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7. 22. 03:51ㆍ여행 이야기
Ⅲ. 문경(聞慶)의 구곡원림과 구곡시가 구곡원림(九曲園林)은 반드시 아름다운 경치가 형성된 계곡(溪谷)에 설정된다. 구곡원림을 살펴보면 먼저 빼어난 골짜기에 자리한다. 바위와 숲 등에 의하여 형성된 아름다운 계곡에 구곡(九曲)이 설정되며 그 지점은 굽이지는 곳이다. 이러한 골짜기는 가운데로 맑은 시내가 흐르는데 원두(源頭)에서 흘러오는 맑은 물은 각 굽이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유자(遊者)는 골짜기를 걸어서 오르며 유람하는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거슬러 오르며 경치를 완상한다. 굽이진 골짜기에 형성된 승경(勝景)을 흐르는 시내 위에 띄운 배에서 바라보며 완상한다. 1. 선유구곡(仙遊九曲) 원림과 선유구곡시 선유구곡(仙遊九曲) 원림(園林)은 문경시(聞慶市) 가은읍(加恩邑)1)가은읍(加恩邑) : 신라 전기에는 가해현(加害縣)으로 불리어졌고 통일신라 경덕왕(750년경) 때에는 고령군(古寧郡; 咸昌)에 예속되었고 고려 현종(1029년경) 때에는 가은현(加恩懸)이라 개칭하여 상주군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34대 공양왕 2년(1390년)에 문경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909년에는 가동(加東), 가북(加北), 가현(加縣), 가남(加南), 가서(加西) 등 5개 면이 가동, 가북, 가현으로 폐합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위의 3개 면을 통합하여 가은면이라 호칭하고 소재지는 가은면 왕릉리(旺陵里)에 두었다. 1973년 문경읍과 함께 가은읍으로 승격되면서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猪音里)를 편입하여 오늘에 이른다. 완장리(完章里)에 자리한다. 완장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져있고 계곡이 수려하며 넓은 반석과 크고 작은 폭포가 여러 곳에 있어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이다. 마을 개척의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삼국시대 말기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마을 위의 선유동(仙遊洞)에서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개척된 곳이라 여겨진다. 완장의 옛 지명은 낭풍원(閬風苑)이다.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2)은 “선유동에서 흘러내린 물이 낭풍원 앞을 지나 도태에 이르러 양산천(陽山川)과 합류한다” 하였으며, “청화산(靑華山) 동북에 있는 선유산 위가 취국(聚局)이 되어 꼭대기는 평평하고 골짜기는 매우 길다. 그 위에는 칠성대와 호소굴이 있어 옛날 진나라 사람 최홍과 도사 남궁두가 이곳에서 수련하였다”고 하며 그의 저서에 이르기를 “수도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산에서 편안히 살 만하다”고하였다. 선유산(仙遊山)은 청화산의 동북쪽에 있다. 산정은 평탄하고 계곡이 매우 길다. 위에 칠성대(七星臺), 호소굴(虎巢窟) (진인(眞人) 최도(崔도)와 도사 남궁두(南宮斗)가 도를 수련하던 곳이다)있다. 시냇물이 흘러내려가 낭풍원(閬風苑)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대탄(大灘)으로 들어간다.3) 또한 조선 중엽의 유명한 예학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4)는 이곳 산수의 기묘함과 수려함, 맑은 물과 아름다운 암반의 절경에 감탄하여 이르기를 “가이완장운(可以浣腸云)”이라 하였는데 이 사실에 연유하여 이 마을을 완장(浣腸)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진다. 전해오는 말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지사(地師)로 종군했던 두사충(杜士沖)이 벽제관 싸움에서 패전을 당한 일로 이여송에 의해 참수되게 되었는데 이 때에 약포(藥圃) 정탁(鄭琢)5)이 이여송을 설득하여 죽음을 맞이한 두사충의 목숨을 구해준 일이 있었다. 두사충이 이 일에 감사하여 정탁에게 “내가 대감에게 은공을 갚아야 하니 대감의 고향 근처에 명당을 잡아드리겠습니다.” 하고 동행하여 정탁의 고향인 예천으로 향하였다. 가는 길에 충청북도 불산리재를 넘어 경상북도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골짜기가 탁 트이는 곳을 만났는데 그 곳이 바로 완장리였다. 두사충이 이곳을 바라보며 ‘창자를 시원하게 한다’ 하며 그 감회를 말한 것에 유래하여 완장(浣腸)이 되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완장(完章)이 되고, 완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의 지명인 완장(完章)은 그 발음만 동일한 뿐이며 특별한 사연이나 의미는 없다. 자연부락으로는 완재이, 선유동(仙遊洞), 관평(官坪), 벌바우(蜂岩), 감남비리 등이 있다. 선생은 고종 병자년(1876) 여름 8월 11일에 줄포리(茁浦里) 세제(世第)에서 태어났다. 성장함에 인품이 엄숙하고 정연하며 품은 뜻이 컸으며 넓은 이마와 우뚝한 콧대와 수염이 신의 모습 같았다. 