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삼부경 - 무량수경의 이해
2014. 7. 10. 09:44ㆍ경전 이야기
정토삼부경 - 무량수경의 이해
1. 무량수경
<무량수경>은 <관무량수경>, <아미타경>과 더불어 이른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으로 불리는 정토교의 중요한 경전이다. 이 경은 줄여서 그냥 '대경(大經)' 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같은 정토삼부경 가운데 <아미타경>이 작은 분량의 경전인 까닭에 붙여진 '소경(小經)'이라는 명칭에 비교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의 정토삼부경인 <관무량수경>은 줄여서 그냥 '관경(觀經)'이라고 부르고 있다.
<무량수경>이라는 경전이 어떻게 해서 대승경전으로서 성립됐는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여러가지 의견이 다르다. 다만 이 경전은 비교적 대승불교 초기에 성립된 경전의 하나라는 것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초기대승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반야경>을 꼽는다. 그후 <법화경><무량수경><화엄경>등의 경전들이 찬술(편찬)되었다고 본다. 이 경들은 어느 것이고 원형이 있고 그 원형을 여러가지로 손을 보아 수많은 교정본이 생기고 그것이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경전이라 해도 보다 옛것이 있고 새로운 것이 있다. <반야심경>이라 해도 널리 알려진 <반야경>처럼 짧은 것이 있는가 하면 <대반야경>처럼 긴 것도 있다. 그러므로 경전에는 어떤 경전도 원형 부분에 증광(增廣)과 부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무량수경> 역시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처음에는 비교적 원형이라 생각되는 짧은 것이 있을 것이지만 여러 사람에 의해 교정이 이루어지고 또 그것이 전해지다가 보니까 어떤 부분은 옛부분 그대로이고 어떤 부분은 첨가된 것임을 짐작케 하는 부분들이 있다.
<대무량수경>의 번역
중국에서 무량수경이 번역된 것은 기원 252년 조위(曹魏)시대에 강승개(康僧鎧)라는 사람에 의해서다. 그것을 이것을 위역(魏譯)의 <대경(大經)> 또는 위역의 <무량수경>이라 한다.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이 경을 번역한 강승개라는 사람은 강(康)이란 성씨에 알 수 있듯이 중앙아시아의 강거국(康居國) 출신이다. 강거국은 지금의 사마르칸트 지방에 있던 작은 나라였다. 이 사마르칸트 출신의 승려인 강승개가 중국으로 와서 낙양의 백마사에 머물면서 <무량수경>을 번역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유의해서 볼 것은 강승개의 출신 지역인 사마르칸트가 있는 중앙아시아와 중국불교와의 관계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이곳을 여행하고 있고 또한 이 중앙 아시아는 옛날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실크로드(비단길)로 연결돼 있다. 다시 말해 인도와 중국의 사이에 중앙아시아가 있고 그곳에 조그만 나라들이 산재해 있었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는 데는 이 중앙아시아를 경유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인도의 불교는 중앙아시아 사람들에 의해 신앙되어 오다가 그 중앙아시아의 불교가 다시 중국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중앙아시아는 역사적으로 흥망성쇄를 거듭했다.
최근 들어 중앙아시아의 불교신앙의 형태가 차츰 밝혀지면서 중국불교의 내용도 좀더 분명해지고 있다. 즉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직접 전해진 것이 아니라 중앙 아시아를 경유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 번역된 경의 기초가 된 것 즉 모든 텍스트는 그것이 범어 원문으로 씌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범어 원전은 먼저 중앙 아시아 발음으로 고쳐졌고 그것이 다시 중국으로 전해져 번역되었다고 보고 있다.
