴화군인데, 신라에서 곡성군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풍산현은 본디 하지현인데, 경덕왕이 영안현으로 이름을 고쳐서 예천군의 영현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일직현은 경덕왕이 직녕현으로 고쳐서 고창군의 영현을 삼았는데, 고려에서 다시 예전 이름으로 바꾸었다. 감천현은 신라 때의 칭호는 미상이다. 위의 4현은 <고려> 현종 무오년에 모두 길주 임내에 붙였다. 길안현은 본디 길안부곡인데, 뒤에 현으로 올렸다. 내성현은 본디 퇴관부곡인데, 고려 충혜왕이 고을 사람인 환자 강금강이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시위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내성현으로 승격시켰다. 춘양현은 본디 가야현인데, 고려 충렬왕 10년 갑신에【원나라 지원 21년.】토인(土人)인 호군 김인월의 공으로써 춘양현으로 승격시켰다. 재산현은 본디 덕산부곡인데, 고려 충선왕이 경화옹주의 고향인 까닭으로 올려서 재산현으로 만들었다. 부곡이 3이니, 개단·소라·소천이다.

  청량산【재산현 서쪽에 있다.】하지산【부 서쪽에 있다. 시속에서 잘못 가로 쓴다.】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진보에 이르기 47리, 서쪽으로 기천에 이르기 62리, 남쪽으로 의성에 이르기 34리, 북쪽으로 춘양을 넘어 순흥 경계에 이르기 94리이다.

  본부의 호수는 8백47호, 인구가 3천3백20명이며, 임하의 호수는 3백23호, 인구가 1천9백단(單)5명이요, 풍산의 호수는 2백82호, 인구가 1천39명이며, 일직의 호수는 72호, 인구가 83명이요, 길안의 호수는 44호, 인구가 1백63명이며, 감천의 호수는 1백62호, 인구가 5백24명이요, 내성의 호수는 83호, 인구가 3백71명이며, 춘양의 호수는 42호, 인구가 1백단(單)5명이요, 재산의 호수는 32호, 인구가 1백57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백13명, 진군이 2백41명, 선군이 5백6명이다.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7이니, 권(權)·김(金)·강(姜)·조(曹)·장(張)·고(高)·이(李)이요, 내성(來姓)이 2이니, 우(禹)곽(郭)이며, 촌성(村姓)이 1이니, 조(趙)이다. 임하의 성이 4이니, 윤(尹)·이(李)·전(全)·신(申)이요, 내성이 1이니, 화(華)이다, 풍산의 성이 5이니, 김(金)·임(林)·유(柳)·홍(洪)·강·(康)이요, 내성이 2이니, 권(權)【본부에서 왔다.】·민(閔)【강주에서 왔다.】이다. 일직의 성이 6이니, 임(任)손(孫)김(金)노(盧)전(田)한(韓)이요, 감천의 성이 5이니, 이(李)·김(金)·전(全)·문(文)·조(趙)이며, 속성이 2이니, 장(張)·최(崔)이다.【모두 근본을 알지 못한다. 지금 향리가 되었다.】춘양의 성이 2이니, 정(鄭)·윤(尹)이요, 길인의 속성이 3이니 김(金)·임(林)·박(朴)이다. 내성·재산·소천·개단의 속성이 각각 1이니, 모두 윤(尹)이며, 소라의 속성이 1이니, 엄(嚴)이다. 인물은 문하시중 상락공 충렬공 김방경【충렬왕 때 사람.】·영의정부사 상락 부원군 익원공 김사형【본조 태조때 사람】·의정부 찬성사 길창군 문충공 권근【본조 태종때 사람.】이다.

  땅이 메마르고, 풍속은 근검하여 농상에 힘쓴다. 풍속은 근검하여 농상(農桑)에 힘쓴다. 간전(墾田)이 1만1천2백83결이다.【논이 7분의 2이다.】토의(土宜)는 벼·기장·조·메밀·콩·뽕나무·삼·왕골이며, 토공(土貢)은 꿀·밀·칡·설면자·송이버섯·잣·지초·은구어·종이·자리·여우가죽·삵가죽·노루가죽이요, 약재는 황금·오미자·백복령·원지·인삼이다. 토산(土産)은 사철(沙鐵)이 임하현 북쪽 사등라리·목곡리 등지에서 난다.【철장(鐵場)이 있다. 세공(歲貢)은 정철(正鐵) 9천9백50근이다.】

  읍 석성【둘레가 5백28보이며, 안에 우물과 샘 18이 있다.】청량산 석성【재산현 서쪽 21리에 있으니, 본부(本府)와의 거리가 71리이다】둘레가 2천2백79보인데, 높고 험하다. 안에 우물과 샘 7, 작은 시내 2가 있고, 또 군창이 있다. 영호루【부치(府治) 남쪽에 있는데, 큰 내를 굽어보고 있다. 고려 공민왕이 올라가 보고 ‘영호루’ 석 자를 써서 편액을 만들었는데, 필력이 힘차서, 보는 사람이 경앙한다.】역(驛)이 7이니, 안기·옹천【본부 지경에 있다.】·금소·송제【임하에 있다.】·안교【풍산에 있다】·신역【일직에 있다.】·유동【감천에 있다.】이다.

  봉화가 7곳이니, 남산은 부(府) 남쪽에 있다.【동쪽으로 신석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일직현의 감곡에 응하며, 서쪽으로 풍산현 남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개목에 응한다.】신석산【임하현의 약산에 응한다.】약산【동쪽으로 진보현 남각산에 응한다.】감곡【남쪽으로 의성현 마산에 응한다.】남산은 풍산현 남쪽에 있다.【서쪽으로 예천 서암산에 응한다.】개목【북쪽으로 영천 소이산에 응한다.】봉화점은 내성현 남쪽에 있다.【동쪽으로 봉화현 서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영천의 소이산에 응한다.】

  관할[所領]은 도호부가 2이니, 영해순흥이요, 군이 4이니, 예천·영천榮川)·영천(永川)·청송이며, 현이 11이니, 의성·영덕·예안·하양·기천·인동·봉화·의흥·신녕·진보·비안이다.

