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유명 부대 (1) - 용서받지 못한 자들, 나치 친위대

2014. 8. 12. 22:06병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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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유명 부대 (1) - 용서받지 못한 자들, 나치 친위대
맛있는 MEALitary
기사입력 2014.06.11 10:38:16  |  최종수정 2014.06.17 17:35:48

   한스 립쉬스 

   지난 2013년 5월 독일 현지 언론은 나치전범 추적기관인 시몬비젠탈센터 (SWC)의 말을 인용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했던 93세노인을 대량학살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혀 세상을 놀라게 했다. 

   독일 연방검찰의 말에 따르면 체포된 한스 립쉬스라는 이름의 이 남성은 제2차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악명 높은 무장친위대 (Waffen-SS) 에서 복무하며 1941년~1943년 아우슈비츠의 경비대원으로 1만510명을 살해한 범죄의 공범 혐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5월 현재,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되었음)  92세 노인을 법정에 세운 독일 사법당국의 의지도 놀랍지만, 유난히 무장친위대를 강조한 각언론사들의 보도는 나치 무장친위대 (Waffen-SS)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과연 무장친위대는 어떤 조직이었을까? 

친위대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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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 세계주요 국가들은 육ㆍ해ㆍ공 3군 혹은 육군, 해군 2군 체제(공군은 각각 육군항공대, 해군항공대 배속)를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히틀러 치하의 나치독일은 매우 이례적으로 육ㆍ해ㆍ공군 외에 나치 친위대(SS, SchutzStaffel)라는 편제를 독립적으로 운용 하였다. SS는 원래 나치당의 전위조직이자 정치 깡패조직이었던 나치 돌격대 (SA, Strumabteilung)의 산하 군소조직 중 하나에 불과했다. 

   나치돌격대(SA)의 수장은 에른스트룀이라는 사람이었는데,그는 애초 군소 정당에 불과했던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NSDAP)을 원내 정당으로 만들기 위해 납치, 감금, 협박, 폭행 등의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날이 갈수록 이 정당의 세력은 커져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에는 전국에 400만 명의 대원을 거느린 거대한 조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와 룀의 밀월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나치당이 집권하자마자 에른스트룀은 자신의 공을 떠벌리고 다니면서 히틀러를 자신의 상관이 아닌 동반자처럼 여기며 자신이 아니었다면 히틀러는 결코 지금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는 등 히틀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것도 모자라 독일육군을 돌격대(SA)의 산하조직으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까지 이르러 군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애쓰던 히틀러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히틀러는 돌격대(SA)의 산하 조직이자 히틀러 경호임무를 맡고 있던 SS의 총 책임자 하인리히 히믈러를 은밀히 불러 에른스트룀과 그가 이끄는 돌격대(SA)를 분쇄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마침내 1934년 6월 30일 히틀러가 회의를 핑계로 에른스트룀을 비롯한 돌격대(SA)의 주요 간부들을 초청한 뒤 장소에 도착한 돌격대(SA)의 간부들을 전원 체포하여 교도소에 수감시켜 버린다. 훗날 ‘장검의 밤’으로 불리는 이 사건을 통해 히틀러는 에른스트룀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에게 당시 나치정권에서 불법으로 규정되었던 동성애 및 국가전복기도혐의를 적용하여 재판도 없이 총살형에 처했다. 이를 시작으로 100여명에 가까운 돌격대(SA)의 간부급 지도자를 잇따라 처형하며 400만에 가까운 숫자를 자랑하던 돌격대(SA)를 사실상 공중분해시켜 버린다. 돌격대(SA)가 와해 되자 하인리히 히믈러를 수반으로 하는 SS는 기존 돌격대(SA)에서 부여받은 히틀러의 경호업무 및 나치당의 전위대 역할을 넘어서 제 4의 군사조직으로 커나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머저리들 

   당시 SS의 최고 지도자였던 하인리히히믈러는 SS를 단순한 나치의 전위대가 아닌 나치의 살아있는 신념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나치즘의 핵심 이론중 하나는 바로 인종우성학에 기반한 인종우월주의였는데 이는 지배인종으로서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이에 따라 SS창설 초기 SS의 입대기준은 매우 엄격하였다. 당시 총통 경호대원의 입대조건을 기준으로 SS의 가입조건을 살펴보면 게르만혈통일 것, 금발에 푸른눈일 것, 신장 174cm 이상에 흉터 및 충치가 없을 것, 마지막으로 양가 모두 증조부 세대까지 유태계의 혈통이 섞이지 않았음을 입증할수 있는 혈통서를 제출할 것 등이었다. 이처럼 까다로운 신체 조건을 충족해야 SS에 입대할 수 있었기에 이러한 관문을 통과하여 선발된 SS대원들의 자부심은 나름 대단한 것이었지만 독일국방군 (Wehrmacht)의 장교들은 근본없는(?) SS를 보며  ‘아름다운 머저리들’, ‘아스팔트 전시용 부대들’ 이라며 비아냥댔다. 

