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도 싱그러운 오월 어느 날, 문경의 7대 구곡원림 중에서 마지막 구곡원림 답사 길로 청대구곡(淸臺九曲)을 찾아 나선다. 청대구곡은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이 경영한 구곡원림으로 문경시 산양면과 산북면, 예천군 용궁면을 걸친 금천(錦川)의 흐름을 따라 설정된 구곡이다. 다른 구곡들이 물을 거슬러 오르며 설정된데 비하여 청대구곡은 물굽이를 따라 설정된 것이 특징이다. 오늘 청대구곡 답사 길에는 마침 청대의 14대 종부(宗婦)인 김영순 회원도 함께 하게 되어 더욱 깊은 답사의 감회를 안을 수 있게 되었다. 권상일은 석문구곡(石門九曲)을 경영한 근품재(近品齋) 채헌(蔡瀗 1715~1795)의 스승으로,본관은 안동,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라 하였으며, 산북면 서중리에서 태어났다. 1710년(숙종36)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한 이래 대사간, 홍문관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했으며 시호는 희정(僖靖)으로 근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청대구곡 답사의 첫 걸음으로 회원들은 모두 제1곡 우암(愚巖)에 집결하였다. 우암으로는 익숙한 걸음이다. 석문구곡 제3곡 우암대며, 산양구곡 제5곡 암대가 바로 이곳이라 이미 발자국을 찍은 곳이기 때문이다. 산양면 서중리 금천 가에 ‘우암’이라는 바위가 있고 그 옆에 우암정이 서있다. 채헌의 시대에 와서 ‘우암(愚巖)’을 ‘우암(友巖)’으로 고치고,그 옆 바위에 우암정(友巖亭)을 지은 것이다. ‘일곡이라 우암이 안아서 열지 않으니 바위 앞에 흐르는 물은 절로 돌아가네(一曲愚巖擁不開 巖前流水自縈回)’라 하였으니, 청대의 시절에는 우뚝 솟은 우암과 맑은 금천 물이 어우러져 풍치 그윽한 정경을 이루었을 듯하다. 그러나 지금 우암 앞에는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인가가 앉아 있고, 금천은 제방 밖으로 밀려나 바위 앞은 경작지가 되어 있어 더께 앉은 우암정만 호젓하게 서 있고, 우암은 ‘友巖蔡公藏修之地’란 각자만 다소곳이 껴안고 있다. 이만유 회장은 그늘과 앉을 자리가 있는 제2곡 벽정(碧亭)으로 얼른 가자고 한다. 현리교를 건너 물길 따라 잠시 달려 이른 벽정은 채씨(蔡氏) 집안 정자인 경체정(景棣亭)이 서있는 곳이다. 이 또한 산양구곡 제4곡 형제암(兄弟巖)이 자리한 곳이 아니던가. 형제암은 물속에 들었지만, 벽정은 부벽(浮碧)이라 이르는 바위를 안고 도는 물굽이를 가리키니, 예 같지는 않을지언정 옛 사람들이 즐기던 흔적은 남아 있는 셈이다. 이 물굽이와 바위를 멀리서 보면 푸른 정자처럼 보여 ‘벽정’이라 했던가. ‘이곡이라 산이 높고 푸름 들려 하는데, 고인의 띠집이 층암의 언덕에 기대어 있네(二曲山高翠欲浮 故人茅棟倚層丘)’라 한 걸 보면 청대가 놀던 때에는 이 바위 곁에 옛 사람의 모옥(茅屋)이 있었던 모양이다. 경체정 그늘에 앉은 회원들을 향해 산양 지키미 이만유 회장이 청대구곡에 대한 안내를 열심히 풀어내고 있다. 이 마을에 사는 이현자 회원이 지난달 산양구곡 답사 때에 이어 또 고맙게도 과일이며 음료수를 간식으로 준비해 와 답사 걸음에 힘을 더욱 보태어주었다. 간식을 함께 들고 있는 중에 이 회장이 문득 손을 들어 강 건너 주암 뒷산을 가리키며 제3곡 죽림(竹林)이 저기라 한다. 석문구곡의 제2곡이기도 한 주암의 뒷산에는 도천사 옛터가 있는데, 그 굽이를 죽림으로 추정한다는 것이다.