이에 앞서 정씨의 집안은 명유(名儒)와 석장(碩匠)이 대대로 결핍되지 않았으니 우담(愚潭) 선생 시한(時翰) 같은 이는 도학이 순정하고 지극하여 실로 도산(陶山)의 적전(嫡傳)이 되었고 해좌(海左)의 범조(範祖)는 문장과 경술로 이름이 났다. 다산(茶山) 약용(若鏞)에 이르러 한나라와 송나라를 겸하여 익혀서 이 학문을 집성하니 선생이 가전(家傳)을 물려받은 것이 이미 작지 않았다. 先生 以高宗丙子夏曆八月十一日生于 茁之世第及長矣 器宇峻整 秉志磊落 廣顙隆準鬚髥若神 先是 丁氏一門 名儒碩匠代不乏人 若愚潭先生時翰道學醇至 實爲陶山之嫡傳 而海左範祖 以文章經術鳴 至茶山若鏞 兼治漢宋 集成斯學 則先生之所禪受於家傳者 旣無孱矣 을미년(1895)에 비로소 동정(東亭) 선생의 문하에 올랐는데 나이가 겨우 20살인데도 동정 선생이 이미 그 인물됨을 자랑하였다. 논어발문답안(論語發問答案) 이 출간됨에 이르러 경전에 담긴 뜻을 깊이 안다는 것으로 더욱 칭찬을 받았으나 지난 해 경인년(1890) 난리에 다 잃어버려 지금은 다만 「존학(存學)」과 「위정(爲政)」의 몇 조목만 문집 가운데 실려 있다. 무신년(1908)에 동정 선생이 돌아가시자 어진 스승을 잃어 학업을 마칠 수 없다는 것으로 한을 삼아 동문의 여러 공들과 함께 남긴 글을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운도아선(雲陶雅選) 에 발문을 적은 후에 다시 행장을 서술하여 스승의 덕성을 칭송하고 사람들과 함께 성리설(性理說)을 토론할 때 일찍이 주리(主理)의 뜻에 정성을 들이지 않음이 없었다. 또한 동정 선생에게 교감을 받지 못한 것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에게 청하여 질의하였는데 예설(禮說)에 있어서 당시 영남의 유림은 병호(屛虎) 두 계열로 나뉘어 있었다. 乙未始登東亭先生之門年財二十而東亭已詡其爲瑋器及論語發問答案一編出尤以經義之邃見獎而盡逸於往歲庚寅之亂今只存學而爲政數條載在集中矣戊申東亭沒以失賢師未及卒業爲恨與同門諸公編摩遺書而刊之旣跋雲陶雅選復譔行狀以贊師懿而與人論性理之說未嘗不拳拳於主理之旨且以未勘於東亭者請質於俛宇郭氏鍾錫而禮說居多當時嶺儒分爲屛虎兩系 면우가 일찍이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을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호유(虎儒)로 지목하였는데 선생이 계암(鷄巖) 정돈섭(丁敦燮), 사주(西洲) 김사진(金思鎭)과 함께 동정(東亭)을 섬겼던 사람으로서 면우를 섬기니 식자들이 이를 옳다고 하였다. 면우가 집에 갇힌 후로부터 요동으로 피하고자하는지라 선생이 그 계획을 도왔으나 일이 마침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병진년(1916)에 이르러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와 서천(西川) 조정규(趙貞奎) 및 계암(鷄巖)과 서주(西洲)가 덕흥보(德興堡)에서 간청하여 면우와 함께 하려 하였다. 기미년(1919) 면우가 파리에 투서한 일로 남도의 감옥에 갇혔는데 선생도 동려(東黎) 김택진(金澤鎭)과 체포되니 대체로 서명한 일 때문이었다. 몇 달이 지나서 석방되니 마침내 서주(西洲)와 더불어 요동으로 갔다가 오래되어 돌아왔다. 이로부터 다시는 바깥을 나가지 않았고 검암(儉巖)의 선정(先亭)을 중수하고 수많은 장서를 책상 위에 놓고 빨리 읽었다. 동서의 손님과 벗들이 들르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글과 술, 바둑과 담화로 각각 그들을 기쁘게 하였다. 한 시대의 뛰어난 인재가 모여드니 가르침에 규약을 두었고 성취가 많으니 영화가 실로 문헌향(文獻鄕)이었다. 俛宇嘗師寒洲李氏震相故人目之以虎儒而先生與丁鷄巖敦燮金西洲思鎭以事東亭者事之識者韙之俛宇自杜屋後欲避地遼東而先生贊其猶然事竟不諧至丙辰李大溪承熙趙西川貞奎及鷄巖西洲營懇於德興堡要與之偕己未俛宇以投書巴里拘於南圄先生亦與金東黎澤鎭被逮蓋以署名故也數月乃釋遂與西洲作遼行久之而歸自是無復出境外重建其儉巖先亭藏書千軸對案劇讀東南賓朋之來過者殆無虛日文酒碁話各整其懽一時英髦坌集授之有術多有成就榮固文獻鄕也7) 외재집(畏齋集) 에는 선유구곡시 뿐만 아니라 외선유구곡시도 함께 실려 있다. 이 내선유구곡과 함께 외선유구곡은 1963년 이전까지 행정구역 상으로 문경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정태진은 이 두 선유구곡 원림을 시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인하여 내선유구곡은 문경시에 속하지만 외선유구곡은 충청북도 괴산군에 속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로 내선유구곡 원림을 읊은 구곡시를 중심으로 선유구곡 원림을 살펴보기로 한다.정태진은 자신이 어떠한 연유로 선유구곡 원림을 찾게 되었는지 기록하여 놓았다. 그는 한동안 문경에 머물러 살았으며 이 때에 선유구곡 원림의 빼어난 경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쉽게 선유구곡 원림을 답사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하여 정태진은 그의 문집에 짧지만 진솔하게 적어놓았다. 余之寓聞喜夙聞仙遊之勝每心往神馳者久矣纏於憂慽拘於時艱屢擬而屢止丁亥四月晦李聖來翊元自榮州歸與金謹夫聯袂來訪且速李養賢遂相與謀仙遊之行聖來適有當幹於寓所更以五月四日約會於中路遂謝去至初三日余與謹夫養賢同發向旺陵8) 정태진(丁泰鎭)은 삶의 고달픔과 시절의 어수선함 때문에 선뜻 유람을 나서지 못하고 있었지만 선유구곡 원림을 유람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였다. 이러한 소망을 이루게 한 이는 벗인 이성래(李聖來)이다. 영주에서 문경으로 돌아온 이성래는 정태진을 찾았고 다른 벗인 김근부, 이양현 등과 선유구곡 원림의 유람을 도모하고 마침내 이를 실행하였다. 