한역불전이 유일한 근거
중국은 범본(梵本. 산스크리트어)으로 되어 있는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면 그 원전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내버리는 것이었다. 자기들이 번역한 한역불전이 가장 좋은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강승개 이전에 이미 범어로 된 <무량수경>이 들어와 번역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몇차례 <무량수경>이 번역되었다. 범어본 텍스트는 어떤 것이었는지 하는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최근에 네팔 등지에서 <무량수경>을 비롯한 여러 대승경전의 범어본들이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범어본 원전이라고 해도 증광되고 부가되어 여러가지로 필사(筆寫)되어 전해서 온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부처님의 출세본회(出世本懷)
어느 대승경전에서도 부처님의 출세본회(出世本懷)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부처님이 이 세상 즉 인간세계에 출현하신 본래의 뜻이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그 경전이 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량수경>의 경우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의 세계를 밝히고자 한 것이 출세본회라고 이해하면 된다.
2. 무량수경의 종류와 성립시기
12종의 무량수경
중국에서 번역된 <무량수경>은 모두 12종류가 있다. 이 가운데 7종의 <무량수경>은 없어지고 5종류만 남아 있다. 이를 가르켜 5존7결12역이라고 한다.
가장 최초로 번역된 것은 지루가참(支樓迦懺)이라는 사람이 후한(後漢) 시대에 번역한 <평등각경(平等覺經)>이라는 것이다. 후한 시대라면 대체로 2세기의 후반에 해당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지겸(支謙)이라는 사람이 3세기 초에 또 한번 번역을 했다. 이것은 <대아미타경>이라고 약칭하는데 오(吳)나라 시대에 번역 되었기 때문에 '오역(吳譯)'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세번째가 위에서 설명한 강승개가 번역한 위역이다. 그리고 네번째가 보리유지(菩리流支)라는 사람이 당(唐)나라 시대에 번역한 '당역(唐譯)'인데 이것은 <무량수여래회(無量壽如來會)>라 부른다. 다섯번째는 법현(法賢)이라는 사람이 10세기 말에 번역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송역(宋譯)'이라고 한다.
이것이 현재 남아 있는 5종류의 <무량수경>인데 내용은 각각 다르다. 아마도 번역에 참조했던 범어본이나 텍스타가 서로 틀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밖에 네팔이나 티벳등지에 발견된 범어본이나 번역본들이 있으며 불교학계에서 계속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4원계와 48원계
<무량수경>은 아미타불이 법장보살(法藏菩薩) 때에 본원(本願)을 세우고 그 본원대로 수행을 해서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법장보살이 아미타불이라는 부처님이 되는 동시에 자기가 아미타불의 국토(서방정토)를 건설하고 모든 중생을 왕생 시킨다는 목적을 완성한 그 자초지종으로 <무량수경>은 찬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히 본원을 세웠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불교학자들은 이 본원의 숫자에 따라 여러 종류의 무량수경에 대해서 어느것이 먼저 찬술 되었는지에 대한 성립순서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즉 본원의 숫자가 적으면 오래 전의 것이고 본원의 숫자가 점점 늘어가면 그것은 후대에 부가된 것으로 생각한다.
지루가참의 <평등각경>과 지겸의 <대아미타경>은 본원이 모두 24개 밖에 안된다. 이 24원경에서는 아미타불이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삶의 행적을 보인다. 즉 이 세상에 출현해서 돌아가시게 된다. 그리고 아사세왕에게 성불의 수기를 주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이에 반해 강승개가 번역한 위역본이나 보리유지가 번역한 당역본은 48원계통에 속한다. 그리고 마지막의 송역본은 36원이다. 그래서 <무량수경>은 24원 계통과 48원계통의 두가지로 대별될 수 있다.
3. 무량수경의 개요
아난존자의 등장
무량수경에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 아난이 등장한다. 아난존자가 어느날 부처님의 모습을 뵈오니 어느 때 보다도 밝은 표정으로 웃고 계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도대체 어떤 까닭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실은 이제부터 나는 아미타불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 바로 그것이 이 세상에 태어난 나의 최대의 소원인 것이다'라고 대답을 했다.
법장보살의 출현
이렇게 해서 <무량수경>은 아미타불의 출현과 중생구제의 임무에 대해서 설법이 이어진다. 이에 의하면 먼저 법장보살이 세상에 나타나서 53분의 부처님에게 차례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53분의 부처님의 가르침이 끝났을 때 세자재왕불이라는 이름의 부처님을 만났다.
