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 삼대화상 / 불교신문

2013. 5. 22. 10:10우리 역사 바로알기

 

 

 

 

"회암사 입지 다져”

   
삼대화상 진영. 왼쪽부터 무학대사, 지공화상, 나옹화상.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 선시는 고려 말 고승으로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나옹선사(1320∼1376)의 작품이다. 시뿐 아니라 가곡으로도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나옹선사는 쇠락해 가는 고려불교를 일신하기 위해 교종과 선종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스님이다. 스님의 노력은 춘천 청평사, 안성 청룡사, 금강산 건봉사 등 많은 사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나옹선사가 입적한 신륵사에는 지팡이가 싹터 자랐다는 은행나무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선사의 탑비명은 선사와 친분이 있던 목은 이색 선생이 썼다. 이색은 “보제(나옹선사의 법호)가 살아있는 것 같다. 신륵사는 보제께서 크게 도를 펴던 곳으로 장차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리라”며 흔쾌히 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양주 회암사는 나옹선사가 주지로 머물며 고려불교의 중흥을 모색했던 곳으로, 선사의 스승 지공화상이 창건했던 절이다. 지공화상은 인도 마가다국 출신으로, 히말라야와 원나라를 거쳐 1326년 고려에 들어왔다.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한 지공화상의 정신은 고려불교 발전의 계기가 됐다. 고려에 머무르는 3년 동안 지공화상은 감로사와 숭수사, 건동선사, 통도사 등에서 설법하며 널리 존경을 받았다. 나옹선사는 스승의 당부를 잊지 않고 회암사 중창불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후 회암사는 고려불교를 대표하는 총본산이자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왕실의 원찰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나옹선사의 제자, 무학대사가 머무르며 발전을 거듭한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가 살아 있을 때, 회암사에 부도탑을 조성해 왕사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도 했다. 숭유억불에도 왕실의 도움으로 발전을 거듭했지만 문정왕후 사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현재는 폐사되어 남아있는 사지만이 당시 회암사의 사세를 짐작케 할 뿐이다.

오는 27일 회암사지박물관 특설무대와 회암사 일원에서 열리는 ‘2013년 양주 회암사 삼대화상문화제’는 과거 융성했던 회암사와 그곳에서 수행 정진했던 삼대화상을 조명하기 위해 양주 회암사(주지 혜성스님)와 삼대화상문화제 조직위원회(회암사불교문화원)가 기획한 행사다. 회암사를 중흥시켰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회암사와 삼대화상의 관계를 홍보하고, 삼대화상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취지다.

김훈래 회암사 불교문화원장은 “삼대화상문화제는 회암사와 회암사지, 그리고 삼대화상을 재조명하고 삼대화상이 수행한 불교성지로서 회암사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불교신문 2901호/2013년 4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