어렵게 이루어진 선유구곡의 유람을 떠나며 그 감회를 정태진은 서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十載經營此一遊 십년을 살다가 이렇게 한번 노니니 일반적으로 구곡원림(九曲園林)의 유람은 제1곡에서 출발하여 제9곡에 이르는 것이다.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 유람도 제1곡에서 출발하여 제9곡에 이르렀다. 또한 걸어서 오른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거슬러 올랐다. 그러나 선유구곡(仙遊九曲) 원림(園林)은 제1곡에서 오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제1곡은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아 제1곡에 이르기 위해서는 농로 옆의 논을 지나 계곡의 없는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 따라서 선유구곡 원림은 제9곡에서 출발하여 내려오는 것이 유람하기 용이하다. 제9곡은 마을이 있어서 도로에서 접근하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다. 제9곡에서 출발하더라도 배를 띄울 수는 없다. 선유계곡은 무이 계곡처럼 넓고 물이 많은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를 띄울 수 없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길도 없다. 바위 위로 혹은 사이로 흐르는 물을 따라 걸어서 유람할 수밖에 없다. 정태진도 이러한 유람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가 지은 시는「무이도가(武夷櫂歌)」처럼 제1곡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선유구곡의 각 굽이를 제1곡에서 제9곡까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1 옥하대(玉霞臺) 선유구곡 원림의 제1곡은 옥하대(玉霞臺)이다. ‘아름다운 안개가 드리우는 누대’라는 의미이다. 정태진은 제1곡에 이르러 바위 위에 새겨진 ‘옥하대’ 라는 글씨가 없는 사실을 발견하고 선인(先人)이 새겨놓은 제1곡의 좋은 글씨가 홍수로 인하여 파괴되어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는 선유구곡 원림 제1곡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곳이 선유구곡의 제1곡이다’ 라고 협주에서 밝혔으니 지금 자신이 서 있던 공간이 바로 선인들이 설정한 제1곡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이 선유구곡의 제1곡이다. 옛날엔 새긴 글자가 있었으나 큰물에 갈라져 지금은 그 장소를 알아낼 수 없다. 是仙遊第一曲也舊有題刻而爲洪流所泐今不得以辨其處云10) 현재 선유구곡 원림 제1곡이라 추증되는, 제2곡으로부터 30m 떨어진 지점에 이르면 넓은 반석 위로 맑은 시냇물이 흘러가는 공간이 나타난다. 선유구곡의 원두(源頭)인 제9곡에서 흘러오는 물이 이 굽이에 이르면 넓은 반석을 만나게 되면서 완만한 물살로 변한다. 제1곡에서 물이 흘러내려오는 방향을 바라보면 제2곡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한 굽이를 이루고 있어서 인간 세상과는 단절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실 선유구곡 원림 제1곡의 정확한 위치를 고증할 방법은 없다. 선인(先人)들이 설정하고 새긴 글씨가 현재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곳이 제1곡이다’ 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태진이 지은 시, 제1곡이 가지는 지형 등을 고려하면 이곳이 제1곡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금번 학술조사에서 선유구곡 원림 제1곡이라 고증한 지점의 위치는 아래와 같다. ∙위도 : 36° 40′09.01″ ∙경도 : 127° 58′46.63″ ∙고도 : 245.9m 선인(先人)들이 제1곡을 옥하대(玉霞臺)로 이름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선유구곡 원림은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선(神仙)이 노니는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은 인간 세상과는 차별성을 가지는 신비한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이 신비한 공간에 들어가는 입구가 바로 제1곡이다.선유구곡 원림을 설정하고 경영했던 선인들이 이 신비로운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명칭에 ‘안개’의 개념을 도입한 것은 신선이 노니는 신비로운 공간을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정태진의 시에서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白石朝暾相暎華 흰 돌에 아침 햇살 비쳐 밝게 빛나고 이 시에서 정태진은 선유구곡 원림의 제1곡의 위치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시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흰 돌[白石]’과 ‘붉은 안개[紫霞]’이다. 