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의 공식행차 ㅡ 회암사에서

2013. 5. 24. 08:14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려말 대문장가였던 목은 이색(木隱 李穡)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중수기

 

(天寶山檜巖寺重修記)에 의하면, < 회암사 주지 윤절갑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 보제(普濟)가 입적한 후에 부도에 명(銘)하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사찰의 시말(始末)을 기록하여서 보제가 이 사찰에 힘을 쏟은 일이

 

끊임없이 전해지도록 그 공적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선생에게

 

부탁하는 바이니 사양치 않으시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라고 하기에

 

승락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회암사는 주지 윤절갑의 간절한 바램과는 달리 대시주였던 문정왕후

 

사후 사세가 쇠약해지다가 그 후에 유생(儒生)들의 방화에 의하여 소실되고 만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 회암사 정청(政廳)에 있을 때,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사죄하려고 찾아오자, 그를 향하여 화살을 날렸다는 기록이 왕조실록에

 

보인다.  이러한 연유로 유생들의 방화에는 후임 왕실과 그를 따르는 대신들의

 

< 보이지 않는 손 >이 작용된 듯 하다.

 

 

 

 

       목은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중수기>   ㅡ  붉은 줄 친 부분이 해당 구절임.

 

 

 

      

           무릇 정치(政治)라는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 풀어보면, 헤게모니 싸움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려말의 최영장군을 대표로 하는 북벌파와 그의 부하 장수였던 이성계 ㅡ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고 조선왕조 오백년 사직을 건설하였으나, 후에 후손들이 경술국치로

 

일제에 나라의 주권을 빼았긴다.

 

      그 뒤로도 훈구파와 신진세력, 노론과 서인들의 대결, 동학농민전쟁으로 표현되는 부패한

 

관리들과 농민들의 다툼, 오늘날의 여와 야, 진보와 보수 그리고 남과 북 ..... 등등 일찍이 이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풀이한 일제강점기 시의 선각자셨던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선생의 분석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획득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그보다 큰 것을 잃었다.

 

고조선 때부터 내려온 우리 한민족의 옛터전인 파미르 고원과 바이칼 호수 일대를 되칮기

 

위해서 선조들이 벌인 무수한 노력들 ㅡ  즉 복본(復本)의 정신을 잃었다. 이 복본 정신은

 

최근에 단재 선생님에 의해 다물(多勿)운동으로 계승된다.

 

    다음에 설명드리겠지만  이러저러한 연유로 하여 제가 지공선사(指空禪師)를 찾아 나서

 

보았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2년( 1402년) 임오(壬午) 6월 9일 첫번째 기사를 인용한다.

 

"태상왕(태조 이성계)이 소요산에서 회암사로 행차하였다. 태상왕이 회암사를 중수(重修)하고,

 

또 궁실(宮室)을 지어 머물어 살겠다고 하니 임금(태종)이 그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서 대부

 

150명을 보내 부역하게 하였다."  

 

 

    앞의 글에서도 설명드린 바와 같이 태조 이성계는 재임시 4차례 회암사를 공식방문

 

(1393~1398년간) 하였고, 함흥이나 지방 순시 때에 수시로 들려 정청에 머물고 하였다. 

 

 

   또한 소요산 , 칠봉산, 왕방산 등 천보산맥에 속하는 회암사 인근의 산들에서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를 자주하였기 때문에 왕이 회암사에 머무는 일이 자주 있었다. 

 

태조의 행차 행렬은 회암사지박물관에 재현되어 있으므로 사진 설명으로 대신한다. 

 

 

     행차 행렬에서 눈여겨 볼 것은 행렬 뒤에 스님들이 함께 따르는 일이다. 

 

 재현된 행차행렬 모형에는 회암사 3대화상인 지공, 나옹, 무학대사가 목탁을 들고 있으며,

 

나머지 스님들은 화살과 전통(箭筒)을 메고 있거나 붓을 지고 따른다. 

 

 

     이는 당시 스님들도 강무에 참석하여 군사훈련을 함께하였으며, 이러한 전통은 나중에 국란

 

ㅡ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맞이하였을 때,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으로 대표되는 승군(僧軍)의

 

동원을 수월하게 하였다.

 

 

 

      역사기록에서 난(亂)과 전쟁은 구별하여 기록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동힉난 등의

 

표현은 일개 민족 또는 한 나라 안에서 일어난 싸움에 대한 표현이고, 고구려의 수당전쟁,

 

고조선의 북위와의 전쟁 등의 표현은 이민족(異民族)간 또는 다른 나라와의 싸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왜란, 호란이라는 사가(史家)들의 기록이다.

 

왜(일본)와 호(胡  :金 & 淸)를 한 민족 또는 한 나라로 보는 것이다. ㅡ 형제국 또는 부마국 간에

 

일어난 싸움도  난(亂)이라고 표현한다. 이러 하듯이 역대 사가들 만도 못한  역사의식이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것은 일제강점기를 통한 식민사관으로 크게 왜곡되어 있는 것인 데,  하루 빨리 시정해야

 

할 일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ㅡ 역대 사관(史官)들의 역사 기록에 대한 관습에 따르자면,

 

동학란을 동학농민전쟁으로 이름을 바꾼 처사는 부패한 관리들과 농민들을 다른 민족 또는

 

다른 나라 사람들로 보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2년 임오 6월 9일 기사

 

 

 

 

    태조 이성계의 회암사 공식행차 모형

 

 

 

 

     행차시 뒤를 따르는 스님들

 

 

 

 

         행차 모형 스님부분

 

 

 

 

       행차도 그래픽  ㅡ  의궤에서 따옴

 

 

 

 

      용머리(龍頭)   ㅡ  내림마루 끝에 양쪽으로 설치하거나 추녀마루에 잡상들과 함께 설치함.

 

 

 

        토수 ㅡ  처마 끝에 돌출된 목재(사래)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는 장식물로 보광전과 같이 격이 높은 건물에만 설치.

                    다른 사찰과는 달리 용 모양 : 회암사의 사격(寺格)이 높았슴을 의미함.

 

 

 

 

     토수  ㅡ  목재(사래)와의 결합이 쉽도록 뒷 부분이 사각으로 비어 있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