이때 수행자 법장은 세자재왕불 곁으로 가서 '이제부터 저는 이런 이러한 서원을 세우고 수행하고 싶습니다.'라고 맹세를 한다. 이것을 48의 본원이라고 한다. 사람은 저렇게 하고 싶다 이렇게 하고 싶다고 할 때에는 자신의 소원을 말한다. 이 것을 본원(本願)이라고도 하고 숙원(宿願)이라고도 한다.
이때 법장보살이 세운 서원은 48가지인데 내용을 요약해 보면 스스로 아미타불이라는 부처님이 되는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세운 극락세계에 왕생시켜 부처님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아미타의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것이 서원의 핵심이다. 이 국토를 서방의 극락국토(정토)라 한다.
'극락' 이라는 것은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아미타 부처님이 사는 불국토의 명칭이다. 아미타불의 국토는 즐거움으로 넘쳐 있지만 동시에 청정(淸淨)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청정의 불국토 줄여서 정토(淨土)라고 한다.
법장보살에서 아미타불로
법장보살은 스스로 구도자로서의 본원을 세우고 수행했던 결과 아미타불이라는 부처님이 된다. 그리고 사방의 정토를 건설한다. 또한 그 정토는 다른 어떤 부처님의 그것보다도 훌륭한 시설이 되어 있고 정토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제하려고 하는 정토이다. 그러므로 법장보살의 본원에는 구도자로서의 법장보살이 부처가 된다고 하는 자리(自利)의 측면과 남들을 구제한다는 이타(利他)의 두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보살(구도자)이란 자리와 이타의 두 개의 완성을 목표로 나아가는 존재다. 중국의 담란(曇鸞)은 <정토론주(淨土論註)>라는 책 속에 '자리(自利)'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이타(利他)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자기가 분명하지 않은데 어찌 남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리의 완성은 동시에 이타의 완성이 된다는 뜻이다.
나 자신의 사업이 번창한다는 것은 동시에 남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즉 자리와 이타는 동시에 완성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자리(自利)다.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적인 자리(自利)로 타락해 버리게 된다.
법장보살은 이러한 48가지의 본원을 세자재왕불 앞에서 맹세하고 또 명상을 했다. 그리고 다시 5겁 동안이라는 무한한 세월을 걸고 본원성취를 위한 수행에 매진했다. 그 결과 법장 보살은 아미타불이라는 부처님이 되고 정토가 건립되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아미타불의 본원에 근거해서 정토에 왕생하고 부처님이 될 수 있는 몸으로 결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아미타불이 자신의 소원이 언제 어디까지라도 미칠 수 있도록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정토종의 이해히고 믿음이다.
정토의 양상
그러면 법장보살이 소원대로 실현한 정토라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그 모습은 <무량수경>의 상권(上券) 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사람이 닦아야 하는 실천수행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하권(下券)에 설명되고 있다.
여기서 실천수행이란 한마디로 '염불왕생'에 대한 것이다. 아미타불의 이름(나무아미타불의 명호)을 믿고 부름으로써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본래 부처님의 명호를 부름으로써 왕생케 하려는 본원에서 맹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서약대로 우리가 믿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정토에 왕생하기 위하서는 여러가지 선정관법(禪定觀法)을 닦고 보살도에서 설법하는 여러가지 수행(六波羅蜜.육바라밀)을 닦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그러한 수행으을 아미타불이 모두 우리를 위해서 완성하고 우리들 입으로 부르는 염불로서 회향시켜 준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왕생의 행(行)이라는 것은 이미 회향된 염불의 내력을 믿고 부르는 것이면 된다는 가르침이다.
삼독(三毒). 오악(五惡)
정토에 왕생한 사람들은 어떠한 이익을 얻느냐 하는 것이 설명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삼독.오악이 설명된다. 삼독이라는 것은 탐욕과 분노 그리고 우치의 번뇌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인간생활은 모두 이 탐욕.분노.우치의 번뇌에 기인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치(愚痴)란 무지와 같은 말이며 이는 진리, 진실을 모르는 것으로 지적(知的)번뇌에 속하며 탐욕과 분노 두가지는 정적(情的)번뇌에 속한다.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아침에 일어나서 잠잘 때까지 만들어 간다. 그리고 그것을 원인으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을 만들어 간다.