정태진은 먼저 ‘흰 돌에 아침 햇살이 비쳐서 밝게 빛난다’고 하였다. 제1곡에 넓게 펼쳐진 반석은 맑은 물에 오랜 세월 씻겨 그 빛깔이 흰색이 되었다. 그 위로 맑은 시냇물이 완만하게 흐르는데 이 물에 아침 햇살이 비치니 밝은 빛을 발산하였다. 이는 현지 답사를 통해 고증한 제1곡의 공간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이 모습은 유람하는 이들에게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다음으로 정태진은 ‘맑은 시내 찬 물결에 붉은 안개가 피어오른다’고 하였다. 이 공간에 흐르는 맑은 시내는 신선이 노니는 신비로운 공간으로 연결하는 매개체이다. 즉 선유의 공간을 찾아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아닐 수 없다. 그 위로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다. 안개가 붉은 빛을 띠는 까닭은 아침 햇살이 안개에 비쳤기 때문이다. 안개는 선유의 공간을 가리고 있어 유람하는 이들에게 신비감을 자아내게 하는 매개체가 아닐 수 없다. 선인들이 선유구곡원림의 제1곡의 명칭을 ‘옥하대’로 명명한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1.2 영사석(靈槎石) 선유구곡(仙遊九曲) 원림(園林)의 제2곡은 영사석(靈槎石)이다. 제1곡에서 물이 흘러오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앞으로 야트막한 산이 자리한다. 이 산은 선유구곡의 시내를 굽어 돌게 하여 한 굽이[曲]를 만든다. 제2곡으로 올라가는 길은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유람을 하는 사람들은 부득이 바지를 무릎까지 걷고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제1곡에서 출발하여 30m 정도 올라가면 넓고 길쭉한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바위는 수면에서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여 시냇물이 불어날 경우에는 물 속에 잠겼다가 수면이 내려가면 드러나는 바위이다. 이 바위 위에 ‘영사석’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以石爲槎喚作靈 돌로 뗏목 삼아 선령을 부르거늘 정태진은 제2곡의 명칭을 ‘돌로 뗏목을 삼아서 선령을 부른다’는 의미로 풀어냈다. 선유구곡을 유람하기 위한 배를 장만하였으니 함께 노닐 신선을 불러야 했다. 그러나 그 옛날 선인(先人)들과 함께 노닐었던 신선은 나타나지 않고 시내 가운데 자리한 뗏목 바위만이 오랜 세월 변하지 않고 자리했다. 그러나 정태진은 제2곡에서 만나는 현실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았다. 뗏목을 준비하고 구곡을 유람할 준비를 마쳤지만 함께 노닐 신선이 없는 현실에 실망하지 않았다. 1.3 활청담(活淸潭) 선유구곡(仙遊九曲) 원림(園林)의 제3곡은 활청담(活淸潭)이다. 제2곡에서 50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시내 오른쪽 길과 연결되는 작은 다리를 만난다. 길은 다리를 건너서 시내 왼쪽에 자리한 인가로 연결된다. 물길을 따라 다리를 건너 바로 시내 오른쪽을 바라보면 높지는 않고 길이가 긴 바위를 하나 만나게 된다. 이 바위를 자세히 보면 ‘활청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새겨진 글씨는 오래되고 이끼가 끼어 있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다. 이 바위 맞은편을 바라보면 저절로 만들어진 얕은 못[潭]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활청담이다. 제4곡에서 흘러오는 물이 이곳에 이르러 활청담을만들고 힘차게 제2곡을 향하여 흘러간다. 바위 위를 흘러온 물이 모여 만든 못이라 그 맑기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시내 오른쪽은 사람들이 경작하는 밭들이 있고 왼쪽은 두어 가구의 집이 자리한다. 靜處從看動處情 마음으로 정처에서 동처를 바라보니 정태진은 선유구곡 제3곡에서 활청담(活淸潭)을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물이 흘러 들어오고 흘러 나가는 모습을 관찰하였다. 이러한 형상 속에서 정태진은 고요한 곳[靜處]과 움직이는 곳[動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연못의 겉은 잔잔하여 고요하지만 연못 속의 물은 요동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며 정태진은 연못 속이 활발하게 움직이니 연못물이 맑아지는 이치를 깨달았다. 연못 속의 물이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부터 연못물이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이다.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현상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만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이치를 하나하나 깨닫는 순간에 도(道)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1.4 세심대(洗心臺) 선유구곡(仙遊九曲) 원림(園林)의 제4곡은 세심대(洗心臺)이다. 