청대는 도천사를 죽림사라고도 하였으니, 그 시절에는 이 산이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금천에 비친 그 대숲을 보며 ‘원하노니 영원히 폐해지지 않아서 앞에 있는 맑은 시내처럼 길이길이 흐르기를(願言永世行無廢 前有淸川滾滾長)’이라며 영원한 세월을 기렸지만, 지금은 죽림사도 죽림도 자취가 흐리기만 하니 세월의 무상을 역력히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벽정에서 물길을 따라 1km 정도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강 건너의 제4곡 가암(佳巖)은 차창으로 곁눈질만 하며 스쳐간다. 가암은 산양구곡의 제3곡 창병(蒼屛)과도 같아 이미 살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청대는 이를 두고 ‘사곡이라 양양히 고기가 연못에서 뛰고 동쪽으로 보니 창석이 평전에 우뚝 솟았네(四曲洋洋魚躍淵 東看蒼石矗平田)’라 노래하였지만, 세월이 예전 같지 않아 지금은 건축물 폐기장 같은 거친 시설물을 곁에 두고 거저 냇가에 우거진 푸른 숲으로만 서 있을 뿐이다. 제4곡에서 400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자리한 제5곡 청대도 스쳐 지나간다. 이 또한 석문구곡의 제1곡 농청대며 산양구곡의 제2곡 존도봉과 같은 곳이라 이미 발걸음을 한 터이기 때문이다. 청대 권상일이 지금은 소실되고 없는 이곳 존도서와(尊道書窩)에 앉아 바위 앞을 흐르는 금천을 내려다보면서 ‘움집 안에 백발노인 한가히 일이 없어 성현의 남긴 글을 책상 위에 펼치네(窩中白髮閑無事 賢聖遺編案上開)’라 하며 구도에 잠심했던 곳이다. 주자의 무이구곡 제5곡 무이정사에 있는 바위 은병암에 존도서와가 있는‘청대’를 견주면서, 그것을 스스로의 호로 삼기도 했던 옛일을 상기해 보며 제6곡을 향한다. 청대에서 물길을 따라 1km 쯤 내려와 산양면 연소리 금양교가 있고, 그 옆 좁은 길로 들어 왼쪽으로 보이는 바위산이 제6곡 구잔(溝棧)이다. 지금의 지명에 이런 이름이 없는 걸 보면 청대가 붙인 이름인 듯하다. 청대는 여기를 두고 ‘육곡이라 산비탈에 잔도가 위태하고 돌을 안은 긴 봇도랑 천천히 흘러가네(六曲山阿棧路危 長溝包石去遲遲)’라 하였으니, 바위 아래 물이 흐르고 바위와 길을 연결하는 잔도(棧道)가 있어 운치 있는 풍경을 이루고 있었던 것 같다.그러나 지금은 바위 아래 둑이 쌓이고 둑 위로 도로가 닦이면서 바위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어 그 바위도, 그 물길도 옛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세월의 무심한 흐름과 시대의 매몰찬 격변을 안타까워하며 다시 물길을 따라 허전한 걸음을 옮겨 놓는다. 물길의 흐름도 바로 따라 내릴 수 없도록 굽이지게 나있는 길을 돌고 돌아 비닐하우스가 진을 치고 있는 어느 밭머리에 차를 세우고 냇가를 찾아간다. 산양면 송죽리의 제7곡 관암(觀巖)을 보러 가는 길이다. 관암은 송죽리의 황사들판을 흘러온 물과 금천이 만나는 지점의 오른쪽에 솟아있는 바위산으로 물을 사이에 두고 바라볼 수 있다. ‘칠곡이라 구불구불 두 물이 가로질러 남으로 달리고 서로 돌며 다투는 듯하네(七曲逶迤二水橫 南奔西轉執如爭)’라 하여 청대의 시절에는 그 바위가 물에 비쳐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어, 물 건너로 그 아름다운 바위를 바라볼 수 있어 ‘관암’이라 한 것 같으나,흐르는 세월 속에서 바위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초여름의 푸른 수풀만 무성할 뿐이다. 제7곡 관암도 상상으로만 그 시절의 운치를 새겨볼 수 있음을 아쉬워하며 제8곡으로 걸음을 돌린다. 제7곡 관암에서 1km 정도를 내려 제8곡 벌암(筏巖)으로 가는 사이에 문경시 산양면과 예천군 용궁면의 경계를 넘다가 감천면 천향리의 석송령(石松靈)과 함께 예천의 2대 담세목(擔稅木)이라는 금남리의 황목근(黃木根)을 만난다. 수령 500년이 넘는 노거수 그늘에 서서 영기(靈氣)를 쐬고 벌암을 찾아 나아간다. 