 

  3.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라도

   전라도(全羅道)

  본래 백제의 땅이다. 의자왕 19년 경신에【당나라 고종 현경 5년.】신라 태종왕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멸하고 드디어 그 땅을 합쳤는데, 경덕왕이 전주·무주 두 도독부로 나누었다. 진성왕 5년 임자【당나라 소종 경복 원년.】에 서면 도통 견훤이 백제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하여 후백제왕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 19년 병신【후진 고조 원복 원년.】에 친히 후백제를 쳐서 이기고, 성종 14년 을미【송나라 태종 지도 원년.】에 전주·영주·순주·마주 등 고을을 강남도로 하고, 나주·광주·정주·승주·패주·담주·낭주 등 고을을 해양도로 하였다가, 현종 9년 무오【송나라 진종 천희 2년.】에 전라도로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도관찰사의 관청을 두고 있다.

  동쪽은 경상도 함양군에 이르고, 서·남쪽은 바다에 닿았으며, 북쪽은 충청도 은진현에 이르는데, 동·서가 2백33리요, 남·북이 4백5리이었다. 관할은 유수가 1이요, 목이 2이요, 도호부가 4이요, 군이 12이요, 현이 39이며, 계수관이 4이니, 전주·나주·남원·장흥이다.

  명산은 지리산【일명 지리, 또는 방장, 또는 두류라 한다.】인데 남원에 있으니, 그 동쪽은 진주·곤남이요, 북쪽은 함양·산음이요, 서쪽은 구례요, 남쪽은 광양이다. 웅장하게 높이 하늘에 우뚝 치솟아, 산허리에 간혹 구름이 머물고, 비가 오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데, 그 위는 맑게 개어 평상시와 같으며, 가을철 서늘하면 매떼[鷹]가 모여들므로 잡아다가 나라에 바친다. 속설에 말하기를, “태을이 그 위에 살고, 여러 신선이 모이며, 여러 용이 살고 있다.”고 한다. 두보의 시에 소위 “방장은 삼한 밖이라.[방문삼한외方文三韓外]” 한 주(註)와 《통감집람》에 이르기를, “방장은 대방군 남쪽에 있다.” 한 것은 이 산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에서 남악,중사로 하였고, 고려와 본조에서도 모두 그대로 따라 중사로 하여서, 봄가을에 향·축을 내리어 관찰사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금성산은 나주에 있는데 제례는 지리산과 같다. 

  무등산은【일명 무진악, 또는 서석산이라 한다.】무진에 있는데, 풍후하고 높고 커서, 신라에서는 소사로 하였고, 고려에서는 나라 제사[국제國祭]를 지냈고, 본조에서는 주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천관산은 장흥에 있는데, 높고 험하여 풍후하여, 가끔 서기가 흰 연기같이 하늘을 찔러서, 사람들이 자못 이상히 여기며, 제례는 무등산과 같다. 월출산은【일명 월내악이라 한다.】영암에 있는데, 바위 봉우리가 층층이 치솟아 섰고, 그 가장 높은 봉우리 꼭대기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높이가 두 길이 넘으며, 곁에 한 구멍이 있는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하며, 그 구멍을 따라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20명이 앉을 만하고, 그 평평한 곳에 오목하게 패어서 물이 담기기를 동이 같이 된 것이 아홉이므로, 구정봉이라 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아니하므로, 속설에 전하기를, “아홉 용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아래에 움직이는 돌이 있는데, 홀로 층바위 위에 서서 높이가 한 길이 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며, 서쪽으로는 산골에 연하고, 동쪽으로는 밑없는 구렁에 임하였는데, 한 사람이 흔들면 무너질 듯 하면서도 무너지지 아니하며, 이 같은 바위가 또 둘이 있었다. 상산은 무주에 있는데, 사면이 벽처럼 서서 층층이 끊어져 사람의 치마처럼 되었으므로 상산이라 한다. 옛사람이 험한 것을 이용하여 성을 만들었는데 겨우 두 길이 있어서 올라 다니며, 그 가운데는 평탄하고 넓으며 샘물이 사방에서 나와 합하여 큰 내가 되어 동쪽 구렁으로 흘러 들어간다.

  변산은【일명 영주산이라 한다.】부안에 있는데, 여러 겹으로 높고 크며, 바위로 된 골짜기가 깊고 아늑하며 전함의 재목이 많이 이곳에서 난다. 마이산은 진안에 있는데, 두 봉우리가 우뚝 솟아 동서로 마주 서서 모양이 깎아 세운 듯하며,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꼭대기에 나무가 울창하며, 속설에 전하기를, “동쪽산 꼭대기에 작은 못이 있다.” 하나 바라만 보일 뿐이요, 올라갈 수는 없다. 우리 태종 13년 계사에 임금이 산 아래에 행차하여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대천은 남포진이 나주에 있는데, 그 수원이 3이 있으니, 그 하나는 담양 추월산의 물이 창평현을 지나 무진의 북쪽으로 들어가 창평현의 남쪽 물과 합하고, 또 무진성 서쪽 물과 어울려 서쪽으로 흐르고, 그 하나는 장성 위령의 물이 진원현 서쪽과 나주 북쪽 경계를 지나 옛 내상성 남쪽을 거쳐서 생압진에 이르러 무진 북쪽 경계의 물과 합하여 나주의 동쪽을 지나고, 그 하나는 능성 쌍봉의 물이 남평현 북쪽을 지나 또 나주의 동쪽 경계의 물과 합하여 남쪽으로 돌아 서쪽으로 흘러서 남포진이 되어 나룻배로 사람을 건너게 되고, 무안현 동쪽에 이르러 대굴포가 되고, 또 서쪽으로 흘러서 영암군 운적산의 기슭을 지나 목포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하도의 조운이 이곳을 경유하여 서울에 이른다.