제3곡에서 150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시내 오른쪽에 사각형의 바위가 옆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위 위에 ‘세심대(洗心臺)’ 라는 글자가 전서(篆書)로 새겨져 있다. 이 바위 앞으로 움푹 들어간 못[沼]이 나타나는데 이 못은 제3곡의 활청담(活淸潭)보다 규모가 큰 못이다. 바위 자체가 움툭 들어가 만들어진 못인지라 물빛이 맑다 못해 파란 빛을 띠고 있다. 바위와 시내가 어우러진 제4곡은 보는 이의 마음을 맑고 시원하게 할 정도이다.제4곡에서 앞을 바라보면 굽어 도는 계곡이 자리하고 뒤를 돌아보면 제3곡과 이어지는 확 트인 경관이 나타난다. 왼쪽을 바라보면 오래된 민가가 보이고 오른쪽을 바라보면 가축을 기르는 사육장과 개간한 밭이 자리한다. 여기서부터 시내가 바위 위를 흐르기 때문에 본격적인 절경이 시작된다. 虛明一理本吾心 허명한 이치가 본디 내 마음이거늘 정태진은 자신의 마음을 허명(虛明)하게 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았다. 허명이란 ‘비어 있지만 밝다’는 의미이다. 주자(朱子)는 ‘마음이 본래 비어 있지만 어둡지 않다’고 하였다. 비었다고만 한다면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비었지만 어둡지 않다고 하였다.어둡지 않다는 말을 직설적으로 풀이하면 밝다는 말이다. 마음이 비어만 있다면 밝을 수가 없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밝은 상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비어 있는 상태를 추구하며 동시에 밝은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유자(儒者)들의 자세이다. 정태진은 이러한 본분을 잊고서 속세에 나아가 세상에 물들어 산 것을 후회하였다. 참다운 도(道)를 추구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을 좇아서 살았던 지난 세월을 생각하며 단호하게 다짐하였다. 묵은 때를 한 터럭도 탐내지 않았다. 1.5 관란담(觀瀾潭) 선유구곡(仙遊九曲) 원림(園林)의 제5곡은 관란담(觀瀾潭)이다. 제4곡에서 120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시내 오른쪽에 드리운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는 길게 펼쳐져 있는데 이 바위 위에 ‘관란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현재는 돌에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언뜻 보아서는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이 바위 앞으로 넓은 소(沼)가 자리하는데 제법 넓게 펼쳐 있다. 선유구곡을 오르는 유자(儒者)들이 이 소에서 일어나는 물결을 바라보며 이 굽이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 바위에는 ‘관란담’이라는 글씨 외에 ‘구은대(九隱臺)’라는 글씨가 있다. 이 ‘구은대’라는 글씨 옆에는 아홉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김태영(金泰永) 김상봉(金商鳳) 김상련(金商璉) 김상홍(金商鴻) 김상건(金商建) 김진영(金塡永) 김무영(金茂永) 김석영(金錫永) 김종진(金鐘震) 구은(九隱)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현재 찾을 수 없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한 집안의 사람들이 이 굽이에 은거하며 자신들을 구은이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선유구곡 원림 제5곡의 위치는 아래와 같이 측정되었다. ∙위도 : 36° 40′11.39″ ∙경도 : 127° 58′27.83″ ∙고도 : 279.3m 관란담(觀瀾潭)의 ‘관란(觀瀾)’은 단순히 ‘물결을 보다’는 의미만있는 것이 아니다. 맹자(孟子) 를 살펴보면 관란의 ‘란(瀾)’은 물결의 의미보다 여울목의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관란은 ‘여울목을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면 이러한 의미를 가진 관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맹자 의 원문을 통하여 살펴보자. 觀水有術必觀其瀾日月有明容光必照焉 맹자(孟子)는 물을 볼 때는 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빛이 비쳐지는 곳에는 반드시 그 비추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은 비유하는 말이다. 여울목과 빛이 비쳐지는 곳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울목과 빛이 비쳐지는 곳이 비유한 것은 무엇인가? 이 말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註)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此言道之有本也…… 觀水之瀾則知其源之有本矣觀日月於容光之隙無不照則知其明之有本矣 주자(朱子)는 이 말이 도(道)의 근본이 있음를 말씀하신 것으로 보았다. 