  하지만 당시 독일 국방군은 과거 프리드리히대왕 시절부터 강군으로 이름 높았던 프로이센군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자부심이 강한 집단이어서 SS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평가절하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히믈러 역시 SS의 약점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보완하고 체계적으로 SS간부들을 양성하기 위한 SS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수많은 SS간부들을 배출하였다.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세를 불려가던 SS는 마침내 전투부대인 SS-VT (SchutzStaffelVererfugungstruppen)를 창설 하면서 본격적인 군사조직으로 재편을 마치고 1939년 9월 폴란드 전역에 전개 되면서 최초로 일반육군처럼 전투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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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ffen SS snipers, 출처: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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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전개된 프랑스 전에서 독일군은 이른바 ‘전격전(Blitz Krieg)’으로 불리는 공지(空地)합동기동전술을 활용하여 단 7주만에 프랑스를 굴복시킨다.이후 제국의회에서의 연설에서 히틀러가 공개적으로 무장친위대 (Waffen-SS)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들의 공을 치하하였고 이때를 기점으로 기존의 SS는 Allgemeine SS (일반 친위대), 전투를 담당하는 SS는 Waffen-SS (무장 친위대)라고 불리게 되면서 무장친위대는 명실상부한 나치독일의 일익을 담당하는 군사조직으로 거듭나게 된다. 

   사실 SS가 히틀러의 총애를 받게 된 주요 이유중 하나는 히틀러의 비천한(?) 출신 성분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원래 오스트리아 태생의 빈털터리 화가 지망생으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시 독일군으로 자원입대하여 상등병 시절 종전을 맞이하게 되고 그 후 줄곧 독일에서 정치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독일국방군은 제2차 세계대전시절까지도 융커스( Junkers) 라고 불리웠던 토지귀족들을 중심으로 하는 명망있는 가문의 자제들이 장교단에 대거 포진해 있었다. 심지어 독일국방군 소속 제2기갑연대의 어떤 병사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적었을 정도였다.  ’우리 부대는 장교단 대부분이 귀족들로 직급만으로 부를 수 있는 장교는 거의 없고 대위니 소위니 하는 계급 대신 왕자님, 백작님으로 불러야 한다.’   이처럼 상무적이고 귀족적이었던 독일 국방군의 기라성 같은 장교들에게 히틀러가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나치즘으로 사상 무장이 되어있을 뿐 아니라 나치즘의 인종우성학 이론에 입각하여 탄생한 친위대는 그 존재 차체가 히틀러의 정통성을 입증해 주는 도구였고 전장에서는 히틀러와 히믈러의 기대 이상으로 탁월한 전과를 거두며 전쟁기간 내내 히틀러의 총애를 받게 된다. 