  잔수진은 구례에 있는데 그 수원이 2가 있으니, 그 하나는 진안 중대산의 물이 서남쪽으로 흘러 임실·순창을 지나 돌아서 동쪽으로 흘러 남원 남쪽 경계에 이르러 순자진이 되며, 그 하나는 지리산 서북쪽 여러 골짜기의 물이 남원을 지나 순자진으로 들어가서 그 하류가 압록진이 되며, 또 보성 정자천의 물이 복성 옛 현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서 낙수진이 되고, 동북쪽으로 흘러 옛 곡성을 지나 압록진으로 들어가서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 구례현 남쪽과 순천 북쪽 경계에 이르러 잔수진이 되고, 지리산 남쪽 기슭을 지나서 경상도 진주의 옛 임내 화개현 서쪽에 이르러 용왕연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며, 동남쪽으로 흘러 광양현의 남쪽을 지나 섬진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신창진은 전주에 있는데 그 수원이 3이 있으니 그 하나는 부(府)의 남쪽 여현의 물이 성 남서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흘러 부의 서남쪽 모산 여러 골짜기의 물을 합하고, 삼례역 남쪽에 이르러 또 고산과 운제의 물과 어울려서 서쪽으로 흘러 회포가 되고, 비간장진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며, 이성의 옛 성 북쪽에 이르러 신창진이 되는데, 나룻배가 있으며, 서쪽으로 흘러 만경과 임피를 지나 옥구에 이르러 고사포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진은 부안현에 있는데 태인과 정읍 두 현의 물이 김제 벽골의 물과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서 흥덕 동쪽에 이르러 고부 눌제의 물과 어울려 동진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므로 다리를 놓아 행인을 다니게 하고 만경현 서남쪽을 지나 바다에 들어간다. 호수는 2만4천73호요, 인구는 9만4천48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천1백67명이요, 영진군이 2천4백24명이요, 기선군이 1만1천7백93명이다.

  간전이 27만7천5백88결이다.【논이 10분의 4이다.】그 부세는 볍쌀【찹쌀·멥쌀】·콩【누렁콩·팥·녹두】·밀·참깨·차조기씨·모시요, 그 공물은 꿀·밀·범가죽·표범가죽·곰가죽·쇠가죽·말가죽·이긴 사슴가죽·이긴 노루가죽·여우가죽·삵괭이가죽·잘·물개가죽·활줄·표범꼬리·여우꼬리·족제비털·사슴·돼지·토끼·산돼지·말린 사슴·말린 노루·말린 돼지·정향포·사슴꼬리·돼지털·쇠뿔·녹각·갖풀·힘줄·잡깃·가뢰·대모·고니·상어·말린 숭어·전복·생복·말린 홍합·낙지·굴·감합·대합조개·은어·붉은큰새우·인포·조포·오징어·옥둥어·다시마·부레·칠·겨자·황밤·대추·곶감·연감·모과·석류·배·개암·가시연밥·유자·감자나무열매·비자·유감·동정귤·금귤·푸른귤·산귤·마름·분곽·상곽·올멱·해모·우무·해각·황각·매산이·김·감태·오해자·송이·석이·느타리·표고·새앙·고사리·지초·회화나무꽃·치자·작설차·송화·소나무그을음·송진·목화·모시·삼·삼노·각색종이【표전지·자문지·부본단자지·주본지·피봉지·서계지·축문지·표지·도련지·중폭지·상표지·갑의지·안지·세화지·백주지·화약지·장지·상주지·유둔지·유둔.】·자리【별무늬돗자리】·보통무늬돗자리·흰무늬돗자리·왕골자리·대껍질방석·가는대·오죽·화살대·바닷대·등상자·대껍질·말린죽순·자기·나무그릇·버들고리이다. 약재는 우황·쇠쓸개·범의뼈·고슴도치가죽·곰쓸개·녹용·녹각상·토끼머리·녹각·담비쓸개·산양이뿔·도아조기름·두꺼비·뽕나무벌레·자라껍데기·오징어뼈·말린잉어·잉어쓸개·자네·등에·매미허물·거북껍데기·결명초·인삼·영릉향·곽향·박상·회향·가시연밥·연꽃·겨우살이꽃·궁궁이·나팔꽃씨·으름덩굴·호라비좆뿌리·겨우살이풀뿌리·패랭이꽃이삭·수자해좆뿌리·택사·새삼씨·탱알·탱알뿌리·연밥·회초미뿌리·파고지·삽주뿌리·쪽·칠·감제뿌리·당귀·하국·하눌타리·작약·끼무릇뿌리·부들꽃·끼절가리뿌리·도라지·꽃창포·족두리풀뿌리·칡꽃·버들옷·검화뿌리껍질·두여머조자기·쇠무릎지기·범부채·쓴너삼뿌리·구리때뿌리·사양채뿌리·바곳·계소·병풍나물뿌리·숭나물·자리공뿌리·다시마·흰띠·겨우살이덩굴·아기풀·갈뿌리·박새·암눈바앗씨·진득찰·꽈리·검산풀뿌리·할미씨깨비·향부자·심황·수자해좆씨·난향·지치·현삼·멧미나리·매자기뿌리·흰바곳·등대풀싹·가위톱·대왕풀·오미자·창이·외나물뿌리·창포·자주연꽃·개구리밥·감국화·더위지기·절국대·수리나물·영생이·속수자·꼭두서니뿌리·두루미냉이씨·단너삼·순비기나무열매·쥐방울·게로기뿌리·항가새·조방가새·사하·파초·산해박·익관초·초결명씨·백작약·모시잎·석골풀·골풀·말오줌나무·마뿌리·두릅뿌리·속수자·소태나무열매·석류껍질·흰매화·매화열매·탱자껍데기·괴좆나무열매·흰매화열매·복령·모란껍데기·닥나무열매·솜대속껍질·괴좆나무뿌리껍질·죽력·황경나무껍데기·조피나무열매·백복령·호도·오갈피·솜대잎·철쭉꽃·쥐엄나무열매·쥐엄나무가시·산이스랏씨·말린모과·살구씨·오배자·복숭아씨·삿갓나물·측백나무잎·아가위·배·잣·묵은귤껍질·엄나무껍질·푸른귤껍질·후박·두충·솔씨·담배·복신이다.

  심는 약은 생지황·장군풀·건강·백변두·검은변두·우엉·심황·소야기이었다.