여울목을 보면 흘러오는 물의 근원이 있음을 알 수 있고 빛이 비쳐지는 곳을 보면 그 밝음의 근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드러나는 현상을 통하여 그 근본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구현되어 있는 현상을 보고 이것이 근본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 현상 속에 존재하며 그 현상을 구현하는 근본을 볼 수 있어야 진정한 도(道)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潭上湍流瀉作瀾 못 위 급한 물살 쏟아져 이룬 물결 정태진은 제5곡을 읊은 시에 이러한 의미를 잘 반영하였다. 관란담(觀瀾潭) 앞은 제6곡에서 흘러오는 물이 세차게 흐르며 물결을 이룬다. 이 물결이 연못에 이르러선 그 기세가 꺾이면서 잔잔한 수면을 이룬다. 정태진은 이러한 물결을 바라보며 그 현상에 머무르지 않고 물결의 근본을 생각했다. 흘러오는 물이 원두(源頭)가 있듯이 자신이 지향하는 도(道)도 근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차가운 수면 위에 내 마음을 비춘다는 말은 이러한 깨달음을 표현한 것이다. 1.6 탁청대(濯淸臺) 선유구곡(仙遊九曲) 원림(園林)의 제6곡은 탁청대(濯淸臺)이다. 제5곡에서 100m 정도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시내 왼쪽에 표지판 같이 생긴 바위가 나타난다. 이 바위 위를 유심히 살펴보면 돌이끼 속에서 ‘탁청대(濯淸臺)’라는 글씨를 발견할 수 있다. 선유구곡 제6곡은 시내가 굽어 도는 지점으로 시내가 이곳에 이르면 왼쪽의 바위를 부딪치며 흘러간다. 제6곡의 오른쪽은 사람들이 경작하는 논이 자리하고 왼쪽은 야트막한 산이 제5곡에서 이어지는데 이 산에는 특히 밤나무들이 많이 자생하고 있다. 제5곡에서 이곳에 이르려고 하면 물길을 따라서 거슬러 오르지 않으면 어려울 정도이다. 따라서 선유구곡을 찾은 사람들이 이곳까지는 잘 이르지 않는다. 滄浪之水淸兮可以濯吾纓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 어부(漁父)의 노래에는 굴원(屈原)의 삶의 태도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나 혼자만이 깨끗하고 나 혼자만이 뛰어나고 나 혼자만이 잘났다는 생각이 굴원의 사고였다. 그러므로 굴원은 스스로 선의 무리와 악의 무리를 분별하는 자세를 가졌다. 선과 악의 분별을 뛰어넘어 이 둘을 모두 아우르고 선의 세계로 나아가게 할 국량(局量)이 없었다. 어부는 이 점을 지적하고 비판한 것이다. 어부의 이말 중에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淸] 내 갓끈[纓]을 씻는다’라는 말에서 ‘탁청(濯淸)’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탁청’이라는 이름이 붙으려면 맑은 세계가 전제되고 이러한 삶을 산 이들이 거론되어야 한다. 정태진은 이 점을 제6곡 시에서 읊었다. 臺前流水絲漪橫 누대 앞에 흐르는 물 일어나는 실물결에 정태진은 제6곡에 이르러 한 사람을 생각했다. 그 사람은 선유구곡 제6곡인 탁청대(濯淸臺) 서쪽에 세심정(洗心亭)을 지어 놓고살았던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1744-1809)이다. 남한조는 상주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어서 한 번 들으면 모두 외었고 성품이 소탈하면서도 대범한 면이 있어 사물에 집착하는 면이 없었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찾아가 학문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경서 등 여러 서적을 탐독하고 거경궁리(居敬窮理)에 힘을 썼다. 남한조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초야에 은둔하여 후진 교육에 힘을 썼다.굴원(屈原)이 벼슬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펼쳐 보려는 의지를 가졌다면 남한조(南漢朝)는 처음부터 이러한 뜻이 없었다. 南損齋漢朝嘗築洗心亭於臺之西今但有遺址 정태진의 기록에 의하면 세심정(洗心亭)의 터만 남아 있다. 1.7 영귀암(詠歸巖) 선유구곡(仙遊九曲) 원림(園林)의 제7곡은 영귀암(詠歸巖)이다. 제6곡에서 100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시내 오른쪽 큰 바위 위에 ‘영귀암(詠歸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서(篆書)로 새겨진 글씨가 너무 아름다워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바위 왼쪽으로는 반석이 자리하는데 그 위로 시냇물이 흘러 내려간다. 이 물은 바위의 틈으로 인하여 작은 폭포가 형성되어 그 소리가 요란하다. 이 시내 굽이를 돌아가면 멀리 제9곡이 보이는데 제9곡에 놀러온 사람들이 이곳까지 내려와 노닐기도 한다. 點爾何如鼓瑟希鏗爾舍瑟而作對曰異乎三子者之撰子曰何傷乎亦各言其志也曰莫春者春服旣成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夫子喟然歎曰吾與點也 공자와 증석의 대화에서 공자와 자로, 염유, 공서화 등과의 대화와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다. 그 차이는 자로, 염유, 공서화는 벼슬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펼치는 삶을 희망하였다면 증석은 벼슬에는 뜻이 없고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희망하였다는 점이다. 