오악이란 직접 경전에는 항목이 나와 있지 않으나 중국의 인륜덕목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에 배반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또한 정토종에서는 오계를 위반한 것을 오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경전은 경박한 인간의 모습을 반성하고 즉시 아미타불의 가르침에 귀의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오악이라는 것은 한역의 24원 계통에는 이것이 있지만 범어본에는 이 부분이 없다. 따라서 불교학자들은 삼독.오악 부분은 원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중국에서 멋대로 부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경은 마지막 결론으로 이 경전을 미륵보살에게 부촉할 것을 말한다. 이어서 설법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진리의 눈(法眼)을 얻고 깨달음의 경지에 달하고 또 지금부터 정토에 왕생코자하는 생각을 일으켰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다른 경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른바 유통분(流通分)에 해당하는 것으로 모든 대승경전이 가지고 있는 일정한 형식이다.
4, 아미타불의 48원
48원과 극락정토
위역(魏譯)의 대경에서는 48가지의 본원이 나타나고 있다. 이 본원의 숫자는 중생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좀더 많아도 좋을 것이다. 중생을 구제할 목적이라면 본원은 많을수록 나쁠 것이 없다. 48본원에 대해서는 별도로 글을 올려 놓았으니 참조하면 좋겠다.
극락정토의 성격
48원의 성격을 대충 다섯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첫번째로 극락정토의 국토의 성격을 살펴보자.
이것은 48원 가운데 제1, 제2, 제16에 나타나 있다. 거기에서 서방 극락정토는 삼악도가 없는 세계(무삼악도)라고 한다. 무삼악도란 지옥도.아귀도.축생도가 없는 세계를 말한다. 다시 말해 이 극락세계는 지옥이라든가 아귀라든가 축생이라든가 하는 고통이 없는 세계로 깨달음의 세계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아미타불의 성격
둘째는 아미타불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광명무량 수명무량의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광명은 지혜를 나타낸다. 그리고 수명은 자비를 나타낸다. 광명은 공간, 수명은 시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은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의 존재자라는 것이다. 즉 시(時). 공(空)의 한정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미타불은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자비를 구비한 부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이름들은 이미 본원 안에서 서약되고 있는데 제12원과 제13원이 그것에 해당된다. 아미타불은 이 본원이 성취돼서 아미타불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정토의 법칙
셋째는 정토의 장엄이다. 즉 어떠한 법칙으로 국토가 성립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전은 나무 사이에 부는 바람 흐르는 시냇물 그런 것들 모두가 진리의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석과 향기로 가득차 있는 곳이 극락이다.
정토에 왕생한 사람의 성격
네번째는 정토에 태어난 사람의 성격에 관해서다. 정토에 태어난 사람은 부처님의 32가지 신체적 특징을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미타불과 마찬가지로 수명도 무한이고 한량없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일에도 무집착이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나라에 가서 부처님들을 공양할 수가 있다. 또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하면 빨래도 할 필요가 없고 바느질할 필요도 없다. 이것을 서원한 항목이 제38원이다. 그리고 또 인간 구제를 위하여 목숨을 연장도 하고 단축할 수도 있다고 한다.
정토에 왕생코져 하는 사람의 성격
다섯번째는 이제부터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사람의 성격에 관해서다. 아미타불의 광명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심신이 유연해져서 몸도 마음도 온화해진다. 그들은 또 언제나 부처님 이름을 듣는다. 즉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 정토에 태어나고자 원하는 사람은 불퇴전의 지위를 얻는다. 불퇴전이라는 것은 신심을 얻은 사람을 말한다. 그는 부처님이 된다고 결정된 지위에 앉아 있는 사람을 말한다.그래서 그는 죽은 후 반드시 정토에 왕생해서 부처님이 될 수가 있다. 부처님의 지위에서 물러나지 않는 지위는 살아 있을 때 부터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현생불퇴(現生不退)라고도 한다.