  조운창이 2이니 영산창이 나주·목포에 있고【나주·순천·장흥·담양·낙안·보성·해진·영암·영광·무진·강진·고흥·광양·능성·남평·화순·동복·곡성·옥과·창평·진원·장성·흥덕·무장·함평·무안 등의 조세를 이곳에 바친다.】덕성창이 함열현 서피포에 있다.【함열·전주·남원·익산·고부·김제·금산·진산·순창·임피·옥구·만경·부안·정읍·금구·태인·임실·구례·운봉·장수·진안·용담·무주·고산·여산·용안 등의 조세를 이곳에 바친다.】

  관방의 수어사는 병마도절제사영이 강진현에 있고,【정군이 4백98명, 수성군이 51명, 조역군이 1백63명, 장인이 1백41명이다.】진(鎭)이 4이니 옥구·부안·무장·조양이요,【정군이 각각 3백명이다.】수군 처치사 영이 무안현 대굴포에 있고,【대선 8척, 중선 16척, 군사 1천8백95명, 뱃사공 21명을 거느린다.】좌도 도만호 선박처가 보성군 동쪽 여도량에 있는데,【중선 6척, 맹선 12척과 군사 1천12명과 뱃사공 19명을 거느린다.】관내의 만호가 8이니, 내례가 순천부 남쪽 며포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 6척과 군사 7백66명과 뱃사공 6명을 거느린다.】돌산이 순천부 남쪽 용문포에 있으며,【중선 8척과 군사 5백18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축두가 고흥현 남쪽 고흥포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5백12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녹도가 장흥부 북쪽 녹도량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83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회령포가 장흥부 남쪽 주포에 있으며,【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72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마도가 강진현 남쪽 원포에 있으며,【중선 8척과 군사 5백10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달량이 영암군 남쪽에 있으며,【중선 7척, 맹선 2척과 군사 5백19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어란이 해진군 남쪽 삼촌포에 있다.【중선 4척과 군사 4백80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우도 도만호 선박처는 함평현 서쪽 원관에 있는데,【중선 8척, 별선 10척과 군사 1천55명과 뱃사공 9명을 거느린다.】관내 만호가 5이니, 목포가 무안현 남쪽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98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다경포가 무안현 서쪽 와포에 있으며,【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79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법성포가 영광군 북쪽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93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금모포가 부안현 남쪽 웅연에 있으며,【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55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군산이 옥구현 북쪽 진포에 있다.【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61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감목관이 3인이요,【도 안에 1인이요, 제주에 2인이다.】역승이 7인이니, 창활도의 관할 역이 11이요,【잔수·갈담·오수·은령·통도·인월·익신·섬거·양률·낙수·지신】앵곡도의 관할 역이 5이요,【거산·천원·부흥·내재·영원】제원도의 관할 역이 2이요,【달계·소천.】벽사도의 관할역이 9이요.【파청·진원·통로·낙신·영보·별진·녹산·양강·가신.】삼례도의 관할 역이 6이요.【반석·양재·오원·재곡·소안·옥포.】청엄도의 관할 역이 9이요,【단엄·선엄·신안·녹사·청송·영신·청연·경신·가리.】경양도의 관할 역이 8이요,【덕기·가림·인물·창신·대부·금부·오림·광리.】

 

  4.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전주부

   전주부(全州府)

  윤(尹) 1인, 판관(判官) 1인, 교수관 1인. 본래 백제의 완산이었는데,【일명 비사벌 또는 비자화라 한다.】위덕왕 원년 을해에【양나라 간문제 승성 4년.】완산주로 하였다가, 11년이 지나서 을유에【진나라 세조 천가 6년】주가 폐지되었고 의자왕 22년 경신에【당나라 고종 현경 5년.】신라 사람들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백제를 멸하자, 그 땅이 모두 신라에 들어갔으며, 신문왕 4년 을유에【당나라 측천 수공 원년.】다시 완산주를 두었다가 경덕왕 15년 정유에【당나라 숙종 원년.】전주로 고쳤다. 효공왕 3년 경신에【당나라 소종 광화 3년】견훤이 완산에 도읍하고 후백제라 하였는데, 고려 태조 19년 병신에【후진 고조 천복 원년.】친히 백제를 이기고 안남 도호부로 고쳤다가 23년 경자에【천복 5년.】다시 전주로 하였다.

  성종 12년 계사에【송나라 태종 순화 4년.】승화 절도안무사로 고쳤고, 15년 병신에【송나라 태종 지도 2년.】전주 순의 군절도사로 고쳤고, 현종 9년 무오에【송나라 진종 천희 2년.】안남 대도호부로 고쳤고, 13년 임술에【송나라 진종 건흥 원년.】전주목으로 고쳤다. 본조 태조 원년 임신에【명나라 고황제 홍무 25년.】완산부로 승격하니, 이씨의 본관인 까닭이다. 태종 3년 계사에【명나라 태종 영락 11년.】전주부로 고쳤다. 별호를 승화·완산【고려 성종 10년 신묘에 정한 것이다.】혹은 견성이라고 한다.【순화 때 정한 것이다.】고속현이 4이니, 이성현은 본래 백제의 두이현이었는데 신라에서 두성현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이성현으로 고쳤으며, 이성현은 본래 백제의 내리아현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전주에 내속하였으며, 옥야현은 본래 백제의 소력지현이었는데, 신라에서 옥야로 고쳐서 금마군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전주에 내속하였고, 명종 6년 병신에 감무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전주에 내속하였으며, 우주현은 본래 백제의 우소저현이었는데, 신라에서 우주로 고쳐서 금마군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초에 전주에 내속하였다. 향이 2이니 경명【일명 영명이라 한다.】·제견이요, 소(所)가 2이니, 두모촌·앙량이다.【태종 9년에 도관찰사 윤향이 아뢰어서 도 안의 현향소부곡들을 모두 본고을에 합쳤다. 지금 고속현을 적는 것은 뒷날에 참고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대천은 신창진이다.【주의 북쪽에 있다.】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고산에 이르기 30리, 서쪽으로 금구에 이르기 27리, 남쪽으로 임실에 이르기 31리, 북쪽으로 여산에 이르기 46리이다. 태조 강헌 대왕 진전【성 안 동남쪽 모퉁이에 있다.】호수는 1천5백65호요, 인구는 5천8백29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77명이요, 진군이 1백48명이요, 선군이 8백26명이요, 수성군이 30명이다.