공자는 자로, 염유, 공서화의 뜻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공자는 증석의 희망과 함께 하겠다고 하였다. 증석처럼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詠] 돌아오겠다[歸]고 하였다. 여기에서 ‘영귀(詠歸)’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臨流盡日弄晴暉물에 임해 온종일 맑은 빛 즐기다가 風浴隨時可詠歸 수시로 바람 쐬고 읊조리며 돌아온다 정태진도 이러한 뜻을 시로 읊었다. 제7곡을 읊은 시는 증석(曾晳)의 기상을 소재로 하였다. 물가에 나아가 온종일 맑은 물빛을 바라보다 수시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는 삶은 증석이 기수(沂水)와 무우(舞雩)에서 하고 싶었던 삶이었다. 그것은 관직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펼쳐보려는 욕망을 던져버리고 바위 누대에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정태진은 혼탁한 시대를 살았다. 1.8 난생뢰(鸞笙瀨) 선유구곡(仙遊九曲) 원림(園林)의 제8곡은 난생뢰(鸞笙瀨)이다. 제7곡에서 물길을 40m 정도 거슬러 올라서 옷을 무릎까지 걷고서 시내를 건너가면 조금 높은 바위 위에 ‘난생뢰(鸞笙瀨)’라는글씨가 새겨져 있다. 제8곡은 실제로 제9곡과 거리가 멀지 않아 제9곡에 놀러온 사람들이 이 굽이에 넓게 만들어진 물웅덩이까지 내려와 수영을 하였다. 아래로는 제7곡과 이어지는 확 트인 경관이 자리하고 위로는 사람들이 사는 제9곡과 연결되어 있다. 琮琤石瀨奏笙鸞 돌여울 물소리 난새의 노래 소리 정태진은 제8곡에 이르러 계곡의 물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난새가 노래하는 소리로 곧 난생(鸞笙)을 연주하는 소리와 같았다. 그러므로 이 굽이에 신선의 자취가 보인다 하였다. 신선의 세계에서 연주되는 악기인 생황의 소리가 연주되기 때문이다. 그는 옛부터 신선이 사는 곳은 신비롭고 괴이하다 하였다. 그 세계에 쉽게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더라도 일상의 공간과 다른 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정태진은 이러한 세계를 구름이 드리운 속에서 울음 우는 닭과 개를 유안(劉安)에 비겨서 증명하려 하였다. 유안에 대한 자료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漢高帝孫襲父封爲淮南王讀書鼓琴善爲文辭武帝方好藝文甚重之詔使爲離騷賦自旦受詔日食時上嘗招致賓客方士作內書二十一篇又有中篇八卷言神仙黃白之術安以內篇獻諸帝帝愛秘之卽今淮南子 유안(劉安)은 신선의 세계를 노래했던 문인이다. 정태진이 제8곡에서 들려오는 닭과 개의 소리를 유안에 비긴 것은 이 굽이가 극처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 옥석대(玉舃臺) 선유구곡(仙遊九曲) 원림(園林)의 제9곡은 옥석대(玉舃臺)이다. 제8곡에서 6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자리한다. 가운데로 시내가 흐르는데 시내 오른쪽엔 두어 채 인가가 자리한다. 이 인가들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하여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시내 왼쪽에는 도암(陶菴) 이재(李縡)28) 선생을 기리는 학천정(鶴泉亭)이 자리한다. 도암 이재 선생은 대야산 용추(龍湫) 부근에 둔산정사(屯山精舍)를 세우고 후학을 교육시켰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고 말았다. 그 후에 향내의 사림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이 정자를 새로 세울 때 선유구곡 제9곡에 이를 세우고 이름을 학천정이라 하였다.용추(龍湫)가 그 위에서 흘러들고 학대(鶴臺)가 그 아래에 우뚝 솟아 산림과 임천이 이미 비범한 경계가 아니거늘 하물며 선생이 지나간 정채(精彩)를 입음에 있어서랴. 이에 선유의 경치는 정사를 두게 되어 남쪽 지방에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는데 세상에 유람하고 완상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나서야 그 욕망을 그칠 수 있었다. 그 후에 불행히도 희출(嘻出)의 재앙을 당하여 땅이 이미 황폐하고 무성한 풀들로 덮히니 다만 산이 높고 물이 긴 경치만을 보게 되어 여행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가리키며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仙遊洞介於嶺湖有內外之別水石之勝與華陽相伯仲焉陶菴李先生嘗於巴串構亭數椽又依其制使從弟知菴公維就外洞築屯山精舍龍湫注其上鶴臺屹其下山林泉石已非凡境況被先生所過之精彩乎於是仙遊之景盡爲精舍之有而擅名于南州世之遊賞者靡不欲窮源乃已其後不幸被嘻出之災地旣廢而鞠爲茂草但見山高而水長行旅莫不指點而咨嗟矣 지난 해 선생의 후손인 이인구(李寅九)와 이만용(李萬用)이이 지경이 된 것을 탄식하고 이에 이강준(李康準) 채영진(蔡永震) 김중진(金中鎭)과 함께 모의하고 말을 합하여 다시 정사를 세우고자 하니 원근의 사람들이 또한 소식을 듣고서 즐거워 힘껏 이를 도왔다. 아! 