벌암은 금남리 용두산이 시작되는 바위가 금천의 물과 함께 어울려 정취 있는 풍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름을 ‘벌암’이라 한 것을 보면 뗏목 형상을 한 바위 같으나 그것도 세월 속에서 이지러졌는지 그런 모양을 찾아볼 수가 없다. 바위에 ‘筏巖’이라는 전서가 새겨져 있다 하나 이것도 또한 찾을 수가 없고, 물도 예 같지 않아 짙게 자란 수초 사이로 어쭙잖게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청대는 이곳을 두고 ‘팔곡이라 창연히 가파른 벽 기이하니 주옹의 풍영대가 이곳에 있네(八曲蒼然峭璧奇 周翁風詠在於斯)’라 하여 송나라의 학자 주돈이가 즐겨 찾던 풍영대에 비겨 청대구곡의 극처에 가까이 온 감회를 풀어내고 있다. 당시의 풍경을 상상으로 음미하며 극처를 향하여 발길을 옮긴다. 차를 타고 달리다 보니 무이교(武夷橋)라는 다리를 건너 무이리(武夷里)라는 마을에 이른다. 이 이름들은 물론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산(武夷山)에서 가져왔을 것이겠고, 청대는 그 이름에 뜻을 의지하여 청대구곡의 극처로 삼았을 것이겠다. 금천의 물이 고여 작은 호수를 이루니, 이를 제9곡 소호(蘇湖)라 하고 그 물가 언덕에 있는 동네를 무이촌이라 했다. ‘구곡이 장차 다하고 산 또한 다하니 무이촌이 언덕 가 동쪽에 자리하네(九曲將終山亦窮 武夷村在岸邊東)’라 노래했다. 무이촌에는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귀국한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 ?~1421)의 유덕을 기려 건립한 청원정(淸遠亭)과 소천서원(蘇川書院)이 자리하고 있고, 정자 뒤편 바위에는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이 새긴 ‘淸遠亭’ 세 글자가 오늘날에도 또렷하다. 퇴계 선생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즐겨 찾았던 이곳을 청대는 청대구곡의 극처로 삼아 구곡 유람을 감회 깊게 마치고 있다. 소호의 물은 옛 물이 아니련만 바위는 옛 것 그대로인데 그 바위를 의지하여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소호 가에 호젓이 핀 찔레꽃을 보면서, 지난날의 선비들 같으면 그윽한 시 한 수로 정감을 다했을 듯하나, 오늘의 구곡원림 답사객들은 답사 길의 정취를 노래로 마무리 지으려는 듯,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하며 가락을 흘려내니, 기 다렸다는 듯 여럿이서 목청을 함께 모은다. 발길을 추스르며 시각을 살피니 벌써 점심때를 넘어서 있고 걸음을 떼는 발도 묵직해졌다. 요기할 곳을 찾아가면서 오늘의 답사 길을 돌아본다. 지난번의 산양구곡이 그랬듯이 오늘의 청대구곡 답사도 관찰력보다는 상상력이 많이도 필요한 걸음이었다. 답사 길이 아니라 예사로이 지나면, 평범한 냇물이요, 범상한 동산에 지나지 않을 것을 청대 당시의 정감을 거슬러 그윽한 옛일을 상기하자니, 고심으로 상상력을 끌어내어 살필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좀 더 흐른 뒤에는 어떻게 될까. 누가 구곡(九曲)의 사연을 전해주고, 그 원림(園林)에 서린 정취를 일러줄까? 오늘도, 있고도 없는, 없고도 있는 청대구곡을 답사하면서 ‘없는 것이 없는’ 인터넷의 바다에서나마 ‘있는’ 구곡이 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예천 용궁에서 소문난 어느 순대국밥 집에 들어 점심을 맛있게 먹으면서 답사기 쓸 일을 궁리한다. 어떻게 청대구곡을 희미한 자취로나마 살아있게 할 수 있을까?♣(2014.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