무장친위대의 위상 

   이러한 상황에서 히틀러로부터 완전히 신임을 얻지 못한 국방군과 달리 나치 친위대는 히틀러의 사병(私兵)이자 나치의 충견으로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특히 총통 경호대에서 출발한 무장친위대 제1기갑사단 `총통기 아돌프 히틀러`(1st SS Panzer Division `Leibstandarte SS Adolf Hitler` ), 무장친위대 제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2nd SS Panzer Division `Das Reich`), 무장친위대 제3기갑사단 `토텐코프`(3rd SS Panzer Division `TotenKopf`) 등 3개 무장친위사단은 나치즘에 대한 광기 어린 충성과 탁월한 전투력으로 정예 중의 정예로 불리며 유럽대륙에서 그 명성을 쌓았다. 위에서 언급한 사단들은 독-소전쟁이 시작된 뒤 레닌그라드 전투, 모스크바 회전, 쿠르스크 전투, 발지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수세로 바뀐 독일군의 전선을 유지하면서 전선의 소방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 덕에 독일육군도 SS를 더 이상 ‘전시용 아스팔트 부대’로 얕잡아 보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무장친위대가 엘리트부대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히틀러는 소련침공 당시 ‘살짝 차기만 하면 썩은 문처럼 나가떨어질 것’이라며 소련군을 얕잡아 봤지만 예상과 달리 소련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독일군은 1941년 12월을 기점으로 모스크바 서쪽 32km까지 진출하였으나 이내 공세종말점(攻勢終末點)에 봉착하여 그 자리에 눌러 앉아버렸고 1942년 러시아남부에서 벌어진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 공방전에서는 독일군 중에서도 정예로 인정 받던 제6군이 말 그대로 전멸함과 동시에 전세는 소련군 쪽으로 기울었다. 예상과 달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독일군의 병력충원은 점점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이는 무장친위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순수 독일인, 게르만계 외국인, 노르만계 백인, 앵글로색슨계 백인 등으로 점차 입대자격을 확대해 나가다가 결국 이마저 한계에 봉착하자 이슬람계, 황인종들까지 모병 대상 규모를 넓히게 된다. (제13 무장친위사단 ‘한트샤르’ 같은 경우는 소수의 장교를 제외한 전투병력 대부분이 무슬림이었을 정도) 상황이 이렇다보니 종전까지 총 38개에 달하는 무장친위사단이 운용되었으나 히틀러와 히믈러의 처음 취지대로 운영되었던 정예 무장친위대는 제1, 2, 3사단을 비롯한 소수에 불과 하였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단은 2선급 부대로 취급되어 병력충원, 장비보급에 있어서 오히려 일반 육군 보다 열악한 수준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무장친위대는 별다른 전공도 없이 독일 육군과 함께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서서히 소모되는 운명을 맞는다. 


친위대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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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메디 학살, 출처:위키피디아



   히틀러 최후의 도박으로 일컬어 지는 이른바 ‘발지전투’가 한창이던 1945년 1월, 벨기에의 말메디 인근에서 비무장으로 사살당한 100여명의 미군 시신이 발견되자 전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끔찍한 학살의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미군 병사의 증언으로 인해 이 학살극의 주범은 무장친위대 제1기갑사단 소속의 요아힘 파이퍼전투단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말메디 학살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존재와 더불어 전후 친위대가 전쟁범죄집단으로 규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 이후 연합국 병사들이 친위대 소속 병사를 생포했을 경우 독일 국방군 소속 병사들과는 달리 구타, 처형하는 일이 암암리에 벌어지곤 했다. ) 이외에도 바비야르 학살, 디스토모 학살 등 무장친위대에 의해 우발적, 조직적으로 자행된 민간인, 포로들에 대한 학살 행위는 밝혀진 것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특히 서부전선과는 달리 게르만족의 생활권 ‘레벤스라움(Lebensraum)’ 을 건설하기 위해 시작된 독-소 전쟁은 성격자체가 민족절멸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독일군이 점령한 동유럽 및 소련 전역에서 조직적인 학살행위가 벌어졌는데 당시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으로 명명된 일단의 특임대들이 동부전선에 배치된 2선급 무장친위대들과 더불어 민간인 학살 및 빨치산 토벌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무장친위대의 악명을 드높였다. 무장친위대가 전쟁범죄 집단으로 규정된 것은 단순히 비무장 민간인 이나 포로 학살행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악행과는 별도로 친위대는 당시 나치독일법상 어느 곳에도 설립과 관련해 명확한 법률적 근거가 없는 조직이었고, 따라서 이들은 무장한 민간인과 같은 신분 즉, 전범으로 구분되어 독일 국방군과는 달리 전후 처리과정에서도 철저히 구제가 배제된다. 심지어는 살아있는 기갑전의 전설이라고 불렸던 미하일 비트만(전차 138대, 대전차포 132문 격파) 같은 경우 소속부대가 무장친위대라는 이유만으로 현재 독일 연방군에서 공식적으로 전과자체가 인정 되고 있지 않을 정도이다. 

   나치 친위대는 이렇게 그 존재 자체를 부정당할 정도로 전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치독일의 악행을 대표하는 대명사로 취급되고 있다.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주요국가들에서는 그 악랄함에 나치의 꺽쇠십자가 즉, 하켄크로이츠(Hakenkreuz)와 더불어 나치 친위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 조차 꺼려하고 있다. 심지어는 SS 라고 씌어진 깃발이나 완장 등을 착용하는 것 만으로도 곧 바로 현행범으로 입건할 정도로 나치 친위대에 대한 혐오감이 심하다. 비록 우수한 전투력은 지니고 있었지만 그릇된 신념과 광기로 얼룩졌던 나치 친위대는 인류역사상 영원한 흑역사로 기억될 것이다. 

[장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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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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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권사 기획팀에 근무중인 밀리터리 매니아. 알아두면 뼈가되고 살이되는 스토리 중심의 밀리터리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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