이것은 선생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運)이 사람을 깊이 감동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인멸되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 누가 그렇게 하였겠는가? 오직 그 옛터는 너무 외진 곳이라 화전(火田)을 당할까 두려워 사림(士林)들이 의논하여 다시 그 남쪽 1리 지점인 봉암(蜂巖) 옥석대(玉舃臺) 위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고쳐서 ‘학천(鶴泉)’이라 하니 비록 그 땅과 정자의 이름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 선생 은거한 장소는 한가지이다. 정자가 이미 이루어져 또 곁에 누각 하나를 세우고 장차 선생의 유상(遺像)을 봉안하려 하니 선생을 존숭하는 도(道)가 한이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어찌 주자(朱子)가 말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하여 흥기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去歲先生宗後裔寅九及萬用慨然於斯乃與李康準蔡永震金中鎭同謀合辭欲復營建遠近章甫亦樂聞而隨力助之噫此非先生之遺風餘韻感人深而至今有未沬者其孰使之而然哉惟其舊址太深邃恐被菑火士林議更構於其南一里蜂岩之玉舃臺上改名曰鶴泉雖其地與亭之名不同於精舍然其爲先生杖屨之所則一也亭旣成又建一閣于傍將以奉先生之遺像不惟於尊先生之道爲無憾也亦豈非晦翁所謂使人瞻望而興起焉者乎 학천정 앞 평평한 바위에는 ‘옥석대(玉舃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물이 맑고 경치가 빼어나 많은 사람들이 여름철에 물놀이를 하는 곳이다. 시내 오른쪽에 솟아 있는 바위에 ‘선유동(仙遊洞)’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자리에서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남근흥암(南近興巖) 서접화양(西接華陽)’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흥암(興巖)은 경북 상주시에 있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30)을 모신 흥암서원(興巖書院)을 말하고 화양(華陽)은충북 괴산군에 있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31)을 모신 화양서원(華陽書院)을 말한다. 따라서 이 문구(文句)는 조선시대 노론계 인사들이 의도적으로 새겨 놓은 것이라 볼 수 있다. 安期先生者瑯琊阜鄕人也賣藥於東海時人皆言千歲翁秦始皇東遊請見與三日三夜賜金璧度數千萬…… 去留書以赤玉舃一雙爲報曰後數年求我於蓬萊山 이 일화 때문에 옥석(玉舃)이라는 말은 ‘득도자(得道者)가 남긴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선인(先人)들이 선유구곡의 제9곡을 옥석대(玉舃臺)로 명명한 것은 옥석의 이러한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제9곡은 선유구곡의 극처이다. 극처는 선인들이 지향했던 도(道)가 존재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 공간에 이르러 선인(先人)들이 지향하는 것은 이 공간에 존재하는 도를 얻는 것이다. 선유구곡 제9곡에 도착한 선인들은 득도자가 남겨 놓은 유물, 즉 옥석대를 만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도를 만나고 도를 얻는 것이다. 全石跨溪鏡面開 시내가 흐르는 전석엔 거울이 열리고 정태진은 선유구곡의 제9곡에 이르러 바위로만 이루어진 계곡을 만난다. 이 바위 계곡은 맑은 시내와 만나서 기이한 경관을 이룬다. 이 굽이는 잔잔한 수면을 가진 소(沼)를 만들고 소에서 흘러내린 물이 파인 곳을 만나 폭포를 만든다. 그리고 시내 양쪽 옆으로 바위가 우뚝 솟아 누대를 만든다. 이 굽이에 도착한 정태진은 선인(仙人)이 남긴 자취, 즉 옥석(玉舃)을 찾았다. 득도자가 남긴 유물, 즉 한 쌍의 옥으로 만든 신발은 정태진이 얻고자 하는 도(道)이다. 그는 섭현(葉縣)에서 날아오는 두 마리 오리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 말에는 고사(故事)가 있다. 王喬者河東人也顯宗世爲葉令喬有神術每月朔望常自縣詣臺朝帝怪其來數而不見車騎密令太史伺望之言其臨至輒有雙鳧從東南飛來於是候鳧至擧羅張之但得一隻舃焉乃詔尙方診視則四年中所賜尙書官屬履也 정태진은 왕교(王喬)의 고사를 통하여 제9곡에는 그가 지향하는도(道)가 있다는 것을 형상화하였다. 왕교의 고사를 통하여 제9곡에는 신선의 자취가 남겨져 있으니 이를 얻어야 한다는 의지를 표출하였다. 이 선유구곡의 각 지점에는 구곡의 명칭이 전서, 해서, 초서 등으로 뚜렷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는 최치원 글씨라고 전하나 확인할 수는 없다. 또한 학천정 옆 높다란 바위에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는 힘찬 필치의 글씨가 눈에 확 들어오는데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없고 다만 학천정 앞 바위에 ‘학천(鶴泉)’이라는 이완용(李完用)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어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 네이버 블로그 <愚溪의 일상, ver2014>기석 님의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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