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유명 부대 (2) - 상남자중의 상남자들, 프랑스 외인부대 (상)

2014. 8. 12. 20:14병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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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유명 부대 (2) - 상남자중의 상남자들, 프랑스 외인부대 (상)
기사입력 2014.06.19 11:05:22  |  최종수정 2014.07.01 10: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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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외인부대의 군인들, 출처: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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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gion Etrangere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 대사전을 찾아보면 외인부대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외인-부대(外人部隊)[외ː---/웨ː---]
「명사」
외국인으로 편성된 용병(傭兵) 부대. 

하지만 역사나 전쟁사 혹은 밀리터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단순한 용병부대라는 사전적 정의 보다는 프랑스 외인부대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역사상 수많은 용병부대와 외인부대가 있었지만 유난히 프랑스 외인부대 ( Legion Etrangere, 레지옹 에트랑제 )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프랑스 외인부대가 갖고 있는 상남자의 이미지와 마초이즘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리라. 

외인부대의 기원 

외인 부대는 1831년 프랑스의 필립 1세 의해 설립되었는데 (우리가 잘아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시기의 왕이기도 하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이 거듭되며 정치적인 혼란이 지속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혼란한 프랑스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알제리 등 해외 식민지에서도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본국의 병력이 파병되었으나 진압을 마친 병력이 귀국하면 다시 반란이 지속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었다. 결국 필립 1세는 외국인으로 구성되어 알제리에 상시 주둔할 5개 보병대대 규모의 외인부대를 창설할 것을 골자로 하는 칙령을 발표한다. 

당시 굳이 프랑스 정규군이 아닌 외국인으로 구성된 용병부대를 알제리에 파병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지도 2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부르봉 왕가에 충성을 다했던 불만 가득한 퇴역 병사들과 해외에서 망명 온 수많은 외국인들, 밀입국한 강도, 폭력배 등으로 인해 사회의 불안이 계속되자 이들에게 일종의 도피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그 시초다. 1832년이 되자 외인부대는 6개 나라(폴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의 국적으로 구성된 6개의 대대의 편성을 완료 한다. 이어 곧바로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프랑스령 알제리로 배치 되면서 180년 전통의 유서 깊은 프랑스 외인부대의 첫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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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부대원을 묘사한 삽화(1852년), 출처:위키미디어

창설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외인부대는 처음에는 공병부대로 활용되다가 이후 위험하고 격렬한 전투에 가장 먼저 투입되어 소모품처럼 쓰여지고 버려졌다. 아직까지도 외인부대는 프랑스가 해외분쟁에 개입할 경우 제일 먼저 선봉으로 투입된다. 물론 그 이유는 소모품으로서의 목적이 아닌 현재 프랑스군의 최정예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과거와는 투입 목적 및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외인부대는 언제부터 우리가 잘 아는 정예부대로 거듭나게 되었을까? 

쟝 당쥬 대위와 카메론 전투, 전설의 시작 

외인부대의 명성을 알리고 나아가 외인부대의 정신적 토대가 되고 있는 전투는 바로 카메론 전투이다. 1830년대부터 멕시코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던 프랑스는 멕시코에 다섯 군데에 이르는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 중 멕시코 시티 동남쪽에 위치한 푸에블라시에는 포레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멕시코군이 이 도시를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프랑스는 푸에블라 시에 3백만프랑에 이르는 금화, 탄약, 각종 물자를 수송하기로 결정하고 쟝 당쥬 대위가 이끄는 외인부대 1대대 3중대에게 수송대 호위임무를 맡긴다. 

그런데 수송 도중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행군을 멈춘 64명의 외인부대는 기병 800명으로 구성된 멕시코군과 마주치게 된다. 쟝 당쥬 대위를 비롯한 외인부대원은 압도적인 적의 병력을 보고 항복을 택하는 대신 인근에 위치한 카메론 농장에 들어가 방어태세를 구축한다. 이윽고 멕시코군에는 보병 2,200여명이 더 증원됐고 마침내 오전 11시, 3,000명이라는 압도적인 숫자의 멕시코군이 일제사격을 가하며 카메론 전투의 막이 올랐다. 외인부대원들은 40배가 넘는 멕시코군의 병력에 맞서 침착한 조준사격으로 멕시코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농장을 사수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멕시코군의 사격에 쓰러지는 외인부대원의 숫자도 점점 늘어났고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 이들을 지휘하던 쟝 당쥬 대위도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전사한다. 전투 개시 7시간 여가 지난 오후 여섯 시. 전사한 쟝 당쥬 대위를 대신해 부대를 지휘하던 모데 소위를 포함해 전투가 가능한 외인부대원은 12명에 불과했고 소지한 탄약도 모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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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론 전투, 출처: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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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는 항복해도 전혀 부끄러울 것 없는 전투였고 멕시코군의 지휘관인 밀란 대령도 잔존 병력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하지만 모데 소위와 휘하 11명의 외인부대원은 항복하는 대신 탄환이 빗발치는 멕시코군 진지를 향해 착검돌격을 감행한다. 용감하다 못해 무식(?)한 이들의 돌격을 보고 탄복한 멕시코군 지휘관은 마침내 사격중지를 명령하고 최후까지 살아남은 2명의 외인부대원을 풀어준다. 

이 전투에서 멕시코군은 3,000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해 고작 65명이 방어하는 별장을 완전 포위한 상태에서 7시간 동안 공격을 퍼부었으나 전사 200여명, 중경상 300여명이라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통상 전투에서 전사자가 30%이상 발생하면 사실상 전멸됐다고 간주하는 것이 통례인 것을 고려해볼 때 당시 외인부대가 얼마나 잘 싸웠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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쟝 당쥬 대위의 의수, 출처:위키미디어

이 때 전사한 쟝 당쥬 대위는 과거 크리미아 전쟁에서 전투 중 왼손을 잃어 나무로된 의수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전사자들의 시신이 모두 반환 됐음에도 당쥬 대위의 의수는 찾을 수 없었다. 얼마 후 격전장 근처에서 한 멕시코 농부가 의수를 발견한 후 2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한 외인부대원이 쟝 당쥬 대위의 의수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이때 찾아온 쟝 당쥬 대위의 의수는 오늘날 외인부대의 감투정신을 상징하는 외인부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전투가 벌어진 4월 30일은 카메론 데이라고 불리는 외인부대의 공식 기념일이 되어 매년 전세계의 외인부대 전역자들과 가족 그리고 현역 외인부대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축제일로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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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론데이 퍼레이드, 출처: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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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남자중의 상남자들, 프랑스 외인부대(하)편에 이어짐... 

[장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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