  토성(土姓)이 9이니 이(李)·최(崔)·유(柳)·박(朴)·전(全)·유(庾)·한(韓)·백(白)이요, 내접성(來接姓)이 1이니, 방(房)이요, 속성(續姓)이 4이니, 양(梁)【주계에서 왔다.】·장(張)【결성에서 왔다.】·김(金) 2【하나는 모평에서 왔고 하나는 온 곳을 모르는데 모두 향리가 되었다.】이다. 이성(伊城)의 성은 5이니, 조(趙)·배(裵)·장(張)·구(仇)·염(廉)이요, 이성(利城)의 성은 5이니, 이(李)·백(白)·정(鄭)·손(孫)·진(陳)이요, 옥야의 성은 4이니, 장(張)·염(廉)·양(梁)·구(仇)요, 망성(亡姓)이 1이니, 임(林)이다. 우주(紆州)의 성은 5이니 박(朴)·이(李)·정(鄭)·황(黃)·최(崔)요, 경명의 성은 4이니, 김(金)·임(林)·배(裵)·인(印)이요, 두모촌의 성은 3이니, 책(冊)·최(崔)·이(李)요, 양량의 성은 4이니, 백(白)·나(羅)·강(康)·유(劉)이다. 인물은 예부 낭중 최균이니, 고려 명종 때 사람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되며, 민간 풍속이 장사를 좋아한다. 간전이 1만8천6백64결이요,【논이 조금 많다.】토의(土宜)는 오곡·뽕나무삼목화감배왕대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여우가죽·이리가죽·잘·종이【표전·주본·부본·자문·서계 등의 종이 및 표지·도련지·백주지·유둔·세화·안지인데, 도 안에 오직 이 고을과 남원의 것이 품질이 좋다.】모시무늬있는 자리·족제비털·칠·꿀·대추·석류·새앙【읍의 사람들이 업으로 삼는다.】이요, 약재는 인삼·말오줌나무·궁궁이·호라비좆뿌리·겨우살이풀뿌리·패랭이꽃이삭·흰매화열매·복령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부의 남쪽 장파곤동에 있는데, 중품이다.】도기소(陶器所)가 2이다.【부의 서쪽 우림곡에 있는데 중품이다.】읍 석성【둘레가 1천2백88보이다.】고덕산 석성【둘레가 1천4백13보이며, 성안에 샘이 7이 있고, 또 시내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역이 3이니 반석·삼례·앵곡이요, 요해가 1이니 상관동·여현이다.【주 남쪽에서 임실로 가는 지로이다.】큰 방죽이 3이니, 상시제·하시제·공덕제이다. 관할은 군이 5이니, 진산·금산·익산·고부·김제요, 현이 11이니, 금구·만경·임피·옥구·함열·용안·부안·정읍·태인·고산·여산이다.

 

  5.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나주목

   나주목(羅州牧)

  본래 백제의 발라군이었는데 신라에서 금산군으로 고쳤다. 신라 말년에 견훤이 후백제왕이라 일컫고 모두 그 땅을 차지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금산 사람들이 후고려왕 궁예에게 붙으니,【후량 태조 건화 원년 신미.】궁예가 명하여 고려 태조를 정기태감으로 삼고 뱃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여 빼앗게 하여 나주로 고쳤다. 성종 15년 병신【송나라 태종 지도 2년.】에 새로 10도를 정하고 나주진 해군 절도사로 하였다. 현종 원년 경술에 왕이 글안의 군사를 피하여 남쪽으로 순행하여 이곳에 열흘 동안 머물렀었는데, 글안 군사가 패하여 물러가므로 왕이 이에 환도하였다.

  9년 무오에 목으로 고쳤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는 통의 금성【순화 때 정한 것이다.】이다. 옛 속현이 8이니 영산은 본래 흑산도이었는데 육지로 나와 주의 남쪽 10리 되는 남포강 가로 옮겼으며【공민왕 12년 갑진에 군의 이름을 붙였다.】압해는 본래 백제의 아차산현이었는데 신라에서 압해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본주에 내속시켰으며, 여황은 본래 백제의 수천현이었는데, 신라에서 여황으로 고쳤으며, 회진은 본래 백제의 두힐현이었는데, 신라에서 회진으로 고쳤으며 안로는 본래 아로곡현이었는데 신라에서 야로로 고쳐서 이에 내속시켰으며, 복룡은 본래 백제의 복룡현이었는데 신라에서 용산으로 고쳐서 무주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다시 복룡이라 하여 이에 내속시켰으며, 반남은 본래 백제의 반내부리현이었는데 신라에서 반남으로 고쳐서 영암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내속시켰으며, 장산은 본래 백제의 거지산현【거(居)가 굴(屈)로도 되어 있다.】이었는데, 신라에서 안파현으로 고쳐서 압해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다시 장산이라 하여 본주에 내속시켰다. 향이 2이니, 종의·손리이요, 소가 1이니, 수타이요,【일명 횡산이라 한다.】부곡이 6이니, 거평·임성·군산·극포·금마·평구이다.

  진산은 금성이다. 남해 신사당【주의 남쪽에 있는데, 제례는 평사이다. 봄·가을에 나라에서 향축을 내려서 제사 지낸다.】앙암용진【주의 관원이 제사 지낸다.】남포진【주의 남쪽에 있는데 배가 있다.】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남평에 이르기 5리, 서쪽으로 무안에 이르기 27리, 남쪽으로 영암에 이르기 32리, 북쪽으로 함평에 이르기 32리이다. 호수가 1천89호요, 인구가 4천26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59명이요, 영진군이 1백55명이요, 선군이 6백70명이다.