제18원 = 왕본원
48가지의 본원중에서도 제18번째의 본원이 옛날부터 중요시되어 왔다. 이것은 사람들이 아미타불을 믿는 그 명호를 부르기만 해도 정토에 왕생하여 부처님이 된다는 것을 맹세한 것을 말한다. 그래서 본원 중에서도 왕이라고 해서 왕본원(王本願)이라고도 한다.
정토교에서는 이 제18원을 중심으로 제11원, 제12원, 제13원을 특별히 중요시하여 '진실의 원'이라고 하고 또 제19원, 제20원을 '방편의 원'이라 하여 이 다섯을 '5원'이라 하며 주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정토왕생을 이상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으로 보고 그 정토에서 성불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여기서 도(道)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을 하고자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도는 반드시 모든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 걸어야 할 길, 걸어가면 반드시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의미한다. 이런 길의 역활을 무자로 나타낸 것이 도(道)이다. 그래서 불도(佛道)라는 것은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인 길이 아니라 반드시 가지 않으면 안되는 길이다.
진실이라는 것
이처럼 정토교에서 도(道)란 사람이 걸어야 할 진실한 길 그 자체다. 여기서 진실이란 이를테면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것이다. 어머니의 사람은 가슴을 째서 꺼내 보일 수 없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반드시 실재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이 반드시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체득할 수 있는가. 진실이란 반드시 진실화의 작용을 갖는 것기 때문에 그런 작용, 형태, 방법을 통해서 진실 그것이 우리에게 파악되어 지는 것이다.
내일은 아이가 소풍날이까 어머니가 아들 머리맡에 평소에 좋아하는 과자등을 놓아둔다고 하자.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뜬 아이는 그것을 보고 '엄마, 너무 행복하고 또 엄마도 너무 사랑해'라고 외친다. 그 아이가 엄마를 좋아한 것은 머리맡에 놓인 과자를 보았기 때문이지만, 그것은 다시말하면 엄마의 진실이 작용해서 과자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그 과자를 봄으로써 즉 엄마의 진실화 작용에 접함으로써 어머니의 진실, 그 자체를 파악했던 것이다.
이런 진실화의 작용을 불교에서는 방편이라고 한다. 진실과 방편이라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며 진실이라고 하면 그 자체 진실한 작용 즉 형식과 방법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것을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진실이 갖는 역활을 언어로 나타낸 것이 정토의 법문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런 진실한 작용으로서의 형식, 방법을 정토교에서는 본원력(本願力) 내지는 본원(本願)으로 나타내고 있다. 앞서 법장보살이 본원을 세우고 스스로 부처님이 되는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극락정토에 왕생케 하고 자기와 같은 부처님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역활, 이것이 다름아닌 진실이다.
방편 = 진실
방편이란 upaya (우파야)라는 범어의 번역이다. upa(우파)~ 라는 말은 '곁에 간다. 곁으로 다가간다'라는 뜻이다. 다시말해서 곁에 다가가서 진실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본래의 자기로서의 활동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진실이란 사티야(satya) 를 번역한 말이다. 그 원어의 뜻은 본래 자신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흔히들 '꽃은 다홍 버들은 초록'이라고 하는 것은 정녕 진실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붉은 꽃은 붉은 것이고 버들은 청색이다. 만일 붉은 꽃이 녹색이라든가 버들잎이 붉다고 한다면 이상하다. 그러니까 버들잎은 청색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실이다.
그러면 앞에서 말했듯이 '삼독.오욕'에 현혹되어 있는 삶이라고 스스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지옥으로 가게 돼 있는 번뇌가 가득찬 범부'라는 반성을 하게 된다. 이것이 진실이다. 이러한 자기 반성이 있을 때 우리는 아미타부처님을 찾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길을 걷게 된다. 이 부처님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부처님의 빛을 받고 걸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 다음 블로그 <붓다의 옛길> 실론섬 님의 글 중에서 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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