  토성(土姓)이 9이니 김(金)·나(羅)·오(吳)·정(鄭)·진(陳)·손(孫)·남(南)·박(朴)·유(柳)이다. 영산의 속성이 1이니 윤(尹)이요, 압해의 성이 5이니, 박(朴)·주(朱)·정(丁)·강(江)·남(南)이요, 반남의 성이 5이니, 홍(洪)·조(曹)박(朴)채(蔡)송(宋)이요, 회진의 성이 4이니, 양(梁)·임(林)·신(申)·조(曹)요, 안로의 성이 4이니, 김(金)서(徐)차(車)전(全)이다. 복룡의 성이 5이니, 조(曹)박(朴)구(仇)유(庾)화(化)요, 속성이 1이니, 범이다. 여황의 성이 4이니, 조(趙)·조(曹)·화(化)·주(朱)요, 속성이 1이니, 전(全)【향리.】이다. 장산의 성이 3이니, 남(南)·김(金)·채(蔡)요, 종남【예전에는 종의라고 하였다.】의 성이 2이니, 박(朴)홍(洪)이요, 거평의 성이 3이니, 사마(司馬)·유(柳)·임(林)이요, 극포의 성이 1이니, 윤(尹)이다. 임성의 성이 1이니, 유(兪)요, 망성(亡姓)이 1이니, 윤(尹)이다. 군산의 성이 1이니, 유(兪)요, 망성(亡姓)이 1이니, 윤(尹)이요, 금마의 망성이 1이니, 하(河)요, 손리의 망성이 1이니, 오(吳)이었다. 인물은 첨의 중찬 문정공 정가신이니 고려 충선왕 때 사람이요, 문하 평리 경렬공 정지이니, 고려 공양왕 때 사람이다.

  땅이 기름진 것이 3분의 1이다. 간전이 1만5천3백39결이요,【논이 조금 많다.】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왕골·닥나무·왕대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삵괭이가죽·여우가죽·잘·족제비털·표범꼬리·등나무상자·목화·자리·작설다·새앙·죽순·대추·감·배·석류·비자요, 약재는 연밥·오매실·염매실·겨우살이풀뿌리·패랭이꽃이삭·도아조기름·잉어쓸개·녹용이요, 토산(土産)은 절어·귤이다. 염소가 35요,【주의 서쪽 여러 섬에 흩어져 있는데, 염창은 주 남쪽 9리에 있다. 염간이 2백59명인데, 봄·가을에 공납하는 소금이 2천5백90석이다. 나주 판관이 주장하여 민간의 면포와 무역해서 국용에 이바지 한다.】자기소가 1이니, 주의 남쪽 금마리에 있다.【하품이다.】

  읍 석성【둘레가 1천1백62보 남짓이다.】금성산 석성【둘레가 1천95보요, 샘이 5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또 못이 있고 군창이 있다.】역이 2이니, 청암·신안이요, 목장이 1이니, 장산도요,【암·수말 57필을 방목한다.】봉화가 2곳이니, 주의 서쪽에 있는 군산과【남쪽으로 무안 유달에 응하고, 북쪽으로 무안 고림에 응하고, 동남쪽으로 마악산에 응한다.】마악산이다.【서쪽으로 군산에 응하고, 동남쪽으로 무안 옥축산에 응한다.】

  월경은 해진의 북촌 월량지의 땅이 종남리를 넘어 들어왔다. 관할은 군이 3이니, 해진·영암·영광이요, 현이 8이니 강진·무장·함평·남평·무안·고창·흥덕·장성이다. 해도가 4이니, 자은도·압해도·암태도·흑산도이다.

 

  6.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순천 도호부

   순천 도호부(順天都護府)

  사(使) 1인. 본래 백제의 삽평군이었는데,【일명 무평이라 한다.】신라에서 승평군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 15년【송나라 태종 지도 2년.】에 새로 10도를 정할 때 승주 연해군 절도사로 하였다가【일명 승화라고 한다.】정종 2년 병자【송나라 인종 경우 3년.】에 다시 승평군으로 하였고, 충선왕 원년 기유【원나라 세조 황제 지대 2년.】에 승주목으로 승격하였다가 2년에 순천부로 강등하였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태종 13년 계사에 예에 의하여 도호부로 하였다. 옛 속현이 3이니, 여수는 본래 백제의 원촌현이었는데, 신라에서 해읍현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여수현으로 고쳐서 승평군의 속현으로 하였다가 충정왕 2년 경인에 따로 현령을 두었는데, 본조 태조 5년 병자에 본부에 환속시켰으며, 돌산은 본래 백제의 돌산현이었는데, 신라에서 노산현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다시 돌산현으로 고쳤으며, 부유는 본래 백제의 둔복현이었는데, 신라에서 부유현으로 고쳐서 곡성군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내속시켰다. 향이 2이니, 삼일포청방이요, 소가 3이니 상이사·두잉지·두평이요, 부곡이 10이니가음·이촌·죽청·율촌·진례·적량·소라포·하이사·별량·송림이다.

  진산은 인제이다.【부의 북쪽에 있다.】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광양에 이르기 20리, 서쪽으로 동복에 이르기 72리,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70리, 북쪽으로 구례에 이르기 48리이다. 호수가 4백67호요, 인구가 6백18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7명이요, 수호군이 79명이다. 토성이 4이니, 장(張)·박(朴)·김(金)·강(康)이요, 망성이 1이니, 도(陶)요, 내접성이 1이니, 임(林)【풍산.】이요, 속성이 1이니, 이(李)【향리.】이다. 여수의 성이 3이니, 박(朴)·신(辛)·백(白)이요, 망성이 1이니, 도(陶)요, 내접성이 1이니, 김(金)이다. 부유의 성이 4이니, 현(玄)·김(金)·심(沈)·이(李)요, 내접성이 2이니, 박(朴)·고(高)요, 속성이 1이니, 임(林)【향리.】이다. 돌산의 성이 5이니, 정(鄭)·윤(尹)·정(丁)·석(石)·노(盧)요, 삼일포의 성이 2이니, 박(朴)·전(田)이요, 내접성이 2이니, 강【경주.】·이【광주.】이다. 정방의 성이 1이니, 김(金)이요, 속성이 1이니 박(朴)【향리.】이요, 두잉지의 성이 2이니, 박(朴)·신(辛)이요, 가음의 성이 2이니, 임(任)·여(呂)요, 내접성이 1이니, 박(朴)【승주.】이요, 이촌의 망성이 2이니, 백(白)임(林)이요, 죽청의 성이 1이니, 도(陶)요, 율촌의 성이 4이니, 김(金)·강(康)·박(朴)·차(車)요, 진례의 성이 3이니, 전(田)·박(朴)신(申)이요, 망성이 1이니, 김(金)이요, 적량의 성이 2이니, 박(朴)신(辛)이요, 소라포의 성이 2이니, 박(朴)·백(白)이요, 망성이 2이니, 전(田)·신(辛)이요, 하이사의 성이 1이니, 임(林)이요, 별량의 성이 3이니, 박(朴)·도(陶)·황(黃)이다. 인물은 좌승 강영규이니, 고려 태조 때 사람이요, 견훤의 사위는 죽어서 해룡산신이 되었다.

  땅이 기름지며 기후가 따뜻하다. 간전이 7천3백15결이요,【논·밭 반반이다.】토의(土宜)는 오곡·뽕나무·삼·밤·닥나무·왕골이다. 토공은 범가죽·삵괭이가죽·여우가죽·잘·족제비털·칠·감귤·석류·배·매화·분곽·꿀·밀·대추·지치·죽순·상어·전복·홍합·붉은큰새우·차·표고·목화·오죽·대방석이요, 약재는 흰매화·녹용·호라비좆뿌리·겨우살이풀뿌리·난향·오징어뼈·심황·속돌·백복령·인삼이요, 토산(土産)이 은어·조기·가는대·왕대이다. 염소(鹽所)가 9이니, 6소(所)와【부의 동쪽에 있는데, 】하나는 토수포에 있고 하나는 예교포에 있고, 하나는 사전포에 있고, 하나는 동산포에 있고, 하나는 마두포에 있고, 하나는 생성포에 있다. 3소이다.【부의 남쪽에 있는데, 하나는 다로도에 있고, 하나는 사도에 있고, 하나는 마골포에 있다.】염창(鹽倉)【읍성 안에 있다. 공사 염간이 아울러 50명이며, 봄·가을에 바치는 소금이 4백9석이다.】자기소가 1이요,【부의 북쪽에 있다.】도기소가 3이었다.【하나는 부의 북쪽 말촌에 있고, 하나는 부의 동쪽 토진에 있고, 하나는 부의 남쪽 이포에 있다.】

  읍 석성【둘레가 5백 81보이다.】여수 목책 도니성【둘레가 1백43보이다.】관방은 내례 돌산이다.【병선이 머무른다.】봉화가 4곳인, 돌산【부의 동쪽에 있는데, 서쪽으로 백야에 응하고, 북쪽으로 성두에 응한다.】·성두【북쪽으로 진례에 응한다.】·진례【북쪽으로 광양 건대산에 응한다.】·백야【서쪽으로 장흥 팔전산에 응한다.】이다. 송광사【선종에 속하고, 전지가 1백30결이다.】역이 2이니, 양률·낙수요,【예전에는 고양역이 있었는데, 왜적으로 말미암아 없어졌다.】해도가 3이니 돌산·개도·금오도이다.

 

  7.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무진군

   무진군(茂珍郡)

  본래 백제의 무진주 도독이었는데,【일명 노지라고 한다.】신라에서 백제를 차지하여 그대로 도독으로 하였고, 경덕왕 16년 정유【당나라 숙종 지덕 2년.】에 무주 도독으로 고쳤다. 진성왕 6년 임자【당나라 소종 경복 원년.】에 견훤이 무진주를 습격하여 빼앗아 웅거하고 후백제왕이라 일컫다가 드디어 전주로 옮겼다. 견훤 20년 신미【양나라 태조건화 원년.】에 후고려왕 궁예가 고려 태조를 정기태감으로 삼아서 뱃군사를 거느리고 무진 지경을 공략하여 차지하게 하였는데, 성주 지훤은 바로 견훤의 사위였으므로 견훤과 서로 응하여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고려 태조 23년 경자【진나라 고조 천복 5년.】에 이르러 광주로 고쳤고, 성종 15년 병신【송나라 태조 지도 2년.】에 광주 자사로 강등하였고, 그 뒤에 또 해양 현령으로 강등하였다가 고종 45년 무오【송나라 이종 보우 6년.】에 공신 김인준의 외향이라 하여 지익주사로 고쳤고, 뒤에 광주목으로 승격하였고, 충선왕 원년 경술【원나라 세조 지대 3년.】에 화평부로 고쳤고, 공민왕 11년 임인【원나라 순제 지정 22년.】에 무진부로 고쳤고,【혜묘의 휘자를 피하여 무(武)를 무(茂)자로 고쳤다.】23년 갑인【명나라 홍무 7년.】에 광주목으로 승격하였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금상 12년 경술에 읍사람 노흥준이 본주 목사를 구타하였으므로 노홍준을 곤장을 때려 변방지방으로 유형시키고 그 가족도 이주시키고서, 군으로 강등하였다. 별호를 광산, 또는 익양이라고 한다. 고속부곡이 2이니, 양과·경지다.

  진산은 무등이다.【군의 동쪽에 있다.】병로지 용당【사전에는 용진 연소라 하였는데, 봄·가을에 이 고을 관원이 제사를 지낸다.】벽진도【군의 서쪽에 있다.】거진도【군의 북쪽에 있다.】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창평에 이르기 15리, 서쪽으로 나주에 이르기 28리, 남쪽으로 화순에 이르기 14리, 북쪽으로 진원에 이르기 24리이다.

  호수가 8백60호요, 인구가 4천1백82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75명이요, 영진군이 2백69명이요, 선군이 5백71명이요, 수성군이 8명이다. 토성(土姓)이 13이니, 탁(卓)·이(李)·김(金)·채(蔡)·노(盧)·장(張)·정(鄭)·박(朴)진(陳)허(許)반(潘)성(成)승(承)이요, 촌성(村姓)이 1이니, 유(庾)요, 속성이 4이니, 김(金)【개성.】·정(程)【금산.】·신(申)【고흥.】·최(崔)【당진.】이요,【모두 향리이다.】양과·경지의 성은 모두 김(金)이요, 벽진도의 망성이 1이니, 김(金)이다. 인물은 지첨의부사 시 문숙공 김주정이니, 고려 충렬왕 때 사람이요, 첨의정승 치사 시 문정공 김태현이니, 충선왕 때 사람이다.

  땅이 메마르며,【10분의 2이다.】간전이 1만8백80결이요,【논이 조금 많다.】토의(土宜)가 오곡·뽕나무·삼·목화·닥나무·왕골이다. 토공(土貢)이 표범가죽·여우가죽·삵괭이가죽·잘·족제비털·칠·등나무상자·대추·감·배·석류·모과·차·표고·꿀·밀·자리·왕대요, 약재가 호라비좆뿌리·겨우살이풀뿌리·연꽃술·말린새앙·패랭이꽃이삭·흰매화열매·복령·모란뿌리껍질이다. 자기소가 1이요,【군의 동쪽 이점에 있다.】도기소가 1이다.【군의 북쪽에 있다.】

  읍 석성【둘레가 9백72보이다.】옛 내상 석성【군의 서쪽에 있는데, 둘레가 6백25보이다.】무진 도독 때의 옛 토성【둘레가 2천5백60보이다.】역이 2이니, 경양·선암이다. 예전에 진원역이 있었는데, 본조 태종 17년 정유에 내상을 강진에 옮길 때 아울러 옮겼다.

  이상한 일[靈異]. 지정 원년 신사【충혜왕 복위 2년.】에 동정 원수 김주정이 각 고을의 성황신에 제사지냈는데, 다니며 이름을 부르면 신령한 일이 나타났으니, 군의 성황 가운데 둑의 방울을 흔든 것이 셋이었으므로, 두루 조정에 함께 보고하여 작을 봉하였다. 무등산 꼭대기에 줄바위가 수십 개 있는데, 삐죽하게 선 것이 높이가 백여 자나 된다. 그 산이 오래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하거나 장차 개려고 할 때에는 우레소리같이 우는 소리가 자주 나는데, 수 십리에까지 들린다. 또 읍의 남쪽에 큰 나무가 있어서 이름을, 활나무라고 하는데, 가지와 줄기가 오래되고 울창하여, 둘레가 19자쯤 되고, 높이가 70자쯤 된다. 해마다 봄철이 되어 여러 나무가 잎이 나기 전에 먼저 잎이 나면 그 해에 흉년이 들 징조이며, 여러 나무가 이미 활짝 피었는데도 이 나무가 잎이 나지 않거나 혹 느즈막하게 가지런히 나면 그 해에 풍년이 들 징조이며, 혹은 나무의 네면과 위·아래가 가지런하지 않게 잎이 나도 또한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성중(城中) 사람들이 대개 이것으로써 한 해의 풍년·흉년을 점치는데, 그 일이 여러 번 들어맞았다.

 

  8. 성종 6년 5월 17일 석강에서 궁실짓는 문제

  석강에 나아갔다.《강목》을 강독하다가 ‘위나라에서 궁실을 크게 지었다.’는 대목에 이르러, 좌부승지 이극기가 아뢰기를 “경회루는 선왕께서 창건하신 것인데 이제 무너져가니 수리해야 합니다마는, 돌로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용을 새기는 것은 옛 제도와 다르므로, 대간조신들이 흔히 말을 합니다.”하고 시강관 이맹헌이 아뢰기를, “지금 바야흐로 가뭄의 재변이 있으니, 공사의 영선을 일체 금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성상께서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찬선을 줄이시더라도, 아랫사람들은 거의 꺼리는 것이 없어 제 마음대로 모여서 마십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구궁(舊宮)을 수리하는 것일 뿐이니, 위예(魏叡)가 영작(營作)한 유례와는 다르다.하였다. 이극기가 말하기를, “경복궁은 근래에 오래 비워 두었으므로, 위에는 <비가>새고 아래에는 습기가 차서 수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위예와 같겠습니다?” 하고, 전경 정회가 아뢰기를, “경회루는 돌기둥에 용을 새겨서 사치하고 웅장하기를 극진하게 하였더라도 이미 지난 일이므로 그만이겠으나 이제 경회루의 일이 끝났고, 그 나머지 수리는 본래 해사가 있으니 청컨데 수리 도감을 파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리는 도감이 아니면 잘 해낼 수 없다.하였다. 또 강독하다가 ‘위나라에서 육형을 회복하기로 의논하였으나 시행하지 못하였다.’는 대목에 이르러 이극기가 아뢰기를, “《대전속록》에 ‘3인이 떼를 지어 도둑질하면 우두머리가 된 자는 장물 많건 적건 논할 것 없이 일체 교형에 처한다.’하였으므로, 3인이 도둑질하였는데 1인이 잡히면 관리가 의례 우두머리가고 공초를 받아서 반드시 극형에 처합니다. 모든 사수(死囚)는 반드시 세 번 복심하여서 아뢰어 살릴 길을 찾는 법인데, 이들에게 어찌 억울한 일이 없겠습니까마는, 매를 때르는데 무엇인들 구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이 있겠습니까? 혹 원통함을 품고 숨지는 자가 있을까 두렵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법은 어느 때에 비롯되었는가?”하니 이극기가 말하기를, “세조 말년에 도둑이 더욱 치성해가는 것을 걱정하여 임시로 이 법을 설치한 것이고 만세에 전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도둑이 조금 그쳤으니 폐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께서 세운 법을 갑자기 폐지할 수는 없으니, 널리 의논하여 아뢰라.”하였다. 이맹현이 말하기를, “전라도는 인심이 각박하고 악하여 도둑이 무리져서 일어나고 아랫사람이 웃사람을 능멸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풍속은 백년 동안 교화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으므로 임금으로서는 마땅히 염려해야 하니 무릇 강상에 관계되는 죄를 범하는 일이 있으면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말고 이런 풍속을 엄하게 징계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라도는 옛 백제의 땅인데 백성들이 견훤이 남긴 풍습을 이제껏 모두 고치지 못하였으므로 그 풍습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하니 이극기가 말하기를, “견훤 이후로 고려 5백년을 지내고 조선조가 되어서도 거의 1백년이 되었으나 남은 풍속이 아직 없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다 완악하니 명심하고 교화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원전】9집 2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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